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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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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국군은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일본의 지원을 받아 창설된 군대이다. 초기에는 훈련 부족과 일본군의 통제, 낮은 충성심 등으로 인해 전투력이 낮았으나, 일본의 지원을 통해 규모가 확대되었다. 만주국군은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 토벌과 소련과의 국경 분쟁에 참여했으며, 태평양 전쟁 말기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해산되었다. 만주국군은 일본군과 유사한 계급 체계를 사용했으며, 군복과 무기 또한 일본군과 유사하게 개편되었다. 만주국군 출신자들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기여했으나,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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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명칭만주국군
원어 명칭滿洲國軍 (Mǎnzhōuguó jūn)
창설1932년
해산1945년
소속만주국
군종육군, 해군
규모110,044명
지휘 체계만주국
관동군
기 및 휘장
만주국 군기
만주국 군기
만주국 오색별
오색별
지휘관
최고 사령관강덕제
국방대신목록 참조
주요 지휘관아이신교로 시치아
장하이펑
장징후이
위즈산
조직
하위 부대금위대
강상군
비행대
흥안군
간도특설대
참전
전투제2차 중일 전쟁
만주국 치안전
열하 작전
열하 전투
소련-일본 국경 분쟁
하르하묘 사건
오라호도가 사건
타우란 사건
건차자도 사건
할힌골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소련-일본 전쟁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병역 및 규모
징병제20세에서 23세의 남성, 3년 복무
규모 (1933년)111,000명
규모 (1945년)170,000–220,000명
계급
계급 체계상장
중장
소장
상교
중교
소교
상위
중위
소위

2. 역사

1932년 3월 만주국 건국 이후 만주국군은 동북군의 일부였던 장쉐량 휘하의 6만 명 규모 부대 등 여러 부대를 모태로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동북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를 사용했으며,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비정규군과 아편 중독자가 많아 전투 능력과 충성도가 낮았다. 1932년 8월에는 만주군 2천 명이 항일 부대에 투항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6]

관동군은 창립 당시부터 만주국군을 조종하였고, 군대의 이동, 훈련, 장비 교체, 인사 이동 등 주요 결정은 관동군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933년 2월에는 만주국 황제 푸이와 고위 관리들을 호위하는 별도 군대인 금위대가 창설되었다. 1934년에는 만주국 정부가 인정하는 학교 졸업자만 만주군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법이 제정되었다.

2. 1. 만주국군 창설 이전의 상황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32년 2월 18일 괴뢰 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일본은 현지 주민 통제를 위한 군대 창설에 착수했다.[16] 만주국의 무장세력은 1932년 4월 15일 군대 및 해군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창설되어 새 국가의 질서 유지를 담당하게 되었다.[16]

만주국군은 동북군의 일부였던 장쉐량의 6만 명 규모의 부대 등 여러 부대를 모태로 삼아 창립되었다.[16] 초기에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비정규군이 많았고 아편 중독자도 있어 전투 능력은 높지 못했다. 충성도 또한 낮아 1932년 8월에는 만주군 2천 명이 항일 부대에 투항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6]

만주군은 창립 당시부터 일본인이 고문을 맡아 조종하였고, 군대의 이동, 연습, 장비 교체, 인사 이동과 같은 주요 결정에 관동군의 승인을 받는 지휘체계였다.

2. 2. 창설과 초기 활동 (1932년 ~ 1937년)

1932년 3월 만주국 건국 이후, 만주국군은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 출신 6만 명 규모의 부대를 포함한 여러 부대를 모태로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동북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를 사용했으며, 훈련 부족과 아편 중독자 문제 등으로 전투 능력과 충성도가 낮았다.[16]

관동군은 창립 당시부터 만주국군을 조종했으며, 군대의 이동, 훈련, 장비 교체, 인사 이동 등 주요 결정은 관동군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932년 4월 15일, 육군 및 해군 법에 의해 만주국의 국군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봉천군벌 군대에 일본군에서 파견된 만주국군 군사고문을 배치한 정도였다.[27]

1933년 2월에는 만주국 황제 푸이와 고위 관리들을 호위하는 별도 군대인 금위대가 창설되었다.

