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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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는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간접선거 방식으로 치러졌다. 선거 절차는 국회 재적 의원 2/3 이상의 출석과 출석 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당선자를 결정하는 것이었으며, 대통령과 부통령을 같은 날 선출하는 것을 두고 논의가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이후 국무총리 인준 과정에서 이윤영이 부결되고 이범석이 임명되었으며,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의 임기 개시일을 두고 논란이 있었으나, 8월 15일로 합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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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 | |
---|---|
선거 개요 | |
국가 | 대한민국 |
선거 종류 | 대통령 선거 |
선거 날짜 | 1948년 7월 20일 |
다음 선거 |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52년 |
대통령 선거 정보 | |
선거 이름 | 대통령 선거 |
당선 필요 조건 | 투표 수의 3분의 2 득표 필요 |
![]() | |
후보 | 이승만 |
소속 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득표수 | 180 |
![]() | |
후보 | 김구 |
소속 정당 | 한국독립당 |
득표수 | 13 |
선거 후 대통령 | 이승만 |
선거 후 소속 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선거인단 | 국회의원 198명 중 197명 출석 |
당선 필요 득표수 | 131표 |
선거 방식 | 간접 선거 |
부통령 선거 정보 | |
선거 이름 | 부통령 선거 |
당선 필요 조건 | 투표 수의 3분의 2 득표 필요 |
![]() | |
후보 | 이시영 |
소속 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득표수 | 133 |
![]() | |
후보 | 김구 |
소속 정당 | 한국독립당 |
득표수 | 62 |
선거 후 부통령 | 이시영 |
선거 후 소속 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선거인단 | 국회의원 198명 중 197명 출석 |
당선 필요 득표수 | 132표 |
2. 선거 절차
당시 헌법 제53조에 따라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실시되었다. 헌법 규정에 따르면,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각각 선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선 요건은 재적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었다. 만약 1차 투표에서 3분의 2 이상 득표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2차 투표를 실시하며, 2차 투표에서도 당선자가 결정되지 않으면 최고 득표자 2명을 대상으로 결선 투표를 진행하여 다수 득표자를 당선자로 결정하도록 규정했다.
2. 1. 컷오프 도입 논의
제헌 헌법이 공포된 7월 17일 오후, 국회는 제32차 회의를 열고 정·부통령 선거의 절차를 논의하였다. 김도연 등 12명의 원내 상임위원장들은 7월 19일에 예비선거를 실시하여 정·부통령 후보자를 먼저 확정하고, 다음 날인 20일에 본 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하였다.이들이 제안한 예비선거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 국회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비공개로 진행한다.
- 재석 의원의 1/3 이상을 득표한 후보만이 본 선거에 진출할 자격을 얻는다.
- 국회 본회의에서 열리는 본 선거에서는 예비선거를 통과한 후보자에게만 투표할 수 있다.
예비선거 도입을 주장한 위원장들은 정·부통령 선거를 하루 만에 치르면 후보 및 정파 간 교섭 시간이 부족하고, 후보들을 충분히 검토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또한, 헌법에 별도의 입후보 규정이 없어 당선자가 선거 결과 수락을 거부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데, 예비선거를 통해 본선 진출 후보자가 미리 수락 여부를 밝힐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다수 의원들은 이러한 예비선거 제도에 반대했다. 전원위원회에서 비공개 회의를 통해 후보자를 미리 정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며 불필요한 시간 낭비라고 비판하며, 예비선거 없이 국회 본회의에서 한 번에 정·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거수 투표 결과, 재석 의원 189명 중 139명이 예비선거 반대 의견에 찬성하였다. 이에 따라 전원위원회 예비 선거 없이 국회 본회의에서 바로 정·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의결되었다.[4]
2. 2. 정·부통령 선거일 분리 논의
제헌 헌법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의 선거일에 대해 현임자의 임기가 끝나기 30일 이전에 실시한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규정이 없었으므로, 두 선거를 같은 날 치를지, 다른 날 치를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일부 국회의원들은 대통령과 부통령은 서로 뜻이 맞는 인물이어야 하므로, 먼저 대통령을 선출한 뒤 당선자가 원하는 부통령 후보를 교섭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회의원들도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고 지지할 부통령 후보를 신중하게 결정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 같은 이유로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 사이에 적어도 하루의 간격을 두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수 의원들은 이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사실상 확정되어 있으므로, 선거 결과 발표 후 의원들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대통령 당선자가 원하는 부통령 후보를 지목하고 국회의원들이 마치 하명을 받듯이 그를 선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하루속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라도 정·부통령을 같은 날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대통령 선거는 오전에, 부통령 선거는 오후에 실시하여 그 사이에 몇 시간 동안 교섭 및 지지 후보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절충안이 지지를 얻었다. 이 안은 거수 투표 결과 재석 의원 179명 중 117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선거일은 7월 20일 화요일로 정해졌다.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날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선거 소식이 신문을 통해 알려질 시간을 고려하여 월요일이 아닌 화요일로 결정한 것이었다.[4]
