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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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마타번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번으로, 현재의 군마현에 위치했다. 오다와라 정벌 이후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영지가 주어졌지만, 그의 장남인 사나다 노부유키가 실질적인 지배를 맡아 누마타번의 기초를 다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선 노부유키는 다이묘가 되었고, 이후 사나다 가문은 마쓰시로 번으로 옮겨가면서 누마타번은 다른 가문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혼다 가문, 구로다 가문을 거쳐 도키 가문이 마지막까지 누마타를 통치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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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마타번 | |
|---|---|
| 개요 | |
| 국명 | 누마타 번 |
| 로마자 표기 | Numata-han |
| 역사 | |
| 성립 | 1656년 |
| 폐지 | 1871년 |
| 이전 | event_pre: date_pre: |
| 이후 | event_post: date_post: |
| 정치 | |
| 정치 체제 | 다이묘 |
| 수도 | |
| 수도 | 누마타성 |
| 행정 구역 | |
| 오늘날의 위치 | 군마현 일부 |
| 통계 | |
| 기타 | |
| 존속 기간 | 에도 시대 |
2. 역사
오다와라 정벌 후, 사나다 마사유키는 누마타령 2만 7천 석[1]을 반환받았으나, 시나노 우에다성을 거성으로 삼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적남인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당시 노부유키는 사나다 가문의 당주(마사유키)의 후계자였으며, 공적으로는 누마타령도 마사유키 영지의 일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것이 후대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1]
노부유키는 영내 검지를 일찍부터 실시하여 영지 지배 체제를 굳혔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동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군을 상대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으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했기 때문에 전후 기슈 구도야마에 칩거했다. 대신 노부유키에게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구령에 더해 3만 석이 가증되어 9만 5천 석[1]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우에다번 성립).[1]
겐나 2년(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옮겨 누마타령은 노부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었다(이 시점에서도 정식 입번은 아니었다).[1] 노부유키는 겐나 8년(1622년)에 시나노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지되었지만, 아직 막부에 공인된 번은 아니었다.[1]
노부요시는 간에이 11년(1634년) 11월 28일,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후계는 노부요시의 아들 쿠마노스케가 이었으나, 간에이 15년(1638년) 11월 6일, 7세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7월 25일, 누마타령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이자 노부요시의 동생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 노부토시에게 5천 석이 분지되었다. 노부마사는 영내 검지 등을 실시하여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메이레키 2년(1656년)에 노부유키가 은거함에 따라 마쓰시로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고, 대신 누마타령의 모든 것을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1]
메이레키 4년(1658년) 2월,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6남이자 2살 노부후사(후의 유키미치)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발생했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는데,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쓰시로번에서 독립했다.[1]
그러나 노부토시는 간분 2년(1662년)에 누마타령 검지를 실시, 실제 3만 석(일설에 의하면 6만 석)의 소령을 14만 4천 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하였다. 이 때문에 영민들은 증세에 시달렸다. 이러한 폭거는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엔포 8년(1680년), 노부토시는 막부 명령으로 에도 료고쿠바시 수리를 위해 용재를 누마타번에서 제공할 것을 청부받았으나, 이미 피폐해진 영민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용재 납기를 맞추지 못한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1]
누마타는 폐번, 막부령이 되었다가, 겐로쿠 16년(1703년) 1월 11일, 시모사 후나토번에서 2만 석으로 혼다 마사나가가 들어와 다시 누마타번이 입번하였다. 마사나가는 2만 석을 더 가증받아 4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혼다 마사노리 시대인 교호 15년(1730년),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이봉되었다. 교호 17년(1732년) 3월 1일, 히타치 시모다테번에서 쿠로다 나오쿠니가 3만 석으로 들어왔다. 쿠로다 나오즈미 시대인 간포 2년(1742년) 7월 28일, 가즈사 구루리번으로 이봉되었다. 대신 로주였던 토키 요리토시가 스루가 다나카번에서 3만 5천 석으로 입부하였다. 도키 사다츠네 시대인 덴메이 원년(1781년) 12월, 연공 증세에 반대한 영민에 의해 미토리 소동이 발생, 사다츠네는 영민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해결했다.[1]
제11대 번주가 된 도키 요리유키는 간세이 개혁으로 유명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손자였으나, 막부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 게이오 3년(1867년) 4월 16일, 가독을 토키 요리토모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이듬해 보신 전쟁에서는 구와나번, 아이즈번과 인척 관계였음에도 신정부군의 누마타 진주를 허용, 신정부에 공순하여 미쿠니토우케 전투에서 아이즈군과 싸웠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20일, 요리토모는 판적봉환하여 번지사가 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누마타번은 폐번, 누마타현을 거쳐 군마현이 되었다. 도키 씨는 메이지 17년(1884년) 화족령에 의해 자작이 되었다.[1]
2. 1. 사나다 가문 시대 (16세기 말 ~ 17세기 말)
