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텐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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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렌텐마르크는 1923년 독일에서 초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통화이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막대한 배상금과 루르 점령으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서, 기존의 파피에르마르크 가치가 폭락하자, 토지 저당을 기반으로 렌텐마르크가 발행되었다. 렌텐마르크는 파피에르마르크와 1:1조의 비율로 교환되었으며, 발행량 제한과 정부의 지원으로 가치를 안정시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렌텐마르크는 1924년 라이히스마르크 도입 이후에도 1948년까지 통용되었으며, 독일 경제 안정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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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텐마르크 | |
---|---|
기본 정보 | |
현지어 이름 | Rentenmark |
현지어 표기 (독일어) | de |
ISO 코드 | (없음) |
통화 기호 | RM |
보조 단위 기호 | Rpf. |
통화 이름 (복수형) | Rentenmark |
보조 단위 이름 (복수형) | Rentenpfennig |
사용 국가 | 바이마르 공화국 |
발행 기관 | 도이체 렌텐방크 |
발행 기관 웹사이트 | (정보 없음) |
대체 통화 | 파피어마르크 |
대체된 통화 | 라이히스마르크 |
통용 중단 | 1948년 |
고정 환율 | 미국 달러 = RM 4.20, 이는 다시 파피어마르크 1조 (1,000,000,000,000) ℳ = RM 1과 같음 (미국식 짧은 척도 1조 또는 영국식 (1974년 이전), 독일,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긴 척도 10억 = 1,000,000,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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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
사용된 동전 | 1 Rpf, 2 Rpf, 5 Rpf, 10 Rpf, 50 Rpf |
사용된 지폐 | RM 1, RM 2, RM 5, RM 10, RM 50, RM 100, RM 500, RM 1,000 |
2. 역사적 배경
1923년 초,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루르 점령(Ruhrkampf)을 강행하자 빌헬름 쿠노(Wilhelm Cuno)의 쿠노 내각(Cuno cabinet)은 소극적 저항 정책으로 대응했다. 이로 인해 독일 산업 중심지인 루르 지역 경제는 거의 마비되었다. 점령 당국은 파업과 사보타주에 체포와 추방으로 대응했고, 루르 투쟁(Ruhrkampf)으로 쫓겨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공공 소득 지원에 의존했다. 경제 활동 둔화로 세수가 급감하자 정부는 주로 화폐 발행으로 자금 수요를 충당했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급증했고, 파피어마르크는 통화 시장에서 폭락했으며, 라이히스방크(Reichsbank)의 외환 보유고는 줄어들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in the Weimar Republic)이 심화되면서 1923년 8월 쿠노 내각은 사임했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슈트레제만은 10월 초 내각을 개편한 후 한스 루터(Hans Luther)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루터는 라이히스방크의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와 협력하여 경제학자 카를 헬페리히(Karl Helfferich)의 통화 개혁 요소와 루터의 전임자인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의 아이디어를 결합한 통화 안정화 계획을 신속하게 마련했다. 1923년 10월 13일 정부에 금융 및 경제 문제에 대한 법령을 발령할 권한을 부여하는 비상법(Ermächtigungsgesetz)의 도움으로, 1923년 10월 15일, 새로운 렌텐방크(Rentenbank)가 설립되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320억 금 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았다.[4] 독일은 전쟁 중 금본위제를 중단했고, 전후에도 복귀하지 못했다. 1914년 7월 1 미국 달러는 4.2 금 마르크였으나, 루르 점령과 재정 지출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1923년 1월에는 1달러 당 7,525 마르크로 폭락했다.[4] 라이히스방크는 정부 발행 국채를 인수하여 초고액 지폐를 계속 발행했다. 그 결과, 대 달러 환율은 같은 해 7월에 1달러 = 16만 마르크, 8월에 462만 455 마르크, 9월에 9,886만 마르크, 10월에 252억 6,028만 마르크, 11월에는 4조 2,000억 마르크까지 폭락했고, 금의 뒷받침이 없는 독일 마르크는 파피에르마르크 (지폐 마르크)라고 불렸다.2. 2. 루르 점령과 초인플레이션
