나바라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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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정복은 15세기 중반 나바라 왕국이 왕위 계승 문제와 귀족 파벌 간의 갈등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하여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한다. 카스티야 왕국은 나바라의 내분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교황의 지원을 받아 1512년 군사적으로 나바라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이후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와의 연합 등을 통해 여러 차례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1529년 캉브레 조약을 통해 나바라가 분할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저지 나바라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갔으나,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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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정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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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정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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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나바라 정복 |
부분 전쟁 | 신성 동맹 전쟁 |
시기 | 1512년-1529년 |
장소 | 나바라 왕국 |
결과 |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의 승리 |
영토 변화 | 나바라의 피레네 산맥 이남 지역이 카스티야에 합병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카스티야 연합왕국 아라곤 연합왕국 |
교전국 2 | 나바라 왕국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페르난도 2세 알바 공작 카를 5세 나헤라 공작 |
교전국 2 지휘관 | 호아네스 3세 앙리 2세 페드로 (나바라 원수) 앙드레 드 푸아 체사레 보르자 |
2. 배경
카스티야 왕국의 1512년 침공 이후, 나바라 왕국을 되찾기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스페인에게 격퇴되었다. 1516년에는 소극적인 탈환 시도가, 1521년에는 적극적인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의 시도가 있었다. 1528년 피레네 산맥 북쪽 지역에서 스페인 군대가 저지 나바라를 포기하면서 교전이 멈췄다. 1529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맺은 캉브레 조약으로 피레네 산맥을 따라 나바라를 분할하기로 결정되었고, 저지 나바라에 존속한 독립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알브레 가문이 베아른 공작 영지와 합쳐 통치했다. 나바라 왕국은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명목상으로는 1790년).
2. 1. 내부 분열과 외부 개입
15세기 중반, 나바라 왕국은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에 빠졌고, 나바라 귀족들은 분파 전쟁에서 보몽당과 아그라몽당이라는 두 개의 적대적인 파벌로 분열되었다. 이는 나바라 내부와 외부의 바스크 지방에 영향을 미쳤고, 외부 세력의 간섭을 받기 쉽게 만들었다.[2] 1461년, 카스티야 왕국 군대가 나바라를 침공하여 손시에라를 비롯한 여러 요새를 빼앗기는 영토 손실을 초래했다. 1474년부터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인접 왕국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동맹과 군사적 노력을 결합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1476년 나바라를 카스티야의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드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나바라에 대한 야망은 피레네 산맥 남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나르본의 자작 존 드 푸아 역시 나바라와는 다른 살리카법에 근거하여 왕위를 노렸다.[2]
프랑스의 마들렌과 비아나 공자가 이끄는 왕실은 1483년부터 어려운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의 유력자들 중에서 동맹을 찾았고, 레린 백작 루이 드 보몽을 찾았는데, 그는 로스 아르코스와 라과르디아에 대한 지배를 요구했다. 그는 또한 총독 피에르 드 푸아를 매수하여 어린 여왕 캐서린을 아스투리아스 공자 존과 결혼시키려 했다. 마들렌은 이 조치를 알고 피에르를 해임했다. 1484년 2월, 알랭 1세 다브레와의 합의로 젊은 가스코뉴 귀족 나바라의 존 3세가 나바라 왕위에 오르면서 아라곤 왕의 계획은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 그러나 나바라의 많은 사람들은 이 결혼에 반대했다.[2]
1488년, 알랭 다브레는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하려 했고, 프랑스의 샤를 8세에 대항하여 카스티야-아라곤, 잉글랜드,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지원했다. 그해 3월, 알랭은 페르난도와 발렌시아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에 대한 나바라 방어를 위한 군사적 협정을 포함하고 베아른의 주권을 인정했다. 1494년 팜플로나에서 캐서린과 존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마들렌과 페르난도 간의 합의에 따른 것으로, 나바라 군주들의 장녀인 안이 아스투리아스 공자 존 또는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와 결혼한다는 내용이었다.[3] 그러나 레린 백작은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반란을 일으켰다. 왕실은 그와 다른 반란 백작들을 완전히 꺾기로 결심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왕국의 모든 요새에 대한 통제를 확보해야 했다.[2]
