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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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글은 15세기 조선 시대에 창제된 한국의 고유 문자이다. 세종대왕은 한국어의 표기를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소리를 나타내는 음소 문자이며, 낱자를 모아 쓰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글은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구성되며, 이후 겹자음과 겹모음이 추가되었다. 한글은 20세기 초 띄어쓰기가 도입되었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면서 표기법이 정립되었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로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세종대왕 문해상을 통해 문맹 퇴치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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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1443년에 세종에 의해 창제된 한국의 고유 문자로, 한글의 창제목적, 원리, 사용법 등을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1446년에 반포되었으며,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로 평가받는다.
한글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한글/조선글 |
로마자 표기법 | Hangul (Hangeul)/Chosŏn'gŭl |
유형 | 자질 문자, 알파벳 |
표기 언어 | 한국어 제주어 찌아찌아어 (제한적) 대만어 (대만어 한글) |
사용 시기 | 1443년–현재 |
창제자 | 세종 |
유니코드 | U+AC00–U+D7AF U+1100–U+11FF U+3130–U+318F U+A960–U+A97F U+D7B0–U+D7FF |
ISO 15924 | Hang |
ISO 15924 설명 | 자모 (자모 하위 집합) |
표기 방향 | 왼쪽에서 오른쪽, 새 줄 아래 위에서 아래, 새 줄 왼쪽 또는 오른쪽에서 왼쪽, 새 줄 아래 (역사적) |
한국어 표기 | |
한글 | 한글 |
조선글 | 조선글 |
훈민정음 | 훈민정음 |
발음 (IPA) | 한글: 조선글: |
로마자 표기 | 한글: |
문자 체계 | |
분류 | 표음 문자 자질 문자 알파벳 |
기타 | |
관련 문서 | 한국어 한국어 문법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 한국어 점자 한국어 혼용 한자 국자 약자 이두 향찰 구결 |
참고 자료 | |
관련 링크 | 국립국어원: 알고 싶은 한글 국립국어원: 한글의 개별 문자 및 원리 |
2. 역사
=== 창제 이전 ===
한국은 삼국 시대부터 이두와 구결을 써 왔다.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하다 해도 한자 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 생활의 불편은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향찰도 사용되었으나, 일반 백성이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 한글 창제 ===
한국인들은 주로 한글보다 수백 년 앞선 토착 음성 표기 체계인 이두체, 향찰, 구결 및 각필과 함께 한문을 사용하여 글을 썼다.[11][12][13] 그러나 한국어와 한자어 습득의 어려움과 사용되는 많은 한자 수 때문에 많은 무학의 하층민들은 문맹이었다.[14] 일반 백성의 문해력 향상을 위해 조선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세종대왕은 직접 새로운 알파벳을 창제하고 반포하였다.[14][15]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한글 창제를 명령했다는 널리 퍼진 추측과 달리, 『세종실록』과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 서문과 같은 당대 기록들은 그가 직접 창제했음을 강조한다.[16]
이 사업은 1443년 12월과 1444년 1월 사이에 완료되었고, 알파벳 자체가 원래 불리던 이름인 1446년에 발표된 『훈민정음』(『훈민정음 언해』)이라는 문서에 기술되어 있다.[10] 『훈민정음』의 발표일인 10월 9일은 대한민국의 한글날이 되었다. 북한의 해당 기념일인 조선글날은 1월 15일이다.
1446년에 발표되어 『훈민정음 해례』(『훈민정음』 해설 및 예시)라는 제목이 붙은 또 다른 문서는 1940년에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자음의 디자인이 조음 음성학에 기반하고, 모음의 디자인은 음양과 모음 조화의 원리에 기반한다고 설명한다.[17] 한글 창제 이후 하층민이나 일반 백성들은 문해력을 갖게 될 기회를 얻었다. 상류층과 문예가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한국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규 교육 없이도 독립적으로 한글을 익혔다.[18]
한글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도 읽고 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19] 『훈민정음 해례』에 따르면, 세종은 자국민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보다 편리하게 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전통적인 한자의 형태뿐만 아니라 서예에서 획의 두께, 획 수, 획 순서와 같은 요소들이 매우 복잡하여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글에 대한 유명한 속담으로는 "똑똑한 사람은 아침 전에 익히고, 바보라도 열흘이면 익힌다"는 말이 있다.[20][21]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르므로, 그 글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쉽게 배우고 날마다 편리하게 쓰게 하고자 함이다.
한반도에서는 15세기 중반까지, 고유 언어인 한국어를 표기할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 지식층은 한자를 사용했다. 향찰과 이두 등 한자를 빌린 표기법으로 단편적이고 암시적으로 표기해 왔다.
조선 제4대 왕 세종은 조선 고유의 문자 창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초창기부터 사대주의적 보수파의 반발을 받았다. 세종이 설립한 자문 기관인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상소문에서 “옛날부터 중국의 여러 지역은 풍토가 달라도 방언에 기반하여 문자를 만든 예가 없다. 다만 몽골(파스파 문자), 서하(서하 문자), 여진(여진 문자), 일본(가나), 티베트(티베트 문자)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적(야만인·미개인)의 짓이며, 말할 가치가 없다.”, “한자(중국 문자)가 유일한 문자이며, 민족 고유의 문자는 있을 수 없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러한 반대를 “이는 문자가 아니다(중국 문화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훈민정음(한자 소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기호)에 불과하다”라고 밀어붙이고[87], 정인지 등 집현전 내 신진 학자들에게 명하여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반포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박진호에 따르면, 세종이 혼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2년) 12월 조에 “한글을 창제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글이라는 단어의 문헌상 최초 등장이지만, 만약 집현전 학자들의 협력 하에 한글을 창제했다면 그 과정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어야 한다. 박진호는 반대파 신하들이 있는 것을 우려하여 세종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이후 한글로 쓰인 서적 편찬 등에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기록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훈민정음의 모음과 자음을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창제했다고 적혀 있다.
또한 동서의 서문에는 "총명한 자는 아침 안에,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충분히 배우고 익힐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창제 이유 ===
1443년 음력 12월, 세종은 한국어가 중국어와 달라 한자로 제대로 표기하기 어렵고, 고유 글자가 없어 문자 생활에 불편함이 크다는 점을 인식했다.[136]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137]
세종대왕이 직접 쓴 《훈민정음 해례본》 예의편 첫머리에는 이러한 창제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矣。lzh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르므로, 그 글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쉽게 배우고 날마다 편리하게 쓰게 하고자 함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사대주의적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1444년 상소문에서 몽골(파스파 문자), 서하(서하 문자), 여진(여진 문자), 일본(가나), 티베트(티베트 문자)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적(야만인·미개인)의 짓이며, 한자(중국 문자)가 유일한 문자이며, 민족 고유의 문자는 있을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러한 반대를 “이는 문자가 아니다(중국 문화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훈민정음(한자 소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기호)에 불과하다”라고 일축하고[87], 정인지 등 집현전 내 신진 학자들에게 명하여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반포했다.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한글 창제를 명령했다는 널리 퍼진 인식과 달리, 『세종실록』과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 서문과 같은 당대 기록들은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했음을 강조한다.[16]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박진호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2년) 12월 조에 “한글을 창제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집현전 학자들의 협력 하에 한글을 창제했다면 그 과정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진호는 반대파 신하들이 있는 것을 우려하여 세종대왕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이후 한글로 쓰인 서적 편찬 등에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했다고 추정한다.
한글 창제 이후 하층민이나 일반 백성들은 문해력을 갖게 될 기회를 얻었다. 상류층과 문예가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한국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규 교육 없이도 독립적으로 한글을 익혔다.[18]
=== 신하들의 반대 ===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신석조, 김문, 하위지, 송처검, 조근, 정창손과 함께 1444년 2월 20일에 연명상소(갑자상소)를[140] 올려 한글 반포를 반대했다.[141] 이들은 새로운 문자를 제작, 보급하는 일은 사대주의의 관례에 어긋나는 일로 오랑캐의 소행에 해당하며, 한글이란 시골촌부나 사용할만한 상스러운 문자이고, 이두와는 달리 출세에만 급급한 벼슬아치들을 양산하여 학문의 발전을 쇠퇴시킬것이고, 한글사용은 가벼운 재주를 부리는 것과 같아 정치에도 무익하고, 억울한 옥살이의 원인은 문맹(文盲)이 아니라 관리의 공정성에 있으며, 새로운 문자사용이란 널리 의논하고 매우 신중하고 거듭 신중해야 하는일이라 등등의 주장을 펼치며 반대했다.[141]
이에 대해 세종은 이두와 한글의 사용은 모두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반박했고, 언어학와 음운학을 거론하며 이들의 주장을 모두 물리쳤다. 그러나 세종의 반박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최만리를 비롯한 연명상소를 올린 7명이 지속적인 반대가 극심하자 세종은 정창손을 파직시킴[142]과 동시에 7명 전원을 의금부에 하루동안 가두어 버렸다.[141] 하옥된 7명은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최만리는 이내 벼슬에서 물러난후 낙향하였다.[143] 다만 김문은 석방된후 곤장 100대를 맞았는데[144] 이는 한글 반포에 대해 찬성하던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반대했음에 대한 처결이었다.
정창손이 파직된 것은 세종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다. 세종은 지난 1428년에 발생하여 충격을 준 패륜범죄[145]의 재발을 막고자,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한글을 보급한후, 과거에 편찬했던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 베포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고 계몽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창손은 과거에 <삼강행실도>를 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없었음을 거론하며, 삼강행실(三綱行實)의 실천 여부는 개인의 성품과 자질에 따른 문제이지 쉬운 문자로 쓴 책을 보급한다하여 달라질게 없다고 하며 한글 사용을 반대했다.[146] 정창손의 발언은 유교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147] 격노한 세종은 파직을 명했던 것이다.[141]
야비하고 상스러운 문자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반대하는 것에 화가난 세종은 평소답지 않게 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강하게 대처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강경책 덕분인지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한글에 대해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으며[148] 1446년 정식 반포 이후 단 한 건의 반대 상소도 남아 있지 않다.[149]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과 달리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한글에 대한 자부심과 문자개혁 정책의 추진이 널리 백성들을 두루 이롭게 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150] 따라서 대소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하옥해가면서까지 자신이 창제한 새로운 글자를 더욱 연구하며 한글반포 작업을 추진하였다.
당시 문인들은 한자만이 정당한 문자 체계라고 믿었으며, 한글의 유통을 중화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자 자신의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14][22][23] 세종이 설립한 자문 기관인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상소문에서 “옛날부터 중국의 여러 지역은 풍토가 달라도 방언에 기반하여 문자를 만든 예가 없다. 다만 몽골(파스파 문자), 서하(서하 문자), 여진(여진 문자), 일본(가나), 티베트(티베트 문자)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적(야만인·미개인)의 짓이며, 말할 가치가 없다.”, “한자(중국 문자)가 유일한 문자이며, 민족 고유의 문자는 있을 수 없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러한 반대를 “이는 문자가 아니다(중국 문화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훈민정음(한자 소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기호)에 불과하다”라고 밀어붙였다[87]
=== 한글 반포 ===
1446년 9월에 한글이 반포되었다.[151]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약 3년간 실제 궁중에서 직접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듬어 왔다.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간하도록 했으며, 1444년 2월에 최항과 박팽년에게 <고금운회거요>의 한글 번역을 명했다.[152] 반포하기도 전에 <고금운회거요> 번역을 시켰다는 것은 이미 '한글'의 완성도는 매우 높았으며 새 문자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는 뜻으로 보인다.[153]
1445년(세종 27) 4월에는 한글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하였다. 목판본 10권 5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어진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 된다.
