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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예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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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예는 수나라 말기에 활약한 군인이자 당나라 초기의 장군으로, 본래 수나라의 감문장군의 아들이었다. 수나라 말기 반란을 틈타 유주 지역을 장악하고 당나라에 귀순하여 연군왕에 봉해졌으나, 당 태종 이세민과의 갈등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실패하여 처형되었으며, 그의 가문은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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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예 (당나라)
인물 정보
이름뤄이
한자 표기羅藝
간체자 표기罗艺
병음Luō Yì
자 (字)자얀 (子) 또는 자팅 (子挺)
기타 정보
관련 인물뤄이 (축구 선수) (동명이인)

2. 초기 생애 및 수나라에서의 활동

나예는 수나라 감문장군(監門將軍) 나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조군(京兆郡) 운양현을 근거지로 삼았다. 성격이 대담하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며, 용감하게 싸우고 활을 잘 쏘았고, 창을 사용하는 데 능했다. 대업 연간에 호분랑장(虎賁郎將)에 임명되었다. 고구려 원정에서 무위대장군 이경의 휘하에서 북평에서 일부 부대를 이끌었지만, 이경을 업신여기고 자주 모욕했다.

616년 무렵, 탁군(涿郡, 대략 현대의 베이징시)은 수 양제고구려 원정을 위해 많은 군수 물자를 비축하고 병력을 배치했으며, 인근 린숴궁(臨朔宮)에 많은 황실 보물을 보관했기 때문에 농민 반란군의 약탈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도시 방어를 책임진 군 장교 자오스주(趙什住), 헬란이(賀蘭誼), 진원옌(晉文衍)은 모두 약탈을 막지 못했지만, 나예는 종종 농민 반란군과 싸워 승리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총사령관이었던 자오는 나예를 크게 의심했다. 나예는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병사들에게 "우리는 도적을 공격하여 종종 승리했다. 그러나 도시 안에 음식 물자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사령관(즉, 자오)은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눠줄 의지가 없다. 어떻게 장교와 병사들이 이것에 격려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선동했다. 반란군 공격에서 돌아온 후 군 서기관을 체포했고, 자오는 두려워 그에게 항복했다.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이력

나예(羅藝)의 가문은 본래 샹양(襄陽, 현대의 샹판시, 후베이성) 출신이었으나,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이주했다. 나예의 아버지 나영(羅榮)은 수나라 때 소규모 장군이었다. 나예는 지혜롭고 자신감이 넘치며 전투에 능했지만 인정이 없다고 전해진다. 나예는 수 양제 통치 후반기에 전장에서의 공헌으로 인해 장군 이경의 지휘 아래 베이핑(北平, 현대의 친황다오시, 허베이성)에서 핵심적인 군 지휘관이 되었다. 나예는 군인들을 엄격하게 통솔했지만, 자신은 이경에게도 거만하게 굴었다고 한다. 이경은 그를 자주 꾸짖었고, 나예는 이경을 원망했다.

수나라 말에 반란이 다발하자, 탁군은 물자가 풍부하고 고구려 원정의 남은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반란군의 표적이 되어 자주 침공을 받았다. 유수의 장수 조십주(趙什住), 하란의(賀蘭宜), 진문연(晉文衍) 등은 지탱할 수 없었지만, 오직 나예 한 사람만이 반란군을 자주 격퇴하여 무용이 군중에 으뜸이었고,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했다.

2. 2. 이경과의 갈등

나예는 수나라 말기의 장군 이경 휘하에서 북평을 지키는 핵심적인 군 지휘관이었다. 나예는 군사들을 엄격하게 통솔했지만, 이경에게는 거만하게 굴었다고 한다. 이경은 나예를 자주 꾸짖었고, 나예는 이경을 원망했다.

2. 3. 유주에서의 세력 확장

뤄이는 스스로 유주 지휘관 직함을 자칭했는데, 이는 수나라 문제 시대에 자주 사용되었지만 양제에 의해 폐지된 직함이었다. 뤄이는 저장된 재산과 음식을 병사와 백성에게 나눠주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는 몇몇 관리를 처형했다. 요동류청선양의 후아이위안 등 여러 수나라 도시가 그에게 항복했다.