베아른은 1,000명의 궁병 부대를 제공했지만, 페르난도는 피레네 공국의 군사적 지원에 대해 경고했다. 나바라 군주들은 여러 요새를 소유하고 카스티야의 통제를 받는 반란 백작을 진압할 수 없었다. 그러나 1495년 초까지 왕실은 그를 왕국에서 추방하고, 여러 요새에 대한 통제를 얻고, 나바라 의회의 완전한 지지를 얻었으며, 많은 보몽 지지자들의 충성을 얻었다.[4] 한편, 안토니오 팔라비치니 젠틸리를 팜플로나 주교로 임명한 것은 나바라 군주의 승인을 받지 못해 로마와 또 다른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1498년 4월, 프랑스 왕위에 루이 12세가 즉위하면서 상호 적대심이 점화되었다. 알랭 다브레는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하려는 루이 12세의 야망을 지지하고 샬롯 다브레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체사레 보르지아의 신부로 제안하여 관계를 완화하려 했다. 나바라, 프랑스, 카스티야-아라곤 간의 뒤이은 평화 조약은 왕국에 4년간의 안정기를 가져왔다.[5]
2. 2. 페르난도 2세의 야망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동맹과 군사적 노력을 결합하여 인접 왕국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고자 했다. 1476년에는 나바라를 카스티야의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기도 했다.[2] 그러나 나바라에 대한 야망은 피레네 산맥 남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나르본의 자작 존 드 푸아 역시 살리카법을 근거로 나바라 왕위를 노렸다.[2]1504년 이사벨 여왕이 사망한 후,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 왕위 요구자의 딸인 나르본 자작 장 드 푸아의 딸, 프랑스 공주 푸아의 제르맹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태어난 자녀는 나바라 왕위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6]
페르난도 2세와 루이 12세는 페르난도 2세가 푸아 백작 영주인 제르맹 드 푸아와 결혼한 이후 관계가 개선되었다. 프랑스 국왕은 알브레 가문에게 베아른, 빅고르, 푸아 백국 등 나바라 밖의 영지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알브레 가문은 강력하게 거부했다.[9]
1510년 여름, 국제 정세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당대 가장 야심 찬 교황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508년 베네치아에 대항하는 신성 동맹을 선포하고 격파했다. 이후, 이전 동맹국이었던 교황령과 초기 근대 프랑스는 전쟁을 벌였다. 율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세력 다툼에서 페르난도 2세 편을 들면서 1511년 8월 4일 프랑스에 대항하는 새로운 신성 동맹을 선포했다. 나바라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다. 페르난도 2세는 1512년 3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한 달 뒤, 가스통 드 푸아가 사망하면서 페르난도 2세의 아내 푸아의 제르맹이 알브레 가문의 피레네 영토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9]
2. 3. 종교적 갈등
1512년 카스티야의 침입 이후, 나바라 왕국을 되찾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스페인에 의해 격퇴되었다. 1528년, 스페인 군대가 피레네 산맥 북쪽의 저지 나바라를 포기하면서 교전이 멈췄고, 1529년 캉브레 조약을 통해 나바라 분할이 결정되었다. 알브레 가문이 통치하던 독립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되었다.페르디난트는 첩자를 통해 나바라와 프랑스 간의 협상 상황을 보고받았고, 침공 직전인 1512년 7월 17일에는 블로와 조약의 위조 초안을 유포하기도 했다.[11] 7월 21일에는 교황 칙서 ''파스토르 일레 첼레스티스''가 발표되어 페르디난트가 "이단" 나바라 왕국을 공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11]
페르디난트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서한을 보내 나바라를 파문하고 자신에게 할당해 달라고 요청했다.[11] 그러나 ''파스토르 일레 첼레스티스'' 교서에는 나바라 왕국이 명시되지 않았고, 1513년 2월 18일에 ''엑시지트 콩투마티움'' 교황 칙서가 발표되어 카탈리나와 후안 3세가 파문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11] 1513년 3월 13일부터 24일까지 팜플로나에서 열린 나바라 의회는 페르디난도 2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나바라는 1521년부터 개신교 사상이 침투하기 시작했고, 종교 재판이 일어나기도 했다.[24] 1525년에는 마녀 재판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화형당했다.
1532년 앙리 2세의 누이인 알브레의 아나 공주가 사망했다. 카를 5세는 나바라 문제 해결을 위해 1539년 자신의 아들 스페인 펠리페 2세와 나바라의 왕위 계승자인 잔 달브레의 결혼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카를 5세는 유언으로 펠리페 2세에게 나바라를 돌려주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11]
3. 카스티야의 침공 (1512년)
1512년, 카스티야의 침공 이전 나바라는 왕위 계승 문제와 귀족들의 분열로 혼란스러웠다. 보몽당과 아그라몽당의 대립은 외부 세력의 개입을 쉽게 만들었고,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이를 틈타 나바라를 사실상 카스티야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2] 프랑스의 마들렌은 어려운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으나, 페르난도 2세는 레린 백작 루이 드 보몽을 비롯한 나바라 유력자들과 동맹을 맺고 여왕 캐서린과 아스투리아스 공자 존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알랭 1세 다브레와의 합의로 나바라의 존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페르난도 2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2]
1494년, 캐서린과 존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지만, 레린 백작은 반란을 일으켰다. 왕실은 반란을 진압하고 여러 요새를 장악했지만, 안토니오 팔라비치니 젠틸리를 팜플로나 주교로 임명한 문제로 로마와 갈등을 겪었다. 1498년, 루이 12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고, 나바라, 프랑스, 카스티야-아라곤 간의 평화 조약으로 잠시 안정을 찾았다.[5]
1510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프랑스에 대항하는 신성 동맹을 선포하면서 국제 정세가 급변했다. 나바라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페르난도 2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가스통 드 푸아의 사망으로 그의 아내 푸아의 제르맹이 알브레 가문의 영토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루이 12세는 나바라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페르난도 2세는 위협과 제안을 섞어가며 군대를 이동시켰다.[9] 1512년 2월, 페르난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실 영토 기옌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준비했다. 나바라는 방어 준비를 했고, 페르난도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원을 받아 나바라 왕관을 분열주의자로 낙인찍는 선전 계획을 세웠다.[9]
