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노 시로
1. 개요
나카노 시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07년 아이치현에서 태어나 1985년 사망했다. 그는 도쿄시 의원과 헤키난 시장을 역임했으며, 중의원 의원으로 11선을 지냈다. 일본농민당 위원장, 개진당 중앙상임위원을 거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국토청 장관을 지냈다. 그는 재일 한국인의 권익 보호에 힘썼으며, 1982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 이름 | 중노 시로 (나카노 시로) |
|---|---|
| 원어 이름 | 中野 四郎 |
| 로마자 표기 | Nakano Shirō |
| 국적 | 일본 |
| 출생일 | 1907년 1월 25일 |
| 출생지 | 일본 제국 아이치현 헤키카이군 신카와정 (현 아이치현 헤키난시) |
| 사망일 | 1985년 10월 21일 |
| 학력 | 사립 풍산중학교 (현 일본대학 풍산중학교・고등학교) |
| 소속 정당 | 삼주농민당 일본농민당 농민협동당 개진당 신당동지회 무소속 자유민주당 |
| 칭호 및 훈장 | 훈일등욱일대수장 중의원 영년재직의원 |
| 배우자 | 유 |
| 내각 | 제1차 오히라 내각 |
|---|---|
| 임기 시작일 | 1978년 12월 7일 |
| 임기 종료일 | 1979년 11월 9일 |
| 선거구 | 구 아이치 2구 (대선거구) 구 아이치 4구 |
| 당선 횟수 | 13회 (총합) |
| 임기 시작일 | 1946년 4월 11일 1960년 11월 20일 1976년 12월 10일 |
| 임기 종료일 | 1955년 1월 24일 1972년 11월 13일 1985년 10월 21일 |
| 당선 횟수 | 1회 |
| 임기 시작일 | 1956년 4월 5일 |
| 임기 종료일 | 1958년 4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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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토청 장관 -
와타누키 다미스케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 중의원 의장, 국민신당 대표를 역임했으며, 기업가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토청 장관, 건설상 등을 거쳐 우정 민영화 반대로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
일본의 국토청 장관 -
사쿠라우치 요시오
사쿠라우치 요시오는 시마네현 출신의 일본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 중·참의원 의원, 농림대신, 건설대신, 통상산업대신, 외무대신, 중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며 국정을 이끌었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
혼마 마사하루
혼마 마사하루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필리핀 공략전을 지휘했으나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한 책임으로 전범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재판은 지휘자 책임 적용 및 맥아더의 복수심 작용 등의 논란이 있다. -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인 도공 후손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만주, 스위스, 독일, 소련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소일 중립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으로서 미일 관계 개선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전범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며, 종전 과정에서 포츠담 선언 수용을 주장하여 일본 항복에 기여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
아이치현 출신 -
미즈타니 유코
미즈타니 유코는 1985년 데뷔하여 다양한 애니메이션, 특히 《치비 마루코짱》의 언니 역과 미니 마우스 일본어 더빙으로 알려진 일본의 성우, 배우, 가수였으며, 폭넓은 음역과 연기력으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으나 2016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
아이치현 출신 -
고토 라라
고토 라라는 일본의 프리 아나운서, 탤런트, 그리고 과거 SKE48 팀E의 멤버로서, SKE48과 AKB48 싱글 선발 멤버로 활동 후 졸업하여 현재 세인트 포스 소속으로 방송 리포터 및 캐스터로 활동 중이며 골프가 특기이다.
2. 생애
1907년 1월 25일, 아이치현 헤키카이군 신카와정(지금의 헤키난시)에서 태어났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농기구 가게에서 일하다가 13살 때 홀로 도쿄로 상경, 신문 배달 등을 하며 학비를 벌어 구제 부잔 중학교에서 수학했으나 1923년 9월에 중퇴했다.
스즈키 쇼고의 소개로 가야하라 가잔의 문하생이 되었다. 1938년 3월, 도쿄시 우시고메구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당시 우시고메구는 미키 부키치의 지역구였고 인접한 고이시카와구는 하토야마 이치로의 지역구였기에 두 사람의 계열에 속하지 않는 정치인은 구의회 의원이 될 수 없었는데, 나카노는 처음으로 이들의 파벌에 들지 않고 의원이 되었다. 1942년 6월, 도쿄시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재일 조선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아사누마 이네지로, 모리 가네미치 등과 함께 상업조합을 결성하고 경시청의 탄압에 맞섰으며, 이 과정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2.1. 전후
도쿄 대공습으로 지역 기반을 잃었으나, 국정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1946년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천황제 논의가 주요 의제였는데, 나카노는 천황제 유지를 주장하며 히노마루를 그린 전단지를 배포했다. 당시 GHQ는 히노마루 사용을 금지했기에, 이러한 나카노의 행동은 농민들에게 '반골' 기질로 인식되어 지지를 얻었고, 정수 7명 중 7위로 당선되었다.
