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나구모 주이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구모 주이치는 1887년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1908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구축함 함장, 해군대학교 교관 등을 거쳐 1939년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1년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어 진주만 공격을 지휘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후 사이판 전투에서 자결했으며, 사후 해군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야마모토 이소로쿠 -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은 1942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미드웨이 환초에서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해전으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의 MI 작전은 미국의 암호 해독, 일본군의 실책, 미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여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 복수 작전
    복수 작전은 1943년 미국이 암호 해독으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시찰 계획을 파악하고 P-38 전투기를 투입하여 야마모토가 탑승한 폭격기를 격추, 야마모토를 사망하게 한 군사 작전이다.
  • 해군 대학교 교수 - 아키야마 사네유키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러일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해군병학교 수석 졸업 후 미국 유학을 통해 해양 전략을 연구하고 연합함대 참모로서 뤼순항 봉쇄 작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 해군 대학교 교수 - 요나이 미쓰마사
    요나이 미쓰마사는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 무관으로서 국제적 경험을 쌓고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해군대신을 역임했으며, 추축국 진영 참여에 반대하고 미영과의 협상을 모색하다 총리대신에 취임했으나 육군과의 갈등으로 사임, 태평양 전쟁 말기 해군대신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에 기여한 인물이다.
  • 일본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 아라키 사다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육군대신과 문부대신을 역임하며 군국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고 국가주의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의 군국주의적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 일본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 오카다 게이스케
    오카다 게이스케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한 일본 제국 해군 대장이자 총리대신으로,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서 군비 축소를 주장하고 2·26 사건 암살 위기를 겪었으며, 태평양 전쟁 종전에도 기여한 온건파 정치인이다.
나구모 주이치
기본 정보
나가모 추이치 (1941–42년경)
이름나가모 추이치
원어 이름南雲 忠一
로마자 표기Nagumo Chūichi
출생일1887년 3월 25일
사망일1944년 7월 6일
출생지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사망지사이판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908년–1944년
최종 계급해군 대장 (사후 추서)
지휘 경력
주요 지휘키사라기, 모미, 사가, 우지, 나카, 제11구축함대, 다카오, 야마시로, 제1구축대, 제8전대, 해군 어뢰학교, 제3전대, 해군대학교, 제1항공함대, 제1항공전대, 제3함대, 사세보 진수부, 구레 진수부, 제1함대, 중부태평양방면함대, 제14항공함대
주요 전투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격
다윈 공습
인도양 습격
미드웨이 해전
동부 솔로몬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
사이판 전투
서훈
훈장욱일장 (3등)
욱일장 (4등)
금치훈장 (3등)
서보장 (1등)

2. 생애

나구모 주이치는 1887년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에서 태어나, 1908년 일본 해군병학교를 졸업했다. 해군대학교 졸업 후에는 수뢰정 전술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았다. 1920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925년부터 1926년까지는 해군 전략, 전술 및 장비 연구를 위해 서유럽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나구모는 중국 영토 해역에서 근무했다. 1926년에는 강포함 사가와 우지의 함장을 역임했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는 제국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9년 대좌로 진급한 후에는 경순양함 나카 함장, 제11구축함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35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8순양함전대를 지휘, 황해에서 일본군의 중국 진출을 지원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어뢰학교 교장을,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제3순양함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9년 중장으로 진급, 1940년부터 1941년 4월까지 해군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에서 승리한 후, 남방군도로 작전을 개시하여 인도양 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영국 동양함대의 모항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전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배려로 1942년 7월 14일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재편성된 제3함대 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

1944년 3월 4일, 중부 태평양 방면 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사이판으로 출격한다. 1944년 6월 15일 미군의 사이판 상륙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지휘하지만 약 20일간의 저항 끝에 사이판 수비대는 모두 전멸했고, 나구모 주이치는 57세의 나이로 자결하였다.[165] 사망 후 해군 대장에 추서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해군 경력

나구모 주이치는 1887년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에서 태어났다. 1908년 일본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견습장교로 보호순양함 소야, 니이타카(Niitaka), 장갑순양함 닛신(Nisshin)에서 복무했다. 1910년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순양함 아사마에 배속되었다.[18]

어뢰 및 해군포술 학교를 수료한 후 소위로 진급하여 전함 아키에서 복무했고, 이후 구축함 하츠유키에 배속되었다. 1914년 중위로 진급하여 전함 기리시마(Kirishima)에 배속되었고, 이후 구축함 스기에서 복무했다. 1917년 12월 15일 구축함 기사라기의 첫 함장을 맡았다.