페르난도는 첩자를 통해 나바라와 루이 12세 간의 협상 상황을 보고받았다. 침공 전날인 1512년 7월 17일, 페르난도는 블루아 조약의 위조 초안을 유포하여 양측을 비방하려 했다.[11] 7월 21일, 교황 칙서 ''파스토르 일레 첼레스티스''가 발표되어 페르난도가 교회의 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승인했는데, 이는 프랑스와 나바라에 적용될 수 있었다.[11] 1512년 6월, 페르난도는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나바라를 파문하고 자신에게 할당해 달라고 촉구했다.[11]
나바라는 ''파스토르 일레 첼레스티스'' 교서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1513년 2월 18일, ''엑시지트 콩투마티움'' 교황 칙서가 발표되어 카탈리나와 후안 3세는 파문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11] 1513년 3월, 팜플로나에서 열린 나바라 의회는 페르난도 2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는 그의 저서 ''나바라 전쟁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3. 1. 침공 과정
1512년 6월, 신성 동맹이 나바라를 통과하여 프랑스로 잉글랜드와 카스티야 군대를 파병하라는 공식 청원을 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동시에 프랑스로 파견된 나바라 외교 사절단은 루이 12세와 한 달 동안 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페르난도 2세는 합의가 이루어지면 국경을 넘겠다고 위협했다. 이 회담은 1512년 7월 18일 블루아 조약으로 이어졌으며, 나바라의 중립을 유지하기 위한 상호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바스크 영토인 온다리비아 (기푸스코아)에 상륙한 후 프랑스에 대한 잉글랜드의 위협에 주목했다. 이 지역은 카스티야의 종주국이었다.[9] 다음 날 페르난도 2세는 그라나다 정복에 참여했던 알바 공작 돈 파드리케 데 톨레도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를 알라바에서 나바라로 넘겨 보냈다. 그 무렵 기푸스코아 민병대가 북서쪽에서 나바라로 쳐들어와 7월 10일 고이수에타를 점령했다.[16]며칠 만에 카스티야 군대는 저항 없이 팜플로나 외곽까지 진격했고, 페르난도 2세의 동맹인 보몽 백작 루이는 아라주리 요새 궁전에서 침략군을 맞이했다. 원정대의 공격 부대는 6,000명의 베테랑으로 구성되었지만, 후위 부대를 포함한 전체 행렬은 15,000명에 달했다. 팜플로나의 인구는 10,000명 미만이었다. 카트린과 후안 3세는 충성스러운 영주들 사이에서 군대를 모으기 위해 투델라로 떠났지만, 500명밖에 모집하지 못했다.[16] 스페인 원정대의 압도적인 규모에 압도당한 충성파들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룸비에르 (이룬베리)로 향했고, 이어서 로어 나바라로 향했다. 카트린, 후안 3세, 그리고 그들의 군대는 오르테즈, 베아른으로 퇴각했다.
팜플로나의 외벽은 허술했고, 알바 공작이 선포한 약탈의 위협이 도시에 드리워졌다. 왕실 가족이 룸비에르로 퇴각하자, 지역 당국은 7월 25일에 항복했다. 지체 없이 카스티야 군은 나바라 전역의 주요 요새로 사자를 보내 똑같이 따를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이 따랐지만, 아마이우르 (바스탄), 에스테야-리사라, 투델라, 생장피에드포르는 항복하지 않았다.[16] 팜플로나 당국은 페르난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그들은 자연스러운 군주인 장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다. 1512년 8월 말 페르난도 2세는 자신이 법적으로 나바라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투델라도 포위되었고, 페르난도 2세의 사생아이자 사라고사의 대주교인 아라곤의 알폰소가 이끄는 아라곤의 공격에 저항했는데, 그는 3,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을 지휘했다.[16] 지역 당국의 나바라 왕실에 대한 확고한 충성은 교황의 칙서와 저항의 절망감 때문에 사기를 떨어뜨렸고, 이는 방어자들이 왕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되어 있었다. 도시는 약탈, 추가 몰수, 헛된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1512년 9월 9일에 항복했다. 알폰소는 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지시에 따라 나바라의 법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했다.[16]
3. 2. 카스티야의 통치
1512년 8월 말, 사실상 모든 이베리아 나바라는 스페인 통치하에 있었다. 알바 공작은 3,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 400명의 포병으로 아에스코아, 살라자르, 론칼의 피레네 계곡을 점령했다. 그들은 북쪽으로 피레네 산길을 넘어 롱세보 예배당을 기습하여 마을에 불을 질렀다. 빌라알바 대령(또는 보몽 파벌의 우르수아 마르틴)이 이끄는 카스티야군은 9월 10일에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 도착했지만, 수비대가 요새를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6] 카스티야군은 하 나바라의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며 공포에 떨게 했다. 교회는 나바라 인구의 정복을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16]카스티야인들은 하 나바라(''울트라푸에르토스, 데사-포르츠'')의 모든 영주들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알바 공작은 이 지역의 모든 탑 가옥을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생장피에드포르(바스크어로 도니바네 가라지) 지역의 과수원은 잘려나갔고, 지역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다.[16] 페르디난트는 카트린과 앙리 2세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그들의 왕위 유지를 조건으로 그들의 상속자인 앙리를 카스티야 궁정에서 키우도록 보낼 것을 제안했다. 이 요구는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프랑스군은 바욘(Bayonne) (라부르, 기옌)에 주둔하며 잉글랜드나 카스티야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페르디난드는 여전히 알브레 가문의 영지와 프랑스 왕실 영지가 있는 기옌, 또는 적어도 나바라의 전략적 항구인 바욘을 침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 나바라의 카스티야군은 식량과 물자가 부족했고, 악천후로 인해 시간이 촉박했다. 생장피에드포르에서는 1,000명의 불만을 품은 베테랑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알바 공작은 그들을 덜 적대적인 부르기(Burgui)와 살라자르 지역으로 이동시켜 반란을 진압했다.[16]
