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애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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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일본애국당은 1951년 아카오 빈에 의해 결성된 일본의 우익 정당이다. 정치 부패와 사회 모순을 비판하며, 선거에 후보를 내세우는 한편, 가두 연설을 통해 지지 기반을 다졌다. 아카오는 사회주의에서 전향하여 천황 친재 하의 공유 재산화를 주장했으며, 반공주의와 반소련 입장을 견지하며 친영미 노선을 지향했다. 당은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과 미키 다케오 총리 폭행 사건 등과 연루되었으며, 파괴활동방지법에 따라 감시 대상 단체로 지정되기도 했다. 아카오 빈 사후, 당은 분열되었으며, 현재도 일부 지방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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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본애국당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대일본애국당 | 
| 로마자 표기 | Dai Nippon Aikokutō | 
| 창립 | 1951년 | 
| 해산 | 알 수 없음 | 
| 본부 위치 | 도쿄도기타구 | 
| 설립자 | 아카오 빈 | 
| 슬로건 | 알 수 없음 | 
| 웹사이트 | 대일본애국당 | 
| 정치 | |
| 정치 성향 | 극우 | 
| 이념 | 초보수주의(일본식) 반공주의 친미주의 국수주의 | 
| 위치 | 극우 | 
| 조직 | |
| 총재 | 아카오 미치히코 | 
| 기관지 | 애국신문 (휴간 중) | 
| 기타 | |
| 색상 | 검은색 | 
| 상징 | 알 수 없음 | 
| 깃발 | 알 수 없음 | 
2. 해설
GHQ의 공직 추방 해제 직후인 1951년에 아카오 빈이 결성하였다. 정치 부패와 사회 모순을 규탄하며, 서민 소규모 기업 경영자부터 여당 정치인까지 폭넓은 지지자를 얻었다. 아카오는 사회주의에서 전향한 인물로, 천황 친정 하에서의 생산 수단의 공유 재산화를 주장했다.[2] [3] 반공주의, 반소련의 입장에서 미국, 영국과의 개전에 반대하고 반전 연설회를 열기도 했다.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남사할린·전쿠릴 열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라고 주장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의 야마구치 니야, 시마나카 사건의 코모리 카즈타카는 모두 대일본애국당 소속이었으나, 각 사건 직전에 탈당했다. 대일본애국당은 1960년 11월 파괴활동방지법에 따라 공안조사청의 감시 대상 단체가 되었다.[5]
3. 당사 및 사건
3. 1. 야마구치 니야와 코모리 카즈타카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을 일으킨 야마구치 니야와 시마나카 사건으로 알려진 코모리 카즈타카는 모두 대일본애국당 소속이었으나, 각각 사건 직전에 탈당했다. 대일본애국당은 아사누마 암살 사건 다음 달인 1960년 11월, 파괴활동방지법에 따라 공안조사청의 감시 대상 단체가 되었다.[5]
3. 2. 후지야마 의원 습격 및 미키 총리 폭행 사건
대일본애국당 서기장을 지낸 필보 히로요시(筆保泰禎일본어, 1940년 10월 25일[5] - 2005년 5월 4일)는 여러 차례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1972년 3월 22일,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에서 중국으로 출발하려던 중의원 의원 후지야마 아이이치로에게 황산을 뿌리려다 체포되었다.[6] 1975년 6월 16일, 일본무도관에서 열린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의 국민장 자리에서 당시 내각총리대신 미키 다케오의 얼굴을 때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미키는 쓰러졌지만 큰 부상은 없었고, 국민장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미키의 부인 미키 무츠코는 대일본애국당 총재 아카오 빈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사건 후 무츠코는 아카오 빈에게 직접 항의했다고 한다. 미키에게는 경시청 경찰관들이 경호원으로 배치되어 있었지만,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키의 이동 방향에만 신경을 써서 범행 대응이 늦어졌다. 이 사건을 교훈 삼아 미국 비밀경호국을 본보기로 한 위압적인 보이는 경호로 방침을 전환하여, 경호관의 존재를 앞세운 경호 체제를 갖춤으로써 미심쩍은 자의 동향을 사전에 파악하여 습격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3. 3. 비틀즈 일본 공연 반대 운동