오다와라 정벌 후, 사나다 마사유키는 누마타령 2만 7천 석을 반환받았으나, 시나노 우에다성을 거점으로 삼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당시 노부유키는 사나다 가문의 후계자였고, 공식적으로 누마타령은 마사유키 영지의 일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하여 후대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1]노부유키는 영지에 대한 검지를 조기에 실시하여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아내로 맞아 동군에 가담,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 군에 맞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으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배하여 기슈 구도야마에 칩거했다. 대신 노부유키는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구령에 3만 석이 추가된 9만 5천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우에다번 성립).[1]
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거처를 옮기고 누마타령은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었다(이 시점에서도 정식 입번은 아니었다).[1] 1622년 노부유키는 시나노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할되었지만, 아직 막부의 공인을 받지는 못했다.[1]
노부요시는 1634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뒤를 노부요시의 아들 구마노스케가 이었으나, 1638년 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누마타령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이자 노부요시의 동생인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 노부토시에게 5천 석이 분지되었다. 노부마사는 영지 검지 등을 통해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1656년 노부유키의 은거로 마쓰시로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면서, 누마타령 전체를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1]
1658년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여섯째 아들인 2세 노부후사(후의 유키미치)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이었으나,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쓰시로번에서 독립했다.[1]
노부토시는 1662년 누마타령 검지를 실시하여 실제 3만 석(일설에는 6만 석)의 소령을 14만 4천 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하여 영민들이 증세에 시달렸다. 이러한 폭거는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1680년, 노부토시는 막부 명령으로 에도 료고쿠 다리 재건을 위해 누마타번에서 자재를 제공하는 것을 맡았으나, 이미 피폐해진 영민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자재 납기 지연의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1]
2. 1. 1. 누마타번의 성립
오다와라 정벌 후, 누마타령 2만 7천 석[1]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반환되지만, 마사유키는 시나노 우에다성을 거성으로 삼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적남인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이 시기의 노부유키는 사나다 가문의 당주(마사유키)의 후계자였으며, 공적으로는 누마타령도 마사유키의 영지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것이 후대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1]노부유키는 영내 검지를 일찍부터 실시하여, 영내 지배 체제를 굳혔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동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군을 상대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으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했기 때문에 전후에는 기슈 구도야마에 칩거하게 되었다. 대신 노부유키에게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구령에 더해 3만 석이 가증되어 9만 5천 석[1]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우에다번 성립).[1]
겐나 2년(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옮겨, 누마타령은 노부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게 되었다(이 시점에서도 정식 입번은 아니다).[1] 노부유키는 겐나 8년(1622년)에 시나노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지되지만, 아직 막부에 공인된 번은 아니었다.[1]
노부요시는 간에이 11년(1634년) 11월 28일,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후계는 노부요시의 아들 쿠마노스케가 이었으나, 간에이 15년(1638년) 11월 6일, 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7월 25일, 누마타령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이자 노부요시의 동생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 노부토시에게 5천 석이 분지되었다. 노부마사는 영내 검지 등을 실시하여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메이레키 2년(1656년)에 노부유키가 은거함에 따라, 마쓰시로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고, 대신 누마타령의 모든 것을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1]
메이레키 4년(1658년) 2월에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나오(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6남이자 2살배기 노부후사(후의 유키미치) 중 누구를 세울 것인가를 두고 후계자 다툼이 발생했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는데,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쓰시로번에서 독립하게 되었다.[1]
노부나오는 간분 2년(1662년)에 누마타령 검지를 실시하여 실고 3만 석(일설에 의하면 6만 석)의 소령을 14만 4천 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하였다. 이에 따라 영민들은 증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폭거에 관해서는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엔포 8년(1680년), 노부나오는 막부 명령에 의해 에도 료고쿠바시의 수리를 위해 용재를 누마타번에서 내줄 것을 청부받았으나, 이미 피폐해져 있던 영민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노부나오는 용재의 납기를 맞추지 못한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1]
