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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직장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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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블린 직장폐쇄는 1913년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노동 분쟁으로, 열악한 환경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제임스 라킨이 이끈 아일랜드 운송 및 일반 노동자 연합(ITGWU)의 활동에 반발한 고용주들이 ITGWU 조합원들을 해고하면서 시작되었다. 윌리엄 마틴 머피를 중심으로 한 고용주들은 파업 파괴 노동자를 고용하고, 노동자들의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여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으며, 아일랜드 시민군이 결성되기도 했다. 7개월간 이어진 직장폐쇄는 영국 노동조합 회의의 지원 거부로 노동자들의 패배로 끝났지만, 아일랜드 노동 운동의 연대 정신을 강화하고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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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직장폐쇄
분쟁 개요
더블린 광역경찰이 노조 집회를 해산시키는 모습
더블린 광역경찰이 노조 집회를 해산시키는 모습
명칭더블린 직장폐쇄
영어 명칭Dublin Lock-out
발생 기간1913년 8월 26일 – 1914년 1월 18일
위치아일랜드, 더블린
원인열악한 노동 환경
노동자 권리 부재
노조 결성 불가
목표노동 환경 개선
노조 결성 권리 쟁취
방법파업, 집회, 퇴근
결과파업 노동자들의 업무 복귀
다수 노동자들이 ITGWU 가입 포기 서약서 작성
ITGWU의 심각한 타격
노조 결성의 원칙 인정
아일랜드 시민군 결성
교전 세력
노동자 단체ITGWU
UBLU
아일랜드 시민군
노동자 단체 지원TUC
고용주 및 기업DUTC
DBTEA
고용주 및 기업 지원더블린 시자치체
더블린 광역경찰
로마 가톨릭 교회
지휘관 및 지도자
노동자 단체제임스 라킨
제임스 코놀리
잭 화이트
고용주 및 기업윌리엄 마틴 머피
규모
노동자20,000명
고용주300명
피해 규모
경찰 부상자200명
사망자2명
부상자수백 명
기타 정보
1913년 8월 29일 금요일 더블린 광역경찰에서 발행한 성명서
1913년 8월 29일 금요일 더블린 광역경찰에서 발행한 성명서. 노조 측에서 예고한 8월 31일에 밖에 나오지 말라는 엄포이다. 노조 지도부의 라킨은 이 성명서가 발행된 당일 성명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2. 배경

20세기 초 아일랜드 더블린의 노동자들은 극심한 빈곤과 열악한 주거 및 노동 환경에 시달렸다. 특히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미숙련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1] 이러한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은 제임스 라킨, 제임스 코놀리 등이 이끄는 노동 운동의 성장을 촉진했으며, 이는 결국 1913년 더블린 직장폐쇄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1. 빈곤과 열악한 주거 환경

20세기 초 더블린의 많은 노동자들은 끔찍한 환경의 빈민가에서 생활했다. 예를 들어, 헨리에타 스트리트에 위치한 조지아 시대 건물 15채에는 8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같은 거리 10번지에서는 아일랜드 자선 수녀회가 50명 이상의 미혼 여성을 수용하는 막달레네 세탁소를 운영했다.[1] 당시 더블린에서는 매년 약 4백만 건의 전당포 대출이 이루어졌으며, 빈곤층의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142명에 달해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은 부족한 의료 서비스와 과밀한 주거 환경 탓에 빈민가 내 질병 발생률이 높아지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결핵(TB)은 당시 더블린 빈민가에서 가장 흔한 질병으로, 빠르게 확산하며 많은 빈곤층의 목숨을 앗아갔다. 1912년에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결핵 관련 사망자 수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보다 50%나 더 많았으며, 사망자의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 보고서는 존 럼스덴 박사가 1903년에 발표한 연구를 바탕으로 업데이트된 것이다.

더블린의 빈곤 문제는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들을 위한 일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전까지 자신들의 권리를 대변할 어떠한 조직도 갖지 못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매일 서로 경쟁해야 했고, 가장 낮은 임금을 제시하는 사람이 일을 얻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2. 2. 제임스 라킨과 ITGWU의 등장

제임스 라킨리버풀 출신의 부두 노동자이자 노조 조직가로서, 더블린 직장폐쇄 당시 노동자 측의 핵심 인물이었다. 1907년, 그는 영국에 본부를 둔 전국 부두 노동자 연합(NUDL)의 지역 조직가로 벨파스트에 파견되었다. 벨파스트에서 라킨은 1907년 벨파스트 부두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이 과정에서 연대 파업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다. 연대 파업은 특정 사업장의 분쟁과 직접 관련 없는 노동자들이 파업 중인 동료들을 지지하기 위해 함께 파업하는 방식으로, 아일랜드 노동 운동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벨파스트 파업의 성공은 라킨의 명성을 높였으나, 그의 급진적인 방식은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더블린으로 전출되었다.

