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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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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1944년,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절대 국방권의 요충지로 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 제도를 설정했다.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괌, 티니안, 팔라우 제도의 펠렐리우, 앙가우르 섬 등을 공격하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마리아나 해전에서 패배하고 주요 섬들을 상실했으며, B-29 폭격기의 일본 본토 공습을 허용했다. 괌, 사이판, 티니안 등지에서 미군은 승리했지만, 펠렐리우 전투에서는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다. 이 전투들은 일본의 패배를 가속화하고, 태평양 전쟁의 종말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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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해병대 LVT
미국 해병대 LVT가 테니안 섬 상륙 작전 중 해안으로 향하고 있다.
분쟁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날짜1944년 6월 - 1944년 11월
장소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제도, 사이판
결과미국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미국체스터 니미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리치먼드 K. 터너
홀랜드 스미스
로이 게이거
해리 슈미트
윌리엄 H. 루퍼투스
폴 J. 뮬러
일본 제국사이토 요시쓰구
나구모 주이치
오자와 지사부로
가쿠다 가쿠지
다카시나 다케시
오바타 히데요시
오가타 기요치
이노우에 사다에
나카가와 구니오
병력 규모
미국128,000명 이상, 600척 이상의 함선
일본 제국71,000명
피해 규모
미국전사 및 실종 8,125명
일본 제국67,000명 이상 전사
지도
사이판 전투
사이판 전투, 1944년 6월 15일 - 7월 9일
테니안 전투
테니안 전투, 1944년 7월 24일 - 8월 1일
괌 전투
괌 전투, 1944년 7월 21일 - 8월 10일
펠렐리우 전투
펠렐리우 전투, 1944년 9월 15일 - 11월 27일
앙가우르 전투
앙가우르 전투, 1944년 9월 17일 - 11월 22일
필리핀해 해전
필리핀해 해전, 1944년 6월 19일 - 6월 20일

2. 배경

1942년 8월, 연합군은 남태평양의 솔로몬 제도 남부에 있는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이후 일본을 향한 연합군의 진격은 중부 태평양을 서진하여 일본 본토를 목표로 하는 경로와 솔로몬 제도 ~ 뉴기니 ~ 필리핀을 경유하여 일본 본토를 목표로 하는 두 경로로 진행되었다.

연합군의 반격 진로


일본은 태평양 방면에서의 전선 후퇴가 시작된 1943년 9월에 절대 국방권 구상을 책정했고, 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 제도는 절대 국방권의 요충지로 여겨졌다.

니미츠 해군 대장이 지휘하는 중부 태평양 방면의 미군은 1943년 11월에 길버트 제도, 1944년 2월에 마셜 제도 공략을 달성했다.

중부 태평양 방면의 전황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일본은 마리아나 방면의 방위 체제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3], 1944년 2월에 중부 태평양 방면의 육군 부대를 통솔하기 위해 제31군을 신설했다.[4] 동시에 만주 등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마리아나 방면으로 수송했으며, 3~5월의 송수송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의 수송은 도중에 수송선이 미군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는 일이 있어, 계획대로의 병력 증강은 진전되지 않았다.

또한, 1944년 5월 27일에 뉴기니 비아크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주요 관심은 비아크 섬으로 향했고, 마리아나 등의 기지 항공기를 이 방면에 파견함과 동시에, 증원 부대의 해상 수송에 힘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군의 진공을 맞이하게 된다.

3. 마리아나 제도 전투

1944년 2월, 미군은 마셜 제도를 점령한 후 마리아나 제도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 이곳은 B-29 폭격기로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5] 미군의 첫 마리아나 제도 공격은 1944년 2월의 공습이었지만, 이는 마셜 제도 공략의 지원 작전이었다.