나예는 관고를 열어 부중에게 보상을 주고, 관창을 열어 곡식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공급했다.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은 발해군 태수 당의(唐禕) 등을 죽이고 위세는 북변에 떨쳤으며, 유성, 회원진의 땅까지 귀순시켰다. 유성군 태수 양림보(楊林甫)를 좌천시키고, 유성군을 고쳐 영주로 삼았으며, 양평군 태수 등고(鄧暠)를 영주 총관으로 삼았고, 나예 자신은 유주 총관을 칭했다.

3. 수나라 말의 반란과 유주 장악

618년 봄, 수 양제우문화급이 주도한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우문화급은 뤄이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뤄이는 "나는 아직 수나라의 신하다."라고 답하며 사신들을 처형하고 양제를 위해 3일간 애도했다. 이는 유교 전통인 3년이나 한 문제에 의해 수정된 36일의 기간보다 짧은 기간이었다. 그 후 반란 지도자 두건덕과 고개도 모두 그에게 항복을 요청했지만, 뤄이는 두 사람을 도적으로 여기고 거절했다. 대신 그는 수나라 장군 이연장안에서 황위에 올라 당나라를 건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 장군 장도원을 통해 그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619년경, 당 고조는 뤄이를 유주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후 두건덕의 공격을 격퇴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주요 봉기와 반란을 보여주는 지도. 뤄이는 현재 베이징과 가까운 유주 지역을 통제한다.


우문화급이 산동까지 북상하자 사자를 파견하여 나예를 초유했지만, 나예는 "나는 수나라 조정의 옛 신하이며, 지금 태행산이 뒤집혔다 해도 의를 저버리고 적에게 욕되게 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사자를 참하고, 양제를 위해 상을 발표하고 사흘 동안 복상했다. 두건덕, 고개도 등도 또한 나예에게 사자를 보냈다. 나예는 "두건덕 등은 모두 흉악한 적이고, 우문화급은 시역의 무리로서, 어느 쪽도 따를 수 없다. 지금 당공(이연)이 기병하여, 인망을 모으고 관우에 근거하고 있으니, 반드시 왕업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귀순하기로 결정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죽이겠다."라고 속관들에게 말했다. 이때 장도원(張道源)이 이연의 명령을 받아 산동을 순찰하며 나예를 초유했으므로, 무덕 2년 (619년)에 나예는 표를 받들어 당나라에 귀순했다. 연왕에 봉해지고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 후 여러 번 두건덕과 싸워 그를 격파했다.

3. 1. 반란의 시작

뤄이는 지혜롭고 자신감이 넘치며 전투에 능했지만 인정이 없다고 전해진다. 뤄이는 수 양제 통치 후반기에 전장에서 공을 세워 장군 이경의 지휘 아래 베이핑(北平, 현대의 친황다오시, 허베이성)에서 핵심적인 군 지휘관이 되었다. 뤄이는 군인들을 엄격하게 통솔했지만, 자신은 이경에게도 거만하게 굴었다고 한다. 이경은 그를 자주 꾸짖었고, 뤄이는 이경을 원망했다.

616년 무렵, 인근 줘군(涿郡, 대략 현대의 베이징시)은 수 양제고구려 원정을 위해 줘군에 많은 군수 물자를 비축하고 많은 병력을 배치했으며, 인근 린숴궁(臨朔宮)에 많은 황실 보물을 보관했기 때문에 농민 반란군의 약탈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도시 방어를 책임진 군 장교 자오스주(趙什住), 헬란이(賀蘭誼), 진원옌(晉文衍)은 모두 약탈을 막지 못했지만, 뤄이는 종종 농민 반란군과 싸워 승리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총사령관이었던 자오는 뤄이를 크게 의심했다. 뤄이는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병사들에게 이렇게 선동했다.

:"우리는 도적을 공격하여 종종 승리했다. 그러나 도시 안에 음식 물자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사령관(즉, 자오)은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눠줄 의지가 없다. 어떻게 장교와 병사들이 이것에 격려를 받을 수 있겠는가?"

뤄이는 반란군 공격에서 돌아온 후 군 서기관을 체포했고, 자오는 두려워 그에게 항복했다. 뤄이는 저장된 재산과 음식을 병사와 백성에게 나눠주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는 몇몇 관리를 처형했다. 랴오닝성 자오양시의 류청(柳城)과 선양시의 후아이위안(懷遠) 등 여러 수나라 도시가 그에게 항복했다. 그는 스스로 유주(幽州, 즉 줘군)의 지휘관 직함을 자칭했는데, 이는 수 문제 시대에 자주 사용되었지만 수 양제에 의해 폐지된 직함이었다.

