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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너 위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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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이트너 위트머는 1867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미국의 심리학자로서, 임상 심리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제임스 매킨 캐텔과 빌헬름 분트에게 심리학을 배우고, 1896년 세계 최초의 심리 클리닉을 설립하여 학습 및 행동 문제를 가진 아동을 연구했다. 위트머는 '임상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교육, 의학, 사회 사업 분야의 사람들이 아동을 관찰하고 함께 일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그는 미국 심리학회와 실험 심리학회 창립에 관여했으나, 비판적인 성격과 검증되지 않은 이론으로 인해 말년에는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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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너 위트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이트너 위트머
출생 이름David L. Witmer Jr.
출생1867년 6월 28일
출생지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주, 미국
사망1956년 7월 19일 (향년 89세)
사망지브린마워, 펜실베이니아주, 미국
국적미국
모교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분야임상심리학
아동심리학
교육심리학

2. 초기 생애 및 교육

위트머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독실한 가톨릭교 집안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약사였고, 형제자매들은 모두 다양한 분야의 의사가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 남북 전쟁 이후의 사회 문제를 보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1]

1880년, 위트머는 필라델피아 성공회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뛰어난 지능과 추론 능력을 보였다. 카누 만들기 과제에서 다른 친구들이 경쟁할 때,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배우겠다는 현명한 태도를 보인 일화가 있다.[1] 그는 17세에 우등으로 졸업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1]

1888년 가을, 럭비 아카데미에서 역사와 영어를 가르치면서 난독증과 유사한 언어 문제를 가진 학생을 만나 특별 교육으로 성공적인 지도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위트머는 학습 장애 아동 교육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1]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정치학을 공부하고자 했다.

2. 1. 초기 생애

위트머는 1867년 6월 28일 필라델피아에서 데이비드 L. 위트머 주니어(David L. Witmer Jr.)로 태어났으며, 50세에 이름을 라이트너(Lightner)로 변경했다. 위트머는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위트머(David Witmer)는 1862년 필라델피아 칼리지(Philadelphia College)를 졸업한 저먼타운의 약제사였고, 어머니 캐서린 후첼(Katherine Huchel)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4명의 자녀 중 장남이었으며, 동생으로는 앨버트 페리(Albert Ferree), 릴리 에블린(Lilly Evelyn), 폴 드란시(Paul DeLancey)가 있었다. 이후 위트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페리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생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릴리 에블린은 베를린에서 세균학 의학 학위를 받았으며, 폴 드란시는 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5년 말까지 위트머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다양한 분야의 의사가 되었다.

2. 2. 교육 과정

젊은 시절, 위트머는 남북 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 문제들을 보면서 더 나은 미래와 더 나은 세상을 원했다. 1880년, 위트머와 그의 형제 페리는 당시 미국 최고의 학교 중 하나였던 “필라델피아 성공회 아카데미”에 입학했다.[1]

위트머는 예비 학교에서 그의 지능과 추론 능력을 보여주었다. 위트머와 다른 두 소년은 각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카누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의 두 학우는 누가 먼저 카누를 만들 것인가를 두고 다투었지만, 위트머는 생각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최고의 카누를 만들겠다."라고 말했다.[1]

그는 17세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1884년, 위트머는 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몇 년 후 재정 및 경제학과로 전과하여 1888년, 20세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1] 그는 1학년 때 반장으로 선출되었고 뛰어난 학생으로 명성을 얻었다. 교사 생활을 잠시 한 후, 위트머는 정치학 석사 과정을 위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2. 3. 럭비 아카데미에서의 경험

1888년 가을, 위트머는 남자 중등학교인 럭비 아카데미에서 강사직을 제안받아 역사영어를 가르쳤다.[1]

위트머는 럭비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동안,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하는 14세 학생이 음을 구별하는 데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오늘날 난독증이라고 불릴 수 있는 다른 언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트머는 이 학생의 문제 해결을 돕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 학생은 만족스럽게 발전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결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입학했다.[1] 이러한 성공을 통해 위트머는 학습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지원, 헌신, 특별 교육을 통해 교육에 만족스럽게 참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1]

3. 심리학 경력

위트머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빌헬름 분트를 만나 제임스 카텔, 프랭크 엔젤(Frank Angell), 에드워드 티치너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실험 심리학자 제임스 매킨 캐텔을 만나 심리학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이후 분트의 지도를 받았다. 189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돌아와 심리학 연구소 소장이 된 후 임상 심리학 분야를 개척하였다.