1512년 12월, 충돌은 생장피에드포르와 그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1513년 3월 13일부터 23일까지 카스티야 정복에 가담한 보몽 당 대표들로 축소된 나바라 의회가 소집되어 페르디난드를 "자연스러운 군주이자 왕"으로 인정했다. 페르디난드는 나바라의 제도와 정체성을 유지하기로 동의했다. 동시에 초대 카스티야 부왕인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푸에로스''로 알려진 나바라 법을 존중하겠다는 맹세를 했다.[9]
초기에 이 왕국은 교황 칙서에 의거하여 "획득한 재산"으로서 페르디난드, 즉 아라곤 왕관에 부속되었다. 아라곤은 권위주의적인 카스티야와는 달리 유사한 연합 제도적 구성을 가진 피레네 왕국이었다. 카스티야의 압력으로 나바라는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의 딸인 후아나에게 상속되었고, 1515년에는 바스크 왕국이 카스티야에 병합되었다.[9] 1515년 6월 11일, 부르고스에서 ''코르테스''가 열렸으나, 나바라 대표는 참석하지 않았다. 페르디난드 2세의 공범이었던 레린 백작 루이 드 보몽도 카스티야에 대한 이 병합에 항의하다가 투옥되었다. 이 병합은 7월 7일 페르디난드에 의해 확정되었으며, 나바라의 법과 제도, 즉 ''팍툼 섭젝티오니스''를 존중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동시에 카스티야 왕립 평의회에 나바라에 관련된 문제를 통치하고 사법권을 행사할 권한을 부여했다.[10]
카스티야와 나바라는 서로 다른 제도와 법적 시스템, 그리고 상이한 사회적, 민족적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 군대가 모든 요새의 점령을 확인한 후, 스페인-카스티야 왕관의 중앙 집권적 추진으로 특징지어지는 점진적인 제도적 인수 기반이 마련되었다. 외교관이자 작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페르디난드 2세가 프랑스와 "나바라를 유지하고 대신 헬베티아와 인접해 있는 밀라노 공국을 포기하는 유일한 조건"으로 신속하고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9]
4. 나바라의 저항과 재정복 시도
카스티야의 침입 이후, 나바라는 이베리아 영토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특히 1516년에는 소극적인 탈환 시도가 있었고, 1521년에는 프랑스와 나바라 연합군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고 카를 5세가 즉위하면서 후안 3세는 나바라 탈환을 시도했다. 소베르테르 드 베아른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상구에사와 룸비에르에 도달, 카스티야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바라 원수 페드로는 시만카스 감옥에서 암살되었다.[16]
1521년, 코무네로스 반란과 형제단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프랑수아 1세와 나바라의 앙리 2세는 협력하여 나바라를 되찾고자 했다. 아스파로스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은 팜플로나를 점령하고 나바라 전역을 일시적으로 정복했다.[17] 그러나 로그로뇨 포위 중 카스티야 군대에 의해 에스키로스(노아인) 전투에서 대패했다.[9][17]
이후에도 나바라는 저항을 계속했다. 1521년 아마이우르-마야 (바스탄) 요새를 점령했지만,[16][17] 1522년 카스티야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9]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스페인에게 격퇴되었고, 1528년 스페인 군대가 저지 나바라를 포기하면서 교전이 멈췄다. 1529년 캉브레 조약으로 나바라는 분할되었고, 저지 나바라의 독립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와 친밀한 알브레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다.
4. 1. 1512년 반격
1512년 10월 중순, 얀 3세는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15,000명의 나바라, 가스코뉴인, 란츠크네히트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3개의 부대가 기푸스코아와 나바라의 핵심 지역으로 진격했다. 첫 번째 부대는 혼다리비아와 도노스티아를 포위하고 이 지역의 작은 마을들을 점령했다. 이는 팜플로나의 포위된 병력에 대한 카스티야의 구원 시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 무렵, 잉글랜드는 페르난도 2세의 신뢰성에 지쳐, 여러 마을을 약탈한 후 (에렌테리아) 전쟁 지역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16] 롱그빌 공작이 지휘하는 두 번째 부대는 8,000명의 가스코뉴인, 1,000명의 나바라인, 1,500명의 란츠크네히트, 그리고 해당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페이레호라드에서 출발하여 아인히세에서 카스티야 군과 교전하여 10월 19일에 그들을 격파했다.[16]세 번째 부대는 론칼(에론카리)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부르기를 점령했다. 알바 공작은 팜플로나와의 통신이 끊길 것을 우려하여 수도로 후퇴했고, 생장피에드포르에는 잘 무장된 수비대를 남겨두었다. 나바라 부대는 살라자르에서 팜플로나로 진격했다. 나바라 군대의 접근 소식을 들은 에스텔라-리사라와 그 옆의 몬하르딘 요새는 점령자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16] 1512년 10월 24일, 알바 공작은 팜플로나에 도착했고, 나바라의 왕당파 군대가 뒤따라 수도를 포위했다.
에스텔라-리사라에서 얀 라미레즈 데 바케다노와 하우메 벨라스 데 메드라노 이 에차우즈가 이끄는 나바라 군대는 곧 페드로 데 보몽의 군대에 맞섰고, 이들은 카스티야의 코마레스 후작과 나헤라 공작의 지원을 받았다. 나바라 지도자들은 메드라노 가문의 통제를 받는 몬하르딘 요새에서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결국 항복이 체결되었다.[16] 팜플로나에 대한 포위는 한 달 동안 지속되었지만, 겨울의 도래와 카스티야로부터의 증원군의 도착으로 작전의 성공적인 결론에 대한 전망이 무산되었다. 왕당파는 후퇴했고, 카스티야 군대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생장피에드포르와 하부 나바라로 돌아갔으며, 불만을 품은 보몽 측의 룩스 영주와 정기적인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1512년 12월 7일, 나바라 군대의 궤멸된 란츠크네히트 부대 중 12문의 포를 호위하던 부대가 벨라테 고개에서 기푸스코아 총독 후안 데 실바가 이끄는 순찰대와 마주쳤다. 기푸스코아 민병대는 란츠크네히트와 교전했고, 란츠크네히트는 흩어져 후퇴했으며, 추격당해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이 소규모 전투는 나중에 대규모 전투로 과장되었으며, 압수한 대포는 1513년에 기푸스코아의 공식 문장에 추가되었다.[16]
4. 2. 1516년 재정복 시도
1512년 카스티야의 침입 이후, 나바라를 되찾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는데, 특히 1516년에는 소극적인 탈환 시도가 있었다.