한글을 반포한 후에는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한글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였고,[154][155]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한글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156] 사서(四書)를 한글로 번역하게 했고[157]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한글로 작성토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한글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한글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158]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한글 보급 정책에 따라 한글은 점차 퍼져 나갔다.[159]
조선 제4대 왕 세종은 조선 고유의 문자 창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초창기부터 사대주의적 보수파의 반발을 받았다. 세종이 설립한 자문 기관인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상소문에서 “옛날부터 중국의 여러 지역은 풍토가 달라도 방언에 기반하여 문자를 만든 예가 없다. 다만 몽골(파스파 문자), 서하(서하 문자), 여진(여진 문자), 일본(가나), 티베트(티베트 문자)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적(야만인·미개인)의 짓이며, 말할 가치가 없다.”, “한자(중국 문자)가 유일한 문자이며, 민족 고유의 문자는 있을 수 없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러한 반대를 “이는 문자가 아니다(중국 문화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훈민정음(한자 소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기호)에 불과하다”라고 밀어붙이고[87], 정인지 등 집현전 내 신진 학자들에게 명하여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반포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한글은 먼저, 창제자인 세종 대에 국가적인 출판 사업에서 활용되었다. 한글 창제 직후 1447년에는 왕조를 찬양하는 송가 『용비어천가』, 석가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세종이 직접 지은 시가집 『월인천강지곡』, 세종의 명에 따라 수양대군이 편찬한 석가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이 잇달아 간행되었고, 이어 1448년에는 운서 『동국정운』을 간행하였다.
=== 중국의 반응 ===
1539년 중종 때 주양우(朱良佑)라는 자가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준 사실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았다는 것으로[160] 보아 당대에는 새 문자 창제 사실을 중국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161] 동국정운(1448)과 홍무정운역훈(1455)을 편찬하는 등 여러 사업을 진행했지만 세종은 한글 반포식을 거행하지 않았으며, 훗날 중국에 보내는 세종의 부고에도 훈민정음을 세종의 업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161] 새로운 문자 창제란 '문화적 독립'을 의미하는데,[162] 이는 약소국이었던 조선이 당대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인 중국을 무시하고 한자 중심 세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어 조심스럽게 진행했던 것이다.
중국(명나라)은 조선의 새로운 문자 창제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161]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명나라의 내정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1368년에 태조 주원장이 명(明)을 건국한 이래 3대 영락제에 이르러 국력이 크게 융성하였으나 1435년에 정통제가 9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후 점차 침체되기 시작했다.[163] 선대의 충신들이 사망하고 1442년에 섭정인 성효소황후 마저 죽자 환관 왕진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했다.[164] 1449년에 정통제가 직접 참전했다가 황제가 적국에 생포당하는 중국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65] 정통제는 생환 후 태상황이 되어 유폐된 채 지내다가[165] 1457년에 쿠데타(탈문의 변)를 통해 복위하는 등에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으며 이후의 황제들도 치세가 그리 순탄치만은 못했다.[163]
=== 자모 낱자 명칭 ===
훈민정음 제정 당시 자모 낱자의 명칭은 기록되지 않았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166] 처음으로 자모 명칭을 언급한 문헌은 1527년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이다.[167]
이 책 머리말에 〈언문자모(諺文字母)〉라는 제목 아래 한글 자모에 관한 설명과 자모 운용 원리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한글 자모 낱자의 명칭을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표기했고, 자모 낱자의 순서도 기록했다. 자모 낱자의 명칭은 각 글자 밑에 '기역 其役, 니은 尼隱, 디귿 池○末, 리을 梨乙, 미음 眉音, 비읍 非邑, 시옷 時○衣, 이응 異凝”, “키 ○箕, 티 治, 피 皮, 지 之, 치 齒, 而, 이 伊, 히 屎”, “아 阿, 야 也, 어 於, 여 余, 오 吾, 요 要, 우 牛, 유 由, 으 應 不用終聲, 이 伊 只用中聲, 思 不用初聲'과 같이 표기했다.[168]
최세진이 자모 낱자의 명칭과 자모의 순서를 처음으로 정한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정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에는 한글 자모 낱자가 모두 27개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ㆆ(여린히읗)'의 사용이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에 기록된 자모 낱자 명칭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169]
한국 알파벳의 글자 이름은 1527년 최세진에 의해 명명되었다. 대한민국은 최세진의 전통적인 이름을 사용하는데, 대부분은 '글자' + '이' + '으' + '글자' 형식을 따른다. 최세진은 비슷한 발음의 한자를 나열하여 이름을 설명했다. 그러나 euk/윽한국어, eut/읃한국어, eut/읏한국어과 같은 음절은 한자에 없었기 때문에, 최세진은 giyeok/기역한국어, digeut/디귿한국어, siot/시옷한국어과 같은 수정된 이름을 부여했다. 이는 규칙에 맞지 않는 한자(기역의 경우) 또는 한국어 고유 음절(디귿과 시옷의 경우)을 사용한 것이다.[56]
원래 최세진은 j/ㅈ한국어, ch/ㅊ한국어, k/ㅋ한국어, t/ㅌ한국어, p/ㅍ한국어, h/ㅎ한국어에 대해 '지', '치', '키', '티', '피', '히'와 같은 불규칙적인 한 음절 이름을 부여했는데, 이는 훈민정음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종성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3년 새로운 표기법이 확립되면서 모든 자음이 종성으로 사용될 수 있게 되자, 이름이 현재의 형태로 바뀌었다.
아래 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한국어 알파벳 자음 명칭을 보여준다. 자음은 북한식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자음 명칭은 맥큐언-라이샤워 표기법으로 로마자 표기되었다. 된소리는 '된'(toen, '딱딱한')이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자음 | ㄱ | ㄴ | ㄷ | ㄹ | ㅁ | ㅂ | ㅅ | ㅈ | ㅊ | ㅋ | ㅌ | ㅍ | ㅎ | ㄲ | ㄸ | ㅃ | ㅆ | ㅉ | 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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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기윽 | 니은 | 디읃 | 리을 | 미음 | 비읍 | 시읏 | 지읒 | 치읓 | 키읔 | 티읕 | 피읖 | 히읗 | 된기윽 | 된디읃 | 된비읍 | 된시읏 | 된지읒 | 이응 |
McCR | kiŭk | niŭn | diŭt | riŭl | miŭm | piŭp | siŭt | jiŭt | chiŭt | ḳiŭk | ṭiŭt | p̣iŭp | hiŭt | 'toengiŭk'' | toendiŭt | toenbiŭp | toensiŭt | toenjiŭt | ' iŭng'' |
북한에서는 자음을 가리키는 또 다른 방법으로 '글자' + 'ㅡ'(ŭ)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g/ㄱ한국어에 대해서는 그(gŭ, geu/그한국어)라고 하고, ss/ㅆ한국어에 대해서는 쓰(ssŭ, sseu/쓰한국어)라고 한다.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어 알파벳 모음의 명칭은 각 모음의 발음과 동일하다.
아래 표는 한국어 알파벳 자음의 한국어 이름을 보여준다. 글자들은 한국어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글자 이름은 한국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인 개정 로마자 표기법 체계로 표기되어 있다. 된소리는 '쌍'이라는 뜻의 ssang/쌍한국어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어 있다.
{| class="wikitable"
!자음
|g/ㄱ한국어
|kk/ㄲ한국어
|n/ㄴ한국어
|d/ㄷ한국어
|tt/ㄸ한국어
|r/ㄹ한국어
|m/ㅁ한국어
|b/ㅂ한국어
|pp/ㅃ한국어
|s/ㅅ한국어
|ss/ㅆ한국어
|ng/ㅇ한국어
|j/ㅈ한국어
|jj/ㅉ한국어
|ch/ㅊ한국어
2. 1. 창제 이전
한국은 삼국 시대부터 이두와 구결을 써 왔다.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하다 해도 한자 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 생활의 불편은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향찰도 사용되었으나, 일반 백성이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컸다.2. 2. 한글 창제
한국인들은 주로 한글보다 수백 년 앞선 토착 음성 표기 체계인 이두체, 향찰, 구결 및 각필과 함께 한문을 사용하여 글을 썼다.[11][12][13] 그러나 한국어와 한자어 습득의 어려움과 사용되는 많은 한자 수 때문에 많은 무학의 하층민들은 문맹이었다.[14] 일반 백성의 문해력 향상을 위해 조선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세종대왕은 직접 새로운 알파벳을 창제하고 반포하였다.[14][15]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한글 창제를 명령했다는 널리 퍼진 추측과 달리, 『세종실록』과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 서문과 같은 당대 기록들은 그가 직접 창제했음을 강조한다.[16]이 사업은 1443년 12월과 1444년 1월 사이에 완료되었고, 알파벳 자체가 원래 불리던 이름인 1446년에 발표된 『훈민정음』(『훈민정음 언해』)이라는 문서에 기술되어 있다.[10] 『훈민정음』의 발표일인 10월 9일은 대한민국의 한글날이 되었다. 북한의 해당 기념일인 조선글날은 1월 15일이다.
1446년에 발표되어 『훈민정음 해례』(『훈민정음』 해설 및 예시)라는 제목이 붙은 또 다른 문서는 1940년에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자음의 디자인이 조음 음성학에 기반하고, 모음의 디자인은 음양과 모음 조화의 원리에 기반한다고 설명한다.[17] 한글 창제 이후 하층민이나 일반 백성들은 문해력을 갖게 될 기회를 얻었다. 상류층과 문예가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한국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규 교육 없이도 독립적으로 한글을 익혔다.[18]
한글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도 읽고 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19] 『훈민정음 해례』에 따르면, 세종은 자국민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보다 편리하게 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전통적인 한자의 형태뿐만 아니라 서예에서 획의 두께, 획 수, 획 순서와 같은 요소들이 매우 복잡하여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글에 대한 유명한 속담으로는 "똑똑한 사람은 아침 전에 익히고, 바보라도 열흘이면 익힌다"는 말이 있다.[20][21]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르므로, 그 글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쉽게 배우고 날마다 편리하게 쓰게 하고자 함이다.
한반도에서는 15세기 중반까지, 고유 언어인 한국어를 표기할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 지식층은 한자를 사용했다. 향찰과 이두 등 한자를 빌린 표기법으로 단편적이고 암시적으로 표기해 왔다.
조선 제4대 왕 세종은 조선 고유의 문자 창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초창기부터 사대주의적 보수파의 반발을 받았다. 세종이 설립한 자문 기관인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상소문에서 “옛날부터 중국의 여러 지역은 풍토가 달라도 방언에 기반하여 문자를 만든 예가 없다. 다만 몽골(파스파 문자), 서하(서하 문자), 여진(여진 문자), 일본(가나), 티베트(티베트 문자)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적(야만인·미개인)의 짓이며, 말할 가치가 없다.”, “한자(중국 문자)가 유일한 문자이며, 민족 고유의 문자는 있을 수 없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러한 반대를 “이는 문자가 아니다(중국 문화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훈민정음(한자 소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기호)에 불과하다”라고 밀어붙이고[87], 정인지 등 집현전 내 신진 학자들에게 명하여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반포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박진호에 따르면, 세종이 혼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2년) 12월 조에 “한글을 창제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글이라는 단어의 문헌상 최초 등장이지만, 만약 집현전 학자들의 협력 하에 한글을 창제했다면 그 과정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어야 한다. 박진호는 반대파 신하들이 있는 것을 우려하여 세종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이후 한글로 쓰인 서적 편찬 등에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기록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훈민정음의 모음과 자음을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창제했다고 적혀 있다.