1904년, 아그네스 어윈 학교의 졸업생인 엠마 레플리어와 결혼했다. 그녀는 미국 철학회에서 활동하는 작가였다.

1908년, 펜실베이니아주 월링포드 근처에 지적 장애와 문제아를 위한 작은 사립 기숙 학교를 설립하고 교직원을 배치했다. 나중에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데본에 유사하지만 더 큰 시설을 설립했다.

1914년, 세계 최초의 언어 클리닉을 설립했다.

3. 1. 제임스 매킨 캐텔과의 만남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재학 중, 위트머는 실험 심리학자 제임스 매킨 캐텔을 만나 심리학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조지 스튜어트 풀러턴은 빌헬름 막시밀리안 분트에게 교육받은 최고의 심리학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캐텔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교수로 초빙했다. 위트머는 풀러턴의 제안을 받아들여 캐텔의 조수가 되었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1]

위트머와 캐텔은 다양한 피험자를 연구하고 개인차를 연구할 목적으로 실험 심리학 연구실을 함께 설립했다.[1] 위트머는 이 연구실에서 반응 시간에 대한 개인차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심리 실험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또한 실험 심리학을 제대로 수행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매뉴얼을 출판하기도 했다. 위트머는 캐텔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했지만, 캐텔은 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 컬럼비아 대학교로 떠나면서 학생들과 연구실을 떠났다.

3. 2. 빌헬름 분트와의 수학

빌헬름 분트가 재직했던 라이프치히 대학 심리학 실험실에서 제임스 카텔, 프랭크 엔젤(Frank Angell), 에드워드 티치너 등과 함께 분트에게서 수학하였다.[1] 1891년, 캐텔은 위트머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빌헬름 분트의 조수로 일하도록 도왔으며, 위트머는 오스왈드 쿨페와 루드비히 슈트룸펠의 수업도 수강했다. 위트머는 분트의 조수로 있으면서 그와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겪었다. 예를 들어, 위트머는 이전에 캐텔과 함께 진행했던 반응 시간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 했지만, 분트는 다양한 시각적 형태의 미적 가치, 교육 심리학, 발달 심리학 등 다른 심리학 분야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트머는 1892년에 분트에게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3.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복귀 및 심리학 연구소 설립

1892년 위트머는 독일을 떠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돌아와 심리학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1] 그는 아동 심리학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여러 강좌를 가르쳤다. 또한 감각-지각 변인의 개인차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실험 심리학 논문을 발표했다. 1896년에는 대학교에서 공립학교 교사들을 가르쳤다. 그해 3월, 철자법을 배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른 과목에서는 매우 뛰어난 14세 학생의 사례가 그에게 제시되었다. 이 사례는 위트머에게 특별한 도전이 되었고, 심리학이 실질적인 이점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발전하는 견해와 일치했다. 그는 곧 그 청소년과 함께 보충 학습을 시작했고, 작업 공간이 필요했던 위트머는 대학교에 최초의 심리 클리닉을 설립했다.[1] 1896년, 그는 미국 심리학회에 심리학 실무를 위한 조직 계획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임상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설명했다.

1902년, 그는 대학원생을 지도하기 시작했고 연구실 매뉴얼을 출판했다.

4. 임상심리학의 개척

위트머는 1896년 미국 심리학 협회(APA) 논문에서 "임상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설명하면서, 새로운 분야에 대한 네 가지 주요 목표를 제시했다.


  • 첫째, 통계적 및 임상적 방법을 사용하여 정신 및 지적 장애를 조사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 둘째, 임상 심리학은 지적 장애 또는 학업 진전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 결함을 겪는 어린이를 위한 심리 클리닉과 병원을 더 많이 설립해야 했다.
  • 셋째, 이 분야는 교육, 의학, 사회 사업 등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지적 장애가 있는 어린이와 일반 어린이를 관찰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 넷째, 정신적 및/또는 도덕적으로 지적 장애가 있는 내담자와 함께 일하는 전문가가 되도록 더 많은 심리학자를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위트머는 임상 심리학의 주요 관심사를 정신적 또는 지적 장애가 있는 개인의 회복과 치료를 목적으로 적극적인 임상적 개입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위트머에 따르면 임상 심리학이 실제로 가치가 있으려면 내담자의 정신 건강과 웰빙을 돕고 개선해야 했다.

