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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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명암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작사가, 극작가, 시인이다. 충남 아산 출생으로 승려 생활을 하다 한용운의 추천으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부터 시 작품을 발표하고,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사가로 활동하며 박영호와 함께 일제강점기 대표 작사가로 꼽혔다. 일본 유학 중에도 가요 가사를 발표했으며, 친일 가요 작사 및 연극 각본을 썼다. 광복 후 좌익 계열에 가담하여 월북, 북한에서 문화성 부상 등을 역임하며 김일성상 계관시인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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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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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조명암 |
원래 이름 | 趙鳴岩 |
출생일 | 1913년 1월 10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충청남도 아산 |
사망일 | 1993년 5월 8일 |
거주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경력 | 극작가 겸 소설가 및 시인 겸 작사가 출신 |
종교 | 불교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학력 | |
학교 | 일본 와세다 대학교 불어불문학과 |
학위 | 학사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무소속 |
공직 | |
직책 | 문화성 제2대 부상 |
임기 시작 | 1961년 1월 28일 |
임기 종료 | 1961년 12월 28일 |
전임 | 황철 |
후임 | 박문원 |
장관 | 박웅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상 |
2. 생애
충청남도 아산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강원도 철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강원도 금화에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뒤 어려운 가정 환경 때문에 금강산에서 '''운탄'''(雲灘)이라는 법명을 얻어 불교 승려로 있다가 1930년 한용운의 추천을 받아 불교계가 운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32년부터 시 작품을 발표하며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사가 활동에 들어갔다. 1936년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유학 중에도 계속 대중가요 가사를 발표하였는데, 다수의 인기곡을 배출해 일제 강점기의 작사가로는 박영호와 쌍벽을 이룬다. 조명암의 가사는 박영호에 비해 섬세한 면이 돋보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영화 《그대와 나》의 주제가를 작사[2] 하였고, 대표적인 친일 가요들인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처〉, 〈혈서지원〉, 〈2천5백만의 감격〉를 작사한 바 있다. 그가 작사한 군국 가요는 총 9편이 알려져 있다.[3] 극작가로도 1944년 〈승리에의 길〉이라는 친일 연극의 각본을 썼다.[4]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연극동맹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좌익 계열에 가담했다. 〈독립군〉, 〈논개〉를 비롯해 낙랑극회가 문화극장, 민중극장과 공동 공연하여 많은 관객을 모은 안영일 연출의 〈위대한 사랑〉(1947)이 연극동맹 시기의 대표작이다. 1948년 월북하여 북한 예술계에서 중용되었고,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을 위한 〈조국보위의 노래〉를 발표하는 등 진중 가요를 작사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북한에서 고위직인 문화성 부상,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꿈꾸는 백마강〉, 〈신라의 달밤〉, 〈선창〉, 〈알뜰한 당신〉, 〈목포는 항구다〉, 〈화류춘몽〉, 〈고향초〉, 〈낙화유수〉, 〈진주라 천리 길〉과 같은 일제 강점기의 히트곡들은 작사자의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1988년 월북 예술인들이 해금된 후에야 작사자가 조명암임을 밝힐 수 있었다.
고전인 《춘향전》을 재해석하여 민족가극인 〈춘향전〉(1960)을 집필[5] 했는데, 이 작품은 김정일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1980년대 후반 재창작되면서 북한 공연계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취급되고 있다.[6] 1973년에 국기훈장을 받고 김일성상 계관시인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조명암은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철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강원도 금화에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금강산에서 '''운탄'''(雲灘)이라는 법명을 얻어 불교 승려 생활을 했다. 1930년 한용운의 추천으로 불교계가 운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1932년부터 시 작품을 발표하며 문필 활동을 시작했고,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작사가로 활동했다. 1936년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서 공부했다. 유학 중에도 대중가요 가사를 계속 발표하여 많은 인기곡을 냈으며, 박영호와 함께 일제 강점기 대표 작사가로 꼽힌다. 조명암의 가사는 박영호의 가사보다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 2. 문학 및 작사 활동
본명인 '''조영출'''(趙靈出)로도 널리 불린다. 지금까지 확인된 노골적인 군국가요 중 2/3가 조명암 가사로 친일인사로 명단에 올랐다.[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문화어로 '''조령출'''이라고 부른다.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이가실'''(李嘉實)이라는 예명을 비롯하여 '''김다인'''(金茶人), '''금운탄'''(金雲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932년부터 시 작품을 발표하며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사가 활동에 들어갔다.[1] 1936년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유학 중에도 계속 대중가요 가사를 발표하였는데, 다수의 인기곡을 배출해 일제 강점기의 작사가로는 박영호와 쌍벽을 이룬다. 조명암의 가사는 박영호에 비해 섬세한 면이 돋보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영화 《그대와 나》의 주제가를 작사[2] 하였고, 대표적인 친일 가요들인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처〉, 〈혈서지원〉, 〈2천5백만의 감격〉를 작사한 바 있다. 그가 작사한 군국 가요는 총 9편이 알려져 있다.[3] 극작가로도 1944년 〈승리에의 길〉이라는 친일 연극의 각본을 썼다.[4]
광복 후에는 조선연극동맹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좌익 계열에 가담했다. 〈독립군〉, 〈논개〉를 비롯해 낙랑극회가 문화극장, 민중극장과 공동 공연하여 많은 관객을 모은 안영일 연출의 〈위대한 사랑〉(1947)이 연극동맹 시기의 대표작이다. 1948년 월북하여 북한 예술계에서 중용되었고,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을 위한 〈조국보위의 노래〉를 발표하는 등 진중 가요를 작사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북한에서 고위직인 문화성 부상,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꿈꾸는 백마강〉, 〈신라의 달밤〉, 〈선창〉, 〈알뜰한 당신〉, 〈목포는 항구다〉, 〈화류춘몽〉, 〈고향초〉, 〈낙화유수〉, 〈진주라 천리 길〉과 같은 일제 강점기의 히트곡들은 작사자의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1988년 월북 예술인들이 해금된 후에야 작사자가 조명암임을 밝힐 수 있었다.