3. 2. 유주 총관 자칭

616년 무렵, 수 양제고구려 원정을 위해 쭤군(涿郡, 대략 현대의 베이징시)에 많은 군수 물자를 비축하고 병력을 배치하면서, 줘군은 농민 반란군의 약탈 공격에 시달렸다. 羅藝|뤄이중국어(나예)는 종종 농민 반란군과 싸워 승리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총사령관 자오스주(趙什住)는 뤄이를 의심했다. 뤄이는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병사들을 선동했다.

뤄이는 "우리는 도적을 공격하여 종종 승리했다. 그러나 도시 안에 음식 물자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사령관(즉, 자오)은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눠줄 의지가 없다. 어떻게 장교와 병사들이 이것에 격려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반란군 공격에서 돌아온 후 군 서기관을 체포했고, 자오는 두려워 그에게 항복했다.

뤄이는 저장된 재산과 음식을 병사와 백성에게 나눠주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는 몇몇 관리를 처형했다. 랴오닝성 자오양시의 류청(柳城)과 선양시의 후아이위안(懷遠) 등 여러 수나라 도시가 그에게 항복했다. 그는 스스로 유주(幽州, 즉 줘군)의 지휘관 직함을 자칭했는데, 이는 수 문제 시대에 자주 사용되었지만 수 양제에 의해 폐지된 직함이었다.

나예는 관고를 열어 부중에게 보상을 주고, 관창을 열어 곡식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공급했다.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은 발해군 태수 당의(唐禕) 등을 죽이고 위세는 북변에 떨쳤으며, 유성, 회원진의 땅까지 귀순시켰다. 유성군 태수 양림보(楊林甫)를 좌천시키고, 유성군을 고쳐 영주로 삼았으며, 양평군 태수 등고(鄧暠)를 영주 총관으로 삼았고, 나예 자신은 유주 총관을 칭했다.

4. 당나라 귀순과 활동

618년 봄, 양제우문화급이 주도한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우문화급은 뤄이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뤄이는 "나는 아직 수나라의 신하다."라며 거절하고 양제를 위해 3일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두건덕과 고개도도 항복을 요청했으나, 뤄이는 이들을 도적으로 여겨 거절했다. 대신 이연장안에서 황위에 올라 당나라를 건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 장군 장도원을 통해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619년경, 당 고조는 뤄이를 유주의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이후 두건덕의 공격을 격퇴했다.

619년 겨울, 당 고조는 뤄이를 연군왕으로 봉하고 황실 성인 이씨를 하사하여, 이후 그는 이의(李義)로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두건덕의 공격을 다시 한번 격퇴했고, 620년 여름에는 고개도의 지원을 받아 또다시 두건덕의 공격을 격퇴했다. 고개도는 이후 뤄이를 통해 당나라에 항복했다.

621년, 당 고조의 아들 이세민 진왕(훗날의 태종)은 두건덕을 생포했고, 당 고조는 두건덕을 처형했다. 잠시 동안 두건덕의 영토는 당나라에 항복했지만, 이후 유흑타를 중심으로 두건덕의 장군들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 고조는 유흑타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장군을 파견하고, 이의에게 북쪽에서 유흑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유흑타는 이의를 포함하여 파견된 모든 당나라 장군을 격파하고 두건덕의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한편, 유주는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개도는 유주에 식량을 공급하기로 동의했고, 이의는 기근을 피하기 위해 병사 중 약한 자들을 위주로 위주로 보냈다. 고개도는 그들을 잘 대했고, 이의는 기뻐하며 수레 수백 대와 말과 당나귀 1,000마리 이상을 동반한 3,000명의 병사를 위주에 보내 식량을 수송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개도는 이의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을 모두 붙잡아 이의와 당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는 북쪽의 동돌궐과 남쪽의 유흑타와 동맹을 맺었다.

622년, 이세민이 유흑타를 공격하면서 이의는 군대를 이끌고 이세민과 합류하여 유흑타의 수도인 명주(洺州, 현대의 한단, 허베이)를 공격했다. 군대가 수개월 동안 교착 상태에 빠진 후, 이세민은 인근 명강의 물을 이용하여 유흑타의 군대를 수장시켜 유흑타를 동돌궐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이의는 유주로 복귀했다. 그해 말, 유흑타가 동돌궐의 지원을 받아 돌아왔고, 이의는 그를 격퇴할 수 없었다. 유흑타는 이후 이세민의 형제 이건성 태자에게 패배하여 623년 초에 살해되었다.