일본 제31군은 만주 등에서 병력을 보충하여 각 섬에 배치하고 방어 진지를 구축했지만, 자재 부족과 짧은 준비 기간으로 인해 충분한 진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방어의 기본 방침은 상륙하는 적을 공격하여 격멸하는 수제 작전이었다.[6]

일본은 도조 히데키 참모총장(수상)이 미국군 상륙 전날 천황에게 "'''마리아나는 확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상주했을 정도로[7] 방어에 자신감을 가졌다. 당시 일본 해군은 "아호 작전"이라는 미·일 함대 결전을 계획하고, 5월경부터 타위타위 (민다나오 섬과 칼리만탄 섬 사이)에 항공모함 등의 함선을 집결시켰다.[8]

그러나 일본 해군은 연료 부족[9]과 항공모함 함재기 조종사들의 훈련 부족[10]이라는 두 가지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미국은 마리아나 제도 공략을 위해 육해군 합쳐 약 167,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1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사이판은 일본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고, 국제 연맹 탈퇴(1933년) 후에도 통치가 계속되어 약 30,000명의 일본인이 이주하였다. 사이판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설탕 생산이었다.

미군이 공략을 시작했을 때 사이판 섬의 일본군(육군, 해군)은 약 47,000명이었다.[12] 이들 중에는 수송 중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수송선이 침몰하여 무기를 잃고 병력만 도착한 부대나 다른 섬으로 이동하기 위해 대기 중인 부대도 있었다. 미군은 1944년 6월 11일 공습과 함포 사격을 시작하여 6월 15일에 상륙을 개시했다. 일본의 수제 작전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무력했고 상륙 저지는 실패했다.

미군 상륙 후 일본 해군은 "아호 작전"을 발동,[13][14] 마리아나 제도 서쪽 해역(필리핀 해)에서 마리아나 해전이 발생했지만, 일본의 대패로 끝나 일본의 항공모함 전력은 괴멸되었다.

일본군은 섬 각지에서 반격을 계속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 저항은 점차 약해져, 7월 9일 미군은 사이판 섬 점령을 선언했다.[15]

일본은 7월 18일 사이판 섬의 옥쇄를 발표했고, 도조 내각은 절대 국방권이 무너진 것에 대한 책임으로 퇴진하고, 고이소·요나이 연립 내각이 이를 대신했다.[16]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마리아나 외에 팔라우와 이오지마 등의 기지 항공기도 많이 잃었고,[17] 잠수함 작전에서도 미군 잠수함은 일본 항공모함 2척(다이호, 쇼카쿠) 외 다수의 구축함[18]과 수송선을 격침시킨 반면, 일본 잠수함은 거의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18척[19]이 손실되었다. 종전 후 사이판 섬의 일본군 생환자는 약 3,600명이었다.[20]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섬은 미국령이 되었다. 1941년 12월 10일 일본군은 섬에 상륙했고, 미군은 큰 전투 없이 항복했다. 섬의 원주민(차모로족)은 약 24,000명이었으며 일본은 민정서를 설치하여 행정을 실시했다.[21]

미군이 마리아나 지역 공략을 시작했을 때 괌 섬의 일본군(육군 해군 합계)은 약 22,000명[22]이었다. 마리아나 해전의 승리와 주변 제도의 기지 항공기 소탕을 달성하여, 그 공격력을 상륙 지원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사이판 전투 때를 넘는 사전 공격(공습, 함포 사격)을 한 후[23], 1944년 7월 21일에 상륙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수제 작전도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무력했고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다.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급속히 전력을 소모해 가는 상황 속에서, 7월 25일 밤에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로 끝났다[24] 그 후, 일본군은 섬 북부로 후퇴하면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잔존 병력은 줄어들 뿐이었고, 8월 11일에는 제31군 사령부도 미군 수중에 들어가 제31군 수뇌인 오바타 사령관은 자결했다[25] 이로 인해 괌 섬의 일본군 조직적 전투는 종료되었고, 8월 13일 미군은 괌 섬 점령을 선언했다[26] 이 후에도 잔존 일본군은 유격전을 벌였지만 미군의 소탕과 식량 부족으로 그 수는 점차 감소했고, 종전 후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약 1,600명이었다[27]

  • 티니안 전투; 1944년 7월 24일 ~ 8월 1일

사이판 전투와 마찬가지로 티니안은 일본의 위임통치령이었으며, 일본과 조선에서 온 민간인(약 13,000명)에 의해 설탕 생산이 주요 산업이었다. 군사적으로는 1944년 초까지 중남부 태평양 방면의 항공기 후방・중계 기지로 사용되었다.[28]

