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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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요시마사는 1548년 오미국에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을 섬긴 무장이다.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가신으로 미카와 오카자키 성주를 거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참여, 공을 세워 지쿠고국 야나가와 32만 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서는 수리 시설 정비, 간척 사업, 도자기 산업 육성 등 도시 건설에 힘썼으며, 기독교에 관대하고 불교 사찰을 지원하기도 했다. 1609년 사망했으며, 그의 가문은 아들이 없어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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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요시마사 | |
---|---|
기본 정보 | |
씨명 | 다나카 씨 |
이름 | 다나카 요시마사 |
가명 | 구효에(久兵衛) |
계명 | 엔코인덴 스겐도다이코지(円光院殿崇厳道越大居士) |
영명 | 바르톨로메오 |
묘소 | 신쇼지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 젠도지 (후쿠오카현 구루메시) 류코인 (교토부 교토시) 깃쇼지 (도쿄도 분쿄구) |
생애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덴분 17년 (1548年) |
사망 | 게이초 14년 2월 18일 (1609年3月23日) |
개명 | 나가마사 → 요시마사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
직책 | 지쿠고노카미, 효부다이스케, 지주 |
가계 | |
아버지 | 다나카 시게마사 |
어머니 | 다케 (구니토모 요자에몬 누이) |
형제 | 요시마사, 다나카 기요마사, 다나카 우지쓰구 |
배우자 | 정실: 국우 도모요자에몬 딸 (미야베 게이준 양녀) 측실: 묘주인, 야마다 씨 |
자녀 | 다나카 요시쓰구, 다나카 요시노부, 다나카 요시오키(다나카 야스마사), 다나카 다다마사, 다나카 쓰네요시, 나카하라 모로스미 실 양자: 다나카 슈메 (요시마사의 조카) |
주요 경력 | |
주군 | 미야베 게이준 → 도요토미 히데쓰구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봉록 | 지쿠고국 야나가와 번 번주 |
2. 생애
1548년(덴분 17년), 오미국에서 다나카 시게마사(田中重政)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야베 게이준의 가신인 구니토모 요자에몬(国友与左衛門)의 누이였다. 처음에는 미야베 게이준을 따라 인바국 돗토리(鳥取)에 있었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미요시 히데쓰구를 섬겨 5000석을 받았다.
2. 1.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가로 시대
1585년(덴쇼 13년)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오미하치만 43만 석을 받자, 요시마사는 그 필두 가로가 되었다. 이때 나카무라 가즈우지, 호리오 요시하루, 야마우치 가즈토요, 이치류 나오스에 등도 히데쓰구의 가로가 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거성을 가졌지만 요시마사는 히데쓰구의 거성인 하치만산성에 머물며 간파쿠 전하 제일로 정무를 처리했다.[1]
1586년(덴쇼 14년) 오마사도코로의 미카와국 하향과 관련된 기술이 있다.[1]
이 시대 요시마사의 서장은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축조한 아즈치성 아래 마을을 하치만성 아래로 옮겨 마을 구획을 정했는데, 에도 시대 중반까지 큐베이초라고 명명된 지역이 오미하치만 마을의 한 구획에 남아 있었다.[1]
2. 2. 미카와 오카자키 시대
1590년(덴쇼 1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토의 호조 씨를 제압하고 여러 다이묘의 배치 전환을 실시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로 전봉되었다. 요시마사는 미카와국오카자키성 5만 석을 받았고,[4] 같은 해 10월 20일, 히데요시로부터 소령 할행장을 받아 5만 7400석을 영유하게 되었다.분로쿠 4년, 히데쓰구가 자결하고 많은 가신들이 처분을 받았지만, 요시마사는 문책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히데쓰구에게 잘 간언했다"는 이유로 2만 8,358석 3두를 추가로 받았으며, 분로쿠 5년에는 1만 4,252석 6두를 더 받아 미카와국 오카자키 성주로서 1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요시마사는 오카자키 성을 근세 성곽으로 정비하고, 성 아래 마을을 정비하기 위해 7개 마을을 해자로 둘러싸는 다나카 호리를 축조했다. 서쪽 저습지를 매립하고, 도카이도를 오카자키 성 아래 마을 중심으로 지나도록 변경하여 "오카자키의 27 굽이"라 불리는 크랭크 모양의 길을 정비했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기후성 공략에서는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오가키성에서 기후성으로 향하는 서군을 가와와타에서 섬멸했다. 이때, 이시다 미쓰나리의 부하인 스기이 간베에는 요시마사의 가신인 쓰지 시게카쓰에게 토벌당했다. 본 전투에서는 구로다 나가마사 군과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 군과 격돌했다.또한 서군의 야마다 쿄레키와 최전선에서 싸운 아카시 데루즈미(요시마사의 사위라는 설이 있다)의 도주를, 전투 후에 구로다 나가마사(아카시 데루즈미의 친족)와 함께 도왔다고 전해진다.