임상 심리학은 과학적 심리학의 원리를 진단 및 치료적 치료에 적용하려는 심리학의 첫 번째 분야였기 때문에 자체적인 기술과 절차가 필요했다. 임상 심리학의 원래 방법론은 매우 실용적이고 문제 중심적이었으며 위트머가 단독으로 개발했다. 그의 초기 연구는 관찰과 면담에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내담자와 임상가의 일대일 상호 작용을 강조했다.

또한 임상가가 전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방식으로 내담자와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에 중점을 두었다. 위트머는 각 내담자를 문제의 물리적 징후나 관찰하고 설명해야 할 현상이 아닌 개별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개념을 강조했다. 그는 각 내담자의 개인적인 배경 이력을 조사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임상가가 상황을 더 잘, 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담자의 문제가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유전적 요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최초의 심리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이 때문에 치료는 신체적, 정신적 또는 도덕적 문제가 발생한 환경을 변경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내담자를 그 환경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위트머가 임상 심리학을 위해 만든 치료 프로그램은 체계적이었지만, 내담자가 개선되거나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새로운 치료 방법이 구현되었다. 치료는 매주 클리닉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문제가 해결되거나 내담자 또는 내담자의 부모/보호자가 종료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위트머의 치료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이 진행된 클리닉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치료 세션 사이와 치료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에도 지속적인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위트머는 내담자와 간병인 모두에게 생활 환경 및 기타 측면에 대한 직접적인 조언과 상담을 제공하여 문제 또는 장애를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위트머는 원숭이와 "피터"라는 극장 공연을 위해 훈련된 침팬지를 연구했다. 그는 그들을 아이들에게 사용한 검사와 비교했다. 그는 피터의 발성 능력을 조사하여 "엄마"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아" 모음이 제대로 발음되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는 피터가 구슬 꿰기, 담배 불 붙이기, 연기하기, 자물쇠를 열쇠로 열기, 못을 망치질하기, 수도꼭지를 켜기, 그리고 칠판에 분필로 "W"자를 쓰는 것을 발견했다.

위트머의 개별 행동 연구는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1900년 그의 저서 ''빈민가의 아이들의 회복''에서 위트머는 범죄 행동이 유전적이지 않다는 믿음을 기술했다. 대신, 그는 범죄 행동이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1911년 위트머는 심각한 정신 지체자의 자녀를 최소화할 목적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이들을 불임시키는 법안을 지지했다. 1912년 그는 특별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4. 1. 최초의 심리 치료소 설립

위트머는 1896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최초의 심리 치료소를 열었다. 이곳에서는 학습 또는 행동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연구했다. 주요 대상은 필라델피아와 그 주변 지역의 공립학교 학생들이었으며, 교사나 부모가 의뢰했다. 위트머의 치료소는 심리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1]

치료소에서 위트머는 언어 장애, 수면 장애, 행동 문제, 과잉 행동 및 등교 거부와 같은 문제를 정기적으로 다루었다. 모든 아이들에게는 완전한 정신적, 신체적 검사가 제공되었으며, 종종 생리적 증상은 배제되었다. 심리적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개선하기 위해 정보를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누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고 그 영역에서 아이와 함께 작업했으며, 종종 여러 영역을 한 번에 개선했다.[2]

오늘날 현대 심리학에서 위트머가 사용하기 시작한 치료를 위한 사전 진단평가 방식, 여러 관점과 다양한 학문 분야의 다각적인 접근 방식, 연구 근거에 바탕을 둔 예방적 치료를 선호하는 진단 전략은 인간의 존엄성을 반영하려는 그의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4. 2. '임상심리학' 용어의 창시

