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누키 다미스케
1. 개요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 중의원 의장, 국민신당 대표 등을 역임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가네보 방적, 토나미 운수를 거쳐 28세에 토나미 운수 대표이사가 되어 기업을 성장시켰다. 1969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국토청 장관, 건설상, 자민당 간사장 등을 지냈으며, 우정 민영화에 반대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2009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2016년 자민당에 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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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
하시모토 류타로
하시모토 류타로는 1963년 중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후생대신, 운수대신, 자민당 사무총장 등을 거쳐 1996년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에 취임, 미군 푸텐마 비행장 반환 합의를 이끌어냈고 행정 및 재정 구조 개혁을 추진했으나 소비세 인상 등의 경제 정책으로 논란을 겪다 1998년 참의원 선거 참패 후 총리직에서 물러난 정치인이다. -
일본의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
노나카 히로무
노나카 히로무는 부락민 차별 경험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자민당 간사장 등 요직을 역임하며 일본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으로, 평화주의를 강조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
일본의 국토청 장관 -
나카노 시로
나카노 시로는 아이치현 출신의 일본 정치인으로, 농민 운동과 재일조선인 권익 보호 활동을 펼치며 국토청 장관을 역임했지만, 선거법 위반 논란 등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
일본의 국토청 장관 -
사쿠라우치 요시오
사쿠라우치 요시오는 시마네현 출신의 일본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 중·참의원 의원, 농림대신, 건설대신, 통상산업대신, 외무대신, 중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며 국정을 이끌었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일본의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사토 에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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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노다 우이치
노다 우이치는 일본의 관료 출신 정치인으로, 대장차관, 건설상, 행정관리청 장관, 경제기획청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2. 생애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도야마현 히가시토나미군 이나미정(지금의 난토시)에서 태어났다. 와타누키가는 대대로 이나미하치만궁의 궁사를 맡아왔는데,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15대에 해당했다. 구제 도나미 중학교(현 도야마현립 도나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후지와라 공업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 재학 중 후지와라 공업대학이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흡수합병되었는데, 와타누키가 소속되어 있던 야금과가 폐지되면서 경제학부에 소속되었다.
졸업 후 가네보 방적(후의 가네보)에서 일했다. 1955년 28세의 나이로 도나미 운수(현 토나미 운수)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경영 파탄 직전의 도나미 운수를 재건해 상장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사업 수완을 보였다.
1955년 도야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4년 뒤인 1959년에 재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재선에 성공하여 현의회 의원을 지내다가, 1967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년 뒤 총선에 다시 출마하여 도야마현 제2구에서 당선되었다.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중의원 의원이 되었으며, 가와시마 쇼지로가 이끌던 교우 클럽에 가입했다. 1973년에는 청람회 결성에 참가했지만, 회합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탈퇴했다. 교우 클럽이 해산된 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목요 클럽에 가입했다.
1986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제3차 나카소네 내각이 출범하자 국토청 장관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처음 입각했다. 1990년 제2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건설상으로 두 번째 입각했다.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는데, 파벌을 옮긴 경력이 있고 총재 후보급으로 보기 힘든 와타누키를 간사장에 기용한 것은 예상 밖의 인사라는 평가가 많았다. 당시 와타누키는 목요 클럽을 계승한 다케시타 노보루의 경세회 소속이었는데, 경세회는 내부 갈등이 심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간사장이 되기를 원했으나 오자와 이치로가 견제하여 와타누키가 간사장이 되었다. 이 갈등은 경세회 분열로 이어졌고, 와타누키는 다케시타, 오부치 게이조, 하타 쓰토무, 오자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한동안 무파벌로 지냈다. 이후 하타파가 자민당을 탈당하자 오부치파에 가입했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첫 선거인 1996년 총선에서는 182,185표를 얻어 전국 최다 득표수를 기록했다. 1998년 오부치가 총리대신이 되자 와타누키는 파벌 회장이 되었다.
2000년 일본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일본의 우정민영화를 추진하자, 자민당 우정족 의원 약 200명이 참여한 우정사업간담회 회장을 맡아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2005년 우정민영화 법안이 중의원에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지만 통과되었다.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중의원을 해산했고, 우정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의원들에게 공천을 주지 않았다. 와타누키는 이에 반발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가메이 시즈카, 가메이 히사오키 등 우정민영화 반대 의원 5명과 함께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대표가 되었다. 자민당은 와타누키의 탈당을 반려하고 제명 처분했다. 총선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은 하기야마 교곤을 꺾고 13선에 성공했다.
총선 후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퇴장할 때 기자에게 누구에게 투표했냐는 질문을 받자 "... 와타누키. 에헷!"이라고 답했다.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당선된 의원들을 모아 통일 회파를 결성하려 했으나 노로타 호세이 전 방위청 장관만 참여했다.