또한 동서의 서문에는 "총명한 자는 아침 안에,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충분히 배우고 익힐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2. 1. 창제 이유
1443년 음력 12월, 세종은 한국어가 중국어와 달라 한자로 제대로 표기하기 어렵고, 고유 글자가 없어 문자 생활에 불편함이 크다는 점을 인식했다.[136]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137]세종대왕이 직접 쓴 《훈민정음 해례본》 예의편 첫머리에는 이러한 창제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矣。lzh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르므로, 그 글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쉽게 배우고 날마다 편리하게 쓰게 하고자 함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사대주의적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1444년 상소문에서 몽골(파스파 문자), 서하(서하 문자), 여진(여진 문자), 일본(가나), 티베트(티베트 문자)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적(야만인·미개인)의 짓이며, 한자(중국 문자)가 유일한 문자이며, 민족 고유의 문자는 있을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러한 반대를 “이는 문자가 아니다(중국 문화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훈민정음(한자 소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기호)에 불과하다”라고 일축하고[87], 정인지 등 집현전 내 신진 학자들에게 명하여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반포했다.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한글 창제를 명령했다는 널리 퍼진 인식과 달리, 『세종실록』과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 서문과 같은 당대 기록들은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했음을 강조한다.[16]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박진호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2년) 12월 조에 “한글을 창제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집현전 학자들의 협력 하에 한글을 창제했다면 그 과정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진호는 반대파 신하들이 있는 것을 우려하여 세종대왕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이후 한글로 쓰인 서적 편찬 등에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했다고 추정한다。
한글 창제 이후 하층민이나 일반 백성들은 문해력을 갖게 될 기회를 얻었다. 상류층과 문예가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한국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규 교육 없이도 독립적으로 한글을 익혔다.[18]
2. 2. 2. 신하들의 반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신석조, 김문, 하위지, 송처검, 조근, 정창손과 함께 1444년 2월 20일에 연명상소(갑자상소)를[140] 올려 한글 반포를 반대했다.[141] 이들은 새로운 문자를 제작, 보급하는 일은 사대주의의 관례에 어긋나는 일로 오랑캐의 소행에 해당하며, 한글이란 시골촌부나 사용할만한 상스러운 문자이고, 이두와는 달리 출세에만 급급한 벼슬아치들을 양산하여 학문의 발전을 쇠퇴시킬것이고, 한글사용은 가벼운 재주를 부리는 것과 같아 정치에도 무익하고, 억울한 옥살이의 원인은 문맹(文盲)이 아니라 관리의 공정성에 있으며, 새로운 문자사용이란 널리 의논하고 매우 신중하고 거듭 신중해야 하는일이라 등등의 주장을 펼치며 반대했다.[141]이에 대해 세종은 이두와 한글의 사용은 모두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반박했고, 언어학와 음운학을 거론하며 이들의 주장을 모두 물리쳤다. 그러나 세종의 반박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최만리를 비롯한 연명상소를 올린 7명이 지속적인 반대가 극심하자 세종은 정창손을 파직시킴[142]과 동시에 7명 전원을 의금부에 하루동안 가두어 버렸다.[141] 하옥된 7명은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최만리는 이내 벼슬에서 물러난후 낙향하였다.[143] 다만 김문은 석방된후 곤장 100대를 맞았는데[144] 이는 한글 반포에 대해 찬성하던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반대했음에 대한 처결이었다.
정창손이 파직된 것은 세종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다. 세종은 지난 1428년에 발생하여 충격을 준 패륜범죄[145]의 재발을 막고자,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한글을 보급한후, 과거에 편찬했던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 베포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고 계몽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창손은 과거에 <삼강행실도>를 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없었음을 거론하며, 삼강행실(三綱行實)의 실천 여부는 개인의 성품과 자질에 따른 문제이지 쉬운 문자로 쓴 책을 보급한다하여 달라질게 없다고 하며 한글 사용을 반대했다.[146] 정창손의 발언은 유교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147] 격노한 세종은 파직을 명했던 것이다.[141]
야비하고 상스러운 문자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반대하는 것에 화가난 세종은 평소답지 않게 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강하게 대처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강경책 덕분인지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한글에 대해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으며[148] 1446년 정식 반포 이후 단 한 건의 반대 상소도 남아 있지 않다.[149]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과 달리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한글에 대한 자부심과 문자개혁 정책의 추진이 널리 백성들을 두루 이롭게 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150] 따라서 대소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하옥해가면서까지 자신이 창제한 새로운 글자를 더욱 연구하며 한글반포 작업을 추진하였다.
당시 문인들은 한자만이 정당한 문자 체계라고 믿었으며, 한글의 유통을 중화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자 자신의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14][22][23] 세종이 설립한 자문 기관인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상소문에서 “옛날부터 중국의 여러 지역은 풍토가 달라도 방언에 기반하여 문자를 만든 예가 없다. 다만 몽골(파스파 문자), 서하(서하 문자), 여진(여진 문자), 일본(가나), 티베트(티베트 문자)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적(야만인·미개인)의 짓이며, 말할 가치가 없다.”, “한자(중국 문자)가 유일한 문자이며, 민족 고유의 문자는 있을 수 없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러한 반대를 “이는 문자가 아니다(중국 문화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훈민정음(한자 소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기호)에 불과하다”라고 밀어붙였다[87]
2. 2. 3. 한글 반포
1446년 9월에 한글이 반포되었다.[151]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약 3년간 실제 궁중에서 직접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듬어 왔다.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간하도록 했으며, 1444년 2월에 최항과 박팽년에게 <고금운회거요>의 한글 번역을 명했다.[152] 반포하기도 전에 <고금운회거요> 번역을 시켰다는 것은 이미 '한글'의 완성도는 매우 높았으며 새 문자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는 뜻으로 보인다.[153]1445년(세종 27) 4월에는 한글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하였다. 목판본 10권 5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어진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 된다.
한글을 반포한 후에는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한글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였고,[154][155]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한글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156] 사서(四書)를 한글로 번역하게 했고[157]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한글로 작성토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한글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한글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158]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한글 보급 정책에 따라 한글은 점차 퍼져 나갔다.[159]
조선 제4대 왕 세종은 조선 고유의 문자 창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초창기부터 사대주의적 보수파의 반발을 받았다. 세종이 설립한 자문 기관인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상소문에서 “옛날부터 중국의 여러 지역은 풍토가 달라도 방언에 기반하여 문자를 만든 예가 없다. 다만 몽골(파스파 문자), 서하(서하 문자), 여진(여진 문자), 일본(가나), 티베트(티베트 문자)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적(야만인·미개인)의 짓이며, 말할 가치가 없다.”, “한자(중국 문자)가 유일한 문자이며, 민족 고유의 문자는 있을 수 없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러한 반대를 “이는 문자가 아니다(중국 문화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훈민정음(한자 소양이 없는 사람들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기호)에 불과하다”라고 밀어붙이고[87], 정인지 등 집현전 내 신진 학자들에게 명하여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반포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한글은 먼저, 창제자인 세종 대에 국가적인 출판 사업에서 활용되었다. 한글 창제 직후 1447년에는 왕조를 찬양하는 송가 『용비어천가』, 석가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세종이 직접 지은 시가집 『월인천강지곡』, 세종의 명에 따라 수양대군이 편찬한 석가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이 잇달아 간행되었고, 이어 1448년에는 운서 『동국정운』을 간행하였다.
2. 2. 4. 중국의 반응
1539년 중종 때 주양우(朱良佑)라는 자가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준 사실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았다는 것으로[160] 보아 당대에는 새 문자 창제 사실을 중국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161] 동국정운(1448)과 홍무정운역훈(1455)을 편찬하는 등 여러 사업을 진행했지만 세종은 한글 반포식을 거행하지 않았으며, 훗날 중국에 보내는 세종의 부고에도 훈민정음을 세종의 업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161] 새로운 문자 창제란 '문화적 독립'을 의미하는데,[162] 이는 약소국이었던 조선이 당대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인 중국을 무시하고 한자 중심 세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어 조심스럽게 진행했던 것이다.중국(명나라)은 조선의 새로운 문자 창제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161]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명나라의 내정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1368년에 태조 주원장이 명(明)을 건국한 이래 3대 영락제에 이르러 국력이 크게 융성하였으나 1435년에 정통제가 9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후 점차 침체되기 시작했다.[163] 선대의 충신들이 사망하고 1442년에 섭정인 성효소황후 마저 죽자 환관 왕진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했다.[164] 1449년에 정통제가 직접 참전했다가 황제가 적국에 생포당하는 중국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65] 정통제는 생환 후 태상황이 되어 유폐된 채 지내다가[165] 1457년에 쿠데타(탈문의 변)를 통해 복위하는 등에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으며 이후의 황제들도 치세가 그리 순탄치만은 못했다.[163]
2. 2. 5. 자모 낱자 명칭
훈민정음 제정 당시 자모 낱자의 명칭은 기록되지 않았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166] 처음으로 자모 명칭을 언급한 문헌은 1527년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이다.[167]이 책 머리말에 〈언문자모(諺文字母)〉라는 제목 아래 한글 자모에 관한 설명과 자모 운용 원리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한글 자모 낱자의 명칭을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표기했고, 자모 낱자의 순서도 기록했다. 자모 낱자의 명칭은 각 글자 밑에 '기역 其役, 니은 尼隱, 디귿 池○末, 리을 梨乙, 미음 眉音, 비읍 非邑, 시옷 時○衣, 이응 異凝”, “키 ○箕, 티 治, 피 皮, 지 之, 치 齒, 而, 이 伊, 히 屎”, “아 阿, 야 也, 어 於, 여 余, 오 吾, 요 要, 우 牛, 유 由, 으 應 不用終聲, 이 伊 只用中聲, 思 不用初聲'과 같이 표기했다.[168]
최세진이 자모 낱자의 명칭과 자모의 순서를 처음으로 정한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정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에는 한글 자모 낱자가 모두 27개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ㆆ(여린히읗)'의 사용이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에 기록된 자모 낱자 명칭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169]
한국 알파벳의 글자 이름은 1527년 최세진에 의해 명명되었다. 대한민국은 최세진의 전통적인 이름을 사용하는데, 대부분은 '글자' + '이' + '으' + '글자' 형식을 따른다. 최세진은 비슷한 발음의 한자를 나열하여 이름을 설명했다. 그러나 euk/윽한국어, eut/읃한국어, eut/읏한국어과 같은 음절은 한자에 없었기 때문에, 최세진은 giyeok/기역한국어, digeut/디귿한국어, siot/시옷한국어과 같은 수정된 이름을 부여했다. 이는 규칙에 맞지 않는 한자(기역의 경우) 또는 한국어 고유 음절(디귿과 시옷의 경우)을 사용한 것이다.[56]
원래 최세진은 j/ㅈ한국어, ch/ㅊ한국어, k/ㅋ한국어, t/ㅌ한국어, p/ㅍ한국어, h/ㅎ한국어에 대해 '지', '치', '키', '티', '피', '히'와 같은 불규칙적인 한 음절 이름을 부여했는데, 이는 훈민정음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종성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3년 새로운 표기법이 확립되면서 모든 자음이 종성으로 사용될 수 있게 되자, 이름이 현재의 형태로 바뀌었다.
아래 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한국어 알파벳 자음 명칭을 보여준다. 자음은 북한식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자음 명칭은 맥큐언-라이샤워 표기법으로 로마자 표기되었다. 된소리는 '된'(toen, '딱딱한')이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자음 | ㄱ | ㄴ | ㄷ | ㄹ | ㅁ | ㅂ | ㅅ | ㅈ | ㅊ | ㅋ | ㅌ | ㅍ | ㅎ | ㄲ | ㄸ | ㅃ | ㅆ | ㅉ | 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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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기윽 | 니은 | 디읃 | 리을 | 미음 | 비읍 | 시읏 | 지읒 | 치읓 | 키읔 | 티읕 | 피읖 | 히읗 | 된기윽 | 된디읃 | 된비읍 | 된시읏 | 된지읒 | 이응 |
McCR | kiŭk | niŭn | diŭt | riŭl | miŭm | piŭp | siŭt | jiŭt | chiŭt | ḳiŭk | ṭiŭt | p̣iŭp | hiŭt | 'toengiŭk'' | toendiŭt | toenbiŭp | toensiŭt | toenjiŭt | ' iŭng'' |
북한에서는 자음을 가리키는 또 다른 방법으로 '글자' + 'ㅡ'(ŭ)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g/ㄱ한국어에 대해서는 그(gŭ, geu/그한국어)라고 하고, ss/ㅆ한국어에 대해서는 쓰(ssŭ, sseu/쓰한국어)라고 한다.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어 알파벳 모음의 명칭은 각 모음의 발음과 동일하다.