누마타는 폐번, 막부령이 되었다가, 겐로쿠 16년(1703년) 1월 11일, 시모사 후나토번에서 2만 석으로 혼다 마사나가가 들어와 다시 누마타번이 입번하였다. 마사나가는 2만 석을 더 가증받아 4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혼다 마사노리 시대의 교호 15년(1730년), 스루가 타나카번으로 이봉되었다. 교호 17년(1732년) 3월 1일, 히타치 시모다테번에서 쿠로다 나오쿠니가 3만 석으로 들어왔다. 쿠로다 나오즈미 시대의 간포 2년(1742년) 7월 28일, 카즈사국 쿠루리번으로 이봉되었다. 대신 로쥬였던 토키 요리토시가 스루가 타나카번에서 3만 5천 석으로 입부하였다. 도키 사다츠네 시대의 덴메이 원년(1781년) 12월, 연공 증징에 반대한 영민에 의해 미토리 소동이 발생하였고, 사다츠네는 영민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해결되었다.[1]
제11대 번주가 된 도키 요리유키는 간세이 개혁으로 유명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손자였으나, 막부와는 별 관계가 없어, 게이오 3년(1867년) 4월 16일에 가독을 토키 요리오키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이듬해의 보신 전쟁에서는 쿠와나번이나 아이즈번과 인척 관계이면서도, 신정부군의 누마타 진주를 허용하고, 신정부에 공순하여 미쿠니토우케 전투에서 아이즈군과 싸웠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20일, 요리오키는 판적봉환하여 번지사가 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에서 누마타번은 폐번이 되고, 누마타현을 거쳐 군마현이 되었다. 도키씨는 메이지 17년(1884년)의 화족령에 의해 자작이 되었다.[1]
2. 1. 2. 사나다 가문의 통치와 개역
오다와라 정벌 후, 사나다 마사유키는 누마타령 2만 7천 석을 반환받았으나, 시나노 우에다성을 거점으로 삼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당시 노부유키는 사나다 가문의 후계자였고, 공식적으로 누마타령은 마사유키 영지의 일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하여 후대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노부유키는 영지에 대한 검지를 조기에 실시하여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아내로 맞아 동군에 가담,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 군에 맞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으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배하여 기슈 구도야마에 칩거했다. 대신 노부유키는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구령에 3만 석이 추가된 9만 5천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우에다번 성립).
겐나 2년(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거처를 옮기고 누마타령은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었다(이 시점에서도 정식 입번은 아니었다). 노부유키는 겐나 8년(1622년)에 시나노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할되었지만, 아직 막부의 공인을 받지는 못했다.
노부요시는 간에이 11년(1634년) 11월 28일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뒤를 노부요시의 아들 구마노스케가 이었으나, 간에이 15년(1638년) 11월 6일 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7월 25일, 누마타령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이자 노부요시의 동생인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 노부토시에게 5천 석이 분지되었다. 노부마사는 영지 검지 등을 통해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메이레키 2년(1656년) 노부유키의 은거로 마쓰시로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면서, 누마타령 전체를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
메이레키 4년(1658년) 2월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여섯째 아들인 2세 노부후사(후의 유키미치)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이었으나,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쓰시로번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노부토시는 간분 2년(1662년) 누마타령 검지를 실시하여 실제 3만 석(일설에는 6만 석)의 소령을 14만 4천 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하여 영민들이 증세에 시달렸다. 이러한 폭거는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엔포 8년(1680년), 노부토시는 막부 명령으로 에도 료고쿠 다리 재건을 위해 누마타번에서 자재를 제공하는 것을 맡았으나, 이미 피폐해진 영민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자재 납기 지연의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
2. 2. 혼다 가문, 구로다 가문 시대 (18세기 초 ~ 18세기 중)
겐로쿠 16년(1703년) 1월 11일, 혼다 마사나가가 시모사 후나토번에서 2만 석으로 누마타에 들어와 다시 누마타번이 설치되었다. 마사나가는 이후 2만 석을 더 받아 4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 후, 제3대 번주 혼다 마사노리 시대인 교호 15년(1730년)에 스루가 타나카번으로 이봉되었다.교호 17년(1732년) 3월 1일, 구로다 나오쿠니가 히타치 시모다테번에서 3만 석으로 누마타에 들어왔다. 하지만, 제2대 번주 구로다 나오즈미 시대인 간포 2년(1742년) 7월 28일에 가즈사 구루리번으로 이봉되었다.
2. 2. 1. 혼다 가문의 통치
오다와라 정벌 후, 누마타령 2만 7천 석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반환되었지만, 마사유키는 시나노 우에다성을 거점으로 삼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이 시기 노부유키는 사나다 가문의 당주(마사유키)의 후계자였으며, 공식적으로는 누마타령도 마사유키의 영지 일부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것이 후대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노부유키는 영내 검지를 일찍부터 실시하여 영내 지배 체제를 굳혔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동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 군을 상대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으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했기 때문에 전후 키슈 구도야마에 칩거하게 되었다. 대신 노부유키에게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구 영지에 더해 3만 석이 추가되어 9만 5천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우에다번 성립).
