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다이토주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이토주쿠는 1939년 카게야마 마사하루가 설립한 사숙 '유신료'에서 시작된 일본의 우익 단체이다. 쇼와 유신에 대한 결의를 표방하며 우익 및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1941년에는 신국학 협회를 발족하여 가도 보급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해산되었다가 1954년 재결성되었으며, 이세 신궁 봉찬 활동, 기원절 부활 운동 등 보수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79년 카게야마 마사하루의 자결 이후에도 보수 집회 참여, 문화 강좌 개최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이토주쿠는 숙생들의 집단 자결, 숙생들의 폭행 사건, 신문지법 위반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정치 단체 - 신사회당
    신사회당은 1996년 일본사회당의 정책 변화에 반대하는 강경파 의원들이 창당한 정당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했으나 선거 참패 후 야당 공조 노선으로 전환하여 현재는 일부 지역에서 지역 정당으로서의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 일본의 정치 단체 - 대일본애국당
    대일본애국당은 1951년 아카오 빈에 의해 결성된 일본의 우익 정당으로, 정치 부패와 사회 모순을 비판하며 반공주의와 친영미 노선을 지향했으며,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등에 연루되어 파괴활동방지법에 따라 감시 대상 단체로 지정되기도 했다.
  • 1939년 설립된 단체 - 폴란드 서부군
    폴란드 서부군은 1939년 폴란드 침공 후 프랑스와 영국에서 재편성되어 프랑스 전투, 영국 전투,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서유럽 전역 등에 참전하며 연합군 승리에 기여했으나, 전후 냉전으로 인해 논란을 겪다 1947년 해체되었다.
  • 1939년 설립된 단체 - 일본음악저작권협회
    일본음악저작권협회(JASRAC)는 일본의 음악 저작권 관리 단체로, 저작권을 위탁받아 음악 이용자에게 사용을 허락하고 사용료를 징수하여 권리자에게 분배하는 업무를 수행하며, 독점적 지위와 운영 방식 등 여러 문제로 비판받아 왔다.
다이토주쿠
기본 정보
명칭대동숙
로마자 표기Daitōjuku
종류정치 단체
설립1939년 (쇼와 14년)
설립자影山正治 (Kageyama Masaharu)
본부도쿄도시부야구센다가야1-23-7
목적경신숭조의 사상 보급 및 진흥에 기여
관련 단체현양사
흑룡회
대일본생산당
애국근로당
불이 가도회
웹사이트일반재단법인 대동회관 공식 웹사이트
인물
관련 인물대동숙 14열사
대동숙 14열사가게야마 쇼헤이
노무라 다쓰오
마키노 하루오
후지와라 마사시
기야마 야스시
아시다 하야시히로
히가시야마 도시카즈
다나야 히로시
노무라 다쓰쓰구
후쿠모토 미요하루
요시노 하루오
쓰무라 미쓰요시
무라오카 아사오
노자키 긴이치

2. 역사

다이토주쿠(大東塾)는 서남](西郷隆盛)]에서 시작되어,

2. 1. 기원과 초기 활동

카게야마 마사하루(影山正治)가 고쿠가쿠인 대학(國學院大學)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사숙 "유신료(維新寮)"에서 시작되었다.[4] 이후 동방의 대국을 의미하는 "대동(大東)"을 사용하여 "대동숙(大東塾)"으로 이름을 바꾸었다.[4] "대동숙이 움직일 때는 쇼와 유신에 대한 결의의 때"라고 말해질 정도로, 우익계와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5]

1941년 신국학 협회를 발족하여 가도(歌道)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전국 조직인 부니 가도회를 창립했다.[5] "신국학 협회"에는 야스다 요지로(保田與重郎), 아사노 아키라(浅野晃)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5]

2. 2. 전후 활동과 이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GHQ)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1954년에 재결성되었다.[4] 월간 『부니』를 발행하고, 1947년부터 매년 궁중 근로 봉사, 칙제 영진, 신곡 헌상을 행하고 있다.

이세 신궁 어조영 봉찬 활동, 기원절 부활 운동, "자위대 내 신사 문제 활동", 니주바시 사건 문책 활동, 메이지 유신 100년제 운동, 메이지 신궁 부흥 봉찬 활동, 천황 거처 방위 부대 설치 요청 활동, 8월 15일 위령 행사 운동, 근황촌 건설 운동, 야스쿠니 신사 국가 호지 운동, 연호 법제화 실현 활동 등을 전개했다.[4] 전 대표 스즈키 마사오는 쇼와 천황 어제집 "쇼와 천황의 오호미우타 - 어제에 받드는 생애"를 간행했다.