위트머는 1896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최초의 심리 진료소를 열었다. 이곳은 학습 또는 행동 문제, 혹은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가진 아이들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주요 대상은 필라델피아와 그 주변 지역의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으며, 교사나 부모에 의해 진료소로 보내졌다. 위트머는 언어 장애, 수면 장애, 행동 문제, 과잉 행동 및 등교 거부와 같은 문제를 정기적으로 다루었다. 모든 아이들에게는 완전한 정신적, 신체적 검사가 제공되었으며, 종종 생리적 증상은 배제되었다. 그는 정보를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심리적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개선하고자 했다.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고 그 영역에서 아이와 함께 작업했으며, 종종 여러 영역을 한 번에 개선했다.[1]

1907년, 위트머는 학술지 ''The Psychological Clinic''을 창간했고, 첫 번째 호에서 "임상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임상 심리학은 의학과 분명히 관련이 있지만, 사회학과 교육학에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과학 연구에 풍부한 자료가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학자들이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고, 실제 현상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이 과학적 가치를 위한 경험과 관찰을 할 수 있는 훈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나는 이 작업에 필요한 방법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용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의학에서 "임상"이라는 단어를 빌려왔다.[1]

위트머의 "임상 심리학"은 개별 아동 연구를 다루었기 때문에 출판되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모든 종류의 아이들(똑똑하거나 정신 지체)이 도움을 받으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그는 "생리적 정신 지체"(연대기적 연령에 맞는 정상적인 발달을 이루지 못한 개인)와 "교육적 정신 지체"(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아동)라는 두 가지 용어로 정신 지체를 정의했다.[1]

4. 3. 학술지 ''The Psychological Clinic'' 창간

1907년 위트머는 학술지 ''The Psychological Clinic''을 창간했다. 첫 번째 호에서 그는 "임상 심리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를 설명했다.

> 임상 심리학은 의학과 분명히 관련이 있지만, 사회학과 교육학에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과학 연구에 풍부한 자료가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학자들이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고, 실제 현상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이 과학적 가치를 위한 경험과 관찰을 할 수 있는 훈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나는 이 작업에 필요한 방법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용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의학에서 "임상"이라는 단어를 빌려왔다.[1]

위트머의 "임상 심리학"은 개별 아동 연구를 다루었기 때문에 출판되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의 논문에서 위트머는 모든 종류의 아이들(똑똑하거나 정신 지체)이 도움을 받으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는 두 가지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정신 지체를 정의했다. "생리적 정신 지체"는 연대기적 연령에 맞는 정상적인 발달을 이루지 못한 개인을 지칭했고, 다른 용어인 "교육적 정신 지체"는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아동을 지칭했다.[1]

''The Psychological Clinic''의 첫 번째 호에서 그는 미국 심리학 협회에 제안한 아이디어를 거부한 동료 및 그들의 부서를 비판했다.[2] 1908년, 그의 학술지의 후속 호에서 그는 윌리엄 제임스를 그의 비과학적인 태도로 비판하며, 제임스를 "미국 심리학의 응석받이"라고 불렀다.

위트머는 다른 관점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항상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옹호했다. 이것과 다른 불일치로 인해 위트머는 동료들과의 우정을 잃었고, 그들은 위트머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위트머는 또한 하버드 대학교가 성찰 이론을 사용하여 심리학을 부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을 공격했다. 위트머는 또한 성찰 이론을 거부했고 순수한 실험 심리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또한 "지능 검사"를 비판하고 학생들에게 그것들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장했는데, 그는 그러한 검사가 개인의 효율성만을 측정할 뿐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검사 결과에 따라 사람들을 정상 또는 비정상으로 지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예를 들어, 그가 글을 쓰고 읽는 방법을 아는지에 따라 개인을 "정상" 또는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주요 연구 및 이론

라이트너 위트머는 1896년 미국 심리학회(APA) 논문에서 "임상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설명하면서, 이 새로운 분야의 네 가지 주요 목표를 제시했다.[1]


  • 첫째, 통계적 및 임상적 방법을 사용하여 정신 및 지적 장애를 조사한다.
  • 둘째, 지적 장애 또는 학업 진전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 결함을 겪는 어린이를 위한 심리 클리닉과 병원을 더 많이 설립한다.
  • 셋째, 교육, 의학, 사회 사업 등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지적 장애가 있는 어린이와 일반 어린이를 관찰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넷째, 정신적 및/또는 도덕적으로 지적 장애가 있는 내담자와 함께 일하는 전문가가 되도록 더 많은 심리학자를 훈련시킨다.