미군이 마리아나 제도 공략을 시작했을 때 티니안섬의 일본군(육군, 해군 합계)은 약 10,000명이었다.[29] 미국군은 해상 및 공중에서의 준비 공격 외에, 이미 점령하고 있던 사이판섬에서도 포격을 가한 후[30], 1944년 7월 24일에 상륙을 시작했다. 이 곳에서도 수제에서의 상륙 저지는 실패로 끝나, 일본군은 압도적인 미국군의 화력 앞에 차츰 몰리게 되었다. 8월 1일, 미국군은 티니안 섬 점령을 선언했다.[31] 종전 후의 일본군 생환자는 약 800명이었다.[32]

  • 기타 섬들

로타섬(괌섬과 테니안섬 사이)[33]이나 파간섬(사이판섬 북쪽)[34] 등에도 일본군이 배치되었지만, 미군은 상륙하지 않고 폭격만 가했다.[35] 일본군은 고립된 채 식량과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자활하며 종전을 맞이했다.[35] 종전 후 일본군 귀환자는 로타섬에서 약 2,800명, 파간섬에서 약 2,100명이었다.[35]

3. 1. 사이판 전투 (1944년 6월 15일 ~ 7월 9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사이판은 일본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고, 국제 연맹 탈퇴(1933년) 후에도 통치가 계속되어 약 30,000명의 일본인이 이주하였다. 사이판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설탕 생산이었다.

미군이 공략을 시작했을 때 사이판 섬의 일본군(육군, 해군)은 약 47,000명이었다.[12] 이들 중에는 수송 중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수송선이 침몰하여 무기를 잃고 병력만 도착한 부대나 다른 섬으로 이동하기 위해 대기 중인 부대도 있었다. 미군은 1944년 6월 11일 공습과 함포 사격을 시작하여 6월 15일에 상륙을 개시했다. 일본의 수제 작전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무력했고 상륙 저지는 실패했다.

미군 상륙 후 일본 해군은 "아호 작전"을 발동,[13][14] 마리아나 제도 서쪽 해역(필리핀 해)에서 마리아나 해전이 발생했지만, 일본의 대패로 끝나 일본의 항공모함 전력은 괴멸되었다.

일본군은 섬 각지에서 반격을 계속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 저항은 점차 약해져, 7월 9일 미군은 사이판 섬 점령을 선언했다.[15]

일본은 7월 18일 사이판 섬의 옥쇄를 발표했고, 도조 내각은 절대 국방권이 무너진 것에 대한 책임으로 퇴진하고, 고이소·요나이 연립 내각이 이를 대신했다.[16]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마리아나 외에 팔라우와 이오지마 등의 기지 항공기도 많이 잃었고,[17] 잠수함 작전에서도 미군 잠수함은 일본 항공모함 2척(다이호, 쇼카쿠) 외 다수의 구축함[18]과 수송선을 격침시킨 반면, 일본 잠수함은 거의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18척[19]이 손실되었다. 종전 후 사이판 섬의 일본군 생환자는 약 3,600명이었다.[20]

3. 2. 괌 전투 (1944년 7월 21일 ~ 8월 10일)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섬은 미국령이 되었다. 1941년 12월 10일 일본군은 섬에 상륙했고, 미군은 큰 전투 없이 항복했다. 섬의 원주민(차모로족)은 약 24,000명이었으며 일본은 민정서를 설치하여 행정을 실시했다.[21]

미군이 마리아나 지역 공략을 시작했을 때 괌 섬의 일본군(육군 해군 합계)은 약 22,000명[22]이었다. 마리아나 해전의 승리와 주변 제도의 기지 항공기 소탕을 달성하여, 그 공격력을 상륙 지원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사이판 전투 때를 넘는 사전 공격(공습, 함포 사격)을 한 후[23], 1944년 7월 21일에 상륙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수제 작전도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무력했고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다.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급속히 전력을 소모해 가는 상황 속에서, 7월 25일 밤에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로 끝났다[24]。 그 후, 일본군은 섬 북부로 후퇴하면서 저항을 계속했지만 잔존 병력은 줄어들 뿐이었고, 8월 11일에는 제31군 사령부도 미군 수중에 들어가 제31군 수뇌인 오바타 사령관은 자결했다[25]。 이로 인해 괌 섬의 일본군 조직적 전투는 종료되었고, 8월 13일 미군은 괌 섬 점령을 선언했다[26]

