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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라도 후작 페드로 고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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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브라도 후작 페드로 고메스는 18-19세기 스페인의 외교관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다. 그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교황 비오 6세를 수행했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빈 회의에 스페인 대표로 참석했다. 빈 회의에서 루이지애나 반환, 교황령과의 동맹 등을 주장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스페인은 빈 최종의정서에 서명했다. 그는 외교적 실패에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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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라도 후작 페드로 고메스
기본 정보
이름페드로 고메스 라브라도
작위라브라도 후작
출생1755년 10월 29일
사망1852년 3월 21일
직업외교관
경력
주요 활동스페인 대사 (파리)
빈 회의 스페인 대표
추가 정보
관련 인물페르난도 7세
카를로스 4세
기타"왕국의 가장 위대한 악당"이라는 평판을 얻음
나폴레옹과의 발렌시아 조약 협상에 참여
빈 회의에서 스페인 대표로 활동하며 소극적인 역할 수행

2. 생애 초기

라브라도는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에서 태어났으며,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27세에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4년 후에는 고급 학위를 받았으며, 1793년 세비야의 아우디엔시아 판사로 임명되었다.

3. 외교 경력

1798년 8월, 카를로스 4세의 명으로 피렌체에 머물던 교황 비오 6세를 방문하면서 외교관 경력을 시작했다. 교황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자 그 역시 항복을 거부하고 함께 포로가 되었으며, 석방 후에는 교황령 주재 전권 공사를 거쳐 나폴레옹 시대의 에트루리아 왕국 수도 피렌체에서 근무했다.

나폴레옹 전쟁카디스 의회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국무장관으로 추천했으나, 라브라도 후작은 페르난도 7세 국왕에게 자유주의 헌법 폐지를 조언하며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한 빈 회의에 에스파냐 대표로 파견되었다. 회의 초반 탈레랑의 외교 전략 덕분에 에스파냐는 8국 위원회의 일원이 되는 등 예상 밖의 중요성을 얻었으나, 라브라도 후작은 메테르니히 같은 노련한 외교관들에게 밀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루이지애나 반환 요구는 무시되었고, 교황령과의 동맹 시도나 포르투갈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좌절되었다. 그의 외교적 능력 부족과 비사교적인 성격은 웰링턴 공작으로부터 "내가 만나본 가장 멍청한 사람"이라는 혹평을 듣는 등[1]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결국 에스파냐의 주요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빈 최종의정서 서명을 거부했으나, 국력의 한계로 1817년 5월 7일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라브라도 후작은 이 외교적 실패에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3. 1. 초기 경력

1798년 8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명을 받아 프랑스군을 피해 피렌체로 피난해 있던 교황 비오 6세를 방문하며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교황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라브라도 후작 또한 교황을 따라 항복을 거부하고 함께 포로가 되었다.

비오 6세가 사망하고 그의 조국 에스파냐가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패배한 후 석방되어, 교황령 주재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시대에 세워진 에트루리아 왕국의 수도 피렌체에서 근무했다.

나폴레옹 전쟁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에스파냐를 해방시키자, 카디스에 기반을 둔 국민 의회의 자유주의 의원들은 그를 국무장관(수상)으로 추천했다. 그들은 라브라도 후작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여겼으나 곧 후회하게 되었다. 그는 "흐릿하고, 장황하며, 어리석음의 경계에 다다른 자만심과 특이한 젠체함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라브라도 후작은 자유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페르난도 7세에게 1812년 자유주의 헌법을 폐지하도록 조언하며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대사 직함을 가지고 파리의 평화 회의에서 에스파냐를 대표하게 된다.

3. 2. 나폴레옹 전쟁 시기

1798년 8월, 카를로스 4세 국왕의 명으로 프랑스군을 피해 피렌체로 피신한 교황 비오 6세를 방문하며 외교관 경력을 시작했다. 교황이 프랑스 군 사령관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장군에게 세속적 주권 포기를 거부하여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고, 라브라도 후작 역시 항복을 거부하며 함께 포로 신세가 되었다.

비오 6세가 사망하고 그의 조국 에스파냐가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참여로 어려움을 겪자 석방되었다. 이후 교황령 주재 전권 공사를 거쳐 나폴레옹 시대의 에트루리아 왕국 수도인 피렌체에서 근무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에스파냐를 해방시키자, 카디스에 기반을 둔 국민 의회의 자유주의 의원들은 그를 국무장관으로 추천했으나, 그는 페르난도 7세에게 1812년 스페인 헌법 폐지를 조언하며 자유주의자들의 기대를 저버렸다(→에스파냐 반란). 이 결정은 자유주의자들이 곧 후회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나폴레옹 전쟁의 뒷처리를 위해 소집된 빈 회의대사 자격으로 에스파냐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반도 전쟁에서의 승리 후 1814년 파리 조약에 따라 프랑스로부터 산토도밍고를 회복했지만, 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이 독립을 추구하는 등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회의 초반, 에스파냐는 탈레랑이 4국 위원회(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8국 위원회의 위상을 높이려 한 덕분에 프랑스, 포르투갈, 스웨덴과 함께 8국 위원회의 일원이 되는 뜻밖의 지위를 얻었다.

