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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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으로, 프랑스 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이집트 시리아 원정에 참전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지시로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며, 이 중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루이를 네덜란드 왕국의 국왕으로 임명했지만, 루이는 네덜란드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프랑스의 요구에 반대하여 퇴위했다. 이후 루이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이탈리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프랑스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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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보나파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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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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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 호라ント 국왕 |
재위 기간 | 1806년 6월 5일 – 1810년 7월 1일 |
로마자 표기 | Rodebijke 1se |
별칭 | 상-루 백작 |
본명 |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출생일 | 1778년 9월 2일 |
출생지 | , 코르시카 섬, 아작시오 |
사망일 | 1846년 7월 25일 |
사망지 | [[파일:Flag of the Grand Duchy of Tuscany (1840).svg|border|25x20px]] 토스카나 대공국, 리보르노 |
매장지 | , 일-드-프랑스 지역, 상-루-라-포레 |
왕가 | 보나파르트 가문 |
아버지 |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 |
어머니 |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 |
통치 | |
전임 | 없음 |
후임 | 루이 2세 |
가문 | |
가문의 수장 | 보나파르트 가문 |
가문 수장 재임 시작 | 1844년 7월 28일 |
가문 수장 재임 종료 | 1846년 7월 25일 |
전임 가문 수장 | 조제프, 쉬르빌리에 백작 |
후임 가문 수장 | 나폴레옹 3세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1802년 결혼, 1837년 이혼) |
자녀 | 나폴레옹-샤를 나폴레옹-루이 샤를 루이-나폴레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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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루이는 1778년 9월 2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보나파르트와 레티치아 라몰리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제프, 나폴레옹, 뤼시앵, 엘리사의 남동생이었으며, 폴린, 카롤린, 제롬의 형이었다. 루이의 대부는 코르시카 지사였던 마르뵈프 씨였고, 대모는 그의 부모와 친분이 있던 관리의 아내 베르트랑 드 부슈포른 부인이었다.[1]
루이 보나파르트의 초기 경력은 군대에서 시작되었으며, 형 나폴레옹과 함께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시리아 원정에 참전했다. 이 원정들 이후 류머티즘을 앓게 되었다. 형 나폴레옹 덕분에 프랑스 군대에 임관하여 제4 포병 연대의 중위가 되었고, 이후 나폴레옹의 참모로서 보좌관을 지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 중 루이를 카르노에게 추천하여 대위로 진급시켰다. 그는 25세의 나이에 장군이 되었으나, 스스로 너무 짧은 시간에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느꼈다.
프랑스로 돌아온 루이는 총재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나폴레옹의 쿠데타 계획에 참여했다.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루이와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의 결혼을 주선했다. 오르탕스는 황후 조제핀의 딸이자 나폴레옹의 의붓딸이었다. 루이와 오르탕스는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2. 1. 결혼

루이는 1802년 1월 4일,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다. 오르탕스는 사망한 장군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백작과 그의 아내 조제핀 타셰 드 라 파제리 사이의 딸이었다. 조제핀은 루이의 형인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이었기 때문에, 오르탕스는 루이에게 의붓 조카이기도 했다.
이 결혼은 강요된 것이었으며, 부부가 세 아들을 낳을 정도로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다. 일반적으로 나폴레옹을 제외한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은 보아르네 가문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루이는 음침한 성격이었던 반면, 어머니 조제핀을 닮은 오르탕스는 쾌활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서로 맞지 않았다. 오르탕스 역시 혼외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
루이는 오르탕스가 낳은 세 아들을 법적으로 인정했지만, 그들의 친자 관계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 | 1802년 10월 10일 | 1807년 5월 5일 | 네덜란드 왕세자. 4세의 나이로 사망.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안치 후 생-르-라-포레에 묻힘. |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 | 1804년 10월 11일 | 1831년 3월 17일 | 형의 사망 후 네덜란드 왕세자. 1810년 아버지 퇴위 후 8일간 홀란트 국왕 루이 2세로 즉위. 베르크 대공국 군주(1809–1813). 홍역으로 사망 후 생-르-라-포레에 묻힘. |
샤를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1808년 | 1873년 | 파리 출생. 훗날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1852–1870)가 됨. |
나폴레옹은 1795년 성립된 프랑스 혁명 전쟁의 결과물인 바타비아 공화국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영국 침공의 발판으로 네덜란드를 완전히 통제하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1806년 6월 5일, 바타비아 공화국을 폐지하고 네덜란드 왕국(홀란트 왕국)을 세워 동생 루이를 왕위에 앉혔다. 나폴레옹은 루이가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순한 프랑스 관할관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했다.[2][3]
결국 루이는 1810년 오르탕스와 이혼했다. 세 아들 중 막내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오르탕스가 맡아 길렀다.