당시 더블린의 미숙련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블랙리스트에 올려 사실상 일자리를 구할 기회를 박탈하는 등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했다. 라킨은 이러한 더블린의 미숙련 노동자들을 조직하려 했으나, 이는 더블린의 막강한 고용주들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우려한 NUDL 지도부의 반발을 샀다. 결국 NUDL은 1908년 라킨을 해고했다.

NUDL에서 축출된 라킨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위한 독자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같은 해 아일랜드 운송 및 일반 노동자 연합(ITGWU)을 설립했다. ITGWU는 숙련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조직화되지 못했던 미숙련 노동자까지 포괄하는 아일랜드 최초의 노동조합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ITGWU는 설립 직후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더블린을 넘어 다른 아일랜드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라킨은 ITGWU를 통해 자신의 생디칼리즘 사상, 즉 노동조합을 통한 총파업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려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다.

ITGWU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초기 몇 차례의 파업에서는 패배를 겪기도 했지만, 점차 조직력을 강화하여 1913년 1913년 슬리고 부두 파업을 비롯한 여러 파업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ITGWU의 조합원 수는 1911년 4,000명에서 1913년에는 10,000명으로 급증하며 고용주들에게 큰 위협으로 부상했다. 라킨은 이러한 활동 과정에서 1910년 토니판디 폭동이나 1911년 리버풀 일반 운송 파업과 같은 영국의 노동 운동 사례를 참고하며 투쟁 방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2. 3. 제임스 코놀리와 아일랜드 노동당

당시 아일랜드에서 조직된 노동자 운동의 부상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제임스 코놀리였다. 그는 아일랜드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에든버러 출신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뛰어난 웅변가이자 훌륭한 작가로 평가받았다. 코놀리는 사회주의와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결합하여 지지했고, 더블린 거리에서 이를 주제로 연설하며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코놀리는 아일랜드 사회주의 공화당과 신문 ''노동자 공화국''을 창간했다. 1911년, 그는 ITGWU의 벨파스트 조직자로 임명되었다. 1912년, 코놀리는 라킨과 함께 아일랜드 노동당을 창당했다. 이는 영국 의회에서 곧 논의될 자치법안과 관련하여 노동자 계층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비록 자치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시행이 연기되었고, 이후 1916년 부활절 봉기를 거치며 아일랜드 공화주의가 부상함에 따라 결국 무기한 중단되었다.

2. 4. 윌리엄 마틴 머피와 고용주들

윌리엄 마틴 머피가 제임스 라킨을 노리는 만평


아일랜드의 고용주들 중 라킨ITGWU와 같은 노동조합에 반대했던 인물로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자본가인 윌리엄 마틴 머피가 있었다. 그는 코크주 캐슬타운베어 출신이다. 1913년 머피는 더블린 연합 전차 회사의 회장이었으며, 클레리스 백화점과 임페리얼 호텔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리시 인디펜던트'', ''이브닝 헤럴드'' 및 ''아이리시 캐톨릭'' 신문을 지배했고 B&I 라인의 주요 주주였다. 머피는 또한 저명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으며, 전 자유자치 의회 의원이었다.

오늘날에도 그의 옹호자들은 그가 자선심이 많고 훌륭한 고용주였으며, 그의 노동자들이 공정한 임금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운영하는 많은 기업의 노동 조건은 종종 열악했다. 직원들은 10일에 하루만 휴가를 받았으며, 하루 최대 17시간까지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더블린 전차 노동자들은 벨파스트리버풀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았고, 징벌적 벌금, 최장 6년까지 연장되는 수습 기간, 그리고 정보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회사 감시 문화에 시달렸다.[2]

머피는 노동조합 자체, 특히 직업별 노동조합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ITGWU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그 지도자인 라킨을 위험한 혁명가로 간주했다.[3] 1913년 7월, 머피는 300명의 고용주가 모인 회의를 주재하여 노동조합의 성장에 대한 집단적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머피와 다른 고용주들은 ITGWU가 더블린의 노동력을 조직화하는 것을 막기로 결의했다. 8월 15일, 머피는 ITGWU 회원으로 의심되는 노동자 40명을 해고했고, 다음 주에는 300명을 추가로 해고하며 노동조합 탄압에 나섰다.

