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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르타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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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르타이오스는 7세기 후반 또는 7세기 60~30년대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으로, 특히 스파르타의 군사적 가치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와 출생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아테네 출신이라는 설과 라코니아 출신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티르타이오스는 주로 애가(elegy)를 통해 스파르타의 헌신과 용기를 강조했으며, 그의 시는 스파르타의 군사적 규율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작품은 스파르타의 군사적 이상과 집단 연대 의식을 강조하며, 호메로스의 영향을 받아 헥사미터와 이오니아 방언을 사용했다. 티르타이오스는 '헌법'과 '교훈'과 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시는 스파르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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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르타이오스
기본 정보
출생고대 스파르타
활동 시대기원전 7세기
직업시인
장르엘레게이아
이름
로마자 표기Tyrtaios
그리스어Τυρταῖος
현대 그리스어Τυρταίος

2. 생애

티르타이오스는 기원전 7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아테네 출신이라는 설과 스파르타 출신이라는 설이 대립한다.

수다에 기록된 활동 시기는 너무 이르고, 제롬은 기원전 633–632년을 제시한다.[25] 현대 학자들은 제2차 메세니아 전쟁과 티르타이오스의 생애를 7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5세기에 티르타이오스의 출생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는데,[2] 아테네 출신의 절름발이 교사라는 묘사는 스파르타를 폄하하기 위한 의도라는 주장이 있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신탁에 따라 아테네인을 보냈지만, 스파르타를 돕고 싶지 않아 절름발이에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시인을 보냈다고 한다.[3]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타 시민권을 받은 외국인 중 티르타이오스를 언급하지 않았다.[4] 고대 자료에는 그의 아테네 데모스가 아피드나이라고 언급되지만, 라코니아에도 같은 이름의 장소가 있었다.

플라톤조차도 티르타이오스의 아테네 출신설에 신빙성을 부여했다.[5] N. R. E. 피셔는 이 이야기가 아테네인들이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협력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티르타이오스는 스파르타 출신이라면 으레 사용했을 라코니아 도리아 방언이 아닌, 호메로스의 이오니아 방언으로 작품을 썼다.

하지만 학자들은 티르타이오스가 라코니아 출신이라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그 근거로 파편 2에서 제우스가 스파르타에 준 헤라클레이다이에 자신을 포함시키기 위해 1인칭 복수를 사용한 점, 그의 어휘에 가끔 도리아어가 사용된 점, 스파르타 전사들에게 권위적인 어조로 말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청동 검을 든 스파르타 전사 (기원전 550–25년)


티르타이오스는 시에서 스파르타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할 것을 촉구했고, 신의 섭리에 기초한 헌법을 상기시키며 왕, 원로, 백성의 협력을 요구했다.[14] 그는 테오폼푸스 왕 통치 시대에 메세니아를 처음 점령했을 때 조상 세대의 모범을 기리고, 무기, 갑옷, 전술에 대한 조언을 제공해 전투에서 영감을 주려 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의 조언이 전장보다는 학교에서 더 익숙하며, 호플리테 전쟁보다는 호메로스 시대의 구식 갑옷과 전술을 특징으로 한다고 본다.[16] 다른 학자들은 스파르타인들이 호플리테 전술을 개발 중이었거나,[17] 메세니아 게릴라에 대처하기 위해 호플리테 전술을 적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테나이오스, 스트라보와 ''수다''는 티르타이오스가 스파르타 장군이었다고 주장한다.[19] 일부 학자들은 티르타이오스가 높은 군사적 지위를 가졌다고 주장하지만,[20]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추측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21]

2. 1. 출생과 출신

《수다》에 기록된 활동 시기는 너무 이른 감이 있으며, 제롬은 기원전 633–632년을 제시한다.[25] 현대 학자들은 제2차 메세니아 전쟁과 티르타이오스의 생애를 7세기 후반, 또는 7세기의 "60년대와 30년대 사이"로 보다 폭넓게 추정한다.

