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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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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산해는 고려 말 성리학자 이색의 7대손으로, 1539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화가이다. 조식, 이황 등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명종 때부터 문장과 서예 실력으로 이름을 떨쳤다. 동인으로 활동하며 정철, 서인 세력과 대립했고, 임진왜란 전후 영의정을 역임했으나 파직과 유배를 겪었다. 광해군을 옹립하는 데 기여하여 광국 공신이 되었으나, 당쟁 속에서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아계 이산해 영정, 아계 이산해 유품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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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산해
한글이산해
한자李山海
로마자 표기I Sanhae
여수(汝受)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 죽피옹(竹皮翁), 시촌거사(枾村居士)
시호문충(文忠)
본관한산
출생1539년 7월 20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1609년 8월 2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직업작가, 시인, 문관
학력1561년 식년 문과 병과 급제
정치 활동
소속 정당동인, 이후 북인
임금조선 선조
관직
영의정재임 시작: 1600년 3월 6일
재임 종료: 1600년 6월 9일
이전: 이원익
이후: 이항복
영의정재임 시작: 1590년
재임 종료: 1592년 6월 10일
이전:
이후: 류성룡
좌의정재임 시작: 1589년 3월 16일
재임 종료: 1590년 3월 11일
이전: 류전
이후: 정철
우의정재임 시작: 1588년 11월 19일
재임 종료: 1589년 3월 16일
이전: 류전
이후:
우의정재임: 1588년 10월 1일 ~ 1589년 2월 1일
가족 관계
아버지이지번
어머니의령 남씨 부인 (생모), 충주 지씨 첩실 (서모)
배우자양주 조씨 부인
자녀이경백, 이경전, 이경신, 이경유, 4녀
형제이산광(이복 남동생)
친인척이산보(사촌 남동생), 이지함(숙부), 이덕형(사위), 이개(종고조부)
기타 정보
분야성리학
웹사이트해당 정보 없음

2. 생애

wikitext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1539년(중종 34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감 이지번(李之蕃)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작은아버지는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그의 총명함이 조정에까지 전해져 명종임금에 의해 회자화될 정도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장안의 명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5] 다섯 살 때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며, 열다섯 살에는 향시 시험에 여러 번 합격하였고, 뛰어난 서예와 그림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한 조식이황에게서 수학하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처음 우는 소리를 듣고 작은아버지였던 이지함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특하니 잘 보호하십시오. 우리 문호가 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이오"라 했다.[4] 5세 때 처음 병풍에 글씨를 썼는데, 운필하는 것이 귀신같아서 신동이라고 일컬어졌다.[4]

자라서 돌이 지나자 스스로 글자를 해독할 수가 있어서 세 갈래로 갈라진 당파창(鏜鈀槍)을 메고 당(堂)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산해는 그것을 보고 갑자기 “산자(山字)다.”라고 말하였다. 성암공이 황 고산(黃孤山)의 초서(草書)를 얻어 벽에 붙여놓고 즐겼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종이가 약간 헐고 더럽혀져 있었다. 괴이하게 여기며 그 이유를 묻자, 유모(乳母)가 말하기를, “아이가 저를 잡아끌기에 안아서 얼굴빛을 보니 기뻐하며 손가락으로 아래 위를 그어대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종이와 붓을 찾아서 이산해에게 쓰게 하니 한 획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 일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6]

5세가 되어서 토정 이지함이 그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기특하게 여겨서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는데, 한 마디의 말로 곧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아서 『태극도』를 가리키면서 따져 묻고 비난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것을 잊었으므로 이지함이 혹시라도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그가 읽는 것을 그치도록 하였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운자(韻字)을 불러주고 시를 짓게 하였는데 운자에 따라 거침없이 시를 지었다.

밥이 더디 되어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배움이 더디면 어떻겠으며

배가 고파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떠하랴?

집은 가난해도 오히려 마음을 치료할 약은 있는 법이니

모름지기 영대(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하리.[6]


5세의 나이에 운에 맞추어 시를 지으니 토정 이지함은 더욱 그를 기특해하면서도 각별하게 여겼다. 여섯 살때에는 초서(草書)·예서(隷書)를 잘 써서 이름이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산해는 6세 때 이미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장원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산해를 우러러 봤으며, 그 사람됨이 순후(醇厚)하고 숙성하여 얻기 어려운 선비라는 말을 들었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선조대 8문장가의 한 명으로 칭송되며 나라에 그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다. 소년기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여 대과 응시 자격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서 글과 학문을 계속 수학한다.

삼촌이자 서경덕의 문인인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수학하다가 뒤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7] 그 뒤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특히 조식의 문하에서 만난 김우옹, 정구, 곽재우, 정인홍 등은 그와 같은 북인을 형성한다. 또한 정구김효원도 그처럼 조식의 문하와 이황의 문하를 동시에 수학하기도 했다. 이황의 문하에서 만난 류성룡은 후일 그와 같은 동인의 창당에 참여하지만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이후 향시(鄕試)에 장원하였고, 이어 생원시에 응시하게 된다.

한편 그의 총명함을 알고 윤원형이 자기의 딸과 결혼시키려 하자, 아버지 이지번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숙부 이지함(李之菡)과 함께 단양(丹陽)의 구담(龜潭)으로 피신해서 숨어살았다.[8]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21살 때는 명종에게 그 학문의 뛰어남을 인정받았으며, 1560년(명종 15) 4월명종이 친히 주관한 성균관의 제술에서 1등하여 바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9])될 자격이 주어졌다.

일찍이 그는 학자 겸 예언가 남사고와 함께 송송정(宋松亭)에 앉아 서쪽으로 안령(鞍嶺)과 동쪽으로 낙봉(駱峯)을 가리키며 뒷날 조정에 반드시 동서의 당(黨)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전한다.[5]

1561년(명종 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에 보임되었다.

1562년 글씨를 잘 쓴다 하여 추천을 받아 홍문관정자가 되었다.[5] 이후 여러번 관직을 보직이동하였으나 글을 잘 써서 항상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직하여 실록 작성에 참여하였다. 1563년 3월 홍문관수찬, 홍문관 저작을 거쳐, 3월 26일 다시 홍문관정자가 되고 4월 홍문관 정자, 그해 7월 26일 홍문관 저작(著作)을 지냈다. 그해 8월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 교리 최옹·고경명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이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5] 10월 1일 홍문관박사가 되었다.

1564년 2월 부수찬(副修撰), 박사(博士), 수찬(修撰), 사간원정언(正言), 병조좌랑, 홍문관수찬을 지내고, 6월 왕명으로 과거 시험장에 그려질 병풍의 시제를 지었다. 1564년 명나라 사신들이 계속 방문하여 조정에서는 문학(文學)을 두루 갖춘 사람을 가려서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게 하였는데 그가 선발되어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정언, 1565년 1월 홍문관부수찬이 되고 이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5월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년) 1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자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할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국경에 나가 명나라 조사(詔使) 일행을 영접하고 돌아왔다. 그해 2월 홍문관부교리, 4월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홍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으로 선조즉위 초 춘추관(春秋館)의 사관으로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70년(선조 4년) 5월 직제학으로 구황 적간 어사(救荒奸御史)에 임명되어 파견되었으며, 1571년 6월 28일 사간원대사간, 9월 이조참의, 1572년 사간원대사간, 9월 17일 이조참의, 1573년(선조 6년) 4월 18일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575년(선조 9년) 1월 왕명으로 2품 이상의 재상에게 지문(誌文) 제술을 명하였으나 예문관에서 선발된 유희춘이 스스로 사직하고 이산해를 천거하여 그가 대신 지문을 짓게 되었다. 2월 11일 대사간이 되었다.

'''동인당 조직'''

조식이퇴계의 문하생이며 서경덕계열이기도 한 그는 이이가 스승들 중 한사람인 이황의 학설인 이기이원론을 정면 반박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는데, 류성룡, 정온, 박승임, 정인홍 등과 함께 동인을 형성했다.[11]

그러나 그해 아버지 이지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

1578년(선조 11년) 사간원대사간으로 재직 중 진도군 이수의 뇌물 사건을 접한 뒤, 서인(西人)의 거물인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비리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12]

1579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1580년 간의대 재건축 공사에 참여하였고,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하였다.

1581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6월 1일 어머니 남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13]

1583년 9월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10월 30일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1584년(선조 17년) 2월 1일 이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당시 이산해는 이조판서였다. 이에 서인 정철의 파인 김응생(金應生) 등이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인사권을 주면 권한이 비대해질 우려가 있다고 공격했다. 동서 분당의 시대였던 당시는 동인이 우세한 시기였다.[16] 그러자 선조는 왕년에 경안군이 류성룡을 참소하더니, 금년에는 김응생이 이산해를 참소한다고 역정을 냈다. 이 두 사람은 국가의 주석(柱石)인데 소인배들이 헐뜯고 있다는 것이었다.[16] 이산해는 이를 정철의 사주로 해석했다.

1585년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김우옹은 정철·신응시(辛應時) 등이 사당(私黨)을 많이 끌어들여 조정을 탁란시켰는데, 전하의 명찰(明察)에 힘입어 이산해(李山海)를 전장(銓長)으로 삼아 위임하셨기 때문에 저들이 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17] 10월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586년 10월 조헌이 그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자 출사를 거부하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이의 문하인 유생 조광현이귀 등이 '이이와 친했으면서도 이이가 무고당하는 것을 좌시했다'고 이산해를 비난하였다.[19]

1588년(선조 21년) 종계변무 사은표를 지었다.[22] 6월 종계변무사를 통해 보낼 종계사은표를 지었으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쓰지 않을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21]

1588년 11월 20일 의정부우의정 유전이 북경에 있을 때 습증(濕症)을 얻어 걷지 못하므로 사직하면서, 이산해는 의정부우의정으로 특별 발탁되었다. 서인들은 반대를 하였으나 왕은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23] 11월 25일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23] 1589년 2월 1일 의정부좌의정이 되고,[23] 9월 우상 정언신(鄭彦信)과 함께 선조를 독대하여 일본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23] 11월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23]

정여립의 옥사로 동인 1천여명이 화를 입었다.[72] 이 중에는 어린이와 아기도 처형당하였고, 이발의 10세 미만의 두 아들과 80세 노모가 곤장을 맞다 죽었다. 당시 형문을 주관하던 형관은 송강 정철로, 형장의 몰골을 목격한 이산해는 정철에게 심한 반감과 원한을 품게 된다.