1934년에는 만주국 정부가 인정하는 학교 졸업자만 만주군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장쉐량 부대 출신 장교들을 제거하고 군벌주의 전통을 없애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16]

만주국군이 참여한 주요 초기 작전은 다음과 같다:

작전명기간내용결과
반길림군 토벌1932년 3월~6월일본군과 만주국군 부대(7,000명)가 길림 지역 2만 명의 국민당군 소탕국민당군 북쪽으로 밀려남, 송화강 확보[4]
제1차 동변도 청소 작전1932년 5월~6월만주국 지휘관 반란으로 일본 영사관 포위, 일본 경찰과 봉천경비군(4,000명) 파견반란군 후퇴, 만주국군 상당한 손실[4]
마찬산 토벌1932년 4월~7월마찬산(馬占山) 본부 공격, 만주국군 5,000명과 흑룡강 경비군 분견대 참여전투 부진으로 게릴라 탈출[4]
리해경 토벌1932년 5월흑룡강 남부 1만 명 반란군 공격, 만주국군 6,000명 참여반란군 성공적 격퇴[4]
제1차 풍장해 토벌1932년 6월길림경비군 부대와 게릴라 간 충돌, 만주국군 1,600명 참여만주국군 150명 사망, 게릴라 1,000명 사살 주장[4]
제2차 풍장해 토벌1932년 6월~7월반일투쟁자 소탕, 만주국군 7,000명, 일본군 지원1만 5천 명 반란군 격퇴[4]
몽골 반란군 토벌 작전1932년 8월몽골 반란군 사도 철도 공격, 소도시 점령, 만주국군 소규모 부대 파견몽골군 후퇴[4]
제3차 풍장해 토벌1932년 9월길림경비군 7,000명, 1만 명 반란군 공격대부분 반란군 탈출[4]
수병위 토벌 (마저우리 사건)1932년 9월~12월수병문(蘇炳文) 지휘 부대 반란, 만주국군 4,500명 진압 참여수병문, 소련 영토로 후퇴[4]
제2차 동변도 토벌1932년 10월봉천경비군, 게릴라 활동 지역 정리게릴라 270명 사살, 1,000명 포로[4]
리해경 토벌1932년 10월3,000명 반란군, 흑룡강 남부 공격 시도반란군, 열하성으로 후퇴[4]
기풍룡 지구 토벌1932년 11월만주국군 5,000명, 기풍룡 지역 반란군 소탕- [4]
제3차 동변도 토벌1932년 11월~12월잔존 반란군 제거, 만주국군 5,000명 참여반란군 1,800명 체포[4]
길림성 토벌1933년 10월~11월길림성 대규모 작전, 만주국군 3만 5천 명 참여여러 저명한 반일 지도자 사망[4]



1934년 러허 성 침공에는 장해팽(張海鵬) 장군 지휘 아래 약 42,000명의 만주국 육군 부대가 일본 관동군을 지원했다.[7]

2. 3. 중일전쟁과 국경 분쟁 (1937년 ~ 1945년)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군 부대가 만주국을 공격했고, 만주국군은 부분적으로 동원되었다. 여러 부대가 국경 지역에 배치되어 8월 내내 국민당군과 여러 차례 충돌했으며, 대부분 만주국군이 패배했다. 일본군 미사키 대령이 지휘를 맡으면서 상황이 다소 호전되었지만, 만주국군은 전사 60명, 행방불명 143명의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8]

만주국군은 소련-일본 국경 분쟁 기간 동안 소련과의 전투에도 참여했다. 1938년 여름 하산호 전투에서는 주로 예비대로 사용되었고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일부 연대가 전투 중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도 있다. 1939년 5월 몽골 인민군 기병과 만주국군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 양측 증원군 투입으로 전투가 확대되어 4개월간의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과 만주국이 패배했다.

