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 부부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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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미 부부 설화는 백제 개루왕 시대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개로왕 시기의 사건으로 여겨진다. 설화는 왕의 수청 요구를 거부한 도미 부인의 정절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한강 유역과 충청남도 보령시를 무대로 하는 두 가지 설화 전승이 존재한다. 문학,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며, 지역 문화 콘텐츠로도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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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 부부 설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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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미 설화의 내용
《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 도미조에 기록된 백제 개루왕 시대의 설화이다.[1] 평민 도미의 아내가 왕의 유혹과 협박에도 절개를 지키고, 위기 끝에 남편과 재회하여 고구려로 망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한국 역사 기록상 가장 오래된 열녀 설화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특히 유교 이념을 강조했던 조선 시대에는 《삼강행실도》 등에 수록되어 널리 알려졌다.
2. 1. 원전 내용 요약
백제의 평민인 도미는 의리를 아는 사람으로, 그의 아내는 미모와 절개로 칭찬받았다. 이 소문을 들은 개루왕은 도미를 불러 아내의 절개를 시험해 보겠다고 말한다. 왕은 도미를 궁에 잡아두고, 신하에게 왕의 옷을 입혀 밤에 도미의 집으로 보낸다. 왕 행세를 한 신하는 도미 부인에게 왕과의 내기에서 이겨 부인을 궁인으로 삼기로 했다며 동침을 요구한다. 부인은 왕명을 따르겠다며 먼저 방에 들어가 있으라 한 뒤, 자신의 계집종을 단장시켜 대신 들여보냈다.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분노하여 도미에게 거짓 죄를 씌워 두 눈을 멀게 한 뒤 작은 배에 태워 강물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도미의 아내를 강제로 범하려 했다. 부인은 지금 월경 중이라 몸이 더럽다며, 며칠 뒤 목욕하고 오겠다고 둘러대 시간을 벌었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부인은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널 수 없어 하늘을 보며 통곡하는데, 배 한 척이 나타나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부인은 아직 살아있는 남편 도미와 기적적으로 다시 만났다.
부부는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지내다가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䔉山) 기슭에 도착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부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옷과 음식을 주며 도왔다. 이후 도미 부부는 고구려 땅을 떠돌며 가난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한국 역사 기록상 가장 오래된 열녀 설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유교적 가치를 중시했던 조선 시대에는 국가에서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미처담초(彌妻啖草)'라는 제목으로 그림과 함께 실려 널리 알려졌다.
3. 도미 설화의 시대적 배경
도미 부부 설화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 개루왕 재위 시기인 2세기의 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설화 속 왕이 실제로는 개로왕(근개루왕)이며, 사건 발생 시기 역시 개로왕 재위 기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1] 이러한 주장은 왕의 이름('개루'와 '개로')의 유사성, 설화 내용과 당시 지리적·시대적 상황의 불일치, 설화 속 사회상이 개루왕 시대보다 후대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다.[1] 하지만 이러한 개로왕 시대 설에 동의하지 않고, 《삼국사기》 기록 그대로 개루왕 시대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2]
3. 1. 개루왕 vs 개로왕