겐나 2년(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옮겨갔고, 누마타령은 노부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었다(이 시점에서도 정식 입번은 아니었다). 노부유키는 겐나 8년(1622년)에 시나노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할되었지만, 아직 막부에 공인된 번은 아니었다.
노부요시는 간에이 11년(1634년) 11월 28일,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후계는 노부요시의 아들 쿠마노스케가 이었으나, 그 역시 간에이 15년(1638년) 11월 6일, 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7월 25일, 누마타령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이자 노부요시의 동생인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 노부토시에게 5천 석이 분할되었다. 노부마사는 영내 검지 등을 실시하여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메이레키 2년(1656년)에 노부유키가 은거함에 따라 마쓰시로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고, 대신 누마타령의 모든 것을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
메이레키 4년(1658년) 2월에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나오(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6남이자 2살 노부후사(후의 유키미치) 중 어느 쪽을 후계자로 세울지를 두고 다툼이 발생했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는데,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쓰시로번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노부나오는 간분 2년(1662년)에 누마타령 검지를 실시하여 실제 3만 석(일설에 의하면 6만 석)의 소령을 14만 4천 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하였다. 이에 따라 영민들은 증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폭정에 가까운 행위는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엔포 8년(1680년), 노부나오는 막부 명령에 의해 에도 료고쿠바시 수리를 위해 용재를 누마타번으로부터 낼 것을 청부받았으나, 이미 피폐해져 있던 영민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노부나오는 용재 납기를 맞추지 못한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
누마타는 폐번, 막부령이 되었다가, 겐로쿠 16년(1703년) 1월 11일, 시모사 후나토번에서 2만 석으로 혼다 마사나가가 들어와 다시 누마타번이 입번하였다. 마사나가는 게다가 2만 석을 더 가증받아 4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 후, 제3대 번주 혼다 마사노리 시대의 교호 15년(1730년), 스루가 타나카번으로 이봉되었다.
2. 2. 2. 구로다 가문의 통치
오다와라 정벌 후, 누마타령 2만 7천 석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반환되지만, 마사유키는 시나노 우에다성을 거성으로 삼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적남인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이 시기의 노부유키는 사나다 가문의 당주(마사유키)의 후계자였으며, 공적으로는 누마타령도 마사유키령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후의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노부유키는 영내의 검지를 일찍부터 실시하여 영내의 지배 체제를 굳혔다.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동군에 속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속하여,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 군을 상대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지만,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전후에는 기슈 구도야마에 은거하게 되었다. 대신 노부유키에게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구령에 더해 3만 석이 가증되어 9만 5천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우에다번 성립).
겐나 2년(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옮겨, 누마타령은 노부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게 되었다(이 시점에서도 정식적인 입번은 아니다). 노부유키는 겐나 8년(1622년)에 시나노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옮겨졌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지되었지만, 아직 막부에 공인된 번은 되지 않았다.
노부요시는 간에이 11년(1634년) 11월 28일,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뒤를 노부요시의 아들 구마노스케가 이었지만, 간에이 15년(1638년) 11월 6일, 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7월 25일, 누마타령의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이자 노부요시의 동생인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인 노부토시에게 5천 석이 분지되었다. 노부마사는 영내의 검지 등을 실시하여 기반을 굳히려고 했지만, 메이레키 2년(1656년)에 노부유키가 은거했기 때문에, 마쓰시로의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어, 대신 누마타령의 전부를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
메이레키 4년(1658년) 2월에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여섯째 아들로 2세의 노부후사(후의 유키미치) 중 누구를 세울 것인가로 후계자 다툼이 발발한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지만,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쓰시로번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부토시는 간분 2년(1662년)에 누마타령의 검지를 실시하여, 실고 3만 석(일설에는 6만 석)의 소령을 14만 4천 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했다. 이 때문에 영민은 증세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폭거는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엔포 8년(1680년), 노부토시는 막부의 명령에 의해 에도 료고쿠 다리의 재건을 위해 자재를 누마타번에서 제공하는 것을 맡았지만, 이미 피폐해진 영민의 협력을 얻지 못했고, 다음 해 11월, 노부토시는 자재의 납기에 늦은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
누마타는 폐번·막부령이 되었지만, 겐로쿠 16년(1703년) 1월 11일, 시모사 후나도번에서 2만 석으로 혼다 마사나가가 들어와, 다시 누마타번이 입번한다. 마사나가는 더욱 2만 석을 가증받아 4만 석의 다이묘가 된다. 그 후, 제3대 번주 혼다 마사노리 대의 교호 15년(1730년),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이봉된다. 교호 17년(1732년) 3월 1일, 히타치 시모다테번에서 구로다 나오쿠니가 3만 석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제2대 번주 구로다 나오즈미 대의 간포 2년(1742년) 7월 28일, 가즈사 구루리번으로 이봉되었다.