아래 표는 한국어 알파벳 자음의 한국어 이름을 보여준다. 글자들은 한국어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글자 이름은 한국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인 개정 로마자 표기법 체계로 표기되어 있다. 된소리는 '쌍'이라는 뜻의 ssang/쌍한국어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어 있다.
자음 | g/ㄱ한국어 | kk/ㄲ한국어 | n/ㄴ한국어 | d/ㄷ한국어 | tt/ㄸ한국어 | r/ㄹ한국어 | m/ㅁ한국어 | b/ㅂ한국어 | pp/ㅃ한국어 | s/ㅅ한국어 | ss/ㅆ한국어 | ng/ㅇ한국어 | j/ㅈ한국어 | jj/ㅉ한국어 | ch/ㅊ한국어 | k/ㅋ한국어 | t/ㅌ한국어 | p/ㅍ한국어 | h/ㅎ한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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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 giyeok/기역한국어 | ssanggiyeok/쌍기역한국어 | nieun/니은한국어 | digeut/디귿한국어 | ssangdigeut/쌍디귿한국어 | rieul/리을한국어 | mieum/미음한국어 | bieup/비읍한국어 | ssangbieup/쌍비읍한국어 | siot/시옷한국어 | ssangsiot/쌍시옷한국어 | ieung/이응한국어 | jieut/지읒한국어 | ssangjieut/쌍지읒한국어 | chieut/치읓한국어 | kieuk/키읔한국어 | tieut/티읕한국어 | pieup/피읖한국어 | hieut/히읗한국어 |
이름 (로마자 표기) | gi-yeok | ssang-giyeok | ni-eun | digeut | ssang-digeut | ri-eul | mi-eum | bi-eup | ssang-bi-eup | si-ot (shi-ot) | ssang-si-ot (ssang-shi-ot) | i-eung | ji-eut | ssang-ji-eut | chi-eut | ki-euk | ti-eut | pi-eup | hi-eut |
2. 2. 6. 연산군의 박해
1504년(연산군 10년) 7월, 연산군의 패륜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연산군은 범인을 색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83][184] 이에 7월 20일부터 백성들의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185][186][187] 한글로 구결을 단 책을 불태우고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했으며, 위반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을[188] 적용하여 곤장 100대부터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189] 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이웃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즉 임금의 지시를 위반한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190] 적용하여 곤장 100대를 때리도록 했다.[191][192] 이는 백성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막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같은 해,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낙서가 곳곳에서 발견되자, 연산군은 한글 교육과 학습을 금지하고, 한글 서적을 불태우며 한글을 사용하는 자들을 탄압했다.[89] 이러한 한글 탄압은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억압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조정 안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 한글로 역서를 번역하도록 했으며,[193] 궁인의 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의녀에게 읽도록 하기도 했다.

2. 2. 7. 조선 중기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낙서가 곳곳에서 발견되자, 연산군은 한글 교육과 학습을 금지하고, 한글 서적을 불태우며 한글을 사용하는 자들을 탄압했다.[89] 그럼에도 한글은 궁중과 일부 양반층, 백성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171] 1490년 군관 나신걸이 아내 맹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이며,[90] 199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굴된 이응태의 무덤에서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내의 한글 편지가 발견되었다.[195] 이 편지에는 '둘이서 머리 하얗게 되도록 살다 함께 죽자더니 먼저 가냐. 이 편지를 읽으면 꼭 꿈에 나와 말을 걸어달라’고 적혀 있었다. 이와 같이 백성들이 한글로 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한문에 비해 매우 단순하여 읽고 쓰기가 너무나도 쉬웠던 까닭에 누구나 짧은 시간내에 배우고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지식인 사회로부터 홀대를 받은 한글은 주로 농서나 의서 같은 실용 서적을 번역하거나 불경을 번역, 편찬하는데 한정됐다. 사서삼경 언해본이 나왔지만 한문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백성에게는 여전히 어려웠고 과거 시험을 준비할 여유가 없는 이들이나 자격이 없던 평민들에게는 불필요한 책이었을 뿐이다. 고급 정보를 담은 책은 여전히 한문으로 간행되었다.
2. 3. 근대
16세기 후반에는 가사와 시조 시가 번성하면서 한국어 알파벳(한글)이 부흥기를 맞았다. 17세기에는 한국어 알파벳 소설이 주요 장르가 되었다.[27] 그러나 한글은 오랫동안 표준화된 정서법 없이 사용되어 철자가 매우 불규칙해졌다.[24]
1796년, 네덜란드 학자 이사악 팃싱은 한국어로 쓰인 책을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서적에는 하야시 시헤이(Hayashi Shihei)가 저술한 일본 책 『삼국통람도설』(Sangoku Tsūran Zusetsu)이 포함되어 있었다.[28] 1785년에 출판된 이 책은 조선 왕조[29]와 한국어 알파벳을 서술하고 있다.[30] 1832년, 영국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의 동방번역기금(Oriental Translation Fun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은 팃싱의 프랑스어 번역본의 축약판을 사후에 출판하는 것을 지원했다.[31]
한국 민족주의의 성장, 갑오개혁 추진 세력의 노력, 그리고 서양 선교사들의 학교와 문학에서의 한국어 알파벳 홍보 덕분에,[32] 1894년에 처음으로 한글이 공식 문서에 채택되었다.[25] 1895년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국어 알파벳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Tongnip sinmun)은 한국어와 영어로 인쇄된 최초의 신문이었다.[33]
공문서의 한글 사용은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4년 11월에 공포된 칙령 1호 공문식에서 공문에 국문(한글)을 사용하도록 규정한 데서 시작되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관보)인 『한성순보』(1883년)의 속편인 『한성주보』(1886년 창간)는 한자 혼합문(일명 “국한혼용문”)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내용에 따라 한문 또는 한글만으로 된 조선 문으로 기술되었다.
『한성주보』의 특기할 만한 점은 최초의 한글 신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한문'''”이라 불리는 문체가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국식 “국한문 혼용문”의 원형은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국한문은 한문의 소양을 필요로 하는 문체였기 때문에 일반에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되는 신문이었다. 이는 분철(分かち書き)을 처음 도입한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한글 분철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스코틀랜드인 존 로스(John Ross, 1842 - 1915)이다.
1890년대 후기에 조선을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는 당시 언문(諺文, En-mun)이라 불렸던 한글에 대해, 아직 지식층으로부터는 멸시되고 있지만, 1895년 1월에 한문 언문 혼합문이 관보에 나타난 이후, 국왕의 독립 선서문을 비롯한 일부를 제외한 공식 문서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고, 언문으로 된 서적도 점차 늘고 있다고 서술하며[98], 앞으로 언문으로 된 교과서와 교사의 양성이 기다려진다고 언급했다.[99] 또한 상류층 여성은 언문을 읽을 수 있지만, 여성의 문해율은 매우 낮아 1000명 중 2명 정도일 것이라고 하면서[100], 한강변에서 만난 하층 계급 남성들의 상당수는 언문을 읽을 줄 안다고 말하고 있다.[101]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조선반도에 건너가 1906년 초대 한국통감에 취임했다. 이상적으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우선 “학교 교육의 충실”을 최우선으로 실시했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행에서 500만 엔을 융자받아 그중 50만 엔을 교육 진흥에 사용했다.[102] 그에 따라 1906년에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을 출판했다. 또한 최광옥의 『대한문전』과 유길준의 『대한문전』(최광옥의 『대한문전』과 같은 제목), 1909년에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주시경의 『국어문법』 등이 출판되었다.
==== 띄어쓰기 도입 ====
한글은 창제 이래 약 400여 년이 넘도록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한글에 띄어쓰기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이다.[197] 그는 19세기 말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한국인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후 한국어 학습 교재인 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영어을 1877년에 펴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한글 띄어쓰기를 적용하였다.[198] 이는 영어의 띄어쓰기가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글 띄어쓰기는 대중화되지 못했다.
이후 배재학당 교수로 활동하던 미국 출신 언어학자이자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함에 따라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 한글판에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199] 아울러 이 시기에 '마침표'와 '쉼표'도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06년 대한국민교육회가 발간한 <초등소학>에는 단어와 조사들을 모두 띄어 쓰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의 어문규정이 하나씩 정립되기 시작했다.
==== 국문 연구소 ====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한글이 공식 문서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한글 표기법에 대한 연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202]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한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 연구소가 설치되었다.[204] 1506년 중종때 언문청이 폐지된 이후로는[205] 처음으로 한글을 연구하는 국가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206][207] 국문 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 및 어윤적, 이종일, 이억, 윤돈구, 송기용, 유필근, 지석영, 이민응의 8위원 연구안으로 완결되었다.
==== 국어 연구 활동 ====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1910년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된다.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31일 주시경 선생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울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였다.[208]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며 국어라는 말이 일본어를 뜻하게 되면서 1911년 9월3일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209] 1913년 3월 23일에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1년 12월3일 ‘조선어연구회’로 다시 변경하였다.[210] 그동안 많은 강연, 학술대회를 연 바, 1926년에 한글날을 제정하였고 1927년에는 동인지 ‘한글’을 창간하였다.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활동하며 학회지 ‘한글’ 창간(1932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년), 표준말 사정(1936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40년)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중에 1942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국어연구가 중단되는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조선반도에 건너가 1906년 초대 한국통감에 취임했다. 이상적으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우선 “학교 교육의 충실”을 최우선으로 실시했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행에서 500만 엔을 융자받아 그중 50만 엔을 교육 진흥에 사용했다.[102] 그에 따라 1906년에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을 출판했다. 또한 최광옥의 『대한문전』과 유길준의 『대한문전』(최광옥의 『대한문전』과 같은 제목), 1909년에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주시경의 『국어문법』 등이 출판되었다.
==== 한글 보급 운동 ====
한일강제합방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실시하였고, 3·1 운동 이후에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으나, 실상은 민족말살과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요하고 한국어 교육을 축소하는 정책을 펼쳤다.[211] 이러한 일제의 차별 교육 정책으로 인해 1930년 무렵 문맹률은 약 70%에 달했다.[211] 민족 지도자들은 이러한 높은 문맹률이 민족의 동질성과 일체감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보급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212]
언론사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였다. 동아일보는 1931년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여 대학생들이 지방에서 한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213] 조선어학회 또한 전국 순회 조선어 강습회를 개최하여 한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보급운동이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 운동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1934년에 이 운동을 강제로 금지시켰다.[211] 더 나아가 1930년대 말부터는 민족말살통치를 실시하며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우리말 사용을 탄압하였다.[214]
일본은 문화 동화와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1938년에 학교와 관공서에서 한국어를 금지하고, 1941년에는 초등 교육에서 한국어 과정을 제외했다.[35][36]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황민화 정책으로 한국어만의 교육은 폐지되었고,[105]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국어(※일본어)를 흔히 사용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학교 당국과 연락하여 엄중히 처벌한다"는 일본어 보급 방침이 시행되었다.[106]
==== 해례본의 발견 ====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훈민정음 해례본'은 기록에만 존재할 뿐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았었는데, 1940년 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다.[215] 이 책을 전형필이 큰 기와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1만원을 지불하여 입수 후 보관하였다.[216] 광복 후 전형필은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학계에 알렸고 영인본을 제작·배포하여 책의 내용을 공개하였다.[217]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 창제 원리와 기원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 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학설들이 난무하며 독창성이 부정당했다.[218] 그러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조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분명히 밝혀졌다.[218] 또한 한글의 우수성, 독창성을 올바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근거 자료가 되고 있다.