3. 홀란트 국왕 (1806–1810)
그러나 루이는 형의 의도와 달리 네덜란드의 독립적인 군주로서 책임감 있게 통치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네덜란드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스스로를 네덜란드식 이름인 '''로드비크 1세'''(Lodewijk I|로드베이크 1세nl)라 칭하며, 프랑스인이 아닌 네덜란드인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네덜란드인들의 존경을 얻었으며, 1807년 레이덴 화약 폭발 사고나 1809년 대홍수와 같은 재난 발생 시 직접 구호 활동을 지휘하여 '선량왕 루이'(Lodewijk de Goede|로드베이크 더 후더nl)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루이의 독자적인 통치 방식과 네덜란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형 나폴레옹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했다. 루이는 나폴레옹 법전 도입 등 프랑스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징병제 도입이나 대륙 봉쇄령 강화 등 나폴레옹의 핵심 요구 사항에는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특히 대륙 봉쇄령을 엄격히 시행하지 않아 영국과의 밀무역이 성행하자 나폴레옹의 분노를 샀다.
결정적으로 1809년 영국군이 네덜란드의 발헤렌 섬에 상륙했을 때(발헤렌 원정), 루이가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자 나폴레옹은 이를 빌미로 루이의 퇴위를 압박했다. 결국 루이는 1810년 7월 1일, 차남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그의 퇴위 직후 네덜란드 왕국은 프랑스 제1제정에 병합되었다.[5]
3. 1. 네덜란드 통치와 나폴레옹과의 갈등
나폴레옹은 기존의 바타비아 공화국 체제를 탐탁지 않게 여겨, 1806년 6월 5일 이를 네덜란드 왕국으로 바꾸고 동생 루이를 왕위에 앉혔다. 나폴레옹은 루이가 단순히 네덜란드를 관리하는 프랑스 관할관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루이는 네덜란드의 책임감 있고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자신만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 국민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네덜란드어를 배우려 노력했으며, 스스로를 네덜란드식 이름인 '''로드비크 1세'''(Lodewijk I)로 칭하며 프랑스인이 아닌 네덜란드인임을 선언했다.[2][3] 초기에는 네덜란드어 발음이 서툴러 자신을 "홀란트의 왕"(Koning van Holland)이 아닌 "홀란트의 토끼"(Konijn van 'Olland)라고 소개하는 실수를 하기도 했으나, 네덜란드어를 배우려는 그의 진지한 노력은 신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스스로를 네덜란드인이라고 선언한 루이는 자신의 궁정을 네덜란드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궁정 신료들과 (대부분 나폴레옹이 임명한) 대신들에게 네덜란드어만을 사용하고 프랑스 시민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이 요구는 당시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그의 아내 오르탕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루이와 오르탕스의 관계는 이 일로 더욱 악화되었다. 오르탕스는 마지못해 네덜란드로 왔지만, 의도적으로 루이를 피하려 했다.
