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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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리스 양식은 기원전 6~5세기에 사용된 건축 양식으로, 그리스 건축의 세 가지 주요 양식 중 가장 오래되었다. 굵고 엔타시스가 강한 기둥과 단순한 사각형 주두가 특징이며, 주좌는 없다. 삼각판과 메토프로 구성된 엔타블레이처를 가지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파르테논 신전과 헤파이스토스 신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르네상스 이후 신고전주의 건축과 그리스 부흥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대 건축에서도 공공 건물 등에 활용되며, 링컨 기념관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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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양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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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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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양식 | 고대 그리스 건축 |
기원 | 기원전 7세기 |
특징 | 단순하고 웅장한 형태 기둥머리의 장식이 없음 엔타시스 강조 |
상세 특징 | |
기둥 | 주초가 없음 홈이 파여 있음 (보통 20개) 엔타시스 (배흘림) 현상 |
기둥머리 | 장식 없음 (간결한 형태) |
엔타블러처 | 아키트레이브 (Architrave): 단순한 띠 모양 프리즈 (Frieze): 트리글리프와 메토프 번갈아 배치 코니스 (Cornice): 돌출된 형태 |
어원 | |
명칭 유래 | 고대 그리스의 도리스인 |
대표 건축물 | |
그리스 | 파르테논 신전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콘코르디아 신전 |
관련 용어 | |
다른 양식 |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 |
참고 문헌 | |
참고 문헌 | Vitruvius, De architectura, 4.1 Vitruvius.be 藤森昭信, フジモリ式建築入門, 筑摩書房, 2011, p.80 戸谷英世・竹山清明, 建築物・様式ビジュアルハンドブック, 株式会社エクスナレッジ, 2009, p.152 コトバンク |
2. 역사
도리스 양식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세 가지 주요 양식 중 하나로, 단순함과 웅장함이 특징이다.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 본토와 대 그리스(현재 이탈리아 남부)에서 발전했다.
도리스 양식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초기 도리스 양식의 예로는 기원전 7세기에 지어진 아테네의 아폴로 신전과 네메아의 제우스 신전 등이 있다. 파에스툼에 있는 세 개의 신전도 초기 도리스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기둥이 굵고 엔타시스(기둥 중간이 불룩한 형태)가 강하며 주두가 넓게 퍼져 있다.
델로스 섬의 델리안 신전은 기원전 478년에 짓기 시작했지만 완공되지 못했다. 이 신전의 기둥은 받침대 없이 기단 위에 바로 세워졌고, 기둥 상단에는 플루팅 형태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어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고전기 그리스 시대의 대표적인 도리스 양식 건축물로는 헤파이스토스 신전(기원전 447년경)과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특히 파르테논 신전은 조각 장식이 풍부하며, 라피테스와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묘사한 조각이 유명하다.
로마 시대에는 도리스 양식이 변형되어 상부 구조의 높이가 낮아지고, 기둥 위에 삼각판이 중심을 잡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로마 도리스 양식 기둥은 밑면에 몰딩이 있고 받침대 위에 세워지기도 하며, 홈을 파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도리스 양식 기둥의 높이를 밑면 지름의 6~7배로 설명했다.
르네상스 건축에서 도리스 양식을 가장 먼저 사용한 예는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의 ''템피에토''(1502년 이후)이다. 18세기 후반 신고전주의 건축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도리아식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스 부흥 건축은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리스 도리아식은 단순함과 고귀함을 상징하는 양식으로 여겨졌다. 독일에서는 프랑스와의 차별성을, 미국에서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세관, 교회, 도서관, 은행 등 다양한 건물에 도리스 양식이 적용되었다.
2. 1. 기원과 초기 발전
그리스 원형 도리스 기둥은 신전의 평평한 포장(''스타일로바테'') 위에 받침대 없이 직접 세워졌다. 기둥의 높이는 지름의 4~8배로, 모든 고전 양식 중 가장 뭉툭했다. 수직 기둥에는 20개의 평행하고 오목한 홈(플루트)이 파여 있었고, 각 홈은 모서리라는 날카로운 가장자리까지 올라갔다. 기둥 꼭대기에는 매끄러운 주두가 있었고, 이는 사각형 주판으로 퍼져 나가 수평 보 (아치트레이브)와 만났다.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 양식 기둥으로 설계되었다. 이 양식은 그리스 본토의 고졸기(기원전 750–480년)에 가장 인기가 있었으며, 대 그리스(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파에스툼의 세 신전이 그 예이다. 이들은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듯이, 후기 고전 양식과 비교하여 주두가 기둥에서 넓게 퍼져 있는 고졸기 도리스 양식에 속한다.