1516년, 페르디난트가 사망하고 이사벨라의 손자인 16세의 카를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에 올랐다. 후안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이베리아 나바라를 탈환하고자 했다. 그는 소베르테르 드 베아른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두 부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자신이 지휘하고 다른 하나는 나바라 원수 페드로가 지휘했다.[16] 이 소규모 군대는 상구에사와 룸비에르에 도달하여 카스티야인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후안 3세가 이끄는 첫 번째 부대는 생장피에드포르를 점령하고 있던 카스티야 수비대를 격파하는 데 실패했고, 두 번째 부대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페드로는 1516년 3월 12일 롱세보로 진격했지만,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나바라의 의도를 알고 롱세보에서 빌랄바 대령을 대기시키고 있었다.
페드로는 살라자르와 롱칼을 거쳐 롱세보를 우회하기로 결정했지만, 날씨와 (롱칼을 제외한) 지역 주민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600명 규모의 부대는 약화되었다.[16] 이 부대는 이사바 근처 롱칼 계곡에서 빌랄바 대령과 교전하여 패배했고,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혔다. 페드로는 몇 년 후 시만카스의 감옥에서 자살로 위장되어 암살되었다.
포로 중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인 발렌틴 데 하소를 비롯한 여러 영주들이 있었다. 포로들은 아티엔자로 끌려가 쇠사슬에 묶여 통신이 제한되었다. 극심한 보안 조치가 취해졌고, 나바라 사람들은 마을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나바라 사람을 숙소로 제공하거나 그들의 존재를 신고하지 않은 모든 거주자는 1,000 마라베디의 벌금과 2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살아남은 7명의 나바라 아그라몽 영주들은 결국 항복을 받아들인 후 풀려났지만, 그들은 모두 아스파로스 장군이 지휘하는 1521년 프랑스-나바라 원정에 합류했다.[16]
재정복 시도는 실패했고, 1516년 8월 14일,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에 누아용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카를 5세는 더 넓은 합의의 맥락에서 나바라 왕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재고하고 여왕 카트린의 사절의 말을 경청하는 데 동의했다.[13] 그러나 프랑코-스페인 간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고, 카트린은 1517년 초에 사망했으며, 조약에 명시된 나바라에 대한 조항은 결코 시행되지 않았다.[9]
스페인 추기경 시스네로스는 새롭게 선포된 국왕 카를로스 1세(Charles V)를 대신하여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그는 1517년에 미래의 저항을 막기 위해 모든 나바라 요새를 철거하라고 명령했다.[9] 나바라 군주를 지지했던 저명한 나바라 인물들은 아티엔사에 투옥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말에 따르면 이 탄압은 더 나아가 "나바라를 복종시키고 제약하여 그 왕국에서 누구도 감히 반란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기"위한 것이었다.[9]
1502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실 결정을 모방하여, 스페인 제국 당국은 1516년 5월 1일경 투델라와 그 주변에 거주하는 나바라 무슬림들에게 강제 개종 또는 추방을 명령했다. 그러나 1516년까지 그들 중 다수는 수십 년 동안 부과된 징수금으로 인해 이주했다. 무슬림들은 1520년까지 나바라에서 이주했으며, 그들 중 다수는 아라곤에 정착하여 1526년 추방될 때까지 임시 거처를 찾았다.[14]
[...] 돈 페드로 데 나바라(Don Pedro de Navarra)는 카를로스를 자신의 왕으로 맹세하지 않았는데, [...] 그는 스페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아버지 쪽으로 카스티야 왕가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게 맹세해서는 안 되었으며, 그는 이 믿음을 훌륭한 신사로서 지켜야 했으며, 돈 후안 데 라브리트(Don Juan de Labrit)와 도냐 카탈리나(Doña Catalina), 나바라의 소유주, 그리고 그의 조국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
– 나바라 원수 페드로는 감옥에서 카를 5세의 제국군 합류 제안을 거절했다(1520년경)[15] |
4. 3. 1521년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의 공격
1512년 카스티야의 나바라 침공 이후, 나바라를 되찾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는데, 특히 1521년에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에 의한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520년과 1521년, 카스티야 왕국은 코무네로스 반란으로, 아라곤 왕국은 형제단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16] 프랑수아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나바라의 앙리 2세와 협력하여 나바라를 되찾고자 했다.
앙리 2세는 가스코뉴인과 나바라 망명자들로 구성된 12,000명 규모의 군대를 모집하였다. 아스파로스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은 보병 12,000명, 기병 800명, 그리고 29문의 대포로 구성되었다.
안토니오 만리케 데 라라, 제2대 나헤라 공작이 이끄는 카스티야군은 코무네로스 반란 진압에 병력 대부분을 투입한 상태였다. 1521년 4월, "프랑스"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경고가 있었다.[17]
카스티야의 지배에 분노한 나바라인들은 앙리 2세의 원정 소식에 봉기하여 카스티야군을 몰아내기 위한 자원 부대를 조직했다.[16] 프랑스-나바라 군대가 팜플로나에 접근하자, 시민들은 봉기하여 카스티야 군사 총독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새로운 성에 포위하였다. 팜플로나 주둔군은 1521년 5월 말 팜플로나 전투에서 며칠간 저항하다 항복하였고, 3주도 지나지 않아 나바라 전역이 다시 정복되었다.[17]
그러나 앙리 2세의 부재는 주민들을 불안하게 했고, 아스파로스 장군의 군대는 비아나에서 약탈을 자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17] 이후 프랑스-나바라 군대는 카스티야로 진격하여 로그로뇨를 포위하였다.