도미 부부 설화에 등장하는 왕은 삼국사기 기록상 개루왕이며, 사건 발생 시기도 개루왕 재위 기간인 2세기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사건이 실제로는 개루왕이 아닌 개로왕(근개루왕) 때의 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1]개로왕 시대 설의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로'(蓋鹵)와 '개루'(蓋婁)라는 이름이 음운상 서로 통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둘째, 개로왕은 '근개루왕'이라고도 불렸는데,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서 앞 글자인 '근'(近)이 종종 생략되는 사례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1977년 《삼국사기》 국역본에 주석을 단 역사학자 이병도는 지리적, 시대적 상황을 근거로 개로왕 시대 설을 뒷받침했다. 그는 개루왕 재위 당시에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낙랑군이 존재했기 때문에, 설화 내용처럼 도미 부인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곧바로 피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근개루왕'으로도 불린 21대 개로왕 시대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1]
또한 설화 내용 중 백성을 호(戶) 단위로 파악하여 관리하는 제도나, 백제의 왕을 '대왕'으로 칭할 만큼 왕권이 강화된 모습 등은 개루왕 시대보다는 훨씬 후대인 개로왕 시대의 사회상에 더 부합한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백제에서 강력한 전제 왕권이 확립된 이후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1]
하지만 이러한 개로왕 시대 설에 동의하지 않고, 기록대로 개루왕 시대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2]
3. 2. 시대적 상황
이 설화에 등장하는 왕은 개루왕이며, 도미 부부의 이야기는 개루왕 재위 시기인 2세기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사건이 실제로는 개로왕(근개루왕) 때 있었던 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첫째, '개로(蓋鹵)'와 '개루(蓋婁)'라는 이름이 서로 통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한 개로왕은 근개루왕이라고도 불렸는데, 일본서기 기록처럼 이름 앞의 '근'(近) 자가 종종 생략되기도 했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둘째, 1977년 《삼국사기》를 번역하고 주석을 단 이병도는 지리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개루왕 당시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군(樂浪郡)이 있어 백제에서 고구려로 바로 가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도미 부부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근개루왕'이라고도 불린 21대 개로왕 때의 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셋째, 설화에 나타난 사회상이 개루왕 시대보다 후대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점도 근거로 거론된다. 백성을 호(戶) 단위로 파악하여 관리한 점이나, 백제 왕을 '대왕'으로 칭할 정도로 왕권이 강력하게 묘사되는 점 등은 왕권의 전제화가 상당히 진행된 시기의 특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1]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따르지 않고, 기록대로 개루왕 때의 사건으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2]
4. 도미 설화의 무대 논쟁
도미 부부 설화의 무대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지역의 주장이 엇갈리며 논쟁이 있다. 이는 설화의 배경이 되는 초기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 및 한성의 위치 비정과도 관련이 깊다.
전통적으로 설화의 무대는 백제의 초기 근거지로 여겨지는 현재의 서울 강동구·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시 일대의 한강 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천성도(踐城島)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재 하남시 창우리 앞 팔당나루를 도미(都彌)의 눈을 빼 던진 곳이라는 의미의 도미나루(渡迷津)로 기록하고 있어 하남시 주장의 근거가 된다. 한편, 강동구 암사동의 옛 지명 '두무개'가 '도미'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강동구를 설화의 무대로 보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충청남도 보령시 역시 현지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과 설화 등을 근거로 자신들이 도미 부부 설화의 실제 무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보령시 오천면에는 도미 부부 설화와 유사한 내용의 설화가 전해오며,[4] '미인도(美人島)', '도미항', '상사봉(想思峰)' 등 관련 지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주 도씨(星州都氏)가 시조로 모시는 도미의 묘가 2003년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보령시로 이장된 것도 주요 근거로 제시된다.[3]
이처럼 각 지역은 문헌 기록, 지명 유래, 현지 전승 등을 근거로 설화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경쟁하고 있다. 하남시는 2009년 학술대회를 열어 보령시의 주장을 위작으로 반박하기도 했으며, 보령시는 하남시의 주장 역시 지명에 근거한 추측일 뿐이며 오히려 보령시가 설화의 주도권을 확보했다고 맞서고 있다. 설화 속 도미 부부가 마지막에 도착한 산산(䔉山)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라 현재의 함경남도 원산 지방으로 추정된다.
