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 매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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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오 매케리는 미국의 영화 감독, 작가, 프로듀서이다. 1937년 영화 《끔찍한 진실》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1944년에는 《나의 길을 가련다》로 감독상, 작품상, 각본상(원작)을 수상하며 3관왕을 차지했다. 그는 로렐과 하디의 스크린 캐릭터 개발을 지도하여 슬랩스틱 코미디의 명가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유성 영화 시대에 장편 영화 연출에 집중하여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매케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작품은 종종 사회 문제와 보수적인 정치적 성향을 반영했다. 프랑스 감독 장 르누아르는 매케리를 "다른 어떤 할리우드 감독보다 사람을 더 잘 이해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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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 매케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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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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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토머스 레오 매커리 |
출생일 | 1898년 10월 3일 |
출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사망일 | 1969년 7월 5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 |
배우자 | 스텔라 마틴 (1920년 결혼) |
자녀 | 1명 |
학력 |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굴드 로 스쿨 |
직업 | 영화 감독 영화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
정당 | 미국 공화당 |
종교 | 가톨릭교 |
안장지 | 홀리 크로스 공동묘지 (컬버 시티) |
친척 | 레이 매커리 (형제) |
수상 내역 | |
아카데미 감독상 | 1937년 신혼 도중기 1944년 나의 길을 가련다 |
아카데미 원안상 | 1944년 나의 길을 가련다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 1944년 나의 길을 가련다 |
골든 글로브상 감독상 | 1944년 나의 길을 가련다 |
2. 생애와 경력
리오 매케리는 캘리포니아주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졸업 후 변호사 일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광산 개발 사업도 실패했다. 1918년 친구 소개로 유니버설 영화사에 입사, 1920년 토드 브라우닝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1]
1923년 할 로치의 권유로 '우리 갱' 시리즈를 시작으로 코미디언들의 개그 작가로 활동했다. 찰리 체이스와 단편 영화를 제작, 연출하며 멘토 관계를 맺었고,[6] 스탠 로렐과 올리버 하디 콤비를 발굴하여 슬랩스틱 코미디의 명가로 이름을 알렸다.
유성 영화 시대에 장편 영화 연출에 집중, 에디 캔터, 마르크스 형제, 메이 웨스트 등 당대 최고 코미디언들과 작업하며 명성을 이어갔다. 1937년 스크루볼 코미디 《끔찍한 진실》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맞았다.[1]
1944년 빙 크로스비 주연의 《나의 길을 가련다》로 두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고, 속편 《성 메리 종》(1945)도 성공을 거두었다.[1] 이 시기 매케리는 미국 최고 소득을 올린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반공주의 성향 영화를 만들면서 대중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57년 《애수》로 건재함을 과시했고, 《깃발을 들고》(1958) 등을 연출했다.[8] 마지막 작품은 《사탄은 잠들지 않는다》(1962)이다.
매케리는 즉흥 연출의 대가로, 프랑스 감독 장 르누아르는 "할리우드 감독 중 사람을 가장 잘 이해했다"라고 극찬했다.[11]
2. 1. 초기 생애
캘리포니아주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세인트 조셉 가톨릭 학교와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를 다녔다.[1] 그의 아버지는 토마스 J. 매케리였는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그를 "세계 최고의 프로모터"라고 불렀다. 리 매케리는 나중에 해럴드 로이드와 함께 권투 코미디 영화 ''더 밀키 웨이''(1936)를 만들었다.[2]USC 골드 법학대학원을 졸업했고[3] 법학 외에도 채굴, 권투, 작곡을 시도했다가[4] 1919년 토드 브라우닝의 조감독이 되었다.[1] 매케리를 브라우닝에게 소개한 사람은 매케리의 소년 시절 친구이자 배우이자 미래의 동료 감독인 데이비드 버틀러였다.[5] 브라우닝은 매케리의 뛰어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배우가 아닌 작가로서 창작 쪽에 종사하도록 설득했다. 그 후 할 로치 스튜디오에서 기량을 연마했다. 로치는 매케리가 스포츠 클럽에서 함께 핸드볼을 친 후 유머 감각에 감탄하여 1923년에 그를 개그맨으로 고용했다. 처음에는 ''우리 갱'' 시리즈와 다른 스튜디오 스타들을 위한 개그를 썼고, 그 후 찰리 체이스와 함께 2릴러를 포함한 단편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했다. 체이스는 매케리의 멘토가 되었다. 1940년 코미디언이 사망하자 매케리는 "내가 가진 성공이나 가질 수 있는 성공은 모두 그의 도움 덕분이며, 그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모두 대중적인 노래를 쓰려는 취미를 공유했기 때문에 특히 잘 맞았다.