기원전 5세기에 나타난 티르타이오스의 출생지에 대한 혼란은[2]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아테네 출신의 절름발이 교사라는 묘사는 스파르타를 폄하하기 위한 의도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아테네인들의 시각에서 스파르타가 자체적으로 재능 있는 시인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신탁에 따라 아테네인을 보내야 했지만, 유능한 인물로 스파르타의 전쟁을 돕고 싶지 않았기에 절름발이에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시인을 타협책으로 보냈다고 한다.[3]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타 시민권을 받은 두 명의 외국인 중 티르타이오스를 언급하지 않았다.[4] 고대 자료에는 그의 아테네 데모스가 아피드나이라고 언급되지만, 라코니아에도 같은 이름의 장소가 있었다.

고대 아테네의 선전이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스파르타를 숭배하여 비방할 의도가 거의 없었을 플라톤조차도 티르타이오스의 아테네 출신설에 신빙성을 부여했다.[5] 학자 N. R. E. 피셔는 "[그 이야기는] 아테네인들이 주로 아테네 시장을 겨냥해 만든 발명품이었을 것이다. 이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협력을 더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티르타이오스는 동시대의 알크만처럼 스파르타 출신이라면 으레 사용했을 라코니아 도리아 방언이 아닌, 호메로스의 이오니아 방언으로 작품을 썼다.

학자들은 티르타이오스가 라코니아 출신이라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그 근거로 파편 2에서 제우스가 스파르타에 준 헤라클레이다이에 자신을 포함시키기 위해 1인칭 복수를 사용한 점, 그의 어휘에 가끔 도리아어가 사용된 점, 스파르타 전사들에게 권위적인 어조로 말한 점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스파르타 출신 시인만이 용인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2. 스파르타에서의 활동

8세기에 티르타이오스의 조상 세대가 메세니아를 정복하면서 세련되고 교양 있는 생활 방식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레스보스의 테르판데르나 크레타의 탈레타스와 같은 외국 시인들이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상아와 금 장식, 정교한 솜씨의 청동 용기, 훌륭한 도자기, 알크만의 송시는 모두 6세기까지 이어지는 세련된 취향을 증명한다. 그러나 메세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뒤이은 전쟁과 내전으로 티르타이오스 시대가 시작되면서, 그의 시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은 피와 수고로 "비싸게 치러진" 것이었다.[12] 이 위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교훈적인 힘을 위해 언급되었다.

그의 시는 스파르타 역사의 중요한 시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스파르타인들은 번성하던 예술과 공예, 알크만과 같은 시인들의 가벼운 시에서 벗어나 군사적 긴축의 정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13] "스파르타의 삶은 스파르타식으로 변했다."[14] 일부 현대 학자들은 티르타이오스가 이러한 전환을 촉진하고 공식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믿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에 대한 실제 증거를 찾지 못한다.

티르타이오스는 그의 시에서 스파르타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할 것을 촉구했고, 신의 섭리에 기초한 헌법을 상기시키며 왕, 원로, 백성의 협력을 요구했다.[14] 그는 메세니아를 처음 점령했을 때, 테오폼푸스 왕의 통치 시대에 그들의 조상 세대의 모범을 기리고, 무기, 갑옷, 전술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전투에서 그들에게 영감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그의 조언이 전장보다는 학교에서 더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며, 호플리테 전쟁보다는 호메로스 시대의 구식 갑옷과 전술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16] 다른 사람들은 그 당시 스파르타인들이 여전히 호플리테 전술을 개발하고 있었거나[17] 메세니아 게릴라에 대처하기 위해 호플리테 전술을 적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티르타이오스의 시는 거의 항상 스파르타 사회에 미친 영향의 징후를 찾기 위해 목적론적으로 해석된다. 호메로스 서사시와 초기 비가 사이의 운율과 어구의 유사성은 이러한 경향을 부추겨 때때로 티르타이오스의 중요성에 대한 극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첫 번째 시인"이라고 불렸고, 이와 유사하게 "그는 단일 챔피언의 호메로스적 이상인 ''아레테''(탁월함)를 애국자의 ''아레테''로 바꾸었다"고 불렸다.[18] 일부 학자들에게 이것은 티르타이오스에게 너무 많은 공을 돌리는 것이다. 그의 ''아레테''의 사용은 호메로스의 사용에 진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의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개인의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고전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 등이 익숙하게 사용했던 "도덕적 탁월함"을 예상하는 것은 아니다.

