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랑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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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락랑구역은 대동강 남동쪽에 위치한 평양직할시의 구역으로, 북쪽으로는 도심부, 남쪽으로는 강남군, 동쪽으로는 력포구역과 접한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토성리 토성 유적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발굴을 통해 낙랑군 관련 유물이 발견되었다. 1959년 평양시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21개의 동(洞)과 9개의 리(里)로 구성되어 있다. 락랑선 락랑역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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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구역은 평양직할시에 설치된 구역으로, 대동강 북안에 위치하며, 26개의 동과 2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고, 평남선 철도, 평양 지하철 혁신선 광복역 등의 교통 시설과 만경대혁명사적관 등의 관광 시설이 있다.
락랑구역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일반 정보 | |
유형 | 평양직할시의 구역 |
한국어 표기 | 락랑구역 |
한자 표기 | 낙랑구역 |
로마자 표기 | Nangnang-guyeok |
행정 구역 | |
구성 | 9개 동, 9개 리 |
정치 |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김영남 (2019년) |
지리 | |
면적 | 97 km² |
인구 통계 | |
총 인구 | 282,681 명 (2008년)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2. 지리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고조선을 멸하고 평양 부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2] 낙랑구역 토성리에는 토성 유적(토성리 토성)이 있으며, 주변에는 한나라부터 진나라 초기에 조성된 분묘군(낙랑 한묘)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발굴 결과, 토성리 토성에서 건물, 도로, 창고군과 "낙랑"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발견되어, 이 토성이 낙랑군의 군치(정청 소재지)로 여겨지게 되었고, "낙랑 토성"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북조선은 이것이 낙랑군의 것이 아닌 고구려에 의해 축조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대동강의 남동안(南東岸)에 위치하며, 강을 사이에 두고 북동쪽에는 평천구역·선교구역 등의 도심부, 북쪽에는 만경대구역, 서쪽에는 천리마군(평안남도)이 있다. 남쪽은 강남군, 동쪽은 력포구역에 접한다.
도심에서 가까운 부분은 시가지화가 진행되고 있다. 대동강가의 통일대로에는 2003년에 농민 시장을 개편해 만들어진, 북조선에서 제일 큰 종합 시장으로 여겨지는 '통일대로시장'이 있다.
3. 역사
일제강점기에는 대동군 대동강면 등에 속했다. 그 후, 평양시 동구역·강남군·중화군 등의 일부가 되었지만, 1959년 9월에 락랑구역이 신설되어 평양시에 편입되었다.
낙랑군은, 《한서》에 따르면 27개 현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구는 406,748명이 넘었다.[2] 현대 평양의 대략적인 위치인 대동강에 위치해 있으며,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군의 치소는 왕검성 즉 평양의 옛 고구려 수도가 파괴된 후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낙랑군의 원래 치소였던 것으로 주장된다.[2]
일제강점기 당시 이 지역은 대동군의 일부였다. 평양이 성장하면서 대동군의 이전 지역을 많이 합병함에 따라, 이 지역은 나중에 평양의 동구역, 강남군, 중화군으로 분할되었다. 락랑구역은 1959년 별도의 구역으로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구역은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수의 한나라 및 고구려 무덤으로 유명하며, 그중 많은 수가 1910년대 초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낙랑 무덤 참조).[3] 특히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와 이마니시 류는 무덤 발굴과 토성리 낙랑 토성을 군의 치소로 식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총 1,500개 이상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한 구역(청백동)에서만 63개가 발견되었다.[3] 그러나 북한은 모든 무덤이 사실 고구려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의 낙랑의 존재를 부인하고 고구려 도시 국가였다고 주장하며, 수천 개의 중국 유물은 낙랑국이 한나라와 맺었던 번창하는 무역을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한다.[4] 북한 학계는 조선에는 고대부터 자주 독립의 국가가 있었다는 독자적인 역사관을 내세우며, "낙랑 토성"의 유적·유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가 날조한 것이며, 실제 낙랑군은 중화인민공화국요동·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학계에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인물이 있다.