623년 봄, 이의는 직책을 떠나 수도 장안에서 복무할 것을 요청했고, 황실 군대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4. 1. 당나라로의 귀순

618년 봄, 양제우문화급이 주도한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우문화급은 뤄이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뤄이는 "나는 아직 수나라의 신하다."라며 거절하고 양제를 위해 3일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이는 유교 전통인 3년이나 한 문제에 의해 수정된 36일보다 짧은 기간이었다. 두건덕과 고개도도 항복을 요청했으나, 뤄이는 이들을 도적으로 여겨 거절했다. 대신 이연장안에서 황위에 올라 당나라를 건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 장군 장도원을 통해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619년경, 당 고조는 뤄이를 유주의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이후 두건덕의 공격을 격퇴했다.

619년 겨울, 당 고조는 뤄이를 연군왕으로 봉하고 황실 성인 이씨를 하사하여, 이후 그는 이의(李義)로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두건덕의 또 다른 공격을 격퇴했다. 620년 여름, 두건덕이 다시 공격해오자 뤄이는 고개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을 격퇴했다. 고개도는 이후 뤄이를 통해 당나라에 항복했다.

4. 2. 연군왕 책봉과 이씨 성 하사

羅藝|나예중국어당 고조에 의해 연군왕으로 봉해지고 황실 성인 이씨를 하사받아 이후 이의(李義|이의중국어)로 알려지게 되었다. 619년 겨울의 일이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두건덕의 공격을 격퇴했다. 두건덕620년 여름에 다시 공격했고, 羅藝|나예중국어는 고개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을 격퇴했다. 고개도는 이후 羅藝|나예중국어를 통해 당나라에 항복했다.

619년(무덕 2년), 羅藝|나예중국어는 표를 받들어 당나라에 귀순했다. 연왕에 봉해지고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 후 여러 번 두건덕과 싸워 그를 격파했다.

4. 3. 두건덕과의 전투

두건덕과 고개도 등이 나예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나예는 이들을 도적으로 여겨 거절했다. 618년 이연장안에서 황위에 올라 당나라를 건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619년경, 당 고조는 나예를 유주의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두건덕의 공격을 격퇴했다.

619년 겨울, 당 고조는 나예를 연군왕으로 봉하고 황실 성인 이씨를 하사하여 이후 그는 이의(李義)로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두건덕의 또 다른 공격을 격퇴했다. 620년 여름, 두건덕이 다시 공격해오자 나예는 고개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을 격퇴했다.

4. 4. 유흑타와의 전투

621년, 당 고조의 아들 이세민 진왕(훗날의 태종)이 두건덕을 생포하고, 당 고조는 두건덕을 처형했다. 잠시 동안 두건덕의 영토는 당나라에 항복했지만, 이후 유흑타를 중심으로 두건덕의 장군들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 고조는 유흑타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장군을 파견하고, 이의(당나라 황실에서 하사받은 이름)에게 북쪽에서 유흑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유흑타는 이의를 포함하여 그에게 파견된 모든 당나라 장군을 격파하고 두건덕의 모든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한편, 유주는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개도는 유주에 식량을 공급하기로 동의했고, 이의는 기근을 피하기 위해 병사 중 약한 자들을 위주로 보냈다. 고개도는 그들을 잘 대했고 이의는 기뻐하며 수레 수백 대와 말과 당나귀 1,000마리 이상을 동반한 3,000명의 병사를 위주에 보내 식량을 수송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개도는 이의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을 모두 붙잡아 이의와 당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는 북쪽의 동돌궐과 남쪽의 유흑타와 동맹을 맺었다.

622년, 이세민이 유흑타를 공격하면서 이의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이세민과 합류하여 유흑타의 수도인 명주(洺州, 현대의 한단, 허베이)를 공격했다. 군대가 수개월 동안 교착 상태에 빠진 후, 이세민은 인근 명강의 물을 이용하여 유흑타의 군대를 수장시켜 유흑타를 동돌궐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이의는 유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해 말, 유흑타가 동돌궐의 지원을 받아 돌아왔고, 이의는 그를 격퇴할 수 없었다. 유흑타는 이후 이세민의 형제 이건성 태자에게 패배하여 623년 초에 살해되었다.