4월 빌라라 전투에서 코무네로스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카스티야는 병력을 나바라로 다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전 반란군 도시들도 병력을 파견했다. 재통합된 카스티야의 지원을 받은 30,000명의 군대가 나바라로 접근했다.[9] 6월 11일, 아스파로스는 로그로뇨 포위를 풀고 베아른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앙리 2세는 이를 거절했다.[17]
1521년 6월 30일, 프랑스-나바라 군대는 에스키로스(노아인) 전투에서 대패했다. 프랑스군과 나바라군은 6,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고, 아스파로스 장군은 포로로 붙잡혔다.[17]
4. 4. 아마이우르(Amaiur) 요새 함락 (1522년)
노아인 전투 패배 이후, 나바라의 앙리 2세와 프랑수아 1세는 반격을 위해 다시 동맹을 맺었다. 1521년 프랑코-나바라군은 아마이우르-마야 (바스탄, 나바라) 요새를 포위했고, 10월 3일 카스티야군은 항복했다.[16][17]
1522년 7월, 카를 5세 군대에 합류한 산탄데르 상륙 란츠크네흐트 4,000명을 포함한 많은 바스크인과 아라곤인들이 있었다. 산 마르시알 전투 승리 후, 7,000명의 카스티야 원정대가 7월 4일 팜플로나에서 출발하여 7월 15일까지 아마이우르를 포위했다.
요새는 벨라스 데 메드라노 궁전 출신 하우메 벨라스 데 메드라노가 지휘하는 200명의 나바라 기사들이 방어했다.[18] 그는 아마이우르-마야의 알카이드이자 시장이었으며, 1512년 에스텔라-리자리차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18] 그러나 구원군은 도착하지 않았고, 결국 1522년 7월 19일 미란다 백작에게 함락되었다.[9]
아마이우르에서 살아남은 39명의 나바라 수비대는 팜플로나로 끌려가 성 니콜라스 요새에 갇혔다. 하우메 벨라스 데 메드라노 외에도 그의 아들 루이스 벨라스 데 메드라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맏형 하비에르의 영주 미겔 데 하소가 포함되었다. 팜플로나에 투옥된 하우메와 아들은 독살되었다는 기록과 석방되었다는 기록이 상반된다. 미겔은 여자 옷을 입고 탈출했다.
5. 결과 및 영향
카스티야의 침입(1512년) 이후, 나바라를 되찾기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스페인에 의해 격퇴되었다. 특히 1516년에는 소극적인 탈환 시도가, 1521년에는 프랑스-나바라 연합군의 적극적인 시도가 있었다. 1528년 피레네 북쪽 지역에서 스페인 군대가 저지 나바라를 포기하면서 교전이 멈췄다. 1529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맺은 캉브레 조약으로 피레네 산맥을 따라 나바라를 분할하기로 결정했고, 저지 나바라에서 살아남은 독립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와 친밀한 관계를 보인 알브레 가문이 그들의 베아른 공작 영지와 합쳐 통치했다. 나바라 왕국은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됐다(명목상으로는 1790년).
교황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페르디난드와 그의 후계자들은 폭정과 찬탈 혐의에 시달렸으며, 이러한 우려는 침공 이후 나바라의 지위에 흔적을 남겼다. 페르디난드는 군사적 점령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려 하면서, 침공을 단순한 왕조 교체로 제시하려 했다. 나바라가 페르디난드의 자유로운 처분을 위한 "획득한 재산"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복종 조약"이 적용되어 나바라 법률과 정체성을 존중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나바라는 그라나다와 같지 않았다. 그라나다는 로마 가톨릭 기준에 의해 정당한 정복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서고트 왕국의 "재정복"으로 여겨졌다.[9] 반면에 나바라는 오랜 기독교 왕국으로, 세속적 제도와 토착 사회 질서에 대한 국민들의 뿌리 깊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9] ''Prior in tempore, potior in iure''(시간상 먼저인 자가 법적으로 더 강하다)는 격언처럼 왕국은 왕관 자체보다 더 강력했다.
혼다리비아(푸엔테라비아) 전투는 1524년 4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1524년 2월 19일, 암살된 나바라 원수(Marshall)의 아들인 페드로 데 나바라가 지휘하는 나바라군은 그의 삼촌인 이니고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에게 항복했다. 4월 29일, 카를 5세는 최종적인 일반 사면령을 내렸고, 혼다리비아의 수비군은 거의 2년간의 포위 끝에 그 지역을 떠났다.
이제 국지적인 군사적 충돌은 바스크 지방의 로어 나바라(바스크어로는 Nafarroa Beherea) 남쪽 가장자리로 국한되었다. 1525년, 스페인의 공격으로 생장피에드포르(St-Jean-Pied-de-Port)가 다시 점령되었고, 스페인은 거의 2년 동안 그곳을 점령했지만, 1527년 룩스(Lukuze)의 영주와 미오센 영주인 에스테반 데 알브레가 그 지역을 탈환했다. 루자이드/발카를로스의 스페인 전초 기지를 제외하고, 그 지역은 카를 5세의 관심 부족과 방어의 어려움으로 인해 1528년에 버려졌다.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프랑스가 더 넓은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나바라의 분할을 확정했다. 앙리 2세는 감옥에서 탈출했지만, 1526년 1월 1일 마드리드 조약과 1529년 캉브레 조약은 나바라의 이베리아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를 확인했다.