약 18,000명의 만주국군이 할힌골 전투에 참여했는데, 주로 제7, 제8기병연대의 기병들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예비대로 배치되었고, 7월에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이 부대들은 할힌골 강으로 진격하는 관동군의 좌익에 배치되었다.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제1기병연대는 8월 북부 지역에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만주국 부대의 전반적인 성과는 좋지 않았지만, 관동군은 인력 부족으로 이들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분쟁 후 일본은 만주국 육군이 제대로 활약했다고 판단하고 규모를 확장할 이유를 발견했다.[7]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국군은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와 싸웠다. 당시 뉴스 보도는 만주국군의 성공적인 토벌 작전과 모병 광고를 계속 보도했는데, 이는 만주국군에 대한 유일한 공개 정보였다.[9]

만주국군 연대 부관으로 복무하던 박정희

2. 4. 태평양 전쟁과 만주국 멸망 (1941년 ~ 1945년)

1941년 태평양 전쟁 (대동아 전쟁) 발발 후, 관동군은 남쪽으로 속속 철수하면서 약화되었다. 그와 반대로 만주국군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1944년에는 철도 경호대가 편입되어 철도경호군으로 개칭되었다.[54]

1945년 4월, 군사부 고문에 의해 몽골군 이외의 기병대를 보병으로 개편하고, 31개의 공병대와 17개의 자동차대를 신설하며, 기관총·대포 등의 중화기를 관동군에 인계하고, 통신권을 박탈하는 등의 개혁안이 제출되었는데, 이는 만주국군을 본격적으로 관동군의 보조 전력으로 위치짓는 것이었다. 6월에는 군사부 장관 형사렴으로부터 각 군관구를 관동군 각 方面軍의 지휘하에 두는 명령이 내려왔다.[54] 해산 직전 만주국군의 총병력은 「만주국 육군 지도 요강」의 6만 명을 2배 이상 초과하는 15만 명에 달했다.[54]

1945년 8월 9일,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파기한 소련군이 대일 참전하자, 만주국군도 관동군과 함께 만주국의 방위에 종사하게 되었으나, 사기가 저하되어 탈영과 반란이 잇따랐다. 제4군관구는 7월에 장병을 일본 측의 지휘 아래 두고, 4,000명이 하얼빈에서 전차호를 구축하고 있었으나, 8월 15일의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에 따라 사령관 이문룡(李文竜)을 비롯한 장병들이 자발적으로 무장 해제하고 소련군에 투항하였다. 제10군관구는 흥안령으로 이동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지휘관인 과문림(郭文林) 중장과 참모들이 협의하여 8월 10일 신니하(新泥河)에서 소련군에 투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11일 아침, 부대에 있던 일본군 장병과 군속들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발포해 왔기 때문에, 반격하여 사살하였다. 제10군관구는 12일 오전 10시에 소련군에 투항하였다.[54] 강상군(江上軍)은 강상군 사령부가 긴급 회의를 하는 사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 장병을 살해하고, 8월 16일에 “동북국민제1군”으로 개칭하여 해산하였다.[54] 친일파로 여겨졌던 흥안군관학교 학생대도 일본계 군관을 살해하고 탈출하였다.

소련의 대일 참전 시점에서 만주국군은 사실상 해체 상태였다. 8월 11일에 만주국 정부가 신경(新京)에서 통화로 이동하였으므로, 군사부 차장 마이주키치(真井鶴吉) 중장을 총사령관으로 한 전선지휘소가 잔존 부대를 이끌고 기밀문서의 소각과 신경 남동부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14일 밤에 전선지휘소도 통화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다음 날 15일 정오에 중대한 방송이 있으므로 대기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신경에 남았다. 그날 밤, 근위병인 금위대 중에서 초명원(樵銘遠)이 이끄는 부대가 일본군 장교를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초명원이 이끄는 부대는 신경을 탈출한 후, 16일에 신경으로 돌아와 “장춘경비사령부”를 자칭하며 무단으로 포고를 발표하여 치안 유지를 실시하였다.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 이후에는 신경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일본군과 만주국군 사이에 총격전이 발발하였고, 병사들 중에는 휘장을 떼어내거나 군복을 벗어 던지는 자도 있었다.[54]

1945년 8월 18일(일본의 항복 3일 후)에 푸이 황제가 퇴위를 선언하고 만주국이 해체됨에 따라, 만주국군도 같은 달 20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만주국군 요인들의 대부분은 19일에 신경에 도착한 소련군 공수부대의 포로가 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에 인도되어 무순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다. 구성원들은 소련 철수 후 국공내전이 발생하자, 많은 수가 인민해방군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국민당군에도 편입되었다.