위트머는 임상 심리학의 주요 관심사가 정신적 또는 지적 장애가 있는 개인의 회복과 치료를 목적으로 적극적인 임상적 개입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임상 심리학이 실제로 가치가 있으려면 내담자의 정신 건강과 웰빙을 돕고 개선해야 한다고 보았다.

임상 심리학은 과학적 심리학의 원리를 진단 및 치료에 적용하려는 심리학의 첫 번째 분야였기 때문에 자체적인 기술과 절차가 필요했다. 임상 심리학의 원래 방법론은 매우 실용적이고 문제 중심적이었으며 위트머가 단독으로 개발했다.[2] 그의 초기 연구는 관찰과 면담에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내담자와 임상가의 일대일 상호 작용을 강조했다.

위트머는 각 내담자를 개별적인 존재로 취급하고, 개인적인 배경 이력을 조사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내담자의 문제가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유전적 요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최초의 심리학자 중 한 명이었다.

오늘날 현대 심리학에서 위트머가 사용하기 시작한 치료를 위한 사전 진단평가 방식, 여러 관점과 다양한 학문 분야의 다각적인 접근 방식, 그리고 연구 근거에 바탕을 둔 예방적 치료를 선호하는 진단 전략은 인간의 존엄성을 반영하려는 그의 노력으로 평가받는다.[1]

그가 만든 치료 프로그램은 체계적이었지만, 내담자가 개선되거나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수정되었고 새로운 치료 방법이 도입되었다. 치료는 매주 클리닉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문제가 해결되거나 종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치료 세션 사이와 치료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에도 지속적인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위트머의 원래 접근 방식 중 많은 부분은 오늘날의 임상 심리학에도 여전히 존재한다.[1]

5. 1. 개별적 접근과 진단

1896년 미국 심리학회(APA) 논문에서 "임상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설명한 라이트너 위트머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네 가지 주요 목표를 제시했다.[1]

  • 첫째, 통계적 및 임상적 방법을 사용하여 정신 및 지적 장애를 조사해야 한다.
  • 둘째, 지적 장애 또는 학업 진전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 결함을 겪는 어린이를 위한 심리 클리닉과 병원을 더 많이 설립해야 한다.
  • 셋째, 교육, 의학, 사회 사업 등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지적 장애가 있는 어린이와 일반 어린이를 관찰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 넷째, 정신적 및/또는 도덕적으로 지적 장애가 있는 내담자와 함께 일하는 전문가가 되도록 더 많은 심리학자를 훈련시켜야 한다.


위트머는 이 논문에서 임상 심리학의 주요 관심사를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이는 정신적 또는 지적 장애가 있는 개인의 회복과 치료를 목적으로 적극적인 임상적 개입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위트머에 따르면 임상 심리학이 실제로 가치가 있으려면 내담자의 정신 건강과 웰빙을 돕고 개선해야 했다.

임상 심리학은 과학적 심리학의 원리를 진단 및 치료적 치료에 적용하려는 심리학의 첫 번째 분야였기 때문에 자체적인 기술과 절차가 필요했다. 임상 심리학의 원래 방법론은 매우 실용적이고 문제 중심적이었으며 위트머가 단독으로 개발했다.[2] 그의 초기 연구는 관찰과 면담에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내담자와 임상가의 일대일 상호 작용을 강조했다.

또한 임상가가 전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방식으로 내담자와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에 중점을 두었다. 위트머는 각 내담자를 문제의 물리적 징후나 관찰하고 설명해야 할 현상이 아닌 개별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개념을 강조했다. 그는 각 내담자의 개인적인 배경 이력을 조사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임상가가 상황을 더 잘, 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담자의 문제가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유전적 요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최초의 심리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이 때문에 치료는 신체적, 정신적 또는 도덕적 문제가 발생한 환경을 변경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내담자를 그 환경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5. 2. 치료 프로그램

