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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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에로스는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자이자 다마스쿠스를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안티오코스 8세 그리푸스와 이집트 공주 트리파이나의 아들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분열과 왕위 계승 분쟁 속에서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통치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테오스', '필로파토르', '소테르' 등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유대아를 침략했으나 실패하고 파르티아에 포로로 잡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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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으로, 제2차 시리아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테오스' 칭호를 얻었으나, 결혼과 왕위 계승 분쟁으로 제3차 시리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2. 배경, 가계 및 초기 생애

데메트리오스 3세는 기원전 2세기 후반, 왕위 계승 분쟁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간섭으로 혼란에 빠진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안티오코스 8세이며, 어머니는 이집트 공주 트리파이나로 추정된다. 안티오코스 8세와 트리파이나 사이에는 셀레우코스 6세, 쌍둥이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 데메트리오스 3세, 그리고 안티오코스 12세 등 다섯 아들이 있었다.
데메트리오스 3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와 그의 이복 형제 안티오코스 9세 사이의 길고 격렬한 내전 속에서 지나갔다. 이 내전은 기원전 113년에 시작되어 15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트리파이나는 기원전 109년에 안티오코스 9세에게 살해당했다.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는 기원전 96년에 암살되었다.
데메트리오스 3세의 출생 순서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형 셀레우코스 6세가 장남이고, 데메트리오스 3세는 쌍둥이 형제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보다 어린 넷째 아들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그가 장남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소아시아의 크니도스 시에서 지냈다고 한다.
2. 1. 셀레우코스 제국의 분열과 왕위 계승 분쟁
시리아를 기반으로 한 셀레우코스 제국은 기원전 2세기에 왕조 내부의 다툼과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간섭으로 인해 붕괴되기 시작했다. 오랜 내전으로 왕족 출신의 여러 인물들이 왕위를 놓고 다투면서 국가는 분열 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혼란은 기원전 123년경 안티오코스 8세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면서 약 10년간 소강상태를 보였다.
이 시기, 이집트와 시리아는 왕조 간의 결혼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이집트가 특정 왕위 계승 후보를 지지하며 시리아의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기원전 124년, 이집트 공주 트리파이나는 안티오코스 8세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다섯 아들이 태어났는데, 셀레우코스 6세, 쌍둥이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 데메트리오스 3세, 그리고 안티오코스 12세였다.
기원전 113년, 안티오코스 8세의 이복형제인 안티오코스 9세가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고, 두 형제는 15년 동안 끊임없이 싸웠다. 이 과정에서 안티오코스 9세는 기원전 109년에 트리파이나를 살해했다. 안티오코스 8세는 기원전 96년에 암살당했다. 이 날짜는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안티오코스 8세가 기원전 125년에 왕위를 차지하여 29년 동안 통치했다고 쓴 진술과, 셀레우코스 시대(SE) 216년(기원전 97/96년)을 안티오코스 8세의 죽음으로 언급한 3세기의 역사가 포르피리오스의 진술에 의해 뒷받침된다.
안티오코스 8세가 사망한 후, 안티오코스 9세는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이에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인 셀레우코스 6세는 킬리키아에 자리를 잡고 삼촌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현대 문헌에서는 셀레우코스 6세가 장남으로 여겨지며, 데메트리오스 3세는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보다 어리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3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 자신이 장남이었을 수도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는 왕위를 차지하기 전에 크니도스 시에 살았다.
2. 2. 초기 생애와 크니도스 망명
데메트리오스 3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고대 자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현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공주이자 안티오코스 8세의 아내인 트리파이나로 추정한다. 트리파이나는 데메트리오스 3세의 형제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의 어머니로 언급된다. 안티오코스 8세와 트리파이나 사이에는 셀레우코스 6세, 쌍둥이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 데메트리오스 3세, 그리고 안티오코스 12세까지 총 다섯 아들이 있었다.