3. 파벌별 상황
제헌 국회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국민주당, 그리고 한국독립당계를 중심으로 한 무소속 의원들 등 3대 파벌이 주도하고 있었다. 대통령과 부통령의 선거, 국무총리를 비롯한 초대 내각의 구성 역시 이들 세 파벌의 영향 아래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당시 대통령 후보로는 제헌 국회의 초대 국회의장을 맡고 있던 이승만이 가장 유력했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헌법 제정을 주도했으며, 임시정부 세력부터 한국민주당까지 초당파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5]
일각에서는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나 서재필 박사를 대통령 혹은 부통령으로 지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김구는 남한 단독 정부 참여를 거부했고, 서재필 박사는 미국 국적자로 피선거권이 없어 두 사람 모두 후보가 되지 못했다.[6]
결국 대통령으로는 사실상 유일하게 출마 의사를 밝힌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이에 따라 원내 각 파벌들은 대통령직보다는 부통령과 국무총리 자리에 누구를 지지할지를 두고 경쟁하는 양상을 보였다.
3. 1. 이화장계
이승만은 부통령 및 국무총리 후보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오세창,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등 세 사람을 검토하고 있었다.이 중에서 오세창은 85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점차 후보군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이승만과 그의 측근들은 조만식을 부통령으로, 이시영을 국무총리로 하는 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남북 통일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당시 북한에 있어 남한으로 내려올 수 없는 상황이었던 조만식을 부통령으로 선출하고 그 자리를 공석으로 두자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2인자인 부통령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과 함께, 이러한 결정이 오히려 북한에 있는 조만식의 신변 안전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결국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7]
3. 2. 한국민주당
원내 제2의 교섭단체였던 한민당은 1948년 7월 18일 긴급 중앙상임위원회를 소집하여 임정의 재무총장을 지낸 이시영을 부통령 후보로 지지할 것을 선언했다.[8] 이시영은 한민당뿐만 아니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및 일부 무소속 의원들에게도 지지를 받아 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었다.[7]한민당은 또한 당수인 김성수를 국무총리 후보로 내세웠다.[9]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김성수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10]
3. 3. 무소속
한국독립당 계열 무소속 의원들은 1948년 7월 17일과 18일에 모여,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를 부통령 후보로, 같은 당의 부당수 조소앙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8] 하지만 김구는 남한 단독 정부에는 어떠한 형태로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나 부통령직을 맡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7][11]김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어서 국회의원들에게 자신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에 참여한 196명의 의원 중 13명은 김구에게 표를 던졌다. 무소속 후보였던 안재홍은 2표를 얻었다. 한편, 당시 미국 시민 신분이었던 독립운동가 서재필에게 던져진 한 표는 무효 처리되었다. 선거는 총 196표 중 180표를 얻은 이승만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4. 선거 결과
국회에서 간접선거 방식으로 치러진 초대 대통령 선거에는 재적의원 198명 중 196명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대통령 선거 결과, 이승만이 총 180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구는 13표, 안재홍은 2표를 얻었으며, 미국 국적자였던 서재필에게 던져진 1표는 무효 처리되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장 출신[3] 이시영이 2차 투표에서 13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김구는 2차 투표에서 62표를 얻어 2위를 기록했다.
4. 1. 대통령 선거
1948년 7월 20일 오전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재적 국회의원 198명 중 이승만과 최봉식 의원을 제외한 196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인 131표를 얻어야 했다.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승만은 자신이 유력한 후보임을 고려하여 선거 개시를 선언한 후, 김동원 부의장에게 사회권을 넘기고 의사당을 나갔다.[12]투표 결과는 개표 완료 후 한꺼번에 발표하는 방식이 아니라, 감표위원이 투표용지를 한 장씩 호명하고 다른 감표위원들이 후보별 득표 상황을 게시판에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개표 도중 독립운동가 서재필에게 투표된 표가 1표 나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0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피선거권이 없었으므로 해당 표는 무효 처리 대상이었다. 사회를 보던 김동원 부의장은 서재필의 국적을 확인한 후 오후에 무효 여부를 결정하려 했으나, 다수 의원들이 "서재필 박사 본인이 미국 국적자라 공직을 맡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며 즉시 무효 처리를 요구했다. 이에 김동원 부의장은 그 자리에서 해당 표를 무효로 선언했다.