2. 3. 1. 띄어쓰기 도입
한글은 창제 이래 약 400여 년이 넘도록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한글에 띄어쓰기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이다.[197] 그는 19세기 말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한국인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후 한국어 학습 교재인 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영어을 1877년에 펴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한글 띄어쓰기를 적용하였다.[198] 이는 영어의 띄어쓰기가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글 띄어쓰기는 대중화되지 못했다.이후 배재학당 교수로 활동하던 미국 출신 언어학자이자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함에 따라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 한글판에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199] 아울러 이 시기에 '마침표'와 '쉼표'도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06년 대한국민교육회가 발간한 <초등소학>에는 단어와 조사들을 모두 띄어 쓰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의 어문규정이 하나씩 정립되기 시작했다.
2. 3. 2. 국문 연구소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한글이 공식 문서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한글 표기법에 대한 연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202]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한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 연구소가 설치되었다.[204] 1506년 중종때 언문청이 폐지된 이후로는[205] 처음으로 한글을 연구하는 국가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206][207] 국문 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 및 어윤적, 이종일, 이억, 윤돈구, 송기용, 유필근, 지석영, 이민응의 8위원 연구안으로 완결되었다.2. 3. 3. 국어 연구 활동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1910년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된다.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31일 주시경 선생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울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였다.[208]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며 국어라는 말이 일본어를 뜻하게 되면서 1911년 9월3일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209] 1913년 3월 23일에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1년 12월3일 ‘조선어연구회’로 다시 변경하였다.[210] 그동안 많은 강연, 학술대회를 연 바, 1926년에 한글날을 제정하였고 1927년에는 동인지 ‘한글’을 창간하였다.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활동하며 학회지 ‘한글’ 창간(1932),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표준말 사정(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40)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중에 1942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국어연구가 중단되는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조선반도에 건너가 1906년 초대 한국통감에 취임했다. 이상적으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우선 “학교 교육의 충실”을 최우선으로 실시했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행에서 500만 엔을 융자받아 그중 50만 엔을 교육 진흥에 사용했다.[102] 그에 따라 1906년에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을 출판했다. 또한 최광옥의 『대한문전』과 유길준의 『대한문전』(최광옥의 『대한문전』과 같은 제목), 1909년에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주시경의 『국어문법』 등이 출판되었다.
2. 3. 4. 한글 보급 운동
한일강제합방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실시하였고, 3·1 운동 이후에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으나, 실상은 민족말살과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요하고 한국어 교육을 축소하는 정책을 펼쳤다.[211] 이러한 일제의 차별 교육 정책으로 인해 1930년 무렵 문맹률은 약 70%에 달했다.[211] 민족 지도자들은 이러한 높은 문맹률이 민족의 동질성과 일체감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보급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212]언론사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였다. 동아일보는 1931년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여 대학생들이 지방에서 한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213] 조선어학회 또한 전국 순회 조선어 강습회를 개최하여 한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보급운동이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 운동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1934년에 이 운동을 강제로 금지시켰다.[211] 더 나아가 1930년대 말부터는 민족말살통치를 실시하며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우리말 사용을 탄압하였다.[214]
일본은 문화 동화와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1938년에 학교와 관공서에서 한국어를 금지하고, 1941년에는 초등 교육에서 한국어 과정을 제외했다.[35][36]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황민화 정책으로 한국어만의 교육은 폐지되었고,[105]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국어(※일본어)를 흔히 사용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학교 당국과 연락하여 엄중히 처벌한다"는 일본어 보급 방침이 시행되었다.[106]
2. 3. 5. 해례본의 발견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훈민정음 해례본'은 기록에만 존재할 뿐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았었는데, 1940년 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다.[215] 이 책을 전형필이 큰 기와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1만원을 지불하여 입수 후 보관하였다.[216] 광복 후 전형필은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학계에 알렸고 영인본을 제작·배포하여 책의 내용을 공개하였다.[217]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 창제 원리와 기원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 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학설들이 난무하며 독창성이 부정당했다.[218] 그러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조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분명히 밝혀졌다.[218] 또한 한글의 우수성, 독창성을 올바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근거 자료가 되고 있다.
2. 4. 현대
현대 한국어 표기법은 1946년, 일제강점기로부터의 대한민국의 독립 직후에 확정되어 발표되었다. 1948년, 북한은 새로운 글자들을 추가하여 표기를 완벽하게 형태음운론적으로 만들려고 시도했고, 1953년에는 대한민국의 이승만이 1921년 식민지 시대의 표기법으로 회귀하여 표기법을 단순화하려 했지만, 두 개혁 모두 몇 년 후에 폐기되었다.[24]북한과 남한 모두 한글 또는 한글 혼용을 공식적인 문자 체계로 사용해 왔으며, 특히 북한에서 한자 사용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197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정부의 개입으로 인해 상업적 또는 비공식적인 글쓰기에서 한자의 사용이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한국 신문에서는 한자를 약어나 동음이의어 구별에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까지 한국의 역사적 문서, 역사, 문학 및 기록은 주로 한문을 사용하여 한자를 주요 문자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특히 학계에서는 한국의 고문헌을 해석하고 연구하거나 인문학 분야의 학술 논문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여전히 중요하다.[37]
한자에 대한 높은 숙련도는 한자어의 어원을 이해하고 한국어 어휘를 넓히는 데에도 유용하다.[37] 194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조선로동당이 한글을 유일한 문자 체계로 채택하고 한자 사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는 김일성의 강력한 민족주의 정책과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38]
2. 4. 1. 한글학회의 주요활동
조선어학회는 광복 후 활동을 재개하여 1949년 9월 25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글학회는 초·중등 교과서 편찬(1945), 훈민정음 원본 영인(1946), 세종 중등 국어교사 양성소 설치(1948) 등의 사업을 진행하였다.[219]이후 큰 사전 편찬(1957), 한글 타자기 통일 글자판 발표(1962), 쉬운말 사전(1967), 월간지 ‘한글 새소식’ 창간(1972), 우리말의 로마자 적기 발표(1984), 제1회 우리 말글 연수회(1985), 한국지명총람 편찬(1986), 문학한글 창간(1987), 한힌샘 주시경 연구/교육한글 창간(1988)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219]
또한 한국 땅이름 큰사전 편찬(1991), 우리말 큰사전 편찬(1991), 제1회 외국인 한국어 발표 대회(1999), 학회 발행 논문집 학술정보 제작(2000), 첫 번째 우리말글 지킴이 위촉(2000), 우리 토박이 말 사전 편찬(2001), 첫 번째 아름다운 우리말 가게이름 선정(2001), 제1회 전국 한말글이름 가진 이 글짓기 대회(2004), 한글 무늬옷 입기 운동(2005), 한글날 큰잔치 조직위원회 결성(2006), 한글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 4편(한힌샘 주시경, 최현배, 건재 정인승, 고루 이극로) 편찬(2008, 2009) 등을 통해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219]
1996년에는 비영리 학술단체로는 처음으로 누리집(홈페이지)을 만들어 누리그물(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정기 간행물 『한글』, 『문학한글』, 『교육한글』, 『한힌샘 연구』, 『한글 새소식』 등을 누리집에서 제공하고 있다.[219]
2. 4. 2. 한글 간소화 파동
1948년 북한은 새로운 글자들을 추가하여 표기를 완벽하게 형태음운론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24] 그러나 이 시도는 몇 년 후에 폐기되었다.[24]
한국어 알파벳을 한국어의 형태음운론적 특성에 더 잘 맞추기 위해, 북한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공식적으로 사용된 「한글 맞춤법」에서 여섯 개의 새로운 글자를 도입했다.[64]
두 개의 폐기된 글자가 복원되었다. ㅿ한국어 (/l//리읃}})는 초성 의 발음 변화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고, ㆆ한국어 (히으한국어)는 모음 사이에서만 발음되었다.
/w//ㄹ}}의 두 가지 변형이 도입되었는데, 하나는 종성으로 사용될 때 묵음이고, 다른 하나는 모음 사이에서 이중으로 사용되었다. 두 소리(즉, 모음 앞에서 ) 사이에서 변하는 단어를 위해 1한국어/ㅂ-ㅜ}}의 혼합 글자가 도입되었다.
마지막으로, 변동하는 이어지는 모음을 위해 {{angle bracket한국어 모음이 도입되었다.
글자 | 발음 | |
---|---|---|
모음 앞 | 자음 앞 | |
Image:Nkchar-l.gif | — | |
Image:Nkchar-rr.gif | ||
ㅿ | ||
ㆆ | — | |
Image:Nkchar-w.gif | ||
Image:Nkchar-y.gif |
2. 4. 3. 문화 유산 지정
간송미술관에서 보관중인 《훈민정음 해례본》, 즉 간송본은 1962년에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220][221] 이는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이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2. 4. 4. 세종대왕 문해상
한국정부는 문해력이 낮은 백성들을 위해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과학적인 문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정신과 업적을 전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세계 문맹 퇴치에 이바지 하고자 '세종대왕 문해상' 제정을 유네스코에 제안하였다.[223] 이런 취지에 공감하여 상을 제정한 유네스코는 1990년부터 문맹퇴치에 앞장선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매년 세계 문해의 날에 수여하고 있다. 수상자에게 지급되는 상금은 한국정부가 전액 지원하고 있다.[223][224][225]2. 4. 5. 그밖의 일들
한국에서는 한글전용법이 시행되어 한자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1990년대 그 사용이 절정을 이루었다.[226] 이후 정부 차원에서의 영어 우대 정책으로 한글의 사용이 점차 줄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227]2009년에는 문자가 없어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던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 찌아찌아어의 표기 문자로 시범으로 한글을 채택, 도입하였다. 그리고 2012년에 솔로몬 제도에 있는 일부 주가 모어 표기 문자로 한글을 도입하였다.[228]
3. 다양한 창제학설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이전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한 문헌이 없어 그 유래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231][232][233]
- 발음 기관 상형설: 발음 기관을 상형했다는 설이다. 신경준, 홍양호, 최현배 등이 주장했다.
- 전자 기원설: 한문 비석 등에 쓰이는 전자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황윤석, 이능화 등이 주장했다.
- 범자(梵字) 기원설: 불경과 함께 고대 인도 문자가 전해져 그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성현, 이수광 등이 주장했다.
- 고대 문자 전래설: 훈민정음 이전 민간에서 전해지던 고대 문자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이다.
- 창문 상형설: 한옥의 창살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에카르트(P. A. Eckardt)가 주장했다.
- 서장(西藏)글자·오행(五行)이론
1446년 9월 상순에 발간된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한글을 창제한 이유와 음양의 원리를 바탕으로 자음과 모음을 만들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현재 한글 자형의 유래에 관한 직접적인 논쟁은 없지만 한자와 파스파 문자 기원설이 있다.
한글의 음운 체계는 자음 문자가 36자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지는 등 음운론에 기반하고 있으며, 훈민정음에는 한글의 자형에 대해 "象形而字倣古篆(상형이자방고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 정초(鄭樵)의 통지(通志)의 "起一成文図(기일성문도)"를 기원으로 하는 설도 있다.[114]
3. 1. 조음기관 모방설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한글의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본떠 만들어졌다. 이는 한글이 음성학적 원리와 철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창제되었음을 보여준다.『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에서는 자음과 모음 각각의 창제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기본 자음 5자(ㄱ, ㄴ, ㅁ, ㅅ, ㅇ)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추상화하고, 기본 모음 3자(ㆍ, ㅡ, ㅣ)는 천지인 삼재를 상징하여 창제되었으며, 다른 글자들은 획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기본 모음 'ㆍ, ㅡ, ㅣ' 중 'ㆍ'(아래아)는 양(陽)인 하늘(天)을, 'ㅡ'는 음(陰)인 땅(地)을, 'ㅣ'는 음과 양의 중간자인 인간(人)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 'ㅏ, ㅑ, ㅗ, ㅛ'는 'ㆍ'(아래아) 계열의 글자로, 양의 속성인 위로의 상승, 바깥으로의 확장을 따라 점을 위, 바깥쪽에 찍었다. 'ㅓ, ㅕ, ㅜ, ㅠ'는 'ㅡ' 계열의 글자로, 음의 속성인 하강, 수축의 뜻으로 점을 안쪽, 아래로 찍었다.
