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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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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4월 일본의 독도 침탈에 맞서 울릉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단체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독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맞서 독도를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에 상륙하여 경비 활동을 펼쳤으며, 일본 순시선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1956년 경찰에 경비 업무를 인계하고 해산되었지만, 독도 수호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의 지원과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활동 내용의 과장 및 왜곡 논란이 존재하며, 관련 기념 사업과 서훈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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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
개요
독도의용수비대
독도의용수비대
명칭
한국어독도의용수비대
한자獨島義勇守備隊
로마자 표기Dokdouiyong Subidae
결성 및 활동
결성일1953년 4월
해산일1956년 12월
활동 기간3년 8개월
창설 목적일본독도 강탈 시도 방어
주요 활동독도 방어
경비 및 감시 활동
일본 어선 단속
조직
규모33명
주요 인물초대 대장: 홍순칠
부대원: 김성도 외 32명
장비
무기M1 소총
카빈 소총
LMG 경기관총
수류탄
함선어선 제1 태창호
어선 제2 태창호
지원
지원 주체대한민국 해군
지역 주민
지원 내용군사 훈련
무기 및 탄약 지원
식량 및 생필품 지원
해산 이후
정부 편입1956년 12월
소속 변경대한민국 경찰 예비대 편입
기념 사업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건립
독도의용수비대 기념 우표 발행
독도의용수비대 관련 영화 및 드라마 제작
기타
관련 정보독도
울릉도
대한민국 해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2. 배경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와 군경은 독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3][4][2] 1948년부터 5년 동안 독도는 미공군의 폭격 연습 대상이 되어 어민들의 피해가 발생하였고, 1952년 9월 15일에는 학술조사단과 해녀, 선원 등이 미공군의 공습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1953년 3월 19일 미공군은 독도를 훈련구역에서 제외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했지만, 대한민국은 조약 당사국으로 초청받지 못했다.[3] 독도 문제는 조약에서 명확히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영유권 주장을 계속했다.[3]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정부는 평화선을 선포하였으나, 1953년 6월 27일 일본의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상륙하여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고 쓰여 있는 나무 기둥을 세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울릉경찰서경기관총 2문을 장착한 소형선박으로 독도를 순찰하는 순라반을 운영하였고, 7월 11일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1954년 7월 한국 정부는 독도에 상주 경비초소를 운영하기로 결정하였다.

1953년 5월부터 7월까지 일본 해상보안청은 여러 차례 독도를 순찰하며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경고 표지판을 설치했고, 10월 23일에는 대한민국의 표지판을 대체하여 새로운 영토 표지석을 설치했다.[4] 또한 일본 선박, 어선, 훈련선이 섬 근처에 자주 나타났다.[4]

이승만 대통령은 다케시마 사건, 다케시마 외 1도, SCAPIN-677, 맥아더 라인 등을 근거로 일본에 독도 영유권이 없다고 해석하고, 한국 전쟁 중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라인을 설정하여 독도 영유를 선언했다.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각의 결정을 통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을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이 편입의 정당성이 인정되었고,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이승만 라인 선언 10일 후 구상서를 통해 한국의 독도 영유 주장에 항의했다.

2. 1. 한국전쟁과 전후 혼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와 군경은 독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3][4][2] 1948년부터 5년 동안 독도는 미공군의 폭격 연습 대상이 되어 어민들의 피해가 발생하였고, 1952년 9월 15일에는 학술조사단과 해녀, 선원 등이 미공군의 공습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1953년 3월 19일 미공군은 독도를 훈련구역에서 제외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했지만, 대한민국은 조약 당사국으로 초청받지 못했다.[3] 독도 문제는 조약에서 명확히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영유권 주장을 계속했다.[3]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정부는 평화선을 선포하였으나, 1953년 6월 27일 일본의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상륙하여 나무 기둥을 세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울릉경찰서경기관총 2문을 장착한 소형선박으로 독도를 순찰하는 순라반을 운영하였고, 7월 11일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1954년 7월 한국 정부는 독도에 상주 경비초소를 운영하기로 결정하였다.