오늘날 현대 심리학에서 위트머가 사용하기 시작한 치료를 위한 사전 진단평가 방식, 여러 관점과 다양한 학문 분야의 다각적인 접근 방식, 그리고 연구 근거에 바탕을 둔 예방적 치료를 선호하는 진단 전략은 인간의 존엄성을 반영하려는 그의 노력으로 평가받는다.[1]

위트머가 만든 치료 프로그램은 체계적이었지만, 내담자가 개선되거나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수정되었고 새로운 치료 방법이 도입되었다. 치료는 매주 클리닉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문제가 해결되거나 내담자 또는 내담자의 부모/보호자가 종료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위트머의 치료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이 진행된 클리닉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치료 세션 사이와 치료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에도 지속적인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위트머는 내담자와 간병인 모두에게 생활 환경 및 기타 측면에 대한 직접적인 조언과 상담을 제공하여 문제 또는 장애를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위트머의 원래 접근 방식 중 많은 부분은 오늘날의 임상 심리학에도 여전히 존재한다.[1]

6. 미국 심리학회(APA)와의 관계 및 논쟁

1896년, G. 스탠리 홀, 윌리엄 제임스, 제임스 매키언 캐텔은 미국 심리학회(APA) 회의에서 심리학 전문가들을 위한 새로운 협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위트머와 동료들은 APA가 심리학 논문만 받아들이고, 미국 철학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새로운 회원을 선택하는 더 나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많은 기존 APA 회원들 사이에서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들의 제안은 거부되었고, 위트머는 홀과 함께 실험 심리학자만을 위한 협회를 시작하려 했지만, 홀이 거절했다. 1904년 에드워드 B. 티치너는 심리학을 철학에서 분리하려는 위트머의 제안을 받아들여 APA를 떠나 위트머가 실험 심리학자만을 위한 협회인 실험 심리학회(SEP)를 창립하는 것을 도왔다.[1]

위트머는 티치너에게 이 협회는 남자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여성은 과학적 문제를 논의할 때 너무 감정적이기 때문에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2] 그는 결국 태도를 바꾸어 여성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클리닉에서 여성의 근무를 허용했으며, 나중에는 여성을 클리닉 관리자로 임명했다.[1]

위트머는 APA를 위해 논문을 쓰고 출판했다. "심리학의 실제적 업무 조직"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학문적으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했으며 조직적인 교육 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학교가 학생들의 수업과 성적에 더 관여해야 하며, 더 나은 교육 도구를 갖추어야 하며, 교직원은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반영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6. 1. 미국 심리학회(APA) 창립 관여 및 갈등

1896년, G. 스탠리 홀, 윌리엄 제임스, 제임스 매키언 캐텔은 미국 심리학회(APA) 회의에서 심리학 전문가들을 위한 새로운 협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위트머와 다른 실험 심리학 동료들은 APA가 심리학 논문만 받아들이고, 미국 철학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새로운 회원을 선택하는 더 나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많은 기존 회원들이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APA 회원들 사이에서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들의 제안은 거부되었고, 위트머는 홀과 함께 실험 심리학자만을 위한 협회를 시작하려 했지만, 홀이 거절했다. 1904년 에드워드 B. 티치너는 심리학을 철학에서 분리하려는 위트머의 제안을 받아들여 APA를 떠나 위트머가 실험 심리학자만을 위한 협회인 실험 심리학회(SEP)를 창립하는 것을 도왔다.[1]

위트머는 티치너에게 이 협회는 남자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여성은 과학적 문제를 논의할 때 너무 감정적이기 때문에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2] 그는 결국 태도를 바꾸어 여성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클리닉에서 여성의 근무를 허용했으며, 나중에는 여성을 클리닉 관리자로 임명했다.[1]

위트머는 APA를 위해 논문을 쓰고 출판했다. "심리학의 실제적 업무 조직"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학문적으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했으며 조직적인 교육 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학교가 학생들의 수업과 성적에 더 관여해야 하며, 더 나은 교육 도구를 갖추어야 하며, 교직원은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반영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6. 2. 실험 심리학회(SEP) 창립