1979년 5월 25일, 카게야마 마사하루는 연호 법제화를 마지막 활동으로 오메의 대동숙 농장 내에서 "한번 죽음으로써 연호 법제화의 실현을 열렬히 기원합니다"라고 적힌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결했다.[6] 6월 6일, 카게야마의 자결 12일 후 연호법이 성립되었다. 숙장을 계승한 하세가와는 병사했다. 2001년 10월에는 숙장 격인 스즈키가 79세로 같은 농장 내에서 자결했다.[7]

현재도 보수 계통의 집회 등에서 대동숙 관계자를 볼 수 있으며, 일관된 유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 3. 주요 사건

다이토주쿠는 다음과 같은 주요 사건에 연루되었다.

  • 아사누마 사건 관련 '민족 정당 방위론' 주장: 1960년 기관지 "미치의 토모"를 통해 개인의 정당방위 개념을 민족에게 확장 적용하는 주장을 펼쳐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다.[10]
  • 야스쿠니 신사 국가 호지 운동 관련 폭행 사건: 1969년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법안에 반대하며 일본 유족회 회장을 폭행하여 처벌받았다.[5]
  • 대동숙 숙생 상해 사건: 1943년, 전몰자 공양 방식을 문제 삼아 도요하시 시장을 폭행하고, 나카가와 요이치의 평론에 분노하여 그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으로, 숙생 노무라 타츠오가 처벌받았다.
  • 대동숙 숙생 신문지법 위반 사건: 1941년, 기관지 『대효』에 게재한 격문이 문제가 되어 숙장 등이 신문지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2. 3. 1. 대동숙 숙생 집단 자결

1945년 8월 25일, 다이토주쿠는 육군 청년 장교들과의 철저 항전을 거부하고, 숙장 대행 카게야마 쇼헤이(影山庄平) 등 14명이 요요기 연병장에서 고식에 따라 집단 할복 자결을 감행했다.[9] 원래 15명이 자결할 예정이었으나, 한 명이 탈락했다. 이들은 전날 밤 "공동 유서"를 작성했는데, 서두에 카게야마 쇼헤이가 "깨끗하게 바치는 우리 14 기둥의 황혼 맹세코 무궁하게 황성을 지키리"라고 적었다.

하시카와 분조(橋川文三)는 이 자결에 대해 "신의를 받들어 이루지 못한 자신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내고, 신들에게 복주(伏誅)로서 행해졌다. 게다가 그것은 그 자체가 신도의 신앙 의례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행해졌다는 놀라운 인상을 준다."라고 평가했다.[9]

당시 숙장이었던 카게야마 마사하루(影山正治)는 징집 중이어서 집단 자결에 참여하지 못하고, 1946년 5월 4일 사세보로 귀국했다. 집단 자결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름연령출신지
카게야마 쇼헤이(影山庄平)60아이치현
노무라 타츠오(野村辰夫)30가고시마현
마키노 하루오(牧野晴雄)31이시카와현
후지와라 히토시(藤原仁)33히로시마현
오니야마 타모츠(鬼山保)28후쿠오카현
아시다 하야시히로(芦田林弘)30오카야마현
히가시야마 토시카즈(東山利一)26구마모토현
타나야 히로시(棚谷寛)24이바라키현
노무라 타츠시(野村辰嗣)18시즈오카현
후쿠모토 미요지(福本美代治)40돗토리현
요시노 야스오(吉野康夫)23니가타현
츠무라 미츠요시(津村満好)22돗토리현
무라오카 아사오(村岡朝夫)29사이타마현
노자키 킨이치(野崎欽一)22가고시마현


2. 3. 2. 대동숙 숙생 상해 사건

1943년 6월 30일, 다이토주쿠 숙생 노무라 타츠오(28세)는 대일본일신회 이시카와 히데키치와 함께 전몰 병사의 공장을 불교식으로 거행하는 것에 반대하여 콘도 토시이치로 도요하시 시장에게 진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폭행했다.[1] 같은 해 9월 15일 도요하시 구 재판소는 노무라에게 징역 4개월,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내렸고, 이시카와에게는 징역 2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1] 한편, '영령 공장 문제'는 카게야마 쇼헤이와 도요하시 시의 합의로 1943년 7월 5일부터 도요하시 시에서는 신식으로 거행하게 되었다.[1]