데메트리오스 3세가 태어나고 자란 시기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극심한 내분과 혼란을 겪던 때였다.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는 기원전 113년부터 이복 형제인 안티오코스 9세와 왕위를 놓고 15년간 끊임없는 내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트리파이나는 기원전 109년에 안티오코스 9세에게 살해당했다.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 역시 기원전 96년에 암살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안티오코스 9세가 수도 안티오크를 점령했고, 데메트리오스 3세의 형인 셀레우코스 6세는 킬리키아에서 세력을 모아 삼촌에게 맞설 준비를 했다. 일반적으로 셀레우코스 6세가 장남으로 여겨지며, 데메트리오스 3세는 쌍둥이 형제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보다 어린 넷째 아들로 간주된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3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그가 실제 장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소아시아의 크니도스라는 도시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이는 당시 셀레우코스 왕족들이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서 안전을 도모하거나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종종 망명을 선택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3. 통치
안티오코스 9세 사후 발생한 권력 공백을 틈타, 데메트리오스 3세는 기원전 96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시기는 셀레우코스 제국 내부의 극심한 혼란과 지속적인 내전이 특징이었다. 북부 시리아에서는 그의 사촌 및 형제들 간의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기원전 95년 셀레우코스 6세가 안티오키아를 차지했으나 곧 안티오코스 10세에게 밀려났고, 이후 셀레우코스 6세의 형제들(안티오코스 11세, 필리포스 1세)과 안티오코스 10세 간의 싸움이 이어졌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주로 다마스쿠스를 기반으로 활동했지만, 기원전 93년에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형제 필리포스 1세를 지원하며 안티오코스 10세와의 전쟁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잠시 다마스쿠스의 통제권을 잃었다가 되찾은 것으로 추정된다. 데메트리오스 3세의 통치, 특히 안티오키아 점령 시기와 기간 등에 대해서는 요세푸스 기록 해석과 주화 증거 분석을 바탕으로 한 여러 학설이 존재하며, 정확한 연대기 재구성은 여전히 논의 중이다.
3. 1. 왕위 계승과 다마스쿠스 점령
안티오코스 9세 키지케노스는 그의 형제가 죽은 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지 않았는데, 그는 아마도 셀레우코스 6세의 위협에 집중하느라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데메트리오스 3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쉽게 만들었고, 그는 기원전 96년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데메트리오스의 이름으로 주조된 가장 초기의 동전은 셀레우코스력 216년(기원전 97/96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제작되었다. 셀레우코스력 216년(기원전 97/96년)에는 다마스쿠스 주화의 앞면 주형틀이 하나만 알려져 있는데, 이는 데메트리오스의 통치가 그 해 늦게 시작되었고, 더 많은 주형틀을 생산할 시간이 거의 없었음을 나타낸다. 데메트리오스 3세의 경력을 다루는 고대 문헌은 요세푸스와 페셰르 나훔, 즉 나훔서에 대한 종파적 해설뿐이다. 역사가 케이 엘링(Kay Ehling)은 요세푸스의 기록이 요약본이며 데메트리오스 3세의 권력 장악과 관련된 실제 사건의 과정은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주화 증거를 해석하는 것은 데메트리오스 3세의 통치의 문제적인 연대기적 재구성에 매우 중요하다.

데메트리우스 3세는 안티오코스 9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을 그의 형제들에게 맡기는 데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북부의 혼란을 틈타 다마스쿠스에서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정당성을 얻은 그는 안티오코스 8세의 모습을 본떠 과장된 매부리코를 가진 동전에 등장했다. 데메트리아스의 튀케의 초상이 새겨진, 데메트리아스라는 도시의 동전은 데메트리우스 3세가 다마스쿠스를 재건하고 왕조명 데메트리아스를 부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역사가 Alfred Bellinger는 데메트리아스 동전에 새겨진 왕의 초상이 데메트리우스 3세라는 점이나 그가 도시를 재건했다는 점을 부인했다. 다마스쿠스 동전은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로 언급하며, 데메트리우스 3세가 도시에게 부여했을 특권이었고, 그는 또한 자신의 수도에 아수일럼의 권한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셀레우코스 왕들은 주로 동전에 그리스 신들을 묘사했지만, 데메트리우스 3세는 셀레우코스 왕국이 더 이상 이질적인 왕국을 통치하지 않음에 따라 지역 숭배가 더 중요해진 축소된 왕국을 통치했다. 지역 숭배는 셀레우코스 왕들이 비(非)그리스인 신하들의 지지를 얻으려 함에 따라 왕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다마스쿠스에서 발행된 그의 왕실 은화에는 최고 고대 셈족 여신 아타르가티스가 뒷면에 등장했으며, 도시 동전은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의 초상을 계속 사용했다. 신성의 상징인 복사관은 데메트리우스 3세가 일부 동전에 사용했는데, 이는 그가 아타르가티스와 의례적으로 결혼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최고 여신과의 결혼은 왕이 자신을 시리아의 최고 신이자 아타르가티스의 파트너인 하닷의 현현으로 간주했음을 나타냈다. 이 관행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기원전 164년 사망)가 처음 시작했으며, 그는 복사관을 사용한 최초의 왕이었고, 아타르가티스의 가장 중요한 성역인 히에라폴리스-밤비케를 선택하여 시리아에서 아타르가티스의 현현인 디아나와 의례적으로 결혼했다.