4. 1. 한강 유역설 (하남시, 강동구)
도미 부부 설화의 무대는 초기 백제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한강 유역, 즉 현재의 서울 강동구·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시 일대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천성도(踐城島)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산천조에는 현재 경기도 하남시 동부면 창우리 앞 팔당나루를 도미(都彌)의 눈을 빼 던진 곳이라는 의미의 도미나루(渡迷津)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남시가 설화의 주 무대라고 주장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이다.그러나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토성을 백제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지리적 거리를 고려할 때 하남시의 도미진(渡迷津) 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본다. 또한 도미진과 두미진(斗迷津)은 같은 곳을 가리키지만, 단순히 도미(都彌)와 음이 같을 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는 반박도 있다. 대신 강동구 암사동의 옛 지명인 '두무개'가 '도미'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강동구가 설화의 배경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강동구는 이를 기념하여 2004년 3월 20일 천호1동 천일공원에 도미부인 동상을 세웠으나, 동상 무게 문제로 2009년 10월 천호2동 녹지공원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한편, 충청남도 보령시 역시 현지 지명 전승 등을 근거로 설화의 무대가 보령이라고 주장하며 하남시, 강동구와 다른 입장을 보인다.[3][4] 이에 대해 하남시는 2009년 10월 31일 하남문화원 주최 학술대회에서 보령의 설화를 위작으로 규정하고 하남시 근거설을 재차 강조했다. 보령시 측은 하남시의 주장 역시 명확한 역사적 증거보다는 지명 유래에 기반한 추측이며, 하남시가 근거로 드는 두미나루 역시 도미가 아닌 두물나루(양수리)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고 반박했다.
참고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도미 부부가 마지막으로 달아난 산산(䔉山)은 신라 삭주(朔州) 정천군(井泉郡) 산산현(䔉山縣)으로, 이전 고구려의 매시달현이었으며 현재의 함경남도 원산 지방으로 추정된다.
4. 2. 보령시 설
충청남도 보령시는 현지에 전해지는 지명 전승을 근거로 도미 부부 설화의 실제 무대가 보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성주 도씨(星州都氏)는 도미를 가문의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는데, 본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산81-1번지에 있던 도미의 무덤(「백제정승도미지묘」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은 2003년 해당 지역이 임해공단 개발 부지에 포함되면서 충청남도 보령시로 이장되었다.[3]보령시 오천면에는 도미 부부 설화와 비슷한 내용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4] 시 안에는 「미인도(美人島)」(원래 이름은 「빙도」), 「도미항」, 「상사봉(想思峰)」, 「원산도(怨山島)」 등 도미 설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보령시는 1992년 소성리(蘇城里) 상사봉 정상에 도미 부인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정절각(貞節閣)을 세웠고, 1994년에는 정절사를 지어 1995년부터 해마다 경모제를 지내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는 2009년 10월 31일 하남문화원이 주최한 「제1회 도미설화 학술대회」에서 보령의 도미부인 설화는 위작이며 하남 지역이 근거지라고 주장하며 보령시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에 대해 보령시 측은 "백제 문화가 재조명되면서 이를 문화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일부 지역의 시도가 있으나, 도미부인 설화는 이미 보령이 모든 주도권을 확보한 상태"라고 강조하며, "보령 근거설을 부정하는 측 역시 역사적인 증거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유래되고 있는 지명 등을 근거로 추측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하남시가 주장하는 두미나루 유래설 역시 도미보다는 두물나루(한강 두 줄기가 합쳐지는 곳, 양수리)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는 점이 보령시 관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보령에서는 2002년 대천극단의 「도미부인」 창작극 공연 이후 뚜렷한 후속 활동은 이어지지 않고 있다.