5. 이건성, 이세민 형제의 권력 투쟁과 연루

나예는 수도에 도착한 직후 권력 투쟁 중이던 이세민과 이건성의 측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건성은 나이가 더 많고 법적으로 당 고조의 후계자였지만, 이세민은 더 유명했고 당나라 건국에 더 많이 기여했으며, 군대에서 더 큰 충성을 얻고 있었다.

이세민이 나예에게 사자를 보냈을 때, 나예는 그들을 묶어 구타하는 사건으로 당 고조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5. 1. 이건성과의 관계

이건성은 나이가 더 많고 법적으로 당 고조의 후계자였지만, 이세민은 더 유명했고 당나라 건국에 더 많이 기여했으며, 군대에서 더 큰 충성을 얻고 있었다. 한번은 이세민이 나예에게 사자를 보냈을 때, 나예는 그들을 묶어 구타했고, 이는 당 고조의 분노를 샀다. 당 고조는 잠시 나예를 체포했지만 곧 석방하고 복귀시켰다. 624년 이건성은 당 고조의 규정을 어기고 나예의 지휘하에 있던 정예 병사들을 징발하여 자신의 경호대를 강화했고, 이 사실이 발각되자 당 고조는 이건성을 꾸짖고 그의 경호대 사령관 가달지(可達志)를 유배 보냈다.

625년 여름, 관중 지역이 동돌궐의 끊임없는 약탈을 받자 당 고조는 이러한 약탈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장군들을 재배치했고, 이 과정에서 나예의 지휘하에 있던 군대는 화정(華亭, 현대 감숙성 평량시)과 탄쟁협(彈箏峽, 현대 닝샤 회족 자치구 고원시)에 배치되었다.

626년 여름, 동돌궐이 다시 공격해오자 당 고조는 이건성 편에 속한 또 다른 아들 이원길을 기왕에 봉하고 동돌궐에 맞서 군대를 이끌게 하였고, 나예는 이원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건성과 이원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두려워한 이세민은 먼저 행동하여 현무문(玄武門)에서 이건성과 이원길을 매복 공격하여 살해했고, 이후 당 고조에게 먼저 황태자 책봉을 강요하고, 두 달 후에는 황위를 물려받도록 하여(당 당태종) 사실상 황제가 되었다.

5. 2. 이세민과의 갈등

이세민이 나예에게 사자를 보냈을 때, 나예는 그들을 묶어 구타했는데, 이는 당 고조의 분노를 샀다. 당 고조는 잠시 나예를 체포했지만 곧 석방하고 복귀시켰다.

626년 여름, 동돌궐이 다시 공격해오자 당 고조는 이건성 편에 속한 또 다른 아들 이원길을 기왕에 봉하고 동돌궐에 맞서 군대를 이끌게 하였고, 나예는 이원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건성과 이원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두려워한 이세민은 먼저 행동하여 현무문에서 이건성과 이원길을 매복 공격하여 살해했고, 이후 당 고조에게 먼저 황태자 책봉을 강요하고, 두 달 후에는 황위를 물려받도록 하여(당 당태종) 사실상 황제가 되었다.

5. 3. 동돌궐 방어 임무

625년 여름, 당 고조동돌궐의 끊임없는 관중 지역 약탈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장군들을 재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나예가 지휘하는 군대는 화정(華亭, 현대 감숙성 평량시)과 탄쟁협(彈箏峽, 현대 닝샤 회족 자치구 고원시)에 배치되었다.

626년 여름, 동돌궐이 다시 공격해오자 당 고조는 이건성의 편이었던 다른 아들 이원길을 기왕에 봉하고 동돌궐에 맞서 군대를 이끌게 했다. 이때 나예는 이원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이건성과 이원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하여, 현무문(玄武門)에서 그들을 매복 공격하여 살해했다. 이후 이세민은 당 고조에게 황태자 책봉을 강요하고, 두 달 뒤에는 황위를 물려받아(당 당태종) 사실상 황제가 되었다.

5. 4. 현무문의 변

626년 여름, 동돌궐이 다시 공격해오자 당 고조는 이건성 편에 속한 또 다른 아들 이원길을 기왕에 봉하고 동돌궐에 맞서 군대를 이끌게 하였고, 나예는 이원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건성과 이원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두려워한 이세민은 먼저 행동하여 현무문에서 이건성과 이원길을 매복 공격하여 살해했고, 이후 당 고조에게 먼저 황태자 책봉을 강요하고, 두 달 후에는 황위를 물려받도록 하여(당태종) 사실상 황제가 되었다.

