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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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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는 1978년 12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간접 선거 방식으로 치러졌으며, 박정희가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8년 5월에 실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해 2,583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으나, 선거 당일에는 2,581명으로 줄었다. 박정희는 2,581명의 대의원 중 2,577표를 얻어 99.8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한 표의 무효표가 발생했다. 이 선거는 유신 체제 하에서 치러진 형식적인 선거라는 부정적 평가와, 정치적 안정을 강조하는 긍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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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
지도 정보
197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지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투표 결과
선거 정보
국가대한민국
선거 유형대통령 선거
투표 방식간접 선거 (선거인단)
이전 선거197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72년
선거일1978년 7월 6일
다음 선거1979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79년
선거인단2,581명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당선 필요 투표수1,291표
후보 정보
후보박정희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득표수2,577
득표율99.85%
선거 결과
대통령 당선자박정희
선거 전 대통령박정희
선거 전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선거 후 대통령박정희
선거 후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2.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1978년 5월 18일, 박정희 정권은 제9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는 유권자 19,140,303명 중 13,319,076명이 투표하여 78.9%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3][4]

지역투표수투표율(%)유효표증감
서울2,754,08667.82,665,140+88
부산942,14877.1919,727+41
경기1,634,74278.21,593,630+39
강원764,85786.9746,432+6
충북577,87787.0562,148+4
충남1,068,65883.41,038,174+4
전북905,39484.9876,166+3
전남1,402,83181.51,356,5310
경북1,833,99084.41,790,763+25
경남1,255,86083.01,223,490+12
제주178,63386.9173,977+2
합계13,319,07678.912,946,178+224


2. 1. 지역별 대의원 수

1978년 5월 18일에 실시된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선출된 대의원 정수는 2,583명이었다.[3][4] 그러나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경북 청송의 조용덕 대의원이 사망하고 충남 당진의 이하용 대의원이 사퇴하여 대통령 선거 당시 재적 대의원 수는 2,581석으로 줄었다.[5]

지역재적 대의원 수
서울391
부산145
경기319
강원151
충북131
충남235
전북203
전남312
경북379
경남290
제주27
2,583


3. 대통령 후보 입후보

1978년 7월 1일부터 7월 5일까지 닷새 동안 후보 등록을 받은 결과, 곽상훈 등 507명의 대의원의 추천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단독으로 입후보하였다.[6]

김영삼, 이민우 등 신민당 비당권파는 제9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를 내야 한다며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 개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철승 대표 등 당권파는 대의원 200명의 추천을 받아 입후보할 가능성도 없고, 설령 후보를 내더라도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며 이 간접 선거는 보이콧하고 직선제 개헌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묵살했다. 신민당은 대통령 후보를 정당이 지명하고, 대의원 후보들이 지지 후보가 정해진 상태에서 대의원 선거를 치르는 미국 선거인단 방식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이철승 대표는 만약 이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대통령 후보를 내는 것에 찬성할 수도 있다고 밝혔으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반대로 해당 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7][8][9][10][11]

4. 대통령 선거 결과

1978년 12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81명 중 2,577명이 찬성하여 박정희 후보가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무효 1표).[12] 박정희는 당선을 위해 최소 1,291표가 필요했으나, 99.8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투표 방식은 후보자 이름을 적는 방식이었는데, 유일하게 박정희의 이름을 '박정'''의''''라고 적은 무효표 1표가 나왔다.[2] 이는 사실상 유일한 반대표였다.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과 함께 임시공휴일 지정, 통행금지 해제, 고궁 무료 개방, 수감자 가석방 등의 조치를 취했다.[12]

4. 1. 지역별 투표 결과

지역박정희무효기권재적
서울38902391
부산14500145
경기31900319
강원15100151
충북13100131
충남23400234
전북20300203
전남31200312
경북37710378
경남28901290
제주270027
2,577132,581



서울 중구의 한병림, 서울 성동구의 김성엽, 경남 진양의 하계용 등 3명은 교통사고 등으로 와병하여 선거에 참석하지 못했다.[5]

훗날 박승국 당시 경상북도 대구시 북구 제2선거구 대의원은 당시 1표의 무효표는 자신의 표였다고 밝히며, 이름을 적는 방식의 100% 찬성 투표식 선거에 반발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13]