빈 회의. 라브라도 후작은 앉아있는 외교관들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 둥근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브라도 후작은 탈레랑이나 메테르니히와 같은 노련한 외교관들을 상대로 회의 기간 내내 고전했다. 프랑스가 에스파냐로부터 빼앗아 미국에 매각한 루이지애나의 반환 주장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메테르니히는 교황령과 특별한 동맹을 맺으려는 그의 노력을 무산시켰고, 캐슬레이 경은 포르투갈에 대한 에스파냐의 어떠한 영유권 주장에도 반대했다.

그의 외교적 능력 부족과 경직된 성격은 다른 외교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웰링턴 공작은 그를 "내가 만나본 이들 중 가장 어리석다(stupid)"[1]고 혹평했다. 에스파냐 국무장관 호세 가르시아 데 레온 이 피사로는 라브라도가 "친근함이 부족하고 사교 모임도 거의 갖지 않았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사교 활동이 중요했던 빈 회의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만찬에 참석하는 것을 꺼렸으며, 다혈질적인 성격 탓에 관계 회복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에스파냐 정부로부터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해 미노리텐 광장에 있는 그의 저택 팔레 팔피에서 사교 모임을 주최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 내 부르봉 왕가 영지에 대한 그의 마지막 주장마저 거부되자, 에스파냐는 1815년 6월 9일 빈 최종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라브라도는 올리벤사포르투갈 반환을 포함한 여러 회의 결의안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이미 유럽의 2류 강국으로 전락하고 해외 식민지 독립 운동으로 어려움을 겪던 에스파냐가 최종의정서를 계속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에스파냐는 결국 1817년 5월 7일 조약에 서명했고, 라브라도 후작은 외교적 참패에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3. 3. 빈 회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질서를 재정비하기 위해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에서 열린 빈 회의에 라브라도 후작은 에스파냐의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이전에 카디스 의회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추천되었으나, 자유주의 헌법을 폐지하려는 국왕 페르난도 7세를 적극적으로 도와 자유주의 세력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그는 페르난도 7세에 의해 빈 회의 대표로 임명되었다.

회의 초반, 에스파냐는 프랑스 대표 탈레랑의 외교 전략 덕분에 예상외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탈레랑은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4대 강국이 회의를 주도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에스파냐를 포함한 포르투갈, 스웨덴 등을 포함시켜 8국 위원회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 했다. 이 덕분에 에스파냐는 강대국들과 함께 주요 논의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라브라도 후작은 이러한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는 탈레랑이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같은 노련한 외교관들과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회의 기간 내내 에스파냐의 국익을 효과적으로 관철하지 못했다. 나폴레옹 전쟁프랑스미국에 매각한 루이지애나 영토의 반환 주장 등 에스파냐의 주요 요구 사항들은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결국 에스파냐는 이탈리아 내 부르봉 왕가 영토 문제에 대한 불만 등으로 1815년 6월 9일 빈 최종의정서에 즉시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국력의 한계로 인해 1817년 5월 7일 결국 의정서를 수락했다. 라브라도 후작은 빈 회의에서의 외교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3. 3. 1. 빈 회의에서의 역할과 한계

나폴레옹 전쟁의 뒷처리를 위해 소집된 빈 회의에 페드로 고메스는 에스파냐 대표로 참석했다. 그의 조국 에스파냐는 반도 전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미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이 독립을 추구하며 반란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에스파냐는 회의 초반에 예상 밖의 중요성을 확보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프랑스의 외교관 탈레랑이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4국 위원회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8국 위원회(에스파냐, 프랑스, 포르투갈, 스웨덴 포함)의 위상을 높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브라도 후작은 탈레랑이나 메테르니히와 같은 노련한 외교관들에게 회의 기간 내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여러 차례 좌절되었다.

  • 나폴레옹 전쟁프랑스가 에스파냐로부터 빼앗아 미국에 매각했던 루이지애나의 반환 요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 메테르니히는 에스파냐가 교황령과 특별한 동맹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 영국의 캐슬레이 경은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에 대해 제기하는 어떠한 영토 관련 주장에도 반대했다.


라브라도 후작 개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웰링턴 공작은 그를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멍청하다(stupid)"[1]고 혹평했다. 또한 사교 활동이 중요했던 빈 회의의 특성상,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만찬 참석을 꺼리는 그의 성격은 외교적 실패를 자초한 측면이 있었다. 에스파냐 정부로부터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교 모임을 주최할 재정적 여력도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내 부르봉 왕가 영지에 대한 그의 마지막 권리 주장마저 거부되자, 에스파냐는 1815년 6월 9일 빈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에스파냐는 올리벤사포르투갈에 반환하라는 합의 사항을 거부하는 등 회의 결정에 저항했다.