동군 승리 후, 미쓰나리의 거성 사와야마성을 미야베 나가후사(나가히로)와 함께 함락시켜, 이부키 산에서 도망 중인 미쓰나리를 포박하는 큰 공을 세웠다. 실제로 포박에 나선 것은 다나카 덴자에몬, 사와다 쇼우에몬이었다. 미쓰나리는 복통으로 앓고 있었지만, 의사의 권유 약을 거부했기 때문에, 요시마사는 숙고 끝에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부추죽을 권했고 미쓰나리는 그것을 먹었다고 한다. 요시마사를 만난 미쓰나리는 태합에게 받은 와키자시를 요시마사에게 주었다(스노비 단도 이시다 사다무네: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정중하게 대접받은 답례라고 한다(미쓰나리도 포박될 때, "다른 자보다 너에게 잡히는 것이 낫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미쓰나리의 대소 중, 우치카타나(사사노쓰유, 빈고 카이 미하라 쇼신 작)는 포박자인 다나카 덴자에몬(다나카 요시타다)에게 건네졌다. 전후, 이러한 훈공이 인정되어, 지쿠고 일국 야나가와성 32만 석을 하사받아 구니모치 다이묘가 되었다.[1]
2. 4. 지쿠고 국주 시대
요시마사는 야나가와의 해자를 정비하여 수운과 벼농사를 위한 용수로를 정비하고, 근대적인 도시 건설을 했다. 수로 외에도 야나가와와 구루메를 잇는 다나카 가도(현 후쿠오카현도 제23호선)나 야나가와와 야메 후쿠시마, 구로키를 잇는 가도를 건설하는 등 육로 정비에도 힘썼다. 또한 야베강의 호안 정비나 아리아케해 연안에 게이초 혼토이(慶長本土居)라고 불리는 제방을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수입 증가를 목표로 아리아케 해의 간척에도 힘썼다.[1]게이초 14년(1609년) 2월 18일, 요시마사는 교토 후시미에서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 다나카 가는 뒤를 이은 다다마사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겐나 6년(1620년)에 개역(무가제법도#개역)되었다. 다다마사가 기독교에 관대했고, 기독교 금교 이후의 정책이 비교적 온건했던 것이 한 원인이라는 시각도 있다.[1] 방계 친족은 다른 가문의 가신이 되는 등으로 가계를 존속시켰다.[1]
3. 묘소
묘소는 야나가와시의 신쇼지(정토진종: 보리사), 구루메시의 젠도지(정토종 대본산), 도쿄 고마고메의 킷쇼지(조동종), 교토 구로타니의 정토종 대본산 곤카이코묘지 탑두 류코인(정토종) 묘지 등에 있다.
구루메의 사찰 거리에 있는 신교지(정토진종)가 한때 보리사였던 적이 있었다. 요시마사의 사후, 역대 보리사가 된 곳은 야나가와의 신쇼지 (옛 이름은 신교지)이며, 현재도 요시마사의 후손들이 보리사로 삼고 있다.