한편,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체에 참여하지 않았고 국회의원들에게 자신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13표를 얻었다. 이는 당시 정치 상황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준다.
개표 결과, 이승만이 총 투표수 196표 중 180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3]
후보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이승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80표 | 91.8% |
김구 | 한국독립당 | 13표 | 6.6% |
안재홍 | 무소속 | 2표 | 1.0% |
유효표 계 | 195표 | 99.5% | |
무효표 | 1표 | 0.5% | |
총 투표수 | 196표 | 100% |
오전 11시 30분, 김동원 부의장은 신익희 부의장과 서정희 의원을 보내 이승만에게 당선 사실을 알리고 의사당으로 다시 오도록 요청했다. 약 20분 후 이승만이 의사당에 도착하자 의원들은 박수로 맞이했고, 이승만은 간단한 당선 인사를 했다. 이후 서정희 의원의 선창으로 참석자 모두 "대통령 이승만 박사 만세"와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했다. 낮 12시 10분, 이승만이 국회의장 자격으로 회의 중지를 선언하면서 대통령 선거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4. 2. 부통령 선거
오후 2시 다시 개회한 국회 본회의는 바로 부통령 선거 절차에 들어갔다.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선거 시작 전 발언권을 얻어, 당시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이시영, 조만식, 오세창 세 사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승만은 이시영을 "대중적 인기가 높고 정치권에서도 딱히 싫어하는 이가 없는 원만한 사람"으로, 오세창은 "기미 독립 선언에 참여한 투철한 독립 투사이자 민의를 충실히 따를 사람"으로, 조만식은 "명망이 높을 뿐 아니라 이북 동포들에게 손을 내미는 의미에서도 부통령으로 뽑으면 좋을 사람"이라고 각각 평가했다. 그는 셋 중 누가 당선되든 좋다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세 사람 모두 70대 이상의 고령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3]
이승만의 발언 후 속행된 투표 결과, 1차 투표에서는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없어 2차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 때는 퇴장했던 이승만도 부통령 선거에는 참여하여 총 투표수는 197표였다.
2차 투표 결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장을 지냈으며 이승만과 민주국민당의 지지를 받은[3] 이시영이 총 197표 중 133표를 얻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헌법은 첫 두 번의 투표에서 당선되기 위해서는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표(132표)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만약 이시영이 2차 투표에서도 당선에 필요한 표를 얻지 못했다면, 2위인 김구와 결선 투표를 치러 과반수 득표자가 당선될 예정이었다.
부통령 선거 결과는 개표를 완료한 뒤 한꺼번에 최종 결과를 발표했으며, 상세 결과는 아래와 같다.
후보 | 정당 | 1차 투표 득표수 | 2차 투표 득표수 |
---|---|---|---|
이시영 | 대한국민당 | 113 | 133 |
김구 | 한국독립당 | 65 | 62 |
조만식 | 조선사회민주당 | 10 | |
오세창 | 무소속 | 5 | |
장택상 | 무소속 | 3 | |
서상일 | 민주국민당 | 1 | |
이구수 | 무소속 | 0 | 1 |
무효표 | 0 | 1 | |
총 투표수 | 197 | 197 | |
재적 의원수 | 198 | 198 |
5. 국무총리 인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정부 구성을 위한 첫 국무총리 인선에 나섰다. 당시 국회 내 주요 파벌들은 각자 지지하는 후보가 있었으나, 이승만은 1948년 7월 27일 예상 밖의 인물인 이윤영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하며 인준을 요청했다.[15][16] 그러나 이윤영 임명동의안은 국회 표결에서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부결되었다.[16] 이는 특정 정파에 얽매이지 않고 남북 통일을 고려한 인선이라는 이승만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주요 정치 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결과였다.[17][18]
첫 인준안 부결 후, 이승만은 7월 31일 이범석 조선민족청년단 단장을 새로운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19] 8월 2일 열린 국회 본회의 표결 결과, 이범석 임명동의안은 찬성 110표, 반대 84표로 통과되어[20] 이범석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민주당의 김성수가 소속 의원들에게 이범석 지지를 설득하는 등[20] 정치 세력 간의 조율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5. 1. 배경
국무총리 지명을 앞두고 국회의 3대 파벌인 독촉, 한민당, 한독당계 무소속 의원들은 각각 신익희 국회부의장, 김성수 한민당 당수, 조소앙 한독당 부당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 세 사람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10]이승만은 7월 22일 기자회견을 갖고 국무총리로는 "의외의 인물"을 내정했다고 밝혔는데, 이 발언이 전해지자 각 파벌들은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이시영 역시 7월 23일 오후 이승만과 만나 1시간 반 동안 조각 문제를 논의하고 나온 뒤 기자들에게 이승만이 "국무총리는 의외의 인물"이라고 했다며, "그 인물이 어떠한 인물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해 궁금증을 자아냈다.[14]
5. 2. 이윤영 지명
이승만이 언급한 "의외의 인물"은 평안북도 출신의 조선민주당 부당수 이윤영으로 여겨졌다. 이승만은 부통령 선거 당시에도 통일을 염원하며 조만식 조선민주당 당수를 지지하려 했던 점을 고려할 때, 국무총리라도 이북 출신 인사를 지명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윤영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되었다.[15]이는 이승만이 의도적으로 원내 주요 정치 세력의 후보를 배제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민주당(한민당) 인사를 지명할 경우, 탄탄한 원내 기반을 통해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했지만, 한민당에 대한 반감이 커 국론 분열이 심화될 수 있었다. 반면 한국독립당(한독당) 계열 인사를 기용하면,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나, 임정계와 비임정계 간의 갈등이 격화될 위험이 있었다.[15]