2. 3. 도키 가문 시대 (18세기 중 ~ 19세기 말)
1703년 시모사 후나토번에서 혼다 마사나가가 2만 석으로 들어와 누마타번이 다시 설치되었다. 마사나가는 2만 석을 더 받아 4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730년 제3대 번주 혼다 마사노리 시대에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이봉되었다. 1732년 히타치 시모다테번에서 구로다 나오쿠니가 3만 석으로 들어왔으나, 1742년 제2대 번주 구로다 나오즈미 시대에 가즈사국 구루리번으로 이봉되었다. 대신 로주였던 도키 요리토시가 스루가 다나카번에서 3만 5천 석으로 입부했다. 1781년 제3대 번주 도키 사다쓰네 시대에 연공 증세에 반대한 영민들에 의해 미토리 소동이 발생했고, 사다쓰네는 영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해결했다.1867년 제11대 번주가 된 도키 요리유키는 간세이 개혁으로 유명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손자였지만, 막부와는 별 관계가 없었고, 도키 요리토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듬해 보신 전쟁에서는 구와나번, 아이즈번과 인척 관계였음에도 신정부군의 누마타 진주를 허용하고 신정부에 공순, 미쿠니토우케 전투에서 아이즈군과 싸웠다. 1869년 도키 요리토모는 판적봉환하여 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누마타번은 폐번, 누마타현을 거쳐 군마현이 되었다. 도키 씨는 1884년 화족령에 의해 자작이 되었다.
2. 3. 1. 도키 가문의 통치와 메이지 유신
오다와라 정벌 후, 사나다 마사유키는 누마타령 2만 7천 석을 돌려받았으나, 시나노 우에다성을 거점으로 삼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이 시기 노부유키는 사나다 가문의 당주(마사유키)의 후계자였고, 공식적으로는 누마타령도 마사유키의 영지 일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것이 훗날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노부유키는 영지 내 검지를 일찍부터 실시하여 영지 지배 체제를 굳혔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아내로 맞아 동군에 가담,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 군에 맞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으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배하면서 전후 기슈 구도야마에 칩거하게 되었다. 대신 노부유키는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옛 영지에 3만 석이 더해져 9만 5천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우에다번 성립).
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옮기고, 누마타령은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었다(이 시점에서도 정식 입번은 아니었다). 노부유키는 1622년 시나노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동했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리되었지만, 아직 막부의 공인을 받지는 못했다.
노부요시는 1634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뒤를 노부요시의 아들 구마노스케가 이었으나, 1638년 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누마타령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이자 노부요시의 동생인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 노부토시에게 5천 석이 분리되었다. 노부마사는 영지 내 검지 등을 실시하여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1656년 노부유키가 은거하면서 마쓰시로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고, 대신 누마타령 전부를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
1658년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여섯째 아들인 2세 노부후사(후의 유키미치)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이었지만,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쓰시로번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노부토시는 1662년 누마타령 검지를 실시하여 실제 3만 석(일설에는 6만 석)인 영지를 14만 4천 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했다. 이 때문에 영민들은 증세에 시달렸다. 이러한 폭거는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680년 노부토시는 막부 명령으로 에도 료고쿠바시 수리를 위해 목재를 누마타번에서 제공하도록 지시받았으나, 이미 피폐해진 영민들의 협력을 얻지 못했고, 이듬해 목재 납기를 맞추지 못한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
누마타는 폐번되어 막부령이 되었다가, 1703년 시모사 후나토번에서 혼다 마사나가가 2만 석으로 들어와 다시 누마타번이 설치되었다. 마사나가는 2만 석을 더 받아 4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제3대 번주 혼다 마사노리 시대인 1730년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이봉되었다. 1732년 히타치 시모다테번에서 구로다 나오쿠니가 3만 석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제2대 번주 구로다 나오즈미 시대인 1742년 가즈사국 구루리번으로 이봉되었다. 대신 로주였던 도키 요리토시가 스루가 다나카번에서 3만 5천 석으로 입번했다. 제3대 번주 도키 사다쓰네 시대인 1781년 연공 증세에 반대한 영민들에 의해 미토리 소동이 발생했고, 사다쓰네는 영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해결했다.