나중에 인터뷰에 따르면, 매케리는 로치에 재직하면서 스탠 로렐과 올리버 하디를 함께 캐스팅했고[6] 그들의 스크린 캐릭터 개발을 지도하여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는 코미디 팀 중 하나를 만들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듀오의 단편 영화인 ''위 포 다운''(1928), ''리버티''(1929)와 ''롱 어게인''(1929)의 감독으로만 출연했지만, 많은 시나리오를 쓰고 다른 사람들의 연출을 감독했다. 1929년까지 스튜디오의 제작 부사장이었다.
2. 2. 할 로치 스튜디오 시절
1923년 할 로치의 권유로 '우리 갱' 시리즈를 시작으로 많은 코미디언들의 개그 작가로 재능을 발휘했다. 찰리 체이스와 함께 2릴러를 포함한 단편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하였는데, 체이스는 매케리의 멘토가 되었다. 1940년 체이스가 사망하자 매케리는 "내가 가진 성공이나 가질 수 있는 성공은 모두 그의 도움 덕분이며, 그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6]매케리는 로치에 재직하면서 스탠 로렐과 올리버 하디를 함께 캐스팅하고 그들의 스크린 캐릭터 개발을 지도하여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는 코미디 팀 중 하나를 만들었다.[6] 그는 공식적으로는 듀오의 단편 영화인 ''위 포 다운''(1928), ''리버티''(1929)와 ''롱 어게인''(1929)의 감독으로만 출연했지만, 많은 시나리오를 쓰고 다른 사람들의 연출을 감독했다.
1929년까지 그는 스튜디오의 제작 부사장이었다. 이 시기에는 로치가 아일랜드계 미국인 매케리와 유대계 미국인 배우를 함께 캐스팅하여 일련의 "방언 코미디"를 만들었을 때 맥스 데이비슨과 함께 연출한 단편 영화가 덜 알려져 있다.
2. 3. 장편 영화 연출
1931년 글로리아 스완슨 주연의 《인디스크리트》, 1932년 에디 캔터 주연의 《스페인에서 온 아이》, 1933년 마르크스 형제 주연의 《오리 수프》, 1934년 W.C. 필즈 주연의 《여섯 가지 종류》, 메이 웨스트 주연의 《나인티스의 벨》을 감독했다.[1]1937년작 《내일 길을 열어주세요》는 대공황 기간 동안 경제적, 가족적 이유로 노부부가 헤어져야 하는 이야기로, 유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매케리는 해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뉴욕 현대 미술관의 영구 컬렉션에 선정되어 중요성을 일찍이 인정받았다.[1] 이후 이 영화는 매케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37년 후반, 매케리는 아이린 던과 캐리 그랜트 주연의 스크루볼 코미디인 《끔찍한 진실》로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1] 이 영화는 캐리 그랜트의 독특한 스크린 페르소나를 탄생시켰으며, 매케리가 대부분 고안했다(그랜트는 매케리의 많은 매너리즘을 모방했다). 작가 겸 감독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끔찍한 진실》 이후, 가벼운 코미디에 관해서는 캐리 그랜트가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2등이었다."라고 언급한다.
1944년에는 빙 크로스비가 연기한 젊은 신부 척 오말리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나의 길을 가련다》를 연출하여 두 번째 감독상을 받았고, 크로스비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1] 이 히트작으로 매케리는 1944년 미국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올렸고, 후속작인 《성 메리 종》(1945)은 크로스비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짝지어 매케리가 새로 설립한 제작사에서 제작했으며, 마찬가지로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반공산주의 영화 《내 아들 존》(1952)은 흥행에 실패했다.[1] 1957년에는 《애수》를 공동 집필, 제작, 감독했다. 이 영화는 캐리 그랜트와 데보라 카가 출연하며 아이린 던과 샤를 보이에가 출연한 1939년 영화 《러브 어페어》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8]
그는 이 히트작에 이어 폴 뉴먼과 조앤 우드워드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깃발을 들고》(1958)를 만들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저조한 평가를 받은 《사탄은 잠들지 않는다》(1962)였다.
