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인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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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리스인의 침입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졌으며,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돌아와 도리스인과 연합하여 침략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이 전설은 미케네 문명의 붕괴와 연관되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역사에서 주요 전환점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적 연구는 이러한 침입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미케네 문명의 붕괴를 단일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신, 사회적 갈등, 자연 재해, 기후 변화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붕괴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도리스인 침입 개념을 자신들의 이념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하여, 도리스인을 아리아인과 연관시키고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이용했다. 나치당은 이를 더욱 극단적으로 활용하여 고전 그리스를 게르만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스파르타의 군국주의를 이상화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이러한 침입설을 신화로 여기며, 문화적 연속성과 민족 기원 신화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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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스인의 침입 | |
|---|---|
| 개요 | |
| 주제 | 도리스인의 침입 |
| 시기 | 기원전 1200년경 ~ 기원전 800년경 |
| 장소 | 그리스 |
| 관련 민족 | 도리스인, 미케네인 |
| 영향 | 그리스 암흑 시대의 시작, 미케네 문명의 종말, 도리스 방언의 확산 |
| 이론 | |
| 주요 주장 | 도리스인이 그리스로 침입하여 미케네 문명을 붕괴시켰다는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설명 |
| 비판 | 고고학적 증거 부족, 민족 이동 모델의 문제점, 사회 경제적 붕괴 원인에 대한 다른 설명 존재 |
| 역사적 맥락 | |
| 배경 | 미케네 문명의 쇠퇴,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의 전환기 |
| 관련된 사건 | 도시의 파괴, 인구 감소, 문화적 변화 |
| 관련된 장소 | 펠로폰네소스 반도, 크레타, 에게 해 |
| 증거 및 반증 | |
| 고고학적 증거 | 특정 지역에서 문화적 변화와 파괴의 흔적 |
| 언어학적 증거 | 도리스 방언의 확산 |
| 유전학적 증거 |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단일 침입보다는 점진적인 이주 가능성을 시사 |
| 대안적 해석 | |
| 사회 경제적 붕괴 | 기후 변화, 무역망 붕괴, 내부 갈등 등의 요인 |
| 점진적인 이주 | 도리스인의 점진적인 이주와 문화적 혼합 |
| 정치적 불안정 | 미케네 문명의 정치적 불안정과 내부 갈등 |
| 논쟁점 | |
| 민족 이동 모델의 타당성 | 민족 이동이 문화적 변화의 주요 원인인지에 대한 논쟁 |
| 도리스인의 정체성 | 도리스인이 단일 민족 집단이었는지, 아니면 다양한 집단의 연합이었는지에 대한 논쟁 |
| 침입의 규모와 영향 | 침입이 대규모 군사적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소규모 이주와 문화적 확산이었는지에 대한 논쟁 |
2. 전설과 신화
고대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인 헤라클레이다이는 헤라클레스 사후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추방되었다가 여러 세대가 지난 후 조상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이 전설이 묘사하는 신화적 세계는 오늘날의 미케네 문명 시대로 여겨진다. '헤라클레스 일족의 귀환'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고대의 유력 가문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헤라클레스와 같은 신화적 영웅에게서 찾으려 했던 경향을 보여준다. 헤라클레스의 실제 후손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작가마다 다르지만, 중요한 점은 고대의 지배적인 부족들이 자신의 기원을 최종적으로 헤라클레스에 연결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귀환'이라는 번역은 주로 영어 번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래 그리스어 단어 '카티에나이'(katienai|카티에나이el)와 '카테르케스타이'(katerchesthai|카테르케스타이el)는 단순히 집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노스토이' nostoi|노스토이el)와는 다르다. 이 단어들은 문자 그대로 '내려오다', '급습하다', '함락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이는 군사적인 침공의 성격을 강하게 시사한다. 따라서 헤라클레스 일족의 이동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대한 군사적 '침입'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전설 속에서 헤라클레스 일족과 도리스인은 점차 연결된다. 헤라클레스가 도리스인의 왕 아에기미우스를 도왔다는 이야기나, 그의 아들 힐루스가 겪은 시련 등은 헤라클레스 일족과 도리스인이 연합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침공하게 되는 배경을 설명한다.
이러한 헤라클레스 후손 및 도리스인의 침입에 관한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 작품, 특히 스파르타와 관련된 기록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는 각 폴리스의 정체성 확립과 영토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2. 1. 티르타이오스의 시
도리스인의 침입 이야기는 스파르타에서 특히 중요했는데, 이 이야기는 도시의 건국 신화를 형성했다. 기원전 7세기 스파르타 시인 티르타이오스는 스파르타인들을 헤라클레이다이와 함께 도리스의 에리네우스에서 라코니아 땅에 도착한 도리아인으로 묘사했다. 그의 시에 따르면, 제우스와 헤라는 스파르타를 헤라클레이다이에게 주었다고 한다. 두 스파르타 왕가인 아기아스 왕조와 에우리폰티드 왕조는 고전 시대까지 헤라클레스의 후손임을 내세웠다.2. 2. 헤로도토스의 기록
고대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인 헤라클레이다이는 헤라클레스 사후 추방되었다가 여러 세대가 지난 후 조상이 소유했던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이 전설이 배경으로 하는 신화적 그리스 세계는 오늘날의 미케네 그리스 시대로 여겨진다. '헤라클레스 일족의 귀환'이라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신빙성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고, 헤라클레스의 실제 후손에 대한 이야기도 고대 작가마다 다르다. 중요한 점은 고대의 유력한 부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헤라클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려 했다는 사실이다.'귀환'이라는 번역은 주로 영어 번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어 단어 '카티에나이'(katienaiel)와 '카테르케스타이'(katerchesthaiel)는 문자 그대로 '내려오다', '급습하다', '함락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드물게는 '전복되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혹은 육지에서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 홍수처럼 밀려 내려오는 것, 바람이나 배처럼 미끄러져 오는 것, 그리고 망명지에서 (주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것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 이 단어들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그런 의미로는 '노스토이'(nostoiel, 향수병을 뜻하는 노스탤지어의 어원)라는 별도의 단어가 사용된다. 따라서 헤라클레스 일족은 단순히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군사적으로 진격했음을 시사하며, '침입'이라는 해석의 근거가 된다. 헤로도토스는 이러한 다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헤라클레스 일족의 이동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라클레스 일족과 도리스인은 본래 구별되는 집단이었으나, 전설 속에서 점차 연결된다. 헤라클레스는 도리스인의 왕 아에기미우스가 라피테스족과의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 대가로 아에기미우스는 왕국의 3분의 1을 헤라클레스에게 할양하고 그의 맏아들 힐루스를 양자로 삼기로 약속했다.
헤라클레스 사후, 그의 아들들은 미케네의 왕이자 헤라클레스의 숙적인 에우리스테우스에 의해 추방당했다. 이후 에우리스테우스가 아티카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 전사하자, 헤라클레스 일족은 페르세우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반도의 권력은 펠롭스 가문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헤라클레스 일족은 권좌를 되찾으려 했으나 코린토스 지협에서 이오니아인에게 패배했다. 힐루스는 아르카디아의 에케무스와 3세대 동안의 평화 또는 즉각적인 귀환을 걸고 일대일 대결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헤라클레스 일족은 헤라클레스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함을 깨달았다. 전승에 따르면 "이 순간 이후 헤라클레스의 자손들과 도리스인은 긴밀히 연합하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고 한다. 3세대가 지난 후, 헤라클레스 일족과 도리스인은 연합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성공적인 침공을 감행했다고 전해진다.
2. 3.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아폴로도로스의 기록
고대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그의 죽음 이후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추방되었다가 몇 세대 후에 조상의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이 신화 속 배경은 오늘날 미케네 문명 시대로 여겨진다. '헤라클레스 일족의 귀환'이라는 주제 자체는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지만, 고대 그리스의 주요 지배 가문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헤라클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려 했다는 점은 중요하다.'귀환'이라는 번역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리스어 원문인 'katienai'나 'katerchesthai'는 문자 그대로 '내려오다', '급습하다', '함락시키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혹은 바다를 통해 망명지에서 돌아오는 침공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헤라클레스 일족은 단순히 고향을 그리워하여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쳐들어간, 즉 '침략'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헤라클레스 일족과 도리스인은 본래 다른 집단이었으나, 역사학자 조지 그로트에 따르면 이들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헤라클레스는 라피테스족과의 전쟁에서 도리스인의 왕 아에기미우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대가로 아에기미우스는 왕국의 3분의 1을 헤라클레스에게 할양하고 그의 맏아들 힐루스를 양자로 삼았다. 헤라클레스는 페르세우스의 후손이었으므로, 힐루스 역시 페르세우스의 혈통을 이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 사후, 그의 숙적이자 같은 페르세우스의 후손인 에우리스테우스에 의해 힐루스를 비롯한 헤라클레스의 아들들은 미케네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에우리스테우스가 아티카 침공에 실패하여 아들들과 함께 사망하면서, 헤라클레스 일족은 페르세우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펠롭스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헤라클레스 일족은 여전히 추방된 상태였다. 그들은 코린토스 지협에서 이오니아인에게 패배하며 첫 번째 귀환 시도에 실패했다. 힐루스는 아르카디아의 왕 에케무스와 3세대 동안의 평화 혹은 즉각적인 귀환(헤라클레스 일족의 펠로폰네소스반도 귀환)을 두고 일대일 대결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사망했다.