기축옥사 당시 홍성민이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의 발언에 그를 연루시킨 것도 서인에 대한 반감을 품는 원인이 됐다. 대사헌 홍성민이 선조에게 "정언신의 그 말은 신과 유홍과 더불어 혀를 찼고, 이산해도 그 불가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언신[25]이 재삼 말하자 이산해도 조금 굽혀서 '다시 생각해보니 솔직하게 말하면 우상의 말도 옳다'하였습니다"라고 말하여 이산해를 모략했던 것이다.[4]

1591년(선조 24년) 세자 건저 문제(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 정철과 대립했다. 선조의 병환이 잦고 나이가 40을 넘었으므로, 후사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공론이 대두되었다. 이산해는 좌의정 정철, 우의정 류성룡 등을 의정부로 불러 광해군을 후사로 정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35] 그러나 이산해는 비밀리에 인빈 김씨의 친정 오빠인 김공량에게 정철 일파가 인빈 김씨신성군을 모해하려 한다고 알렸고, 인빈 김씨선조에게 정철이 자신의 모자를 제거하려 한다며 궐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35]

이산해는 정여립 사건 때 정철과 적이 되지 않기 위해 정언신의 후임으로 정철을 추천하기도 했지만, 서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35] 또한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신성군을 낳자 그를 세자로 밀려 하고 있었다.[35] 이산해는 인빈의 오빠인 김공량과 가까웠으므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35]

이산해는 세 사람이 함께 모여 건저를 주청하기로 약속한 날, 병을 핑계로 정청에 나가지 않았으며, 건저 주청 전날 아들 경전을 시켜 김공량을 찾아가 정철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고 난 다음 인빈 김씨신성군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다고 전했다.[36][35] 이를 들은 김공량이 즉시 인빈에게 달려가 그 말을 전했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하소연했다.[35]

이산해는 만조백관들을 이끌고 선조에게 가서 후사를 세울 것을 주청했다. 선조는 누가 후사로 적합한가를 문의했고, 좌의정 정철은 바로 광해군이 영명하니 세자로서 적합하다고 추천했다. 이때,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동의했고, 동인인 류성룡과 이산해는 침묵을 지켰다.[37] 진노한 선조는 그자리에서 정철을 파직하고,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던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의 관직을 강등하고 외지로 쫓아냈다.[37]

결국 이산해는 인빈 김씨와 결탁하여 정철을 모함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던 서인들이 대거 숙청되었다.[37]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성사시킨 공으로 광국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정철의 처리를 놓고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파직, 유배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며 류성룡우성전은 선처를 호소했다. 이산해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잊었느냐며 분개했고, 정인홍 등은 류성룡우성전을 공박했다.[38]

강경파였던 이산해는 사간원사헌부동인들에게 양사가 합계하여 탄핵할 것을 지시했고, 김수와 우성전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했다.[38]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사형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우성전을 공격하면서 우성전이 축첩을 한 것과 부모의 상중에도 기생 첩이 수시로 우성전의 집에 출입한 점 역시 지적했다. 이산해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으로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 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 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은 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이다. 이때 이산해는 정철을 죽여야 된다고 강력하게 역설했다. 정철을 살려두면 다시 음모를 꾸며 동인을 일망타진하려 들 것이니, 이번 기회에 정철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다.

우성전이산해가 대립하게 되면서 류성룡은 우성전의 편을 들어 남인이 되고, 이산해와 정인홍, 이발(李潑) 등은 북인이 되었다.[39] 사람들은 이때부터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남인이라 불렀고, 이산해의 집이 서울의 북악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북인이라 불렀다.[39]

남인북인의 분당은 이산해가 정철을 죽이자고 하거나 정철의 처벌이나 전랑 천거 이전에 이미 이황학파와 조식학파 간 사물관, 이론의 차이[40]에 기인한 것으로, 기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로써 기를 다스려야 된다는 이황 학파와, 이와 기를 논하는 것은 공리공담이라고 본 조식 학파의 이념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1592년(선조 25년)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45] 임진왜란 발발 직후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하는 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진 뒤 국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이유였다.[46] 조정의 파천을 놓고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으나 이산해는 과거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했고, 주변에서는 웅성대더니 그 책임을 이산해에게 돌렸다. 양사가 합계하여 파면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도성의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도성을 고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46] 이후 서인계 언관과 성균관 유생들의 맹공격을 받고 파직당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 조정이 평양을 거쳐 의주로 파천하였으나, 5월 2일 조정을 파천할 것을 청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47] 선조가 피난 중 개성에 머무를 때, 종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김공량(인빈 김씨의 오라버니)이 궐내와 통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죄와,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하며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43] 이후 5월 3일 양사에서 그를 유배보내야 된다고 탄핵하였으나 선조는 삭탈관직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양사는 5월 4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 합계하여 그를 공격하였고 5월 17일 중도부처의 명이 떨어졌다. 평양에서 다시 서인계 언관들의 집중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45] 유배지에서 그는 시와 서예, 그림 등을 그리며 우울함을 달랬다. 전서와 해서, 초서에 두루 능하여 전란 중인데도 그의 작품을 구하러 유배지를 찾아오는 사대부와 유지들도 있었다.

그의 글씨가 새겨진 목판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자신의 친필 초서로 쓴 것을 스스로 판각하였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장군 이순신원균 사이의 내분이 문제가 되었다. 이순신류성룡, 권율 등과 친분이 있자, 그는 상대적으로 원균을 지지, 옹호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도 북인의 당수로서 실력을 행사하였고, 남인들의 타협론에 의혹을 제기하며 남인들이 서인들과 내통했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1595년(선조 28년) 1월 11일 선조의 특명으로 다시 석방되고 관작을 돌려받았다. 서인들은 그가 임진왜란 초 파천을 주장했음을 지적하며 석방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석방되었다. 1595년 1월 24일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3월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상소를 읽고 다시 출사하게 하였다. 이후 출사하여 파천한 조정이 있는 곳으로 갔다. 9월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5년 10월 천도한 조정에서 열린 비변사 회의에서 비변사의 특별 추천으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직 상소인 걸퇴소(乞退疏)를 올리고 며칠의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선조가 다시 부르자 장문의 사직 상소인 걸면본직병사대제학소(乞免本職竝辭大提學疏)를 올려 거듭 사양하였다. 상소는 윤허되지 않았고, 다시 서인계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인들의 반대를 견뎌내고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직을 겸직한다. 이후 북인의 당수이자 정신적 지주로 있다가, 북인 내에서도 다시 기성 북인들에 불만을 가진 소북과 기성 세력인 대북으로 갈라졌는데 이산해는 홍여순과 함께 대북세력을 지지하였으나 소극적으로 관망하였다.

임진왜란중에 이순신을 지지한 류성룡과 대립하여, 이산해는 원균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귀환 후 그는 대제학이 되었고, 당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된 북인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이산해는 대북에 속했지만, 당파 싸움에는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1596년 7월 이몽학의 반란이 진압되자 류성룡, 윤두수,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 윤자신(尹自新), 대사간 이기(李墍), 대사헌 유영경(柳永慶), 우승지 이광정(李光庭) 등과 함께 이몽학의 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국문장의 추관이 되었다. 그해 8월 이몽학의 난 관련자의 위관에게 포상할 때 상을 받았다.

1598년(선조 3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군하기 시작하면서 임진왜란이 종결되었다. 이산해는 이미 사면[48]되어 서울에 돌아와 있었고, 그의 아들 이경전은 이미 과거에 급제해 있었다. 옥당 관원을 뽑게 되었는데, 이경전이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있고 또한 대신의 아들이라 당연히 전랑에 천거되었다.[49]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이조정랑(Ijo Jeongrang)직에 추천되었지만, 남인(남인)인 전임 이조정랑 정경세(Jung Gyung Sae)가 이산해의 성격을 이유로 반대했다. 이는 이산해와 그의 추종자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고, 남인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그의 아들 이경전이 이조에 천거되자 당시 영남 사람 정경세가 전랑으로 있었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고자 이렇게 말했다.<

2. 1. 생애 초기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1539년(중종 34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감 이지번(李之蕃)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작은아버지는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그의 총명함이 조정에까지 전해져 명종임금에 의해 회자화될 정도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장안의 명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5] 다섯 살 때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며, 열다섯 살에는 향시 시험에 여러 번 합격하였고, 뛰어난 서예와 그림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한 조식이황에게서 수학하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처음 우는 소리를 듣고 작은아버지였던 이지함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특하니 잘 보호하십시오. 우리 문호가 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이오"라 했다.[4] 5세 때 처음 병풍에 글씨를 썼는데, 운필하는 것이 귀신같아서 신동이라고 일컬어졌다.[4]

자라서 돌이 지나자 스스로 글자를 해독할 수가 있어서 세 갈래로 갈라진 당파창(鏜鈀槍)을 메고 당(堂)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산해는 그것을 보고 갑자기 “산자(山字)다.”라고 말하였다. 성암공이 황 고산(黃孤山)의 초서(草書)를 얻어 벽에 붙여놓고 즐겼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종이가 약간 헐고 더럽혀져 있었다. 괴이하게 여기며 그 이유를 묻자, 유모(乳母)가 말하기를, “아이가 저를 잡아끌기에 안아서 얼굴빛을 보니 기뻐하며 손가락으로 아래 위를 그어대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종이와 붓을 찾아서 이산해에게 쓰게 하니 한 획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 일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6]

5세가 되어서 토정 이지함이 그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기특하게 여겨서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는데, 한 마디의 말로 곧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아서 『태극도』를 가리키면서 따져 묻고 비난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것을 잊었으므로 이지함이 혹시라도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그가 읽는 것을 그치도록 하였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운자(韻字)을 불러주고 시를 짓게 하였는데 운자에 따라 거침없이 시를 지었다.