1953년 5월부터 7월까지 일본 해상보안청은 여러 차례 독도를 순찰하며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경고 표지판을 설치했고, 10월 23일에는 대한민국의 표지판을 대체하여 새로운 영토 표지석을 설치했다.[4] 또한 일본 선박, 어선, 훈련선이 섬 근처에 자주 나타났다.[4]

이승만 대통령은 다케시마 사건, 다케시마 외 1도, SCAPIN-677, 맥아더 라인 등을 근거로 일본에 독도 영유권이 없다고 해석하고, 한국 전쟁 중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라인을 설정하여 독도 영유를 선언했다.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각의 결정을 통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을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이 편입의 정당성이 인정되었고,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이승만 라인 선언 10일 후 구상서를 통해 한국의 독도 영유 주장에 항의했다.

2. 2. 일본의 계속되는 도발

1948년부터 5년 동안 독도는 미공군의 폭격 연습 대상이 되어 어민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2년 9월 15일에도 학술조사단과 해녀, 선원 등 23명이 미공군의 공습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공식 항의하였고, 1953년 3월 19일 미공군은 독도를 훈련 구역에서 제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2년 1월 18일 평화선을 선포하였으나, 1953년 6월 27일 일본의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상륙하여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고 쓰여 있는 나무 기둥을 세웠다. 울릉경찰서는 순라반을 운영하여, 7월 11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해쿠라호를 격퇴했다. 1954년 7월 한국 정부는 독도에 상주 경비 초소를 운영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했지만, 대한민국은 조약 당사국으로 초청받지 못했다.[3] 독도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고, 조약에는 이 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3] 1953년 5월부터 7월까지, 일본 해상보안청은 여러 차례 독도를 순찰하며,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경고 표지판을 설치했다.[4] 10월 23일, 일본 해상보안청은 대한민국의 표지판을 대체하여 새로운 영토 표지석을 설치했다.[4] 일본 선박, 어선, 훈련선이 섬 근처에 자주 나타났고, 울릉도 주민들은 이러한 행위를 어업에 의존하는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했다.[4]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도 시대의 "다케시마 사건", 메이지 초기의 태정관 지령에 있는 "다케시마 외 1도", 제2차 세계 대전독도가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훈령 제677호(SCAPIN-677) 및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훈령 제1033호(SCAPIN-1033/이른바 맥아더 라인)에 의해 일본의 정치 및 어업 관할에서 제외된 것을 근거로 일본에 영유권이 없다고 해석했다. 한국 전쟁 중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라인을 독도를 포함한 해역에 설정하여 독도 영유를 선언했다.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각의 결정을 통해 독도를 편입하여 다케시마로 명명하고 시마네현 오키군 고카촌에 속하게 하여, 에도 시대 이래의 역사적 권원을 근대적인 국제법에 따른 권원으로 대체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도 이 편입의 정당성이 인정되었고,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승만 라인이 선언된 지 10일 후, 일본은 구상서를 통해 한국의 독도 영유 주장에 항의했다.

3. 결성

1953년 4월 20일, 한국 전쟁 참전 용사이자 울릉도 출신 홍순칠은 일본의 독도 침탈에 맞서기 위해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다.[2][12] 홍순칠은 울릉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원을 모집하였으며, 대부분 상이군인·경찰관 출신이었고, 순수 민간인도 일부 포함되었다.[11]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이나 대한민국 경찰에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결성되었다.[1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의 일본 점령이 끝나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했지만, 대한민국은 조약 당사국으로 초청받지 못했다. 그 결과 독도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았고, 조약에는 독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3] 1953년 5월부터 7월까지 일본 해상보안청은 독도를 순찰하며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경고 표지판을 설치했고, 10월 23일에는 대한민국의 표지판을 대체하는 영토 표지석을 설치했다. 일본 선박, 어선, 훈련선이 섬 근처에 자주 나타나자, 울릉도 주민들은 이를 생계 위협으로 인식했다.[4] 이러한 상황에서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해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12]

4. 활동

1953년 4월 20일,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해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에 상륙, 경비 활동을 시작하였다.[12] 같은 해 6월 27일, 일본의 순시선 2척이 독도에 와서 6명의 수비대원을 섬에서 내쫓고, 일본 영토의 표식을 세웠다. 그러나 순시선은 그대로 철수했기에, 의용수비대가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1954년 4월 21일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여 교전 상태가 발생, 순시선 1척을 격침시켰다고 주장하며, 일본 측 기록에서도 순시선이 발포를 받아 손해를 입은 것은 확인되지만, 격침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일본 측은 발포한 조직을 한국 "관헌"으로 인식했다. 1954년 8월, 수비대와 일본 순시선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일본 순시선은 퇴각해야 했다. 11월 21일에는 독도 인근을 침범한 일본 순시선 3척 및 항공기와 격전을 벌여 일본군 십수명을 살상시키는 최대전과를 올렸다.[12] 일본 측 기록에서도 1954년 11월 30일 일본 순시선이 독도로부터 포격을 받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4년 8월 독도의 동도에 등대와 상주 초소를 설치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4년 8월 중순까지 섬에 독립적으로 주둔했으며,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섬에 군사 초소와 등대를 설치했다.