이제 헤라클레스 일족은 헤라클레스의 유산을 주장하려면 신중히 행동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순간 이후 헤라클레스의 자손들과 도라이인은 긴밀히 연합하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3대 후 헤라클레스 일족과 도리스인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차지하려 합작했으니, 그로트는 이후의 일련의 사건들을 "승리의 침공(victorious invasion)"이라 칭한다.
도리아인의 침입 이야기는 특히 스파르타에서 도시의 건국 신화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인 티르타이오스는 스파르타인들을 헤라클레스의 후손(헤라클레이다이)과 함께 도리스의 에리네우스에서 라코니아 땅으로 온 도리아인으로 묘사하며, 제우스와 헤라가 스파르타를 헤라클레이다이에게 주었다고 노래했다. 스파르타의 두 왕가인 아기아스 왕조와 에우리폰티드 왕조는 고전 시대까지 자신들이 헤라클레스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스파르타에서 사용된 침략 이야기 버전은 다양한 신화들을 짜깁기한 것으로 보이며, 고대 그리스인들이 도리아인을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미약한 관련성만 있었다. 역사학자 나이젤 케넬은 이를 "극도로 축약된" 것이라고 칭했으며, 라코니아 자체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기능적으로 도리아인의 침략 이야기는 헤라클레이다이 이야기와 함께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모두에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 기여했다.
메세니아 자체에서도 신화의 한 버전은 도리아인들이 헤라클레이드 크레스폰테스를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크레스폰테스는 헤라클레이드 경쟁 이후 왕국을 할당받았다. 기원전 370년 에파미논다스에 의해 메세니아의 독립이 회복된 후, 이 후자의 버전이 강조되었고, 새로 설립된 메세니아 부족들은 그 지역의 전통적인 도리아 부족 집단의 이름이 아닌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의 이름을 받았다. 니노 루라기는 이것을 메세니아와 스파르타 사이의 인식된 연결고리를 끊는 수단으로 해석하는데, 스파르타는 그의 말에 따르면 "도리아니즘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의 침략 신화를 사용하여, 스파르타의 적 아테네의 동맹국인 포키스의 침략에 맞서 도리스를 대신하여 군대를 파견한 기원전 457년 타나그라 전역을 정당화했다.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스파르타는 공통된 도리아인의 유산을 주장하며 펠로폰네소스 동맹국과의 친족 관계를 주장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시대(서기 117년-138년 통치) 무렵, 스파르타는 본질적인 도리아 도시로서의 위상을 재확립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방언의 "초도리아화"를 포함하여 원시적인 도리아 문화 형태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2세기 CE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의 저술에서, 메세니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에 일어난 제2차 메세니아 전쟁 동안 공동 도리아인의 조상을 근거로 스파르타인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은 역사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2. 4. 핀다로스의 시
기원전 5세기 초 테베의 시인 핀다로스 역시 도리스인의 침입 사건을 언급하였다.3. 도리스인의 침입 가설
고대 그리스의 전설에 따르면,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인 헤라클레이다이는 조상의 땅인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이 '헤라클레스 일족의 귀환'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미케네 문명의 쇠퇴 이후 도리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비롯한 그리스 남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하게 된 역사적 사건, 즉 '도리스인의 침입'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가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 가설에서 '귀환'이라는 용어는 단순한 고향 방문을 넘어, 군사적 정복이나 대규모 이주를 함축하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헤라클레이다이와 도리아인을 연결하는 이 신화는 특히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계 폴리스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영토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비록 헤라클레이다이의 귀환과 도리스인의 이동이 원래는 별개의 전승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헤로도토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두 이야기가 결합되어 도리스인의 침입을 설명하는 주요 서사로 자리 잡았다.
3. 1. 도리스인의 기원과 이동
고대 그리스인들은 도리아인들이 영웅 시대(청동기 시대 후기) 말, 트로이 전쟁 직후에 헤라클레스의 후손들(헤라클레이다이)에 의해 중앙 그리스에서 펠로폰네소스로 이주했다고 믿었다. 이 이야기는 도리아인의 기원과 이동을 설명하는 핵심 신화로 받아들여졌다. 이 신화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기원전 7세기 스파르타 시인 티르타이오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헤라클레이다이의 귀환 신화'''
전설에 따르면, 영웅 헤라클레스가 죽은 뒤 그의 후손들은 추방되어 망명 생활을 했다. 여러 세대가 지난 후, 그들은 조상 헤라클레스가 가졌던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돌아오고자 했다. 이 신화 속 배경은 오늘날의 미케네 문명 시대로 여겨진다.
'헤라클레이다이의 귀환'이라는 표현에서 '귀환'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어 원문 katienai|카티에나이grc나 katerchesthai|카테르케스타이grc는 글자 그대로 '내습하다', '급습하다', '함락시키다'와 같은 강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의 nostoi|노스토이grc와는 구별된다. 즉,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평화롭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침공했음을 시사한다. 헤로도토스는 이 사건을 kathodos|카토도스grc라는 용어로 표현했는데, 이는 '강하' 또는 '추방에서의 귀환'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 자신은 도리스인이 아니었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는 도리스의 왕 아에기미우스를 도와 라피테스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었다. 그 대가로 아에기미우스는 왕국의 3분의 1을 헤라클레스에게 할애하고 그의 맏아들 힐루스를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헤라클레스 사후, 힐루스를 비롯한 헤라클레스의 자손들은 헤라클레스의 숙적이었던 에우리스테우스에게 쫓겨났다. 이후 에우리스테우스가 아티카 침공 중 사망하자,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페르세우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는 이미 펠롭스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권좌를 되찾으려 했으나 코린토스 지협에서 이오니아인에게 패배했다. 힐루스는 아르카디아의 왕 에케무스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하여 사망했고,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3세대 동안 펠로폰네소스로 돌아가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후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도리스인과 긴밀히 연합하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3세대 후, 헤라클레이다이와 도리스인은 함께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성공적으로 침공했다. 처음에는 도리스인의 이주 이야기와 헤라클레이다이의 귀환은 별개의 전승이었으나, 늦어도 헤로도토스 시대(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는 두 이야기가 결합되었다. 기원전 5세기 말에는 그리스인들이 도리아인의 침략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신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기원전 5세기 초 핀다르, 기원전 1세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그리고 서기 1세기 또는 2세기의 신화 개요집인 Bibliotheca|비블리오테카grc(가짜 아폴로도로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2. 스파르타의 건국 신화
도리아인의 침입 이야기는 스파르타에서 특히 중요했는데, 이 이야기는 도시의 건국 신화를 형성했다. 기원전 7세기 스파르타 시인 티르타이오스는 스파르타인들을 헤라클레이다이와 함께 도리스의 에리네우스에서 라코니아 땅으로 이주해 온 도리아인으로 묘사했다. 그의 시에 따르면, 제우스와 헤라는 스파르타 땅을 헤라클레이다이에게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스파르타의 두 스파르타 왕가인 아기아스 왕조와 에우리폰티드 왕조는 고전 시대까지 자신들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스파르타에서 통용된 침략 신화 버전은 여러 신화를 조합한 것으로 보이며, 고대 그리스인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했던 도리아인의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역사가 나이젤 케넬은 이 스파르타 버전의 신화가 "매우 축약된" 형태이며, 라코니아 지역 자체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이 신화는 헤라클레이다이 이야기와 결합되어 기능적으로,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반도, 특히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지역에 대한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한편, 메세니아 지역에서는 다른 버전의 신화가 전해졌다. 이 버전에 따르면, 도리아인들이 헤라클레이다이 중 한 명인 크레스폰테스를 살해했다고 한다. 크레스폰테스는 헤라클레이다이 간의 경쟁을 통해 메세니아 왕국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370년,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에 의해 메세니아의 독립이 회복되자, 메세니아인들은 크레스폰테스 살해 버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형성된 메세니아 부족들의 이름도 전통적인 도리아 부족 명칭 대신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이름을 따랐다. 역사가 니노 루라기는 이를 '도리아주의의 전형'으로 여겨지던 스파르타와의 연관성을 끊으려는 메세니아의 시도로 해석했다.