1920년 일본 해군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소좌로 승진했다.[19] 그의 전문 분야는 어뢰와 구축함 전술이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구축함 모미의 함장을 역임했지만, 곧 제국 해군 참모본부의 다양한 육상 근무에 배속되었다. 1924년 대좌로 진급했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나구모는 해군 전략, 전술 및 장비에 대한 연구를 위해 일본의 서유럽미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에 참여했다.

1933년에서 1934년 사이, 다카오 함장으로서 나구모(왼쪽)와 해군 장교 마치다 신이치로와 이나가키 아야오가 이자카야에서 함께 찍은 사진


일본으로 돌아온 후, 1926년 3월 20일부터 1926년 10월 15일까지 강포함 사가 함장에 임명되었고, 1926년 10월 15일부터 1927년 11월 15일까지는 강포함 우지 함장을 역임했다. 그 후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제국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9년 11월 대좌로 진급했고, 경순양함 나카의 함장을 맡았으며,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제11구축함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행정직을 역임한 후,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중순양함 다카오 함장,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전함 야마시로 함장을 역임했다. 1935년 1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1930년경, 나구모 주이치는 함대파(군축조약 반대파)의 주요 인물로 알려져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대립했다.[22][23] 1931년 10월 10일 군령부 제1반 제2과장에 취임하여, 상관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주최한 원유회에서 술에 취해 외국 무관과 가족들 앞에서 연못에 소변을 보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25]

1932년 5·15 사건 이후, 나구모는 사건 해결책으로 런던 조약에 통수권 침범 의혹을 불러일으킨 중요 책임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29] 1933년경에는 일본의 런던 해군 군축 조약 탈퇴를 요구하며 연합함대 각 함장, 항공대 사령관 등의 서명을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30]

소장으로서 나구모는 제8순양함전대를 지휘하여 황해에서 일본군의 중국 진출을 지원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어뢰학교 교장을, 1938년부터 1939년까지는 제3순양함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9년 11월 15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0년 11월부터 1941년 4월까지 나구모는 해군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에서 승리한 후, 남방군도로 작전을 개시하여 인도양 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영국 동양함대의 모항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4월 10일, 나구모 주이치는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 전투단인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 많은 동시대인과 역사가들은 그가 해군 항공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구모의 친구이자 동료 제독인 쓰카하라 니시조는 "나구모는 배경, 훈련, 경험, 그리고 일본 해군 항공에서의 주요 역할에 대한 관심 면에서 전적으로 부적합했습니다."라고 말했다.[4]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 선택한 인물이었지만,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해임할 만한 강력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4]

이 무렵 나구모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눈에 띄게 늙어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어린 시절 검도 선수였던 시절부터 앓았을 가능성이 있는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5] 정신적으로는 신중한 장교가 되어 자신이 참여하는 모든 작전의 전술 계획을 세심하게 검토했으며, 지휘 결정에서 유연성이 부족했다. 쓰카하라 니시조는 나구모의 임명에 대해 "나구모는 구식 장교였고, 어뢰와 수상 기동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해군 항공의 능력과 잠재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구모의 아들은 그를 자식들에게 일본 해군 입대를 강요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깊은 생각에 잠긴 아버지로 묘사했다. 반면 나구모의 하급 해군 장교들은 그를 아버지와 같은 인물로 여겼다.[5]

제한된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구모는 해군과 공군력을 결합하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미국 해군 진주만 해군 기지 공격 계획에 대해서는 야마모토 제독에 반대했다. 제1항공함대를 지휘하는 동안 나구모는 진주만 공격을 감독했지만, 3차 공격을 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6][7][8]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전 후 작전 실패 건으로 사령관에서 물러났으나,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배려로 1942년 7월 14일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재편성된 제3함대 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

1942년 10월 26일, 남태평양 해전에서 제3함대 사령관으로 참가해 미국 항공모함 호넷을 격파했으나, 항공모함 쇼가쿠, 즈이가쿠를 잃고 전장을 이탈하여 함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패배 후 본토 방위 지역수비장관을 지낸 후 제1함대 사령관으로 다시 취임하였고, 1944년 2월 25일 해산되는 제1함대의 마지막 사령관이 되었다. 1944년 3월 4일, 중부 태평양 방면 함대 사령관에 취임, 고쿄에서 임명식으로 천황을 만난 후, 가마쿠라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죽음을 각오하고 사이판으로 출격한다.