그리스와 로마 버전 도리스 양식의 두드러진 특징은 번갈아 나타나는 삼각판과 메토프이다. 삼각판은 두 개의 수직 홈("tri-glyph")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엔타블러처 하단을 차지하는 단순한 아치트레이브 위에 놓이는 원래 나무로 된 끝 보를 나타낸다. 각 삼각판 아래에는 기둥과 보(트라베이트) 구조를 안정시키기 위해 아래에서 망치로 두드린 것처럼 보이는 못 모양의 "스태건" 또는 "구타"(문자 그대로: 물방울)가 있다. 이는 위에서 떨어진 빗물을 "조직화"하는 역할도 했다.[6] 삼각판 사이의 공간은 "메토프"인데, 평평하게 남겨두거나 얕은 부조로 조각할 수 있었다.[6]

신전에서 도리스 양식의 기원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있다. 도리스라는 용어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도리아 부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7] 한 가지 믿음은 도리스 양식이 이전 신전의 초기 목재 원형의 결과라는 것이다.[8] 또 다른 믿음은 도리스 양식이 고대 이집트의 건축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9] 마지막으로, 또 다른 이론은 도리스 양식의 영감이 미케네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 문명의 유적에는 도리스 양식과 매우 유사한 건축물이 있으며, 그리스에 위치해 접근성이 매우 좋았다.
도리스 양식의 가장 초창기 예시는 기원전 7세기에 나타난다. 이러한 예시에는 아테네의 아폴로 신전과 네메아의 제우스 신전이 있다.[10] 도리스 양식의 다른 예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파에스툼에 있는 기원전 6세기 신전 세 곳이 있는데, 이곳은 그리스 식민지인들이 정착한 마그나 그라에키아 지역이었다. 후기 버전과 비교하여 기둥은 훨씬 더 거대하며, 강한 엔타시스 또는 부풀림과 더 넓은 주두를 가지고 있다.
델로스 섬에 세워진 "주주식" 도리스 양식 신전인 델리안 신전은 세 개의 아폴로 신전 중 가장 큰 것이다. 기원전 478년에 시작되었지만 결코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기둥의 플루팅이 없는 매끄러운 기둥은 기단(스타일로베이트) 위에 직접 서 있으며, 받침대는 없다. 기둥 상단의 플루팅 형태의 움푹 들어간 "네킹"과 넓은 쿠션 모양의 에키누스는 델로스가 아폴로의 고대 탄생지라는 점을 고려하여 약간 의식적인 고풍스러운 특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스 도리스 양식의 전형적인 사례는 기원전 447년경에 지어진 아테네의 헤파이스토스 신전이다. 고전 아테네에서 가장 큰 신전인 동시대의 파르테논 신전 역시 도리스 양식으로, 조각적인 장식은 이오니아 양식에서 더 익숙하다. 여기에는 유명한 라피테스와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포함한 조각품이 있다.

2. 2. 고전기 그리스
도리스 기둥은 신전의 평평한 포장(''스타일로바테'') 위에 받침대 없이 직접 세워졌다. 지름의 4~8배에 불과한 높이로, 모든 고전 양식 중에서 가장 뭉툭했으며, 수직 기둥은 20개의 평행한 오목한 플루트로 홈이 파여 있었고, 각각 모서리라고 불리는 날카로운 가장자리까지 올라갔다. 기둥 꼭대기에는 기둥에서 수평 보 (아치트레이브)와 만나는 사각형 주판으로 퍼지는 매끄러운 주두가 있었다.[6]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 양식 기둥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그리스 본토에서 고졸기(기원전 750–480년)에 가장 인기가 있었으며, 대 그리스(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파에스툼의 세 개의 신전이 그 예이다. 이들은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듯이, 후기 고전 양식과 비교하여 주두가 기둥에서 넓게 퍼져 있는 고졸기 도리스 양식에 속한다.[6]
그리스 도리스 양식의 전형적인 사례는 기원전 447년경에 지어진 아테네의 헤파이스토스 신전이다. 고전 아테네에서 가장 큰 신전인 동시대의 파르테논 신전 역시 도리스 양식으로, 조각적인 장식은 이오니아 양식에서 더 익숙하다. 그리스인들은 르네상스 이론가나 신고전주의 건축가만큼 고전 어휘 사용에 독단적이지 않았다.[6] 18세기 후반부터 훈련된 건축가의 기본 어휘의 일부인 이 디테일은 메토프의 너비가 얼마나 유연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유명한 라피테스와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포함한 조각품이 있다.