4. 출자
『간세이 중수 제보』에 따르면, 다나카 요시마사의 선조는 오미국다카시마군 다나카촌에 살았으며, 하키노카미 타카히로 때 다나카를 칭했다[1]. 또한 선조는 오미 겐지다카시마 씨(高島氏)의 일족으로 다나카 성의 성주였다고도 한다. 요시마사는 가문에 "히토츠 메유이" 문양(쿠기누키 문양이라고도 한다)을 사용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다카시마군 진공으로 다나카 씨는 당시 귀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
요시마사의 출생지는 아자이군의 미카와촌 또는 미야베촌(현재의 나가하마시 미카와초, 미야베초)으로, 요시마사 본인은 그곳에 사는 농민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 근거로는 아자이군 거주민에 한정되는 다케시마의 행사·렌게회의 촌장을 야나가와번주가 된 요시마사가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 미카와촌에는 다나카 요시마사의 출생 전승이 남아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는 미야베촌의 구니진 영주인 미야베 츠구즈미(宮部継潤)를 섬긴 기록이 있다. 또한 요시마사의 어머니, 즉 미야베 츠구즈미 가신 구니토모 요자에몬의 누나는 미야베촌과 미카와촌에서 가까운 사카타군구니토모촌(당시 유수의 조총 생산지. 현재의 나가하마시 구니토모초) 출신이다. 다만, 오미하치만 시대 이전의 기록은 적다.
5. 인물과 일화
다나카 요시마사는 활달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백성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것을 즐겼다. 오카자키 성주 시절에는 매일 성 아래를 순찰하며 백성들의 삶을 살폈고, 길가에서 도시락을 먹는 소탈한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2]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시다 미쓰나리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미쓰나리를 정중하게 대접하고 부추죽을 권했지만,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계략을 쓰기도 했다.[1]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계속 간언하여 히데쓰구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편휘를 받아 이름을 요시마사(吉政)로 바꾸었다.[2] 오미하치만에 있을 때 하치만 신사에서 받았다는 좌삼두(左三つ巴) 문양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깃발로 사용되었고,[4] 못관통 문양(釘貫紋, 구조누키(九城抜き)라고도 불리며 성 공격의 명수임을 나타냄)도 자주 사용했다.[4] 요시마사가 염색공의 실수를 탓하지 않고 좌두(左巴) 문양을 자신의 가문 문양으로 삼았다는 일화도 있다.[5]
처음 미야베 쓰구준을 섬길 때 7석 2인 부양을 받는 가난한 무사였으나, 어느 날 찻집에서 낮잠을 잘 때 되(升)를 베개로 벴는데, 옆에 있던 맹인이 "이제부터 1국 1성의 주가 될 사람이 되를 베개로 삼는다면, 기껏해야 1,000석에 머물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요시마사는 감사하며 술 1되와 새우 1되를 답례했다. 훗날 지쿠고의 거대 다이묘로 성장하여 게이초 5년(1600년) 11월 18일 입국할 때, 군중 속에서 그 맹인을 발견하고 재회를 기뻐하며 그를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만년을 편안하게 했다고 한다.[4]
5. 1. 종교
다나카 요시마사는 기독교에 관대하여 선교사들로부터 서양 지식을 적극적으로 배웠다. 영내의 기독교 신자를 보호하고 스스로도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하며, 세례명은 바르톨로메오(바르톨로뮤(Bartolomeo,Bartholomew))이다.[1]또한, 정토계 종파의 불교 신자였으며, 보리사인 진교사, 금계광명사, 선도사 등 정토계 불교 사찰을 포함한 많은 불교 사찰의 부흥과 보호에 힘썼다.[1] 다만, 오카자키에서는 재임 기간이 10년 정도로 짧았기 때문에, 오카자키 성하 정비를 위해 요시마사에게 이전을 강요당하거나 소유지를 몰수당한 사찰이 많았다(특히 도쿠가와 가문과 관계가 옅은 사찰).[1] 『만덕사 연기』에서는 요시마사의 사찰 탄압의 가혹함을 전하고 있다.[1]
5. 2. 가문
다나카 요시마사의 가문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오미하치만에 있을 때 하치만 신사에서 받았다고 전해지는 좌삼두(左三つ巴) 문양이다. 이 문양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깃발로 사용되었다.[4] 또, 못관통 문양(釘貫紋, 구조누키(九城抜き)라고도 불리며 성 공격의 명수임을 나타냄)도 자주 사용했다.[4]요시마사는 활달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무장이었다. 무사가 되면서 염색공에게 하카마(袴) 염색을 맡겼는데, 완성된 하카마에는 좌두(左巴) 문양이 있었다(원래는 우두(右巴)여야 했다). 하지만 요시마사는 염색공의 실수를 탓하지 않고, 이 문양을 그대로 자신의 가문 문양으로 삼았다고 한다.[5]