자음은 오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각 방위와 발음 기관을 연결시키고, 해당 발음 기관에서 나는 소리 또한 방위와 연관시키고 있다. 방위는 계절과 연결되므로, 소리는 계절과 연결된다. (소리=방위=계절, 소리=계절) 계절은 봄, 여름, 늦여름, 가을, 겨울 순이므로, 소리 역시 어금닛소리(ㄱ, 봄), 혓소리(ㄴ, 여름), 입술소리(ㅁ, 늦여름), 잇소리(ㅅ, 가을), 목소리(ㅇ, 겨울) 순으로 배열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기본 자음을 ㄱ, ㄴ, ㅁ, ㅅ, ㅇ, ㄹ 순으로 배열한 것은 오행 원리와 연관이 있다.
속성 | 계절 | 방위 | 음성 | 오음 |
---|---|---|---|---|
목(木) | 봄 | 동 | 어금닛소리(ㄱ, ㅋ, ㄲ) | 각 |
화(火) | 여름 | 남 | 혓소리(ㄴ, ㄷ, ㅌ, ㄸ) | 징 |
토(土) | 중하 | 중앙 | 입술소리(ㅁ, ㅂ, ㅍ, ㅃ) | 궁 |
금(金) | 가을 | 서 | 잇소리(ㅅ, ㅆ, ㅈ, ㅊ, ㅉ) | 상 |
수(水) | 겨울 | 북 | 목구멍소리(ㅇ, ㅎ) | 우 |
한글 자모의 디자인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훈민정음의 일부인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에 제시되어 있다.[61] 여기서는 자음 형태의 기원을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것으로 설명하고, 모음은 음양오행에 기반한 세 가지 요소(ㆍ, ㅡ, ㅣ)의 조합으로 설명한다.[61]
훈민정음의 자음 원래 순서는 ㄱ, ㅋ, ㆁ, ㄷ, ㅌ, ㄴ, ㅂ, ㅍ, ㅁ, ㅈ, ㅊ, ㅅ, ㆆ, ㅎ, ㅇ, ㄹ, ㅿ이었다.
- ㄱ은 /k/]]/
- ㄴ은 /n/]]/
- ㅁ은 /m/]]/
- ㅅ은 /s/]]/
- ㅇ은 자음이 없는 것을 나타내며, 목구멍을 묘사한다.
기본 자음 이외의 자형은 기본 자음을 기반으로 획을 추가하거나 나란히 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ㄹ은 ㄴ의 변형에서 나왔지만, 반설음이라는 특별한 분류가 있다.
3. 2. 파스파 문자 유래설
세종실록에는 최만리가 훈민정음이 "고전(古篆)을 본떴다(倣)"라고 말한 기록이 있는데,[229][230] 이 '고전'은 전자체(篆字體)라는 설과 당시에 '몽고전자(蒙古篆字)'로도 불렸던 파스파 문자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본떴다'는 표현은 그 생김새만 닮았다는 해석과, 제작에 참고를 했다거나 모두 본떴다는 등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파스파 문자 유래설은 한글 자형이 파스파 문자와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된다. 특히, 한글의 기본 자음은 ㄱ, ㄷ, ㅂ, ㅈ, ㄹ, ㅇ이며, 이들은 조음 기관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발음이 비슷한 파스파 문자의 자음들을 간략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116] 예를 들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ㄹ이 혀의 모습을 본떴다고 설명하지만, 실제 ㄹ 발음 시 혀 모양은 ㄹ처럼 되지 않는다. 그러나 파스파 문자에서 /l/에 해당하는 자음은 ㄹ과 형태가 유사하다.[63] 또한, ㆁ의 모양도 조음기관 모방설로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파스파 문자 유래설에 따르면 비음을 나타내는 ㄴ, ㅁ은 파열음을 나타내는 ㄷ, ㅂ의 상단을 감획한 모양이고, ㄱ을 마찬가지로 감획하면 ㅣ모양이 되며 이 아래에 ㅇ을 덧붙여 ㆁ을 만들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레디어드(Gari Ledyard) 교수는 한글 창제에서 파스파 문자의 역할이 제한적이라고 보면서도, 한글 자음 다섯 개(ㄱ, ㄷ, ㅂ, ㅈ, ㄹ)의 형태가 파스파 문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종이 ㆁ을 독자적으로 발명하고, 나머지 자음들은 이 여섯 개 자음에서 내부적으로 유도되었다고 본다.[62] 다만, 그는 차용된 다섯 자음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기본으로 간주되는 가장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중국 음운론의 기본 자음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레디어드는 세종이 한글 창제에 '고전(古篆)'을 채택했다고 언급한 것은 '몽골(蒙古)'과의 말장난으로, '고전(古篆)'이 '몽골 전자(蒙古篆字)', 즉 중국 전서처럼 보이도록 쓰인 파스파 문자의 공식적인 변형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 궁궐 도서관에 파스파 필사본이 있었고, 세종의 여러 신하들이 이 문자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는 몽골과의 관계를 회피하려 한 세종의 의도가 당시 몽골 원나라 멸망 후 한국과 명나라의 관계, 그리고 문인들의 몽골에 대한 경멸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레디어드는 차용된 다섯 문자가 그래픽적으로 단순화되어 자음군을 허용하고 유기음을 유도하기 위해 획을 추가할 공간을 확보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비파열음(ㆁ, ㄴ, ㅁ, ㅅ)이 기본 문자 윗부분을 "제거"하여 유도되었다고 주장하며, ㅂ에서 ㅁ을 유도하는 전통적인 설명 방식이 ㅂ의 모양이 다른 파열음과 유사하지 않아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ng' 문자에 대한 레디어드의 설명도 전통적인 설명과 다르다. 그는 세종 시대 중국어에서 초성 'ng'가 묵음이거나 로 발음되었고, 한국어 차용 시에는 묵음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세종이 ㄱ에서 남은 세로선을 무성음 ㅇ에 추가하여 ㆁ을 만들어 단어 중간/끝의 발음과 처음의 묵음을 모두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레디어드는 중국어 초성 微중국어를 옮겨 적은 ㅱ(두 요소로 구성된 문자)이 'm' 또는 'w'를 나타내며, ㅁ [m]과 ㅇ (파스파 [w]에서 유래)으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파스파 문자에서 문자 아래 고리가 모음 뒤 'w'를 나타낸다는 점을 근거로, 이것이 ㅱ 아래쪽 고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어 알파벳이 파스파 문자의 관례를 따라 'w' 고리를 순음 계열(ㅁ, ㅂ, ㅍ)에 추가하여 ㅱ, ㅸ, ㆄ ('w', 'v', 'f')를 생성했다고 설명한다.
레디어드는 차용된 한글 문자 대부분이 원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였지만, ㄷ 'd' [t]에는 항상 파스파 문자 ꡊ 'd' [t]처럼 왼쪽 상단에 작은 입술이 돌출되어 있었다는 점을 마지막 증거로 제시한다. 그는 이 입술이 티베트 문자 ད 'd'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한글 자음이 발음 기관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기존 이론이 다소 믿기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된다.[63]
3. 3. 기타 학설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이전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한 문헌이 없어 그 유래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231][232][233]- 발음 기관 상형설: 발음 기관을 상형했다는 설이다. 신경준, 홍양호, 최현배 등이 주장했다.
- 전자 기원설: 한문 비석 등에 쓰이는 전자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황윤석, 이능화 등이 주장했다.
- 범자(梵字) 기원설: 불경과 함께 고대 인도 문자가 전해져 그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성현, 이수광 등이 주장했다.
- 고대 문자 전래설: 훈민정음 이전 민간에서 전해지던 고대 문자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이다.
- 창문 상형설: 한옥의 창살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에카르트(P. A. Eckardt)가 주장했다.
- 서장(西藏)글자·오행(五行)이론
1446년 9월 상순에 발간된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한글을 창제한 이유와 음양의 원리를 바탕으로 자음과 모음을 만들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현재 한글 자형의 유래에 관한 직접적인 논쟁은 없지만 한자와 파스파 문자 기원설이 있다.
한글의 음운 체계는 자음 문자가 36자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지는 등 음운론에 기반하고 있으며, 훈민정음에는 한글의 자형에 대해 "象形而字倣古篆(상형이자방고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 정초(鄭樵)의 통지(通志)의 "起一成文図(기일성문도)"를 기원으로 하는 설도 있다.[114]
4. 구조
한글은 음소 문자이면서, 낱자를 모아쓰는 특징을 가진다. 한 음절은 첫소리(초성), 가운뎃소리(중성), 끝소리(종성)의 낱소리 세 벌로 이루어지는데, 첫소리와 끝소리에는 닿소리(자음)를 쓰고 가운뎃소리에는 홀소리(모음)를 쓴다.[59] 한글은 낱자를 하나씩 풀어쓰지 않고 하나의 글자 마디로 모아쓰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 알파벳의 글자는 '자모'라고 부른다. 현대 알파벳에는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이 사용된다. 이들은 최세진이 저술한 한자 교과서인 훈몽자회한국어에서 처음 명명되었다. 또한, 기본 자모를 결합하여 만든 27개의 복합 자모가 있다. 경음 자음 5개, 복합 자음 11개, 복합 모음 11개이다.
문자 체계는 일반적으로 형태소 수준(한자와 같은 표의 문자) 또는 음절 수준(음절 문자, 예: 가나), 음운 단위 수준(영어와 다른 많은 언어를 쓰는 데 사용되는 라틴 문자와 같은 알파벳 문자), 또는 때로는 대립 특징 수준에서 언어를 표기한다. 한국어 알파벳은 후자 세 가지의 측면을 통합하여 소리를 음절로 그룹화하고, 음운 단위에 대해 별개의 기호를 사용하며, 어떤 경우에는 조음 위치(순음, 치음, 경구개음, 또는 성문음) 및 조음 방법(파열음, 비음, 마찰음, 기음)과 같은 대립 특징을 나타내는 별개의 획을 사용한다(자음의 경우), 그리고 요타 변화(앞선 'i' 음), 모음 조화, i 변화를 사용한다(모음의 경우).
예를 들어, 자음 ㅌ은 세 개의 획으로 구성된다. 윗획은 ㅌ이 파열음임을, 가운데 획은 기음임을, 아랫획은 치음임을 나타낸다.
모음의 경우, 짧은 획은 요타화 가능성을, 획의 위치는 밝음 또는 어둠을 나타낸다. 현대 알파벳에서 추가적인 수직 획은 i 변화를 나타낸다.
문자 외에도 한국어 알파벳은 원래 억양을 나타내는 구두점을 사용했다. 높은 음높이(거성)의 음절은 왼쪽에 점(〮)(세로로 쓸 때)으로 표시했다. 상승하는 음높이(상성)의 음절은 콜론과 같은 이중 점(〯)으로 표시했다. 현대 서울 방언에서는 성조가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59]
4. 1. 자모 낱자
현대 한글은 닿소리(자음) 14자와 홀소리(모음) 10자, 총 24자로 구성된다. 닿소리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이며, 홀소리는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이다. 이들은 최세진이 저술한 한자 교과서인 훈몽자회한국어에서 처음 명명되었다.[51]닿소리 | ㄱ | ㄴ | ㄷ | ㄹ | ㅁ | ㅂ | ㅅ | ㅇ | ㅈ | ㅊ | ㅋ | ㅌ | ㅍ | ㅎ |
---|---|---|---|---|---|---|---|---|---|---|---|---|---|---|
홀소리 | ㅏ | ㅑ | ㅓ | ㅕ | ㅗ | ㅛ | ㅜ | ㅠ | ㅡ | ㅣ |
처음 한글 낱자는 닿소리 17자와 홀소리 11자로 총 28가지였으나, 현재는 닿소리 ㅿ(반시옷), ㆁ(옛이응), ㆆ(여린히읗)과 홀소리 ㆍ(아래아)의 네 글자는 사용되지 않는다. 반시옷은 알파벳의 z에 해당하는 음가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며, 여린히읗은 1을 강하게 발음할 때 목구멍이 막히며 나는 성문 파열음으로 추측된다.[234]
각 자모의 소릿값은 첫소리(초성), 가운뎃소리(중성), 끝소리(종성)에 따라 달라진다.[234]
닿소리는 홑소리(단음)를 바탕으로 겹소리(복음)를 표기하기 위해 ㄲ, ㄸ, ㅃ, ㅆ, ㅉ와 같은 겹닿소리를 사용한다. 홀소리 또한 ㅐ, ㅒ, ㅔ, ㅖ, ㅘ, ㅙ, ㅚ, ㅝ, ㅞ, ㅟ, ㅢ와 같은 겹홀소리를 사용한다.