2. 3. 로마 시대
로마 도리아식에서는 상부 구조의 높이가 줄어들었다. 가장자리의 삼각문양은 아치트레이브의 모서리를 차지하는 대신 기둥 위에 중심을 둔다. 기둥의 비율은 약간 덜 튼튼하다. 캡 아래에는 아스트라갈 몰딩이 기둥을 링처럼 둘러싼다. 크라운 몰딩은 프리즈와 코니스 사이의 전환을 부드럽게 하고, 자본의 윗부분인 주두의 위쪽 가장자리를 강조한다.로마 도리아식 기둥은 또한 밑면에 몰딩이 있으며, 낮은 사각형 패드 위에 서 있거나 받침대 위에 세워지기도 한다. 로마 도리아 양식에서는 기둥에 보통 홈을 파지 않는다. 로마인들은 삼각문양이 모서리를 덮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둥과 삼각문양 모두 다시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되고 함께 중심을 맞출 수 있었다. 아치트레이브 모서리는 "비어 있는" 상태로 남겨져야 했으며, 이는 때때로 절반 또는 ''데미'' 메토프라고 불린다.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 십서에서 모듈을 기반으로 한 구조 배치의 절차를 설명했으며, 그는 이를 기둥 밑면 지름의 절반으로 간주했다.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도리아식은 비트루비우스 모듈에서 볼 수 있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도리아식 기둥의 높이는 밑면 지름의 6~7배이다.[11] 이것은 도리아식 기둥을 8:1의 비율을 가진 이오니아식 기둥보다 짧고 두꺼운 모양으로 만든다.
18세기 후반 신고전주의 건축이 등장할 때까지, 고전 건축을 부활시킨 후기 시대는 로마 도리아식을 사용했다. 르네상스 건축에서 도리아식을 가장 영향력 있고 초기에 사용한 예시는 도나토 브라만테가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안뜰에 지은 원형 ''템피에토''(1502년 이후)였다.[12]
18세기 잉글랜드에서 그리스 부흥 건축이 처음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그리스 또는 정교한 로마 도리아식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토스카나" 양식의 주두는 비공식적인 건물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 이는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했는데,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한 로열 호스피털 첼시(1682년 이후)가 그 예이다. 그리스 도리아식의 첫 번째 판화 삽화는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에서는 프랑스와의 대조를 암시했고, 미국에서는 공화주의적 미덕을 나타냈다. 세관에서 그리스 도리아식은 청렴성을, 개신교 교회에서 그리스 도리아식 현관은 오염되지 않은 초기 교회로의 회귀를 약속했다. 도서관, 은행 또는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시설에도 똑같이 적합했다. 부활한 도리아식은 1789년까지 시칠리아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프랑스 건축가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구하면서 팔레르모 식물원의 입구를 설계했다.
2. 4. 르네상스 이후
그리스 부흥 건축이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처음 성장하기 전까지, 그리스 또는 정교한 로마 도리아식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토스카나" 양식 주두는 비공식적인 건물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으며,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한 로열 호스피털 첼시(1682년 이후)와 같이 군사적 맥락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리스 도리아식의 첫 번째 판화 삽화는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운 단계의 고전주의에서 나타난 것은 고상한 원시적 단순함, 목적의 진지함, 고귀한 절제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독일에서는 프랑스와의 대조를 암시했고, 미국에서는 공화주의적 미덕을 나타냈다. 세관에서 그리스 도리아식은 청렴성을, 개신교 교회에서 그리스 도리아식 현관은 오염되지 않은 초기 교회로의 회귀를 약속했다. 도서관, 은행 또는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시설에도 똑같이 적합했다. 부활한 도리아식은 1789년 프랑스 건축가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구하면서 팔레르모 식물원의 입구를 설계한 시칠리아로 돌아갔다.