노무라는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던 1943년 10월 11일, 나카가와 요이치가 『현대』 및 『문예세기』 9월호에서 다이토주쿠 숙장 카게야마 마사하루의 시마자키 토손 비판 논문과 오자키 시로(『히무가시』 동인) 비방 논문을 발표한 것에 분노하여 나카가와 자택을 찾아가 폭행,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혔다.[2] 1944년 3월 20일, 도쿄 구 재판소는 노무라에게 징역 5개월을 선고했고, 노무라는 상고했다.[2]

2. 3. 3. 대동숙 숙생 신문지법 위반 사건

1941년 다이토주쿠는 기관지 『대효(大孝)』 호외에 "대미영(對美英) 전쟁의 대조(大詔)를 받들어 거국의 동우(同憂) 동지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도조 히데키 수상 등에게 발송했는데, "안녕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신문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1]

문제가 된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하루라도 속히 유신 대조의 환발을 받들어, 어황족을 수반으로 하는 유신 내각을 확립하여, …… 신국 체제를 완성해야 한다[1]

1942년 3월 19일, 도쿄지방재판소는 신문법 위반으로 카게야마 마사하루 숙장과 하세가와 유키오 숙감에게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내렸다.[1]

2. 3. 4. 민족 정당 방위론

1960년 10월 19일 발행된 다이토주쿠 기관지 "미치의 토모" 호외에 게재된 "아사누마 사건에 대해"에서, 다이토주쿠는 다음과 같은 "민족 정당 방위론"을 주장했다.[10]

> 개인의 경우, 타인으로부터의 폭력 행위에 의해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자위상 이에 저항하여 직접 행동에 나서 그 결과, 가해자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경우에도, 그것이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것은 전 세계 공통의 형법상의 통념이다. 이 경우에는 그 방위 행위를 '폭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민족의 경우에도 이 원리는 인정되어, 밖을 향해서는 이것을 '자위권'이라고 말하지만, 내부의 반민주 세력의 집단 폭력 행위 앞에서 민족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이에 대해 발생한 민족적 자위 행위도 또한 충분히 정당방위성을 가지며, 결코 단순한 '폭력'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1]

이는 당시 제1차 안보 투쟁의 여파가 남아있던 상황에서 민족파 진영에 테러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 테러 옹호 풍조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았다.[10]

2. 3. 5. 야스쿠니 신사 국가 호지 운동

1969년(쇼와 44년) 1월 20일, 야스쿠니 신사의 "국가 호지" 운동, 즉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법안 문제에 대해 일본 유족회 회장이 야스쿠니 신사의 비종교화를 약속하는 법안에 찬성했다. 이에 분개한 다이토주쿠 구성원이 회담 중 일본 유족회 회장에게 폭행을 가해 징역 3개월, 집행 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다이토주쿠 주감은 회담을 주선한 요시하시 토시오 공안조사청 장관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 한 마디를 잘랐다.[5]

3. 조직 및 활동

다이토주쿠는 국체를 존중하고 천황 중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본류 우익 "전통 우익"으로 분류된다.[3] 사이고 다카모리에서 시작되어, 겐요샤(도야마 미쓰루), 흑룡회(우치다 료헤이)의 대아시아주의를 넘어, 사회 모순 극복과 혁신 일본 건설을 목표로 한다. 철저한 반체제, 국가 혁신을 본질로 하며, "몰아 헌신", "구국 사석"의 사상 신념을 가지고, 메이지 유신의 이념과 방식을 계승하여 제2유신으로서의 "쇼와 유신 단행"을 목표로 운동하고 있다.

다이토주쿠 숙장 가게야마 마사하루는 『유신자의 신조』에서 "혁명가는 증오에 서고, 유신자는 눈물에 선다. 혁명가는 증오를 가지고 베고, 유신자는 눈물을 가지고 끊는다. 그 본질에 있어서 시인이 아니면 진정한 유신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본류 우익(전통 우익)에 공통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3]

신병대 사건으로 검거된 가케야마가 고쿠가쿠인 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은 "유신료"를 "대동숙"으로 개칭하면서 시작되었다.[4] "대동숙이 움직일 때는 쇼와 유신에 대한 결기의 때"라고 말해질 정도로, 우익계·정계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강했다. 현재도 제전, 집회, 강연회 등을 주최하고 있으며, 공안 경찰·공안조사청의 조사 대상이다.[5]

부니 가도회는 1941년 창립된 "신국학 협회"에서 발족, 카게야마가 주재한 전국 조직으로 가도 보급을 목적으로 한다. "신국학 협회"에는 야스다 요주로, 아사노 아키라, 후지타 도쿠타로 등이 동인으로 참가했다. 1945년 종전 후, 점령군에 의해 해산되지만 1954년에 재결성되었다.