1954년, 홍순칠 대장이 동도의 바위면에 "韓國領"이라고 새기게 했다.

1956년 12월 30일, 독도의용수비대는 경비 업무와 장비를 경찰에 이관하고 해산하였다.[5] 그러나 독도의용수비대원 9명은 울릉경찰서에 경찰관으로 채용되어 수비대 해체 후에도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4][5]

4. 1. 무장 및 장비

초기 독도의용수비대는 개인 소유의 총기 등 열악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울릉경찰서와 주민들의 지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 등으로 점차 무장을 강화해 나갔다. 독도의용수비대는 M1 소총, 카빈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했으며, 직사포 1문도 배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4. 2. 일본과의 교전

1953년 4월 20일,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해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였다.[12] 같은 해 6월 27일, 일본 순시선 2척이 독도에 상륙하여 수비대원 6명을 내쫓고 일본 영토 표식을 세웠으나, 순시선이 철수하자 의용수비대는 곧바로 섬을 탈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상북도 경찰에 지시하여 박격포 1문과 탄 100발을 의용대에 지급했으며, 의용대는 M1 소총과 카빈총으로 무장했다. 직사포 1문도 배치되었다는 설이 있다.

1954년 4월 21일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여 교전이 발생, 순시선 1척을 격침시켰다고 주장한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순시선이 발포를 받아 손해를 입은 것은 확인되지만, 격침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 측은 발포한 조직을 한국 "관헌"으로 인식했다.[4] 1954년 8월, 수비대와 일본 순시선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일본 순시선은 퇴각해야 했다. 11월에는 수비대와 일본 순시선 3척, 항공기 간의 교전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4] 일본 측 기록에서도 1954년 11월 30일 일본 순시선이 독도로부터 포격을 받았다고 한다.[12]

1954년, 홍순칠 대장은 동도의 바위면에 "韓國領"이라고 새기게 했다.

5. 조직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4월 20일부터 1956년 12월 30일까지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해 결성한 조직이다.[12] 대장 홍순칠을 중심으로 부관, 전투반, 후방 지원반, 교육반, 보급반 등으로 구성되었다.[2]

독도의용수비대
대장홍순칠
부관 (33세)황영문
전투 1반장 & 대원서기종 (김재두, 최재우, 조상달, 김용근, 한진진, 김현수, 김장호, 양봉준)
전투 2반장 & 대원정원도 (김영복, 김수봉, 이상국, 이규현, 김경호, 허신도, 김영호)
후방 지원 반장 & 대원김병열 (정재덕, 한상용, 박영희)
교육 반장 & 대원유원식 (오일환, 고성달)
보급 반장 & 대원김인갑 (정익관, 안광렬, 정현권, 구용복, 이필영)



제1전투반과 제2전투반은 직접적인 전투 임무를 수행했고, 나머지 반들은 보급, 교육, 지원 등 후방 임무를 담당했다. 홍순칠의 부인 박영희는 유일한 여성 대원으로 보급반에서 활동했다. 1954년 11월 21일에는 독도 인근을 침범한 일본 순시선 3척 및 항공기와 격전을 벌여 일본군 십수명을 살상시키는 최대전과를 올렸다.[12]

6. 해산

1956년 4월,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에 경찰력을 상주시키기로 결정하고, 울릉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독도 경비를 담당하게 되었다.[12] 1956년 12월 25일, 독도의용수비대는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경비 업무와 장비를 경찰에 인계했다. 독도의용수비대원 중 일부는 울릉경찰서 경찰관으로 특별 채용되어 독도 경비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7. 지원 및 평가

대한민국은 독도의용수비대원과 독도를 지키기 위해 특별한 희생을 한 생존자들에게 지원을 제공한다.[6] 수비대원과 사망한 대원의 배우자는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대전현충원 내 독도의용수비대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수비대원과 그 배우자의 사망에 대한 보상금 지급, 수비대를 기념하는 국가 기념일, 국가보훈의 달 및 위로의 날, 위로 행사 초청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6]