1947년 일본농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농민협동당을 거쳐 1952년 개진당에 입당하여 중앙상임위원이 되었다.
1955년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헤키난시장 선거에 출마, 1956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자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8년 중의원 해산 후 시장에서 사임하고 총선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1960년 총선에서 호리 시게루의 도움으로 자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어 5년 만에 국회로 복귀했다. 당선 후에는 사토파-후쿠다파에 소속되었다.
이후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중의원 예산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78년 제1차 오히라 내각에서 국토청 장관으로 입각했다. 1979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11선 의원이 되었지만, 선거 운동 관련 비리로 측근이 체포되기도 했다. 1982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1985년 7월, 자택에서 낙상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무리한 일정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0월 21일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나카노 사후,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스기우라 세이켄이 후계자가 되었다.
3. 정치 활동 및 이념
나카노 시로는 초기에는 농민 운동과 진보 정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아이치현 제2구에서 산슈농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천황제 유지와 히노마루를 그린 전단지를 배포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1947년 일본농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아이치현 제4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농민협동당을 거쳐 1952년에는 개진당에 입당하여 중앙상임위원이 되었다.
1960년 자유민주당에 입당, 호리 시게루의 도움으로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해 국회에 복귀했다. 사토파-후쿠다파 소속으로,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중의원 예산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8년 제1차 오히라 내각 국토청 장관을 지냈고, 1979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11선 의원이 되었으나, 선거 운동 관련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82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3.1. 재일 한국인과의 관계
경시청이 조선인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조선인들이 많이 종사하던 고철상이나 중고 거래업에 대한 단속에 나서자, 나카노 시로는 자신의 지지자들인 재일 조선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모리 가네미치 등과 함께 상업조합을 결성해 경시청에 대항했는데, 이 조합에는 1만 8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참여했다. 1942년 가을 히비야 공원에서 돗자리 깃발 집회를 열었다가 나카노 시로는 아사누마 이네지로, 모리 가네미치와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3.2. 농민 운동과 진보 정당 활동
나카노 시로는 초기 정치 경력에서 농민 운동과 진보 정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아이치현 제2구에서 산슈농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천황제 논의가 주요 의제였는데, 나카노는 천황제 유지를 주장하며 히노마루를 그린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는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히노마루 사용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에게 반골 정신으로 인식되어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
1947년 일본농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아이치현 제4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농민협동당을 거쳐 1952년에는 개진당에 입당하여 중앙상임위원이 되었다.
3.3. 자유민주당 활동과 보수화
中野 四郎일본어는 1960년 자유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 경력을 이어갔다. 호리 시게루의 도움으로 자민당 공천을 받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 5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당선 후에는 사토파-후쿠다파에 소속되었다.
이후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중의원 예산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당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1978년 제1차 오히라 내각에서는 국토청 장관으로 입각하여 행정 경험을 쌓았다. 1979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11선 의원이 되었지만, 선거 운동을 돕던 전현직 니시오시의회 의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82년에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4. 역대 선거 기록
| 실시일 | 선거 | 소속 정당 | 당락 |
|---|---|---|---|
| 1946년 4월 10일 |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산슈농민당 | 당선 |
| 1947년 4월 25일 |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일본농민당 | 당선 |
| 1949년 1월 23일 |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일본농민당 | 당선 |
| 1952년 10월 1일 |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개진당 | 당선 |
| 1953년 4월 19일 |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개진당 | 당선 |
| 1955년 2월 27일 |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신당동지회 | 낙선 |
| 1956년 4월 5일 | 헤키난시장 선거 | 무소속 | 당선 |
| 1958년 5월 22일 |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무소속 | 낙선 |
| 1960년 11월 20일 |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당선 |
| 1963년 11월 21일 |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당선 |
| 1967년 1월 29일 |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당선 |
| 1969년 12월 27일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당선 |
| 1972년 12월 10일 |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낙선 |
| 1976년 12월 5일 |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당선 |
| 1979년 10월 7일 |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당선 |
| 1980년 6월 22일 |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당선 |
| 1983년 12월 18일 |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자유민주당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