2. 4. 전성기
USC 골드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3] 법학 외에도 채굴, 권투, 작곡을 시도했다가,[4] 1919년 토드 브라우닝의 조감독이 되었다.[1] 매케리를 브라우닝에게 소개한 사람은 매케리의 소년 시절 친구이자 배우이자 미래의 동료 감독인 데이비드 버틀러였다.[5] 브라우닝은 매케리의 뛰어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배우가 아닌 작가로서 창작 쪽에 종사하도록 설득했다. 매케리는 그 후 할 로치 스튜디오에서 기량을 연마했다. 로치는 매케리가 스포츠 클럽에서 함께 핸드볼을 친 후 유머 감각에 감탄하여 1923년에 그를 개그맨으로 고용했다. 매케리는 처음에는 ''우리 갱'' 시리즈와 다른 스튜디오 스타들을 위한 개그를 썼고, 그 후 찰리 체이스와 함께 단편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했다. 1940년 코미디언이 사망하자 매케리는 "내가 가진 성공이나 가질 수 있는 성공은 모두 그의 도움 덕분이며, 그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나중에 인터뷰에 따르면, 매케리는 로치에 재직하면서 스탠 로렐과 올리버 하디를 함께 캐스팅했고,[6] 그들의 스크린 캐릭터 개발을 지도하여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는 코미디 팀 중 하나를 만들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듀오의 단편 영화인 ''위 포 다운''(1928), ''리버티''(1929)와 ''롱 어게인''(1929)의 감독으로만 출연했지만, 많은 시나리오를 쓰고 다른 사람들의 연출을 감독했다. 1929년까지 그는 스튜디오의 제작 부사장이었다.
유성 영화 시대에 매케리는 장편 영화 연출에 집중하여 글로리아 스완슨(''인디스크리트'', 1931), 에디 캔터(''스페인에서 온 아이'', 1932), 마르크스 형제(''오리 수프'', 1933), W.C. 필즈(''여섯 가지 종류'', 1934) 그리고 메이 웨스트(''나인티스의 벨'', 1934)의 작품들을 감독했다.
1937년 그의 작품인 ''내일 길을 열어주세요''는 대공황 기간 동안 경제적, 가족적 이유로 노부부가 헤어져야 하는 이야기였으나, 흥행에 실패했고 감독은 해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뉴욕 현대 미술관의 영구 컬렉션에 선정되어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1937년 후반에 컬럼비아에 초청받은 매케리는 아이린 던과 캐리 그랜트가 출연하는 스크루볼 코미디인 ''끔찍한 진실''로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이 영화는 캐리 그랜트의 독특한 스크린 페르소나를 탄생시켰다. 작가/감독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끔찍한 진실'' 이후, 가벼운 코미디에 관해서는 캐리 그랜트가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2등이었다."라고 언급한다.
''끔찍한 진실''의 성공 이후 매케리는 프랭크 카프라처럼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진 컬럼비아 전속 감독이 될 수도 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길을 갔고, ''카우보이 앤 더 레이디''가 될 이야기를 샘 골드윈에게 팔고 나서 RKO로 옮겨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940년의 자동차 사고로 인해 그는 ''내 사랑하는 아내''를 연출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 영화는 ''끔찍한 진실''의 속편으로 같은 두 배우가 출연할 예정이었으며, 결국 가슨 카닌에게 넘어갔지만 매케리는 일부 편집 작업에 참여했다.[7]
매케리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도였고 사회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1940년대에 그의 작품은 더욱 진지해지고 정치적 성향은 더욱 보수적으로 변했다. 1944년에 그는
2. 5. 후기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반공산주의 영화 ''내 아들 존''(1952)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러나 5년 후, 그는 ''애수''를 공동 집필, 제작, 감독했다. 이 영화는 캐리 그랜트와 데보라 카가 출연하며 아이린 던과 샤를 보이에가 출연한 1939년 영화 ''러브 어페어''를 정확히 같은 시나리오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8] 1993년, 노라 에프론의 매우 인기 있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애수''를 너무 자주 언급하여, 구작 영화가 재상영, 케이블 TV, 비디오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매케리의 가장 인기 있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 그는 이 히트작에 이어 폴 뉴먼과 조앤 우드워드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깃발을 들고''(1958)를 만들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저조한 평가를 받은 ''사탄은 잠들지 않는다''(1962)였는데, 이 영화는 ''내 아들 존''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었다.오토르 비평가 앤드류 사리스는 매케리가 "미국 영화 역사에서 즉흥 연주의 원칙을 나타낸다"라고 말했다.[9] 매케리는 경력 대부분 동안, 무성 영화에 뿌리를 둔 촬영 방식으로, 이전에 스튜디오와 배우에게 제공된 시나리오의 스토리 아이디어, 사업의 비트, 대화를 대폭 변경했다. 그는 종종 피아노에 앉아 종종 짜증이 난 스탭들이 영감을 기다리는 동안 낙서를 했다. 빙 크로스비는 ''나의 길을 가련다''에 대해 "나는 아마도 매일 촬영의 75%가 리 매케리에 의해 세트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10]
이 기술은 완성된 작품에 약간의 어색함과 거친 면을 야기했지만, 매케리의 많은 장면에는 일반적인 주류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부족한 신선함과 즉흥성이 있었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작업한 감독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료 코미디 감독 그레고리 라 카바, 하워드 혹스 그리고 조지 스티븐스 - 후자는 로치 졸업생이기도 하다 - 는 세트에서 즉흥 연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감독 장 르누아르는 "리 매케리는 다른 어떤 할리우드 감독보다 사람을 더 잘 이해했다."라고 극찬했다.[11]
3. 사망
레오 매케리는 1969년 7월 5일, 향년 70세의 나이로 폐기종으로 사망했다.[12][13] 그는 캘리포니아주 컬버시티에 있는 홀리 크로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남동생인 영화 감독 레이 매케리는 21년 전에 사망했다.
