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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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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로왕은 백제의 제22대 왕으로, 비유왕의 아들이며 455년에 즉위하였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고구려와의 외교 실패, 잦은 토목 공사 등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특히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계략에 빠져 국력을 낭비했고, 결국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위례성이 함락되면서 아차성에서 처형당했다. 개로왕 재위 기간 동안 백제는 송, 북위, 왜 등 주변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고구려의 압박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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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이름개로왕
한자蓋鹵王, 近蓋婁王
로마자 표기Gaero-wang, Geungaeru-wang
본명부여경사(扶餘慶司), 부여경(扶餘慶)
다른 이름경사(慶司), 경(慶)
즉위455년 9월 (음력)
사망475년 9월 (음력), 백제 아차성
매장지알려지지 않음
자녀왕자, 공주, 문주왕?, 곤지?, 무령왕?
부왕비유왕
모후알려지지 않음
형제자매문주왕, 곤지
왕비알려지지 않음
전임자비유왕
후임자문주왕
묘호없음
시호없음
종교불교
왕조백제
연호없음
호칭어라하
목록제21대 백제 국왕
백제 군주
백제 군주들
백제 군주들 (20-26대)

2. 생애

비유왕의 아들로 부왕 사후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455년에 즉위하였다고 했고,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의 기사를 인용하여 429년에 즉위하였다고 기록해 양자가 차이를 보인다.[5]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단순한 오류로 볼 수도 있지만, 개로왕의 즉위가 다소 불안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비유왕이 죽은 지 한 달만인 455년 10월에 고구려백제를 침공하였고, 이때 신라의 눌지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5]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를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첫 사례라고 평가하였다.

458년, 개로왕은 에 사신을 보내 우현왕 여기(餘紀) 등 11인의 관직 제수를 요청했다.[3] 이들 중 8인은 부여씨로 백제 왕족이었으며, 이는 개로왕이 왕족 중심의 집권 체제를 구축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훗날 문주왕이 귀족 해구에게 살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459년, 개로왕은 여곤(餘昆)을 왜로 보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곤지는 어떤 이유로 백제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곤지는 개로왕에게 왕의 부인을 요구했고, 개로왕은 이를 허락하며 부인이 임신 중이니 가는 길에 해산하면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이는 무령왕 탄생의 복선이 된다.

469년부터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고,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靑木嶺)에 목책을 쌓아 북한산성의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는 등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472년, 개로왕은 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6]위서》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개로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는데, 유교적인 표현과 경전의 글귀를 활용하여 당시 백제의 유교 수용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 국서는 조선 초 《동문선》에도 「백제상위주청벌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국서에서 개로왕은 고구려의 상황을 "연(璉)은 죄가 있어 나라가 어육(魚肉)이 되어 대신과 힘센 귀족들을 마구 죽이기를 서슴지 않으니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다"고 표현하며 매우 혼란스럽다고 전했다. 또한 고구려가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내통하며 왕법(王法)을 무시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북위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했다. 북위는 고구려가 이미 북위에 조공을 바치고 있고, 잘못한 점이 없으며,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에 대한 군사 지원 요청이 실패하자 개로왕은 북위와의 국교를 끊었다.[7]

무리한 토목 공사는 백성들의 원망을 샀으며, 이는 《삼국사기》의 도미 부부 설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위례성은 함락되고 개로왕도 처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서 첩자로 보낸 승려 도림의 진언에 따라 왕성의 성곽과 궁실, 누각 등을 짓는 과정에서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해 국고가 고갈되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졌고, 이를 틈타 쳐들어온 고구려군에 의해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 자신도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처음 공격해오자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도피시키고, 한성(漢城)이 함락되기 직전에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왔지만 고구려군의 재증걸루(再曾桀婁) · 고이만년(古尒萬年) 두 장수에게 붙잡혀 아차성 아래로 끌려가 피살되었다.[7]

2. 1.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 견제

개로왕은 비유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귀족 세력을 억누르려 했다. 458년에는 중국 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친족들을 포함한 11명에게 관직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 중 8명은 백제 왕족의 성씨인 부여씨였는데, 이는 왕족 중심의 통치 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개로왕의 의도를 보여준다.[5]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사, 훗날 문주왕이 귀족 해구에게 살해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유력 귀족이었던 해씨와 진씨 대신 자신의 부여(扶餘) 씨족 출신 인물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하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사를 보내 청목령(靑木嶺)을 지키게 하는 등 고구려에 대한 견제책을 펼쳤다.

472년에는 고구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에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으나, 당시 남조(南朝)와 싸우고 있던 북위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피하려 했기에 거절당했다. 470년대 초,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장수왕(長壽王)은 고구려의 첩자였던 도림(道琳)이라는 불교 승려를 보냈다. 도림은 개로왕의 바둑에 대한 열정을 이용하여 국방을 소홀히 하고 토목공사에 힘쓰도록 설득했다.[1]

2. 2. 대외 관계

개로왕은 남조, 북위와 교류하고 신라, 와 동맹(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려 했다.