3. 전개

1913년 8월, 더블린의 주요 고용주 중 한 명이자 언론사를 소유한 윌리엄 마틴 머피는 ITGWU에 가입한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성장하던 노동조합 운동을 억누르려는 고용주 측의 의도적인 조치였으며, 더블린 직장폐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머피의 행동에 다른 고용주들이 동조하면서 직장폐쇄는 더블린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크고 격렬한 노동 쟁의 중 하나로 발전하게 된다.

이에 맞서 제임스 라킨과 제임스 코놀리가 이끄는 노동자들은 파업과 시위를 통해 저항했으나, 고용주 연합과 더블린 수도 경찰의 강경한 탄압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의 일요일"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으며,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아일랜드 시민군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직장폐쇄는 수개월간 지속되며 더블린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직장폐쇄의 확산과 노동자들의 저항

1913년 8월 31일, 새크빌 가(Sackville Street) 집회 금지 포고문


더블린 직장폐쇄로 촉발된 산업 분쟁은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번졌다. 더블린의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몰아내고, 영국 본토와 아일랜드 다른 지역에서 파업 파괴 노동자들을 데려와 빈자리를 채웠다. 당시 연합 왕국 내에서도 가장 빈곤했던 더블린 노동자들은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했고, 영국의 노동조합 회의 (TUC)를 비롯한 여러 단체로부터 15만파운드에 달하는 지원금을 받아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을 통해 신중하게 분배되었다.[4][5]

파업 노동자들의 굶주린 자녀들을 영국 노조원들이 임시로 맡아 돌보려던 "어린이 계획"은 로마 가톨릭 교회, 특히 고대 히베르니아 기사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들은 가톨릭 아이들이 영국에 머무는 동안 개신교무신론에 물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분쟁 내내 고용주들의 편에 섰으며, 사회주의 혁명가로 여겨진 라킨을 공공연히 비난했다.[6]

주목할 점은 더블린 최대 고용주이자 수출 기업인 기네스가 직장폐쇄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네스는 머피가 주도하는 고용주 연합 가입을 거부했지만, 고용주 기금에 500GBP를 기부했다. 기네스는 동정 파업을 용납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하며, 아일랜드 평균보다 훨씬 나은 조건에서 일하는 자사 노동자들이 동정 파업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실제로 동정 파업에 참여한 6명은 해고되었다. 이미 ITGWU 조합원이었던 400명의 직원이 있었기에, 기네스는 노조와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라킨은 해고된 6명의 복직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세계 산업 노동자(IWW)의 지도자 빌 헤이우드는 파리에서 직장폐쇄 소식을 듣고 파업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1,000프랑을 모금하여 더블린으로 건너와 시청 앞에서 군중 연설을 하기도 했다.[8][9]

파업 노동자들은 파업 파괴 노동자들을 상대로 대규모 피켓 시위를 벌이고 위협했으며, 파업 파괴 노동자들 역시 폭력으로 맞섰다. 더블린 수도 경찰(DMP)은 노동자 집회에 진압봉(곤봉)을 휘두르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1913년 8월 31일, 경찰은 집회가 금지된 새크빌 가(Sackville Street, 현재의 오코넬 스트리트)에서 열린 집회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제임스 놀란과 존 번이라는 두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3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이 잔혹한 진압은 집회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연설하려 했던 제임스 라킨의 등장이 계기가 되었다. 라킨은 토머스 맥도너프의 처제인 넬리 기퍼드의 도움으로 윌리엄 마틴 머피 소유의 임페리얼 호텔 발코니에 몰래 올라가 연설을 강행했다. 이 사건은 20세기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참사와 리버풀 총파업 당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일컫는 용어인 피의 일요일로 기억된다. 이후 또 다른 노동자인 앨리스 브래디는 노조 사무실에서 배급 식량을 받아 나오던 중 파업 파괴 노동자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킹스타운 출신의 ITGWU 간부 마이클 번은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한 후 사망하는 비극도 발생했다.[10]

이에 코놀리, 라킨, 그리고 전 영국 육군 대위 출신인 잭 화이트는 노동자 시위를 보호하기 위한 자체 민병 조직인 아일랜드 시민군을 창설했다.

7개월간 지속된 직장폐쇄는 수만 명의 더블린 가정에 큰 고통을 안겼다. 머피 소유의 3대 주요 신문인 ''아이리시 인디펜던트'', ''선데이 인디펜던트'', ''이브닝 헤럴드''는 라킨을 악당으로 몰아가며 여론을 호도했다. 반면, 패트릭 피어스, 마르키에비츠 백작 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같은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은 언론을 통해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지지했다.