2007년 7월 참의원 의원 선거 때 무소속 모리타 다카시를 지원했다. 모리타는 당선된 후 그해 12월에 국민신당에 입당했다.
2009년 총선 때 자민당 가와이 쓰네노리가 와타누키를 지지하기 위해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에 입당하겠다고 발표했다. 와타누키가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고 비례대표 단독 출마를 결정해 가와이의 탈당은 무산되었지만, 자민당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와타누키는 총선에서 낙선했고 당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최고고문이 되었다. 도야마현 제1구에 출마한 민주당 무라이 무네아키를 지지해 당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구였던 도야마현 제3구를 다른 정치 신인에게 물려주지 않고 야당계 무소속 아이모토 요시히코도 지지하지 않아, 자민당 공천을 받은 전 다카오카시장 다치바나 게이이치로가 당선되는데 기여했다.
2010년 4월 29일 동화대수장을 수훈받았다. 2011년 4월 명예 난토시민 칭호를 받았다.
와타누키의 뒤를 이어 국민신당 대표가 되었던 가메이 시즈카가 2012년 4월 소비세 증세에 반대하며 민국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금융상 지미 쇼자부로와 시모지 미키오 등이 반발하면서 국민신당은 분열했다. 가메이는 대표에서 해임되자 가메이 아키코와 함께 국민신당을 탈당했다. 이때 국민신당 공식 홈페이지에서 와타누키의 이름이 삭제됐다.
국민신당이 2013년 해산한 뒤, 와타누키는 자민당 복당을 원치 않았지만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가 복당을 권했다. 2016년 11월 2일 자민당 당기위원회가 와타누키의 복당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2.1. 정계 입문 전
도야마현 히가시토나미군 이나미정(지금의 난토시)에서 태어났다. 와타누키가는 대대로 이나미하치만궁의 궁사를 맡아왔는데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15대에 해당했다. 구제 도나미 중학교(현 도야마현립 도나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후지와라 공업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 재학 중일 때 후지와라 공업대학이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흡수합병되었는데 와타누키가 소속되어 있던 야금과가 폐지되면서 경제학부에 소속되었다.
졸업 후 가네보 방적(후의 가네보)에서 일했다. 1955년 28살의 나이로 도나미 운수(현 토나미 운수)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경영 파탄 직전의 도나미 운수를 재건해 상장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사업 수완을 보였다.
2.2. 정계 입문과 자민당 의원
1955년 도야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4년 뒤인 1959년에 재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재선에 성공하여 현의회 의원을 지내다가, 1967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년 뒤 총선에 다시 출마하여 도야마현 제2구에서 당선되었다.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중의원 의원이 되었으며, 가와시마 쇼지로가 이끌던 교우 클럽에 가입했다. 1973년에는 청람회 결성에 참가했지만, 회합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탈퇴했다. 교우 클럽이 해산된 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목요 클럽에 가입했다.
1986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제3차 나카소네 내각이 출범하자 국토청 장관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처음 입각했다. 1990년 제2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건설상으로 두 번째 입각했다.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는데, 파벌을 옮긴 경력이 있고 총재 후보급으로 보기 힘든 와타누키를 간사장에 기용한 것은 예상 밖의 인사라는 평가가 많았다. 당시 와타누키는 목요 클럽을 계승한 다케시타 노보루의 경세회 소속이었는데, 경세회는 내부 갈등이 심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간사장이 되기를 원했으나 오자와 이치로가 견제하여 와타누키가 간사장이 되었다. 이 갈등은 경세회 분열로 이어졌고, 와타누키는 다케시타, 오부치 게이조, 하타 쓰토무, 오자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한동안 무파벌로 지냈다. 이후 하타파가 자민당을 탈당하자 오부치파에 가입했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첫 선거인 1996년 총선에서는 182,185표를 얻어 전국 최다 득표수를 기록했다. 1998년 오부치가 총리대신이 되자 와타누키는 파벌 회장이 되었다.
2000년 일본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2002년 12월 10일에는 의사진행 원고를 실수로 두 장 넘겨 2000년도 결산 채결이 처리되지 않았는데도 산회 선언을 했다가, 이틀 뒤 산회 선언을 무효로 하고 결산 채결을 진행했다. 2003년 볼로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4년에는 신사본청으로부터 신토에 공적이 있는 신직(神職)에게 주어지는 장로 칭호를 받았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일본의 우정민영화를 추진하자, 와타누키는 자민당 우정족 의원 약 200명이 참여한 우정사업간담회 회장을 맡아 우정민영화에 강하게 반대했다. 2005년 우정민영화 법안이 중의원에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지만 통과되었다.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중의원을 해산했고, 우정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의원들에게 공천을 주지 않았다. 와타누키는 이에 반발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가메이 시즈카, 가메이 히사오키 등 우정민영화 반대 의원 5명과 함께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대표가 되었다. 자민당은 와타누키의 탈당을 반려하고 제명 처분했다. 총선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은 하기야마 교곤을 꺾고 13선에 성공했다.