아테나이오스, 스트라보와 ''수다''의 두 번째 항목은 티르타이오스가 스파르타 장군이었다고 주장한다.[19] F. Rossi(1967–68)와 같은 일부 현대 학자들은 티르타이오스가 높은 군사적 지위를 가졌다고 주장하지만,[20] Gerber(1997)는 이것이 추측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군사 사령관만이 군사적 훈계와 지시를 내릴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지만, 이는 불필요한 추정이다."[21]

3. 작품

수다에서 언급된 '헌법'(Πολιτεία λακεδαιμονίοις|폴리테이아 라케다이모니오이스grc)은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트라보가 언급한 '에우노미아'(Εὐνομία|에우노미아grc)의 다른 제목으로 여겨진다.[22]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 이 작품은 국가와 정부 발전에 있어서 신의 섭리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스파르타제2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헌법을 유지한 채로 살아남았는데, 이는 승리로 인해 변화가 불필요해졌거나 티르타이오스가 장려한 종류의 "종교적 선전"이 변화에 대한 압력을 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다'에 따르면, 티르타이오스의 '헌법'과 '교훈'(Ὑποθῆκαι|히포테카이grc)은 모두 애가 연으로 구성되었다. 파우사니아스는 또한 '아나페스트'를 언급하는데, 그 중 몇 구절은 디오 크리소스톰에 의해 인용되었으며, 석학에 의해 티르타이오스의 작품으로 여겨진다.[22]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를 '수다'에 언급된 소위 '전쟁 노래'(Μέλη Πολεμιστήρια|멜레 폴레미스테리아grc)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라코니아 방언으로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나, 다른 것은 남아있지 않다.[22]

필로데모스에 따르면, 티르타이오스는 그의 시뿐만 아니라 음악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23] 율리우스 폴룩스는 티르타이오스가 스파르타인들에게 연령별(소년, 청년, 노인) 세 개의 합창단을 소개했다고 언급했으며,[24] 일부 현대 학자들은 그가 권고와 반성을 번갈아 가며, 그리스 합창 시와 유사한 응답 형식으로 각각 5개의 연으로 그의 애가를 작곡했다고 주장한다. 고대 주석가들은 티르타이오스를 아르킬로코스와 칼리누스와 함께 애가의 발명자로 언급했다.[25]

4. 시적 특징 및 주제

티르타이오스의 시는 스파르타 사회에 끼친 영향, 특히 군사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점을 보여준다.

그의 시는 고대 그리스 사상과 호메로스아레테 개념을 스파르타의 개인 및 집단 환경에서 보여준다. 시 9에서 그는 진정한 ''아레테''를 달성하려면 응집력 있는 집단에 속해야 함을 강조한다.[34] 티르타이오스가 ''아레테''를 중심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스파르타 전사를 용감하고 애국적인 전사로 만드는 스파르타 이데올로기 때문이며, 그의 시는 스파르타인이 강력한 자아가 되도록 이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맹렬한 투지"를 강조하며, 주입식 사고방식을 경계한다.[35]

티르타이오스 시에 나타난 또 다른 주제는 집단 간 연대 의식이다. 팔랑크스에서 개인의 ''아레테''를 발휘하려면 함께 싸우는 사람들과 최전선에 머물러야 하며, 스파르타인은 집단과 하나가 될 의무가 있었다.[34]

티르타이오스는 시에 특정 인물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전사가 국가 복지에 이타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그의 시는 군사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여 스파르타 전사들이 용감하게 싸우고, 죽음이나 승리를 통해 영광을 얻도록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35]