5. 1. 나바라 분할
카스티야의 침입 이후, 나바라를 되찾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스페인에 의해 격퇴되었다. 1528년, 스페인 군대가 저지 나바라를 포기하면서 교전이 멈췄고, 1529년 캉브레 조약을 통해 피레네 산맥을 기준으로 나바라가 분할되었다. 독립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알브레 가문의 통치하에 베아른과 통합되었고,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되었다(명목상으로는 1790년).1512년 12월, 충돌은 생장피에드포르와 그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1513년 3월, 나바라 의회는 페르디난드를 왕으로 인정했고, 페르디난드는 나바라의 제도와 정체성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초대 카스티야 부왕인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푸에로스''를 존중하겠다고 맹세했다.[9]
초기에 나바라는 아라곤 왕국에 부속되었으나, 1515년 바스크 왕국이 카스티야에 병합되었다.[9] 부르고스에서 열린 ''코르테스''에는 나바라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고, 페르디난드 2세의 공범이었던 레린 백작 루이 드 보몽도 항의하다 투옥되었다. 병합은 7월 7일 페르디난드에 의해 확정되었고, 카스티야 왕립 평의회에 나바라 관련 통치 및 사법권이 부여되었다.[10]
카스티야와 나바라는 서로 다른 제도, 법, 사회적, 민족적 구성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 집권적 추진으로 인해 마찰과 긴장이 발생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페르디난드 2세가 나바라를 유지하기 위해 밀라노 공국을 포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9]
혼다리비아(푸엔테라비아) 전투는 1524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나바라군은 페드로 데 나바라의 지휘하에 항복했고, 카를 5세는 일반 사면령을 내렸다.[20] 나바라 지도자들은 재산 반환을 약속받았지만, 카를 5세에게 충성 맹세를 해야 했다. 이 항복으로 나바라의 저항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군사적 충돌은 로어 나바라 남쪽 가장자리로 국한되었다. 1525년, 생장피에드포르가 다시 점령되었으나, 1527년 룩스(Lukuze)의 영주와 미오센 영주인 에스테반 데 알브레가 탈환했다. 루자이드/발카를로스의 스페인 전초 기지를 제외하고, 1528년에 스페인은 이 지역을 포기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나바라 분할이 확정되었다. 앙리 2세는 탈출했지만, 1526년 마드리드 조약과 1529년 캉브레 조약으로 나바라의 이베리아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가 확인되었고, 프랑수아 1세는 앙리 2세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기로 약속했다.
5. 2. 카스티야의 지배 강화
1512년 카스티야의 침입 이후, 나바라 왕국을 되찾기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1528년, 스페인 군대는 피레네 북쪽의 저지 나바라를 포기했고, 1529년 캉브레 조약을 통해 나바라는 피레네 산맥을 기준으로 분할되었다. 알브레 가문이 통치하던 저지 나바라의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되었다.1513년, 카스티야에 충성하는 보몽파 중심의 나바라 의회가 소집되어 페르난도 2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의 제도와 정체성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초대 카스티야 부왕 코르도바 후작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나바라 법(푸에로스)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했다.[9]
초기에 나바라는 교황 칙서에 따라 아라곤 왕국에 속했으나, 카스티야의 압력으로 1515년 카스티야에 병합되었다.[9] 이 과정에서 페르난도 2세의 협력자였던 레린 백작 루이 드 보몽조차 투옥될 정도로 나바라의 저항이 있었다. 병합은 1515년 7월 7일 페르난도 2세에 의해 확정되었으며, 나바라의 법과 제도를 존중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카스티야 왕립 평의회에 나바라 관련 통치 및 사법권이 부여되었다.[10]
카스티야와 나바라는 서로 다른 제도, 법, 사회, 민족 구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카스티야의 중앙 집권적 정책은 잦은 마찰과 긴장을 유발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페르난도 2세가 나바라 유지를 위해 밀라노 공국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9]
페르난도 2세는 자신의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률 전문가들에게 보고서를 의뢰했다.[9] 이 보고서는 스페인의 나바라 정복의 도덕성에 대한 논쟁의 기준점이 되었지만, 역사가 알프레도 플로리스탄은 이들이 페르난도 2세와 알바 공작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의 하수인으로서 선전 임무를 수행했다고 지적했다.[9]
페르난도 2세는 1511년 로마 교회에서 통과된 '공정한 전쟁'(iure belli) 교리,[9] 자신의 권리(de iure propio),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통행권", 동맹국 잉글랜드를 돕기 위한 "국제 조약 준수" 등 다양한 명분을 내세웠다.[9] 또한 이니고 아리스타로부터 시작된 나바라 왕가가 서고트 왕국의 정당한 카스티야 계승자를 찬탈했다는 주장도 펼쳤다.[9]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1517년 나바라의 모든 요새를 철거하라고 명령하여 저항을 막으려 했다.[9] 나바라 군주를 지지했던 인물들은 투옥되거나 망명해야 했으며,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이러한 탄압이 "나바라를 복종시키고 제약하여 반란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9]
1516년, 스페인 제국 당국은 투델라와 그 주변의 무슬림들에게 강제 개종 또는 추방을 명령했다. 많은 무슬림들이 1520년까지 나바라를 떠나 아라곤에 정착했다가 1526년 추방되었다.[14]
나바라 원수 페드로는 감옥에서 카를 5세의 제국군 합류 제안을 거절하며, "스페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아버지 쪽으로 카스티야 왕가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를로스에게 맹세해서는 안 되었으며, 나바라의 소유주인 돈 후안 데 라브리트와 도냐 카탈리나에게 주어진 믿음을 지켜야 했다"고 말했다.[15]
1512년 침공 이후에도 나바라의 제도적 틀은 유지되었다. 나바라 의회는 카를 5세에게 대관식 참석을 촉구했으나, 카를 5세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의회는 1517년 카를 5세 없이 회동했고, 나바라의 두 번째 부왕 파드리카 데 아쿠냐는 불만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1515년에 해임되었다.[11]
카를 5세는 나바라를 합스부르크 스페인에 통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면령을 내렸지만, 16세기 내내 나바라인들의 충성심에 대한 불신은 계속되었다. 헨리 2세에게 충성한 신민들의 재산 반환 절차는 문제로 가득했고, 아그라몬트 당 지도자들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초까지의 법학, 회계, 임명, 의회 및 왕실 평의회 회의, 재산권 등에 관한 많은 책, 기록, 문서가 사라졌다.[11] 이 파일들은 스페인 군주국이나 새로 임명된 당국에 의해 압수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인구가 바스크어를 사용하고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카스티야 관료 앞에서 재산권을 다시 등록해야 했고, 실패하면 소유권이 무효화되었다.[11]
나바라는 적어도 1530년까지 군사 점령 상태였다.[9] 왕국의 모든 정부 직책은 카스티야 출신에게 넘어갔고, 팜플로나,[21] 및 기타 나바라 마을에는 카스티야 군대가 주둔했다. 나바라 성직자들은 수도원장 이상의 직책으로 승진하는 것이 금지되었다.[11]