3. 1. 고조선과 낙랑군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고조선을 멸하고 평양 부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2] 한서에 따르면 낙랑군은 27개 현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구는 406,748명이 넘었다.[2] 락랑구역 토성리에는 토성 유적(토성리 토성)이 있으며, 주변에는 한나라부터 진나라 초기에 조성된 분묘군(낙랑 한묘)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발굴 결과, 토성리 토성에서 건물, 도로, 창고군과 "낙랑"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발견되어, 이 토성이 낙랑군의 군치(정청 소재지)로 여겨지게 되었고, "낙랑 토성"이라고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지역은 대동군의 일부였다.[2] 평양이 성장하면서 대동군의 이전 지역을 많이 합병함에 따라, 이 지역은 나중에 평양의 동구역, 강남군, 중화군으로 분할되었다. 락랑구역은 1959년 별도의 구역으로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2]
이 구역은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수의 한나라 및 고구려 무덤으로 유명하며, 그중 많은 수가 1910년대 초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낙랑 무덤 참조).[3] 특히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와 이마니시 류는 무덤 발굴과 토성리 낙랑 토성을 군의 치소로 식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총 1,500개 이상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한 구역(청백동)에서만 63개가 발견되었다.[3] 그러나 북한 학계는 조선에는 고대부터 자주 독립의 국가가 있었다는 독자적인 역사관을 내세우며, "낙랑 토성"의 유적·유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가 날조한 것이며, 실제 낙랑군은 중화인민공화국요동·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학계에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인물이 있다.
3. 2.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낙랑군은 한서에 따르면 27개 현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구는 406,748명이 넘었다. 현대 평양의 대략적인 위치인 대동강에 위치해 있으며,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군의 치소는 왕검성 즉 평양의 옛 고구려 수도가 파괴된 후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낙랑군의 원래 치소였던 것으로 주장된다.[2]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평양 부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지역은 대동군의 일부였다. 평양이 성장하면서 대동군의 이전 지역을 많이 합병함에 따라, 이 지역은 나중에 평양의 동구역, 강남군, 중화군으로 분할되었다. 1959년 9월 락랑구역이 신설되어 평양시에 편입되었다.
이 구역은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수의 한나라 및 고구려 무덤으로 유명하며, 그중 많은 수가 1910년대 초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낙랑 무덤 참조). 특히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와 이마니시 류는 무덤 발굴과 토성리 낙랑 토성을 군의 치소로 식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총 1,500개 이상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한 구역(청백동)에서만 63개가 발견되었다.[3] 락랑구역 토성리에는 토성 유적(토성리 토성)이 있으며, 주변에는 한나라부터 진나라 초기에 조성된 분묘군(낙랑 한묘)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발굴 결과, 토성리 토성에서 건물, 도로, 창고군과 "낙랑"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발견되어, 이 토성이 낙랑군의 군치(정청 소재지)로 여겨지게 되었고, "낙랑 토성"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북한은 모든 무덤이 사실 고구려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의 낙랑의 존재를 부인하고 고구려 도시 국가였다고 주장하며, 수천 개의 중국 유물은 낙랑국이 한나라와 맺었던 번창하는 무역을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한다.[4] 북한 학계는 조선에는 고대부터 자주 독립의 국가가 있었다는 독자적인 역사관을 내세우며, "낙랑 토성"의 유적·유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가 날조한 것이며, 실제 낙랑군은 중화인민공화국요동·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학계에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인물이 있다.
3. 3. 락랑구역 연혁
낙랑군은 한서에 따르면 27개 현, 406,748명이 넘는 인구로 구성되었다.[2] 현대 평양의 대략적인 위치인 대동강에 위치해 있었으며,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군의 치소는 왕검성 즉 평양의 옛 고구려 수도가 파괴된 후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낙랑군의 원래 치소였던 것으로 주장된다.[2]
일제강점기 당시 이 지역은 대동군의 일부였다. 평양이 성장하면서 대동군의 이전 지역을 많이 합병함에 따라, 이 지역은 나중에 평양의 동구역, 강남군, 중화군으로 분할되었고, 1959년 락랑구역이 별도의 구역으로 공식 설립되었다.