1896년, G. 스탠리 홀, 윌리엄 제임스, 제임스 매키언 캐텔은 미국 심리학회(APA) 회의에서 심리학 전문가들을 위한 새로운 협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위트머와 다른 실험 심리학 동료들은 APA가 심리학 논문만 받아들이고, 미국 철학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새로운 회원을 선택하는 더 나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많은 기존 회원들이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APA 회원들 사이에서 논쟁을 촉발시켰다.[1] 그들의 제안은 거부되었고, 위트머는 홀과 함께 실험 심리학자만을 위한 협회를 시작하려 했지만, 홀이 거절했다. 1904년 에드워드 B. 티치너는 심리학을 철학에서 분리하려는 위트머의 제안을 받아들여 APA를 떠나 위트머가 실험 심리학자만을 위한 협회인 실험 심리학회(SEP)를 창립하는 것을 도왔다.[1]

위트머는 티치너에게 이 협회는 남자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여성은 과학적 문제를 논의할 때 너무 감정적이기 때문에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2] 그는 결국 태도를 바꾸어 여성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클리닉에서 여성의 근무를 허용했으며, 나중에는 여성을 클리닉 관리자로 임명했다.[2]

위트머는 APA를 위해 논문을 쓰고 출판했다. "심리학의 실제적 업무 조직"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학문적으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했으며 조직적인 교육 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학교가 학생들의 수업과 성적에 더 관여해야 하며, 더 나은 교육 도구를 갖추어야 하며, 교직원은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반영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7. 말년 및 유산

위트머는 학교 심리학 분야의 창시자로 꼽히며, 이 분야에서 주요한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정신적, 신체적, 도덕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결함을 개선하기 위한 치료에 집중한 최초의 심리학자였다. 학업 성공을 저해하는 결함으로 고통받는 아동을 치료하는 것을 임상 심리학의 주요 초점으로 삼았으며, 장애 아동 치료를 위한 심리학적 클리닉과 병원을 설립하여 이 분야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만들었다.

위트머는 교사의 중요한 역할을 최초로 인식하고, 자신의 클리닉에서 교사들을 위한 강좌를 개설했다. 또한 의학 및 사회 복지 분야 사람들에게 클리닉을 개방하여 정상 아동과 장애 아동을 관찰하고 함께 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아동과 상호 작용하는 사람들이 치료 환경에서 그들과 함께 일하며, 정상 아동과 장애 아동의 차이점을 직접 관찰하고, 임상적 방법을 실제로 적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는 다른 분야에서 장애 아동과 함께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기여했다.

7. 1. 적십자 활동 및 은퇴

1917년, 위트머는 적십자에 합류하여 전쟁 피해 노숙자들의 재활을 도왔다.[1] 1920년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와 티치너의 죽음으로 출판을 중단했다.

1930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그에게 ''임상 심리학: 라이트너 위트머를 기리는 연구''라는 책을 헌정했다.[1]

1956년 7월 19일, 위트머는 브린 모어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8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2]

7. 2. 사망 및 유산

위트머는 1956년 7월 19일, 89세의 나이로 브린 모어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1930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그에게 ''임상 심리학: 라이트너 위트머를 기리는 연구''라는 책을 헌정했다.

위트머는 임상 심리학 외에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거의 언급되지 않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위트머는 자신의 분야 내에서 적대적이고, 논쟁적이며, 직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상대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심리학회, 단일 실험주의자, 심리학이라는 학문, 그리고 그의 동료들을 공격했다.

둘째, 그의 많은 이론은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어려웠다. 위트머는 과학적 절차를 옹호했지만, 종종 자신의 이론을 가설이 아닌 사실로 제시했고, 검증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의 많은 원리, 방법, 아이디어는 기본적으로 해당 분야의 후기 발전과 일치하지만, 그가 제시했을 때는 주류와 거리가 멀었다. 1897년 공식 연설에서, 그의 임상 심리학에 대한 아이디어는 몇몇 사람들의 눈썹을 치켜세우게 했을 뿐이었다.

위트머는 경력 동안 심리학과 사회의 많은 유행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대량 교육에 초점을 맞춘 당시의 인기 있는 교육 방법에 직접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교육이 개인화와 학생 개개인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능 검사가 지능이 아닌 효율성을 측정한다고 비판하며, 지능은 유전적, 환경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y for Lightner Witmer https://secureapps.l[...]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2013-05-08
[2]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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