3. 특징
도리스 양식은 세 가지 주요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도리스, 이오니아, 코린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사용되었다.[40] 굵고 엔타시스가 강한 기둥, 단순한 사각형 주두(기둥머리)가 특징이며, 주좌(기둥 받침)는 없다.[40] 주두에 鉢形(발형) 장식이나 주초가 없어 "장중"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41]
도리스 양식은 나무로 만들어진 건축 양식을 돌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삼각장은 목조 건축에서 들보의 나무 단면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후대의 고대 로마나 고전주의 건축에서도 도리스 양식이 사용되었다.[38]
3. 1. 기둥

도리스 양식의 그리스 오리지널 버전에서 도리스 기둥은 신전의 평평한 포장(''스타일로바테'') 위에 받침대 없이 직접 세워졌다. 지름의 4~8배에 불과한 높이로, 기둥은 모든 고전 양식 중에서 가장 뭉툭했으며, 수직 기둥은 20개의 평행한 오목한 플루트로 홈이 파여 있었고, 각각 모서리라고 불리는 날카로운 가장자리까지 올라갔다.[6] 기둥 꼭대기에는 기둥에서 수평 보 (아치트레이브)와 만나는 사각형 주판으로 퍼지는 매끄러운 주두가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 양식 기둥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그리스 본토에서 고졸기(기원전 750–480년)에 가장 인기가 있었으며, 대 그리스(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파에스툼의 세 개의 신전이 그 예이다. 이들은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듯이, 후기 고전 양식과 비교하여 주두가 기둥에서 넓게 퍼져 있는 고졸기 도리스 양식에 속한다.
로마 도리아식에서는 상부 구조의 높이가 줄어들었다. 가장자리의 삼각문양은 아치트레이브의 모서리를 차지하는 대신 기둥 위에 중심을 둔다. 기둥의 비율은 약간 덜 튼튼하다. 캡 아래에는 아스트라갈 몰딩이 기둥을 링처럼 둘러싼다. 크라운 몰딩은 프리즈와 코니스 사이의 전환을 부드럽게 하고, 자본의 윗부분인 주두의 위쪽 가장자리를 강조한다.
로마 도리아식 기둥은 또한 밑면에 몰딩이 있으며, 낮은 사각형 패드 위에 서 있거나 받침대 위에 세워지기도 한다. 로마 도리아 양식에서는 기둥에 보통 홈을 파지 않는다. 실제로 홈을 파는 경우는 드물다. 로마인들은 삼각문양이 모서리를 덮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기둥과 삼각문양 모두 다시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되고 함께 중심을 맞출 수 있었다. 아치트레이브 모서리는 "비어 있는" 상태로 남겨져야 했으며, 이는 때때로 절반 또는 ''데미'' 메토프라고 불린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도리아식 기둥의 높이는 밑면 지름의 6~7배이다.[11] 이것은 도리아식 기둥을 8:1의 비율을 가진 이오니아식 기둥보다 짧고 두꺼운 모양으로 만든다. 이러한 비율은 도리아식 기둥에 남성적인 외관을 부여하는 반면, 더 날씬한 이오니아식 기둥은 더 여성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감각은 특정 구조에 어떤 유형의 기둥을 사용할지 결정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고전 건축을 부활시킨 후기 시대는 18세기 후반에 신고전주의 건축이 등장할 때까지 로마 도리아식을 사용했다. 이는 그리스 도리아식 건물의 최초의 훌륭한 삽화와 측정된 설명에 따른 것이었다.