밥이 더디 되어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배움이 더디면 어떻겠으며

배가 고파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떠하랴?

집은 가난해도 오히려 마음을 치료할 약은 있는 법이니

모름지기 영대(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하리.[6]


5세의 나이에 운에 맞추어 시를 지으니 토정 이지함은 더욱 그를 기특해하면서도 각별하게 여겼다. 여섯 살때에는 초서(草書)·예서(隷書)를 잘 써서 이름이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산해는 6세 때 이미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장원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산해를 우러러 봤으며, 그 사람됨이 순후(醇厚)하고 숙성하여 얻기 어려운 선비라는 말을 들었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선조대 8문장가의 한 명으로 칭송되며 나라에 그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다. 소년기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여 대과 응시 자격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서 글과 학문을 계속 수학한다.

삼촌이자 서경덕의 문인인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수학하다가 뒤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7] 그 뒤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특히 조식의 문하에서 만난 김우옹, 정구, 곽재우, 정인홍 등은 그와 같은 북인을 형성한다. 또한 정구김효원도 그처럼 조식의 문하와 이황의 문하를 동시에 수학하기도 했다. 이황의 문하에서 만난 류성룡은 후일 그와 같은 동인의 창당에 참여하지만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이후 향시(鄕試)에 장원하였고, 이어 생원시에 응시하게 된다.

한편 그의 총명함을 알고 윤원형이 자기의 딸과 결혼시키려 하자, 아버지 이지번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숙부 이지함(李之菡)과 함께 단양(丹陽)의 구담(龜潭)으로 피신해서 숨어살았다.[8]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21살 때는 명종에게 그 학문의 뛰어남을 인정받았으며, 1560년(명종 15) 4월명종이 친히 주관한 성균관의 제술에서 1등하여 바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9])될 자격이 주어졌다.

일찍이 그는 학자 겸 예언가 남사고와 함께 송송정(宋松亭)에 앉아 서쪽으로 안령(鞍嶺)과 동쪽으로 낙봉(駱峯)을 가리키며 뒷날 조정에 반드시 동서의 당(黨)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전한다.[5]

1561년(명종 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에 보임되었다.

2. 1. 1. 출생과 가정 배경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1539년(중종 34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감 이지번(李之蕃)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작은아버지는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그의 총명함이 조정에까지 전해져 명종임금에 의해 회자화될 정도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장안의 명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5] 다섯 살 때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며, 열다섯 살에는 향시 시험에 여러 번 합격하였고, 뛰어난 서예와 그림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한 조식이황에게서 수학하였다.

2. 1. 2. 유년기와 소년기

그가 태어났을 때 처음 우는 소리를 듣고 작은아버지였던 이지함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특하니 잘 보호하십시오. 우리 문호가 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이오"라 했다.[4] 5세 때 처음 병풍에 글씨를 썼는데, 운필하는 것이 귀신같아서 신동이라고 일컬어졌다.[4]

자라서 돌이 지나자 스스로 글자를 해독할 수가 있어서 세 갈래로 갈라진 당파창(鏜鈀槍)을 메고 당(堂)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산해는 그것을 보고 갑자기 “산자(山字)다.”라고 말하였다. 성암공이 황 고산(黃孤山)의 초서(草書)를 얻어 벽에 붙여놓고 즐겼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종이가 약간 헐고 더럽혀져 있었다. 괴이하게 여기며 그 이유를 묻자, 유모(乳母)가 말하기를, “아이가 저를 잡아끌기에 안아서 얼굴빛을 보니 기뻐하며 손가락으로 아래 위를 그어대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종이와 붓을 찾아서 이산해에게 쓰게 하니 한 획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 일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6]

5세가 되어서 토정 이지함이 그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기특하게 여겨서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는데, 한 마디의 말로 곧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아서 『태극도』를 가리키면서 따져 묻고 비난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것을 잊었으므로 이지함이 혹시라도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그가 읽는 것을 그치도록 하였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운자(韻字)을 불러주고 시를 짓게 하였는데 운자에 따라 거침없이 시를 지었다.

밥이 더디 되어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배움이 더디면 어떻겠으며

배가 고파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떠하랴?

집은 가난해도 오히려 마음을 치료할 약은 있는 법이니

모름지기 영대(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하리.[6]


5세의 나이에 운에 맞추어 시를 지으니 토정 이지함은 더욱 그를 기특해하면서도 각별하게 여겼다. 여섯 살때에는 초서(草書)·예서(隷書)를 잘 써서 이름이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산해는 6세 때 이미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장원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산해를 우러러 봤으며, 그 사람됨이 순후(醇厚)하고 숙성하여 얻기 어려운 선비라는 말을 들었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선조대 8문장가의 한 명으로 칭송되며 나라에 그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다. 소년기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여 대과 응시 자격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서 글과 학문을 계속 수학한다.

삼촌이자 서경덕의 문인인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수학하다가 뒤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7] 그 뒤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특히 조식의 문하에서 만난 김우옹, 정구, 곽재우, 정인홍 등은 그와 같은 북인을 형성한다. 또한 정구김효원도 그처럼 조식의 문하와 이황의 문하를 동시에 수학하기도 했다. 이황의 문하에서 만난 류성룡은 후일 그와 같은 동인의 창당에 참여하지만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이후 향시(鄕試)에 장원하였고, 이어 생원시에 응시하게 된다.

한편 그의 총명함을 알고 윤원형이 자기의 딸과 결혼시키려 하자, 아버지 이지번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숙부 이지함(李之菡)과 함께 단양(丹陽)의 구담(龜潭)으로 피신해서 숨어살았다.[8]

2. 1. 3. 청년기와 성균관 수학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21살 때는 명종에게 그 학문의 뛰어남을 인정받았으며, 1560년(명종 15) 4월명종이 친히 주관한 성균관의 제술에서 1등하여 바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9])될 자격이 주어졌다.

일찍이 그는 학자 겸 예언가 남사고와 함께 송송정(宋松亭)에 앉아 서쪽으로 안령(鞍嶺)과 동쪽으로 낙봉(駱峯)을 가리키며 뒷날 조정에 반드시 동서의 당(黨)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전한다.[5]

1561년(명종 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에 보임되었다.

2. 2. 관료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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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 글씨를 잘 쓴다 하여 추천을 받아 홍문관정자가 되었다.[5] 이후 여러번 관직을 보직이동하였으나 글을 잘 써서 항상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직하여 실록 작성에 참여하였다. 1563년 3월 홍문관수찬, 홍문관 저작을 거쳐, 3월 26일 다시 홍문관정자가 되고 4월 홍문관 정자, 그해 7월 26일 홍문관 저작(著作)을 지냈다. 그해 8월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 교리 최옹·고경명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이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5] 10월 1일 홍문관박사가 되었다.

1564년 2월 부수찬(副修撰), 박사(博士), 수찬(修撰), 사간원정언(正言), 병조좌랑, 홍문관수찬을 지내고, 6월 왕명으로 과거 시험장에 그려질 병풍의 시제를 지었다. 1564년 명나라 사신들이 계속 방문하여 조정에서는 문학(文學)을 두루 갖춘 사람을 가려서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게 하였는데 그가 선발되어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정언, 1565년 1월 홍문관부수찬이 되고 이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5월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년) 1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자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할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국경에 나가 명나라 조사(詔使) 일행을 영접하고 돌아왔다. 그해 2월 홍문관부교리, 4월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홍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으로 선조즉위 초 춘추관(春秋館)의 사관으로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70년(선조 4년) 5월 직제학으로 구황 적간 어사(救荒奸御史)에 임명되어 파견되었으며, 1571년 6월 28일 사간원대사간, 9월 이조참의, 1572년 사간원대사간, 9월 17일 이조참의, 1573년(선조 6년) 4월 18일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575년(선조 9년) 1월 왕명으로 2품 이상의 재상에게 지문(誌文) 제술을 명하였으나 예문관에서 선발된 유희춘이 스스로 사직하고 이산해를 천거하여 그가 대신 지문을 짓게 되었다. 2월 11일 대사간이 되었다.

'''동인당 조직'''

조식이퇴계의 문하생이며 서경덕계열이기도 한 그는 이이가 스승들 중 한사람인 이황의 학설인 이기이원론을 정면 반박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는데, 류성룡, 정온, 박승임, 정인홍 등과 함께 동인을 형성했다.[11]

그러나 그해 아버지 이지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

1578년(선조 11년) 사간원대사간으로 재직 중 진도군 이수의 뇌물 사건을 접한 뒤, 서인(西人)의 거물인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비리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12]

1579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1580년 간의대 재건축 공사에 참여하였고,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하였다.

1581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6월 1일 어머니 남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13]

1583년 9월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10월 30일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1584년(선조 17년) 2월 1일 이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당시 이산해는 이조판서였다. 이에 서인 정철의 파인 김응생(金應生) 등이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인사권을 주면 권한이 비대해질 우려가 있다고 공격했다. 동서 분당의 시대였던 당시는 동인이 우세한 시기였다.[16] 그러자 선조는 왕년에 경안군이 류성룡을 참소하더니, 금년에는 김응생이 이산해를 참소한다고 역정을 냈다. 이 두 사람은 국가의 주석(柱石)인데 소인배들이 헐뜯고 있다는 것이었다.[16] 이산해는 이를 정철의 사주로 해석했다.