이 후에도 잔존 일본군은 유격전을 벌였지만 미군의 소탕과 식량 부족으로 그 수는 점차 감소했고, 종전 후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약 1,600명이었다[27]

3. 3. 티니안 전투 (1944년 7월 24일 ~ 8월 1일)

사이판 전투와 마찬가지로 티니안은 일본의 위임통치령이었으며, 일본과 조선에서 온 민간인(약 13,000명)에 의해 설탕 생산이 주요 산업이었다. 군사적으로는 1944년 초까지 중남부 태평양 방면의 항공기 후방・중계 기지로 사용되었다.[28]

미군이 마리아나 제도 공략을 시작했을 때 티니안섬의 일본군(육군, 해군 합계)은 약 10,000명이었다.[29] 미국군은 해상 및 공중에서의 준비 공격 외에, 이미 점령하고 있던 사이판섬에서도 포격을 가한 후[30], 1944년 7월 24일에 상륙을 시작했다. 이 곳에서도 수제에서의 상륙 저지는 실패로 끝나, 일본군은 압도적인 미국군의 화력 앞에 차츰 몰리게 되었다. 8월 1일, 미국군은 티니안 섬 점령을 선언했다.[31] 종전 후의 일본군 생환자는 약 800명이었다.[32]

3. 4. 기타 섬들

로타섬(괌섬과 테니안섬 사이)[33]이나 파간섬(사이판섬 북쪽)[34] 등에도 일본군이 배치되었지만, 미군은 상륙하지 않고 폭격만 가했다.[35] 일본군은 고립된 채 식량과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자활하며 종전을 맞이했다.[35] 종전 후 일본군 귀환자는 로타섬에서 약 2,800명, 파간섬에서 약 2,100명이었다.[35]

4. 팔라우 제도 전투

팔라우 제도는 캐롤라인 제도의 서부(서캐롤라인 제도)에 속하며, 마리아나 제도의 남쪽에 위치한 섬들이다. 캐롤라인 제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고,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1933년)한 후에도 통치를 계속했으며, 일본으로부터의 이주민도 많았다. 태평양 전쟁 개시 후, 팔라우는 솔로몬 제도, 뉴기니 방면의 후방 병참 기지가 되어 부대와 군수품의 중계 기지로서 기능했다.

1944년 3월에 공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는 연합군이 뉴기니의 호란디아에 진공하기 위한 지원 작전으로 실시된 것이다. 일본은 중부 태평양 방면의 전황 악화에 따라 이 방면의 육군 부대를 통솔하기 위해 제31군을 신설했고, 팔라우도 이 제31군의 배속 하에 방위 체제의 강화를 꾀하게 된다.

일본군(대본영)은 마리아나 제도가 단기간의 전투로 함락된 것은 적 상륙 시 기본으로 삼았던 수제 작전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견지에서 급히 이 방침을 변경하여,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주진지를 구축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장기간에 걸쳐 상륙군에 반격하는 작전(장기 지구전)을 취하도록 지도했다.

한편, 필리핀 탈환을 향해 뉴기니 북안을 서진하고 있던 연합군은 비악 섬까지 이르렀지만, 필리핀에 더욱 가까운 위치에 항공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펠렐리우 섬과 앙가우르 섬의 공략을 시작했다. (동시에 뉴기니와 필리핀 사이에 있는 모로타이 섬의 공략도 시작.)