3. 조직

만주국군은 1932년 4월 15일 군대 및 해군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창설되어 국가 질서 유지를 담당했다. 푸이는 육해공군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초기 병력은 장쉐량 휘하의 중국 국민당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훈련 부족, 낮은 충성심, 아편 중독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어 신뢰도가 낮았다.[16]

일본은 만주국군을 신뢰할 수 있는 병력으로 만들기 위해 1934년 새로운 법률을 제정, 만주국 정부에서 훈련받은 사람만 장교로 복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심양과 신경에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군 간부를 양성했다.[13] 1937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병력을 확충했다.[1][21]

만주국 전쟁성 산하에는 군사고문부를 두어 일본군 고문관을 배치, 만주국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14] 헌법에 해당하는 「정부조직법」과 「육해군조례」에 따라 만주국 집정(이후 만주국 황제) 푸이 통솔 아래 육군 및 해군이 조직되었다. 제정 실시 이후에는 「조직법」에 따라 황제 통솔 아래 육군, 해군, 비행대(공군)가 조직되었다.[28][27][29]

3. 1. 초기 조직 (1932년)

1932년 만주국군의 초기 조직은 다음과 같다.[44]

부대명병력담당 구역비고
군정부130명중앙 군정 담당-
도료경비군16,200명통료현, 봉평현, 창도현 등
(신경 서쪽, 북쪽은 치치하얼 남쪽, 남쪽은 봉천 북쪽까지)
구 장해붕군
봉천성 경비군17,153명도료경비사령관 담당 구역 이외의 봉천성-
길림성 경비군44,692명길림성-
흑룡강성 경비군43,485명흑룡강성 (진래현 및 경성현 서남부 제외)-
흥안성 경비군12,921명흥안성1932년 5월, 내몽고 자치군으로부터 개편 및 설치
강방함대392명흑룡강, 우수리강 등 국경 하천부 및 보해 연안-



위 부대들의 병력 수는 1932년 9월 당시 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 다다 준 소장이 육군성에 보낸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45]

만주국군에는 창설 초기부터 일본인들이 고문, 교관으로 소속되었다.[45] 군사 고문 외에도 부대장 등에 일본군에서 전직해 온 일계 군관이 배치되는 경우가 있었다.

3. 2. 1934년 개편

1934년, 만주국군은 5개의 지방군으로 재편되었다. 이와 함께 동흥안령경비군, 서흥안령경비군, 북흥안령경비군, 남흥안령경비군, 서안경비군, 제1흥경기병여단, 강방함대 등 여러 독립 부대들이 창설되었다.[7] 강방함대는 1932년 2월에 발족되었으며, 육군 군벌이 소유했던 5척의 군함(소형 포함·경비정)을 편성한 것이었다. 1932년 4월 15일 공포된 「육해군조례」에 따라 만주국 해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34년 11월 강방함대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만주국의 강방함대가 발족했다.[46] 1939년 2월에는 육해군조례 개정에 따라 강상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육군의 일부가 되었다.[47]

3. 3. 1940년대

소련 정보 당국의 보고에 따르면, 1940년대 만주국군의 병력은 2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 병력은 제1사단, 제1경비여단, 제1기병사단, 10개의 보병여단, 6개의 기병여단, 21개의 혼성여단 등으로 구성되었다.[7]

3. 4. 1945년 (소련 침공 직전)

1945년 당시 만주국군은 보병사단 8개, 기병사단 7개, 보병 및 기병여단 14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8] 총병력은 출처에 따라 17만 명[18]에서 22만 명[19]으로 추정된다.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직전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보병사단 8개
  • 기병사단 7개
  • 보병 및 기병여단 14개


1945년 8월, 소련군의 침공 당시 만주국군은 유럽 전선에서 온 76개 사단, 4,500대의 전차를 포함한 대규모 소련군에 비해 전력이 크게 열세였다.[10] 몇몇 노후한 경전차와 장갑차로 구성된 기갑 부대는 소련군 전차 부대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주력은 기병이었다.[10]