셀레우코스 왕에게 전형적인 것처럼, 데메트리우스 3세는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시리아에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고 했다. 가다라는 기원전 100년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기원전 93년 이전에 나바테아인의 손에 유대 왕이 패배한 후 도시가 독립하여 다시 셀레우코스 왕에게 돌아갔다. 가다라는 남부 작전을 위한 주요 군사 거점으로 데메트리우스 3세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제하는 것은 유대인과의 전쟁 노력에 매우 중요했다.
기원전 95년에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9세를 격파하고 살해한 후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는데,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 에우세베스는 아라두스로 도망쳐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했다. 기원전 94년에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10세에게 수도에서 쫓겨났고, 전자는 킬리키아 도시인 몹수에스티아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지역 반란 중에 사망했다.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는 셀레우코스 6세를 위해 복수했고, 안티오코스 11세는 기원전 93년에 안티오코스 10세를 수도에서 몰아냈다. 안티오코스 10세는 그해에 도시를 되찾고 안티오코스 11세를 죽일 수 있었다. 기원전 93년 봄, 데메트리오스 3세는 그의 형제 필리포스 1세를 지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안티오코스 11세의 마지막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더 일찍 북쪽으로 진군했을 수도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와 필리포스 1세는 안티오코스 10세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는데, 요세푸스의 표현은 안티오코스 10세가 사촌들에 맞서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기보다는 방어적인 입장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220 셀레우코스력(기원전 93/92년)에, 다마스쿠스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를 위한 동전이 생산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그 도시의 지배권을 잃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유대인이나 나바테아인이 데메트리오스 3세가 그의 형제를 돕기 위해 떠난 틈을 타 도시를 점령했을 가능성이 있다. 왕은 221 셀레우코스력(기원전 92/91년)에 다마스쿠스를 되찾았다. 안티오코스 10세의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적인 학설은 증거 없이 기원전 92년을 제시하고, 데메트리오스가 안티오키아를 장악하여 기원전 87년 몰락할 때까지 5년 동안 통치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연대는 정당화하기 어려운데, 연간 다이 사용 평균율을 추정하는 방법론(Esty 공식)을 사용하여 후버는 안티오코스 10세의 통치의 종말을 224 셀레우코스력(기원전 89/88년)으로 제안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 동전에 사용한 다이는 1개에서 3개로 추정되는데, 이는 안티오키아에서 5년 동안 통치할 정도로 충분한 숫자가 아니다. 문헌 자료는 기원전 92년을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날짜로 명시하지 않으며, 그의 안티오키아 동전 중 어느 것에도 날짜가 적혀 있지 않다.
3. 2. 왕명과 칭호
데메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Demetriosgrc)는 그리스 이름으로, 풍요의 여신인 데메테르에게 속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주로 셀레우코스나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에서 왕족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 이름을 사용한 것은 안티고노스 왕조의 후계자임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보인다.헬레니즘 시대의 왕들은 현대처럼 재위 번호를 사용하지 않고, 이름이 같은 다른 군주들과 구별하기 위해 별칭(epithet)을 사용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별칭은 테오스(Theos, 신성한), 필로파토르(Philopator,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 소테르(Soter, 구원자)였다. 이 세 별칭은 그가 다마스쿠스와 안티오키아에서 발행한 모든 동전에 함께 나타난다. '테오스'는 '테오스'라는 별칭을 사용했던 할아버지 데메트리오스 2세의 계승자임을, '소테르'는 증조부 데메트리오스 1세의 별칭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로파토르'는 사망한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에 대한 헌신을 나타냈다.