스파르타는 이 건국 신화를 정치적으로 적극 활용했다. 기원전 457년 타나그라 전투로 이어지는 군사 작전 당시, 자신들의 적인 아테네의 동맹국인 포키스의 침략에 맞서 도리스 지역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할 때, 도리아인의 침략 신화를 정당화 근거로 사용했다. 또한 기원전 5세기 말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공동의 도리아 혈통을 강조하기도 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시대(서기 117년~138년 재위)에는 스파르타가 스스로를 핵심적인 도리아 도시로 재정립하려 했으며, 방언을 '초도리아화'하는 등 원시적인 도리아 문화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서기 2세기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메세니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 제2차 메세니아 전쟁 중에 공동의 도리아인 조상을 근거로 스파르타인들에게 호소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3. 3.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갈등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의 침입 신화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기원전 457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동맹국인 포키스가 도리스를 침략하자, 도리아인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군대를 파견하는 타나그라 전역을 벌였다. 이는 도리아 신화를 이용해 군사 행동을 정당화한 사례이다.또한,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스파르타는 자신들이 도리아인의 후예임을 내세우며 펠로폰네소스 동맹 국가들과의 유대감을 강조했다. 이는 공동의 '도리아 혈통'을 명분으로 동맹을 결속시키고 아테네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4. 현대 고고학적 관점
현대 고고학 연구는 전통적인 '도리스인의 침입' 가설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며, 이를 미케네 문명 붕괴의 주된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많은 학자들은 이 가설을 더 이상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일종의 "학문적 신기루"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회의론은 여러 고고학적, 언어학적 증거에 기반한다. 1952년 선문자 B 해독을 통해 미케네 그리스 시대에도 이미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지면서, 외부 민족인 도리스인이 갑자기 침입하여 기존 문명을 파괴하고 새로운 언어를 가져왔다는 가설의 설득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과거 도리스인의 침입 증거로 여겨졌던 새로운 물질 문화 요소들(특정 도기 양식, 무기, 장례 방식, 철기 사용 등)은 후속 연구를 통해 그 연대가 미케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침입과는 무관하게 점진적으로 확산되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이러한 문화 요소들이 특정 민족 집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문화-역사 고고학적 시각 자체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대규모 침략과 정착을 뒷받침할 만한 명확하고 일관된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며, 미케네 궁전들의 파괴 시점과 새로운 문화 요소들의 등장 시점 사이에 연대기적 불일치가 나타나는 경우도 지적된다.
이에 따라 현대 학계에서는 미케네 문명의 붕괴를 외부의 단일한 침략 사건보다는, 청동기 시대 말기 붕괴라는 더 광범위한 현상의 일부로 이해한다. 즉, 사회 내부의 갈등, 궁정 중심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붕괴와 같은 내부적 요인과 함께 지진 등 자연재해, 질병, 기후 변화,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같은 외부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인구 이동이 일부 있었을 수 있지만, 이는 대규모 침략이라기보다는 미케네 중심지의 쇠퇴에 따른 인구 재배치나 소규모 이동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시스템 붕괴의 여러 원인 중 하나이거나 그 결과로 해석된다.
결론적으로, '도리스인의 침입'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기보다는, 후대의 폴리스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기원과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민족 기원 신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올리버 디킨슨과 같은 학자들은 이 신화가 실제 일어난 사건과는 거의 관련이 없을 것이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후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필요에 의해 각색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현대 고고학은 미케네 문명 붕괴 이후 그리스 세계의 변화를 다양한 요인이 상호작용한 복잡하고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4. 1. 초기 연구와 비판
19세기 초 고고학 연구는 청동기 시대와 그리스 초기 철기 시대 사이에 상당한 단절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는 새로운 물질 문화의 도입, 특히 청동 바이올린 활 모양의 피불라, 새로운 유형의 나우에 II 검, 화장, 석곽묘(Cist grave)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철기 제작 기술로 특징지어졌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새로운 이주민의 도착과 연관되었고, 이 새로운 이주민들은 도리스인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미케네 그리스의 궁전 유적에서 발견된 파괴층은 이러한 가설적인 침략의 결과로 여겨졌지만, 그러한 파괴는 도리아인의 기원에 대한 고대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았다.[1]1824년, 카를 오트프리트 뮐러는 『도리아인』(Die Dorierde)을 출판했다. 그는 도리아인이 그리스를 침략하여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한 북부의 인도유럽어족(indogermanischde)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리아인을 "젊은 민족"으로 묘사했는데, 그들의 개별적인 특성, 정치 조직 및 언어에서 우수했다고 보았다. 뮐러의 제자인 에른스트 쿠르티우스는 그들을 "북부 산악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비교적 덜 발달하고 문명화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활력 때문에 그리스 해안 주민보다 더 강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도리아인은 근동 지역의 북부 또는 아리아인 침략자에 대한 다른 유사한 가설과 일치하는 아리아인으로 여겨졌다. 헤르만 뮐러는 1844년에 도리아인(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명의 노르드족 기원을 주장했는데, 이 견해는 독일 역사학의 표준이 되었고 20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1870년, 알렉산더 콘체는 최근에 확인된 기하학적 도기 스타일이 도리아 침략자들의 작품이라고 제안했는데, 그는 그들을 북유럽 출신의 게르만 민족으로 간주했다. 이 견해는 19세기 말까지 기하학적 도기에 대한 가장 인기 있는 학문적 해석이 되었지만, 초기 반론에서는 미케네 양식과 기하학적 양식의 연속성을 지적했고, 기하학적 도기는 신화적 전통에서 도리아인의 침략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티카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기하학적 도기는 사실 "농민 스타일"로, 원래 미케네 문화보다 앞섰다는 가설, 북유럽 스타일과 미케네 시대의 스타일이 혼합된 것이라는 가설, 또는 페니키아인에 의해 근동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가설이 개발되었다. 이후 기하학적 스타일은 기원전 9세기까지 사용된 초기 형태인 원기하학 양식 스타일과 구분되었으며, 원기하학 스타일 역시 도리아인에서 유래했다고 주장되었다.
도리아 침략의 패러다임은 독일에서 영국과 프랑스 학문으로 퍼져나갔지만, 그 원리는 프랑스와 독일 외에서는 거의 논쟁되거나 발전되지 않았다. 윌리엄 릿지웨이, 에른스트 그루마흐, 싱클레어 후드와 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은 도리아 침략과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고대 신화가 아리아인 도리아인의 그리스 이주를 반영한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해석은 고대 증언과 초기 미케네인이 스스로 그리스인이었다는 이해와 상충되었다. 프랑스에서 빅토르 뒤뤼는 도리아 침략을 스파르타 국가의 독재적 성격과 연결하여, 스파르타가 인종적으로 동질적이고 억압적인 정부에 더 순응하게 만들었다고 제안했다.

1893년, 카를 율리우스 벨로흐는 그리스의 역사적 전통을 미케네에서 하인리히 슐리만과 파나기오티스 스타마타키스가 발견한 것과 같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과 통합하려 시도했다. 벨로흐는 도리아인이 미케네 그리스의 토착민이었으며 기원전 8세기에 그들과 차별화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침략에 기반한 서술보다 일반적으로 거부되었다. 벨로흐에 반박하며, 에두아르트 마이어는 그 침략을 "초기 그리스 역사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몇 안 되는 사실 중 하나"라고 불렀다. 크리스토스 춘타스와 에른스트 마이어 (역사가), 각각 1893년과 1937년에 미케네 궁전이 기원전 12세기에 멸망한 이유로 이를 제시했다. 19세기 말에, 파울 크레치머는 초기 형태의 그리스어가 북유럽이 아닌 아나톨리아에서 퍼져나갔지만, 이러한 원시 그리스인들이 퍼져나가는 동안 원시 도리아인이 그리스로 이주한 마지막 부족을 포함하여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다고 주장했다.
화장의 광범위한 채택과 같은 문화적 변화 중 일부는 그리스 문화와 중앙 유럽의 Urnfield 문화 사이의 유사성을 만들어 도리아 침략자가 북쪽에서 왔다는 견해를 뒷받침했다. 앨런 웨이스와 모리스 S. 톰슨은 1912년 저서 ''선사 시대 테살리아''에서 북부 기원 설을 옹호했다. 1921년, 스탠리 캐슨은 기하학 도기 발견을 바탕으로 도리아인의 침략 경로를 추적하려 시도했으며,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디필론 문의 정착지 모두 도리아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니컬러스 해먼드도 1934년에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과 달리 도리아인이 핀두스 산맥의 알바니아를 통해 그리스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1940년대, 1950년대 동안 도리아인의 침략 패러다임은 부분적으로 청동기 시대 이후 그리스 세계에 대한 당시 이용 가능한 고고학적 및 역사적 증거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지배적이었다. 1939년부터 메세니아의 필로스의 미케네 유적 발굴자였던 칼 블레겐은 그 유적이 도리아인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생각했고, 트로이 7a의 연대를 이 이론과 일치하도록 조정했다. 그는 트로이 전쟁의 배경이라고 믿었다. 그는 당시 고고학적 주제를 포함하여 도리아인의 침략에 대해 Wac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주 논의했다. 이 침략은 이집트와 근동 자료에 언급된, 집합적으로 해양 민족으로 알려진 다른 추정 이주 민족과 연결되었다.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는 1954년에 도리아인의 침략이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했다. 이 견해는 존 마이어스에 의해 "과격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마이어스는 침략에 대한 고고학적, 언어적 증거가 결정적이지 않으며, 그것을 둘러싼 신화적 이야기가 소아시아의 그리스 정착민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1956년, 웨이스는 그 침략이 역사적이었지만, 그리스 문화를 후기 청동기 시대와 고전 시기 사이에 광범위하게 연속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문화적 변화보다는 정치적 변화만 수반했다고 제안했다.