458년 8월, 송에 사신을 보내 우현왕 여기(餘紀) 등 11명의 뛰어난 능력을 칭찬하며 3품 관직을 제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3] 이들 중 8인은 부여(餘)씨 성을 가진 왕족으로, 개로왕의 왕족 중심 집권 체제 구축 의지를 보여주나,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 분열을 야기했다.

472년 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 북위와 국교를 끊었다.[6][7]

한편, 왜는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자칭하며 에 백제 지역에 대한 군사 지배권을 요구했다.[4] 442년 왜는 대가야 진출을 시도했지만, 대가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백제에 의해 실패했다. 이는 왜와 백제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져 백제의 왜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시켰다.[4] 개로왕은 왜에 대항하기 위해 과의 외교를 강화했지만, 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 지배권은 요구하지 않았다.[4]

2. 2. 1. 나제 동맹 강화

455년 아버지 비유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455년에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의 내용을 인용하여 429년에 즉위했다고 기록하여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기록 오류로 볼 수도 있지만, 개로왕의 즉위가 불안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개로왕 즉위 직후인 455년 10월, 고구려백제를 침공하자 신라의 눌지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였다.[5]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를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첫 사례라고 평가하였다.

458년 8월, 개로왕은 에 사신을 보내 우현왕 여기(餘紀) 등 11명의 뛰어난 문무와 충성심, 근면함을 들어 3품 관직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3] 관직을 받은 11명 중 8명은 부여(餘)씨, 즉 백제 왕족이었다. 이는 개로왕이 왕족 중심의 통치 체제를 만들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의 분열을 일으켜, 훗날 문주왕이 귀족 해구에게 살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459년, 개로왕은 좌현왕이 된 여곤(餘昆)을 왜로 보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곤지는 어떤 이유로 백제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곤지는 개로왕에게 왕의 부인을 요구했고, 개로왕은 이를 허락하며 부인이 임신 중이니 가는 길에 해산하면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이는 무령왕 탄생의 복선이 된다.

469년부터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고,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靑木嶺)에 목책을 쌓아 북한산성의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는 등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472년, 개로왕은 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달라고 요청했다.[6]위서》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개로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는데, 유교적인 표현과 경전의 글귀를 활용하여 당시 백제의 유교 수용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 국서는 조선 초 《동문선》에도 「백제상위주청벌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국서에서 개로왕은 고구려의 상황을 "연(璉)은 죄가 있어 나라가 어육(魚肉)이 되어 대신과 힘센 귀족들을 마구 죽이기를 서슴지 않으니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다"고 표현하며 매우 혼란스럽다고 전했다. 또한 고구려가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내통하며 왕법(王法)을 무시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북위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했다. 북위는 고구려가 이미 북위에 조공을 바치고 있고, 잘못한 점이 없으며,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에 대한 군사 지원 요청이 실패하자 개로왕은 북위와의 국교를 끊었다.

한편, 이 시기 백제와 왜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왜는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자칭하며 에 백제 지역에 대한 군사 지배권을 요구했다.[4] 이는 백제가 왜에 대한 경계심과 불신감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442년, 왜는 대가야 진출을 시도했지만, 대가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백제에 의해 실패했다. 이는 왜와 백제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져 백제의 왜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시켰다.[4]

개로왕은 왜에 대항하기 위해 과의 외교를 강화했지만, 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 지배권은 요구하지 않았다.[4]

2. 2. 2. 송과의 관계

개로왕은 남조과 교류하며 신라, 와의 동맹(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에 대항하려 했다. 457년 남조 송의 세조로부터 ‘진동대장군’ 작위를 받았고, 458년에는 백제 신하들의 임시 장군 호칭을 인정받았다.[3] 이는 남조 송이 북위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471년에도 송에 조공했다.

458년 8월, 개로왕은 송에 사신을 보내 우현왕 여기(餘紀) 등 11인의 뛰어난 능력을 칭찬하며 3품 관직을 제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3] 이들 중 8인은 부여(餘)씨 성을 가진 왕족으로, 개로왕의 왕족 중심 집권 체제 구축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귀족들의 반발과 지배층 분열을 야기했고, 훗날 문주왕이 귀족 해구에게 살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백제는 장군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개로왕은 송에 자신뿐만 아니라 신료들의 장군호까지 요구했다.[3] 이는 왜가 송에 백제 지역에 대한 군사 지배권을 요구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 왜는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자칭하며 그 제수를 요구했고, 이는 백제가 왜에 대한 경계심과 불신감을 갖게 했다.[4]

430년대에서 450년대에 걸쳐 백제와 왜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4] 백제가 신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왜와의 외교적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와 왜의 군사적 충돌까지 발생하면서 백제의 왜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4]