1923년 초,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루르 점령(Ruhrkampf)을 강행하면서 빌헬름 쿠노(Wilhelm Cuno) 내각은 '소극적 저항' 정책으로 맞섰다.[4] 이로 인해 독일 산업의 중심지였던 루르 지역의 경제는 거의 마비되었다. 점령군은 파업과 사보타주에 체포와 추방으로 대응했고, '루르 투쟁(Ruhrkampf)'으로 인해 쫓겨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공공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경제 활동 둔화로 세수가 급감하자, 정부는 화폐 발행을 통해 재정을 충당했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심화시켜 파피어마르크는 가치가 폭락했다.[4] 라이히스방크(Reichsbank)의 외환 보유고는 줄어들었다.[4]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in the Weimar Republic)이 극심해지자 1923년 8월, 쿠노 내각은 물러나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 내각이 들어섰다.[4] 슈트레제만은 10월 초 내각을 개편하면서 한스 루터(Hans Luther)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루터는 라이히스방크의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와 함께 경제학자 카를 헬페리히(Karl Helfferich)의 통화 개혁안과 루터의 전임자였던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의 아이디어를 결합해 통화 안정화 계획을 수립했다.[4] 1923년 10월 13일, 정부에 금융 및 경제 문제에 대한 법령 발령 권한을 부여하는 비상법(Ermächtigungsgesetz)을 통해, 1923년 10월 15일 새로운 렌텐방크(Rentenbank)가 설립되었다.[4]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320억 금 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전쟁 중 금본위제를 중단했던 독일은 전후에도 복귀가 불가능했다. 1914년 7월 1 미국 달러 = 4.2 금 마르크였던 환율은 루르 점령의 영향과 재정 지출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1923년 1월에는 1달러 = 7,525 마르크로 상승했다. 라이히스방크는 정부 발행 국채를 인수하며 초고액권 지폐를 계속 발행했다. 그 결과, 대 달러 환율은 같은 해 7월 1달러 = 16만 마르크, 8월 462만 455 마르크, 9월 9,886만 마르크, 10월 252억 6,028만 마르크, 11월에는 4조 2,000억 마르크까지 폭락했고, 금의 뒷받침이 없는 독일 마르크는 파피에르마르크 (지폐 마르크)라고 불리게 되었다.[5]
당시 루돌프 힐퍼딩 재무 장관은 렌텐마르크 도입을 결정했지만 해임되었고,[4] 은행가 히얄마르 샤흐트가 라이히 통화 위원이 되어 독일 렌테 은행(Deutsche Rentenbank)을 설립했다.
2. 3. 렌텐마르크의 도입
한스 루터 재무장관은 얄마르 샤흐트와 협력하여 통화 안정화 계획을 마련했다. 이 계획은 카를 헬페리히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토지 저당을 기반으로 하는 렌텐마르크를 고안하는 것이었다.[4] 1923년 10월 15일, 렌텐방크가 설립되어 렌텐마르크 발행을 시작했다.[4]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 위기로 인해 통화를 뒷받침할 금이 없었다. 따라서 루터는 실물 자산으로 뒷받침되는 통화라는 헬페리히의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새 통화는 농업 및 사업에 사용되는 토지로 뒷받침되었으며, 32억 독일 금마르크 상당의 저당으로 담보되었다. 32억 렌텐마르크 상당의 지폐가 발행되었으며, 1 렌텐마르크는 1조(1012) 파피어마르크와 같고 1 미국 달러는 4.2 렌텐마르크와 같다는 비율로 도입되었다.
렌텐마르크는 처음에는 법정 통화가 아니었지만, 대중에게 받아들여졌고 그 가치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라이히스방크에서 샤흐트가 주도한 통화 정책과 한스 루터 재무부 장관의 재정 정책으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 시대는 종식되었다.[5] 이 인플레이션의 급속한 수렴을 "렌텐마르크의 기적"(das Wunder der Rentenmark)이라고 부른다.