월간 『부니』를 발행하고, 1947년부터 매년 궁중 근로 봉사, 칙제 영진, 신곡 헌상을 행한다. 이세 신궁 어조영 봉찬 활동, 기원절 부활 운동, "자위대 내 신사 문제 활동", 니주바시 사건 문책 활동, 메이지 신궁 부흥 봉찬 활동, 야스쿠니 신사 국가 호지 운동, 연호 법제화 실현 활동 등을 전개했다.

가게야마는 1979년 연호법 제정을 기원하며 할복 자결했고,[6] 12일 후 연호법이 성립되었다. 2001년에는 숙장 격인 스즈키가 같은 농장에서 자결했다.[7]

3. 1. 조직 구성

대동숙은 주로 신도, 국학, 가도 관계자와 학생을 위한 연수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1965년에는 학생 기숙사를 설립했다. 기숙사 출신으로는 고쿠가쿠인 대학 신도 문화 학부 교수 오하라 야스오와 일본 문화 종합 연구소 대표 타카모리 아키노리 등이 있다.[8]

3. 2. 현재 활동

현재도 보수 계통의 집회 등에서 대동숙 관계자를 볼 수 있으며, 일관 불혹의 유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문화 강좌로 시음 교실과 단가 교실을 개최하고, 무도장에서는 풀 컨택트 가라테 교실을 운영한다. 1956년도쿄도 오메시에 개척된 대동 농장은 딸기로 유명하며, 농장 내에는 다이토 신사(大東神社)와 십사사지비(十四士之碑), 카게야마 마사하루 어른의 비(影山正治大人之碑)가 있다.[13]

4. 비판 및 논란

다이토주쿠는 극우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여러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주요 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반체제 및 국가 혁신 주장: 사회 모순 극복을 명분으로 내세우나, 철저한 반체제 및 국가 혁신을 주장하며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3]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안정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된다.
  • "몰아 헌신" 강조: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몰아 헌신" 사상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3]
  • 극단적 행동: 카게야마 마사하루 숙장이 연호법 제정을 요구하며 할복 자결하고,[6] 숙장 격인 스즈키 마사오도 자결하는 등[7] 극단적인 행동을 보였다.

4. 1. 역사 인식 문제

대동숙은 일본의 과거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야스쿠니 신사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 등에서 극우적인 주장을 펼치며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 국가 호지 운동[6] 등을 전개한 바 있다.

4. 2. 극단적 민족주의

대동숙의 "민족 정당 방위론"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옹호하고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3] 이는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상충되며, 민주주의와 인권 존중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는다.[3]

4. 3. 한국과의 관계

다이토주쿠(大東塾)는 일본 극우 단체의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다이토주쿠의 역사 왜곡과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역사 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참조

[1] 문서 影山庄平・野村辰夫・牧野晴雄・藤原正志・鬼山保・蘆田林弘・東山利一・棚谷寛・野村辰嗣・福本美代治・吉野晴夫・津村満好・村岡朝夫・野崎欽一(遺書署名順)の14人
[2] 문서 自決した14名の中には影山の父・庄平も含まれており、影山本人は出征中であり、帰国の後に自決の事実を知ったと言う。14名の共同遺書の内容は「清く奉ぐる吾等十四柱の皇魂誓って無窮に皇城を守らむ」である。
[3] 서적 右翼運動の思想と行動 立花書房
[4] 서적 「右翼」の戦後史 講談社現代新書
[5] 서적 戦後の右翼勢力 増補版
[6] 서적 ゴーマニズム宣言スペシャル・天皇論
[7] 뉴스 右翼 大東塾代表が自殺か 朝日新聞 2001-10-09
[8] 서적 「右翼」の戦後史 講談社現代新書
[9] 서적 昭和超国家主義の諸相
[10] 서적 右翼運動の思想と行動 立花書房
[11] 간행물 道の友 1960-10-19
[12] 웹사이트 生産者紹介10 大東農場 https://www.tokyo-gy[...] 協同乳業 2022-04-04
[13] 서적 「右翼」の戦後史 講談社現代新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