5. 3. 정치
1590년(덴쇼 1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씨를 제압하고 여러 다이묘의 배치 전환을 실시한 결과, 요시마사는 미카와국오카자키성 5만 석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20일, 히데요시로부터 소령 할행장을 받아 5만 7400석을 영유하게 되었다.[2]1595년(분로쿠 4년), 히데쓰구가 자결하고 많은 가신들이 처분을 받았지만, 요시마사는 문책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히데쓰구에게 잘 간언했다"는 이유로 2만 8,358석 3두를 가증받았으며, 1596년(분로쿠 5년)에는 1만 4,252석 6두가 더 가증되어 미카와국 오카자키 성주 1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요시마사는 오카자키 성을 근세 성곽으로 정비하고, 성 아래 마을 정비에 힘썼다. 7개의 마을을 해자로 둘러싸는 다나카 호리를 축조하고, 서쪽 저습지를 매립했다. 도카이도를 오카자키 성 아래 마을 중심을 지나도록 변경하고, "오카자키의 27 굽이"라고 불리는 크랭크 모양의 길을 정비했다.[2]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지쿠고국 야나가와에 입국하여 백성들에게 경작지를 넓히도록 장려했다. 야나가와 성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간척에 주목하여 야나가와의 지성을 파각하고 밭으로 만들었다. 또한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지쿠고강의 물을 끌어와 운하를 열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부탁하여 도자기 장인인 이에나가 히코사부로 카타치카를 초빙하여 66석을 주고 지쿠고국 도자기 관리인으로 임명하여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고, 야나가와야키의 시작이 되었다.[3]
요시마사는 야나가와의 해자를 정비하여 수운과 벼농사를 위한 용수로를 정비하고, 근대적인 도시 건설을 했다. 수로 외에도 야나가와와 구루메를 잇는 다나카 가도(현 후쿠오카현도 제23호선)나 야나가와와 야메 후쿠시마, 구로키를 잇는 가도를 건설하는 등 육로 정비에도 힘썼다. 야베강의 호안 정비나 아리아케 해 연안에 게이초 혼토이(慶長本土居)라고 불리는 제방을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수입 증가를 목표로 아리아케 해의 간척에도 힘썼다.[3]
오카자키 성주 시절, 요시마사는 매일 성 아래를 순찰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배가 고파지면 성에서 도시락을 가져오게 하여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길가에서 식사를 했다. 그 때문에 영민들에게는 소탈한 영주로 친밀하게 여겨졌다고 한다.[2]
5. 4. 기타
-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난 후, 부정한 행위를 거듭하던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계속 간했다. 그 때문에 히데쓰구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편휘를 받아 나가마사(長政)를 요시마사(吉政)로 개명했다.[2]
- 요시마사는 처음에는 미야베 쓰구준을 섬기며 7석 2인 부양을 받았다. 어느 해 여름날 찻집에서 낮잠을 잘 때, 되(升)를 베개로 삼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맹인이 "이제부터 1국 1성의 주가 될 사람이 되를 베개로 삼는다면, 기껏해야 1,000석에 머물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그 말에 요시마사는 감사하며, 답례로 술 1되와 새우 1되를 주었다. 지쿠고의 거대 다이묘로 성장하여 게이초 5년(1600년) 11월 18일 입국할 때, 군중 속에 그 당시의 맹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회를 기뻐했다. 그리고 맹인을 켄교 가가(検校加賀都)로 불러들여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만년을 편안하게 보내게 했다고 한다.[4]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크게 승리한 후, 이시다 미쓰나리가 도망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쓰나리 체포를 자청했다. 요시마사는 오미 출신으로 지리에 밝았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이를 허락했다. 미쓰나리를 체포하자 "가엾다"며 밧줄을 풀고, "도쿠가와 내부(이에야스) 님께 살려달라고 청할 테니, 설령 산속의 오지에서라도 조용히 사십시오"라고 말하며, 미쓰나리로부터 무구와 재산의 은닉 장소를 알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요시마사의 사기였으며, 장소를 알아내자 미쓰나리를 이에야스 앞에 끌고 가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명량홍범』)
6. 일족
- 형제
- 다나카 기요마사(田中清政): 사마노카미. 아카시 성주.