3. 렌텐마르크의 특징
렌텐마르크는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 시기에 도입된 임시 통화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경제는 루르 점령과 쿠노 내각의 소극적 저항 정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파피어마르크의 가치가 폭락하고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은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한스 루터 재무장관과 얄마르 샤흐트 라이히스방크 총재에게 통화 개혁을 맡겼다. 이들은 경제학자 카를 헬페리히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토지 저당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통화인 렌텐마르크를 고안했다.
렌텐마르크는 1913년 재산세인 'Wehrbeitrag'를 기준으로 32억 독일 금마르크 상당의 저당으로 담보되었다. 1조 파피어마르크 = 1 렌텐마르크, 4.2 렌텐마르크 = 1 미국 달러의 비율로 도입되었다.[4]
렌텐마르크는 처음에는 법정 통화가 아니었지만, 비교적 가치가 안정적이었다. 관련 법에 따라 5년 동안 매년 4월과 10월에 두 번 재산에 대한 지불을 통해 통화를 뒷받침했다. 또한, 사유화된 라이히스방크의 어음 할인(discounting)을 금지하여 파피어마르크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했다. 1924년 8월 30일에는 렌텐마르크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독일 라이히스마르크가 새로운 법정 통화가 되었다. 렌텐방크는 1924년 이후에도 존속했으며, 렌텐마르크 지폐와 동전은 1948년까지 유통되었다.
3. 1. 발행 및 교환
1923년 11월 15일 렌텐마르크가 발행되었다. 렌텐마르크와 파피에르마르크의 교환 비율은 1렌텐마르크 = 1조 파피에르마르크였다.[4] 이는 실질적으로 마르크를 1조 분의 1로 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한 것과 같았다. 독일 렌테 은행은 통화 발행량을 32억 렌텐마르크로 제한했다.[5]3. 2. 가치 안정화
렌텐마르크는 법정 통화는 아니었지만, 대중에게 받아들여져 가치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가상이었지만 토지의 가치와 결부되어 발행액이 제한되었고, 정부 기관에 대한 지불 수단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가치가 안정된 통화를 원했던 사람들은 파피에르마르크를 렌텐마르크로 교환했다.[5] 렌텐방크의 발행량 제한과 히얄마르 샤흐트의 통화 정책, 루돌프 힐퍼딩의 재정 정책이 결합하여 인플레이션 진정에 기여했다.3. 3. 한계
렌텐마르크는 법정 통화가 아니었고 금과의 교환은 할 수 없었다. 또한 토지 가치와 직접 교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의 본위에 서는 통화이자 인플레이션 시기에 많이 유통된 "긴급 통화" (노트게르트)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다.[5]4. 렌텐마르크의 기적
1923년 초,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에 의한 루르 점령 이후 빌헬름 쿠노 내각은 소극적 저항 정책으로 대응했다. 이로 인해 독일 산업 중심지인 루르 지역 경제는 거의 마비되었다. 점령 당국은 파업과 사보타주에 체포와 추방으로 대응했고, 쫓겨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공공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경제 활동 둔화로 세수는 급감했고, 정부는 주로 화폐 발행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급증하여 파피어마르크는 폭락했고, 라이히스방크의 외환 보유고는 감소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1923년 8월 쿠노 내각은 사임하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슈트레제만은 10월 초 내각을 개편하여 한스 루터를 재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루터는 라이히스방크의 얄마르 샤흐트와 협력하여 경제학자 카를 헬페리히의 통화 개혁 요소와 루터의 전임자인 루돌프 힐퍼딩의 아이디어를 결합한 통화 안정화 계획을 마련했다. 1923년 10월 15일, 새로운 렌텐방크가 설립되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던 1913년 재산세인 'Wehrbeitrag'를 기준으로, 32억 독일 금마르크 상당의 저당(''Rente''는 독일어로 저당을 의미)으로 담보된 32억 렌텐마르크 상당의 지폐가 발행되었다. 렌텐마르크는 1 렌텐마르크가 1조(1012) 구 마르크와 같고, 1 미국 달러가 4.2 렌텐마르크와 같다는 비율로 도입되었다.