킬리키아에서 발행된 동전에는 필로메토르(Philometor,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와 에우에르게테스(Euergetes, 은인)라는 두 별칭이 함께 사용되었다. '필로메토르'는 어머니 트리파에나를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왕실 혈통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의 동전에는 이 두 별칭에 더해 칼리니쿠스(Kallinikos, 고귀한 승리자)라는 별칭까지 총 세 개의 별칭이 사용되었다.
한편, 현대 역사가들이 데메트리오스 3세를 지칭할 때 흔히 사용하는 '에우카에로스'(Eucaerus)는 요세푸스의 저작인 《유대 전쟁》과 《유대 고대사》에 기록된 별칭을 잘못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 저작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필사본에는 '아카이로스'(Akairos)라는 별칭이 세 차례 등장한다. '에우카에로스'는 후대의 필사본과 라틴어 번역본에서 나타나는데, 아마도 '아카이로스'가 실수라고 생각한 필사자가 수정한 결과일 수 있다. '에우카에로스'는 "시기적절한"으로 번역되는 반면, '아카이로스'는 "부적절한" 또는 "때를 놓친"으로 번역된다. 요세푸스는 '아카이로스'라는 별칭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이러한 별칭들은 동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오직 고대 문헌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에우카에로스나 아카이로스 모두 데메트리오스 3세의 동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이 별칭에 대한 유일한 출처이다. 역사가 데이비드 레벤슨과 토마스 마틴은 데메트리오스 3세를 지칭할 때 '에우카에로스' 대신 원전에 가까운 '아카이로스'나 그의 공식적인 별칭 중 하나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3. 계승 방식
안티오코스 9세가 그의 형제 안티오코스 8세가 사망한 후, 셀레우코스 6세와의 대립에 집중하느라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지 못하면서 데메트리오스 3세에게 기회가 생겼다. 그는 기원전 96년(셀레우코스력 216년)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며 왕위에 올랐다. 이 해에 다마스쿠스에서 발행된 그의 초기 동전 주형(앞면 다이)이 단 하나만 발견된 점은 그의 통치가 그 해 말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데메트리오스 3세의 행적에 대한 주요 고대 기록은 요세푸스와 나훔 해설(페셰르 나훔)에 남아있다. 그러나 역사가 케이 엘링(Kay Ehling)은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건의 요약본에 불과하여, 데메트리오스 3세가 권력을 잡게 된 실제 과정은 주화 증거 등을 통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그의 형제들이 안티오코스 9세의 후계자들과 북부에서 항쟁하는 동안, 다마스쿠스에서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데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버지(안티오코스 9세 키지케노스)로부터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으며, 동전에는 안티오코스 8세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매부리코를 새겨넣었다. 튀케 여신이 새겨진 '데메트리아스'라는 도시 명칭의 동전은 그가 다마스쿠스를 재건하고 자신의 왕조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다마스쿠스 동전에는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로 칭하는 문구가 나타나는데, 이는 데메트리오스 3세가 부여한 특권으로 보이며, 성역권(asylum)을 부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전통적으로 그리스 신들을 동전에 주로 묘사했지만, 왕국의 영토가 축소되면서 데메트리오스 3세는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지역 신앙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의 다마스쿠스 발행 은화 뒷면에는 고대 셈족의 최고 여신인 아타르가티스가 등장한다. 또한 일부 동전에는 신성을 상징하는 복사관(radiate crown)을 쓴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는 그가 아타르가티스와의 신성한 결혼을 통해 자신을 여신의 배우자인 하닷 신의 현신으로 나타내려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복사관 사용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시작한 관행이다.