4. 3. 각 지역 주장의 근거와 한계
도미 부부 설화의 무대에 대한 논의는 주로 초기 백제의 도읍지였던 위례성 및 한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서울 강동구·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시 일대의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천성도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산천조에서는 현재 경기도 하남시 동부면 창우리 앞 팔당나루를 도미의 눈을 빼 던진 곳이라는 의미의 '도미나루(渡迷津)'로 기록하고 있다. 설화 속 도미 부부가 마지막으로 도망친 산산(䔉山)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삭주(朔州) 정천군(井泉郡) 산산현으로, 고구려의 매시달현이었으며 현재의 함경남도 원산 지방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토성을 백제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하남시까지의 지리적 거리를 고려할 때 도미나루 설화의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본다. 또한 도미진(渡迷津)과 두미진(斗迷津)이 같은 장소이며, 이는 '도미(都彌)'와 음이 같을 뿐 관련성은 없다는 반박도 있다. 한편, 강동구 암사동의 '두무개'라는 지명이 '도미'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강동구가 설화의 무대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강동구는 2004년 3월 20일 천호1동 천일공원에 도미부인 동상을 세웠으나, 동상의 무게 문제로 2009년 10월 천호2동 녹지공원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이러한 한강 유역 중심의 논의와 별개로, 충청남도 보령시는 현지에 전승되는 지명을 근거로 도미 부부 설화의 무대가 보령이라고 주장한다. 보령시 오천면에는 도미 부부 설화와 유사한 내용의 설화가 전해져 오며,[4] '미인도(美人島)'(원래 이름 '빙도'), '도미항', '상사봉(想思峰)', '원산도(怨山島)' 등 관련 지명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성주 도씨(星州都氏)는 도미를 시조로 모시는데, 본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산81-1번지 일대에 '백제정승도미지묘'라는 이름의 도미 무덤으로 알려진 봉분이 있었다.[3] 이 무덤은 2003년 해당 지역이 임해공단 개발 부지에 포함되면서 보령시로 이장되었다. 보령시는 이를 근거로 1992년 소성리 상사봉 정상에 도미 부인을 기리는 사당인 정절각(貞節閣)을 세웠고, 1994년에는 정절사를 추가로 건립하여 1995년부터 매년 경모제를 지내고 있다.
이에 대해 하남시는 2009년 10월 31일 하남문화원 주최 학술대회에서 보령의 설화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며 하남시가 설화의 근거지임을 재차 강조하며 보령시의 주장을 반박했다. 보령시 측은 "백제 문화 재조명 과정에서 일부 지역의 문화콘텐츠 개발 시도가 있으나, 도미부인 설화는 이미 보령이 주도권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며, "보령 근거설을 부정하는 측 역시 명확한 역사적 증거보다는 지명 유래 등을 근거로 추측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하남시가 주장하는 두미나루 유래설 역시, 도미가 아닌 두물나루(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나루, 즉 양수리)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어 보령시의 주장에 힘을 싣는 측면도 있다. 다만 보령시 역시 2002년 지역 극단의 창작극 공연 이후로는 설화와 관련된 뚜렷한 후속 활동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5. 도미 설화의 현대적 의의와 계승
백제 시대의 도미 부부 설화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이다. 이 설화는 단순한 옛이야기를 넘어,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설화의 핵심은 부부간의 굳건한 사랑과 신의이다. 개로왕의 부당한 요구와 위협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믿음을 지키고 정절을 소중히 여긴 도미 부부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는 부부 윤리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특히 남편을 구하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 도미 부인의 주체적인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또한, 도미 설화는 권력자의 횡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백성의 아내를 탐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한 가정을 파괴하려 한 개로왕의 모습은 부당한 권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며,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선 도미 부부의 저항은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현대적 가치와 의미 덕분에 도미 설화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여러 문학 작품과 공연 예술의 소재가 되어 새로운 해석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으며, 설화와 관련된 여러 지역에서는 이를 중요한 문화 자원으로 삼아 그 가치를 알리고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이는 도미 설화가 지닌 생명력과 우리 사회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5. 1. 문학, 예술 작품의 소재
; 소설: * 박종화, 「아랑의 정조」 (1937년) - 원전 기록에 없는 도미 부인의 이름을 '아랑'이라고 설정했다.