1944년 6월 15일, 미군의 사이판 상륙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지휘하지만 약 20일간의 저항 끝에 사이판 수비대는 모두 전멸했고, 나구모 주이치는 57세의 나이로 자살하였다.[165] 사망 후 해군 대장에 추서되었다.

2. 2. 1. 진주만 공격

1941년 12월 8일, 나구모 주이치는 제1항공함대를 이끌고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미 태평양 함대의 전함 4척이 침몰하고 2척이 크게 파손되는 등 큰 타격을 입혔다.[165] 진주만 공격은 제2차 세계 대전미국이 참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구모는 진주만 공격을 성공적으로 지휘했지만, 3차 공격을 개시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았다.[6][7][8] 3차 공격이 이루어졌다면 연료 저장 시설과 수리 시설을 파괴하여 태평양에서 가장 중요한 미 해군 기지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잠수함 기지와 정보 기지의 지속적인 운영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진주만 공격 당시, 공격대 대장 후치다 미쓰오 중좌는 나구모와 구사카 류노스케에게 보고했다. 적의 반격 가능성을 알게 된 나구모는 동요했다.[56] 나구모는 반복 공격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있었고,[57] 공격 후 미카와 군이치(제3전대 사령관)로부터 재공격 건의가 있었지만, 구사카의 진언도 있어 예정대로 철수했다.[58]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제2격 준비 완료"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의견 건의를 권유받자 "나구모는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며 의견 신청을 하지 않았다.[59]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에게 참모 몇 명이 "재차 공격을 제1항공함대 사령부에 재촉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야마모토는 "나구모는 하지 않겠지", "기동부대 지휘관(나구모)에게 맡기자"라고 대답하고 재차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62]

연합함대 명령은 "하와이에 있는 적 함대를 기습 격파한다"였고, 재차 공격이나 석유 탱크 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명령대로였다.[64] 군령부는 개전과 동시에 행해지는 필리핀, 말레이 반도, 홍콩 등에 대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한 미 함대 주력 격파를 본 작전의 주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구모의 일격만으로 피해를 피한 훌륭한 작전 지도라고 평가했다.[65]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기동부대 지휘관 나구모 중장이 진주만 공격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나구모 중장의 책임감의 강함이 오해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했다.[66]

나구모(전열 중앙)와 제1항공함대 참모들, 아카기 함상, 1941년 4월 10일 - 1942년 7월 14일


진주만 공격으로 향하는 아카기 함교 위의 나구모, 1941년 11월 26일 - 12월 7일


제1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2. 2. 2. 인도양 작전

1942년 초, 나구모는 제1항공함대를 이끌고 다윈 폭격과 동인도 공격에서 함대 사령관으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동인도 공격에서는 영국 항공모함 2척, 순양함 2척, 구축함 2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영국 동방함대의 제임스 소머빌 제독을 동아프리카로 후퇴하게 만들었다.[5]

2. 2. 3.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6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 주이치는 제1항공함대 장관으로 참가했지만, 일본 해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아카기(Akagi), 가가(Kaga), 소류(Sōryū), 히류(Hiryū))을 모두 잃는 참패를 당했다.[13] 이 해전에서 나구모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명령을 어기고 미드웨이에 대한 추가 공격을 명령했다.[10] 그러나 미군 함선이 있다는 정찰 보고를 받자, 함재기의 무장을 어뢰로 변경하도록 지시하여 혼란을 야기했다.[11] 결국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의 공격으로 아카기(Akagi), 가가(Kaga), 소류(Sōryū)가 큰 피해를 입었고, 나구모는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2] 그는 함교 근처에서 불타는 자신의 함선을 바라보며 기함 이동을 주저했지만,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의 설득으로 눈물을 흘리며 탈출했다.[12]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는 일본 해군의 공세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미국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13] 해전 후, 나구모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낙담했지만, 구사카의 설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12] 이후 공격성과 효율성이 떨어진 나구모는 1944년 두 아들에게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12]

1942년 7월 14일, 나구모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배려로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재편성된 제3함대 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102]