네덜란드 통치 기간 동안 루이는 수도를 정하지 못하고 암스테르담, 헤이그, 위트레흐트 등 여러 도시를 오가며 십여 차례나 수도를 옮겼다. 심지어 한 부유한 네덜란드 상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곳이 마음에 들어 주인을 내쫓고 잠시 거주하기도 했으나, 7주 만에 다시 거처를 옮겼다. 이러한 잦은 이동은 그를 따라다녀야 했던 궁정에 큰 혼란을 야기했고, 유럽의 외교 사절단이 나폴레옹에게 루이가 한 곳에 정착하도록 청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오르탕스는 루이가 네덜란드에 있는 동안 파리에서 아들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와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를 낳았다. 1806년 루이는 아들들을 네덜란드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오르탕스는 아들이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루이가 형 나폴레옹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오르탕스의 편을 들었다. 나폴레옹은 조카를 자신의 궁정에 머물게 했고,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그를 프랑스 황위 계승자로 지명하기도 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통치 기간 중 두 차례의 큰 비극이 발생했다. 1807년 레이덴 시 중심부에서 화약을 실은 선박이 폭발한 사고와 1809년 네덜란드를 덮친 대규모 홍수였다. 두 사건 모두 루이는 직접 현장을 찾아 구호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선량왕 루이'(Lodewijk de Goede)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형제여, 어떤 왕에 대해 사람들이 선량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통치에 실패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4] 루이는 내정과 경제 부흥에도 관심을 기울여 나폴레옹 법전을 도입하고 가톨릭 교회를 복권시키는 등의 정책을 추진했으나, 징병제 도입은 거부하고 대륙 봉쇄령에도 반대하는 등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루이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첫째 이유는 나폴레옹이 네덜란드 투자자들이 보유한 프랑스 국채 가치를 3분의 2로 삭감하려 하여 네덜란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려 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나폴레옹이 루이의 퇴위를 요구하는 직접적인 구실이 되었다.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포함한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모든 지역에서 군대를 징발하려 했으나, 루이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나폴레옹은 루이가 프랑스의 이익보다 네덜란드의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비난하며 네덜란드 주둔 프랑스군 대부분을 철수시켰고, 약 9,000명의 수비병만 남겼다.
이런 상황에서 1809년, 영국군 40,000명이 앤트워프와 플러싱을 점령하기 위해 발헤렌 원정을 감행하며 상륙했다. 루이는 스스로 왕국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프랑스가 미래의 스웨덴 국왕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지휘하는 80,000명의 민병대를 파견하여 침략을 격퇴했다. 나폴레옹은 루이가 네덜란드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퇴위를 제안했지만, 루이는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 군대의 네덜란드 점령을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1810년 7월 1일, 루이는 자신의 둘째 아들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그는 7월 2일 또는 3일에 하를럼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우디노 원수가 7월 4일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나폴레옹은 7월 9일 라부예 칙령을 통해 네덜란드를 프랑스 제국에 공식적으로 합병했다.[5] 루이의 아들 나폴레옹 루이(루이 2세)는 불과 10일간 왕위에 있었으며, 이후 샤를 프랑수아 르브룅이 총독으로 임명되어 암스테르담에 주재했다.
3. 2. 주요 사건
루이는 형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시리아 원정에 참가했으나, 이후 류머티즘을 앓게 되었다.
형의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 | 1802년 ~ 1807년 | |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 | 1804년 ~ 1831년 | 홀란트 국왕 루이 2세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1808년 ~ 1873년 |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
그러나 루이와 오르탕스는 성격 차이로 인해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이후 네덜란드에는 1795년 프랑스의 위성 국가인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졌다.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 기지로서 네덜란드를 통제하기 위해, 1806년 6월 5일 바타비아 공화국을 네덜란드 왕국(홀란트 왕국)으로 바꾸고 동생 루이를 왕위에 앉혔다. 나폴레옹은 루이가 단순히 프랑스의 대리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지만, 루이는 네덜란드의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고자 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배우려 노력하고 스스로를 네덜란드식 이름인 '''로드비크 1세'''(Lodewijk I|로드베이크 1세nl)로 칭하며 네덜란드인임을 강조했다.[2][3] 처음에는 네덜란드어가 서툴러 자신을 '홀란트의 왕'(Koning van Holland|코닝 판 홀란트nl) 대신 '홀란드의 토끼'(Konijn van 'Olland|코네인 판 올란트nl)라고 소개하는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언어를 배우려는 그의 진지한 노력은 네덜란드 국민들의 존경을 얻었다.