기둥은 굵고 엔타시스가 강하며, 단순한 사각형의 주두가 있지만, 주좌는 없다.[40] 주두에 鉢形(발형) 장식이나 주초를 갖지 않아 종종 "장중"하다고 표현된다.[41]
3. 2. 엔타블레이처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 양식 기둥으로 설계되었다. 고졸기 (기원전 750–480년)에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으며, 대 그리스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파에스툼의 세 신전이 그 예이다. 이들은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듯이, 후기 고전 양식과 비교하여 주두가 기둥에서 넓게 퍼져 있는 고졸기 도리스 양식에 속한다.그리스와 로마 버전 모두의 도리스 양식의 두드러진 특징은 번갈아 나타나는 삼각판과 메토프이다. 삼각판은 두 개의 수직 홈("tri-glyph")으로 장식적으로 홈이 파여 있으며, 엔타블러처 하단을 차지하는 단순한 아치트레이브 위에 놓이는 원래 나무로 된 끝 보를 나타낸다. 각 삼각판 아래에는 기둥과 보 (트라베이트) 구조를 안정시키기 위해 아래에서 망치로 두드린 것처럼 보이는 못 모양의 "스태건" 또는 "구타"(문자 그대로: 물방울)가 있다.[6] 또한 위에서 떨어진 빗물을 "조직화"하는 역할도 했다. 삼각판 사이의 공간은 "메토프"인데, 평평하게 남겨두거나 얕은 부조로 조각할 수 있다.[6]
로마 도리아식에서는 상부 구조의 높이가 줄어들었다. 가장자리의 삼각문양은 아치트레이브의 모서리를 차지하는 대신 기둥 위에 중심을 둔다. 기둥의 비율은 약간 덜 튼튼하다. 크라운 몰딩은 프리즈와 코니스 사이의 전환을 부드럽게 하고, 주두의 위쪽 가장자리를 강조한다.
3. 3. 도리스 양식의 모서리 문제
그리스와 로마 버전의 도리스 양식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번갈아 나타나는 삼각판과 메토프이다. 삼각판은 두 개의 수직 홈("tri-glyph")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원래 나무로 된 끝 보를 나타낸다. 각 삼각판 아래에는 못 모양의 "구타"(문자 그대로: 물방울)가 있어 빗물을 "조직화"하는 역할을 했다. 삼각판 사이의 공간은 "메토프"라고 불리며, 평평하게 남겨두거나 얕은 부조로 조각할 수 있었다.[6]삼각판의 간격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야기했다. 삼각판은 모든 기둥 위에 중심을 맞춰야 하고, 기둥 사이에도 다른 삼각판이 있어야 했지만, 그리스인들은 모서리 삼각판이 상부 구조의 모서리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기둥과 조화롭지 않은 불일치를 만들었다.
건축은 조화의 규칙을 따랐다. 원래 디자인은 나무 사원에서 유래되었고 삼각판은 나무 들보의 실제 머리였기 때문에 모든 기둥은 기둥 중앙에 놓이는 들보를 지탱해야 했다. 삼각판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었고, 마지막 삼각판은 마지막 기둥 위에 중심을 두었다(''위 그림 '''I.'''''). 이것이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간주되었다.
나무 들보 대신 돌 입방체로 변경하면서 마지막 기둥에서 아치트레이브 하중을 완전히 지지해야 했다. 첫 번째 사원에서 마지막 삼각판이 이동되었고(''위 그림 '''II.'''''), 여전히 시퀀스를 종료했지만 규칙적인 순서를 방해하는 간격을 남겼다.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삼각판은 해당 기둥과 중심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러한 "고풍스러운" 방식은 조화로운 디자인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그 결과 문제는 '''도리스 양식 모서리 갈등'''이라고 불린다. 더 넓은 모서리 삼각판 ('''''III.''''')을 적용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메토프는 비율 면에서 어느 정도 유연하기 때문에 기둥 사이의 모듈식 공간("간주")은 건축가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 종종 마지막 두 기둥은 모서리에 미묘한 시각적 강성을 부여하기 위해 약간 더 가깝게 배치되었고(''모서리 수축''), 이것은 모서리 갈등의 "고전적인" 해결책 ('''''IV.''''')이라고 불린다. 삼각판은 다시 조화로운 방식으로 배열될 수 있었고, 모서리는 삼각판으로 끝났지만 마지막 삼각판과 기둥은 종종 중심에 있지 않았다. 로마 미학은 삼각판이 모서리를 형성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고, 반쪽(''데미''-) 메토프로 채워 삼각판이 기둥 위에 중심을 두게 했다(''위 그림 '''V.''''').