3. 2. "어린이 계획"과 가톨릭 교회의 반대

아일랜드 파업 노동자들의 굶주린 자녀들을 영국 노동조합원들이 임시로 맡아 돌보는 이른바 "어린이 계획"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로마 가톨릭 교회, 특히 고대 히베르니아 기사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들은 가톨릭 신자인 아이들이 영국에 머무는 동안 개신교무신론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분쟁 기간 동안 고용주들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사회주의 혁명가로 평가받던 라킨을 비난하는 입장을 취했다.[6]

3. 3. 경찰의 폭력과 "피의 일요일"



파업 노동자들은 파업 파괴 노동자들을 상대로 대규모 피켓 시위를 벌이고 위협했으며, 파업 파괴 노동자들 역시 파업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블린 수도 경찰(DMP)은 노동자 집회에 진압봉을 휘두르며 개입했다.

1913년 8월 31일, DMP는 당국에 의해 공개적으로 금지된 Sackville Street(현 오코넬 스트리트)에서 열린 집회를 공격했다. 이는 집회 금지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지도자 제임스 라킨이 노동자들을 위해 연설하려 나타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라킨은 토머스 맥도너프의 처제인 넬리 기퍼드의 도움으로 고용주 연합의 대표격인 윌리엄 마틴 머피 소유의 임페리얼 호텔로 몰래 들어가 발코니에서 연설을 시도했다. 경찰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제임스 놀란과 존 번이라는 두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으며, 3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 참혹한 사건은 "피의 일요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용어는 이후 20세기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다른 유혈 사태나 리버풀 총파업 당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10]

"피의 일요일"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희생은 이어졌다. 또 다른 노동자인 앨리스 브래디는 노조 사무실에서 식량을 배급받아 돌아가던 중 파업 파괴 노동자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던 레어 출신의 ITGWU 간부였던 마이클 번은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후 사망하는 비극을 맞았다.[10]

경찰과 파업 파괴자들의 계속되는 폭력에 맞서, 코놀리, 라킨, 그리고 전 영국 육군 대위 출신인 잭 화이트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보호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동자 민병대인 아일랜드 시민군을 결성했다.

3. 4. 아일랜드 시민군 창설

파업 노동자들은 파업 파괴 노동자들을 상대로 피켓 시위 등을 벌였으나, 더블린 수도 경찰(DMP)은 노동자 집회에 진압봉을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1913년 8월 31일, 경찰은 공개적으로 금지되었던 새크빌 스트리트(현 오코넬 스트리트)에서의 집회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제임스 놀런과 존 번이라는 두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으며, 3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피의 일요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노동자 앨리스 브래디는 식량을 운반하던 중 파업 파괴 노동자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킹스타운 출신 ITGWU 간부인 마이클 번은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한 후 사망했다.[10]

이러한 경찰과 파업 파괴자들의 폭력으로부터 노동자 시위를 보호하기 위해, 제임스 코놀리, 제임스 라킨, 그리고 전 영국 육군 대위였던 잭 화이트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민병대인 아일랜드 시민군을 창설했다.

4. 결과 및 영향

1914년 초, 영국 노동조합회의(TUC)가 파업 지원 요청을 거부하면서 더블린 직장폐쇄는 결국 노동자들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일터로 복귀해야 했다. 이 패배와 주요 지도자들의 부재(짐 라킨의 미국 이주, 제임스 코놀리의 처형)는 ITGWU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윌리엄 오브라이언과 토마스 존슨 등의 노력으로 노조는 재건되어 1919년에는 1913년보다 더 많은 조합원을 확보했다.

직장폐쇄 이후 블랙리스트에 오른 많은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영국군에 입대했고, 곧이어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비록 ITGWU와 소규모 노조 연합(UBLU)의 투쟁이 당장의 실질적인 노동 조건 개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더블린 직장폐쇄는 아일랜드 노동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자 연대의 원칙이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고용주 윌리엄 마틴 머피가 시도했던 것과 같은 노골적인 노조 파괴 시도는 이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다만, 장기화된 직장폐쇄는 더블린 지역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어 많은 기업이 파산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1. ITGWU의 좌절과 재건

1913년 더블린 직장폐쇄 관련 전단지


더블린 직장폐쇄는 1914년 초에 결국 마무리되었다. 이는 영국 노동조합회의(TUC)가 제임스 라킨과 코놀리의 파업 지지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결국 일터로 돌아가야 했고,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에 다시는 가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받았다.