455년 비유왕이 죽고 개로왕이 즉위하면서, 백제의 군사 지배권은 송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사회에서 확고하지 않았다. 개로왕은 457년 송에 비유왕의 관작 제수를 요구하며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는데, 이는 한반도 남부의 군사 지배권까지 얻으려는 왜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4] 그러나 개로왕은 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 지배권을 송에 요구하지 않았다.[4]

2. 2. 3. 북위와의 관계

472년,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위서》 백제전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당시 개로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는데, 유교적인 수사와 경전의 글귀를 활용하여 당시 백제의 유교 수용 상황과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6] 국서에서 개로왕은 고구려의 정세가 혼란스럽고 백제를 속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의 사신이 고구려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위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했다. 북위는 다음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이유내용
1백제가 보낸 사신의 기물은 중국의 것이 아니다.
2고구려는 북위에 조공을 바치고 있으며 잘못한 것이 없다.
3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곤란하다.



북위의 사신 소안은 고구려를 경유하여 백제로 가려 했지만 장수왕의 거절로 길이 막혔고, 바다를 통해 가려 했으나 결국 도착하지 못했다. 군사 지원 요청이 실패하자 개로왕은 북위와의 국교를 끊었다.[7]

이후 백제는 북위와 교류하지 않았고, 47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처형되면서 북위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2. 2. 4. 왜와의 관계

개로왕은 비유왕의 뒤를 이어 백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남조과 교류하며 신하들의 관직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특히, 458년에는 송에 사신을 보내 11명의 신하에 대한 관직 제수를 요청했는데, 이 중 8명이 부여씨 왕족이었다는 점은 개로왕이 왕족 중심의 집권 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3]

왜와의 관계는 복잡했다. 461년경, 백제는 왕자 군사를 왜에 인질로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3] 그러나 이 시기 백제와 왜는 가야 지역을 둘러싸고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442년에 왜가 가야를 공격했으나 백제가 가야의 요청으로 목라근자를 파견하여 이를 저지했다는 기록이 있다.[4]

왜는 송에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자칭하며 백제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요구했다.[4] 이는 백제에게 왜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로왕은 왜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지배권 요구를 피하면서, 송과의 외교를 통해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확립하려 했다. 이는 왜의 군사적 행동과 한반도 남부 지배권 요구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4]

2. 3. 고구려의 침공과 죽음

455년 10월, 고구려백제를 침공했을 때, 신라의 눌지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였다.[5]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를 나제동맹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첫 사례로 보았다.

472년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위서》 백제전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개로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다. 국서에서 개로왕은 고구려의 정세가 혼란스럽다고 전하며, 고구려가 송 (남조) 및 연연과 협력하여 북위를 능멸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440년 무렵 백제 서쪽 국경에서 발견된 시체와 유품을 근거로 북위 사신이 고구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위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위는 1) 백제가 보낸 증거물은 중국의 것이 아니며, 2) 고구려는 이미 북위에 조공을 바치고 있고, 3) 군사 요청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백제의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개로왕은 북위와의 국교를 단절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의 위례성은 함락되었고, 개로왕은 아차산성 아래에서 처형되었다.[7]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도림의 말에 따라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을 곤궁에 빠뜨린 것이 패인이었다. 고구려군이 공격해오자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한성(漢城) 함락 직전 탈출했으나,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이들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으나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친 자들이었다.

3. 도미 부부 설화

삼국사기》 열전에는 개루왕 때의 일이라 하여 도미라는 인물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이것은 개로왕(근개루왕) 때의 일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4. 가계


  • 아버지: 비유왕
  • 어머니: 미상
  • 왕비: 미상
  • 아들: 부여모도(扶餘牟都, ?~477) - 백제 제22대 왕.[2]
  • 아들: 부여곤지(扶餘昆支, ?~477) - 백제 제24대 왕 동성왕의 아버지. 461년 일본으로 파견되어 일본 여성과 아들을 낳았다.

5. 대중 문화에서의 등장

참조

[1] 서적 Korea's Pastimes and Customs: A Social History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2006
[2] 서적 Mountain Fortresses in Central Inland Korea: Samnyeon Sanseong Mountain Fortress https://books.google[...] Korea Fortress Academy 2007
[3] 서적 百済の王号・侯号・太守号と将軍号 : 5世紀後半の百済の支配秩序と東アジア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18-03-30
[4] 서적 百済の王号・侯号・太守号と将軍号 : 5世紀後半の百済の支配秩序と東アジア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18-03-30
[5] 서적 삼국사기
[6] 서적 주나라 이래로 제후 격에 내려주는 작위 및 봉토
[7] 서적 삼국사기 1145
[8] 논문 『日本書記』에 인용된 百濟三書에 관한 연구 http://academic.nave[...] 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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