1585년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김우옹은 정철·신응시(辛應時) 등이 사당(私黨)을 많이 끌어들여 조정을 탁란시켰는데, 전하의 명찰(明察)에 힘입어 이산해(李山海)를 전장(銓長)으로 삼아 위임하셨기 때문에 저들이 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17] 10월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586년 10월 조헌이 그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자 출사를 거부하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이의 문하인 유생 조광현이귀 등이 '이이와 친했으면서도 이이가 무고당하는 것을 좌시했다'고 이산해를 비난하였다.[19]

1588년(선조 21년) 종계변무 사은표를 지었다.[22] 6월 종계변무사를 통해 보낼 종계사은표를 지었으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쓰지 않을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21]

1588년 11월 20일 의정부우의정 유전이 북경에 있을 때 습증(濕症)을 얻어 걷지 못하므로 사직하면서, 이산해는 의정부우의정으로 특별 발탁되었다. 서인들은 반대를 하였으나 왕은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23] 11월 25일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23] 1589년 2월 1일 의정부좌의정이 되고,[23] 9월 우상 정언신(鄭彦信)과 함께 선조를 독대하여 일본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23] 11월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23]

정여립의 옥사로 동인 1천여명이 화를 입었다.[72] 이 중에는 어린이와 아기도 처형당하였고, 이발의 10세 미만의 두 아들과 80세 노모가 곤장을 맞다 죽었다. 당시 형문을 주관하던 형관은 송강 정철로, 형장의 몰골을 목격한 이산해는 정철에게 심한 반감과 원한을 품게 된다.

기축옥사 당시 홍성민이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의 발언에 그를 연루시킨 것도 서인에 대한 반감을 품는 원인이 됐다. 대사헌 홍성민이 선조에게 "정언신의 그 말은 신과 유홍과 더불어 혀를 찼고, 이산해도 그 불가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언신[25]이 재삼 말하자 이산해도 조금 굽혀서 '다시 생각해보니 솔직하게 말하면 우상의 말도 옳다'하였습니다"라고 말하여 이산해를 모략했던 것이다.[4]

1591년(선조 24년) 세자 건저 문제(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 정철과 대립했다. 선조의 병환이 잦고 나이가 40을 넘었으므로, 후사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공론이 대두되었다. 이산해는 좌의정 정철, 우의정 류성룡 등을 의정부로 불러 광해군을 후사로 정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35] 그러나 이산해는 비밀리에 인빈 김씨의 친정 오빠인 김공량에게 정철 일파가 인빈 김씨신성군을 모해하려 한다고 알렸고, 인빈 김씨선조에게 정철이 자신의 모자를 제거하려 한다며 궐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35]

이산해는 정여립 사건 때 정철과 적이 되지 않기 위해 정언신의 후임으로 정철을 추천하기도 했지만, 서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35] 또한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신성군을 낳자 그를 세자로 밀려 하고 있었다.[35] 이산해는 인빈의 오빠인 김공량과 가까웠으므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35]

이산해는 세 사람이 함께 모여 건저를 주청하기로 약속한 날, 병을 핑계로 정청에 나가지 않았으며, 건저 주청 전날 아들 경전을 시켜 김공량을 찾아가 정철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고 난 다음 인빈 김씨신성군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다고 전했다.[36][35] 이를 들은 김공량이 즉시 인빈에게 달려가 그 말을 전했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하소연했다.[35]

이산해는 만조백관들을 이끌고 선조에게 가서 후사를 세울 것을 주청했다. 선조는 누가 후사로 적합한가를 문의했고, 좌의정 정철은 바로 광해군이 영명하니 세자로서 적합하다고 추천했다. 이때,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동의했고, 동인인 류성룡과 이산해는 침묵을 지켰다.[37] 진노한 선조는 그자리에서 정철을 파직하고,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던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의 관직을 강등하고 외지로 쫓아냈다.[37]

결국 이산해는 인빈 김씨와 결탁하여 정철을 모함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던 서인들이 대거 숙청되었다.[37]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성사시킨 공으로 광국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정철의 처리를 놓고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파직, 유배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며 류성룡우성전은 선처를 호소했다. 이산해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잊었느냐며 분개했고, 정인홍 등은 류성룡우성전을 공박했다.[38]

강경파였던 이산해는 사간원사헌부동인들에게 양사가 합계하여 탄핵할 것을 지시했고, 김수와 우성전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했다.[38]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사형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우성전을 공격하면서 우성전이 축첩을 한 것과 부모의 상중에도 기생 첩이 수시로 우성전의 집에 출입한 점 역시 지적했다. 이산해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으로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 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 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은 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이다. 이때 이산해는 정철을 죽여야 된다고 강력하게 역설했다. 정철을 살려두면 다시 음모를 꾸며 동인을 일망타진하려 들 것이니, 이번 기회에 정철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다.

우성전이산해가 대립하게 되면서 류성룡은 우성전의 편을 들어 남인이 되고, 이산해와 정인홍, 이발(李潑) 등은 북인이 되었다.[39] 사람들은 이때부터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남인이라 불렀고, 이산해의 집이 서울의 북악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북인이라 불렀다.[39]

남인북인의 분당은 이산해가 정철을 죽이자고 하거나 정철의 처벌이나 전랑 천거 이전에 이미 이황학파와 조식학파 간 사물관, 이론의 차이[40]에 기인한 것으로, 기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로써 기를 다스려야 된다는 이황 학파와, 이와 기를 논하는 것은 공리공담이라고 본 조식 학파의 이념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2. 2. 1. 관료 생활 초반

1562년 글씨를 잘 쓴다 하여 추천을 받아 홍문관정자가 되었다.[5] 이후 여러번 관직을 보직이동하였으나 글을 잘 써서 항상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직하여 실록 작성에 참여하였다. 1563년 3월 홍문관수찬, 홍문관 저작을 거쳐, 3월 26일 다시 홍문관정자가 되고 4월 홍문관 정자, 그해 7월 26일 홍문관 저작(著作)을 지냈다. 그해 8월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 교리 최옹·고경명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이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5] 10월 1일 홍문관박사가 되었다.

1564년 2월 부수찬(副修撰), 박사(博士), 수찬(修撰), 사간원정언(正言), 병조좌랑, 홍문관수찬을 지내고, 6월 왕명으로 과거 시험장에 그려질 병풍의 시제를 지었다. 1564년 명나라 사신들이 계속 방문하여 조정에서는 문학(文學)을 두루 갖춘 사람을 가려서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게 하였는데 그가 선발되어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정언, 1565년 1월 홍문관부수찬이 되고 이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5월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년) 1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자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할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국경에 나가 명나라 조사(詔使) 일행을 영접하고 돌아왔다. 그해 2월 홍문관부교리, 4월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홍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으로 선조즉위 초 춘추관(春秋館)의 사관으로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2. 2. 2. 관료 생활

1570년(선조 4년) 5월 직제학으로 구황 적간 어사(救荒奸御史)에 임명되어 파견되었으며, 1571년 6월 28일 사간원대사간, 9월 이조참의, 1572년 사간원대사간, 9월 17일 이조참의, 1573년(선조 6년) 4월 18일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575년(선조 9년) 1월 왕명으로 2품 이상의 재상에게 지문(誌文) 제술을 명하였으나 예문관에서 선발된 유희춘이 스스로 사직하고 이산해를 천거하여 그가 대신 지문을 짓게 되었다. 2월 11일 대사간이 되었다.

'''동인당 조직'''

조식이퇴계의 문하생이며 서경덕계열이기도 한 그는 이이가 스승들 중 한사람인 이황의 학설인 이기이원론을 정면 반박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는데, 류성룡, 정온, 박승임, 정인홍 등과 함께 동인을 형성했다.[11]

그러나 그해 아버지 이지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

2. 2. 3. 서인과의 갈등

1578년(선조 11년) 사간원대사간으로 재직 중 진도군 이수의 뇌물 사건을 접한 뒤, 서인(西人)의 거물인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비리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12]

1579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1580년 간의대 재건축 공사에 참여하였고,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하였다.

1581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6월 1일 어머니 남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13]

1583년 9월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10월 30일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1584년(선조 17년) 2월 1일 이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당시 이산해는 이조판서였다. 이에 서인 정철의 파인 김응생(金應生) 등이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인사권을 주면 권한이 비대해질 우려가 있다고 공격했다. 동서 분당의 시대였던 당시는 동인이 우세한 시기였다.[16] 그러자 선조는 왕년에 경안군이 류성룡을 참소하더니, 금년에는 김응생이 이산해를 참소한다고 역정을 냈다. 이 두 사람은 국가의 주석(柱石)인데 소인배들이 헐뜯고 있다는 것이었다.[16] 이산해는 이를 정철의 사주로 해석했다.

1585년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김우옹은 정철·신응시(辛應時) 등이 사당(私黨)을 많이 끌어들여 조정을 탁란시켰는데, 전하의 명찰(明察)에 힘입어 이산해(李山海)를 전장(銓長)으로 삼아 위임하셨기 때문에 저들이 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17] 10월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586년 10월 조헌이 그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자 출사를 거부하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이의 문하인 유생 조광현이귀 등이 '이이와 친했으면서도 이이가 무고당하는 것을 좌시했다'고 이산해를 비난하였다.[19]

2. 2. 4. 종계변무 사은표문을 쓰다

1588년(선조 21년) 종계변무 사은표를 지었다.[22] 6월 종계변무사를 통해 보낼 종계사은표를 지었으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쓰지 않을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21]

2. 2. 5. 우의정과 좌의정 재직

1588년 11월 20일 의정부우의정 유전이 북경에 있을 때 습증(濕症)을 얻어 걷지 못하므로 사직하면서, 이산해는 의정부우의정으로 특별 발탁되었다. 서인들은 반대를 하였으나 왕은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23] 11월 25일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23] 1589년 2월 1일 의정부좌의정이 되고,[23] 9월 우상 정언신(鄭彦信)과 함께 선조를 독대하여 일본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23] 11월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23]

2. 2. 6.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

정여립의 옥사로 동인 1천여명이 화를 입었다.[72] 이 중에는 어린이와 아기도 처형당하였고, 이발의 10세 미만의 두 아들과 80세 노모가 곤장을 맞다 죽었다. 당시 형문을 주관하던 형관은 송강 정철로, 형장의 몰골을 목격한 이산해는 정철에게 심한 반감과 원한을 품게 된다.