4. 작품 목록
리오 매케리는 감독, 제작, 각본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영화인이다. 다음은 매케리가 참여한 작품 목록이다.
- 식은 죽 먹기
- 레드 갭의 러글스
- 내일을 위한 길
- 이혼 소동
- 러브 어페어 (1939년 영화)
- 마이 페이버릿 와이프
- 나의 길을 가련다
- 성 메리 성당의 종
- 러브 어페어 (1957년 영화)
- 하베아스 코르푸스 (1928, 단편) - 감독
- 패스 더 그레이비 (1928, 단편) - 감독
- 빅 비즈니스 (1929, 단편) - 감독
- 카우보이와 숙녀 (1938) - 스토리 작가
- 나의 마음에 드는 아내 (1940) - 프로듀서, 스토리 작가
4. 1. 감독 작품
연도 | 제목 | 영어 제목 | 비고 |
---|---|---|---|
1921 | 소사이어티 시크릿 | Society Secrets | |
1924 | 올 웻 | All Wet | 단편 |
1925 | 삶은 끔찍하지 않은가? | 'Isnt Life Terrible?'' | 단편 |
1926 | 롱 플리브 더 킹 | Long Fliv the King | 단편 |
1926 | 마이티 라이크 어 무스 | Mighty Like a Moose | 단편 |
1927 | 슈가 대디스 | Sugar Daddies | 단편 |
1928 | 결혼한 남자는 집에 가야 할까? | Should Married Men Go Home? | 단편, 각본 |
1928 | 위 포 다운 | We Faw Down | 단편 |
1929 | 리버티 | Liberty | 단편, 각본 |
1929 | 롱 어게인 | Wrong Again | 단편 |
1929 | 더 소포모어 | The Sophomore | |
1929 | 레드 핫 리듬 | Red Hot Rhythm | |
1930 | 와일드 컴퍼니 | Wild Company | |
1930 | 파트 타임 와이프 | Part Time Wife | |
1930 | 렛츠 고 네이티브 | Let's Go Native영어 | |
1930 | 극락도 만원 | Let's Go Native영어 | |
1931 | 인디스크릿 | Indiscreet | |
1932 | 스페인에서 온 아이 | The Kid from Spain | |
1932 | 칸타의 투우사 | The Kid from Spain영어 | |
1933 | 덕 수프 | Duck Soup | |
1933 | 나는 오리다 | Duck Soup영어 | |
1934 | 식스 오브 어 카인드 | Six of a Kind | |
1934 | 나인티스의 벨 | Belle of the Nineties | |
1934 | 죄는 아니야 | Belle of the Nineties영어 | |
1934 | 히옷코 6인조 | Six of a Kind영어 | |
1935 | 레드 갭의 러글스 | Ruggles of Red Gap | |
1935 | 인생은 42부터 | Ruggles of Red Gap영어 | |
1936 | 밀키 웨이 | The Milky Way | |
1936 | 로이드의 우유 가게 | The Milky Way영어 | |
1937 | 내일을 위한 길 | Make Way for Tomorrow | 제작 |
1937 | 끔찍한 진실 | The Awful Truth | 제작 |
1937 | 신혼 여행기 | The Awful Truth영어 | |
1937 | 내일은 오지 않는다 | Make Way for Tomorrow영어 | |
1939 | 러브 어페어 | Love Affair | 제작 |
1939 | 해후 | Love Affair영어 | |
1942 | 옛날 옛적에 허니문 | Once Upon a Honeymoon | 각본, 제작(크레딧 없음) |
1944 | 나의 길을 가련다 | Going My Way영어 | 제작 |
1945 | 성 메리 성당의 종소리 | The Bells of St. Mary's영어 | 제작, 각본 |
1948 | 굿 샘 | Good Sam | 제작, 각본 |
1952 | 나의 아들 존 | My Son John | |
1957 | 애수 | An Affair to Remember영어 | 제작, 각본 |
1957 | 만남 | An Affair to Remember영어 | |
1958 | 깃발을 휘날리며, 친구들! | 'Rally Round the Flag, Boys!'' | 제작 |
1958 | 폴 뉴먼의 아내 만세! | 'Rally Round the Flag, Boys!'' | |
1962 | 사탄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 Satan Never Sleeps | 제작 |