2. 3. 사이판 전투와 죽음

1944년 3월 4일, 나구모 주이치는 중부 태평양 방면 함대 사령관 겸 제14항공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어 사이판 방어를 맡게 되었다.[124] 그는 가마쿠라의 자택에서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보낸 후, 절대국방권의 최전선인 사이판에 부임하였다.[125][126]

6월 15일, 미군이 사이판섬에 상륙하자 나구모는 저격 전투 지휘를 맡았다.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이끄는 제1기동함대6월 19일~6월 20일 마리아나 해전에서 패배하여 사이판섬 구원은 절망적이 되었다.[137] 약 20일간의 항전 끝에 사이판섬 수비군은 전멸했고, 나구모도 자결했다.[165]

7월 5일, 사이판 수비대의 용전에 대한 천황의 칭찬과 함께 사이판 포기로 인한 결별의 말을 전해 들은 나구모는 6일 마지막 명령을 중앙에 타전하고 연락을 끊었다.[138] 나구모는 "살아서 포로의 욕을 받지 말라"는 전진훈을 언급하며,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어 사이판섬에 뼈를 묻으려 한다"고 훈시했다.

나구모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다. 제43사단 참모 평쿠시 타카 육군 중좌에 따르면, 7월 6일 오후 10시경 사령부에서 사이토 요시츠구 육군 중장과 함께 할복 및 권총 자살을 했다고 한다.[139] 반면, 나구모의 종병이었던 이시카와 쿠라타로는 나구모가 7월 7일 해군 부대 선두에서 돌격을 지휘하다 중상을 입고, 그날 오전 4시 30분경 권총으로 자결했다고 증언한다.[140] 또 다른 해군 상등병조는 나구모가 7월 7일 오전 10시 30분에 야노 히데오 소장과 함께 자결했다고 증언한다.[141]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와 대결했던 미군 마리아나 공략 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대장은 나구모의 자결 소식을 듣고 "삼진 아웃"이라며 비꼬면서 기뻐했다.[143]

나구모는 사후 해군대장으로 추서되었다.[14]

나구모(중앙)의 마지막 사진, 사이판, 1944년


3. 평가 및 논란

나구모 주이치는 진주만 공격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연합군 항공모함 3척(허미스, 요크타운, 호넷)을 격침하고 1척(엔터프라이즈)을 손상시켰으며, 중순양함 2척과 구축함 다수를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다.[145]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이 있다.

나구모는 전쟁 전 “맹장(猛將)”으로 알려져 해군 내에서 많은 무용담이 전해졌으며,[37] 우에노역에 도착한 어머니를 해군 중좌 군복 차림으로 업고 갈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144] 제3전대 사령관 시절에는 부하 교육에 엄격했지만,[38] 기지에서는 게이샤가 5~10명씩 면회 오고, 운수(雲水)가 몰려드는 등 사령관으로서는 특이한 면모를 보였다.[38]

제1항공함대와 제3함대 참모장을 역임한 쿠사카 류노스케 중장은 나구모를 좋은 상사이자 “표悍표마(剽悍剽馬)”와 같다고 평가하면서도, 섬세하고 인정이 많으며 부대 운용에도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다만, 항공전에 익숙하지 않아 본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겐다 미노루 대좌는 나구모 중장이 정한(精悍)하고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오랜 세월 바닷바람에 단련된 제독이라는 느낌이었고, 매우 정이 많고 부하를 배려했다고 평가했다.[149] 후치다 미츠오 대좌는 나구모가 대좌 시절부터 제1수뢰전대 사령관 시절까지는 만점을 줄 만한 인물이었지만, 개전 후에는 활기차고 당당했던 옛 투지가 사라지고 어딘가 冴えない(사에나이, 활기 없는) 장관이었으며, 이미 노쇠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고 평가했다.[150]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는 진주만 공격의 성공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에게 돌리고, 미드웨이 해전 패전의 책임을 나구모에게 돌리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152]

3. 1. 비판적 시각

나구모 주이치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적극 가담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전범으로 비판받는다. 그의 군사적 판단 실수는 일본 해군 패배를 불러와 더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는 비판도 있다.[145]

나구모는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반대하는 강경파(艦隊派)의 주요 인물이었다.[22][23] 조약에 찬성하는 조약파(条約派)를 몰아내고,[24] 해군 군령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했다.[28] 5·15 사건 이후에는 사건 관련자들의 사형 및 무기징역을 피하고, 런던 조약에 통수권 침범(統帥権干犯)의 책임이 있는 주요 인사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29] 또한, 일본의 런던 해군 군축 조약 탈퇴를 주장하며 연합함대 함장들의 서명을 모으기도 했다.[30]