- 다나카 우지쓰구(田中氏次): 효고노스케. 에우라 성주. 형 요시마사와의 불화로 퇴거, 분고에서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1000석으로 섬김. 이후 자손은 구마모토 번사로 존속. 우토군에 영지를 얻음.
- 우지쓰구 장남: 사효에·우지히사(양자, 처음에는 사쿠마 츄스케, 은거 후에는 소하쿠)
- 우지히사 유자: 시부 사에몬
- 자녀
- 다나카 요시쓰구(田中吉次): 장남. 종5위하 민부노쇼. 자식은 민부 요시카츠.
- 다나카 요시노부(田中吉信): 차남. 구루메 성주. 관위는 즈젠노쇼. 별명은 노리마사.
- 다나카 요시오키(田中吉興): 삼남. 후쿠시마 성주. 자손은 하타모토. 별명은 야스마사(康政).
- 다나카 다다마사(田中忠政): 4남. 요시마사 사망 후, 도쿠가와가의 지시로 가독을 이음.
- 다나카 야스마사(田中庸政): 어머니는 야마다 씨. 첩의 자식으로 가로 사와다와 함께 교토로 이주. 자식은 에이마사.
- 다나카 슈바: 유자[요시마사의 조카]
- 딸: 다이게키(大外記) 나카하라 모로카도(中原師廉)의 아내. 나카하라 모로나리(中原師生)의 어머니[5]
- 딸: 미야가와 사누키의 아내[고본 야메군 시에는 사도 아내라고 기록되어 있음]
- 딸: 이소노 하쿠로의 아들 다이젠 이치나리의 아내
- 딸: 쿠사노 쿠마노스케의 아내
7. 등장 작품
- 田中家の三十二万石|다나카 가의 32만 석일본어 (2021년, 이와이 산시로 저, 코분샤)
- 関ヶ原|세키가하라일본어 (1981년・TBS 계열 드라마, 배우: 미조구치 슌스케)
- 徳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 (1983년・NHK 대하드라마, 배우: 가지 겐타로)
- 独眼竜政宗|독안룡 마사무네일본어 (1987년・NHK 대하드라마, 배우: 시미즈 미키오)
- 葵 徳川三代|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일본어 (2000년・NHK 대하드라마, 배우: 사이토 시로)
- 功名が辻|공명의 갈림길일본어 (2006년・NHK 대하드라마, 배우: 카네다 켄이치)
- 連作眼 薫造|연작안 쿤조일본어 (2009년・엔터브레인 간행 코믹 『세키가하라 전국 희화 단편집 동군』, 작: 모토무라 에리)
- 聞書抄 (第2 盲目物語)|문서초 (제2 맹목 이야기)일본어 (1943년, 타니자키 준이치로 저, 소겐샤)
참조
[1]
웹사이트
岡崎の都市計画の祖、田中吉政の石造が設置されました
https://okazakikeika[...]
岡崎市
2010-03-28
[2]
서적
新編 日本武将列伝
秋田書店
[3]
서적
久留米市史
[4]
문서
筑後将士軍談
[5]
서적
王朝日記論
법정대학출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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