그러나 해외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이미 유럽의 2류 강국으로 전락한 에스파냐가 언제까지나 최종의정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에스파냐는 1817년 5월 7일, 빈 최종의정서에 서명했다. 라브라도 후작은 빈 회의에서의 외교적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3. 3. 2. 빈 회의 이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소집된 빈 회의에서 라브라도 후작은 에스파냐 대표로 임명되었다. 비록 반도 전쟁에서의 승리로 파리 조약 1814년에 따라 산토도밍고프랑스로부터 돌려받는 등 성과가 있었으나, 당시 에스파냐는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독립을 위한 반란 상태에 있었다.

회의 초반, 에스파냐는 탈레랑의 전략 덕분에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4국 위원회 외에 프랑스, 포르투갈, 스웨덴과 함께 8국 위원회의 일원이 되는 예상 밖의 지위를 얻었는데, 이는 탈레랑이 4국 위원회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한 결과였을 뿐, 에스파냐 자체의 힘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브라도 후작은 회의 기간 동안 탈레랑이나 메테르니히와 같은 노련한 외교관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여러 차례 좌절되었다.

  • 프랑스나폴레옹 전쟁 중 에스파냐로부터 빼앗아 미국에 판매한 루이지애나의 반환 요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 메테르니히는 에스파냐가 교황청과 특별한 동맹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 영국의 캐슬레이 경은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에 대해 제기한 어떤 영토 주장에도 반대했다.


그의 능력과 태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웰링턴 공작은 그를 "내가 만난 가장 멍청한 사람"이라고 혹평했으며[1], 캐슬레이 경 역시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과 협력하기 어렵다는 불만을 표했다. 에스파냐 국무장관 호세 가르시아 데 레온 이 피사로는 라브라도 후작이 "친근함이 부족하고, 저녁 식사나 모임도 거의 갖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사교 활동이 중요했던 빈 회의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러한 그의 성향은 외교적 실패를 자초한 측면이 있었다. 그는 에스파냐 정부로부터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해 미노리텐 광장의 저택(팔레 팔피)에서 사교 모임을 열 형편도 되지 못했다.

결국 라브라도 후작은 이탈리아 내 부르봉 왕가 영지의 권리에 대한 에스파냐의 요구가 최종 의정서 조항에 반영되지 않자, 이에 대한 유보 조항 첨부를 시도했으나 무시당했다. 이로 인해 에스파냐는 1815년 6월 9일 빈 최종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또한 에스파냐는 올리벤사포르투갈에 반환하라는 결정을 포함한 여러 합의 사항에 대해 항의했다.

하지만 이미 유럽 내에서 2류 국가로 전락한 에스파냐가 언제까지나 최종 의정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에스파냐는 결국 1817년 5월 7일 조약에 서명했다. 라브라도 후작은 이 외교적 실패의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외교직에서 물러난 후 그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내, 시력, 판단력, 그리고 재산을 모두 잃었다.

4. 빈 회의 이후의 삶

나폴레옹 전쟁의 뒷처리를 위하여 소집된 빈 회의에 에스파냐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소진된 상태였으나, 우연히 회의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4개국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프랑스의 탈레랑이 8국 위원회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에스파냐는 프랑스, 포르투갈, 스웨덴과 함께 8국 위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라브라도 후작은 회의 기간 동안 탈레랑이나 메테르니히와 같은 노련한 외교관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번번이 농락당했다. 나폴레옹 전쟁프랑스가 에스파냐로부터 빼앗아 미국에 판매한 루이지애나를 다시 에스파냐 영토로 되돌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테르니히는 교황령과 동맹을 맺으려는 그의 시도를 무산시켰으며, 영국의 캐슬레이는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는 것에 반대했다. 심지어 웰링턴 공작은 후작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멍청하다(stupid)"라고 혹평하기도 했다.[1] 또한,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만찬 참석을 꺼리는 그의 내성적인 성격은 사교가 중요했던 빈 회의의 분위기 속에서 외교적 실패를 예견하게 했다.

라브라도 후작의 마지막 주요 주장이었던 이탈리아 내 부르봉 왕가 영지에 대한 권리 주장마저 거부되자, 에스파냐는 빈 최종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에스파냐는 올리벤차를 포르투갈에 반환하라는 빈 회의의 합의 사항에도 저항했다. 하지만 이미 유럽 내에서 위상이 약화된 에스파냐가 언제까지나 의정서 서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에스파냐는 1817년 5월 7일 빈 최종의정서에 서명했으며, 라브라도 후작은 이러한 외교적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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