소련군 침공 초기, 소규모 만주국 기병 부대가 교전했으나, 후룬베이얼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수비대는 항복했다.[10] 8월 11일, 후친(富錦)이 함락되고 만주국군은 남동쪽으로 후퇴했다.[10] 8월 16일, 만주국 제7보병여단은 자무쓰에서 항복했다.[10] 전선 우익의 만주국 기병은 내몽골에서 소련군 및 몽골군과 교전했고, 8월 14일 캘건과 돌로노르로 가는 도중 소규모 만주국 기병 부대를 격파했다.[10]

신징(신경)에서는 8월 13일부터 19일까지 반란이 일어났고, 일부 만주국 부대는 일본군 장교들을 살해했다.[10] 소수의 만주국 정규군과 보조군만이 일본군과 함께 싸웠고, 대부분의 부대는 흩어지거나 소련군에 투항했다.[10]

갈등 중 소련군은 30,700명의 비일본군 병사를 사로잡고 약 10,000명을 사살했다. 여기에는 중국인 16,100명, 몽골인 3,600명, 만주족 700명, 한국인 10,300명이 포함되었다.[11] 한국인 대부분은 관동군 보조군이었고, 나머지는 만주국군 병사였다.[11] 대한민국 육군 전 참모총장 백선엽과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도 만주국군에서 복무했다.[11]

3. 5. 부대 구성

1932년 3월, 육군은 동북군 병력이었던 장쉐량의 군대를 모태로 창설되어 만주국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7] 1933년 2월 23일부터 3월 28일까지 열하성을 침공한 만리장성 전투에서 장해팽(張海鵬) 장군의 지휘 아래 약 42,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만주국 육군의 여러 부대가 일본 관동군을 지원하였다. 서방 언론은 일부 만주국 부대가 상당히 선전하여 한 부대가 중국군 5,000명을 사로잡았다고 보도했다.[7]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군 부대가 만주국을 공격했고, 만주국 육군은 부분적으로 동원되었다. 여러 부대가 국경 지역에 배치되어 8월 내내 국민당군과 여러 차례 충돌했으나, 대부분 만주국군이 패배했다. 이후 일본 대령 미사키(Misaki)가 지휘를 맡으면서 상황이 다소 호전되었지만, 만주국 육군은 전사 60명, 행방불명 143명의 손실을 입었다.[8]

1938년 여름 하산호 전투에서 만주국 부대는 주로 예비대로 사용되었고,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는 약 18,000명의 만주국군이 참여했다. 주로 제7기병연대와 제8기병연대의 기병들이 예비대로 배치되었고, 7월에 전선에 투입되었다. 제1기병연대는 8월 북부 지역에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만주국 부대의 전반적인 성과는 좋지 않았지만, 관동군은 인력 부족으로 이들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분쟁 후 일본은 만주국 육군이 제대로 활약했다고 판단하고 규모를 확장했다.[7]

강방함대(해군)는 1932년 4월 15일에 창설되었고, 1939년 11월에 강상군(江上軍)으로 개편되었다. 육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었다.[46][47] 실질적인 해상 병력은 해변경찰대가 담당했으며, 독자적인 항공대도 존재했다. 주력 함선은 「해위」급으로, 일본 해군의 구축함 「가시」가 인계되었다.

금위대는 1933년에 창설되어 만주국 황제 푸이와 고위 관료 보호를 담당하였다. 창춘 중심부의 황제가 거주하는 궁 인근에 본부가 있었다.

비행대1937년 2월 하얼빈에서 관동군이 선발한 30명을 훈련시켜 창설하였다.

3. 6. 특별 부대

만주국 황궁근위대는 푸이 황제 경호 및 의장 행사에서 의장대 역할을 맡았다.[20] 1933년 3월 열하 침공에 참여했던 제4기병여단을 정식 명칭으로 하는 독립기병대도 있었다. 봉천성에도 특별 경비대가 창설되었고, 결국 모든 성에서 각각 하나씩 편성되었다.