3. 4. 아카오 빈 사후
아카오 빈 사망 후, 대일본애국당은 총본부계 각 단체와 중간파, 그 외의 3파로 분열되었다. 기관지 『애국신문』은 아카오 빈의 미망인 아카오 후미에에게 계승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행이 중단되었다.[4]
4. 조직
대일본애국당은 총본부를 중심으로 여러 지방 조직을 두고 있다. 각 조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하라.
4. 1. 본부와 지방 조직
대일본애국당은 총본부를 중심으로 여러 지방 조직을 두고 있다. 주요 조직은 다음과 같다.- 대일본애국당 총본부: 도히코 파. 후나카와 타카 총본부장.
- 대일본애국당 후쿠시마현 본부: 아시나 노보루모리 최고간부회의장(조국방위군 부대장)파. 군마시 소재. 아시나는 2005년경 사망.[2]
- 대일본애국당 청년대: 도히코·구 아시나 파. 에노모토 류세이 대장. 이케부쿠로 동구역 앞 광장에서 매달 셋째 일요일에 '시국엄정비판정례연설회'라는 제목으로 가두 선전 활동을 하고 있다.
- 아카오 빈 선생 유훈 계승·대일본애국당: 도시마구 소재. 훗보 야스사다가 아카오 빈 시대와 변함없는 양식의 전단을 도쿄 부근 곳곳에 붙였으나, 자금난으로 활동이 점차 축소. 2005년 훗보 사망, 2015년 아내 미치코 사망.
- 아카오 빈 선생 문하 대일본애국당
- 대일본애국당 오카야마현 본부: 오카야마시 소재, 서일본 총지부를 겸임. 1970~80년대에 본부장 오카다 사다미가 각종 선거에 출마.
- 대일본애국당 히로시마현 본부
- 대일본애국당 고치현 본부: 고치시 소재, 모리사와 이즈루 본부장.
- 대일본애국당 후쿠오카현 본부: 후쿠오카시 소재, 이쿠노 히데노부 본부장. 북큐슈 지역의 민족파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큐슈 단체도 가맹하고 있는 큐슈 공투 위원회 위원장을 겸임. JR 하카타역 하카타구치 역 앞 광장에서 매주 일요일에 '일장기 세상 바로잡기 거리 연설회'라는 제목으로 가두 선전 활동을 하고 있다.
- 대일본애국당 큐슈 연합회: 후쿠오카시 소재, 매주 일요일에 중국 영사관, 한국 영사관에 대한 항의 활동을 하고 있다.
- 대일본애국당 일장기 행동대
- 대일본애국당 사가현 본부
- 대일본애국당 오이타 지부: 사이키시 소재, 고치현 본부 연락소에서 이쿠노 위원장의 지원 아래 승격.
- 대일본애국당 홋카이도 본부: 삿포로시 소재, 유키다 아키마사 본부장.
5. 비판 및 논란
아카오 빈은 사회주의에서 전향한 인물로, 천황 친정 하에서 생산 수단의 공유 재산화를 주장했으며, 우익 사상 해석에 불경 발언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2] [3] 반공주의, 반소련 입장에서 미국, 영국과의 개전에 반대하며 반전 연설회를 열었다. 자신을 "거품 후보" 취급하는 언론에 대해 일관되게 이의를 제기했으며, 아사히 신문에는 항의했다.[4] 아카오 사후, 공안 형사 일부로부터 "과격했지만 지성인"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5. 1. 역사 왜곡 및 영토 주장
대일본애국당은 북방 영토 문제에서 "남사할린·전쿠릴 열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라고 주장했다.[2]5. 2. 극단적인 민족주의
대일본애국당은 GHQ의 공직 추방 해제 직후인 1951년에 아카오 빈이 결성하였다. 사회주의에서 전향한 아카오는 천황 친정 하에서의 생산 수단의 공유 재산화를 주장하였고, 우익 사상 해석에 불경 발언이 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2] [3]반공주의, 반소련의 입장에서 미국, 영국과의 개전에 반대하고 반전 연설회를 열기도 하였다.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남사할린과 전 쿠릴 열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아카오의 사상을 파시스트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일본이 완전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친영미 노선을 내걸었다는 견해도 있다.
참조
[1] 
뉴스
 
High Court Upholds Sentence of Akao
 
1962-10-24
 
[2] 
텍스트
 
[3] 
서적
 
日本近代人名辞典
 
吉川弘文館
 
2001
 
[4] 
서적
 
「憂国のドン・キホーテ」赤尾敏
 
山手書房
 
1983
 
[5] 
서적
 
右翼運動要覧 戦後編
 
日刊労働通信社
 
1976
 
[6] 
뉴스
 
朝日新聞
 
197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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