1960년대부터 언어학적 주장이 도리아인의 침략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카디아와 키프로스 섬 사이에서 공유되는 아르카도키프로스 그리스어의 특정 공통 특징은 두 지역이 침략하는 도리아인에 의해 분열된 더 큰 언어 집단의 잔재를 나타내는 증거로 간주되었으며 키프로스로 도망간 난민을 포함했다. 도리아인의 침략이라는 생각은 1960년대 내내 학문적 정설로 남아 있었고, 소련 역사가들에 의해 채택되어 그리스 문화가 원시 공산주의에서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생산 방식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 통합되었다. 영어권 학계에서는 논쟁의 초점이 그리스 고고학 유적에서 도리아인의 물질적 흔적을 찾는 데 집중되었다. 블레겐은 1962년에 "모든 위대한 [미케네] 궁전의 불에 탄 폐허"가 "도리아인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1960년대 동안 도리아인의 침략은 현대 그리스인이 고전 그리스인의 후손이 아니라 슬라브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야코프 필리프 팔머라여의 19세기의 생각과 연결되었다. 팔머라여는 이 인구 교체를 비잔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예를 들어 리스 카펜터와 도널드 니콜, 도리아인의 침략을 유사한 단절점으로 보았다. 미케네와 고전 그리스 사이의 단절에 대한 견해는 그리스 자체에서 거부되었다. 업데이트된 1970년판 ''그리스 민족의 역사''는 이에 반대했고, 그리스 군사 독재 정권이 후원한 1968년 아테네 전시회도 마찬가지였다. 전시회의 한 패널은 도리아인을 "그리스 민족의 건강한 힘"으로 묘사했다. 1980년, 레너드 로버트 팔머는 최근의 비판에 대해 도리아인의 침략 가설을 옹호하며, 고전 시대에 서부 그리스 방언의 분포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를 인용했다. 로버트 드루스는 1988년에 도리아인이 기존의 미케네 국가들이 적응하지 못한 새로운 전쟁 방식을 마스터함으로써 그리스를 정복했다고 썼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쿡은 초기 학문적 인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아인과 기하학 도자기의 연관성이 증거와 결코 편안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다고 썼다. 1903년, 한스 드라겐도르프는 기하학 도자기가 단순히 미케네 양식의 발전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드라겐도르프의 견해는 1917년 베른하르트 슈바이처의 연구를 통해 입증된 후 학계의 공론이 되었다. 1939년, 가에타노 데 산티스,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했던 이탈리아 고전학자는 초기 그리스 역사를 저술하면서 뮐러의 도리아인 침입 관점을 거부하고 도리아인에게 작은 역사적 역할만을 부여했다. 1952년 선문자 B 해독을 통해 그리스어가 청동기 시대부터 펠로폰네소스에서 사용되었음이 밝혀지면서 많은 학자들이 도리아인 침입을 가설로 버렸다.
1960년대부터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주요 문화적 변화, 예를 들어 나우에 II 검, 철기 제작의 발전, 화장 관행 및 기하학 도자기의 발달과 같은 문화적 변화의 연대기적 지평이 미케네 시대로 밀려났다. 또한 이것들이 소위 "도리스"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복 엘리트의 이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조각조각 채택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쿡은 1962년 논문에서 도리아인 침입에 대한 가용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별로 연구할 가치가 없는 주제"라고 칭하며, 침입이 아마도 일어났을 것이지만, 물질적 기록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이에 관한 신화적, 역사적 전통의 대부분의 요소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빈센트 데스버러는 1964년, 석곽묘의 광범위한 채택(기원전 1100년경)과 미케네 궁전의 파괴(기원전 1180년경) 사이의 연대기적 불일치를 입증했다. 더 넓게는 1960년대의 고고학 연구가 문화 변화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으로서의 이주에서 벗어나면서 도리아인 침입 및 관련 가설이 주류 학문에서 쇠퇴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특히 영국에서 여러 학자들이 도리아인이 이미 미케네 시대에 그리스에 존재했다는 벨로흐의 주장을 되살렸다. 존 채드윅은 1965년 에른스트 리쉬가 가정한 미케네 그리스어의 가설적 방언인 특수 미케네어가 도리아 그리스어의 조상 형태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도리아인 침입은 이전에 종속되었던 집단의 반란, 또는 일련의 이주 중 마지막 사건으로 재구성되었다. 데스버러는 도리아인들이 초기 침략에서 물러났고, 따라서 미케네 궁전의 파괴 이후 그들의 정착에 대한 증거가 부족한 것을 설명했으며, 약 50~100년 후 후기 미케네 시대에 돌아왔다고 제안했다. 앤서니 스노드그래스는 대안으로 도리아인 침입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도리아인들이 그들이 대체한 미케네인들과 동일한 물질 문화를 사용했고, 도리아인 정착지의 위치에 대한 전해진 전통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78년, 클라우스 킬리안은 물레로 만들지 않은 도자기 종류에 "도리아 도기"라는 이름을 제안했으며, 이는 현재 수제 광택 도기로 알려져 있으며, 티린스에서의 발굴 조사에서 파괴 후 층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이 도자기가 도리아 침략자들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들에게 유적의 파괴를 귀속시켰다. 그러나 동일한 도자기는 나중에 유적 파괴 이전의 층에서도 발견되었으며, 현재 지역 미케네 제조품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이미 미케네 사회에 존재했을 수 있는 소규모 이민자 집단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폴 카틀리지는 1979년 스파르타에 대한 도리아인의 정착의 역사성을 옹호했지만, 그러한 정착이 기원전 950년경 이전에는 발생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도리아인 침입과 헤라클레이다이에 대한 그리스 신화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더 이상 도리아인에게 물질 문화 혁신이 귀속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도리아인들은 고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1980년대 초까지 도리아인 침입의 현실성은 학계에서 널리 의심받았다. 1978년, 캐롤 G. 토마스는 채드윅의 언어학적 주장이 신화적 전통과 양립할 수 없으며, 도리아인 침입이 철기 시대에 만들어진 post facto|사후la 민족 기원 신화를 의미한다고 썼다. 노엘 로버트슨은 1980년에 침입의 진실성이 널리 의심받았으며, 그것에 대한 유일한 남은 증거는 나중에 혁신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 신화 전통이라고 썼다. 1982년, 애니 슈냅-구르빌리옹은 도리아인 침입을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을 괴롭히는 유령"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이용 가능한 고고학적 증거는 대규모 정착에 이은 침입 이론보다는 "일련의 폭력적이지만 제한적인 습격" 가설을 지지할 수 있다고 썼다. 1990년대까지 도리아인 침입은 이 분야의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신화로 여겨졌지만, 특히 독일어권 학계에서 비르기타 에더, 니콜라스 해먼드 및 시어도어 크레시 스케이트와 같은 지지자들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다.