4. 2. 무효표 논란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북구 제2선거구 박승국 대의원은 유일한 무효표를 던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름을 적는 방식의 100% 찬성 투표 방식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밝혔다.[13] 박승국 대의원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100% 찬성은 오히려 문제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독재를 하는 후진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13]

5. 평가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는 유신체제 하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선거 후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당시 언론 보도와 교과서 내용을 인용하여, 단일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 방식과 99% 이상의 찬성률이 공산국가의 선거와 유사하다고 비판하는 전단을 배포했다.[14] 조갑제는 이 전단을 두고 "객관성과 함축성, 유신체제의 본질을 까발린 간결성·해학성"을 갖춘 예술적 작품이자, 제도 언론과 관제 교과서를 인용하여 법적 제재를 피할 수 있었던 "지하유인물 가운데 베스트셀러"라고 평가했다.[14]

반면, 조선일보는 1978년 7월 7일 자 사설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며 유신체제를 통한 정치적 안정을 강조했지만,[15] 이는 당시 언론 통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5. 1. 부정적 평가

유신체제 하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이 선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선거가 끝난 후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전단을 배포했다.[14]

통일주체국민회의는 6일 상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오는 84년(1984년)까지 재임할 임기 6년의 제9대 대통령을 선출한다. 국민회의는 6일 상오 10시 개회식을 한 뒤 단일후보인 박대통령에 대한 제9대 대통령 선출 투표에 들어간다.|7월 6일 《한국일보》 1면한국어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는 6일 상오 10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회식을 갖고 현 박정희 대통령을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제2대 국민회의 대의원 2583명 가운데 2578명이 참석, 박정희 후보가 2577표(무효 1표)를 얻어(99.9%) 임기 6년의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7월 7일 《한국일보》 1면한국어

공산국가에서도 형식상 선거를 치른다. 그러나 그 선거는 민주주의국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선거와는 다른 일종의 사기행위이다. ……우선 공산국가의 선거에서는'' '''단 한사람의 입후보자에''' ''대하여''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을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찬성할 수 있는 자유는 있어도 반대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선거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많은 사람 중에서 적격자 한사람을 고르는 선택행위인데'' '''입후보자가 한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벌써 선거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선거 결과는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과 99% 이상의 찬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선거 분위기 속에서 반대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공산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 다른 어떤 권리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들임을 알 수 있다.|대한민국 문교부가 발행한 중학교용 교과서 《승공통일의 길 2》47, 52, 53쪽에한국어

조갑제는 이 전단에 대해 "유신체제 아래서 수많은 지하유인물이 나왔지만 이 전단과 견줄 만한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객관성과 함축성, 유신체제의 본질을 까발린 간결성·해학성으로 해서 이 전단은 예술적 감동마저 주고 있다. 이 전단을 지하유인물 가운데서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은 안전성 덕분이었다. 여기에 인용된 것은 모두 유신체제에 편입된 제도언론과 관제 교과서였기 때문에 법으로 옭아맬 아무런 꼬투리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전단엔 주관적 서술이 없다. 그런 것은 오히려 군더더기로 느껴질 만큼 비교법이 완벽하다"고 평가했다.[14]

5. 2. 긍정적 평가

조선일보는 1978년 7월 7일자 '제9대 대통령 선출'이라는 사설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며, 유신체제를 통한 정치적 안정을 강조했다.[15] 이는 당시 언론 통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참조

[1] 서적 Korea: A Century of Change World Scientific 2001
[2] 웹사이트 김일 박치기에 온 국민 시름 잊고… '체육관 대통령' 선출 민주주의 시름 겪어 http://www.hankookil[...] 2019-03-28
[3] pdf http://www.ddc.go.kr[...]
[4]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elecinfo.nec.[...] 2018-04-24
[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7
[6]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7
[7]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19
[8]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19
[9]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7
[10]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19
[11]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19
[1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3 인물과사상 2002
[13] 웹인용 김일 박치기에 온 국민 시름 잊고… '체육관 대통령' 선출 민주주의 시름 겪어 http://www.hankookil[...] 2019-03-16
[14]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3 인물과사상 2002
[15]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3 인물과사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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