루이는 자신의 궁정 신하들에게 네덜란드어 사용을 강요하고 프랑스 시민권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아내 오르탕스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오르탕스는 마지못해 네덜란드로 왔으나 루이를 피하려 했다. 루이는 재위 기간 동안 암스테르담, 헤이그, 위트레흐트 등으로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겨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오르탕스는 파리에서 두 아들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와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를 낳았다. 루이가 아들들을 네덜란드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오르탕스는 거부했고, 나폴레옹은 오르탕스의 편을 들었다.
루이의 통치 기간 중 1807년 레이덴에서의 화약선 폭발 사고와 1809년 대규모 홍수라는 두 차례의 큰 재난이 있었다. 루이는 두 사건 현장에서 직접 구호 활동을 지휘하여 '선량왕 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어떤 왕이 선량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통치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고 비꼬았다.[4]
루이는 네덜란드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나폴레옹의 정책에 반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는 나폴레옹 법전 도입과 가톨릭 교회 복권 등 내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징병제 도입과 대륙 봉쇄령 시행에는 소극적이었다. 특히 대륙 봉쇄령을 엄격히 시행하지 않아 영국과의 밀무역이 성행하자 나폴레옹의 불만을 샀다. 또한 나폴레옹이 네덜란드 투자자들이 보유한 프랑스 국채 가치를 삭감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여 네덜란드 경제를 보호하려 했다.
1809년, 영국군 4만 명이 젤란트 주의 발헤렌 섬에 상륙하여 발헤렌 원정을 감행했다. 당시 네덜란드 주둔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준비로 대부분 철수하여 9천 명의 수비병만 남아 있었고, 루이는 영국군의 침공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가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지휘하는 8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영국군을 격퇴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빌미로 루이에게 왕국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며 퇴위를 강요했다. 루이는 프랑스 군대의 네덜란드 주둔을 불법으로 선언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1810년 7월 1일 차남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그는 오스트리아로 망명길에 올랐다. 우디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7월 4일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나폴레옹은 7월 9일 라부예 칙령으로 네덜란드를 프랑스 제국에 병합시켰다.[5] 네덜란드 총독으로는 샤를프랑수아 르브룅이 임명되었다.
같은 해인 1810년, 루이는 오르탕스와 이혼했다. 셋째 아들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은 오르탕스가 양육했다.
3. 3. 퇴위
루이 보나파르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주요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형 나폴레옹은 네덜란드 투자자들이 보유한 프랑스 대출의 가치를 3분의 2로 줄이려 했으며, 이는 네덜란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조치였다. 루이는 네덜란드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형의 정책에 반대했다. 특히 대륙 봉쇄령 시행에 소극적이었고, 네덜란드에서의 징병제 도입을 거부했으며, 밀무역을 효과적으로 단속하지 못했다. 이는 나폴레옹의 불만을 샀다.[4]
둘째,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며 네덜란드를 포함한 통제 하의 모든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 루이는 네덜란드 군대의 차출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폴레옹은 루이가 프랑스보다 네덜란드의 이익을 앞세운다고 비난하며, 네덜란드에 주둔하던 프랑스군 대부분을 철수시켜 약 9,000명의 수비병만 남겼다.
결정적인 계기는 1809년 영국군 40,000명이 발헤렌 원정을 통해 앤트워프와 플러싱(젤란트 주)을 점령하려 시도한 사건이었다. 약화된 군대로는 왕국을 방어할 수 없었던 루이를 대신해, 프랑스는 미래의 스웨덴 국왕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지휘하는 80,000명의 민병대를 파견하여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나폴레옹은 이 사건을 빌미로 루이에게 네덜란드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며 퇴위를 요구했다. 루이는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 군대의 네덜란드 점령을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압박은 계속되었고, 1810년에는 2만 명의 프랑스 군대가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 결국 루이는 1810년 7월 1일, 자신의 둘째 아들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그는 7월 2일 또는 3일에 하를렘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우디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7월 4일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나폴레옹 루이는 명목상 '루이 2세'로 불렸으나, 그의 통치는 단 10일에 그쳤다. 나폴레옹은 7월 9일 라부예 칙령을 통해 네덜란드 왕국을 프랑스 제1제정에 공식적으로 병합했으며,[5] 샤를 프랑수아 르브룅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암스테르담에 주재시켰다.