2.3. 우정 민영화 반대와 국민신당 창당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추진한 우정 민영화에 반대하여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도야마현 제3구에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하여 13선에 성공했다.
총선 후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퇴장할 때 기자에게 누구에게 투표했냐는 질문을 받자 "... 와타누키. 에헷!"이라고 답했다.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당선된 의원들을 모아 통일 회파를 결성하려 했으나 노로타 호세이 전 방위청 장관만 참여했다.
2007년 7월 참의원 의원 선거 때 무소속 모리타 다카시를 지원했다. 모리타는 당선된 후 그해 12월에 국민신당에 입당했다.
2.4. 국민신당 활동과 정계 은퇴
2005년 총선에서 우정민영화에 반대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총선에서 도야마현 제3구에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하여 13선에 성공했다.
총선 후 진행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퇴장할 때 기자에게 누구에게 투표했냐는 질문을 받자 "… 와타누키. 에헷!"이라고 답했다.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재선에 성공한 의원들을 규합해 통일 회파를 결성하고자 했지만, 전 방위청 장관 노로타 호세이만 참여했다.
2007년 참의원 선거 때 무소속 모리타 다카시를 지원했다. 모리타는 당선 후 12월에 국민신당에 입당했다.
2009년 총선 때 자민당 가와이 쓰네노리가 와타누키를 지지하기 위해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에 입당하겠다고 발표했다. 와타누키가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고 비례대표 단독 출마를 결정해 가와이의 탈당은 무산되었지만, 자민당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와타누키는 총선에서 낙선했고 당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최고고문이 되었다. 도야마현 제1구에 출마한 민주당 무라이 무네아키를 지지해 당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구였던 도야마현 제3구를 다른 정치 신인에게 물려주지 않고 야당계 무소속 아이모토 요시히코도 지지하지 않아, 자민당 공천을 받은 전 다카오카시장 다치바나 게이이치로가 당선되는데 기여했다. 와타누키가 아이모토를 지지하지 않은 이유는 지지자 중 일부가 무소속 시바타 다쿠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29일 동화대수장을 수훈받았다. 5월 7일 수훈자를 대표해 "각자의 분야에서 더욱 정진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인사했고, 아키히토는 "오랜 기간 각자의 역할에 힘써 국가나 사회를 위해, 또 여러 사람들을 위해 노력해 온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라고 화답했다. 2011년 4월 명예 난토시민 칭호를 받았다.
와타누키의 뒤를 이어 국민신당 대표가 되었던 가메이 시즈카가 2012년 4월 소비세 증세에 반대하며 민국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금융상 지미 쇼자부로와 시모지 미키오 등이 반발하면서 국민신당은 분열했다. 가메이는 대표에서 해임되자 가메이 아키코와 함께 국민신당을 탈당했다. 이때 국민신당 공식 홈페이지에서 와타누키의 이름이 삭제됐다.
국민신당이 2013년 해산한 뒤, 와타누키는 자민당 복당을 원치 않았지만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가 복당을 권했다. 2016년 11월 2일 자민당 당기위원회가 와타누키의 복당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자민당이 제명된 의원의 복당을 허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당기위원회는 복당 심사에 앞서 제명된 국회의원의 복당 기준을 마련해야 했다.
3. 사상 및 정책
니노미야 소토쿠(니노미야 긴지로)가 제창한 보덕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후쿠다 아키오 등이 결성한 “니노미야 소토쿠 사상 연구회”에도 참가했다. 보덕니노미야 신사의 자선 그림마 전시회에도 찬동하여, 직접 휘호한 그림마를 출품했다.
* 외국인 참정권(外国人参政権)에 반대.
* 국적법(国籍法) 개정에 반대.