요세푸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튀로스가 데메트리오스 3세를 다마스쿠스의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고고학자 후버(Hoover)는 요세푸스가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초기 지원(기원전 97/96년)과, 데메트리오스 3세가 잠시 다마스쿠스를 잃었다가 되찾은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92/91년(셀레우코스력 221년)의 두 번째 지원을 혼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셀레우코스력 220년(기원전 93/92년)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의 동전이 발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북쪽의 형제 필리포스 1세를 돕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도시의 통제권을 잠시 상실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셀레우코스력 221년(기원전 92/91년)에 다마스쿠스를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3. 4. 정책
데메트리오스 3세는 북부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형제들과 안티오코스 9세 및 그 후계자들과의 분쟁에는 직접 개입하기보다, 이를 다마스쿠스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로부터 통치의 정당성을 찾으려 했으며, 이는 자신이 발행한 동전에 아버지의 특징적인 외모, 특히 과장된 매부리코를 새겨 넣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다마스쿠스에서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메트리아스'라는 이름의 도시 동전에는 튀케 여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데메트리오스 3세가 다마스쿠스를 재건하고 자신의 왕조 이름을 따 '데메트리아스'라고 명명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다마스쿠스에서 발행된 동전에는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로 칭하는 문구가 나타나는데, 이는 데메트리오스 3세가 부여한 특권일 수 있으며, 그가 수도 다마스쿠스에 성역권(아수일럼)을 부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들은 전통적으로 동전에 그리스 신들을 주로 묘사했지만, 데메트리오스 3세 시대에는 왕국의 영토가 축소되면서 다양한 지역 문화와 종교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에 데메트리오스 3세는 왕실의 후원을 통해 지역 토착 신앙을 장려함으로써 비(非)그리스계 신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발행한 은화 뒷면에는 당시 시리아 지역에서 널리 숭배되던 최고 셈족 여신인 아타르가티스가 등장했다. 다만, 도시 자체에서 발행한 동전에는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의 도상이 계속 사용되었다.
일부 동전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는 신성함의 상징인 복사관(radiate crown)을 쓰고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아타르가티스 여신과 의례적인 신성 결혼(hieros gamos)을 치렀음을 암시할 수 있다. 최고 여신과의 결합은 왕 자신이 시리아의 최고 신이자 아타르가티스의 배우자인 하닷 신의 지상 현현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상징과 의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이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복사관을 처음 사용하고, 아타르가티스의 주요 성소인 히에라폴리스-밤비케에서 여신과 신성 결혼 의식을 거행한 것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3. 5. 안티오코스 10세와의 투쟁
기원전 95년,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9세를 격파하고 살해한 후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다.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는 아라두스로 도망쳐 스스로 왕을 선언했다. 기원전 94년,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10세에게 수도에서 쫓겨났고, 킬리키아의 도시 몹수에스티아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지역 반란 중에 사망했다.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는 셀레우코스 6세를 위해 복수전에 나섰다. 기원전 93년, 안티오코스 11세는 안티오코스 10세를 수도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10세는 같은 해 도시를 되찾고 안티오코스 11세를 살해했다. 기원전 93년 봄, 데메트리오스 3세는 그의 형제 필리포스 1세를 지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코스 11세의 마지막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더 일찍 북쪽으로 진군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와 필리포스 1세는 안티오코스 10세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안티오코스 10세가 사촌들에 맞서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기보다는 방어적인 입장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셀레우코스력 220년(기원전 93/92년)에 다마스쿠스에서는 데메트리오스 3세를 위한 동전이 생산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도시의 지배권을 잃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유대인이나 나바테아인이 데메트리오스 3세가 형제를 돕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시를 점령했을 수 있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셀레우코스력 221년(기원전 92/91년)에 다마스쿠스를 되찾았다.
안티오코스 10세의 사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적으로는 증거 없이 기원전 92년으로 추정하며,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를 장악하여 기원전 87년 몰락할 때까지 5년간 통치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연대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역사가 후버(Hoover)는 연간 동전 다이 사용 평균율을 추정하는 방법론(Esty 공식)을 사용하여 안티오코스 10세 통치의 종결 시점을 셀레우코스력 224년(기원전 89/88년)으로 제안했다.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 동전에 사용한 다이는 1개에서 3개로 추정되는데, 이는 안티오키아에서 5년간 통치하기에는 부족한 숫자이다. 문헌 자료 역시 기원전 92년을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날짜로 명시하지 않으며, 그의 안티오키아 동전에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3. 6. 유대 원정
다른 셀레우코스 왕들처럼, 데메트리오스 3세 역시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고자 했으며, 시리아 남부로 영향력을 확장하려 시도했다. 특히 유대 지역과의 관계에서 가다라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가다라는 남부 군사 작전을 위한 핵심 기지였으며, 이곳을 통제하는 것은 유대 하스몬 왕조와의 잠재적 충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가다라는 기원전 100년경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에게 정복되었으나, 기원전 93년 이전에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가 나바테아인에게 패배한 후 독립하여 다시 셀레우코스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는 나바테아 왕 오보다스 1세에게 패배한 이후 약 6년간 지속된 내전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내전은 데메트리오스 3세가 기원전 87년 몰락하기 직전에 그의 개입으로 종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대 지역의 불안정한 상황은 데메트리오스 3세에게 남부로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제공했을 수 있다.