1962 | 유혹의 밤 | Satan Never Sleeps영어 |
4. 2. 기타 참여 작품
- 식은 죽 먹기
- 레드 갭의 러글스
- 내일을 위한 길
- 이혼 소동
- 러브 어페어 (1939년 영화)
- 마이 페이버릿 와이프
- 나의 길을 가련다
- 성 메리 성당의 종
- 러브 어페어 (1957년 영화)
- 하베아스 코르푸스 (1928, 단편), 감독
- 패스 더 그레이비 (1928, 단편), 감독
- 빅 비즈니스 (1929, 단편), 감독
- 카우보이와 숙녀 (1938), 스토리 작가
- 나의 마음에 드는 아내 (1940), 프로듀서 및 스토리 작가
5. 수상 및 후보
6. 평가 및 영향
프랑스인 감독 장 르누아르는 "리 매케리는 다른 어떤 할리우드 감독보다 사람을 더 잘 이해했다."라고 극찬했다.[11]
오토르 이론 비평가 앤드류 사리스는 매케리가 "미국 영화 역사에서 즉흥 연주의 원칙을 나타낸다"라고 말했다.[9] 매케리는 경력 대부분 동안, 무성 영화에 뿌리를 둔 촬영 방식으로, 이전에 스튜디오와 배우에게 제공된 시나리오의 스토리 아이디어, 사업의 비트, 대화를 대폭 변경했다. 그는 종종 피아노에 앉아 종종 짜증이 난 스탭들이 영감을 기다리는 동안 낙서를 했다. 빙 크로스비는 ''나의 길을 가련다''에 대해 "나는 아마도 매일 촬영의 75%가 리 매케리에 의해 세트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10]
이 기술은 완성된 작품에 약간의 어색함과 거친 면을 야기했지만, 매케리의 많은 장면에는 일반적인 주류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부족한 신선함과 즉흥성이 있었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작업한 감독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료 코미디 감독 그레고리 라 카바, 하워드 혹스 그리고 조지 스티븐스 - 후자는 할 로치 졸업생이기도 하다 - 는 세트에서 즉흥 연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7년에 스크루볼 코미디 '신혼 여행'을 발표하여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지만, 본인으로서는 같은 해, 노부부의 시선을 통해 사회 개량론적인 테마를 담은 '내일은 오지 않는다'가 자신작이었지만 흥행적으로도 참패하여, 매케리는 "이 작품에 상이 주어져야 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덧붙여 이 작품은 오즈 야스지로의 대표작 '동경 이야기'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라고 한다.
1944년에는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이자 배우로서 뮤지컬과 코미디에 출연했던 빙 크로스비를 주연으로 기용, 빈민가의 교회를 무대로 한 인정극의 걸작 '나의 길을 가련다'를 감독, 영화는 대히트를 기록, 게다가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수상, 매케리도 두 번째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명성을 확고히 했다. 또한 이 성공으로 빙 크로스비는 성격 배우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다. 이 영화의 히트로 이듬해 1945년, 주연의 크로스비에 잉그리드 버그만을 공동 출연시켜 속편 '성 메리 성당의 종'을 감독하여, 전작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미 재산 순위 1위에 올랐다.
1950년대는 점차 커리어가 침체되었지만, 1957년에 '만남'을 케리 그랜트와 데보라 카를 기용하여 직접 리메이크한 '러브 어페어'를 발표, 조금도 연출력이 쇠퇴하지 않았음을 어필하며, 매케리로서 만년의 걸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할리우드에서는 매카시즘의 한가운데였고, 이 시기의 작품은 대부분 반공산주의적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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