1930년대 초 일본은 만주국에 거주하는 몽골족을 중심으로 "몽골 독립군"을 편성했다. 초기에는 주로 산적과 기타 불량배들이 모병되었으며, 일본 고문관들이 이 새로운 군대를 완전히 통제했다. 초기 몽골 독립군은 총 6,000명으로, 각 2,000명씩 3개 군으로 나뉘었다. 이 군대는 창설된 후 주로 기병 부대로서 만주국군의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9개 기병 연대로 구성되어 만주국군과는 별도로 산적 토벌전을 벌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1933년 열하 침공에도 참여했다.[20]

1937년, 한국계 사업가가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특별한 한국인 부대 (간도특설대)를 편성했다. 일본군은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를 좋게 받아들였고, 한국인들이 더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1938년 12월에 부대원 충원이 완료되었고, 1939년 첫 번째 신병들이 훈련소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규모가 작아 본부, 보병 중대, 박격포 중대만 있었지만, 1940년에 보병 중대 하나가 추가되면서 확장되었다. 이 부대는 공산당 게릴라와 산적들과의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며, 일본군으로부터 무자비하고 효율적인 부대로 평가받았다. 잔혹함으로 악명 높았지만, 강한 투지 덕분에 일본 상관들의 존경을 받은 몇 안 되는 괴뢰 부대 중 하나였다.[20]

러시아 내전 이후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이 만주에 정착했고, 일본은 이 반소련 세력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초 만주국군에 대한 징집이 시작되어 러시아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었다.[21]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의 러시아 파시스트당과 협력하여 이 부대를 편성했으며, 1933년 백계 러시아인의 반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들을 유용하게 여겨 계속 고용했다. 1936년 이들은 아사노 다카시(Asano Takashi) 대령(이 부대를 조직한 일본 고문)의 이름을 딴 아사노 분견대 또는 아사노 여단으로 통합되었다. 이 여단은 공식적으로 만주국군의 일부였지만 일본 장교들이 지휘했다.[8][22] 1938년 할힌골 전투에 참전하여 거의 전멸했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또 다른 부대가 편성되었고, 1945년까지 코사크를 포함하여 약 4,000명에 달했다. 만주 침공 당시 소련군과 싸웠으며, 소련군 포로가 된 이들의 운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25]

4. 계급

만주국 군대는 계급을 나타내는 견장을 착용했다. 초기에는 대일본제국 육군과 같은 제도를 사용했으나, 1937년에 견장의 색깔이 갈색으로 변경되었다.[15]

만주국에서는 장교에 해당하는 군사 계급을 “장(將)”, “교(校)”, “위(尉)”의 3등으로 나누고, 각각을 다시 3급으로 나누어 3등 9급으로 구분하였다.


  • 장관(將官): 일본군의 장관에 해당
  • 상장(上將)
  • 중장(中將)
  • 소장(少將)
  • 교관(校官): 일본군의 사관(佐官)에 해당
  • 상교(上校)
  • 중교(中校)
  • 소교(少校)
  • 위관(尉官): 일본군의 위관에 해당
  • 상위(上尉)
  • 중위(中尉)
  • 소위(少尉)


견장은 「육군복제」(대동 원년 12월 28일 군령 제9호)[37]의 「견장양식표」에서 제정되었다. 당초에는 바탕이 휘장융비융(徽章絨緋絨)이었고, 줄무늬는 은색 바탕에 금색 선, 별장은 금속 별장(병사는 황색 융별장)이었지만, 1937년(강덕 4년)의 육군복제 중개정의 건(강덕 4년 5월 12일 칙령 제85호)[38]에서 바탕이 진연색융(중국어 표기는 심자홍색)으로 개정되었다. 대원수인 만주국 황제의 견장은 「육군식 및 해군식어복제식」(강덕 원년 12월 24일 궁실령 제15호)[39]에서 금색 금속제 난화문장 및 금색 금속제 별장 각 3개를 붙이는(통상 예장의 경우), 천황의 대원수 견장(금색 국화 문장 및 금색 별장 각 3개)과 동일한 방식으로 제정되었다.

구분황제장교
장성영관위관
계급계급
대원수
상장
상장
중장
소장
대령
중령
소령
대위
중위
소위



구분부사관
준사관하사관
계급준위상사중사하사
상등병
일등병
이등병


5. 군사학교

육군군관학교1939년 신징(현재의 창춘)에 설립된 4년제 군사학교로, 흔히 신경군관학교로 불렸다. 만주계와 일본계 학생들을 육군 장교로 양성했으며, 일본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던 조선과 타이완 출신도 포함되었다. 제1기 입학생 가운데 일본계는 172명이었다.[13]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워 조선인 학생도 많았다.