4. 2. 물질 문화의 변화
19세기 초 고고학 연구는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 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단절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에 새로운 물질 문화 요소들이 등장했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청동으로 만든 바이올린 활 모양의 피불라, 새로운 유형의 나우에 II 검, 화장 풍습, 관형묘,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철기 제작 기술의 도입 등이 있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새로운 이주민 집단의 도착과 연관 지어졌고, 이들을 도리스인으로 보았다. 이후 미케네 그리스의 여러 궁전 유적에서 발견된 파괴의 흔적은 이러한 가상의 침략 때문이라고 여겨졌지만, 정작 고대 기록에서는 도리아인의 기원과 관련하여 그러한 파괴를 언급하지 않았다.[1]알렉산더 콘체(Alexander Conze)는 1870년에 당시 새롭게 확인된 기하학 양식 도기 스타일이 도리아 침략자들의 작품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도리아인을 북유럽 출신의 게르만 민족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견해는 19세기 말까지 기하학적 도기에 대한 가장 지배적인 학문적 해석이었으나, 초기부터 반론도 제기되었다. 반론자들은 미케네 양식과 기하학 양식 사이의 연속성을 지적했으며, 기하학적 도기는 신화적 전통에서 도리아인의 침략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인 아티카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기하학적 도기가 원래 미케네 문화보다 앞선 "농민 스타일"이라거나, 북유럽 스타일과 미케네 스타일이 혼합된 결과라거나, 혹은 페니키아인에 의해 근동에서 유입되었다는 등의 대안적인 가설들이 제시되었다. 이후 기하학적 스타일은 기원전 9세기까지 사용된 초기 형태인 원기하학 양식과 구분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원기하학 스타일 역시 도리아인에게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화장의 광범위한 채택과 같은 다른 문화적 변화들은 그리스 문화와 중부 유럽의 Urnfield 문화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어, 도리아 침략자들이 북쪽에서 왔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앨런 웨이스(Alan Wace)와 모리스 S. 톰슨(Maurice S. Thompson)은 1912년 저서 ''선사 시대 테살리아''에서 북방 기원설을 지지했다. 1921년, 스탠리 캐슨(Stanley Casson)은 기하학 도기의 발견 분포를 바탕으로 도리아인의 침략 경로를 추적하려 시도했으며,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디필론 문 유적 모두 도리아인의 정착지였다고 결론지었다. 니컬러스 해먼드(Nicholas Hammond) 역시 1934년에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과는 달리 도리아인이 핀두스 산맥을 통해 알바니아를 거쳐 그리스로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메세니아의 필로스에 있는 미케네 유적을 발굴한 칼 블레겐(Carl Blegen)은 해당 유적이 도리아인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믿었으며, 1962년에는 "모든 위대한 [미케네] 궁전의 불타버린 폐허"가 바로 "도리아인의 흔적"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도리아인 침입 가설, 특히 물질 문화 변화를 그 증거로 삼는 견해는 점차 도전을 받게 되었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쿡(Robert Cook)은 초기 학계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도리아인과 기하학 도자기를 연결하는 주장이 증거와 잘 부합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 1903년에 한스 드라겐도르프(Hans Dragendorff)는 기하학 도자기가 단순히 미케네 양식이 발전한 형태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견해는 1917년 베른하르트 슈바이처(Bernhard Schweitzer)의 연구를 통해 뒷받침되면서 학계의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952년 선문자 B 문자가 해독되면서, 그리스어가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사용되고 있었음이 밝혀지자 많은 학자들이 도리아인 침입 가설을 재고하거나 폐기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들은 침입설을 더욱 약화시켰다. 과거 도리아인의 특징으로 여겨졌던 주요 문화적 변화들, 예를 들어 나우에 II 검의 사용, 철기 제작 기술의 발전, 화장 풍습, 기하학 도자기의 발달 등이 실제로는 미케네 시대 후기부터 시작되었거나 점진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이러한 변화들은 소위 "도리스인 지역"에서 일률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지역마다 다르게, 조각조각 채택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정복 엘리트의 이주라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빈센트 데스버러(Vincent Desborough)는 1964년에 석곽묘가 널리 채택된 시점(기원전 1100년경)과 미케네 궁전들이 파괴된 시점(기원전 1180년경)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지적하며, 두 사건을 직접 연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밝혔다. 1978년, 클라우스 킬리안(Klaus Kilian)은 티린스 유적의 파괴 이후 지층에서 발견된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만든 특정 도기 유형에 "도리아 도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를 도리아 침략자들과 연결하려 했다. 그러나 동일한 도기가 나중에 파괴 이전 지층에서도 발견되면서, 이 도기는 지역 미케네인들이 만들었거나 혹은 이미 미케네 사회 내에 존재했을 수 있는 소규모 이민자 집단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특정 물질 문화의 변화를 특정 민족 집단의 이동이나 침입과 직접적으로 연결 짓던 기존의 문화-역사 고고학적 접근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폴 카틀리지(Paul Cartledge)는 1979년 스파르타에 대한 도리아인의 정착의 역사성을 옹호했지만, 그러한 정착이 기원전 950년경 이전에는 발생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도리아인 침입과 헤라클레이다이에 대한 그리스 신화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또한 더 이상 도리아인에게 물질 문화 혁신이 귀속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도리아인들은 고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결론적으로, 현대 학계에서는 청동기 시대 말기와 초기 철기 시대 사이에 나타난 물질 문화의 변화(철기 도입, 새로운 도기 양식, 장례 방식 변화 등)를 더 이상 도리아인의 대규모 침입이나 이주의 직접적인 증거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들은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른 시기와 속도로 발생했으며, 일부는 미케네 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거나, 전통적으로 도리아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여겨진 아티카나 에우보이아 같은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도리아인이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침략하거나 그곳으로 대규모로 이주했다는 이론은 현재 "학문적 신기루"로 여겨지며, 당시의 문화 변화는 청동기 시대 말기 붕괴라는 더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사회경제적, 환경적 요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4. 3. 미케네 문명의 붕괴 원인
과거에는 미케네 문명의 붕괴 원인을 주로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설명했다. 이는 고대 전설에서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는 이야기와 연결되었다. 19세기 초 고고학 연구는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 사이에 문화적 단절이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새로운 물질 문화(청동 피불라, 나우에 II형 검, 화장, 관형묘, 철기 제작 기술 등)의 등장과 함께 북쪽에서 온 새로운 이주민, 즉 도리스인의 침입 결과로 해석되었다. 미케네 궁전 유적의 파괴층 역시 이러한 침략의 증거로 여겨졌다.[1]카를 오트프리트 뮐러(Karl Otfried Müller)는 1824년 저서 ''Die Dorier''에서 도리스인이 그리스 북부에서 온 인도유럽어족이며, 이들이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리스인을 우수한 특성을 가진 "젊은 민족"으로 묘사했으며, 그의 제자 에른스트 쿠르티우스(Ernst Curtius)는 이들을 "북부 산악인"으로 칭하며 덜 문명화되었지만 활력이 넘쳐 더 강하다고 보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도리스인을 아리아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고, 헤르만 뮐러는 도리스 문명의 노르드족 기원을 주장하기도 했다. 알렉산더 콘체(Alexander Conze)는 기하학 양식 도기를 도리스 침략자들의 작품으로 보았으나, 미케네 양식과의 연속성, 아티카에서의 기원 등 반론이 제기되었다.
카를 율리우스 벨로흐는 1893년 도리스인이 미케네 시대 그리스의 토착민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에두아르트 마이어 등은 침략설을 강력히 지지했다. 화장과 같은 문화적 변화가 중부 유럽의 Urnfield 문화와의 유사성을 보여 북쪽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듯 보였다. 앨런 웨이스, 스탠리 캐슨, 니컬러스 해먼드 등도 도리스인의 북쪽 기원 및 침략 경로를 추정하며 이 가설을 지지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도리스인 침입설은 고고학 및 역사적 증거 부족 속에서 지배적인 설명으로 자리 잡았다. 칼 블레겐은 필로스 유적의 파괴를 도리스인의 소행으로 보았고, 이는 해양 민족의 이동과도 연관 지어졌다.
그러나 1952년 선문자 B 해독으로 미케네 그리스에서 이미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지면서 도리스인 침입설은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의 고고학적 발견들은 과거 도리스인의 침입 증거로 여겨졌던 문화적 변화(나우에 II 검, 철기 제작, 화장, 기하학 도기 등)가 실제로는 미케네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거나 점진적으로 채택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고, 정복 엘리트의 이주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빈센트 데스버러는 묘지 무덤 채택(기원전 1100년경)과 궁전 파괴(기원전 1180년경) 사이의 시간적 불일치를 지적했다. 또한, 고고학계 전반에서 문화를 설명하는 방식으로서의 이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커지면서 도리스인 침입설은 점차 힘을 잃었다.
존 채드윅 등 일부 학자들은 도리스인이 이미 미케네 시대에 그리스에 존재했으며, 미케네 붕괴는 기존 지배층에 대한 하층민의 반란이나 점진적인 이주의 결과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클라우스 킬리안이 '도리아 도기'(현재 수제 광택 도기)를 침략의 증거로 제시했지만, 이 역시 파괴 이전 지층에서도 발견되어 지역 생산품이거나 소규모 이주민의 영향으로 해석되었다. 폴 카틀리지는 도리스인의 스파르타 정착 자체는 인정했지만, 그 시기가 기원전 950년경 이전일 수 없어 신화와는 맞지 않으며, 물질 문화에서 도리스인을 특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미케네 문명의 붕괴를 더 이상 단일한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청동기 시대 말기 붕괴는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결과로 이해된다. 주요 원인으로는 미케네 궁정 사회 내부의 갈등,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붕괴 등 내부적 요인과 함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질병, 기후 변화, 그리고 새로운 기술(특히 철기)의 등장과 같은 외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본다. 인구 이동이 일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이는 대규모 침략이라기보다는 미케네 중심지의 쇠퇴에 따른 인구 재배치나 소규모 이동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광범위한 시스템 붕괴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과거 도리스인의 침입 증거로 제시되었던 철기, 특정 도기 양식(원기하학 양식, 기하학 양식 도기), 석곽묘, 화장 등의 문화 요소들은 미케네 궁전 파괴 이전에 이미 나타났거나, 침략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여겨졌던 아티카나 에우보이아 같은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현대 고고학은 물질 문화의 변화를 반드시 특정 민족 집단의 이동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도리스인의 침입'이라는 개념은 실제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후대에 여러 펠로폰네소스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민족 기원 신화의 일부로 해석된다. 올리버 디킨슨은 도리스인 침입 신화가 실제 사건과는 거의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후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의해 이야기가 변형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4. 4. 도리스인 침입설의 쇠퇴
미술사학자 로버트 쿡은 초기 학문적 인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아인과 기하학 도자기의 연관성이 증거와 결코 편안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다고 썼다. 1903년, 한스 드라겐도르프는 기하학 도자기가 단순히 미케네 양식의 발전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드라겐도르프의 견해는 1917년 베른하르트 슈바이처의 연구를 통해 입증된 후 학계의 공론이 되었다. 1939년, 가에타노 데 산티스,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했던 이탈리아 고전학자는 초기 그리스 역사를 저술하면서 뮐러의 도리아인 침입 관점을 거부하고 도리아인에게 작은 역사적 역할만을 부여했다. 1952년 선문자 B 해독을 통해 그리스어가 청동기 시대부터 펠로폰네소스에서 사용되었음이 밝혀지면서 많은 학자들이 도리아인 침입을 가설로 버렸다.