4. 대표적 건축물
도리스 양식은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 중 하나로, 단순하고 웅장한 기둥이 특징이다. 이러한 도리스 양식은 여러 나라의 다양한 건축물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대표적인 건축물들은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
- 초기
- 코르푸의 아르테미스 신전: 가장 초기의 석조 도리스식 신전이다.
-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 델포이, 아폴론 신전
- 이탈리아 파에스툼의 세 신전
- 신전 계곡, 아그리젠토, 유노 신전(아그리젠토) 등
- 아파이아 신전
- 고전
-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 헤파이스토스 신전
- 바세, 아폴론 신전
- 파르테논, 아테네
- 수니온, 포세이돈 신전
르네상스 및 바로크
-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의 안뜰에 있는 도나토 브라만테의 ''템피에토''
- 카를 5세 궁전, 그라나다, 1527년, 상층의 이오니아식 아래 안뜰의 원형 아케이드
- 바실리카 팔라디아나, 비첸차, 안드레아 팔라디오, 1546년 이후, 상층의 이오니아식 아래 아케이드
- 바야돌리드 대성당, 후안 데 에레라, 1589년 시작
신고전주의 및 그리스 부흥
-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1788년
- 그레인지 (노팅턴), 1804년
- 로르드 힐 기둥, 슈루즈베리 (잉글랜드), 1814년, 약 40.54m 높이
- 노이에 바헤, 베를린, 1816년
- 에든버러 로열 고등학교, 1829년 완공
- 발할라, 레겐스부르크, 바이에른, 1842년
- 프로필레아, 뮌헨, 1854년
미국
- 미국 제2 은행, 필라델피아, 1824년
- 포츠머스 해군 의료 센터, 1827년, 10개의 기둥이 있는 박공 신전 정면
- 페리의 승리 및 국제 평화 기념비, 오하이오주 풋-인-베이, 약 107.29m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도리스식 기둥이다.
- 오하이오주 매리언의 하딩 묘는 도리스식 기둥이 있는 원형 그리스 신전 디자인이다.
4. 1. 해외
로마 도리아식에서는 상부 구조의 높이가 줄어들었다. 가장자리의 삼각문양은 아치트레이브의 모서리를 차지하는 대신 기둥 위에 중심을 둔다. 기둥의 비율은 약간 덜 튼튼하다. 캡 아래에는 아스트라갈 몰딩이 기둥을 링처럼 둘러싼다. 크라운 몰딩은 프리즈와 코니스 사이의 전환을 부드럽게 하고, 자본의 윗부분인 주두의 위쪽 가장자리를 강조한다.
로마 도리아식 기둥은 또한 밑면에 몰딩이 있으며, 낮은 사각형 패드 위에 서 있거나 받침대 위에 세워지기도 한다. 로마 도리아 양식에서는 기둥에 보통 홈을 파지 않는다. 실제로 홈을 파는 경우는 드물다. 로마인들은 삼각문양이 모서리를 덮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둥과 삼각문양 모두 다시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되고 함께 중심을 맞출 수 있었다. 아치트레이브 모서리는 "비어 있는" 상태로 남겨져야 했으며, 이는 때때로 절반 또는 ''데미'' 메토프라고 불린다.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동시대 관행에 따라 건축 십서에서 모듈을 기반으로 한 구조 배치의 절차를 설명했으며, 그는 이를 기둥 밑면 지름의 절반으로 간주했다.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도리아식은 아이작 웨어가 모듈을 식별하여 배치한 모습의 그림은 ''팔라디오 건축의 네 권의 책''(런던, 1738)에 있으며, 비트루비우스 모듈에서 볼 수 있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도리아식 기둥의 높이는 밑면 지름의 6~7배이다.[11] 이것은 도리아식 기둥을 8:1의 비율을 가진 이오니아 양식 기둥보다 짧고 두꺼운 모양으로 만든다. 이러한 비율은 도리아식 기둥에 남성적인 외관을 부여하는 반면, 더 날씬한 이오니아식 기둥은 더 여성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감각은 특정 구조에 어떤 유형의 기둥을 사용할지 결정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고전 건축을 부활시킨 후기 시대는 18세기 후반에 신고전주의 건축이 등장할 때까지 로마 도리아식을 사용했다. 이는 그리스 도리아식 건물의 최초의 훌륭한 삽화와 측정된 설명에 따른 것이었다. 르네상스 건축에서 도리아식의 가장 영향력 있고 아마도 가장 초기의 사용은 도나토 브라만테가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안뜰에 지은 원형 ''템피에토''(1502년 이후)였다.[12]