기축옥사 당시 홍성민이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의 발언에 그를 연루시킨 것도 서인에 대한 반감을 품는 원인이 됐다. 대사헌 홍성민이 선조에게 "정언신의 그 말은 신과 유홍과 더불어 혀를 찼고, 이산해도 그 불가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언신[25]이 재삼 말하자 이산해도 조금 굽혀서 '다시 생각해보니 솔직하게 말하면 우상의 말도 옳다'하였습니다"라고 말하여 이산해를 모략했던 것이다.[4]

2. 2. 7. 세자 건저 파동과 서인 숙청

1591년(선조 24년) 세자 건저 문제(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 정철과 대립했다. 선조의 병환이 잦고 나이가 40을 넘었으므로, 후사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공론이 대두되었다. 이산해는 좌의정 정철, 우의정 류성룡 등을 의정부로 불러 광해군을 후사로 정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35] 그러나 이산해는 비밀리에 인빈 김씨의 친정 오빠인 김공량에게 정철 일파가 인빈 김씨신성군을 모해하려 한다고 알렸고, 인빈 김씨선조에게 정철이 자신의 모자를 제거하려 한다며 궐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35]

이산해는 정여립 사건 때 정철과 적이 되지 않기 위해 정언신의 후임으로 정철을 추천하기도 했지만, 서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35] 또한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신성군을 낳자 그를 세자로 밀려 하고 있었다.[35] 이산해는 인빈의 오빠인 김공량과 가까웠으므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35]

이산해는 세 사람이 함께 모여 건저를 주청하기로 약속한 날, 병을 핑계로 정청에 나가지 않았으며, 건저 주청 전날 아들 경전을 시켜 김공량을 찾아가 정철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고 난 다음 인빈 김씨신성군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다고 전했다.[36][35] 이를 들은 김공량이 즉시 인빈에게 달려가 그 말을 전했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하소연했다.[35]

이산해는 만조백관들을 이끌고 선조에게 가서 후사를 세울 것을 주청했다. 선조는 누가 후사로 적합한가를 문의했고, 좌의정 정철은 바로 광해군이 영명하니 세자로서 적합하다고 추천했다. 이때,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동의했고, 동인인 류성룡과 이산해는 침묵을 지켰다.[37] 진노한 선조는 그자리에서 정철을 파직하고,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던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의 관직을 강등하고 외지로 쫓아냈다.[37]

결국 이산해는 인빈 김씨와 결탁하여 정철을 모함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던 서인들이 대거 숙청되었다.[37]

2. 2. 8. 류성룡, 우성전과의 갈등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성사시킨 공으로 광국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정철의 처리를 놓고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파직, 유배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며 류성룡우성전은 선처를 호소했다. 이산해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잊었느냐며 분개했고, 정인홍 등은 류성룡우성전을 공박했다.[38]

강경파였던 이산해는 사간원사헌부동인들에게 양사가 합계하여 탄핵할 것을 지시했고, 김수와 우성전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했다.[38]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사형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우성전을 공격하면서 우성전이 축첩을 한 것과 부모의 상중에도 기생 첩이 수시로 우성전의 집에 출입한 점 역시 지적했다. 이산해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으로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 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 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은 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이다. 이때 이산해는 정철을 죽여야 된다고 강력하게 역설했다. 정철을 살려두면 다시 음모를 꾸며 동인을 일망타진하려 들 것이니, 이번 기회에 정철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다.

2. 2. 9. 남북 분당

우성전이산해가 대립하게 되면서 류성룡은 우성전의 편을 들어 남인이 되고, 이산해와 정인홍, 이발(李潑) 등은 북인이 되었다.[39] 사람들은 이때부터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남인이라 불렀고, 이산해의 집이 서울의 북악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북인이라 불렀다.[39]

남인북인의 분당은 이산해가 정철을 죽이자고 하거나 정철의 처벌이나 전랑 천거 이전에 이미 이황학파와 조식학파 간 사물관, 이론의 차이[40]에 기인한 것으로, 기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로써 기를 다스려야 된다는 이황 학파와, 이와 기를 논하는 것은 공리공담이라고 본 조식 학파의 이념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2. 3. 임진왜란 전후

1592년(선조 25년)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45] 임진왜란 발발 직후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하는 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진 뒤 국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이유였다.[46] 조정의 파천을 놓고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으나 이산해는 과거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했고, 주변에서는 웅성대더니 그 책임을 이산해에게 돌렸다. 양사가 합계하여 파면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도성의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도성을 고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46] 이후 서인계 언관과 성균관 유생들의 맹공격을 받고 파직당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 조정이 평양을 거쳐 의주로 파천하였으나, 5월 2일 조정을 파천할 것을 청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47] 선조가 피난 중 개성에 머무를 때, 종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김공량(인빈 김씨의 오라버니)이 궐내와 통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죄와,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하며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43] 이후 5월 3일 양사에서 그를 유배보내야 된다고 탄핵하였으나 선조는 삭탈관직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양사는 5월 4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 합계하여 그를 공격하였고 5월 17일 중도부처의 명이 떨어졌다. 평양에서 다시 서인계 언관들의 집중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45] 유배지에서 그는 시와 서예, 그림 등을 그리며 우울함을 달랬다. 전서와 해서, 초서에 두루 능하여 전란 중인데도 그의 작품을 구하러 유배지를 찾아오는 사대부와 유지들도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장군 이순신원균 사이의 내분이 문제가 되었다. 이순신류성룡, 권율 등과 친분이 있자, 그는 상대적으로 원균을 지지, 옹호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도 북인의 당수로서 실력을 행사하였고, 남인들의 타협론에 의혹을 제기하며 남인들이 서인들과 내통했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1595년(선조 28년) 1월 11일 선조의 특명으로 다시 석방되고 관작을 돌려받았다. 서인들은 그가 임진왜란 초 파천을 주장했음을 지적하며 석방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석방되었다. 1595년 1월 24일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3월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상소를 읽고 다시 출사하게 하였다. 이후 출사하여 파천한 조정이 있는 곳으로 갔다. 9월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5년 10월 천도한 조정에서 열린 비변사 회의에서 비변사의 특별 추천으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직 상소인 걸퇴소(乞退疏)를 올리고 며칠의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선조가 다시 부르자 장문의 사직 상소인 걸면본직병사대제학소(乞免本職竝辭大提學疏)를 올려 거듭 사양하였다. 상소는 윤허되지 않았고, 다시 서인계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인들의 반대를 견뎌내고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직을 겸직한다. 이후 북인의 당수이자 정신적 지주로 있다가, 북인 내에서도 다시 기성 북인들에 불만을 가진 소북과 기성 세력인 대북으로 갈라졌는데 이산해는 홍여순과 함께 대북세력을 지지하였으나 소극적으로 관망하였다.

임진왜란중에 이순신을 지지한 류성룡과 대립하여, 이산해는 원균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귀환 후 그는 대제학이 되었고, 당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된 북인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이산해는 대북에 속했지만, 당파 싸움에는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1596년 7월 이몽학의 반란이 진압되자 류성룡, 윤두수,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 윤자신(尹自新), 대사간 이기(李墍), 대사헌 유영경(柳永慶), 우승지 이광정(李光庭) 등과 함께 이몽학의 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국문장의 추관이 되었다. 그해 8월 이몽학의 난 관련자의 위관에게 포상할 때 상을 받았다.

1598년(선조 3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군하기 시작하면서 임진왜란이 종결되었다. 이산해는 이미 사면[48]되어 서울에 돌아와 있었고, 그의 아들 이경전은 이미 과거에 급제해 있었다. 옥당 관원을 뽑게 되었는데, 이경전이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있고 또한 대신의 아들이라 당연히 전랑에 천거되었다.[49]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이조정랑(Ijo Jeongrang)직에 추천되었지만, 남인(남인)인 전임 이조정랑 정경세(Jung Gyung Sae)가 이산해의 성격을 이유로 반대했다. 이는 이산해와 그의 추종자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고, 남인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그의 아들 이경전이 이조에 천거되자 당시 영남 사람 정경세가 전랑으로 있었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고자 이렇게 말했다.[49]

"이경전은 유생 때부터 남에게 비방을 많이 들었으므로 이조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49]

이 말을 듣고 이산해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모두 크게 노했다.[49] 이 발언의 진원지로 이산해는 류성룡을 의심하였다. 이후 남인류성룡계파에 대한 그의 분노와 불만은 한층 더해갔다.

그때 이덕형이 재상으로 있었는데,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이준에게 이렇게 청했다.[49] 당시 이덕형은 남인이었다.