펠렐리우 전투1944년 9월 15일부터 11월 27일까지 팔라우 제도 펠렐리우섬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펠렐리우 섬에는 일본군 비행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약 11,000명의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었다.[40] 일본군은 섬의 자연 동굴을 이용한 진지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42]

미군은 9월 15일에 상륙을 시작해 며칠 만에 비행장 지역을 확보했지만,[41] 일본군은 섬의 산지에 구축한 진지에서 반격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10월 말 육군 제81보병사단과 교체되어 섬에서 철수했다.[42] 11월 27일, 미군은 소탕 작전 종료를 선언했다.[43]

일본군은 수제선 방어 대신 장기 지구전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이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 영향을 주었다. 종전 후 일본군 생존자는 약 450명이었다.[44]

펠렐리우 섬 남서쪽 약 10km에 위치한 앙가우르 섬은 비료 원료인 인광석 산지로 유명하며, 군사적으로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지역이었다.[45] 이 때문에 섬은 팔라우 제도의 중요 거점으로 펠렐리우 전투와 마찬가지로 방위 강화가 이루어졌다.

1944년 9월 17일 미군이 앙가우르 섬 공략을 시작했을 때, 섬의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을 합쳐 약 1,200명이었다.[45] 미군은 9월 17일에 상륙을 시작했고,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점차 전력이 감소해 갔다.

10월 15일부터 미군은 비행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46], 10월 21일 앙가우르 섬에서 조직적인 전투 종료를 선언했다.[47] 종전 후 일본군 생존자는 약 50명이었다.[48]

팔라우 본섬(바벨다오브섬)과 야프섬(팔라우 본섬 북쪽)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고 폭격만 가했다.[49] 이 섬들의 일본군은 자급자족하며 종전을 맞이했다.[49] 종전 후 일본군의 귀환자는 팔라우 본섬에서 약 25,000명, 야프 섬에서 약 5,500명이었다.[49]

울리시 환초(야프섬 동쪽 약 100km)에는 1944년 9월 23일 미군이 상륙했지만, 일본군은 이미 철수했기 때문에 전투는 없었다.[50] 울리시 환초는 미국 해군의 정박지(휴양, 보급, 수리)로 정비되었고, 이후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50]

4. 1. 펠렐리우 전투 (1944년 9월 15일 ~ 11월 27일)



펠렐리우 전투1944년 9월 15일부터 11월 27일까지 팔라우 제도 펠렐리우섬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펠렐리우 섬에는 일본군 비행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약 11,000명의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었다.[40] 일본군은 섬의 자연 동굴을 이용한 진지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42]

미군은 9월 15일에 상륙을 시작해 며칠 만에 비행장 지역을 확보했지만,[41] 일본군은 섬의 산지에 구축한 진지에서 반격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10월 말 육군 제81보병사단과 교체되어 섬에서 철수했다.[42] 11월 27일, 미군은 소탕 작전 종료를 선언했다.[43]

일본군은 수제선 방어 대신 장기 지구전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이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 영향을 주었다. 종전 후 일본군 생존자는 약 450명이었다.[44]

4. 2. 앙가우르 전투 (1944년 9월 17일 ~ 10월 22일)

펠렐리우 섬 남서쪽 약 10km에 위치한 앙가우르 섬은 비료 원료인 인광석 산지로 유명하며, 군사적으로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지역이었다.[45] 이 때문에 섬은 팔라우 제도의 중요 거점으로 펠렐리우 전투와 마찬가지로 방위 강화가 이루어졌다.

1944년 9월 17일 미군이 앙가우르 섬 공략을 시작했을 때, 섬의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을 합쳐 약 1,200명이었다.[45] 미군은 9월 17일에 상륙을 시작했고,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점차 전력이 감소해 갔다.

10월 15일부터 미군은 비행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46], 10월 21일 앙가우르 섬에서 조직적인 전투 종료를 선언했다.[47] 종전 후 일본군 생존자는 약 50명이었다.[48]

4. 3. 기타 섬들

팔라우 본섬(바벨다오브섬)과 야프섬(팔라우 본섬 북쪽)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고 폭격만 가했다.[49] 이 섬들의 일본군은 자급자족하며 종전을 맞이했다.[49] 종전 후 일본군의 귀환자는 팔라우 본섬에서 약 25,000명, 야프 섬에서 약 5,500명이었다.[49]

울리시 환초(야프섬 동쪽 약 100km)에는 1944년 9월 23일 미군이 상륙했지만, 일본군은 이미 철수했기 때문에 전투는 없었다.[50] 울리시 환초는 미국 해군의 정박지(휴양, 보급, 수리)로 정비되었고, 이후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50]