같은 해인 1810년, 루이는 아내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와 이혼했다.
4. 망명과 사망
1810년 형 나폴레옹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후,[6] 루이 보나파르트는 파리 근처 생-뢰-라-포레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따 '생-뢰 백작'(comte de Saint-Leufra)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7] 그는 이미 1808년 명예직인 프랑스 대원수로 임명된 바 있었다.
왕위를 빼앗긴 루이에게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는 망명을 제안했다. 그는 1811년부터 1813년까지 그라츠에서 지내며 글쓰기와 시 창작에 몰두했다.[8] 러시아 원정 실패 소식을 들은 루이는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내 네덜란드 왕위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네덜란드 방문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네덜란드 국왕 빌럼 1세에게 거절당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는 1840년 그의 방문을 허락했다. 루이는 가명으로 네덜란드를 여행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가 이전 국왕임을 알아보고 호텔 창문 아래 모여 환호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옛 백성들의 애정에 감동했다고 한다.
1844년 그의 맏형 조제프가 사망하자,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은 루이를 프랑스 황제의 정당한 계승자로 여겼다. 그러나 루이 본인은 황위 계승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미래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의 쿠데타 시도 실패로 프랑스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1846년 7월 25일 리보르노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 일드프랑스의 생-뢰-라-포레에 안장되었다.
5. 자녀
루이는 1802년 1월 4일, 형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다. 오르탕스는 루이의 의붓 조카이기도 했다. 이 결혼은 강요된 것이었고, 루이의 음침한 성격과 오르탕스의 쾌활하고 사교적인 성격이 맞지 않아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비록 세 아들을 낳았지만 사랑 없는 관계였으며, 오르탕스에게는 혼외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루이 역시 아들들의 친부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루이와 오르탕스 사이에는 공식적으로 세 아들이 있었다.
-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 (1802년 10월 10일 ~ 1807년 5월 5일): 네덜란드 왕세자였으나 4살 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 (1804년 10월 11일 ~ 1831년 3월 17일): 형의 사망 후 네덜란드 왕세자가 되었고, 아버지가 퇴위한 후 1810년 7월 1일부터 9일까지 짧은 기간 동안 홀란트 국왕 '''루이 2세'''로 즉위했다. 홍역으로 사망했다.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08년 ~ 1873년):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재위 1852년 ~ 1870년)가 되었다.
6. 기타
나폴레옹은 형제들을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고위직에 임명했다. 루이 보나파르트 역시 1804년에 Grand Orient de Francefra의 부 그랜드 마스터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그랜드 마스터는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였다.[11]
참조
[1]
서적
Napoleon dans se jeunesse
Société d'Éditions Littéraires et Artistiques
1907
[2]
서적
War, Public Opinion and Policy in Britain, France and the Netherlands, 1785-1815
Springer
2017
[3]
서적
Napoleon: A Biographical Companion
ABC-CLIO
[4]
서적
Bonaparte
https://archive.org/[...]
Knight Publications
[5]
서적
Napoleon's Empire: European Politics in Global Perspective
Palgrave Macmillan
2016
[6]
서적
Napoleon and His Family: Moscow-Saint Helena, 1813–1821
https://books.google[...]
Allen & Unwin
[7]
서적
La famille Bonaparte depuis 1264
https://books.google[...]
Vergne
[8]
서적
Reponse à sir Walter Scott, sur son histoire de Napoleon
https://books.google[...]
C.J. Trouve
[9]
문서
McMillan
[10]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Louis Bonaparte king of Holland
https://www.britanni[...]
[11]
웹사이트
Napoleon I
http://freemasonry.b[...]
2015-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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