직장폐쇄에서의 패배는 ITGWU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설상가상으로 1914년 라킨이 미국으로 떠나고, 1916년에는 부활절 봉기의 주요 지도자였던 코놀리가 처형당하면서 노조는 더욱 큰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노조 재건의 노력이 이어졌다. 윌리엄 오브라이언과 토마스 존슨 등이 중심이 되어 ITGWU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결과, 1919년에는 노조 조합원 수가 직장폐쇄 이전인 1913년보다 더 많아지며 조직력과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직장폐쇄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진 많은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할 다른 방도가 없어 영국군에 입대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입대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참호 속으로 보내졌다.

비록 ITGWU와 소규모 연합이었던 UBLU의 투쟁이 당장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 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아일랜드 노동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이를 계기로 노조 활동과 노동자 연대의 중요성이 아일랜드 사회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윌리엄 마틴 머피가 시도했던 것처럼 노골적으로 노조를 파괴하려는 고용주의 시도는 이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다만, 직장폐쇄는 더블린 지역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어 많은 상업 기업들이 파산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2. 노동 운동의 교훈과 사회적 인식 변화



더블린 직장 폐쇄는 1914년 초, 영국 노동조합회의(TUC)가 파업 지지 요청을 거부하면서 결국 노동자들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일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ITGWU는 이 패배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1914년 짐 라킨의 미국 이주와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주요 지도자였던 제임스 코놀리의 처형으로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노동조합 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윌리엄 오브라이언 (노동조합원)과 토마스 존슨 (아일랜드 정치인)과 같은 인물들의 노력으로 노조는 다시 재건되었고, 1919년에는 조합원 수가 직장 폐쇄 이전인 1913년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한편, 직장 폐쇄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진 많은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군에 입대하는 길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현실에 내몰리기도 했다.

비록 ITGWU와 소규모 더블린 건축 노동조합 연합(UBLU)의 투쟁이 당장의 임금 인상이나 노동 조건 개선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더블린 직장 폐쇄는 아일랜드 노동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조합 활동의 필요성과 노동자들 간의 연대 정신이 아일랜드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또한, 고용주들은 윌리엄 마틴 머피가 시도했던 것처럼 노동조합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다만, 장기간의 직장 폐쇄는 더블린 지역 경제에도 상당한 부담을 주어 많은 상점과 기업들이 문을 닫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3.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1913년 9월"

1913년 9월은 W. B. 예이츠의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로, 더블린 직장폐쇄 파업 기간 동안 ''아이리시 타임스''에 발표되었다. 이 시는 원래 휴 레인의 미술품 컬렉션을 위한 미술관 건립 계획이 더블린 시의 반대로 무산된 것에 대한 반응으로 쓰였다. 특히 직장폐쇄를 주도했던 자본가 윌리엄 마틴 머피는 미술관 건립에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 시를 단순히 미술관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격렬했던 직장폐쇄 파업에 대한 예이츠의 비판적 논평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1]

시에서 예이츠는 "기름기 묻은 금고에서 더듬으며, 페니에 하프펜스를 더하는" 당시 더블린 상인 계층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꼬집으며,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해 희생했던 과거 영웅들의 숭고함과 대비시킨다.



이것을 위해 야생 기러기는

모든 조류에 회색 날개를 펼쳤는가;

이것을 위해 그렇게 많은 피가 흘렀는가,

이것을 위해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는 죽었는가,

그리고 로버트 에머트와 울프 톤,

모든 용감함의 델리리움?

낭만적인 아일랜드는 죽고 사라졌네,

그것은 올레리와 함께 무덤에 있네.


예이츠는 이 시를 통해 물질주의에 빠진 당대 아일랜드 사회와 상인 계층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고, 과거의 이상과 용기가 사라진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참조

[1] 웹사이트 Exhibition - Poverty and Health http://www.census.na[...] National Archives of Ireland 2015-07-09
[2] 서적 Rebel City- Larkin, Connolly and the Dublin Labour Movement Merlin Press Ltd 2004
[3] 서적 William Martin Murphy 1997
[4] 웹사이트 Multitext - James Larkin http://multitext.ucc[...] 2015-07-09
[5] 문서
[6] 논문 Revolution in Ireland: Popular Militancy 1917 to 1923 1996
[7] 서적 Guinness 1886–1939 Cork Univ. Press 1998
[8] 서적 Transnational Perspectives on Modern Irish History Taylor & Francis 2014
[9] 서적 Rebellious Families Household Strategies and Collective Action in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Berghahn Books 2002
[10] 웹사이트 The Dublin Lock-out of 1913 http://www.anarkismo[...] 2015-07-09
[11] 논문 Postcolonial Yeats: Culture, Enlightenment, and the Public Sphere https://books.googl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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