1960년대부터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주요 문화적 변화, 예를 들어 나우에 II 검, 철기 제작의 발전, 화장 관행 및 기하학 도자기의 발달과 같은 문화적 변화의 연대기적 지평이 미케네 시대로 밀려났다. 또한 이것들이 소위 "도리스"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복 엘리트의 이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조각조각 채택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쿡은 1962년 논문에서 도리아인 침입에 대한 가용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별로 연구할 가치가 없는 주제"라고 칭하며, 침입이 아마도 일어났을 것이지만, 물질적 기록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이에 관한 신화적, 역사적 전통의 대부분의 요소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빈센트 데스버러는 1964년, 묘지 무덤의 광범위한 채택(기원전 1100년경)과 미케네 궁전의 파괴(기원전 1180년경) 사이의 연대기적 불일치를 입증했다. 더 넓게는 1960년대의 고고학 연구가 문화 변화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으로서의 이주에서 벗어나면서 도리아인 침입 및 관련 가설이 주류 학문에서 쇠퇴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특히 영국에서 여러 학자들이 도리아인이 이미 미케네 시대에 그리스에 존재했다는 벨로흐의 주장을 되살렸다. 존 채드윅은 1965년 에른스트 리쉬가 가정한 미케네 그리스어의 가설적 방언인 특수 미케네어가 도리아 그리스어의 조상 형태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도리아인 침입은 이전에 종속되었던 집단의 반란, 또는 일련의 이주 중 마지막 사건으로 재구성되었다. 데스버러는 도리아인들이 초기 침략에서 물러났고, 따라서 미케네 궁전의 파괴 이후 그들의 정착에 대한 증거가 부족한 것을 설명했으며, 약 50~100년 후 후기 미케네 시대에 돌아왔다고 제안했다. 앤서니 스노드그래스는 대안으로 도리아인 침입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도리아인들이 그들이 대체한 미케네인들과 동일한 물질 문화를 사용했고, 도리아인 정착지의 위치에 대한 전해진 전통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78년, 클라우스 킬리안은 물레로 만들지 않은 도자기 종류에 "도리아 도기"라는 이름을 제안했으며, 이는 현재 수제 광택 도기로 알려져 있으며, 티린스에서의 발굴 조사에서 파괴 후 층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이 도자기가 도리아 침략자들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들에게 유적의 파괴를 귀속시켰다. 그러나 동일한 도자기는 나중에 유적 파괴 이전의 층에서도 발견되었으며, 현재 지역 미케네 제조품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이미 미케네 사회에 존재했을 수 있는 소규모 이민자 집단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폴 카틀리지는 1979년 스파르타에 대한 도리아인의 정착의 역사성을 옹호했지만, 그러한 정착이 기원전 950년경 이전에는 발생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도리아인 침입과 헤라클레이다이에 대한 그리스 신화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더 이상 도리아인에게 물질 문화 혁신이 귀속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도리아인들은 고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1980년대 초까지 도리아인 침입의 현실성은 학계에서 널리 의심받았다. 1978년, 캐롤 G. 토마스는 채드윅의 언어학적 주장이 신화적 전통과 양립할 수 없으며, 도리아인 침입이 철기 시대에 사후에 만들어진 민족 기원 신화를 의미한다고 썼다. 노엘 로버트슨은 1980년에 침입의 진실성이 널리 의심받았으며, 그것에 대한 유일한 남은 증거는 나중에 혁신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 신화 전통이라고 썼다. 1982년, 애니 슈냅-구르빌리옹은 도리아인 침입을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을 괴롭히는 유령"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이용 가능한 고고학적 증거는 대규모 정착에 이은 침입 이론보다는 "일련의 폭력적이지만 제한적인 습격" 가설을 지지할 수 있다고 썼다. 1990년대까지 도리아인 침입은 이 분야의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신화로 여겨졌지만, 특히 독일어권 학계에서 비르기타 에더, 니콜라스 해먼드 및 시어도어 크레시 스케이트와 같은 지지자들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다.
도리아인이 펠로폰네소스를 침략하거나 그곳으로 이주했다는 이론은 현재 "학문적 신기루"로 거부된다. 일반적으로 미케네 궁정 문명의 붕괴는 사회 갈등이나 궁정의 사회 경제 모델의 붕괴와 같은 내생적 요인에 의해 더 잘 설명되며, 자연 재해, 질병, 기후 변화 및 기술 변화와 같은 외부 요인에 의해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 시대 말기의 사건을 단일하고 상호 연결된 붕괴로 설명해야 하는지, 그리고 "붕괴"가 주로 궁정 행정과 관련된 지역, 제도 및 관행에 국한되었는지도 의문시되고 있다. 그리스의 대부분 지역은 미케네 시대에 궁정 국가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인구, 문화 및 전통의 연속성을 보였다.
인구 이동이 청동기 시대 말기에 발생했을 수 있지만, 신화적 전통도 고고학적 증거도 "도리아인"이라는 일관된 인구의 단일 대규모 펠로폰네소스 이주와는 양립할 수 없다.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고 믿어지는 곳에서는 미케네 중심지에서 순 이주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과거 도리아인이 정착했다고 여겨졌던 지역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작은 규모의 이러한 인구 이동은 현재 이 시대의 변화에 대한 단일 원인 설명보다는 광범위하고 다중 원인적인 시스템 붕괴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 말기와 초기 철기 시대 사이에 문화적, 언어적 변화가 발생했지만, 변화의 여러 측면은 단일 대규모 인구 이동에서 예상되는 것처럼 갑작스럽고 동시에 발생하는 대신, 다른 시기와 속도로 발생하여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 도리아인의 침략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믿어졌던 철기, 원기하학 및 기하학 도기, 석곽묘, 화장과 같은 문화적 특징은 현재 궁정 파괴보다 먼저 발생했거나 침략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여겨졌던 아티카와 에우보이아와 같은 그리스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일반적으로, 현대 학문은 문화 형태와 민족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았으며, 이는 물질 문화의 변화가 일반적으로 인구 이동으로 설명되었던 문화-역사 고고학 패러다임의 쇠퇴에 해당한다.
현대 학문은 도리아인의 침략에 대한 고대 서사를 문화 형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수렴된 펠로폰네소스 공동체에 의한 민족 기원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진 합리화 신화로 설명한다. 올리버 디킨슨은 도리아인의 침략 신화가 실제 발생한 일과 "관련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썼으며, 이는 추정된 사건과 생존한 재구성의 구성 사이의 오랜 시간 간격, 그리고 서사에 존재했을 수 있는 모든 역사적 요소에 대한 현대 정치, 이데올로기 및 사회의 왜곡 효과를 인용했다.
5. 현대적 해석
현대 학계에서는 헤라클레스 후손의 귀환과 도리스인의 침입에 대한 고대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여러 공동체, 특히 스파르타와 같은 폴리스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들의 기원과 정체성, 영토 소유권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형성하고 발전시킨 일종의 건국 신화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신화들은 각 지역의 정치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고 활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스파르타는 헤라클레이다이(헤라클레스의 후손)와의 연결성을 강조하며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이 신화를 사용했다. 반면, 메세니아는 스파르타로부터 독립한 후, 스파르타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도리스인보다는 헤라클레스 후손과의 연관성을 부각하는 다른 버전의 신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따라서 고대의 기록들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정체성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실제 역사적 이동이나 사건의 정확한 반영이라기보다는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구성된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이 현대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5. 1. 민족 기원 신화
고대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그의 죽음 이후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떠나 망명 생활을 했다고 한다. 몇 세대가 지난 후, 그들은 조상 헤라클레스가 가졌던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이 전설이 배경으로 하는 신화 속 고대 그리스 세계는 오늘날의 미케네 그리스 시대로 여겨진다. '헤라클레스 일족의 귀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고대의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기원을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에게 연결시키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실제로 헤라클레스의 후손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고대 작가들마다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귀환'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원문의 의미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스어 '카티에나이'(katienai)나 '카테르케스타이'(katerchesthai)는 문자 그대로 '내려오다', '급습하다', '함락하다'와 같은 뜻을 가지며, 때로는 '전복되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거나, 망명지에서 돌아오는 행위를 나타내지만, 단순한 귀향을 의미하는 '노스토이'(nostoi, 노스탤지어의 어원)와는 다르다. 헤라클레스 일족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쳐들어갔음을 암시하며, 이는 '침략'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헤라클레스 일족과 도리스인은 본래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역사가 조지 그로트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도리스인의 왕 아에기미우스가 라피테스인과의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대가로 아에기미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왕국의 3분의 1을 약속하고 그의 맏아들 힐루스를 양자로 삼았다. 헤라클레스와 힐루스는 페르세우스의 후손이었는데, 헤라클레스 사후 힐루스와 다른 아들들은 또 다른 페르세우스의 후손이자 헤라클레스의 숙적이었던 에우리스테우스에 의해 미케네 땅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에우리스테우스가 아티카 침공에 실패하여 아들들과 함께 죽자, 헤라클레스 일족은 페르세우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펠롭스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헤라클레스 일족은 여전히 추방된 상태였다. 그들은 코린토스 지협에서 이오니아인에게 패배하며 복귀에 실패했다. 힐루스는 3대에 걸친 평화와 즉각적인 귀환 권리를 걸고 아르카디아의 왕 에케무스와 일대일 대결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죽었다. 이 사건 이후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도리스인과 긴밀히 연합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3대 후에 힘을 합쳐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성공적으로 침공했다고 그로트는 설명한다.