: * 최인호, 「몽유도원도」 (1996년) - 여기서는 고구려로 간 도미 부인이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또다시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내 훼손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또한, 도미 부부의 죽음 이후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의 생전 모습을 한 혼령이 배를 타고 가는 환상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이 소설은 2002년에 같은 이름의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 악극
: * 「도미부인」 (차범석 극본, 1984년) - 한국 국립무용단의 초대 단장이었던 송범(1926년~2007년)이 LA 올림픽 초청 공연을 위해 특별 제작한 작품이다. 2012년에 같은 제목으로 다시 만들어졌는데, 연출을 맡은 국수호는 1984년 초연 당시 주인공 도미 역을 맡았던 인연이 있다.
: * 「몽유도원도」(최인호 원작, 2002년) - 윤호진이 연출을 맡았다.
: * 「도미나루의 아랑」 (2007년) - 하남시 문화예술회관과 하남&허성재 무용단이 함께 만든 무용극이다. 2007년 하남종합문예회관 개관 기념 공연으로 처음 선보였다. 같은 해 스페인 그라나다 시에서 열린 '스페인 - 포르투갈 시민을 위한 춤 축제'(7월 8일~7월 23일)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라보스 페스티벌에 하남중앙문화예술단 초청으로 공연되었고, 알람브라 궁전과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에서도 공연되었다.
: * 「황포돛배와 도미부인의 사랑이야기」 (2013년)
; 뮤지컬
:* 「아랑가」(2016년)
5. 2. 지역 문화 콘텐츠
도미 부부 설화는 백제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서울 강동구 · 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시 일대, 그리고 충청남도 보령시 등 여러 지역에서 전승되며 지역 문화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각 지역은 설화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관련 문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서울 강동구는 암사동의 '두무개'라는 지명이 '도미'와 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설화와의 연관성을 주장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4년 3월 20일 천호1동 천일공원에 도미부인 동상을 세웠으나, 동상의 무게 문제로 2009년 10월 천호2동 녹지공원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충청남도 보령시는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미인도(美人島)', '도미항', '상사봉(想思峰)', '원산도(怨山島)' 등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지명과 유사한 내용의 설화가 존재한다는 점을 근거로[4] 보령시가 설화의 주 무대임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특히 성주 도씨(星州都氏)가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는 도미의 무덤(백제정승도미지묘)이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었으나, 2003년 임해공단 개발 부지에 편입되면서 보령시로 이장되었다.[3] 보령시는 1992년 소성리 상사봉 정상에 도미 부인을 기리는 사당인 정절각(貞節閣)을 건립했으며, 1994년에는 정절사를 추가로 지어 1995년부터 매년 경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2002년에는 지역 극단인 대천극단이 '도미부인' 창작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경기도 하남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도미나루(渡迷津)를 근거로 하남 지역이 설화의 중심지라고 주장한다. 2009년 10월 31일에는 하남문화원 주최로 '제1회 도미설화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보령의 도미부인 설화를 위작으로 규정하며 하남 근거설을 강조하고 보령시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에 대해 보령시 측은 "백제 문화가 재조명되면서 이를 문화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일부 지역의 시도가 있으나, 도미부인 설화는 이미 보령이 모든 주도권을 확보한 상태"라며, "보령 근거설을 부정하는 측 역시 역사적인 증거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유래되고 있는 지명 등을 근거로 추측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하며 하남시의 주장을 일축했다. 실제로 하남시가 학술대회에서 제기한 두미나루 유래설은 도미보다는 두물나루(한강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 즉 양수리)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더 우세하여 보령시의 주장을 뒷받침한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보령시의 경우 2002년 창작극 공연 이후 눈에 띄는 후속 문화 콘텐츠 활동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향후 과제로 지적된다.
참조
[1]
서적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2]
저널
The world of the biography Domi of Samguksagi : in relation to the stratification of Baekje society in the 2nd century A.D
https://doi.org/10.2[...]
2007-12
[3]
서적
성주도씨족보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4]
간행물
도미설화의 전승양상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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