4. 1. 시적 스타일

티르타이오스는 주로 애가 시인이었다. 애가는 "영웅 헥사미터를 서정시 방향으로 변형한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26] 영웅 헥사미터는 호메로스가 사용했으며, 그의 구절과 이오니아 방언 어휘는 티르타이오스 시의 주된 내용이 되었다. 티르타이오스의 시는 도리아 방언을 사용하는 스파르타 청중을 위해 작곡되었지만, "이오니아 서사시가 방언과 민족 간의 경쟁을 초월하는 문화적 통합을 그리스인들 사이에 얼마나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27] 티르타이오스가 스파르타 고유의 국가적, 군사적 윤리를 표현하고 그의 시가 아마도 전쟁 중 연회나 행군 중에 불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오니아 어휘의 사용은 더욱 놀랍다. 그러나 행군 노래(Ἐμβατήρια|엠바테리아grc)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구절은 아나페스트로 되어 있으며, 도리스 방언을 포함하고 있어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된다.[28]

군사 연회에서 불렸던 애가는 심포지엄 시의 전통에 속하며,[29] 동시에 무술적 권고의 장르를 대표한다.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언어와 주제적 관심사를 채택한 것은 이 장르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티르타이오스의 시 10.1–2절("선봉에서 용감하게 쓰러져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15.494–7절에서 헥토르의 연설("그리고 미사일에 맞거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한 자는 죽게 하라. 자신의 아버지의 땅을 보호하다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을 의심할 여지없이 반영한다.[30] 티르타이오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호메로스를 의도적으로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고대 작가들의 시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귀족들의 심포지엄에서 공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서사시적 영웅에 대한 언급은 귀족 청중의 엘리트 지위를 찬양하는 역할을 했다.[31]

생존해 있는 가장 긴 세 개의 시 구절(fr. 10–12)은 이상적인 전사를 묘사하고 그의 개인적인 선택에 따르는 불명예나 영광을 설명하는 완전하거나 거의 완전한 시이다. 시적 품질은 고르지 않고, 눈길을 끄는 이미지가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서투른 전환, 반복 및 여백 채우기가 일부 있다. 다음 구절은 이 중 하나(fr. 11, 27–34행, 여기서는 '''1'''–'''8'''행으로 지칭)에 속하며, 중장보병 부대 간의 전투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그림을 제공한다.[32]

ἔρδων δ' ὄβριμα ἔργα διδασκέσθω πολεμίζειν,:μηδ' ἐκτὸς βελέων ἑστάτω ἀσπίδ' ἔχων,ἀλλά τις ἐγγὺς ἰὼν αὐτοσχεδὸν ἔγχει μακρῷ:ἢ ξίφει οὐτάζων δήιον ἄνδρ' ἑλέτω,καὶ πόδα πὰρ ποδὶ θεὶς καὶ ἐπ' ἀσπίδος ἀσπίδ' ἐρείσας,:ἐν δὲ λόφον τε λόφῳ καὶ κυνέην κυνέῃκαὶ στέρνον στέρρνῳ πεπλημένος ἀνδρὶ μαχέσθω,:ἢ ξίφεος κώπην ἢ δόρυ μακρὸν ἑλών.|사람은 먼저 용감하게 강력한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방패를 들고 미사일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서, 길고 긴 창이나 칼로 상처를 입히며,:적의 생명을 빼앗아라. 발을 발 옆에 대고 방패를 방패에 대고,:그리고 볏을 볏에 대고 투구를 투구에 대고 가슴을 가슴에 대고, 싸움에 휘말려—사람 대 사람으로 싸우게 하라.:검자루나 창을 단단히 잡고!grc