도리스인의 침입 이야기는 특히 스파르타에서 도시의 건국 신화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시인 티르타이오스는 스파르타인들이 헤라클레스의 후손(헤라클레이다이)들과 함께 도리스의 에리네우스에서 라코니아 땅에 도착한 도리아인이며, 제우스와 헤라가 스파르타를 헤라클레이다이에게 주었다고 노래했다. 스파르타의 두 왕가(아기아스 왕조와 에우리폰티드 왕조)는 고전 시대까지 자신들이 헤라클레스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왕위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이처럼 스파르타에서 사용된 침략 이야기는 다양한 신화를 조합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 도리아인의 역사적 이동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역사가 나이젤 케넬은 이 이야기가 라코니아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이 신화는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반도, 특히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지역에 대한 영토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메세니아 지역에서는 다른 버전의 신화가 전해졌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도리아인들이 헤라클레스의 후손 중 한 명인 크레스폰테스를 죽였다고 한다. 크레스폰테스는 헤라클레스 후손들 사이의 경쟁 끝에 메세니아 왕국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370년,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로부터 메세니아의 독립을 되찾아주었을 때, 이 버전의 신화가 강조되었다. 새로 설립된 메세니아 부족들은 전통적인 도리아 부족 이름 대신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역사가 니노 루라기는 이를 '도리아인의 전형'으로 여겨지던 스파르타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메세니아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해석한다.
이처럼 도리스인의 침입 신화는 정치적 목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457년 타나그라 전투 당시, 포키스의 침략에 맞서 도리스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면서 '같은 도리아인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또한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나이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국가들과의 공통된 도리아 혈통을 강조하며 동맹의 결속을 다지려 했다. 심지어 로마 제국 시대인 하드리아누스 황제 통치기(서기 117년-138년)에도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순수한 도리아 정체성을 재확립하기 위해 방언을 의도적으로 더 고풍스러운 도리아식으로 바꾸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2세기경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는 제2차 메세니아 전쟁(기원전 7세기) 당시 메세니아인들이 공동의 도리아 조상을 근거로 스파르타에 자비를 호소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5. 2. 문화적 연속성
고대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그의 죽음 이후 망명길에 올랐다가 몇 세대 뒤 조상이 소유했던 펠로폰네소스반도의 권리를 주장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이 전설 속 배경은 오늘날의 미케네 문명 시대로 여겨진다. '헤라클레스 일족의 귀환'이라는 이야기는 신화적 성격이 강하며, 헤라클레스의 실제 후손에 대한 기록은 고대 작가마다 다르다. 중요한 점은 고대의 지배적인 부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헤라클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려 했다는 사실이다.'귀환'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단어 'katienai'와 'katerchesthai'를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들은 문자 그대로 '내습(descent)', '급습(come down)', '함락(go down)' 등의 의미를 가지며, 망명지에서 돌아오는 경우(주로 배를 타고)를 뜻하기도 한다. 단순히 집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의 'nostoi'(향수, 노스텔지아의 어원)와는 다르다. 따라서 헤라클레스 일족은 단순히 고향을 그리워하여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물밀듯이 쳐들어갔음을 시사하며, 이는 '침략'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헤라클레스 일족과 도리스인은 본래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역사가 조지 그로트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도리스인의 왕 아이기미오스가 라피테스족과의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대가로 아이기미오스는 왕국의 3분의 1을 헤라클레스에게 할애하고 그의 장남 힐로스를 입양했다. 헤라클레스 사후, 그의 아들들은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박해받아 추방당했다. 이후 에우리스테우스가 아테나이 침공에 실패하여 아들들과 함께 사망하자, 헤라클레스 일족은 페르세우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펠롭스 가문이 권력을 잡자 헤라클레스 일족은 추방되었고, 권좌 복귀를 시도했으나 코린토스 지협에서 이오니아인에게 패배했다. 힐로스는 아르카디아의 에케무스와 3대에 걸친 평화 또는 즉각적인 귀환을 걸고 일대일 대결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헤라클레스의 후손들과 도리스인은 긴밀히 연합하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고, 3세대 뒤에는 함께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승리의 침공(victorious invasion)"을 감행했다고 그로트는 설명한다.
도리스인의 침입 이야기는 특히 스파르타에서 도시의 건국 신화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시인 티르타이오스는 스파르타인들이 헤라클레스의 후손(헤라클레이다이)과 함께 도리스의 에리네우스에서 라코니아 땅에 도착한 도리스인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제우스와 헤라가 스파르타를 헤라클레이다이에게 주었다고 노래했다. 스파르타의 두 왕가인 아기아스 왕조와 에우리폰티드 왕조는 고전 시대까지 자신들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스파르타에서 통용된 침략 이야기는 여러 신화를 조합한 것으로 보이며, 고대 그리스인들이 도리스인을 하나의 민족 집단으로 이해했던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역사가 나이젤 케넬(Nigel Kennell)은 이를 "극도로 축약된" 이야기이며 라코니아 지역 자체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기능적으로 이 신화는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반도, 특히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지역에 대한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 기여했다.
메세니아 지역에서는 다른 버전의 신화가 전해지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도리스인들이 헤라클레이다이 중 한 명이자 메세니아 왕국을 할당받았던 크레스폰테스를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370년, 테바이의 장군 에파미논다스에 의해 메세니아가 스파르타로부터 독립을 되찾은 후, 이 후자의 버전이 강조되었다. 새로 설립된 메세니아 부족들은 전통적인 도리스 부족 이름 대신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이름을 따랐다. 역사가 니노 루라기(Nino Luraghi)는 이를 "도리아니즘의 전형"으로 여겨지던 스파르타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시도로 해석했다.
스파르타는 도리스인의 침입 신화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기원전 457년 타나그라 전투를 위한 원정 당시,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적인 아테나이의 동맹국 포키스의 침략에 맞서 도리스 지역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때 도리스인과의 혈족 관계를 내세웠다. 기원전 5세기 말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공동의 도리스 혈통을 강조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시대(서기 117년–138년)에는 스파르타가 본질적인 도리스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방언을 "초도리아화"하는 등 원시적인 도리스 문화를 복원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2세기경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는 그의 저서에서 메세니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 제2차 메세니아 전쟁 당시 공동의 도리스 조상을 근거로 스파르타에 호소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6. 독일 민족주의와 나치즘에서의 이용
19세기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도리스인의 침입을 독일 민족의 특별한 역사적 경로와 우월성을 주장하는 존더베크 가설과 연결지어 해석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특히 스파르타와의 문화적, 인종적 연결고리를 강조하며 도리스인을 이상화하고 독일 민족을 그 계승자로 여겼다. 이러한 스파르타 숭배는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적 국가 모델과 연결되기도 했다.
20세기 나치즘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해석을 극단적으로 왜곡하여 나치 인종 이론의 정당화에 악용했다. 나치 이론가들은 도리스인을 순수한 아리아인 정복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침입이 그리스 문명을 소위 "열등한 인종"의 영향으로부터 정화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관점은 나치 독일의 군국주의와 히틀러 유겐트를 고대 스파르타의 아고게와 연결하며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나치 시대 독일 학계에서는 도리스인을 "용감한 아리아인 정복자"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러한 왜곡된 역사 해석은 프리츠 샤허마이어와 같은 역사가들을 통해 학계에 영향을 미쳤다. 나치의 이러한 역사 왜곡은 당시 국제 학계에도 일부 영향을 미쳤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즘이 몰락한 뒤에도 영웅적인 침략자로서의 도리스인 이미지는 한동안 그 영향력을 유지했다.