만주국은 군의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의관학교도 설립했다. 일본의 군의관학교와 달리 중학교 졸업자를 입학시켜 4년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키는 방식이었다.[13]

6. 군비

초기 만주국군은 장쉐량 군대로부터 노획한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물려받아 사용했기 때문에 유지 보수 및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1932년에는 26종류의 소총과 20종류가 넘는 권총이 사용되었고, 1933년에는 77,268정의 소총, 441정의 경기관총, 329정의 중기관총이 운용되었다.[12]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5×50mmSR Arisaka 38식 소총과 같은 구경의 3식 중기관총 및 11식 경기관총을 중심으로 무기를 통일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었다.

1935년 일본에서 50,000정의 38식 카빈 소총을 수입하면서 전환이 시작되었다.[12] 이후 2~3년 동안 일본제 소총과 기관총이 점차 중국제를 대체하여 보병에게 지급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 과정이 거의 완료되어 만주국군의 무기는 기본적으로 일본군과 거의 동일해졌다.[12] 그러나 후방 방어 부대와 민병대에는 노획한 중국제 소총과 구형 일본제 소총이 지급되었다.[12]

봉천과 심양의 군수 공장은 소총, 기관총, 포병 및 수리를 담당하도록 확장되었다. 탄약과 소화기는 만주국의 민간 공장에서 주문했다.[12]

초기 중화기 역시 중국에서 온 것이었다. 국민당군의 야포 부족으로 장쉐량 군대에서 압수한 무기의 대부분은 경보병포와 산포였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은 독일제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 산포였다. 1933년까지 사용 중인 포는 보병포 281문, 산포 88문, 야포 70문이었다. 일본은 장비 표준화를 위해 만주국군에 자체 야포를 지급했다. 소련 침공의 잠재적 위협 때문에 많은 대공포도 사용되었다.[12]

만주국군이 사용한 주요 화기는 다음과 같다.


  • 38식 75mm 야포
  • 41식 75mm 산포
  • 크루프 산포
  • 중국제 7cm 구경 박격포
  • 중국제 75mm 야포
  • 수류탄(막대형)
  • 10식 수류탄 발사기
  • 88식 75mm 대공포


만주국군은 소규모의 기갑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요 전차는 다음과 같다.

  • 르노 NC-27 경전차 8대
  • 카든-로이드 Mk VI 경전차 20대
  • 르노 FT 경전차 (소수)
  • 94식 경전차 10대 (1940년대 일본군으로부터 대여)


또한, 다음과 같은 장갑차를 운용했다.

  • 92식 중장갑차 30대 (주로 육군사관학교 기갑부대에서 사용)
  • 영국 및 프랑스제 장갑차 (일부)

7. 군복

만주국군의 초기 군복은 현지 저항 세력 및 산적들의 복장과 구분이 어려웠다. 장쉐량의 옛 부하들은 국민당 군복을 계속 착용했고, 노란색 완장으로만 구분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양측 병사들이 완장을 바꿔 착용할 수 있어 혼란이 가중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는 1934년 일본군 군복과 유사한 스타일의 새로운 군복을 채택하고 옷깃 휘장에 색상 코드 체계(군경: 검정, 보병: 빨강, 기병: 녹색, 포병: 노랑, 공병: 갈색, 수송대: 파랑)를 사용하면서 해결되었다. 낡은 군복 교체는 193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으며, 수도와 대도시에 주둔한 병사들이 외곽 도시 병사들보다 먼저 새 군복을 받았다. 10년 동안 일본식 군복은 점차 독특한 만주국식 군복으로 대체되었다.[15]

8. 만주국군에 대한 평가와 논란

만주국군은 만주족, 한족, 몽골족, 조선족, 러시아인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본의 괴뢰 군대라는 특성 때문에 다양한 평가와 논란이 존재한다.