"자네가 경암(정경세의 자)에게 말하게. 만약 이경전이 전랑에 천거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일어날 터이니, 이는 조정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세. 이는 내가 사사로이(그의 처남이기도 하다.) 하는 말이 아닐세."[49]

이준은 정경세와 고향이 같고, 이경전은 이덕형의 처남인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경세는 듣지 않았다.[50]

얼마 뒤 대간 남이공이 정승 류성룡을 참혹하게 탄핵했다.[50] 이중환에 의하면 당시 이 탄핵을 두고 '정경세는 본래 류성룡의 제자였으므로, 이산해는 류성룡정경세를 사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그러므로 남이공을 시켜 류성룡을 탄핵하도록 한 것이지, 류성룡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보았다.[50]

2. 3. 1. 영의정 취임과 면직

1592년(선조 25년)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45] 임진왜란 발발 직후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하는 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진 뒤 국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이유였다.[46] 조정의 파천을 놓고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으나 이산해는 과거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했고, 주변에서는 웅성대더니 그 책임을 이산해에게 돌렸다. 양사가 합계하여 파면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도성의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도성을 고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46] 이후 서인계 언관과 성균관 유생들의 맹공격을 받고 파직당한다.

2. 3. 2. 임진왜란 발발과 유배 생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 조정이 평양을 거쳐 의주로 파천하였으나, 5월 2일 조정을 파천할 것을 청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47] 선조가 피난 중 개성에 머무를 때, 종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김공량(인빈 김씨의 오라버니)이 궐내와 통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죄와,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하며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43] 이후 5월 3일 양사에서 그를 유배보내야 된다고 탄핵하였으나 선조는 삭탈관직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양사는 5월 4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 합계하여 그를 공격하였고 5월 17일 중도부처의 명이 떨어졌다. 평양에서 다시 서인계 언관들의 집중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45] 유배지에서 그는 시와 서예, 그림 등을 그리며 우울함을 달랬다. 전서와 해서, 초서에 두루 능하여 전란 중인데도 그의 작품을 구하러 유배지를 찾아오는 사대부와 유지들도 있었다.

2. 3. 3. 임진왜란 기간 중

임진왜란 초기부터 장군 이순신원균 사이의 내분이 문제가 되었다. 이순신류성룡, 권율 등과 친분이 있자, 그는 상대적으로 원균을 지지, 옹호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도 북인의 당수로서 실력을 행사하였고, 남인들의 타협론에 의혹을 제기하며 남인들이 서인들과 내통했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1595년(선조 28년) 1월 11일 선조의 특명으로 다시 석방되고 관작을 돌려받았다. 서인들은 그가 임진왜란 초 파천을 주장했음을 지적하며 석방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석방되었다. 1595년 1월 24일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3월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상소를 읽고 다시 출사하게 하였다. 이후 출사하여 파천한 조정이 있는 곳으로 갔다. 9월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5년 10월 천도한 조정에서 열린 비변사 회의에서 비변사의 특별 추천으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직 상소인 걸퇴소(乞退疏)를 올리고 며칠의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선조가 다시 부르자 장문의 사직 상소인 걸면본직병사대제학소(乞免本職竝辭大提學疏)를 올려 거듭 사양하였다. 상소는 윤허되지 않았고, 다시 서인계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인들의 반대를 견뎌내고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직을 겸직한다. 이후 북인의 당수이자 정신적 지주로 있다가, 북인 내에서도 다시 기성 북인들에 불만을 가진 소북과 기성 세력인 대북으로 갈라졌는데 이산해는 홍여순과 함께 대북세력을 지지하였으나 소극적으로 관망하였다.

임진왜란중에 이순신을 지지한 류성룡과 대립하여, 이산해는 원균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귀환 후 그는 대제학이 되었고, 당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된 북인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이산해는 대북에 속했지만, 당파 싸움에는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2. 3. 4. 이몽학의 난

1596년 7월 이몽학의 반란이 진압되자 류성룡, 윤두수,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 윤자신(尹自新), 대사간 이기(李墍), 대사헌 유영경(柳永慶), 우승지 이광정(李光庭) 등과 함께 이몽학의 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국문장의 추관이 되었다. 그해 8월 이몽학의 난 관련자의 위관에게 포상할 때 상을 받았다.

2. 3. 5. 임진왜란의 종결과 복귀

1598년(선조 3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군하기 시작하면서 임진왜란이 종결되었다. 이산해는 이미 사면[48]되어 서울에 돌아와 있었고, 그의 아들 이경전은 이미 과거에 급제해 있었다. 옥당 관원을 뽑게 되었는데, 이경전이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있고 또한 대신의 아들이라 당연히 전랑에 천거되었다.[49]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이조정랑(Ijo Jeongrang)직에 추천되었지만, 남인(남인)인 전임 이조정랑 정경세(Jung Gyung Sae)가 이산해의 성격을 이유로 반대했다. 이는 이산해와 그의 추종자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고, 남인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2. 3. 6. 류성룡 일파 공격

그의 아들 이경전이 이조에 천거되자 당시 영남 사람 정경세가 전랑으로 있었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고자 이렇게 말했다.[49]

"이경전은 유생 때부터 남에게 비방을 많이 들었으므로 이조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49]

이 말을 듣고 이산해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모두 크게 노했다.[49] 이 발언의 진원지로 이산해는 류성룡을 의심하였다. 이후 남인류성룡계파에 대한 그의 분노와 불만은 한층 더해갔다.

그때 이덕형이 재상으로 있었는데,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이준에게 이렇게 청했다.[49] 당시 이덕형은 남인이었다.

"자네가 경암(정경세의 자)에게 말하게. 만약 이경전이 전랑에 천거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일어날 터이니, 이는 조정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세. 이는 내가 사사로이(그의 처남이기도 하다.) 하는 말이 아닐세."[49]

이준은 정경세와 고향이 같고, 이경전은 이덕형의 처남인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경세는 듣지 않았다.[50]

얼마 뒤 대간 남이공이 정승 류성룡을 참혹하게 탄핵했다.[50] 이중환에 의하면 당시 이 탄핵을 두고 '정경세는 본래 류성룡의 제자였으므로, 이산해는 류성룡정경세를 사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그러므로 남이공을 시켜 류성룡을 탄핵하도록 한 것이지, 류성룡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보았다.[50]

2. 4. 생애 후반

1570년 32세에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구황 적간 어사(救荒摘奸御史)에 임명되어 파견 나갔다.[4] 1571년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4] 1572년 이조 참의가 되었다.[4] 1574년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4] 1574년 세 번 사직상소를 올려 면직되었다.[4] 1575년 대사간이 다시 되었다.[4] 1578년 홍문관 대제학, 승정원 도승지,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4] 1579년 대사간으로서 서인 윤두수, 윤근수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4] 1580년 형조 판서가 되었다.[4] 1581년 43세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가 되었다.[4] 1584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다.[4] 1585년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4] 1588년 종계변무의 표문을 지었으나 곧 수정, 대제학에 올랐다.[4] 1588년 지춘추관사가 되었다.[4] 1588년 의정부우의정에 올랐다.[4] 1589년 비변사의 불차 채용(不次採用)에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였고, 좌의정에 올랐다.[4]

1590년 영의정에 올랐다.[4] 1590년 사절단의 한사람인 홍순언 등에 의해 종계변무(宗系辨誣)가 성사되자, 변무의 공으로 광국 공신에 책록되었다.[4] 1592년 54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파천을 주장하였다가 삭탈 관직되었음. 파면되어 평양에 이르렀을 때,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에 중도부처되었다.[4] 1595년 풀려나 직첩을 되돌려받았다.[4]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비변사의 특별 추천으로 홍문관 및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탄핵되었다.[4] 1600년 62세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4]

1599년 겨울에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다.[51] 1599년(선조 32년) 3월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 문제로 다시 갈등이 생겼다. 홍여순이 대사헌에 임명되자 석 달 후 다른 부서도 아닌 사헌부에서 “‘홍여순은 평생 경영한 일이 모두 재산을 불리고 사치를 일삼는 것’이고 북도순찰사(北道巡察使) 시절에는 사람을 풀처럼 여겨 함부로 죽였으므로 온 도(道)의 사람들이 그 살점을 먹으려 했다”고 탄핵할 정도였다. 훗날 백호(白湖) 윤휴가 좌참찬 윤승길(尹承吉)의 ‘영의정 추증 시장(諡狀)’에서 ‘윤승길이 병조참판일 때 병조판서 홍여순이 뇌물을 멋대로 받아 챙기자 병조의 인사가 있는 날(政日)이면 그와 한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51]

1601년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북인은 홍여순대사헌 임명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이산해는 대북을 지지하였다.[51] 대북1600년 (선조 33년)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발생해 이산해의 육북(肉北), 홍여순이 골북(骨北)으로 다시 나뉘었다.[51] 그러나 세자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는 소북의 유영경과 경쟁하면서 골북과 육북은 다시 대북으로 통합된다.

1602년(선조 35년) 영의정에서 사임하고, 영중추부사로 전임했다.[52] 그해 10월 12명의 대신과 사위 이덕형을 비롯한 3백 68명, 무관 변양걸(邊良傑) 등 2백 45명 등 625명의 서명을 받고, 광해군임진왜란 극복에 힘쓴 점을 들어 광해군을 정식으로 세자 책봉을 할 것을 건의하였다.[52]

1605년(선조 38년) 이후 선조의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영창대군[53]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자 그는 갈등을 봉합하기 어렵다고 판단, 대세를 따라 대북의 편에 섰다. 이산해는 선조가 자신이 서손(庶孫)인데다가 방계 승통이라는 열등감을 안고 있다는 것과, 유일한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영창대군을 앉히고 인목대비가 섭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내렸다.

1608년(선조 41년) 선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원상으로서 정무를 주관했고 옥새를 탈취하려는 소북계열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한 뒤 광해군에게 옥쇄를 넘겨주었다.[5]

1609년 봄 둘째 손자인 한림(翰林) 이구(李久)가 불행히도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상심이 컸다.[6] 이후 관직에서 은퇴해 있다가 1609년 음력 8월 병석에 누웠다. 병세가 악화되자 왕이 친히 어의를 내려보내 진맥하게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해 음력 8월 23일에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항년 70세였다.