렌텐마르크 발행 법은 5년 동안 매년 4월과 10월에 두 번 재산에 대한 지불을 통해 통화를 뒷받침하도록 했다. 렌텐마르크는 처음에는 법정 통화가 아니었지만, 대중에게 받아들여졌고 그 가치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이 법은 최근 사유화된 라이히스방크가 어음을 할인하는 것을 금지했고, 파피어마르크의 인플레이션은 즉시 멈췄다. 라이히스방크에서 샤흐트가 주도한 통화 정책과 한스 루터 재무부 장관의 재정 정책으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시대는 종식되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의 급격한 진정 과정을 "렌텐마르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5]
4. 1. 인플레이션 진정
히얄마르 샤흐트는 라이히 통화 위원이 되어 독일 렌테 은행(Deutsche Rentenbank, Rente는 지대의 의미)을 설립했다. 독일 렌테 은행은 11월 15일에 국내 토지에 설정한 지대 청구권(토지의 가치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을 본위로 하여 렌텐마르크를 발행했다. 렌텐마르크와 파피에르마르크의 교환 비율은 1:1조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마르크의 1조 분의 1 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한 것과 같았다.[4] 독일 렌테 은행의 통화 발행량은 32억 렌텐마르크, 국채 인수액은 12억 렌텐마르크로 제한되었다. 렌텐마르크는 법정 통화가 아니었고 금과의 교환, 액면 가치의 토지와의 교환도 할 수 없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의 본위에 서는 통화이자 인플레이션기에 많이 유통된 "긴급 통화" (노트게르트)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렌텐마르크는 가상일지라도 토지의 가치와 결부되어 발행액이 제한되었고, 정부 기관에 대한 지불 수단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가치가 안정된 통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앞다투어 파피에르마르크를 렌텐마르크로 교환했다. 그 결과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급속히 진정되었으며[5], 이 현상을 "렌텐마르크의 기적"(das Wunder der Rentenmark)이라고 부른다.4. 2. 경제 안정화
렌텐마르크는 독일 경제 안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전쟁 중 중단했던 금본위제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4년 7월 1 미국 달러 = 4.2 금 마르크였던 환율은 루르 점령과 재정 지출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1923년 1월에는 1달러 = 7,525 마르크가 되었다. 라이히스방크는 정부 발행 국채를 인수하며 초고액 지폐를 계속 발행했고, 그 결과 1923년 11월에는 1달러 = 4조 2,000억 마르크까지 폭락했다. 금의 뒷받침이 없는 독일 마르크는 파피어마르크 (지폐 마르크)라고 불렸다.루돌프 힐퍼딩 재무 장관이 렌텐마르크 도입을 결정했지만 해임되었고,[4] 은행가 얄마르 샤흐트가 라이히 통화 위원이 되어 독일 렌테 은행(Deutsche Rentenbank)을 설립했다. 독일 렌테 은행은 토지 저당을 기반으로 11월 15일 렌텐마르크를 발행했다. 렌텐마르크와 파피에르마르크의 교환 비율은 1:1조로, 이는 사실상 마르크의 1조 분의 1 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한 것과 같았다. 독일 렌테 은행의 통화 발행량은 32억 렌텐마르크, 국채 인수액은 12억 렌텐마르크로 제한되었다. 렌텐마르크는 법정 통화가 아니었고 금과의 교환도 불가능했으며, 토지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해당 액면 가치의 토지와 교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의 본위에 서는 "긴급 통화" (노트게르트)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렌텐마르크는 가상이었지만 토지 가치와 연결되어 발행액이 제한되었고, 정부 기관에 대한 지불 수단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가치가 안정된 통화를 원하던 사람들은 파피에르마르크를 렌텐마르크로 교환했고,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급속히 진정되었다.[5] 이를 "렌텐마르크의 기적"(das Wunder der Rentenmark)이라고 부른다.