결국 이승만은 1948년 7월 27일, 직접 국회를 찾아 이윤영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표하며 인준을 요청했다. 그는 특정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인사를 지명함으로써 국론 분열을 피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최우선 과제인 남북 통일을 위해 이북 대표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어진 무기명 표결 결과, 총 투표수 193표 중 찬성 59표, 반대 132표, 기권 2표로 이윤영 총리 임명동의안은 부결되었다.[16]
이승만은 다음 날인 7월 28일 이화장에서 담화를 발표하며, 한민당과 한독당이 자신들의 계파 인사가 지명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으로 인준안을 부결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원들이 정부 수립 초기부터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국가 재건을 저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7] 이에 야당 의원들은 이승만 자신을 180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했을 때는 국회가 민의를 대변한다고 하더니, 총리 인준안을 132표로 부결시키자 이를 당파 싸움으로 치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반박했다.[18]
5. 3. 이범석 지명
이윤영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후, 이승만 대통령과 원내 각 파벌은 차기 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이승만 측에서는 이범석 조선민족청년단 단장을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민당 의원들은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회합을 갖고 김성수 당수를 끝까지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한독당 계열 무소속 의원들 역시 같은 기간 회합을 통해 조소앙 부당수를 지지할 것을 선언하며 대립각을 세웠다.[19]결국 이승만은 7월 31일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이는 지난번처럼 후보자를 비밀에 부쳤다가 국회에서 발표하는 방식과 달리, 국회 승인안 논의 며칠 전에 후보자를 공개한 것이었다. 이는 이전 인준안 부결이 계파 간 절충과 후보자에 대한 공론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8월 2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총 투표수 197표 중 찬성 110표, 반대 84표, 무효 3표로 이범석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이 통과되었다.[20] 이범석 총리 임명이 가결된 데에는 무소속 의원들의 찬성표뿐만 아니라, 국무총리 후보 중 한 명이었던 김성수 한민당 당수가 직접 소속 의원들에게 이범석 지지를 설득한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6. 취임일 논란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의 제1대 대통령 임기 시작일을 언제로 볼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제헌 헌법에 관련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제1대 대통령의 임기 만료일과 제2대 대통령의 임기 시작일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정부는 취임식이 열린 7월 24일을 임기 시작일로 보았지만, 일부 국회의원은 당선일인 7월 20일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부 수립일인 8월 15일을 임기 시작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러한 논란은 발췌 개헌 파동으로 대통령 선거가 늦어져 7월 안에 선거를 치르기 어렵게 되자, 국회에서 8월 15일을 임기 시작일로 합의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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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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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제1회-제33호 국회회의록
194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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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문제에 정부통령 합의 - 의외 인물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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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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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난 총리 적재, 김성수·조소앙·신익희 씨 등 외 이윤영 씨 아연물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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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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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제35호 국회회의록
1948-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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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 원한 길 따른다" 총리 인준 부결 후 이 대통령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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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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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제36호 국회회의록
194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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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국무총리 임명, 이범석 씨 유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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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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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제37호 국회회의록
194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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