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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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제사는 1912년 상하이에서 신규식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생사를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조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청년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중국 혁명가들과 신아동제사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1915년에는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고, 1918년에는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기여했으며, 신규식 사망 이후 박찬익이 이사장직을 맡았으나 이후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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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사 | |
---|---|
동제사 | |
![]() | |
국가 | 대한민국 |
창립일 | 1912년 |
해체일 | 1937년 |
설립자 | 신규식 |
주요 인물 | 신규식 조소앙 신채호 박은식 김규식 이시우 정인보 윤백영 유동열 김교헌 |
결성 배경 | |
배경 |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필요 독립운동가 양성 필요 |
목표 | 신규식의 항일 구국운동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독립운동가 양성 |
활동 | |
주요 활동 | 동제학교 설립 지원 독립운동 자금 지원 박달학원 설립 지원 |
관련 단체 | |
관련 단체 | 규약 대한독립청년단 신한청년당 임시정부 |
2. 명칭
동제사(同濟社)는 '동주공제(同舟共濟)'에서 따온 이름으로, '생사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7]
1912년 7월, 신규식은 상하이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에서 건너온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 동제사를 조직했다. 동제사는 표면적으로는 상하이 거류 조선인들의 상호 부조를 위한 기관으로 활동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였다.[3]
3. 연혁
1913년 12월,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청년들을 교육하고 중국이나 서구권 학교로 유학을 보내는 데 힘썼다.[4] 1912년 말에는 중국 혁명가들과 협력하기 위해 신아동제사(신아동제사)를 조직했다.[1]
1915년에는 베이징의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연합하여 신한혁명당을 결성했고, 1917년 스톡홀름 만국 사회당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조선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8년 11월에는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1]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후, 동제사는 임시 정부의 정책과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5] 1922년 신규식 사망 이후 박찬익이 이사장직을 맡았지만, 그 이후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1]
3. 1. 결성 배경
1911년 신규식은 신해혁명에 참여한 후 청나라 정부와 중국 주재 일본 영사의 지명 수배를 피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피신했다.[3] 당시 상하이에는 조선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에서 건너온 조선인 유학생들이 많았다.[3]
3. 2. 동제사 결성 (1912)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은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여 신해혁명에 참여했고, 중국 측 요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와 중국 주재 일본 영사에 의해 지명 수배되어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피신했다.[3]
당시 상하이에는 조선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에서 건너온 조선인 유학생들이 많았다. 1912년 7월, 신규식은 그들을 규합하여 동제사를 조직했다. 표면적으로는 상하이 거류 조선인의 상호 부조 기관으로 활동했지만, 실제 목적은 독립운동이었다.[3] 본부 이사장은 신규식, 총재는 박은식이 맡았다.[2]
3. 3. 박달학원 설립 (1913)
1913년 12월, 동제사는 조선 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을 위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박달학원'''을 설립했다.[4] 박달학원은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들을 중국이나 구미의 학교에 유학시키기 위한 예비 교육 및 유학 알선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1][4]
3. 4. 신아동제사 결성 (1912)
1912년 말, 동제사는 중국 혁명가들과의 협력을 위해 천치메이, 쑹자오런 등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했다.[1] 쑹자오런, 후한민, 랴오중카이, 추루, 다이지타오, 천궈푸 등 중국의 주요 인사들이 신아동제사에 참여하여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다.[11]
3. 5. 신한혁명당 결성 (1915)
1915년 동제사는 베이징의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1] 신한혁명당은 1917년 스톡홀름 만국 사회당 대회 참가를 위해 조선사회당으로 개칭되었다.[1]
3. 6. 신한청년당 결성 (1918)
1915년, 베이징의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1917년, 신한혁명당은 스톡홀름 만국 사회당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조선사회당으로 개칭되었다. 1918년 11월, 조직 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1]
3. 7.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참여 (1919)
동제사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후, 임시 정부의 정책 방향과 활동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5]
3. 8. 신규식 사망 이후 (1922)
1922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내분 속에서 신규식은 병상에서 단식하다 사망했다.[6] 이후 박찬익이 동제사의 이사장직을 맡았지만, 그 후의 활동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1]
4. 주요 활동
동제사는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4. 1. 독립청원서 제출 (1919)
1919년 1월 25일,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공화당 명의의 프랑스어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청원서는 신규식과 김규식이 가명으로 서명하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신규식은 '신정'(Shinjhung), 김규식은 '김성'(Kinshung)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8]청원서는 일본의 식민 통치의 부당함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 회복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원서는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통치하는지 외국 열강이 알지 못하며, 가혹한 검열로 인해 한국의 소식이 외부 세계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열강들이 일본의 한국 병합 조약을 승인했기 때문에 한국을 위해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8]
미국 대표단은 청원서에 대해 "미국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했으며, 현재 이 문제는 미국 대표단에 제출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답하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미국 측은 미래에 활용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이 청원서를 보관했다.[9]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는 김규식과 신규식 인맥이 정교한 기획과 준비 작업을 통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평가했다.[10]
5. 평가
동제사는 1910년대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주요 단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박달학원을 통한 인재 양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한 점은 높이 평가된다. 더불어민주당은 동제사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동제사 회원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기린다.[2]
6.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동제사
https://100.daum.net[...]
[2]
웹사이트
동제사
https://100.daum.net[...]
[3]
웹사이트
동제사(同濟社)
https://encykorea.ak[...]
[4]
웹사이트
박달학원(博達學院)
https://encykorea.ak[...]
[5]
웹사이트
동제사
https://100.daum.net[...]
[6]
웹사이트
신규식(申圭植)
https://encykorea.ak[...]
[7]
웹사이트
제2회 무창봉기에 참가한 독립운동 지도자 신정
http://www.ckywf.com[...]
[8]
뉴스
윌슨에게 외친 독립청원서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9]
뉴스
멸망을 원하지 않습니다"…김규식의 또다른 독립청원서 확인
https://www.yna.co.k[...]
연합뉴스
[10]
뉴스
베일속 신규식 행적 담겨… 독립운동사 새로 밝혀줄 사료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11]
웹사이트
제2회 무창봉기에 참가한 독립운동 지도자 신정
http://www.ckyw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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