스페인 정복 이후, 팜플로나 대성당 참사회 등은 나바라 출신 주교를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1539년에는 바스크어를 할 수 있는 토착 성직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있었으나 거부되었고, 카스티야 출신 주교가 임명되었다.[22] 교회 역사가 고니 가스탄비데는 이를 "나바라 교회의 카스티야 동화"라고 비판하며 식민 통치에 종속되었다고 평가했다.[23]
5. 3. 나바라의 저항과 정체성 유지
카스티야의 침입 이후, 나바라를 되찾기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1528년, 스페인 군대는 저지 나바라를 포기했고, 1529년 캉브레 조약을 통해 피레네 산맥을 기준으로 나바라가 분할되었다. 저지 나바라에 존속한 독립 나바라 왕국은 알브레 가문의 통치하에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되었다.1513년, 카스티야에 협력한 일부 세력으로 축소된 나바라 의회는 페르난도 2세를 왕으로 인정했고, 페르난도는 나바라의 제도와 정체성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초대 카스티야 부왕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푸에로스''로 알려진 나바라 법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했다.[9]
초기에 나바라는 교황 칙서에 따라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에 속했으나, 카스티야의 압력으로 1515년 카스티야에 병합되었다.[9] 이 과정에서 나바라 대표는 배제되었고, 심지어 페르난도 2세의 협력자였던 레린 백작도 항의하다 투옥되었다. 병합 이후에도 나바라의 법과 제도는 존중되었지만, 카스티야 왕립 평의회가 나바라 관련 사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10]
카스티야와 나바라는 제도, 법, 사회, 민족 구성이 달랐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페르난도 2세가 나바라 유지를 위해 다른 지역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9] 페르난도 2세와 그 후계자들은 폭정과 찬탈 혐의를 받았으며, 침공을 왕조 교체로 포장하려 했다. 나바라는 "복종 조약"에 따라 법률과 정체성을 존중받았지만, 그라나다와 달리 오랜 기독교 왕국으로서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9]
합스부르크 스페인 통합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사면령이 내려졌지만, 프로테스탄트와 피레네 산맥 북쪽의 독립 나바라의 존재로 인해 나바라인들의 충성심에 대한 불신은 계속되었다. 헨리 2세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재산이 반환되기도 했지만, 사법적 박해와 아그라몬트 당 지도자들에 대한 처벌도 있었다.
1512년 침공 이전의 기록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카스티야 관료 앞에서 재산권을 다시 등록해야 했다. 등록 실패 시 소유권은 몰수되었다.[11] 나바라는 1530년까지 군사 점령 상태였고,[9] 모든 정부 직책은 카스티야 출신이 차지했다. 팜플로나 등 주요 도시에는 카스티야 군대가 주둔했고,[21] 나바라 성직자들은 고위직 승진이 금지되었다.[11]
나바라 출신 주교 임명을 요청했지만 거부되었고, 카스티야 출신 주교가 임명되었다. 고니 가스탄비데는 이를 "나바라 교회의 카스티야 동화"라고 비판했다.[23] 나바라는 기푸스코아와 함께 종교 재판의 대상이 되었고, 개신교 관련 서적 소지 및 설교가 금지되었다.[24]
1525년, 마녀 혐의가 제기되어 많은 이들이 화형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1532년, 앙리 2세의 누이 아나 공주가 사망하며 팜플로나에 묻히길 원했지만,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를 5세는 나바라 문제 해결을 위해 스페인 펠리페 2세와 잔 달브레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유언으로 펠리페 2세에게 나바라 반환을 지시했지만,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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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Convenio navarro o Ley Paccionada de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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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onquista de Navarra: Fernando el Católico o las endebles justificaciones de un rey que anhelaba un reino aj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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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real, G./Jimeno, R. The assignment made by ''Aelii Antonii Nebrisensis ex gramatico et rhetore historici regii de bello navariensis, liber prior incipitur'' was included in his ''Decadas'' Latin-language chronicle, a tribute to [[Isabella of Castile]] and Ferdinand II of A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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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 of France and the emperor are referred in the treaty as "The Catholic", i.e. Charles V, and "The Most Christian", namely Francis I; see Monreal, G./Jimeno, R.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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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his influential ''Gramatica castellana'' (1492), Nebrija advocates for the need of the defeated to learn the language of the victors. He goes on to point that "it holds true that not only do the enemies of our faith need to know the Castilian language, but the [[Biscayne (ethnonym)|Biscayne]]s, the Navarrese, the French, the Italians, and any others who hold a business and a conversation in Spain, as well as a necessity for our language, may be able to know it better, had not they acquired it by use since childhood, by means of this work of mine. See Monreal, G; Jimeno, R. p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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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eno Jurío, 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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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eno Jurío, 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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