1924년 8월 30일, 렌텐마르크에 라이히스마르크라는 새로운 법정 통화가 추가되었다. 렌텐마르크와 라이히스마르크의 교환 비율은 1:1이었다. 렌텐마르크는 1934년까지 라이히스마르크로 대체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후에도 렌텐마르크 지폐가 발행되었고, 1948년까지 통용되었다. 도스 계획 시행과 함께 라이히스마르크가 도입되어 금 본위제로 복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5. 주화 및 지폐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렌텐마르크는 토지와 산업 자산을 담보로 발행되어 안정성을 확보했으며, 1 렌텐마르크는 1조 파피어마르크와 교환되었다.[4]
렌텐마르크는 주화와 지폐 두 가지 형태로 발행되었다. 주화는 1, 2, 5, 10, 50 렌텐페니히 종류로 발행되었으며, 재질은 청동과 알루미늄 청동이었다. 지폐는 1, 2, 5, 10, 50, 100, 500, 1000 렌텐마르크 등 다양한 액면가로 발행되었으며, 1923년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추가 발행이 이루어졌다.
1924년 라이히스마르크가 도입된 이후에도 렌텐마르크는 계속 통용되었으며, 1948년까지 유효했다.[4]
5. 1. 주화
1923년, 1924년, 1925년에 1, 2, 5, 10, 50 렌텐페니히 주화가 발행되었다. 1925년에는 소량의 렌텐페니히 주화만 생산되었고, 1929년에는 소수의 1 렌텐페니히 주화가 주조되었다. 1 렌텐페니히와 2 렌텐페니히는 청동으로, 5, 10, 50 렌텐페니히 주화는 알루미늄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이 주화는 바이마르 공화국 및 초기 나치 독일 시대의 라이히스마르크 주화와 동일한 디자인 특징과 모티브를 가지고 있었다.5. 2. 지폐
1, 2, 5, 10, 50, 100, 500, 1000 렌텐마르크 등 다양한 액면가의 렌텐마르크 지폐가 발행되었다. 최초의 지폐는 1923년 11월 1일에 발행되었으며, 이후 1925년(10, 50 렌텐마르크), 1926년(5 렌텐마르크), 1934년(50 렌텐마르크), 1937년(1, 2 렌텐마르크)에 추가 발행되었다.

마지막 렌텐마르크 지폐는 1948년까지 유효했다.[4]
6. 의의 및 영향
렌텐마르크 도입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렌텐마르크는 토지 자산을 기반으로 발행되어 가치가 안정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신뢰하여 파피어마르크 대신 사용하면서 인플레이션이 급격히 진정되었다.[5] 이를 "렌텐마르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렌텐마르크는 법정 통화가 아니었고, 금과의 교환도 불가능했으며, 토지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토지와 교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즉, 렌텐마르크는 일종의 임시방편적인 성격을 가진 "긴급 통화"였다.[5]
1924년 8월 30일에는 렌텐마르크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라이히스마르크가 새로운 법정 통화로 도입되었다. 렌텐마르크는 1948년까지 통용되었으며, 1949년에는 독일 렌테 은행의 자산을 바탕으로 독일 농림 금융 공고가 설립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Die Währungsreform 1923
https://www.dhm.de/l[...]
2015-08-06
[2]
웹사이트
Das Kabinett Cuno – Einleitung (German)
https://www.bundesar[...]
Bundesarchiv
2015-01-06
[3]
웹사이트
Biografie Hans Luther
http://www.deutsche-[...]
Bayerische Nationalbibliothek
2015-01-19
[4]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Biographie: Rudolf Hilferding
http://www.dhm.de/le[...]
[5]
서적
Die Stabilisierung der Mark
George Allen & Unwin Ltd.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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