제11대 번주가 된 도키 요리유키는 간세이 개혁으로 유명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손자였지만, 막부와는 별 관계가 없었고, 1867년 가독을 도키 요리토모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듬해 보신 전쟁에서는 구와나번, 아이즈번과 인척 관계였음에도 신정부군의 누마타 진주를 허용하고 신정부에 공순, 미쿠니토우케 전투에서 아이즈군과 싸웠다. 1869년 요리토모는 판적봉환하여 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누마타번은 폐번, 누마타현을 거쳐 군마현이 되었다. 도키 씨는 1884년 화족령에 의해 자작이 되었다.
2. 3. 2. 폐번치현
오다와라 정벌 후, 누마타령 2만 7천 석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반환되었지만, 마사유키는 시나노 우에다성을 거점으로 삼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이 시기 노부유키는 사나다 가문의 당주(마사유키)의 후계자였으며, 공식적으로는 누마타령도 마사유키의 영지 일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것이 후대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노부유키는 영내 검지를 일찍부터 실시하여 영지 지배 체제를 굳혔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혼다 다다카쓰의 딸)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동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 휘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 군을 상대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으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했기 때문에 전후 기슈 구도야마에 칩거했다. 대신 노부유키에게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옛 영지에 더해 3만 석이 추가되어 9만 5천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우에다번 성립).
겐나 2년(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옮겨 누마타령은 노부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었다(이 시점에서도 정식 입번은 아니었다). 노부유키는 겐나 8년(1622년) 시나노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동했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리되었지만, 아직 막부에 공인된 번은 아니었다.
노부요시는 간에이 11년(1634년) 11월 28일,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후계는 노부요시의 아들 구마노스케가 이었으나, 그 역시 간에이 15년(1638년) 11월 6일, 7세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7월 25일, 누마타령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이자 노부요시의 동생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 노부토시에게 5천 석이 분할되었다. 노부마사는 영내 검지 등을 실시하여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메이레키 2년(1656년) 노부유키가 은거함에 따라 마쓰시로 사나다 종가 가독을 잇게 되었고, 대신 누마타령 전부를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
메이레키 4년(1658년) 2월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여섯째 아들로 2세 노부후사(후 유키미치)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발생했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 가독을 잇게 되었는데,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쓰시로번에서 독립했다.
그런데 노부토시는 간분 2년(1662년) 누마타령 검지를 실시하여 실제 3만 석(일설 6만 석) 소령을 14만 4천 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했다. 이로 인해 영민들은 증세에 시달렸다. 이러한 폭거는 사나다 종가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엔포 8년(1680년), 노부토시는 막부 명령으로 에도 료고쿠 다리 수리를 위해 용재를 누마타번에서 제공할 것을 청부받았으나, 이미 피폐해진 영민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노부토시는 용재 납기일을 맞추지 못한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
누마타는 폐번, 막부령이 되었다가, 겐로쿠 16년(1703년) 1월 11일, 시모사 후나도번에서 2만 석으로 혼다 마사나가가 들어와 다시 누마타번이 입번했다. 마사나가는 2만 석을 더 받아 4만 석 다이묘가 되었다. 그 후 제3대 번주 혼다 마사노리 시대 교호 15년(1730년),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이봉되었다. 교호 17년(1732년) 3월 1일, 히타치 시모다테번에서 구로다 나오쿠니가 3만 석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제2대 번주 구로다 나오즈미 시대 간포 2년(1742년) 7월 28일, 가즈사 구루리번으로 이봉되었다. 대신 로주였던 도키 요리토시가 스루가 다나카번에서 3만 5천 석으로 입부했다. 제3대 번주 도키 사다쓰네 시대 덴메이 원년(1781년) 12월, 연공 증세에 반대한 영민들에 의해 미토리 소동이 발생했고, 사다쓰네는 영민들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해결했다.
제11대 번주가 된 도키 요리유키는 간세이 개혁으로 유명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손자였으나, 막부와는 별 관계가 없어 게이오 3년(1867년) 4월 16일 가독을 도키 요리토모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이듬해 보신 전쟁에서는 구와나번이나 아이즈번과 인척 관계였음에도 신정부군 누마타 진주를 허용하고 신정부에 공순하여 미쿠니토우케 전투에서 아이즈군과 싸웠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20일, 요리토모는 판적봉환하여 번지사가 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누마타번은 폐번되어 누마타현, 이어서 군마현이 되었다. 그리고 도키 씨는 메이지 17년(1884년) 화족령에 의해 자작이 되었다.