그는 "맹장(猛將)"으로 알려져 있었고, 해군 내에서는 많은 무용담이 전해졌지만,[37] 그의 경력과 자질을 고려하면 항공모함 함대 사령관보다는 수상함 부대가 더 적합했으며, 이러한 인사는 해군 인사 행정의 폐단이었다는 지적도 있다.[146]

쿠사카 류노스케 중장은 나구모를 “표悍표마(剽悍剽馬)”와 같은 좋은 상사라고 평가했지만, 항공전에 익숙하지 않아 본래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겐다 미노루 대좌는 나구모가 정이 많고 부하를 배려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149] 반면, 후치다 미츠오 대좌는 나구모가 개전 후 활기와 투지를 잃고 퇴폐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150]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는 진주만 공격의 성공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에게 돌리고, 미드웨이 해전 패전의 책임을 나구모에게 돌리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152]

3. 2. 옹호적 시각

나구모 주이치는 당시 일본 해군의 주류였던 함대파의 일원으로서, 시대적 상황과 군 내부의 압력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옹호론도 있다. 그는 맹장으로 알려져 있었고[37], 해군 내에서는 그의 무용담이 많이 전해진다.[37]

나구모는 부하 교육에 엄격했지만[38], 인정이 많고 부하를 배려하는 따뜻한 면모도 있었다.[149] 특히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우에노역에 도착한 어머니를 해군 중좌 군복 차림으로 업고 걸었다는 일화도 있다.[144]

쿠사카 류노스케 중장은 나구모를 좋은 상사이자 “표悍표마(剽悍剽馬)”와 같다고 평하면서도 섬세하고 인정이 많으며, 부대 운용에도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겐다 미노루 대좌는 “나구모 중장은 정한(精悍)하고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오랜 세월 바닷바람에 단련된 제독이라는 느낌이었다. 또한 매우 정이 많고 부하에 대한 배려가 깊었다”라고 말했다.[149]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는 “진주만 공격 성공의 공적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에게 돌리고, 미드웨이 해전 패전의 책임을 나구모에게 돌리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152] 그의 군사적 능력이 제한적이었을지라도, 진주만 공격과 같은 대규모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4. 가족 관계

나구모 주이치의 아버지는 요네자와 번사였던 나구모 슈조이다. 그의 아내는 리키(우에스기 번사 아오키 도요키의 셋째 딸)였다. 장남은 나구모 스스무(해군 소위)로, 1944년 12월 4일 유구모급 구축함 15번함 기시나미에서 전사했다. 사후 해군 중위로 승진했다.[153]

마이니치 신문 보도에 따르면, 요네자와시 출신 나구모 겐이치로 공장은 친족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154]