5. 결과

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 제도에서의 전투는 미국과 일본 간의 현격한 전력 차이를 드러냈다.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 기동부대는 대패했고, 지상전에서도 제공권과 해상권을 상실했다.[51] 펠렐리우 전투는 격전이었으며, 사이판 전투에서는 일본군 수비대 30,000명이 전멸했다. 일본은 절대 국방권을 상실했고, 도조 히데키는 총리대신에서 물러났다.[51]

미군은 필리핀 해 해전을 통해 필리핀 탈환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일본의 남방 유전 지대와 본토 간 연결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51] B-29 폭격기는 마리아나 제도를 기점으로 1944년 11월 24일 일본 본토 폭격을 시작했다.[51] 이전에는 중국 청두에서 발진하여 항속 거리 제약이 있었으나, 마리아나 제도에서 발진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고, 대규모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이어졌다.[51][52]

일본에서는 도조 내각이 퇴진하고, 20개월 만에 실전에 투입된 항공모함 부대가 괴멸되었다. 이후 일본 항공모함은 레이테 해전에서 미끼 역할이나 수송선으로밖에 사용될 수 없었다.

이 시기 유럽 전선에서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을 향해 나아갔다.

6. 연표

1941년 12월 10일, 일본군이 괌 섬에 상륙하여 점령하였다. 1944년 2월 23일, 미국군이 마리아나 제도를 공습하였다. 3월 30일에서 31일에는 팔라우를 공습하였다. 6월 15일, 사이판 섬에 상륙하였고, 6월 19일에서 20일에는 마리아나 해전이 벌어졌다. 7월 21일에는 괌 섬에 상륙하였고, 7월 24일에는 테니안 섬에 상륙하였다. 9월 15일, 펠렐리우 섬과 모로타이 섬에 각각 상륙하였고, 9월 17일에는 앙가우르 섬에 상륙하였다. 3월에서 5월사이에 일본군은 송(松) 수송을 실시하여 이에 성공했다. 5월에서 6월사이에는 제3503 선단, 제3530 선단, 제3606 선단이 각각 괴멸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Liberation: Marines in the Recapture of Guam (Operation in Forager) https://www.nps.gov/[...] 2016-03-09
[2] 강연 World War II: The Pacific Theater The Great Courses
[3] 서적 戦史叢書
[4] 서적 戦史叢書
[5] 서적 戦史叢書
[6] 서적 戦史叢書
[7] 서적 戦史叢書
[8] 서적 戦史叢書
[9] 서적 戦史叢書
[10] 서적 戦史叢書
[11] 서적 戦史叢書
[12] 서적 戦史叢書
[13] 기타
[14] 서적 戦史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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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戦史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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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戦史叢書
[20] 서적 戦史叢書
[21] 서적 戦史叢書
[22] 서적 戦史叢書
[23] 서적 니미츠
[24] 서적 戦史叢書
[25] 서적 戦史叢書
[26] 서적 戦史叢書
[27] 서적 戦史叢書
[28] 서적 戦史叢書
[29] 서적 戦史叢書
[30] 서적 니미츠
[31] 서적 戦史叢書
[32] 서적 戦史叢書
[33] 서적 戦史叢書
[34] 서적 戦史叢書
[35] 서적 戦史叢書
[36] 서적 戦史叢書13
[37] 서적 戦史叢書13
[38] 서적 ニミッツ
[39] 서적 戦史叢書13
[40] 간행물 戦史叢書13 付表第1
[41] 서적 戦史叢書13
[42] 서적 戦史叢書13
[43] 서적 戦史叢書13
[44] 간행물 戦史叢書13 付表第1
[45] 간행물 戦史叢書13 付表第1
[46] 간행물 戦史叢書13 付表第2
[47] 서적 戦史叢書13
[48] 간행물 戦史叢書13 付表第1
[49] 간행물 戦史叢書13 付表第1
[50] 서적 BULL HALSEY
[51] 서적 米軍が記録した日本空襲
[52] 서적 米軍が記録した日本空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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