고전인 《춘향전》을 재해석하여 민족가극인 〈춘향전〉(1960)을 집필[5] 했는데, 이 작품은 김정일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1980년대 후반 재창작되면서 북한 공연계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취급되고 있다.[6] 1973년에 국기훈장을 받고 김일성상 계관시인이 되었다.
2. 3. 친일 행적
본명은 '''조영출'''(趙靈出)이며, 문화어로는 '''조령출'''이라고 불린다. 확인된 군국가요 중 2/3가 조명암 가사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1]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4] 작사가로 활동하며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금운탄'''(金雲灘) 등의 예명을 사용했다.일제강점기 말기 영화 《그대와 나》의 주제가를 작사[2]했고,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처〉, 〈혈서지원〉, 〈2천5백만의 감격〉 등 대표적인 친일 가요들을 작사했다. 알려진 군국 가요는 총 9편이다.[3] 1944년에는 친일 연극 〈승리에의 길〉의 각본을 썼다.[4]
2. 4. 광복 후 활동과 월북
조명암은 광복 후 조선연극동맹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5] 〈독립군〉, 〈논개〉를 비롯해 안영일 연출의 〈위대한 사랑〉(1947)이 연극동맹 시기의 대표작이다.[5] 1948년 월북하여 북한 예술계에서 중용되었고,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을 위한 〈조국보위의 노래〉를 발표하는 등 진중 가요를 작사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북한에서 문화성 부상,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5] 1973년에는 국기훈장을 받고 김일성상 계관시인이 되었다. 고전인 《춘향전》을 재해석하여 민족가극인 〈춘향전〉(1960)을 집필했는데,[5] 이 작품은 김정일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1980년대 후반 재창작되면서 북한 공연계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취급되고 있다.[6]2. 5. 북한에서의 활동과 사망
조명암은 광복 후 조선연극동맹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좌익 계열에 가담했다.[4] 〈독립군〉, 〈논개〉를 비롯해 낙랑극회가 문화극장, 민중극장과 공동 공연하여 많은 관객을 모은 안영일 연출의 〈위대한 사랑〉(1947)이 연극동맹 시기의 대표작이다. 1948년 월북하여 북한 예술계에서 중용되었고,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을 위한 〈조국보위의 노래〉를 발표하는 등 진중 가요를 작사하며 활발히 활동했다.북한에서 고위직인 문화성 부상,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5]하여,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꿈꾸는 백마강〉, 〈신라의 달밤〉, 〈선창〉, 〈알뜰한 당신〉, 〈목포는 항구다〉, 〈화류춘몽〉, 〈고향초〉, 〈낙화유수〉, 〈진주라 천리 길〉과 같은 일제 강점기의 히트곡들은 작사자의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1988년 월북 예술인들이 해금된 후에야 작사자가 조명암임을 밝힐 수 있었다.
고전인 《춘향전》을 재해석하여 민족가극인 〈춘향전〉(1960)을 집필했는데, 이 작품은 김정일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1980년대 후반 재창작되면서 북한 공연계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취급되고 있다.[6] 1973년에 국기훈장을 받고 김일성상 계관시인이 되었다.
3. 주요 작품
'''가요'''
본명인 '''조영출'''(趙靈出)로도 널리 불린다.[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문화어로 '''조령출'''이라고 부른다.[1]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금운탄(金雲灘)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1] 지금까지 확인된 노골적인 군국가요 중 2/3가 조명암 가사로 친일인사로 명단에 올랐다.[1]
'''연극/극'''
본명인 '''조영출'''(趙靈出)로도 널리 불린다.[1]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금운탄(金雲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
3. 1. 가요
본명인 '''조영출'''(趙靈出)로도 널리 불린다.[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문화어로 '''조령출'''이라고 부른다.[1]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금운탄(金雲灘)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1] 지금까지 확인된 노골적인 군국가요 중 2/3가 조명암 가사로 친일인사로 명단에 올랐다.[1]3. 2. 연극/극
본명인 '''조영출'''(趙靈出)로도 널리 불린다.[1]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금운탄'''(金雲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4. 평가
참조
[1]
저널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1편 “남인수·백년설이 정말 '혈서'를 썼을까?”>
https://radio.ytn.co[...]
YTN
2019-05-31
[2]
뉴스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12)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08-25
[3]
뉴스
충남 아산 설화예술제는 친일인사 기리는 축제? - 제1회 ‘조명암 가요제’ 태동 앞두고 친일행적 논란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6-09-19
[4]
뉴스
"사실을 알리고 역사적 교훈을 삼자는 것뿐" -
[5]
뉴스
[6]
뉴스
北 민족가극의 효시 `춘향전`
연합뉴스
200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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