이 구역은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수의 한나라 및 고구려 무덤으로 유명하며, 그중 많은 수가 1910년대 초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낙랑 무덤 참조). 특히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와 이마니시 류는 무덤 발굴과 토성리 낙랑 토성을 군의 치소로 식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총 1,500개 이상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한 구역(청백동)에서만 63개가 발견되었다.[3] 그러나 북한은 모든 무덤이 사실 고구려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의 낙랑의 존재를 부인하고 고구려 도시 국가였다고 주장하며, 수천 개의 중국 유물은 낙랑국이 한나라와 맺었던 번창하는 무역을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한다.[4]
4. 행정 구역
락랑구역은 21개의 동과 9개의 리로 구성된다.[5]
정백 1동, 정백 2동, 락랑 1동, 락랑 2동, 락랑 3동, 정오 1동, 정오 2동, 원암동, 두단동, 충성 1동, 충성 2동, 충성 3동, 동산동, 관문 1동, 관문 2동, 관문 3동, 통일 1동, 통일 2동, 승리 1동, 승리 2동, 승리 3동, 송남리, 보성리, 류소리, 남사리, 중단리, 룡호리, 금대리, 벽지도리, 긴골리가 이에 해당한다.
비교적 큰 동인 정백동, 정오동, 관문동, 락랑동, 통일동은 행정 목적상 두 부분으로 나뉘며, 충성동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5]
4. 1. 동 (洞)
락랑구역은 21개의 동과 9개의 리로 구성된다.[5] 정백 1동, 정백 2동, 락랑 1동, 락랑 2동, 락랑 3동, 정오 1동, 정오 2동, 원암동, 두단동, 충성 1동, 충성 2동, 충성 3동, 동산동, 관문 1동, 관문 2동, 관문 3동, 통일 1동, 통일 2동, 승리 1동, 승리 2동, 승리 3동, 송남리, 보성리, 류소리, 남사리, 중단리, 룡호리, 금대리, 벽지도리, 긴골리가 이에 해당한다. 비교적 큰 동인 정백동, 정오동, 관문동, 락랑동, 통일동은 행정 목적상 두 부분으로 나뉘며, 충성동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5]4. 2. 리 (里)
락랑구역은 21개의 동과 9개의 리로 구성된다.[5] 정백 1동, 정백 2동, 락랑 1동, 락랑 2동, 락랑 3동, 정오 1동, 정오 2동, 원암동, 두단동, 충성 1동, 충성 2동, 충성 3동, 동산동, 관문 1동, 관문 2동, 관문 3동, 통일 1동, 통일 2동, 승리 1동, 승리 2동, 승리 3동, 송남리, 보성리, 류소리, 남사리, 중단리, 룡호리, 금대리, 벽지도리, 긴골리가 이에 해당한다.[5] 비교적 큰 동인 정백동, 정오동, 관문동, 락랑동, 통일동은 행정 목적상 두 부분으로 나뉘며, 충성동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5]
5. 교통
락랑선 락랑역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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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Administrative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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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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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元前1世紀の楽浪郡木簡発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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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古級の論語、北朝鮮から 古代墓から出土の竹簡に記述(1/2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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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最古級の論語、北朝鮮から 古代墓から出土の竹簡に記述(2/2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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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朝鮮史をわい曲する「新しい歴史教科書」
http://www1.kore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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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現在進行形 歴史わい曲の後には ‘津田・イ・ビョンド 濃厚な影’
http://japan.hani.co[...]
200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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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평양시 낙랑구역 역사
http://www.cybernk.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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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2008년 인구 조사
http://unstats.un.or[...]
조선중앙통계국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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