4. 역대 선거 기록
| 당락 | 선거 | 시행일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순위 /후보자수 | 비례구 | 비례순위 /후보자수 | |
|---|---|---|---|---|---|---|---|---|---|---|
| 낙 |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7년 1월 29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47,850 | 19.7 | 4/5 | - | - | |
| 당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9년 12월 27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63,693 | 25.6 | 2/5 | - | - | |
| 당 |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2년 12월 10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64,950 | 23.5 | 2/5 | - | - | |
| 당 |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6년 12월 5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87,752 | 36.7 | 1/4 | - | - | |
| 당 |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9년 10월 7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3,356 | 26.4 | 2/5 | - | - | |
| 당 |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80년 6월 22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84,848 | 29.4 | 1/5 | - | - | |
| 당 |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83년 12월 18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1,849 | 27.1 | 1/5 | - | - | |
| 당 |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86년 7월 6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75,711 | 24.8 | 1/7 | - | - | |
| 당 |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0년 2월 18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82,092 | 26.6 | 1/5 | - | - | |
| 당 |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3년 7월 18일 | 도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96,567 | 32.2 | 1/5 | - | - | |
| 당 |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6년 10월 20일 | 도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82,185 | 79.9 | 1/3 | - | - | |
| 당 |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0년 6월 25일 | 도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50,200 | 58.5 | 1/4 | - | - | |
| 당 |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3년 11월 9일 | 도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59,316 | 69.7 | 1/3 | - | - | |
| 당 |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5년 9월 11일 | 도야마현 제3구 | 국민신당 | 120,083 | 41.3 | 1/5 | - | - | |
| 낙 |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9년 8월 30일 | - | 국민신당 | | style="text-align: right;" | | style="text-align: right;" | - | 비례 북륙신에쓰 | 제1위 | |||
| 당선 횟수 13회 (중의원 의원 13) | ||||||||||
5. 소속 정당
2005년 자민당에서 우정 민영화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후,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게 되자 카메이 시즈카, 카메이 히사오키 등과 함께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결성하여 당 대표로 취임했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한 후 국민신당 대표직을 사임하고 당 최고 고문으로 취임했다.
6. 소속 의원 연맹
* 일미평화·문화교류협회 이사
* 공익재단법인 쇼와성덕기념재단 회장
*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 회장
*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발기인
* 금연추진의원연맹 회장
*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 회장
* 베이징 올림픽을 지원하는 의원의 모임 고문
* 헌법 20조를 생각하는 모임 고문
* 전국치수사방협회 회장
* 특정비영리활동법인 일본방재사기구 평의원
* 공익재단법인 일본 배드민턴협회 회장
7. 기타
* 다케시타파 분열 당시, 다케시타 노보루·오부치 게이조 등과 하다 쓰토무·오자와 이치로 등 양쪽 모두와 좋은 관계였던 와타누키는 양측 사이에서 곤경에 처했다. 결국 동기 당선자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던 하다파(개혁 포럼 21) 쪽으로 기울었지만, 참가를 보류하고 오부치파에도 참가하지 않고 무파벌을 선택했다. 하다파가 탈당한 후에 오부치파에 입당했다.
* 중대선거구제 비례대표 병립제 도입 후 처음으로 실시된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선거구에서 역대 최고 득표수(182,185표)를 기록하여 당선되었지만, 이 기록은 와타누키가 자민당을 탈당한 후의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의 가나가와현 제11구 득표(197,037표)에 의해 경신되었다.
* 2004년부터 중의원 의장 접견실에 장식되어 있는 와타누키의 초상화 작가가 작품 유사(표절) 문제가 거론된 와다 요시히코였기 때문에 파문을 불렀다.
* 저서에서 "말해야 할 것은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신조를 밝히고 있다. 와타누키는 이 신조를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경험을 예시하고 있다. 와타누키는 어떤 지역에서 그 지역의 유력자와 회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상대는 술에 취해 만취해 있었다. 그리고 만취한 기세로 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사를 "너"라고 불렀다. 와타누키는 "너라고 부르는 것은 좋지 않다. 친한 사이에도 예의가 있다"고 주의했다. 나중에 그 인물로부터 와타누키에게 사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와타누키도 만취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소리를 높였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평소에는 상냥한 와타누키 씨가 이렇게까지 화낸 것에 놀랐다"라고 말을 들었다고 한다. 또한 와타누키는 이 에피소드에 덧붙여 "술은 마셔도 술에 맡기지 마라", "일본인은 술을 마시면 제멋대로 되기 쉽다", "일본은 술 취한 사람에게 너무 관대하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려면 상당한 절도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 아버지 와타누키 사민은 아와지섬의 유력자로 효고현 의회 의원을 지낸 미나미 카고로의 친자이며, 그 외가인 미나미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후예"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민푸는 구스노키 씨와 관련된 사람들에 의한 친목회인 "구스노키 동족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 아들 와타누키 쇼스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토나미 운수의 사장을 거쳐 상호를 변경한 토나미 홀딩스의 사장도 역임하고, 이나미 하치만궁의 궁사를 역임했다. 하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2022년 12월 23일 급성 심부전으로 63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 심층 뉴스 2017.9.18 경로의 날・독창 건강법 90세 정계 원로의 몸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