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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동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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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화동은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속하는 법정동이자 행정동이다. 백제 시대에는 우술군, 신라 시대에는 비풍군으로 불리다가 고려 시대에 회덕현으로 개칭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회덕현 현내면 대화리로 불렸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전군에 편입되었고, 1935년 대전읍이 부로 승격되면서 대덕군에 속하게 되었다. 1963년 대전시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대덕구 설치와 함께 대덕구의 행정동이 되었다. 대전산업단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대전대화초등학교와 대전원명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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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동 (대전)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대화동
한자 표기大禾洞
영문 표기Daehwa-dong
광역시도대전광역시
시군구대덕구
면적3.16
세대3,930
세대 조사2014.11.30.
인구6,835
인구 조사2022년 3월
법정동대화동
22
104
동주민센터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심5길 10
홈페이지대화동 행정복지센터

2. 역사

대화동 지역은 백제 시대 우술군에 속하였고, 신라 시대에는 비풍군으로 불렸다. 고려 시대에는 회덕현으로 개칭되었으며, 한때 공주의 속현이 되기도 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 이후 회덕현에 속했으며, 정조 13년(1789년)의 《호구총수》 기록에는 회덕현 현내면 소속 '대화리'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회덕군이 설치되면서 회덕군 내남면 대화리가 되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이 되면서 대화리는 여러 지역 일부를 병합하여 대전군 내남면 대화리가 되었다. 1935년 대전부가 신설되면서 대덕군이 분리되었고, 대화리는 대덕군 내남면 소속으로 남게 되었다. 1963년 1월 1일 대전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시에 편입되었으며[2], 1989년 1월 1일 대덕군이 폐지되고 대전직할시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대덕구의 행정동이자 법정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3]

2. 1.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

백제 시대에 대화동 지역은 우술군에 속했다. 이후 신라 시대에는 비풍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유성현과 적오현(나중에 덕진현으로 불림)을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 시대 초기에 비풍군은 회덕현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1018년 현종 9년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현종 9년의 군현 개편 과정에서 회덕현에서 분리되어 공주의 속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회덕현은 1172년 명종 2년에 처음으로 감무(조선 시대의 현감과 유사한 직책)가 파견되면서 주현으로 승격하여 행정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2. 2. 조선시대

조선 건국 이후 1413년 태종 13년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회덕현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 현감이 다스리는 현이 되었다. 이 시기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유성현이 폐지되었고, 그 영역 일부가 회덕현에 편입되었다.

1789년 정조 13년의 인구 조사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회덕현 현내면 소속으로 ‘대화리’라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선 중기부터 이미 ‘대화리’라는 지명과 행정구역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고종 32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기존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에 23부제가 실시되었다. 이 개편으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한 27개 군 중 하나인 회덕군으로 승격되었고, 대화리는 회덕군 내남면 대화리에 소속되었다. 당시 회덕군은 기존 회덕현의 7개 면에 공주군의 5개 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이전보다 크게 확대되었다.

2. 3.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1914년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이 설치되었다. 이때 대화리는 율사동, 구만리, 법동 일부와 서면의 구만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전군 내남면 대화리가 되었다. 이후 1931년에는 대전군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대전군은 1읍 11개 면 체제가 되었다.

1935년 11월 1일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함에 따라 기존의 대전군이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화동은 대덕군 내남면 대화리로 남게 되었다.

광복 이후, 1963년 1월 1일 대전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대화리는 대전시에 편입되었다.[2] 그리고 1989년 1월 1일 대덕군이 폐지되고 대전직할시 대덕구가 신설되면서, 대화동은 대덕구에 속한 행정동이자 법정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3]

3. 연혁

4. 지리

갑천유등천에 연해 있고, 그 지류인 법동천이 흘러 땅이 매우 비옥하였다. 동 이름 역시 지역의 땅이 매우 기름져 벼가 잘되는 곳이라는 의미로 ‘대화’(大禾)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과거에는 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으며, ‘구만이’와 ‘안구만이’를 중심으로 두레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3년 제1공업단지, 1975년 제2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농업 중심 지역에서 산업 지역으로 크게 변모하였다. 공업단지 조성으로 안구마니와 구만이 등 일부 대전천 변의 농토를 제외하고는 대화동 대부분의 지역이 공업단지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의 전출입이 잦아지면서 마을의 정체성이 점차 약화되었고, 원주민들도 새로 이주해 온 주민들과 함께 공업단지 내 생산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생산직 외에도 대화동 공업단지와 오정동 사이에 새로 생긴 주거지와 상업지역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도 많아졌다. 공업단지 개발로 항소·밤적골·망골 등의 전통 마을과 관련 민속 등은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옛 대화동의 모습은 구만이와 안구만이 마을의 하천 변 일부에서만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1]

5. 산업

대화동은 과거 갑천유등천, 그리고 그 지류인 법동천이 흘러 땅이 매우 비옥했다. 이 때문에 지역 이름도 벼가 잘 자라는 기름진 땅이라는 의미로 ‘대화’(大禾)라고 불렸다. 과거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지었으며, ‘구만이’와 ‘안구만이’ 마을을 중심으로 두레가 조직되어 운영되었다.[1]

그러나 1973년 제1공업단지, 1975년 제2공업단지(대전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대화동은 농업 지역에서 산업 지역으로 크게 변모하였다.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안구마니와 구만이 등 일부 대전천 변의 농지를 제외한 대화동 대부분 지역이 공업 지대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전출입이 잦아지면서 마을 고유의 정체성은 점차 약화되었다.[1]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도 공단 내 공장에서 생산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또한, 공단과 오정동 사이에 새로 조성된 주거지와 근린상업지역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공업단지 개발로 항소, 밤적골, 망골 등 전통 마을과 그곳의 민속 등은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옛 대화동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곳은 구만이와 안구만이 마을의 대전천 변 일부뿐이다.[1]

6. 교육

7. 주요 시설


  • 대전산업단지

참조

[1] 웹사이트 대화동 지역특성 http://www.daedeok.g[...] 2012-08-29
[2] 법률 법률 제1175호 1962-11-21
[3] 웹사이트 대화동의 연혁 http://www.daedeok.g[...] 201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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