1601년 아성부원군(Aseong Buwongun)에 봉해졌고, 1609년까지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4] 선조 재위 후기에 북인이 왕위 계승 문제로 분열되어 대북이 광해군을, 소북이 영창대군을 지지하였을 때, 이이는 선조가 영창대군을 더 선호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영창대군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여(3세) 광해군을 지지했다.[4] 1608년 선조가 사망한 후, 이이는 소북의 음모를 막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4] 그는 1609년에 은퇴하여 그 해 후반에 사망했다.[4]

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싼 서인 처벌 문제에서 사형 강경파인 북인(北人)이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이산해(李山海)는 북인 정치인들을 다수 추천하고, 일부 남인(南人)계 정치인들을 등용했지만, 적대감을 드러냈다.[4]

정철(鄭澈)을 등용한 이산해는 동인(東人) 중 정철에게 쫓겨난 사람들을 불러들여 조정의 관직을 채우고, 정철을 따랐던 사람들을 몰아냈다.[4]

2. 4. 1. 영의정 재임 시절

1599년 겨울에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다.[51] 1599년(선조 32년) 3월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 문제로 다시 갈등이 생겼다. 홍여순이 대사헌에 임명되자 석 달 후 다른 부서도 아닌 사헌부에서 “‘홍여순은 평생 경영한 일이 모두 재산을 불리고 사치를 일삼는 것’이고 북도순찰사(北道巡察使) 시절에는 사람을 풀처럼 여겨 함부로 죽였으므로 온 도(道)의 사람들이 그 살점을 먹으려 했다”고 탄핵할 정도였다. 훗날 백호(白湖) 윤휴가 좌참찬 윤승길(尹承吉)의 ‘영의정 추증 시장(諡狀)’에서 ‘윤승길이 병조참판일 때 병조판서 홍여순이 뇌물을 멋대로 받아 챙기자 병조의 인사가 있는 날(政日)이면 그와 한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51]

1601년, 아성부원군(Aseong Buwongun)에 봉해졌다.

2. 4. 2. 북인의 분당

1592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북인은 홍여순대사헌 임명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이산해는 대북을 지지하였다.[51] 대북1600년 (선조 33년)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발생해 이산해의 육북(肉北), 홍여순이 골북(骨北)으로 다시 나뉘었다.[51] 그러나 세자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는 소북의 유영경과 경쟁하면서 골북과 육북은 다시 대북으로 통합된다.

1602년(선조 35년) 영의정에서 사임하고, 영중추부사로 전임했다.[52] 그해 10월 12명의 대신과 사위 이덕형을 비롯한 3백 68명, 무관 변양걸(邊良傑) 등 2백 45명 등 625명의 서명을 받고, 광해군임진왜란 극복에 힘쓴 점을 들어 광해군을 정식으로 세자 책봉을 할 것을 건의하였다.[52]

1605년(선조 38년) 이후 선조의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영창대군[53]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자 그는 갈등을 봉합하기 어렵다고 판단, 대세를 따라 대북의 편에 섰다. 이산해는 선조가 자신이 서손(庶孫)인데다가 방계 승통이라는 열등감을 안고 있다는 것과, 유일한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영창대군을 앉히고 인목대비가 섭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내렸다.

2. 4. 3. 은퇴와 죽음

1608년(선조 41년) 선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원상으로서 정무를 주관했고 옥새를 탈취하려는 소북계열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한 뒤 광해군에게 옥쇄를 넘겨주었다.[5]

1609년 봄 둘째 손자인 한림(翰林) 이구(李久)가 불행히도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상심이 컸다.[6] 이후 관직에서 은퇴해 있다가 1609년 음력 8월 병석에 누웠다. 병세가 악화되자 왕이 친히 어의를 내려보내 진맥하게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해 음력 8월 23일에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항년 70세였다.

3. 학문 세계

이산해는 문장에 능하여 선조 대 문장 8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5] 서화(書畵)에 두루 능하여 초서(草書),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를 잘 그렸다.[5] 특히 평해 유배시절에는 수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문인화와 서예를 배우러 그의 유배지에까지 여러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미수 허목 또한 한때 그의 문하에 출입하며 그림과 글씨를 배웠다.[5] 그밖에 김선여(金善餘)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56] 1608년 선조가 죽은 후에는 선조의 지문(誌文)을 지었다. 안강의 이언적신도비명(李彦迪神道碑銘)과 경기도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를 썼다.[5] 그밖에 한글로 된 언해소학의 발문 등을 썼고, 목각 공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5]

4. 사후

사후 이산해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안골(내곡)에 안장되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인조 반정 이후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산해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산해는 인목대비 폐모론, 신경진의 옥사, 영창대군 사사 이전에 사망하여 그의 제자나 문하생들은 인조 반정에 연루되거나 화를 입지 않았다. 서인 일부는 이산해에 대한 원한으로 그의 아들 이경전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경전은 인조 반정을 지지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1819년(순조 19년)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내에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8대손 이정명(李鼎溟)의 부탁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인 채제공이 신도비문을 썼다.

5. 평가

이산해는 다섯 살에 대문자를 지을 정도로 천품이 뛰어나고 재능이 숙성하여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떨쳐졌다.[59] 선조 당시 8대 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힐[60]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으며, 서화에도 재능을 보였다.[66][67][68][69] 선조는 이산해에 대하여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뭉치의 참된 기운이 속에 차고 쌓여서 바라보면 존경심이 생긴다"고 평가했다.[60] 이이는 이조판서 시절의 이산해가 모든 공론을 따르고 청탁을 받지 않아, 뜰 안이 쓸쓸하기가 한 겨울의 선비집 같고, 착한 선비를 모아 벼슬길을 맑게 하는 것만 마음에 두고 있다고 칭찬했다.[60] 하서 김인후는 그의 시문에 대하여 "비유하면 공중의 누각과 같아서 천분(天分)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평했다.[61]

그러나 기자헌은 이산해의 지혜에 감탄하면서도 그를 용과 같은 사람이라 칭하며 어려워하며 꺼려했는데, 이는 그의 지혜와 술수에 깊이 감복하여 상대하기 어려움을 꺼려서 한 말이었다. 사초에는 이산해가 권모술수에 능한 역적 또는 간신 등으로 표현되는 등 매우 부정적인 평가가 많으며,[62] 그가 관직에 등용되면 바로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가 항상 있을 정도였다.[63] "그는 비록 한 집안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서로 대하지 않았고 그 궤휼함을 헤아리기 어려워 대중은 그를 등지고 친척은 멀어졌다"[64]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들 이경전이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라는 반론도 있다.[65]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임진왜란 전후와 선조 말기에 이산해가 파행적 정치 행보를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70] 또한 인조반정 이후 그의 정적이었던 정철, 성혼의 당인 서인이 고종 때까지 340년을 집권하면서, 정철을 가장 심하게 공격했던 이산해에 대한 평가가 좋게 내려질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정철이 다양한 시가와 작품을 남긴데 반해 그는 작품을 많이 남기지 못했고,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할 자서전이나 저서를 남기지 못한 것 역시 후대에까지 그에게 불리한 평가가 내려지는 원인이 되었다.

가혹한 평가와 탄핵 상소에도 불구하고 이산해는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임진왜란 전의 영의정으로서 일본의 침입을 경계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도 선조 말기에 다시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며 공신의 반열에 오르고 선조 34년에는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으로 책봉되기까지 했다. 이산해가 죽자 광해군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라며 후하게 장례를 치러줄 것을 지시한 것으로 보아 광해군의 신임까지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1]

6. 가족 관계

이지번(李之蕃, 1508년 ~ 1575년 4월 21일)과 의령남씨(宜寧南氏, 1509년 - 1581년 6월 24일)의 아들이며, 현령(縣令) 남수(南修)의 외손자이다. 이지함은 그의 숙부이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李塏)는 그의 고조부 이우의 사촌이었다.

7. 작품

《아계집》(鵝溪集)과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57]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문집 서문, 정충록(精忠錄) 서문, 언해소학(諺解小學)의 발문을 썼다. 조정암광조 묘비명(趙靜庵光祖墓碑銘), 이언적 묘비명, 안강의 이언적신도비명(李彦迪神道碑銘) 글씨, 선종소경대왕[57]지문(墓誌文), 노익(盧珝) 신도비 글씨, 할아버지 이치(李穉) 묘갈명, 처사 최역(崔櫟) 묘지명, 임국로 묘지명, 임몽정(任蒙正) 묘지명 등을 남겼다.

산수묵도(山水墨圖)와 당시 사회를 불의가 판치는 사회라고 확신했던 그는 여러 편의 풍자시를 남겼다. 그 중에는 굶주리다 못해 도적이 된 사람, 길에서 굶주려 죽은 사람, 부패한 관리의 뇌물과 아부, 백성의 솥단지까지 긁어가는 참혹상, 조선 조정에서 중국에 공녀를 보내는 것에 대한 은유와 풍자를 주로 소재로 활용하였다.

{{인용문2|노방원(路傍寃) : 길가의 어느 원귀



三人死路傍(삼인사로방) / 길가에 죽어 있는 세 사람


皆是流離子(개시유리자) / 모두가 유랑하는 사람들이라


一爲烏鳶食(일위오연식) / 까마귀와 솔개의 먹힌 한 사람


過者不忍視(과자불인시) / 지나가던 사람들 차마 못본다


一爲肌民斫(일위기민작) / 굶주린 사람들이 살 베간 사람


白骨無餘肉(백골무여육) / 뼈만 앙상하고 살 한 점 없도다


一爲凶賊頭(일위흉적두) / 나머지 하나는 도적의 머리로고


函去賭黃甲(함거도황갑) / 상자에 넣어 보내면 현상금 많겠다


一死等是寃(일사등시원) / 한번 죽어 원통함은 같아도


淺深猶有異(천심유유이) / 깊이는 여전히 차이가 없었도다


人鳥尙可活(인조상가활) / 오히려 새와 사람 살릴 수 있었지만


何如作凶醜(하여작흉추) / 어찌하여 그대는 흉악한 도적이 되었느뇨}}

{{인용문2|장사원(壯士怨) : 어느 장사의 원한



嶺表有奇士(영표유기사) / 영남에 기이한 장사 있었으니


壯勇百夫特(장용백부특) / 용맹이 모든 사내들 중 특출하였다.