겹닿소리 | ㄲ | ㄸ | ㅃ | ㅆ | ㅉ | ||||||
---|---|---|---|---|---|---|---|---|---|---|---|
겹홀소리 | ㅐ | ㅒ | ㅔ | ㅖ | ㅘ | ㅙ | ㅚ | ㅝ | ㅞ | ㅟ | ㅢ |
현대 한글에서 끝소리가 있을 때 홑받침 또는 겹받침을 쓰는데, 홑받침에는 모든 닿소리가 쓰이며, 겹받침에는 ㄲ, ㅆ, ㄳ, ㄵ, ㄶ,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ㅄ이 사용된다. 모든 받침의 소릿값은 끝소리 규칙에 따라 8갈래(ㄱ, ㄴ, ㄷ, ㄹ, ㅁ, ㅂ, ㅇ)로 모인다.[234]
겹받침 | ㄲ | ㅆ | ㄳ | ㄵ | ㄶ | ㄺ | ㄻ | ㄼ | ㄽ | ㄾ | ㄿ | ㅀ | ㅄ |
---|---|---|---|---|---|---|---|---|---|---|---|---|---|
받침의 소릿값 | ㄱ | ㄴ | ㄷ | ㄹ | ㅁ | ㅂ | ㅇ |
사전에 올릴 때에는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의 순으로 정렬하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51]
첫소리 |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
---|---|
가운뎃소리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
끝소리 | (없음) ㄱ ㄲ ㄳ ㄴ ㄵ ㄶ ㄷ ㄹ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ㅁ ㅂ ㅄ ㅅ ㅆ ㅇ ㅈ ㅊ ㅋ ㅌ ㅍ ㅎ |
4. 2. 모아쓰기
한글은 낱자를 모아쓰는 방식으로 표기한다.[68] 닿소리를 먼저 쓰고 그 오른쪽이나 아래에 홀소리를 적으며, 받침은 닿소리와 홀소리 밑에 놓는다. 중성의 모양에 따라 초성의 결합 위치가 달라진다.- 중성이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ㅣ와 같이 세로로 긴 모양일 때는 초성의 오른쪽에 붙여 쓴다.
{| class="wikitable"
|-
|
초성 | 중성 |
|
초성 | 중성 |
종성 |
|}
- 중성이 ㅗ, ㅛ, ㅜ, ㅠ, ㅡ와 같이 가로로 긴 모양일 때는 초성의 아래쪽에 붙여 쓴다.
{| class="wikitable"
|-
|
초성 |
중성 |
|
초성 |
중성 |
종성 |
|}
- 중성이 ㅘ, ㅙ, ㅚ, ㅝ, ㅞ, ㅟ, ㅢ와 같이 가로와 세로로 조합된 모양일 때는 초성의 아래쪽과 오른쪽에 붙여 쓴다.
{| class="wikitable"
|-
|
초성 | 중성 |
중성 |
|
초성 | 중성 |
중성 | |
종성 |
|}
20세기 이전의 몇몇 문법적 형태소를 제외하고 현대 한국어에서는 자음 또는 모음 글자가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글자들은 음절 단위로 묶여 있으며, 각 음절은 초성(자음 또는 중복 자음), 중성(모음 또는 이중모음), 그리고 선택적으로 종성(자음 또는 자음군)으로 구성된다. 음절에 실제 초성 자음이 없을 경우, 영자음 이응/ㅇ한국어이 자리 표시자로 사용된다.
4. 3. 표기 가능한 글자 수
현대 한글은 낱자를 엮어 11,172(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27 + 끝소리 없음 1))글자 마디를 쓸 수 있다. 11,172자 중 399자는 받침이 없는 글자이며 10,773자는 받침이 있는 글자이다. 사용 빈도는 KS X 1001 완성형 한글 코드에 선별된 2,350글자가 상위 99.9%로 알려져 있다.자모를 조합하여 만들 수 있는 문자의 이론적인 조합은 11,172자이지만, 실제 사용되는 것은 그 절반 이하이다. 1987년 한국의 국가 표준이 된 컴퓨터용 문자 집합(KS C 5601-1987)에는 일상의 99%를 표기할 수 있는 범위로 2,350자만 포함되었다. 1994년~1995년경까지는 11,172자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 집합(조합형)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Windows 95에서 KS 완성형을 확장한 문자 집합(확장 완성형, UHC)을 채택하고 이후 Windows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조합형 문자 집합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Windows NT 계열에서는 Unicode 2.0(KS C 5700, 현재: KS X 1005-1) 이후를 지원하고 있다.
4. 4. 소리 나는 음절 개수
표준 발음법에 따르면 현대 한국어 표준어에서 실제 사용하는 소리마디는 2,912가지가 된다. 한국어의 소리는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로 이루어지는데, 표준어에서 첫소리에는 19가지 닿소리가 모두 쓰이되, 첫소리에 놓인 ㅇ은 소리 나지 않는다. 끝소리는 7종성법에 따라 7갈래로 모이며 끝소리가 없는 것까지 더하여 모두 8갈래이므로 현대 한국어의 발음은 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8 = 3,192가지 소리가 된다.그런데 표준 발음법을 따르면 구개음 ㅈ, ㅉ, ㅊ 뒤의 이중 모음 ㅑ, ㅒ, ㅕ, ㅖ, ㅛ, ㅠ는 단모음 ㅏ, ㅐ, ㅓ, ㅔ, ㅗ, ㅜ로 소리 나므로 첫소리 3 × 가운뎃소리 6 × 끝소리 8 = 144소리가 빠진다. 아울러 소리 나는 첫소리 (ㅇ이 아닌 첫소리 뒤에 오는)를 얹은 가운뎃소리 (ㅢ)는 ㄴ을 제외하면(ㄴ은 구개음화에 따른 다른 음소로 인정하고 있다.) [ㅣ]로 소리 나므로(한글 맞춤법 제9항 및 표준 발음법 제5항 단서 3) 첫소리 17 × 가운뎃소리 1 × 끝소리 8 = 136 소리가 다시 빠진다.
5. 한글 [[맞춤법]]
20세기 초까지 한국어의 통일된 맞춤법은 확립되지 않았다.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여 형태음운론적 표기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는 현대 남북한 맞춤법의 원형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88년 교육부에서 개정된 한글 맞춤법을 사용하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은 모든 공식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기 시작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인해 맞춤법 논의가 중단되었다. 대한민국 총독부는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6.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
한글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로마자로 표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한글 표기를 읽을 수 없는 외국인이나 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알려야 하는 경우,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해 의사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지명, 인명, 상호명 등과 같은 고유 명사를 로마자로 표기할 때 로마자 표기 규정에 따르면, 표기가 통일되어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고, 정보 검색 등이 편리해진다.[235]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은 1832년 독일인 지볼트(Siebold, P.F.), 1895년 미국인 호머 헐버트를 비롯하여[236] 서양의 동양학자나 선교사·외교관들이 만든 방안들이 있고, 정인섭, 최현배, 박창해 등의 국내 학자들이 만든 방안도 여럿이 있다. 또한 1940년 조선어학회의 안과 1948, 1959, 1984년에 나온 문교부의 방안 등이 있다. 이들 여러 방법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지고, 또 흔히 쓰이는 것은 매큔·라이샤워체계(The McCune-Reischauer System for the Romanization of Korean)와 마틴(Martin)이 제안한 예일체계(The Yale System), 2014년에 나온 문화체육관광부안이다.
로마자표기법이 통일되지 않고 다소 무질서하게 사용되어 왔던 것은 한국어의 특성상 로마자로 표기하는 데 있어서 여러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 해결 방안이 각기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에 인터넷시대에 맞지 않는 반달표와 어깨점을 없애고 한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편리한 방향으로 개정한 문화관광부안이 고시되었는데,[237] 이것을 일부 개정하여 2014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고시되어[238]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
7. 한글의 우수성
한글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과학적인 문자이다. 'ㅁ'은 입술, 'ㅇ'은 목구멍, 'ㅅ'은 이빨 모양을 본떴으며,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또한, 한글은 기본 글자를 바탕으로 다른 글자를 만드는 체계적인 문자이다. 즉, 기본자인 'ㄱ'에 획을 더해 'ㅋ'을 만드는 방식이다. 모음의 경우도 '하늘, 땅, 사람'을 형상화한 'ㆍ, ㅡ, ㅣ'를 기본 글자로 하고, 나머지는 기본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거나 조합해서 만들었다. 이러한 특징은 한글의 학습 용이성과 효율성에 기여한다.
8. 용도폐기된 4글자
- '''ㆆ(여린히읗, 된이응) :''' ㅇ하고 ㅎ의 중간획 글자로, ㅇ에 흡수되면서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 '''ㆁ(옛이응, 꼭지이응) :''' 아음으로, '앙'이라는 소리를 낼 때 본 글자의 종성이응, 즉 유성음 이응이 옛이응이다. 지금은 사용할 때 ㅇ하고 혼동하기 쉬우므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솅종(세종)' 할 때 솅(세)의 ㅇ은 그냥 '이'이고, 종 할때는 ㆁ, 즉 옛이응이 된다.
- '''ㅿ(반시옷) :''' ㅆ, ㅉ의 중간 글자로, ㅅ하고 ㅈ의 중간 발음이 난다. 지금은 이 글자가 점차 ㅅ하고 ㅈ 소리로 점차 간소화 되면서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알파벳의 /z/ 소리를 띈다. 반치음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 '''ㆍ(아래아) :''' 본 글자는 초성의 밑에 쓰는 ㅏ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ㅏ(아)하고 ㅡ(으)의 중간 발음이다. 역시 ㅏ로 간소화 되면서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9. 유니코드
유니코드에서 한글은 한글 글자 마디, 한글 자모, 한글 자모 확장-A, 한글 자모 확장-B, 한글 호환 자모, 반각 한글 자모 등 여러 영역에 배당되어 있다.
- 한글 글자 마디(Hangul Syllables): `U+AC00`~`U+D7AF`
- 한글 자모(Hangul Jamo): `U+1100`~`U+11FF`
- 한글 자모 확장-A(Hangul Jamo Extended-A): `U+A960`~`U+A97F`
- 한글 자모 확장-B(Hangul Jamo Extended-B): `U+D7B0`~`U+D7FF`
- 한글 호환 자모(Hangul Compatibility Jamo): `U+3130`~`U+318F`
- 반각 한글 자모: `U+FFA0`~`U+FFDC`
한글 자모(`U+1100`–`U+11FF`) 및 한글 호환 자모(`U+3130`–`U+318F`) 블록은 1993년 6월 유니코드 표준 1.1 버전에서 추가되었다. 별도의 한글 음절 블록에는 미리 조합된 음절 블록 문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동시에 처음 추가되었지만 1996년 7월 유니코드 표준 2.0 버전에서 현재 위치로 재배치되었다.
한글 자모 확장-A(`U+A960`–`U+A97F`) 및 한글 자모 확장-B(`U+D7B0`–`U+D7FF`) 블록은 2009년 10월 유니코드 표준 5.2 버전에서 추가되었다.