3. 역대 번주
1681년 사나다 노부토시가 개역 처분을 받은 후, 누마타는 잠시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가 1703년 혼다 마사나가가 들어오면서 다시 번이 설치되었다. 이후 구로다 씨를 거쳐 1742년부터 도키 씨가 메이지 유신까지 누마타 번을 다스렸다.[1]
각 가문별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위 | 석고 | |||||
|---|---|---|---|---|---|---|---|---|---|---|
| 1 | 사나다 노부토시 | 1656년 ~ 1681년 | 이가노카미(伊賀守) | 종5위하(従五位下) | 3만 석 | |||||
![]() | '천령' | 1681–1703 | ||||||||
| 1 | 本多正永|혼다 마사나가일본어 | 1703년 ~ 1711년 | 호키노카미 (伯耆守); 지주 (侍従) | 종4위하 (従四位下) | → | |||||
| 2 | 本多正武|혼다 마사타케일본어 | 1711년 ~ 1721년 |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 3 | 本多正矩|혼다 마사노리일본어 | 1721년 ~ 1730년 | 부젠노카미 (豊前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 1 | 黒田直邦|구로다 나오쿠니일본어 | 1732년 ~ 1735년 | 부젠노카미(豊前守), 지주(侍従) | 종4위하(従四位下) | 3만 석 | |||||
| 2 | 黒田直純|구로다 나오즈미일본어 | 1735년 ~ 1742년 | 야마토노카미(大和守) | 종5위하(従五位下) | 3만 석 | |||||
| 1 | 土岐頼稔|도키 요리토시일본어 | 1742년 ~ 1744년 | 단고노카미, 시종 | 종4위하 | 3만 5천 석 | |||||
| 2 | 土岐頼煕|도키 요리오키일본어 | 1744년 ~ 1755년 | 이요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 3 | 土岐定経|도키 사다쓰네일본어 | 1755년 ~ 1782년 | 미노노카미 | 종4위하 | 3만 5천 석 | |||||
| 4 | 土岐頼寛|도키 요리히로일본어 | 1782년 | 이요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 5 | 土岐定吉|도키 사다요시일본어 | 1782년 ~ 1786년 | 미노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 6 | 土岐定富|도키 사다토미일본어 | 1786년 ~ 1790년 | - | - | 3만 5천 석 | |||||
| 7 | 土岐頼布|도키 요리노부일본어 | 1790년 ~ 1813년 | 야마시로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 8 | 土岐頼潤|도키 요리미쓰일본어 | 1813년 ~ 1826년 | 야마시로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 9 | 土岐頼功|도키 요리카쓰일본어 | 1826년 ~ 1843년 | 야마시로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 10 | 土岐頼寧|도키 요리야스일본어 | 1843년 ~ 1867년 | 이요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 11 | 土岐頼之|도키 요리유키일본어 | 1857년 ~ 1871년 | 야마시로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 12 | 土岐頼知|도키 요리오키일본어 | 1867년 ~ 1871년 | 하야토노쇼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3. 1. 사나다 가문 (도자마, 3만 석)
사나다 노부토시는 노부유키의 손자이자 노부요시의 차남이다. 1656년부터 1681년까지 누마타 번을 다스렸으며, 공식적인 누마타 번 초대 번주이다.[1]1658년 아버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토시는 숙부와의 후계자 다툼에서 승리하여 사나다 종가를 이었지만, 이로 인해 누마타령은 마쓰시로번에서 독립하게 되었다.[1]
그러나 노부토시는 1662년 누마타령의 검지에서 실제보다 많은 14만 4천 석을 막부에 신고하여 영민들에게 증세를 강요했다. 1680년에는 에도 료고쿠 다리 재건에 필요한 자재 조달에 실패하여 1681년 책임을 지고 개역되었다.[1]
|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위 | 석고 |
|---|---|---|---|---|---|
| 1 | 사나다 노부토시 | 1656년 ~ 1681년 | 이가노카미(伊賀守) | 종5위하(従五位下) | 30,000 석 |
3. 2. 혼다 가문 (후다이, 2만 석 → 4만 석)
# 혼다 마사나가(正永) - 종4위하 호키노카미, 시종# 혼다 마사타케(正武) - 종5위하 도토미노카미
# 혼다 마사노리(正矩) - 종5위하 부젠노카미
|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위 | 고쿠다카 |
|---|---|---|---|---|---|
| 1 | 혼다 마사나가|本多正永일본어 | 1703년 ~ 1711년 | 호키노카미 (伯耆守); 지주 (侍従) | 종4위하 (従四位下) | → |
| 2 | 혼다 마사타케|本多正武일본어 | 1711년 ~ 1721년 |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
| 3 | 혼다 마사노리|本多正矩일본어 | 1721년 ~ 1730년 | 부젠노카미 (豊前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겐로쿠 16년(1703년) 1월 11일, 시모사 후나도번에서 혼다 마사나가가 2만 석으로 누마타번에 들어왔다. 마사나가는 이후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4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제3대 번주 혼다 마사노리 대인 교호 15년(1730년),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이봉되었다.