실질적인 지휘권은 일본 관동군이 행사했으며, 군사 고문과 부대장 등에는 일본군 출신 인물들이 배치되었다.[55] 1940년부터는 모든 호령이 일본어로 바뀌었고, 명령과 지시 또한 일본어로 하는 것이 장려되었다.[55]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도 많아, 탈영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1936년 금창구 사건, 노몬한 사건에서의 반란, 1945년 소련군 침공 시의 대규모 탈영 및 투항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54] 만주국군 내에서는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인 '동삼성주권영토회복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했다.[54]

만주국군은 한국 현대사와도 연관이 깊다. 박정희, 백선엽, 정일권 등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은 해방 이후 한국군의 핵심 인물이 되거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49][50][51][52][53] 이러한 배경 때문에 만주국군 출신 인사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이들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56]

참조

[1] 서적 Holland (2008)
[2] 서적 Jowett (2004)
[3] 서적 Jowett (2004)
[4] 서적 Jowett (2004)
[5] 서적 Jowett (2004)
[6] 서적 Birnbaum (2015)
[7] 서적 Jowett (2004)
[8] 서적 Jowett (2004)
[9] 간행물 Manchuria: Japan's Supply Base
[10] 서적 Jowett (2004)
[11] 서적 Paik (1992)
[12] 서적 Jowett (2004)
[13] 서적 Jowett (2004)
[14] 서적 Jowett (2004)
[15] 서적 Jowett (2004)
[16] 서적 Jowett (2004)
[17] 서적 Jowett (2004)
[18] 서적 Glantz (2003)
[19] 서적 Jowett (2004)
[20] 서적 Jowett (2004)
[21] 서적 Harmsen (2018)
[22] 서적 Oberlander (1966)
[23] 서적 Smirnov (2015)
[24] 서적 Smirnov (2015)
[25] 서적 Smirnov (2015)
[26] 논문 Caught between states: Urjin Garmaev and the conflicting loyalties of trans-border Buryats
[27] 간행물 満洲国政府公報日譯 1932-04-15
[28] 간행물 満洲国政府公報邦譯 1932-04-01
[29] 간행물 政府公報日譯 1934-03-01
[30] 간행물 満洲国政府公報日譯 1932-09-16
[31] 간행물 政府公報日譯 1934-06-08
[32] 기타
[33] 간행물 政府公報 1939-02-02
[34] 기타
[35] 간행물 政府公報 1941-10-22
[36] 간행물 政府公報日譯 1934-11-15
[37] 간행물 満洲国政府公報日譯 1932-12-28
[38] 간행물 政府公報 1937-05-12
[39] 간행물 政府公報日譯 1934-12-24
[40] 간행물 政府公報日譯 1934-04-19
[41] 기타
[42] 간행물 政府公報 1937-03-18
[43] 기타
[44] 간행물 満洲国政府公報日譯 1932-04-15
[45] 웹사이트 満洲国軍事顧問並軍事教官一覧表外の件 {{아시아역사자료센터|C0100301[...]
[46] 간행물 政府公報日譯 1934-11-24
[47] 간행물 政府公報 1939-02-17
[48] 간행물 政府公報日譯 1934-07-26
[49] 뉴스 血書 軍官志願 半島の若き訓導から http://image.blog.li[...] 満洲新聞 1939-03-31
[50] 뉴스 일 육사 졸업 뒤 항일연합군 공격“임정 입장서 박정희는 적군 장교”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친일 행적’ 신문 공개 http://www.hani.co.k[...] ハンギョレ 2009-11-05
[51] 뉴스 日本陸軍士官学校卒業後 抗日連合軍を攻撃 http://blog.livedoor[...] ハンギョレサランバン 2009-11-05
[52] 뉴스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때 “목숨바쳐 충성” 혈서 사실로 민족문제연구소, 당시 신문 공개 http://www.hani.co.k[...] ハンギョレ 2009-11-06
[53] 뉴스 朴正熙 満州軍官学校 志願の時 "命捧げて忠誠" 血書は事実 http://blog.livedoor[...] ハンギョレサランバン 2009-11-06
[54] 서적 偽満州国軍の潰滅 不二出版 2014
[55] 간행물 写真週報 情報局 1941-08-06
[56] 기타 満洲国指導方針要綱 https://ndlsearch.nd[...] 1933-08-08
[57] 기타
[5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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