유니코드에는 한글을 부호화하기 위한 문자가 여러 종류 있으며,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한글 자모(U+1100-11FF)와 한글 음절 자모(U+AC00-D7A3)이다. 한글 자모는 한글을 구성하는 자모로, 이들을 조합하여 15세기부터 현대까지의 한글 음절 문자를 만들 수 있다. U+1100-115F는 초성 자음, U+1160-11A2는 중성 모음, U+11A8-11F9는 종성 자음이 정의되어 있다. 한글 음절 자모는 두 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음절 399자, 세 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음절 10,773자의 총 11,172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외에 한글 호환 자모(U+3130-318F)가 있지만, KS 완성형(KS C 5601-1987, 현재: KS X 1001:1998)과의 호환성을 위해 존재한다.
유니코드에서는 유니코드 1.1 이전과 유니코드 2.0 이후 한글을 정의하는 영역이 달라 호환성이 없다. 유니코드 1.1까지는 U+3400-4DFF에 한글이 정의되어 있었지만, 유니코드 2.0 제정 시 새롭게 U+AC00-D7AF에 한글이 정의되고 기존 영역은 폐기되었다. 그때 한국의 요구에 따라 KS C 5601-1992의 조합형 문자 집합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한글 음절 자모 11,172자가 포함되었다. 유니코드 2.0에서 폐기된 영역은 유니코드 3.0 제정 시 CJK 통합 한자 확장 A로 U+3400-4DBF에 정의되고, 유니코드 4.0 제정 시 주역 부호 집합으로 U+4DC0-4DFF에 정의되어 있다. 한편, 반각 한글은 유니코드 1.0부터 일관되게 블록의 U+FFA0-FFBE, U+FFC2-FFC7, U+FFCA-FFCF, U+FFD2-FFD7, U+FFDA-FFDC에 정의되어 있다.
2019년 3월 현재, 현대 한국어를 표현하는 데 마이크로소프트 계열 OS(Windows 10 등)에서는 완성형(U+AC00-D7AF)이, 맥 계열 OS(iOS 및 macOS Mojave 등)에서는 조합형(U+1100-11F9)이 사용되고 있으며, 맥 계열에서 생성된 파일의 파일명 한글 부분이 윈도우 계열 탐색기에서 초·중·종성으로 나뉘어 표시되는 경우가 있다.
한글 자모 [https://www.unicode.org/charts/PDF/U1100.pdf 공식 유니코드 컨소시엄 코드 차트](PDF) | ||||||||||||||||
0 | 1 | 2 | 3 | 4 | 5 | 6 | 7 | 8 | 9 | A | B | C | D | E | F | |
U+110x | ᄀ | ᄁ | ᄂ | ᄃ | ᄄ | ᄅ | ᄆ | ᄇ | ᄈ | ᄉ | ᄊ | ᄋ | ᄌ | ᄍ | ᄎ | ᄏ |
U+111x | ᄐ | ᄑ | ᄒ | ᄓ | ᄔ | ᄕ | ᄖ | ᄗ | ᄘ | ᄙ | ᄚ | ᄛ | ᄜ | ᄝ | ᄞ | ᄟ |
U+112x | ᄠ | ᄡ | ᄢ | ᄣ | ᄤ | ᄥ | ᄦ | ᄧ | ᄨ | ᄩ | ᄪ | ᄫ | ᄬ | ᄭ | ᄮ | ᄯ |
U+113x | ᄰ | ᄱ | ᄲ | ᄳ | ᄴ | ᄵ | ᄶ | ᄷ | ᄸ | ᄹ | ᄺ | ᄻ | ᄼ | ᄽ | ᄾ | ᄿ |
U+114x | ᅀ | ᅁ | ᅂ | ᅃ | ᅄ | ᅅ | ᅆ | ᅇ | ᅈ | ᅉ | ᅊ | ᅋ | ᅌ | ᅍ | ᅎ | ᅏ |
U+115x | ᅐ | ᅑ | ᅒ | ᅓ | ᅔ | ᅕ | ᅖ | ᅗ | ᅘ | ᅙ | ᅚ | ᅛ | ᅜ | ᅝ | ᅞ | | |
U+116x | | | ᅡ | ᅢ | ᅣ | ᅤ | ᅥ | ᅦ | ᅧ | ᅨ | ᅩ | ᅪ | ᅫ | ᅬ | ᅭ | ᅮ | ᅯ |
U+117x | ᅰ | ᅱ | ᅲ | ᅳ | ᅴ | ᅵ | ᅶ | ᅷ | ᅸ | ᅹ | ᅺ | ᅻ | ᅼ | ᅽ | ᅾ | ᅿ |
U+118x | ᆀ | ᆁ | ᆂ | ᆃ | ᆄ | ᆅ | ᆆ | ᆇ | ᆈ | ᆉ | ᆊ | ᆋ | ᆌ | ᆍ | ᆎ | ᆏ |
U+119x | ᆐ | ᆑ | ᆒ | ᆓ | ᆔ | ᆕ | ᆖ | ᆗ | ᆘ | ᆙ | ᆚ | ᆛ | ᆜ | ᆝ | ᆞ | ᆟ |
U+11Ax | ᆠ | ᆡ | ᆢ | ᆣ | ᆤ | ᆥ | ᆦ | ᆧ | ᆨ | ᆩ | ᆪ | ᆫ | ᆬ | ᆭ | ᆮ | ᆯ |
U+11Bx | ᆰ | ᆱ | ᆲ | ᆳ | ᆴ | ᆵ | ᆶ | ᆷ | ᆸ | ᆹ | ᆺ | ᆻ | ᆼ | ᆽ | ᆾ | ᆿ |
U+11Cx | ᇀ | ᇁ | ᇂ | ᇃ | ᇄ | ᇅ | ᇆ | ᇇ | ᇈ | ᇉ | ᇊ | ᇋ | ᇌ | ᇍ | ᇎ | ᇏ |
U+11Dx | ᇐ | ᇑ | ᇒ | ᇓ | ᇔ | ᇕ | ᇖ | ᇗ | ᇘ | ᇙ | ᇚ | ᇛ | ᇜ | ᇝ | ᇞ | ᇟ |
U+11Ex | ᇠ | ᇡ | ᇢ | ᇣ | ᇤ | ᇥ | ᇦ | ᇧ | ᇨ | ᇩ | ᇪ | ᇫ | ᇬ | ᇭ | ᇮ | ᇯ |
U+11Fx | ᇰ | ᇱ | ᇲ | ᇳ | ᇴ | ᇵ | ᇶ | ᇷ | ᇸ | ᇹ | ᇺ | ᇻ | ᇼ | ᇽ | ᇾ | ᇿ |
10. 다른 언어에서의 한글 사용
2009년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찌아찌아어 표기에 한글을 도입한 사례가 있으며,[43][44][45][46][119] 2012년 솔로몬 제도의 일부 주에서도 모어 표기에 한글을 도입하였다.[239][240]
인도네시아 남동 술라웨시(Southeast Sulawesi) 바우바우(Baubau)시에서 차차어(Cia-Cia language)를 표기하는 데 한글을 채택하였다.[43][44][45][46] 서울을 방문한 여러 인도네시아 차차어 사용자들은 한국에서 큰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그들의 도착을 환영하였다.[47]
찌아찌아족은 알파벳이나 아랍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이 있지만, 한글이라면 표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한글을 채택하였다.[120] 찌아찌아어는 “고유의 문자가 없고, 고유어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한국 단체가 제안하여 2009년 7월, 바우바우 시에서 한글 보급 각서를 체결하였다.[73] 한국의 훈민정음학회가 중심이 되어 치아치아어의 한글 표기를 추진하였다.[73]
바우바우 시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상의 없이 도입을 결정하였고,[73] 인도네시아 정부도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다.[121] 이 표기법은 치아치아어의 음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의 사정에 맞춰 작성된 것이며, 조의성은 “아시아의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만 사용하는 문자를 굳이 채택할 필요는 없다”고 하며, 세계적으로 범용성이 있는 라틴 문자로 치아치아어를 표기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주장하였다.[73] 2018년에 방영된 한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따르면, 마을의 간판이나 교과서 등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122]
이밖에도 허초덕(許曹德)과 안의진(Ang Ui-jin) 등 언어학자들은 한글 자모를 변형된 규칙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시도하여 중국어 계열 언어인 타이완어(대만어) Hokkien을 표기하려 했으나, 결국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실용적인 해결책으로 밝혀졌고 타이완 교육부(Ministry of Education of Taiwan)에서도 이를 지지하였다.[39][40][41] 서울의 훈민정음학회는 아시아의 미기록 언어에 한글 사용을 확산시키려고 시도하였다.[42]
11. 오해와 사실
한글은 한자의 부수로 이루어지거나 다른 나라의 글자를 본뜬 것이 아닌, 한민족 고유의 글자이다.[161][241]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한글"이 아닌 책 《훈민정음 해례본》이며, 기록물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기록물만을 등록 대상으로 한다.[161][241] 한글날은 한글 창제일(음력 12월 30일)이 아닌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은 한국어(말)가 아니라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글자)이다. 한글은 언어의 이름이 아니라 문자의 이름이며, 창제 당시의 이름인 '훈민정음'과 그 약칭인 '정음'도 본래 글자의 이름이었다. 실제의 한글은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현재의 한글은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보다 표현할 수 있는 발음 수가 적다.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학 명제가 아니고 창제 당시에 모든 소리는 기본 5음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배경으로 한 철학적 표현이다. 한글 낱자는 모두 소릿값이 확정되어 있고 실제 한글 쓰임에서는 모아쓰기의 규칙도 정해져 있으므로 한글로 표현되는 소리의 숫자는 본래 유한하며, 한글의 기본은 한국어에 맞추어져 있다. 현재 한글은 한국어 발음에만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의 훈민정음에서는 모아쓰기가 좀 더 다양하며, 아울러 《동국정운》에 따르면 실제의 한국어 발음뿐만 아니라 이론적 한자음도 훈민정음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찌아찌아족의 찌아찌아어 표기에 한글이 사용되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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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년 전 한글 로마자표기법 발표한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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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0-10-03
[237]
웹사이트
로마자표기법 [Romanization]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238]
웹사이트
로마자표기법 [─字表記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39]
뉴스
솔로몬제도 일부 州, 표기문자로 한글 채택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2-10-08
[240]
뉴스
솔로몬제도 일부 州, 표기문자로 한글 채택
https://news.mt.co.k[...]
머니투데이
2012-10-09
[241]
Youtube
우리가 모르는 한글이야기
https://www.youtube.[...]
세종소리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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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빈, 광복 80주년 특별전 영상 내레이션 참여
한글과 만난 드로잉 아티스트 “캐릭터 같은 한글, 울림을 줍니다”
[밀착카메라] 곤룡포 수건, 단청 키보드 '열풍'…'국중박 굿즈' 숨은 주역들
고려사이버대 동문, 광복 80년 공모전 주요 상 석권
독립운동가의 중국인 손자 “나에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한글창제 원리를 먹붓질로 표현하다
“케이팝, 차트가 아닌 아트를 보라” [.txt]
근데 ‘산돌고딕’의 산돌이 뭐야?...폰트가 더 중요해진 시대, 업계 1위 만나봤더니
도로 표지판 글씨체 우리가 만들었죠
다시, 한자 문제 [말글살이]
“팔도의 말맛, 느껴 보세요”···강릉시립박물관서 ‘사투리는 못 참지!’ 기획특별전
대한민국 최고의 ‘어린이 한글대왕’ 찾는다
"기억에 남을 수학여행 같은 APEC 보여줄게요"
6월16일 알림
'세종대왕 나신 날' 영상에 일본 신사…서경덕 "있을 수 없는 일"
김남길, 서경덕 교수와 부다페스트에 한국 알린다 | JTBC 뉴스
외국인 유학생, 한류에 물들다… 상지대 'K-컬처의 날' 성황리 개최
대한외국인 2인 "한글과자 수출합니다"
현대해상, 다문화가정 아동 학습·정서 지원하는 ‘마음한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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