데메트리오스 3세의 생애와 활동, 특히 유대 지역과의 관계에 대한 정보는 주로 요세푸스의 저술과 쿰란 문서 중 하나인 나훔 해설을 통해 알려져 있다.
3. 7. 권력 절정과 패배
데메트리오스 3세는 형제인 필리포스 1세와 안티오코스 11세가 안티오코스 9세의 후계자들과 북부 시리아에서 싸우는 동안, 다마스쿠스에서의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의 모습을 모방하여 과장된 매부리코를 가진 주화를 발행하며 정통성을 강조했다. '데메트리아스'라는 도시 이름과 튀케 여신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는 데메트리오스 3세가 다마스쿠스를 재건하고 자신의 왕조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마스쿠스 주화에는 도시가 "성스러운" 곳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데메트리오스 3세가 도시에 부여한 특권일 수 있으며, 수도에 아수일럼(성역)의 권한을 부여했을 수도 있다.
셀레우코스 왕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신들을 주화에 묘사했지만, 데메트리오스 3세는 축소된 왕국을 통치하면서 지역 신앙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비(非)그리스 신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지역 신앙을 후원했다. 그의 다마스쿠스 발행 은화 뒷면에는 최고 셈족 여신인 아타르가티스가 등장했으며, 도시 주화는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의 초상을 계속 사용했다. 일부 주화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는 신성을 상징하는 복사관을 쓰고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아타르가티스와 의례적으로 결혼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최고 여신과의 결혼은 왕이 자신을 시리아의 최고 신이자 아타르가티스의 배우자인 하닷의 현신으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행은 복사관을 처음 사용하고 히에라폴리스-밤비케에서 디아나(아타르가티스의 현신)와 의례적으로 결혼했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64년 사망)가 시작한 것이다.
다른 셀레우코스 왕들처럼 데메트리오스 3세 역시 영토 확장을 목표로 삼아 시리아 내에서 세력을 넓히려 했다. 가다라는 기원전 100년경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에게 정복되었으나, 기원전 93년 이전에 나바테아인들이 유대 왕을 물리친 후 독립하여 다시 셀레우코스 왕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다. 가다라는 데메트리오스 3세에게 남부 지역 작전을 위한 주요 군사 거점으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으며, 유대와의 전쟁 수행에 필수적이었다.
한편 북부에서는 기원전 95년 셀레우코스 6세가 안티오코스 9세를 물리치고 안티오키아를 점령했으나, 곧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에게 쫓겨나 킬리키아의 몹수에스티아에서 사망했다. 셀레우코스 6세의 동생들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는 복수를 위해 나섰고, 안티오코스 11세는 기원전 93년에 잠시 안티오키아를 점령했지만 곧 안티오코스 10세에게 패배하여 사망했다. 기원전 93년 봄, 데메트리오스 3세는 형제 필리포스 1세를 돕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안티오코스 11세의 마지막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더 일찍 북진했을 가능성도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 3세와 필리포스 1세는 안티오코스 10세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나, 안티오코스 10세는 주로 방어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셀레우코스력 220년(기원전 93/92년)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의 주화가 발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잠시 도시의 통제권을 잃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유대인이나 나바테아인이 데메트리오스 3세가 북쪽으로 떠난 틈을 타 도시를 점령했을 수 있다. 데메트리오스 3세는 셀레우코스력 221년(기원전 92/91년)에 다마스쿠스를 되찾았다.
안티오코스 10세의 사망 시기는 불분명하다.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92년으로 추정하며,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여 기원전 87년 몰락할 때까지 5년간 통치했다고 보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 주화 발행량을 분석하는 방법(Esty 공식)을 사용한 연구에서는 안티오코스 10세의 통치가 셀레우코스력 224년(기원전 89/88년)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에서 사용한 주화 다이(die)는 1개에서 3개로 추정되는데, 이는 5년 통치 기간 동안 발행하기에는 적은 숫자이다. 문헌 자료 역시 데메트리오스 3세가 기원전 92년에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고 명시하지 않으며, 그의 안티오키아 주화에는 발행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권력의 절정에 도달한 정확한 시기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4. 여파
(내용 없음 -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여파' 섹션에 해당하는 데메트리오스 3세의 사망 이후 사건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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