1966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의용수비대의 업적을 평가하여, 대장 홍순칠에게는 근로공로훈장을 수여했으며, 11명의 대원에게는 국방부 표창장을 수여했다.[4][7] 동북아역사재단의 유하영 박사는 "무엇보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존재는 독도에 대한 국가 관할권 행사에 기여하고, 국토를 수호하는 데 기여했다"라고 말했다.[7]

7. 1. 훈장 및 포상

1966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의용수비대의 업적을 평가하여, 대장 홍순칠에게는 근로공로훈장을 수여했으며, 11명의 대원에게는 국방부 표창장을 수여했다.[4][7] 동북아역사재단의 유하영 박사는 "무엇보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존재는 독도에 대한 국가 관할권 행사에 기여하고, 국토를 수호하는 데 기여했다"라고 말했다.[7]

대한민국은 독도의용수비대원과 독도를 지키기 위해 특별한 희생을 한 생존자들에게 지원을 제공한다.[6] 수비대원과 사망한 대원의 배우자는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대전현충원 내 독도의용수비대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수비대원과 그 배우자의 사망에 대한 보상금 지급, 수비대를 기념하는 국가 기념일, 국가보훈의 달 및 위로의 날, 위로 행사 초청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6]

8. 논란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과 관련하여 일부 과장 및 왜곡 논란이 존재한다.[8][9] 오마이뉴스는 독도의용수비대의 창설 시기, 활동 기간, 일본과의 교전 내용 등이 실제와 다르다고 보도했다.[8]

1966년 4월 정부는 홍순칠에게 5등 근무공로훈장을, 10명에게 방위포장을 수여했으며, 1996년 4월에는 33명에게 서훈했다.[13] 그러나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와 유족회는 서훈 당시 공적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5년, 이들은 국가보훈처를 방문해 진실 규명을 요구했고, 독도수호대는 공적 조서가 허위로 작성되었다며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했다. 2007년 감사원은 1996년 서훈 당시 공적 조서가 법에서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작성되었고, 공적심사위원회도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14]

오마이뉴스는 홍순칠의 자필 기록 외에는 수비대가 일본 순찰선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울릉경찰서장이었던 최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군 사이에 독도를 두고 두 번의 대립이 있었는데, 1953년 7월 일본 어선이 독도에 상륙한 후 경고 사격을 받고 섬을 떠난 사건과 1954년 9월경 일본 순찰선이 경찰의 박격포 경고 사격을 받고 철수한 사건이었다. 최현식은 홍순칠이 두 사건 모두 독도에 없었고, 이 "전투"는 수비대가 아닌 경찰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고 한다.[9]

9. 기념 사업

참조

[1] 뉴스 Japan protests Seoul's plan to beef up disputed islets with new military unit https://www.japantim[...] 2018-06-18
[2] 웹사이트 독도의용수비대란? https://www.dokdofou[...] 2024-04-16
[3] 뉴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http://news.khan.co.[...] 2018-06-14
[4] 문서 독도의용수비대 (獨島義勇守備隊)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5] 웹사이트 The Dokdo Volunteer Garrison of Supporting Law,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 제2조 제1호) http://www.law.go.kr[...]
[6] 웹사이트 The dokdo volunteer garrison, support business http://www.dokdofoun[...]
[7] 뉴스 "The Dokdo volunteer garrison, the Noble Mental Succession"(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Dokdo volunteer Garrison' and an academic conference on the succession of the protection of the land) http://www.konas.net[...] 2018-06-14
[8] 문서 전설의 독도수비대, '영웅'은 없었다. [독도수비대의 진실① 미역채취선 타고 8개월간 독도 경비] OhmyNews 2006-10-30
[9] 문서 "일본 순시선과 총격전? 전쟁날 일 있나?" [독도수비대의 진실② 독도 방어 '전투'는 없었다] OhmyNews 2006-10-19
[10] 웹사이트 Japan protests Seoul’s plan to beef up disputed islets with new military unit https://www.japantim[...] 2018-08-26
[11] 뉴스 常習的に侵犯する日本人を決死阻止した独島義勇守備隊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12-08-19
[12] 뉴스 日군함들-항공기 침공 물리친 1954년 '독도대첩' https://www.pressian[...] 2005-03-15
[13] 뉴스 독도의용수비대 33명에 훈장 의결 https://news.kbs.co.[...] 1996-04-02
[14] 뉴스 교과서에 실린 독도의용수비대 역사는 거짓이었다 http://www.mediatoda[...] 20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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