6. 1. 존더베크 가설

계몽주의 이후 18세기와 19세기 독일에서는 도리스인의 침입을 존더베크(Sonderweg) 가설의 일부로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존더베크 가설은 독일 민족이 특별한 역사적 경로를 걸어왔으며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당시 인도유럽어족 연구가 발전하면서 독일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사이의 연관성이 밝혀졌는데, 특히 독일어와 그리스어의 강한 연관성을 근거로 독일 문화가 고대 그리스 문화의 계승자라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도리아인"으로 간주했다. 1794년 이후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도리아 사회로 묘사하며 이러한 관점을 확산시켰다. 슐레겔에게 스파르타는 성공적인 사회 통합과 여성의 권리 및 존엄성 존중을 보여주는 인종적, 문화적 이상향이었다. 이러한 스파르타 숭배는 독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독일의 고전학자 카를 오트프리트 뮐러는 도리아인에 대한 고고학적 이론을 확장하여 명예, 자유, 애국심과 같은 특성을 도리아인과 동일시하며 "도리아적 삶의 방식"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평온함, 조화, 명료함과 연관시킨 신 아폴론이 도리아 기원이라고 주장하며, 정반대의 특성을 지니고 트라키아에서 유래했다고 본 디오니소스와 대조했다. 이러한 생각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영향을 주어, 그는 뮐러의 도리아인에 대한 견해를 독일과 주변국(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적대감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뮐러는 도리아 문화를 계층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군사화된 프로이센 국가의 선구자로 보았다. 이는 프랑스 학자 에두아르 빌(Édouard Will)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 지성계에서 "거의 영구적인 유혹"이 되었다. 뮐러의 사상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연결되었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뮐러, 군국주의, 고대 스파르타가 실제 뮐러의 저작에서보다 훨씬 더 강하게 독일 정치 문화 속에서 결합되었다.
1929년, 나치당의 초기 지지자이자 나치 인종 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한스 F. K. 귄터는 Rassengeschichte des Hellenischen und des Römischen Volkes|헬레네와 로마 민족의 인종사de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인과 로마인 모두 북유럽 인종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귄터는 헤로도토스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같은 고대 작가들이 도리아인의 조상으로 신화적인 히페르보레아인을 언급한 것이, 도리아인이 실제로 먼 북쪽에서 왔다는 기억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어 단어 '이리스'(iris)가 "무지개"와 눈의 홍채를 모두 의미한다는 점 등을 들어, 최초의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갈색 눈이 아닌 파란 눈을 가졌다는 증거라고 내세웠다. 1930년, 나치 인종 이론가이자 이후 전범이 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도리아인을 그리스를 침략한 여러 아리아인 집단 중 하나로 묘사하며, 미케네 시대와 그 이후의 그리스, 그리고 고대 로마가 인종적으로 북유럽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나치 통치 시기(1933년-1945년) 동안 독일 고전학자들은 도리아인을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진 이오니아인들과 대조하며 "용감한 아리아인 정복자"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치당은 도리아인의 침략이 그리스를 "아시아 인종"의 "오염"으로부터 "구원"한 사건이라고 선전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고전 그리스 문화가 본질적으로 게르만적 성격을 가지며, 군국주의와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국가 주도의 소년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나치 독일이야말로 스파르타를 모델로 한 고전 그리스 미덕의 정점이라고 주장했다. 도리아인이 이탈리아도 침략했다는 주장도 나왔는데, 1940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된 한 연구는 북부 이탈리아 선사 시대 유적과 프로이센 및 스칸디나비아 유적 사이에 "부인할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인종 이론을 신봉했던 저명한 나치 역사가 프리츠 샤허마이어의 연구는 도리아인 침략 가설을 독일어권 학계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하는 데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1941년 2월, 아돌프 히틀러 자신도 아리아인이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침략함으로써 역사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고 언급했다.
나치 독일에서 조장된 도리아인에 대한 인종적 관점은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 교육받고 아테네 대학교 교수를 지낸 그리스 인류학자 요안니스 쿠마리스는 역사적 사건과 사회 구조에서 인종이 중요하다는 나치의 견해에는 동의했지만, 도리아인 이주는 다양한 그리스 인종 내에서의 "지역적 이동"이었다고 주장했다. 도리아인 침략에 대한 인종주의적 해석의 기본적인 틀은 나치즘에 반대했던 학자들조차 쉽게 부정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독일 망명 학자 베르너 예거나 프랑스 학자 조르주 뒤메질, 샤를 피카르 등이 그러했다. 피카르는 1935년에 도리아인 침략이 "나쁜 일이 아니었으며, 아시아 정신의 신기루를 넘어 그리스 예술이 발전하도록 해주었다"라고 쓰기도 했다. 뮐러의 '우월하고 문명화된 침략자'로서의 도리아인 관점에 비판이 제기될 때조차, 구스타브 글롯츠와 같은 비평가들은 침략이라는 기본적인 틀 자체에는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대신 도리아인을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세력으로 묘사하는 데 그쳤다. 애니 슈납-고르빌리옹은 글롯츠와 당시 친(親)도리아 학자들 모두 "거짓된 합리성과 도덕적 측면으로 특징지어지는 과거를 처음부터 재창조했다"고 비판했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아리아인"과 같은 용어는 학계에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영웅적인 이주 침략자라는 기본적인 서사 구조는 1960년대까지 주류 역사학과 명백한 우익 및 네오나치 저술 모두에서 계속 유지되었다.
6. 2. 나치 인종 이론
1929년, 나치당의 초기 지지자이자 나치 인종 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한스 귄터는 《헬레네와 로마 민족의 인종사》(Rassengeschichte des Hellenischen und des Römischen Volkesde)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인과 로마인 모두 북유럽 인종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귄터는 헤로도토스나 디오도로스 시쿨루스 같은 고대 작가들이 도리아인의 조상으로 신화적인 히페르보레아인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도리아인이 실제 먼 북쪽에서 왔다는 기억이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어 단어 '이리스'(iris)가 "무지개"와 눈의 홍채를 모두 의미한다는 점 등을 언어학적 증거로 제시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들이 갈색 눈이 아닌 파란 눈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1930년, 나치 인종 이론가이자 나중에 전쟁 범죄자로 판결받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도리아인을 그리스로 침입한 여러 아리아인 중 하나로 묘사했다. 그는 미케네 시대와 그 이후의 그리스, 그리고 고대 로마가 인종적으로 북유럽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나치 통치 시기(1933년-1945년) 동안 독일의 고전학자들은 도리아인을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진 이오니아인들과 대조하며 "용감한 아리아인 정복자"로 보편적으로 묘사했다. 나치당은 도리아인의 침입을 통해 그리스가 "아시아 인종"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고전 그리스 문화가 근본적으로 게르만적 성격을 지니며, 군국주의와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국가 주도의 소년 군사 훈련을 실시한 나치 독일이 스파르타를 모델로 삼아 고전 그리스 미덕의 정점을 구현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도리아인이 이탈리아까지 침략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40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된 한 저술에서는 북부 이탈리아의 선사 시대 유적과 프로이센 및 스칸디나비아 유적 사이에 "부인할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인종 이론의 저명한 나치 역사가이자 추종자였던 프리츠 샤허마이어의 연구는 도리아인 침략 이론을 독일어권 학계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하는 데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1941년 2월, 아돌프 히틀러 자신도 아리아인이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침략함으로써 역사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고 언급했다.
나치 독일에서 조장된 도리아인에 대한 인종적 견해는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 교육받은 인류학자이자 아테네 대학교 교수였던 요안니스 쿠마리스는 역사적 사건과 사회 조직에서 인종이 우선한다는 나치의 견해에는 동의했지만, 도리아인의 이주는 이질적인 그리스 인종 내에서의 "지역적 이동"이었다고 주장하며 나치 이론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흥미롭게도, 도리아인 침략에 대한 인종주의적 해석의 기본적인 틀 자체는 나치 통치와 정치에 반대했던 인물들조차 쉽게 부정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독일 망명자였던 베르너 예거나 프랑스 학자 조르주 뒤메질, 샤를 피카르 등이 그러했다. 피카르는 1935년에 도리아인의 침략이 "나쁜 일이 아니었으며, 아시아 정신의 신기루를 넘어 그리스 예술이 발전하도록 해주었다"라고 쓰기도 했다. 뮐러의 '우월하고 문명화된 침략자로서의 도리아인'이라는 견해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던 구스타브 글롯츠와 같은 학자들조차 침략이라는 기본적인 패러다임 자체에는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도리아인을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세력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뮐러의 견해에 반박했다. 애니 슈납-고르빌리옹은 글롯츠와 당시 친(親)도리아 학자들이 모두 "거짓 합리성과 도덕적 측면으로 특징지어진 과거를 처음부터 재창조했다"고 평가했다.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아리아인"과 같은 용어는 학계에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영웅적인 이주 침략자라는 도리아인 침략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은 주류 역사학과 명백한 우익 및 네오 나치 성향의 저작물 모두에서 1960년대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했다.
참조
[1]
서적
2014
[1]
서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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