'''1'''행의 고귀한 감정은 독창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어휘는 완전히 호메로스적이며, '''5'''–'''7'''행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13.130–33)에서 각색되었지만,[33]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호메로스는 한쪽의 근접 대형 진격을 묘사하는 반면, 티르타이오스는 중장보병 스타일의 전투에서 만나는 두 편을 묘사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전투에 대한 이러한 묘사를 시대착오적이라고 거부한다. 예를 들어 미사일은 중장보병 전쟁의 특징이 아니었다. 이 구절은 티르타이오스가 사용하는 더 일반적인 장치 중 하나인 증폭을 위한 병렬 구절 사용을 보여주며, 때로는 지루한 반복으로 퇴보한다. 여기서는 혼잡한 전장의 감각을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4. 2. 주요 주제

티르타이오스의 시에는 그가 스파르타 사회에 끼친 영향이 나타나는 많은 사례가 있다. 그러한 주제 중 하나는 군사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이 스파르타를 어떻게 형성하는 데 기여했는가이다.

첫째, 티르타이오스의 시는 고대 그리스 사상과 호메로스의 개념인 아레테를 잘 보여준다. 이 개념은 탁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티르타이오스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러한 이상을 스파르타의 개인과 집단 환경 모두에서 보여줄 수 있다. 시 9에서 그는 진정한 최고의 ''아레테''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을 함께 보여주는 응집력 있는 집단에 속해야 함을 보여준다.[34] ''아레테'' 개념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스파르타 전사를 가장 용감하고 애국적인 전사로 만드는 스파르타 이데올로기를 통해서이다. 그의 시가 스파르타인이 어떻게 가장 강력한 자아가 되는지를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를 더욱 밀어붙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 개념을 중심으로 글을 쓰지만, 이를 자신이 주입하는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구체적으로 "맹렬한 투지"에 대해 쓴다.[35]

티르타이오스 9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군사 이데올로기 내의 또 다른 주제는 집단 간의 연대 의식이다. 팔랑크스에서 자신의 개별적인 ''아레테''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함께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최전선에 머물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스파르타인은 자신의 집단과 하나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34]

마지막으로, 티르타이오스는 자신의 시에 누구의 이름도 포함하지 않는 스타일 선택을 한다. 이것은 전사가 국가의 복지에 기여하는 데 있어 이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조한다.[34] 이는 티르타이오스가 그의 시에서 군사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여 스파르타 전사들이 용감하고 전투에서의 죽음이나 승리에서 영광을 얻을 것을 알면서 국가를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살도록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줄 수 있다.[35]

참조

[1] 논문 The Dates of the Messenian Wars 1991
[2] 서적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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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ix.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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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2.43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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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3.5 1999
[9] 웹사이트 iv.610.5 (Adler) https://www.loebclas[...] 1999
[10] 논문 Tyrtaios 1899
[11] 서적 1997
[12] 서적 Politics 5.6.1306b36 1999
[13] 서적 Solon and Early Greek Poetry: the politics of exhort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14] 인용 1999
[15] 인용 1999
[16] 논문 The Hoplite Phalanx 1947
[17] 논문 The Lycurgean Reform at Sparta 1950
[18] 서적 Solon and Early Greek Poetry: The Politics of Exhort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19] 웹사이트 14.630f https://www.loebclas[...] 1999
[20] 논문 La 'strategie' di Tirteo 1967-68
[21] 서적 1997
[22] 웹사이트 4.15.6 https://www.loebclas[...] 1982
[23] 웹사이트 17 (p. 28 Kemke) https://www.loebclas[...] 1999
[24] 웹사이트 4.107 https://www.loebclas[...] 1999
[25] 서적 Et.Mag. p. 57, Scholiast on Ar. Birds 217 1985
[26] 서적 Res Metrica 49 1982
[27] 인용
[28] 인용
[29] 서적 Lyric and Elegiac Poetry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30] 서적 Solon and Early Greek Poetry: The Politics of Exhortation. 2005
[31] 서적 2005
[32] 서적 Fragment 11.27–34 1999
[33] 인용
[34] 논문 Tyrtaeus, 9 D.: The Role of Poetry in the New Sparta https://www.jstor.or[...] 1983
[35] 논문 Tyrtaeus and the Art of Propaganda https://www.jstor.or[...]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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