一朝海寇來(일조해구래) / 어느 날 왜적이 침략해 왔어도


安閑猶自若(안한유자약) / 편안하고 한가하며 태연자약하였다.


荊妻不下機(형처불하기) /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고


老母在床席(노모재상석) / 노모는 침상 자리에 있었어라.


出門但唾手(출문단타수) / 문 나서서 손에 침을 뱉더니


挺身恣馳突(정신자치돌) / 몸을 빼어 마음껏 적을 무찔렀어라.


一箭射巨酋(일전사거추) / 화살 하나로 우두머리를 죽이자


群醜自奔逐(군추자분축) / 부하들은 절로 도망쳐 버렸어라.


公輸奪賊貨(공수탈적화) / 빼앗은 적의 재물은 관가로 보내고


袖有斬賊馘(수유참적괵) / 벤 적의 수급은 소매에 넣어두었어라.


官長本無厭(관장본무염) / 고을 원이 본래 탐욕이 너무 많아


所欲非貨足(소욕비화족) / 재물로는 욕심 채울 수 없었어라.


居然逢彼怒(거연봉피노) / 이에 뜻하지 않게 노여움을 샀나니


縛虎何太急(박호하태급) / 잡아오라는 명령이 그리도 급하였던가.


朝家重爪牙(조가중조아) / 조정은 원래 장수를 중히 여기는데


胡爲輕殺戮(호위경살륙) / 어찌하여 가벼이 살육을 행하는가.


古來固如此(고래고여차) / 예로부터 이런 일 많았으니


含寃非爾獨(함원비이독) / 원한 머금고 죽은 이 그대뿐 아니겠지.}}

{{인용문2|영소군 1(詠昭君 1) : 소군을 노래하다

三千粉黛鎖金門(삼천분대쇄금문) / 삼천 궁녀들 구중궁궐에 갇혀있어

咫尺無由拜至尊(지척무유배지존) / 지척에 있어도, 지존인 임금을 뵈지 못했다

不是當年投異城(불시당년투이성) / 당시에 낯선 땅으로 가지 않았다면

漢宮誰識有昭君(한궁수식유소군) / 한나라 궁궐에서 누가 소군이 있음을 알았으리}}

{{인용문2|영소군 2(詠昭君 2) : 소군을 노래하다

世間恩愛元無定(세간은애원무정) / 세상의 은혜와 사랑 월리 정해진 것 아니니

未必氈城是異鄕(미필전성시이향) / 오랑캐 땅이 반드시 낯선 땅이 되는 것은 아니도다

何似深宮伴孤月(하사심궁반고월) / 구중 깊은 궁궐에서 외로운 달만 짝했다면 어떠했을까

一生難得近君王(일생난득근군왕) / 한 평생 동안에도 군왕 가까이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이산해는 당시의 시인, 문인, 기녀들이 주로 짓던 중국의 고전이나 무릉도원, 중국의 경치를 담은 시를 거의 짓지 않고, 현실의 삶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시를 주로 남겼다. 세상의 현실을 풍자한 그의 작품경향은 후에 허목, 윤휴, 유형원, 이서우, 이하진, 이익, 오상렴, 신후담, 안정복, 정약용 등으로 이어진다.

8. 기타

1608년 선조가 죽은 후에는 선조의 지문(誌文)을 지었다. 서화는 초서(草書)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으며, 산수묵도(山水墨圖)에도 뛰어났다. 안강의 이언적신도비명(李彦迪神道碑銘)과 경기도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를 썼다.[5] 그림에도 두루 능하여, 문인화와 서예를 배우러 그의 유배지에까지 여러 문하생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그는 비록 한 집안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서로 대하지 않았고 그 궤휼함을 헤아리기 어려워 대중은 그를 등지고 친척은 멀어졌다.[54] 그러나 이는 아들 이경전이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에 의하면 '도량이 심후한 데다 청렴하고 근신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오랫동안 전형(銓衡)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류(士類)들을 진출시켜 한때 인망이 높았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세상에 영합하여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는 비루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불초한 아들 경전(慶全)이 사람답지 못한 자들과 서로 결탁하여 말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었다[55]'는 것이다.

1575년 아버지 이지번이 임종하게 되자 병든 아버지 이지번을 소생시키려고 스스로 칼로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벤 일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쇠약해지자 그때의 상처가 병의 빌미가 되어 5년 동안을 병환(病患) 을 앓기도 했다.[6]

9. 관련 문화재


  • 아계 이산해 영정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2009년 1월 20일 지정)
  • 아계 이산해 유품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8호 (2009년 1월 20일 지정)

참조

[1] 서적 Soaring Phoenixes and Prancing Dragons: A Historical Survey of Korean Classical Literature Jimoondang International
[2] 웹사이트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韓山 이씨 https://www.segye.co[...] 2012-01-10
[3]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4]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5] 웹사이트 daum사전 http://enc.daum.net/[...]
[6] 문서 이산해 신도비문
[7] 웹사이트 73. 이산해(李山海) http://nammyung.org/[...]
[8] 실록 전 내자시 정 이지번의 졸기
[9] 실록 성균관에 거둥해 대성전에 분향하다
[10] 문서 오언절구와 칠언절구 각 2수를 짓는 것
[11] 문서 동인 구성 및 남북 분당
[12] 실록 양사가 윤두수·윤근수·윤현을 논핵하여 파직시키다
[13] 문서 임진왜란 이전의 3년상과 시묘살이
[14] 실록 유생 박윤이 상소하여 시사를 극론하다
[15] 실록 평안도 순무 어사 김수에게 논·부의 과제를 보내 도내 유생에게 제술하게 하다
[16] 서적 재상열전:조선을 이끈 사람들 청아출판사
[17] 실록 경연에서 김우옹·이산보 등이 이이·성혼·정철·심의겸의 관계를 논하다
[18] 실록 이조 판서 이산해가 조헌의 상소에서 배척을 받았다며 사직을 청하자 출사를 명하다
[19] 실록 유생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고 받은 일을 극론하고 서계하다
[20] 실록 이조 판서 이산해가 신병으로 정사하다
[21] 실록 이산해가 제진한 종계 사은표의 개간을 명했으나 이산해가 사양하자 허락하다
[22] 실록 종계 변무에 대한 사은 표문을 이산해가 고치다
[23] 실록 비변사에서 무인을 불차 채용한다고 하자 각 신료들이 올린 명단
[24] 실록 송익필 형제의 추문을 형조에 전교하다
[25]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6]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7] 실록 역적과 관련하여 의논이 과격한 사람은 제재하라고 좌상 이산해에게 전교
[28] 서적 재상열전:조선을 이끈 사람들 청아출판사
[29] 서적 재상열전:조선을 이끈 사람들 청아출판사
[30]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31] 실록 전라 유생 정암수 등이 이산해·정언신·정인홍·류성룡 등을 지척하는 상소를 올리다
[32] 실록 추국했던 대신과 금부 대신을 불러 정언신의 말을 들었는지 묻다
[33] 실록 양사가 정암수의 국문을 반대한 당시 양사를 탄핵하다
[34]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35]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36] 서적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꿈과희망 2009
[37]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녁 출판사 1996
[38]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39]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40] 문서 정치적으로는 이황학파나 조식학파는 이이, 성혼의 기호학파에 대항하여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41] 실록 간원이 독서당 간택을 다시 할 것을 청하다 1591-08-10
[42] 서적 택리지 서해문집 2006
[43] 서적 택리지 서해문집 2006
[44]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45] 뉴스 조선 국왕 선조가 서행 길에 오르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10-19
[46] 실록 대신 이하 파천을 반대했으나 영상 이산해는 파천의 전례가 있다고 말하다 1592-04-28
[47] 실록 도승지 이충원 등을 가자하고 적의 형세, 민심의 동향 등을 묻다 1592-05-03
[48] 실록 1595-01-01
[49] 서적 택리지 서해문집 2006
[50] 서적 택리지 서해문집 2006
[51] 뉴스 소통과 통합에 실패한 군주, 외롭게 몰락하다 http://sunday.joins.[...] 중앙 오피니언 2011-01-07
[52] 실록 정승민이 이산해와 황우한을 탄핵하니 황우한이 스스로 변명하다 1600-04-01
[53] 문서 선조의 유일한 적자
[54] 실록 이산해·이준·장만·최철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601-06-03
[55] 실록 유영경·기자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604-12-06
[56] 웹사이트 김선여묘갈(金善餘墓碣) http://gsm.nricp.go.[...]
[57] 문서 선조의 첫 시호는 선종이었으나 임진왜란 극복의 이유로 인조때 선조로 묘호가 개정되었다.
[58] 실록 김응남을 우의정으로 삼다 1594-11-01
[59] 실록 원혼·김개·박충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567-04-25
[60]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61] 서적 하서시학과 호남시단 국학자료원 1995
[62] 실록 1608-04-27
[63] 실록 1601-06-05
[64] 실록 이산해·이준·장만·최철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601-06-03
[65] 실록 유영경·기자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604-12-06
[66] 실록 1601-06-05
[67] 실록 1562-03-05
[68] 실록 1563-10-01
[69] 실록 1560-04-24
[70] 실록 1608-04-27
[71] 서적 광해군일기 1609-08-23
[72] 서적 선비 2(인생의 참스승) 바움 2004
[73] 서적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꿈과희망 2009
[74]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녁 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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