6. 반란과 죽음

태종이건성과 이원길의 측근들을 사면하고, 이건성의 많은 조언자들을 자신의 행정부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이세민과 갈등을 겪었던 이의는 불안해했다. 무당 이오계(李五戒)는 이의의 부인 맹(孟)공주와 가까이 지내며, 맹공주와 함께 이의를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627년 봄, 이의는 태종으로부터 당시 변방이었던 의주(宜州, 현대의 산시성 퉁촨)에서 장안으로 돌아오라는 밀지를 받은 척했다. 그는 빈주(豳州, 현대의 산시성 셴양)의 사무총장 조자호(趙慈皓)를 체포하고 빈주를 점령했다. 태종은 매부인 장손무기를 이의에 대항하여 파견했지만, 장손무기가 도착하기 전에 조자호의 동료 양급(楊岌)이 이의를 공격했고, 그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이의는 동돌궐로 도주하려 했지만, 오씨(烏氏, 현대의 핑량)에 도착했을 때 그의 측근들이 그를 암살하고 그의 머리를 잘라 장안으로 보냈다. 태종은 그의 머리를 거리에 걸어두고 그의 성을 다시 나(羅)로 바꾸어 황족 족보에서 삭제했다. 그의 부인 맹공주, 이오계, 그리고 그의 형제 나수는 모두 처형되었다.

6. 1. 반란의 배경

태종이건성과 이원길의 측근들에 대한 사면령을 선포하고, 이건성의 많은 조언자들을 자신의 행정부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이세민과 갈등을 겪었던 이의는 불안해했다. 한편, 무당 이오계(李五戒)는 이의의 부인 맹(孟)공주와 가까이 지내며 그녀에게 자신과 이의 모두 큰 영광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오계와 맹공주는 그를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627년 봄, 이의는 태종으로부터 당시 변방이었던 의주(宜州, 현대의 산시성 퉁촨)에서 장안으로 돌아오라는 밀지를 받은 척했다. 그는 빈주(豳州, 현대의 산시성 셴양)의 사무총장 조자호(趙慈皓)를 체포하고 빈주를 점령했다. 태종은 매부인 장손무기를 이의에 대항하여 파견했지만, 장손무기가 도착하기 전에 조자호의 동료 양급(楊岌)이 이의를 공격했고, 그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이의는 동돌궐로 도주하려 했지만, 오씨(烏氏, 현대의 핑량)에 도착했을 때 그의 측근들이 그를 암살하고 그의 머리를 잘라 장안으로 보냈다. 태종은 그의 머리를 거리에 걸어두고 그의 성을 다시 나(羅)로 바꾸어 황족 족보에서 삭제했다. 그의 부인 맹공주, 이오계, 그리고 그의 형제 나수는 모두 처형되었다.

6. 2. 빈주 점령과 최후

羅藝|나예중국어는 당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태종은 이건성과 이원길의 측근들을 사면하고, 이건성의 조언자들을 자신의 행정부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세민과 갈등을 겪었던 羅藝|나예중국어는 불안해했다. 무당 이오계(李五戒)는 羅藝|나예중국어의 부인 맹(孟)씨에게 羅藝|나예중국어와 자신 모두 큰 영광의 조짐을 보인다고 말하며, 맹씨와 함께 羅藝|나예중국어를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627년 봄, 羅藝|나예중국어는 태종의 밀지를 받은 척하며 빈주(豳州, 현대의 산시성 셴양)의 사무총장 조자호(趙慈皓)를 체포하고 빈주를 점령했다. 태종은 장손무기를 보내 羅藝|나예중국어를 진압하게 했으나, 장손무기가 도착하기 전에 조자호의 동료 양급(楊岌)이 羅藝|나예중국어를 공격하여 군대가 붕괴되었다. 羅藝|나예중국어는 동돌궐로 도주하려 했지만, 오씨(烏氏, 현대의 핑량)에서 측근들에게 암살당하고 머리가 잘려 장안으로 보내졌다. 태종은 羅藝|나예중국어의 머리를 거리에 걸어두고 성을 다시 나(羅)씨로 바꾸어 황족 족보에서 삭제했다. 羅藝|나예중국어의 부인 맹씨, 이오계, 그리고 그의 형제 나수(羅壽)는 모두 처형되었다.

7. 대중 문화에서의 등장

모바일 레전드: 뱅뱅에서 2020년 5월, 중국 황제 문화를 기반으로 한 마법사 영웅 뤄이가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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