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섭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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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영섭은 평양 출신의 극작가로, 보성전문학교에서 연극 활동을 시작하여 도쿄학생예술좌를 창립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 친일 연극에 참여했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이후 행방이 묘연하며 월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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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은 청천이라는 호를 사용한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의 문학평론가, 수필가, 번역가, 교육자로, 평론, 수필,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경성방송국 직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서울대학교 및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주영섭 (극작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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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주영섭 |
본명 | 주정섭(朱丁燮) → 주영섭(朱永燮 → 朱永涉) |
본관 | 신안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부 |
사망일 | ? |
종교 | 개신교(장로회) |
직업 | 극작가 겸 연출 및 평론가(전직 시인 및 은퇴 배우 출신) |
필명 | 일본식 이름은 마쓰무라 나가루(松村永涉)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경력 | 국민연극연구소 연구위원 |
활동 기간 | 1931년~1945년 |
학력 | 일본 도쿄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학사 |
부모 | 주진우(부) |
주요 작품 | 희곡 《나루》 |
형제 | 주요한(첫째 형), 주요섭(둘째 형) |
분야 | 연극연출, 극작, 희곡, 시문학 |
영향 준 인물 | 절친한 친구인 아동문학가 현재덕 등의 영향을 받음. |
웹사이트 | 주영섭 |
2. 생애
평안남도 평양 출신인 주영섭은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막심 고리키의 《밤주막》 공연, 극단 신건설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출연 등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1]
이후 일본 유학을 떠나 호세이 대학에서 수학하며 1934년 도쿄학생예술좌를 창립, 창작극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1939년 도쿄학생예술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1]
귀국 후에는 현대극장과 국민연극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친일적인 성향으로 전향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월북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북에서의 활동은 불분명하다.[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
2. 1. 초기 활동 (1930년대 초)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연극계에 입문하여 막심 고리키의 《밤주막》을 공연했고, 극단 신건설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에 배우로 출연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에리히 레마르크의 반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카프 계열 연극인들이 신건설 창립작으로 올렸다가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을 일으킨 작품이다.[1]2. 2. 일본 유학 및 도쿄학생예술좌 활동 (1934년 ~ 1939년)
193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호세이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마완영 등과 함께 도쿄학생예술좌를 창립했다. 도쿄학생예술좌는 창작극 공연에 중점을 두었고, 창립작으로 유치진의 《소》와 주영섭의 《나루》를 공연했다. 주영섭이 《신동아》에 발표한 《나루》는 당시 궁핍한 농촌 현실을 사실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경향파적 성향을 보였다.[1] 1939년 도쿄학생예술좌 사건으로 마완영, 박동근, 이서향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1]2. 3. 귀국 후 친일 연극 활동 (1940년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주영섭은 유치진의 현대극장에 가입하고, 함대훈의 국민연극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사실상 전향했다. 현대극장 창립작으로 유치진의 친일 희곡 《흑룡강》을 연출해 공연하였고, 함세덕의 《추석》, 유치진의 《북진대》 등 현대극장의 대표적인 친일 연극들을 연출했다. 1942년 연극 배우에서 은퇴한 이후, 1944년에는 연극 연출가에서도 은퇴를 선언했으나, 1945년 8월 15일 을유 해방 직전까지 극작가로 활약했다.[1]2. 4. 광복 이후 (1945년 ~ )
1945년 8·15 을유 해방(광복) 직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 전력과 정황으로 미루어 월북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북에서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았다.[1]3. 친일 논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연극에 참여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었다.[1]
유치진의 현대극장에 가입하고, 함대훈의 국민연극연구소에서 활동하여 사실상 전향했다. 현대극장 창립작으로 유치진의 친일 희곡 《흑룡강》을 연출해 공연하였고, 함세덕의 《추석》, 유치진의 《북진대》 등 현대극장의 대표적인 친일 연극들을 연출했다. 1942년 연극 배우 은퇴 이후, 1944년에 연극 연출가로도 은퇴 선언했으나,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을유 해방 직전 때까지 전면적인 극작가로 활약했다.[1]
4. 학력
- 평남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1924년 3월)[1]
- 평남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졸업 (1930년 3월)[1]
- 경성 보성전문학교 문과 전문학사 (1932년 3월)[1]
- 일본 도쿄 호세이 대학 법정학과 학사 (1937년 3월)[1]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주공삼 | 1875년 6월 16일 | 1953년 10월 18일 | 개신교 장로회 목사. 평남 평양 연화동교회 목사 역임. 평남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 |
첫째 형 | 주요한 | 1900년 10월 14일 | 1979년 11월 17일 | 소설가, 번역문학가, 시인, 언론인, 정치인. 대한해운공사 사장 역임. |
둘째 형 | 주요섭 | 1902년 11월 24일 | 1972년 11월 14일 | 소설가, 시인, 영문학자.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역임. |
6. 인간 관계
현재덕과 오랜 친구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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