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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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남양 서씨 시조 '''서간'''(徐趕)은 당나라 8학사 중 한 명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당성(唐城)에 정착했다고 전해지며, 태사(太師)에 오르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당성 서씨는 남양 서씨 시조 서간의 12세손이자 교리(校理)를 지낸 서원길의 둘째 아들인 '''서득부'''(徐得富)를 시조로 한다.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은 대구 서씨 족보(1702년) 서문에서 서씨(徐氏)는 본래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이후 이천, 달성, 대구, 장성, 연산, 남평, 부여, 평당, 남양, 당성의 8파로 나뉘었다고 기록했다.
1742년 이천 서씨 족보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우리나라 달성, 대구, 부여, 평당, 장성, 연안, 전주, 남평, 남양, 당성 서씨는 모두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하여 나뉜 것이다. 아간공의 줄거리는 이천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천 서씨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는 우리나라 서씨(徐氏) 중 이천은 아간 서신일(徐神逸), 부여는 백제 온조왕(溫祚), 달성은 소윤 서한(徐閈)을 시조로 하며,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부여 서씨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2. 1. 시조 및 기원
남양 서씨의 시조(始祖) '''서간'''(徐趕)은 당나라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당성(唐城)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벼슬이 태사(太師)에 올랐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남양 서씨 시조 서간(徐趕)의 12세손으로 교리(校理)를 지낸 서원길의 둘째 아들인 '''서득부'''(徐得富)를 당성 서씨의 시조로 한다.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 달성, 대구, 장성, 연산, 남평, 부여, 평당, 남양, 당성이 이것이라고 하였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고, 대구의 선조는 서한(徐閈)이며, 달성의 선조는 서진(徐晋)이고, 장성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며, 연산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이고, 남평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며, 부여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고, 평당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며, 남양의 선조는 서간(徐趕)이고, 당성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 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 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 서씨는 그 후손이고, 대구, 봉성(峯城), 남양, 당성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東國)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라고 하였다.
1742년 이천 서씨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 대구, 부여, 평당, 장성, 연안, 전주, 남평, 남양, 당성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가 이천 서씨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부여 서씨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2. 2. 분파 및 관련 성씨
남양 서씨의 시조(始祖) '''서간'''(徐趕)은 당나라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당성(唐城)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벼슬이 태사(太師)에 올랐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남양 서씨 시조 서간(徐趕)의 12세손으로 교리(校理)를 지낸 서원길의 둘째 아들인 '''서득부'''(徐得富)를 당성 서씨의 시조로 한다.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은 대구 서씨 족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서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 달성, 대구, 장성, 연산, 남평, 부여, 평당, 남양, 당성이 이것이라고 하였다.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 대구, 부여, 평당, 장성, 연안, 전주, 남평, 남양, 당성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3. 본관
고구려 때 당성군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고, 822년(헌덕왕 14) 수성군에 병합되었으나 829년(흥덕왕 4)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분리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군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 수주(水州)의 관할에 들었고, 이후 인주(仁州)의 영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독립하여 감무를 두었고 재양현(載陽縣 : 安陽縣)을 관할하였다. 1290년(충렬왕 16) 익주(益州)로, 이후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로, 다시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 남양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 남양도호부가 되었다가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6년 경기도 남양군이 되었다가, 1914년 수원군에 병합되었으나, 1949년 경기도 화성군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었다.
4. 인물
4. 1. 서경덕 (徐敬德, 1489년 ~ 1546년)
서경덕(1489년 ~ 1546년)은 자가 가구(可久), 호가 복재(復齋)이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개성)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여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졌다. 독창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 철학을 제창하였다. 북인4. 2. 서남수 (徐南洙, 1952년 ~ )
전 교육부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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