3. 3. 구로다 가문 (후다이, 3만 석)
|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위 | 석고 |
|---|---|---|---|---|---|
| 1 | 黒田直邦|구로다 나오쿠니일본어 | 1732년 ~ 1735년 | 부젠노카미(豊前守), 지주(侍従) | 종4위하(従四位下) | 30,000 석 |
| 2 | 黒田直純|구로다 나오즈미일본어 | 1735년 ~ 1742년 | 야마토노카미(大和守) | 종5위하(従五位下) | 30,000 석 |
1732년 히타치 시모다테번에서 구로다 나오쿠니가 3만 석으로 누마타번에 들어왔다. 그러나 1742년 제2대 번주 구로다 나오즈미 대에 가즈사 구루리번으로 이봉되었다.
3. 4. 도키 가문 (후다이, 3만 5천 석)
1742년 요리토시가 스루가 다나카번에서 3만 5천 석으로 입부하면서 도키 씨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순서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위 | 고쿠다카 |
|---|---|---|---|---|---|
| 1 | 요리토시 | 1742년 ~ 1744년 | 단고노카미, 시종 | 종4위하 | 3만 5천 석 |
| 2 | 요리오키 | 1744년 ~ 1755년 | 이요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3 | 사다쓰네 | 1755년 ~ 1782년 | 미노노카미 | 종4위하 | 3만 5천 석 |
| 4 | 요리히로 | 1782년 | 이요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5 | 사다요시 | 1782년 ~ 1786년 | 미노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6 | 사다토미 | 1786년 ~ 1790년 | - | - | 3만 5천 석 |
| 7 | 요리노부 | 1790년 ~ 1813년 | 야마시로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8 | 요리미쓰 | 1813년 ~ 1826년 | 야마시로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9 | 요리카쓰 | 1826년 ~ 1843년 | 야마시로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10 | 요리야스 | 1843년 ~ 1867년 | 이요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11 | 요리유키 | 1857년 ~ 1871년 | 야마시로노카미 | 종5위하 | 3만 5천 석 |
| 12 | 요리오키 | 1867년 ~ 1871년 | 하야토노쇼 | 종5위하 | 3만 5천 석 |
제3대 번주 사다쓰네 대인 1781년 12월, 연공 증세에 반대한 영민에 의해 미토리 소동이 발생하였으나, 사다쓰네는 영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해결했다.
제11대 번주 요리유키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손자였지만, 막부와는 그다지 관계를 갖지 않았다. 1867년 4월 16일에 가독을 요리토모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다음 해의 보신 전쟁에서는 구와나번과 아이즈번과 인척 관계에 있었으면서도, 신정부군의 누마타 진주를 허용하여 신정부에 굴복하고, 산국 고개의 싸움에서 아이즈 군과 싸웠다.
1869년 6월 20일, 요리토모는 판적봉환하여 번 지사가 되었고,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누마타번은 폐번되어 누마타현, 이어서 군마현이 되었다. 도키 씨는 1884년 화족령에 의해 자작으로 서임되었다.
4. 누마타번의 영지
누마타번은 한 체제의 대부분의 영지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지적도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다.[2][3]
누마타번의 영지는 다음과 같다.
| 국명 | 군명 | 마을 수 |
|---|---|---|
| 고즈케국 | 군마군 | 5개 마을 |
| 고즈케국 | 토네군 | 50개 마을 |
| 가와치국 | 와카에군 | 5개 마을 (그 중 2개 마을은 사카이현에 편입) |
| 가와치국 | 시키군 | 5개 마을 |
| 미마사카국 | 쇼보쿠군 | 6개 마을 |
| 미마사카국 | 아이다군 | 51개 마을 |
| 미마사카국 | 쇼난군 | 3개 마을 |
참조
[1]
웹사이트
Edo daimyo.net
http://www1.parkcity[...]
[2]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3]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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