그리스 부흥 건축이 처음으로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성장하기 전까지, 그리스 또는 정교한 로마 도리아식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토스카나" 양식의 주두는 비공식적인 건물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 이는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로열 호스피털 첼시(1682년 이후, 크리스토퍼 렌 설계)가 있다. 그리스 도리아식의 첫 번째 판화 삽화는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운 단계의 고전주의에서 나타난 것은 고상한 원시적 단순함, 목적의 진지함, 고귀한 절제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독일에서는 프랑스와의 대조를 암시했고, 미국에서는 공화주의적 미덕을 나타냈다. 세관에서 그리스 도리아식은 청렴성을, 개신교 교회에서 그리스 도리아식 현관은 오염되지 않은 초기 교회로의 회귀를 약속했다. 도서관, 은행 또는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시설에도 똑같이 적합했다. 부활한 도리아식은 1789년까지 시칠리아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프랑스 건축가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구하면서 팔레르모 식물원의 입구를 설계했다.
; 고대 그리스, 초기
- 코르푸의 아르테미스 신전, 가장 초기의 석조 도리스식 신전
-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 델포이, 아폴론 신전
- 이탈리아 파에스툼의 세 신전
- 신전 계곡, 아그리젠토, 유노 신전(아그리젠토) 등
- 아파이아 신전
; 고대 그리스, 고전
; 르네상스 및 바로크
-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의 안뜰에 있는 도나토 브라만테의 ''템피에토''
- 카를 5세 궁전, 그라나다, 1527년, 상층의 이오니아식 아래 안뜰의 원형 아케이드
- 바실리카 팔라디아나, 비첸차, 안드레아 팔라디오, 1546년 이후, 상층의 이오니아식 아래 아케이드
- 바야돌리드 대성당, 후안 데 에레라, 1589년 시작
; 신고전주의 및 그리스 부흥
-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1788년
- 그레인지 (노팅턴), 1804년
- 로르드 힐 기둥, 슈루즈베리 (잉글랜드), 1814년, 약 40.54m 높이
- 노이에 바헤, 베를린, 1816년
- 에든버러 로열 고등학교, 1829년 완공
- 발할라, 레겐스부르크, 바이에른, 1842년
- 프로필레아, 뮌헨, 1854년
; 미국
- 미국 제2 은행, 필라델피아, 1824년
- 포츠머스 해군 의료 센터, 1827년, 10개의 기둥이 있는 박공 신전 정면
- 페리의 승리 및 국제 평화 기념비, 오하이오주 풋-인-베이, 약 107.29m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도리스식 기둥이다.
- 오하이오주 매리언의 하딩 묘는 도리스식 기둥이 있는 원형 그리스 신전 디자인이다.
; 각국의 도리스 양식 건축물
5. 현대 건축에서의 활용
그리스 부흥 건축이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처음 성장하기 전까지는 그리스식 또는 정교한 로마 도리아식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토스카나" 양식 주두는 비공식적인 건물, 특히 군사적 맥락에서 인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한 로열 호스피털 첼시(1682년 이후)가 있다. 그리스 도리아식의 첫 번째 판화 삽화는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전주의의 새로운 단계에서 나타난 그리스 도리아식은 고상한 원시적 단순함, 목적의 진지함, 고귀한 절제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1]
독일에서는 프랑스와의 대조를 암시했고, 미국에서는 공화주의적 미덕을 나타냈다. 세관에서 그리스 도리아식은 청렴성을, 개신교 교회에서 그리스 도리아식 현관은 오염되지 않은 초기 교회로의 회귀를 약속했다. 도서관, 은행 또는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시설에도 똑같이 적합했다. 부활한 도리아식은 1789년 시칠리아에서 프랑스 건축가들이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구하면서 팔레르모 식물원의 입구를 설계하면서 다시 나타났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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