참조

[1] 문서 Nishida, Imperial Japanese Navy
[2] 웹사이트 Nagumo Chuichi http://navalhistory.[...] 2009-04-13
[3] 웹사이트 Vice-Admiral Chuichi Nagumo https://warfare.gq/d[...]
[4] 논문 "WINNING" THE PACIFIC WAR: The Masterful Strategy of Commander Minoru Genda https://www.jstor.or[...] 2014
[5] 웹사이트 World War II Database page on Nagumo http://ww2db.com/per[...]
[6] 서적 Silent Victory Lippincott
[7] 서적 Barrier and the Javelin United States Naval Institute Press
[8] 서적 Double-Edged Secrets United States Naval Institute Press
[9] 문서 Lundstrom, p. 337
[10] 웹사이트 Office of Naval Intelligence Combat Narrative: "Midway's Attack on the Enemy Carriers" http://www.ibiblio.o[...] 2012-01-28
[11] 뉴스 The True Story of the Battle of Midway https://www.smithson[...] Smithsonian 2019-11-08
[12] 서적 1942: The Year That Tried Men's Souls https://books.google[...] Grove Press
[13] 서적 The Turn of the Tide in the Pacific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14] 웹사이트 Breaching the Marianas: The Battle for Saipan http://www.ibiblio.o[...]
[15] 서적 歴代海軍大将全覧 中公新書
[16] 서적 慶応元年分限帳 人物索引付 米沢市教育委員会
[17] 문서 海軍兵学校沿革 p.269, p.297
[18]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p.46
[19]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p.47
[20]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p.39
[21] 문서 陸海軍将官人事総覧 海軍篇
[22] 문서 日本海軍の興亡 p.188
[23] 문서 日本陸海軍総合事典 p.671
[24] 문서 海は白髪なれど pp.73-74
[25]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pp.54-55
[26]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pp.56-57
[27]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p.131
[28] 문서 井上成美(第10版) pp.142-143
[29] 문서 波まくらいくたびぞ pp.210-213
[30] 문서 牧野伸顕日記 p.581
[31] 문서 海軍の昭和史 pp.72-73
[32] 문서 どん亀艦長青春記 p.70
[33] 문서 どん亀艦長青春記 p.71
[34] 문서 どん亀艦長青春記 p.88
[35] 문서 どん亀艦長青春記 p.89
[36]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37]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38]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39]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40]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41] 서적 城英一郎日記
[42] 서적 南雲忠一 空母機動部隊を率いた悲劇の提督 PHP文庫
[43]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44] 서적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光和堂
[45]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文春文庫 1998-00-00
[46]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47] 서적 山本五十六 平凡社
[48]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49]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50] 서적 ハワイ作戦
[51]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52]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53] 서적 奥宮、読み方
[54]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55] 서적 悲劇の南雲中将, 波まくらいくたびぞ
[56] 서적 トラトラトラ 並木書房
[57]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58] 서적 ハワイ作戦
[59] 서적 ハワイ作戦
[60] 서적 ハワイ作戦
[61] 서적 太平洋戦争の意外な裏事情 PHP文庫
[62] 서적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2)昭和十七年六月まで
[63]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64] 서적 日本海軍の戦略発想
[65]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66] 서적 真珠湾作戦回顧録
[67] 서적 城英一郎日記
[68]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上)
[69]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 原書房
[70]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実録太平洋戦争 中公文庫, 光風社
[71] 서적 帝国陸海軍事典 同成社
[72]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73]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74]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75] 서적 別冊歴史読本永久保存版空母機動部隊 新人物往来社
[76]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77]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中公文庫
[78]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79]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中公文庫
[80]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81]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82]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83]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84] 서적,간행물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ミッドウェー海戦 中公文庫
[85] 서적 豊田穣戦記文学集2 ミッドウェー海戦 講談社
[86] 서적 豊田穣戦記文学集2 ミッドウェー海戦 講談社
[87] 간행물 歴史と人物 165号 中央公論社 1984-09
[88]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89]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 下 原書房
[90]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91]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92]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93] 서적 日米空母決戦ミッドウェー 学習研究社 2006
[94] 서적 日米空母決戦ミッドウェー 学習研究社 2006
[95] 간행물,문서 ミッドウェー海戦, ミッドウェー森
[96] 문서 吉田・指揮官と参謀
[97] 문서 第1航空艦隊戦闘詳報(2)
[98] 문서 海軍航空隊始末記
[99] 간행물 ミッドウェー海戦
[100] 서적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光和堂
[101]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 原書房
[102]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03] 서적 炎の海 光人NF文庫
[104] 서적 聯合艦隊作戦室から見た太平洋戦争
[105] 문서 回想の提督
[106] 서적 南雲忠一 空母機動部隊を率いた悲劇の提督 PHP文庫
[107] 문서 吉田・比叡
[108] 서적 南雲忠一 空母機動部隊を率いた悲劇の提督 PHP文庫
[109] 서적 南雲忠一 空母機動部隊を率いた悲劇の提督 PHP文庫
[110] 문서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111] 서적 ソロモンの激闘 学研
[112] 서적 ソロモンの激闘 学研
[113] 서적 ソロモンの激闘 学研
[114] 서적 ソロモンの激闘 学研
[115]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16] 문서 城英一郎日記
[117] 문서 城英一郎日記
[118] 문서 回想の提督
[119] 문서 城英一郎日記
[120] 문서 城英一郎日記
[121] 문서 駆逐艦磯風と三人の特年兵
[122] 문서 駆逐艦磯風と三人の特年兵
[123] 문서 城英一郎日記
[124] 문서 奥宮、読み方
[125] 문서 自伝的日本海軍始末記
[126]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27] 문서 最後の帝国海軍
[128] 서적 戦史叢書12
[129] 문서 波まくらいくたびぞ
[130] 서적
[131] 서적
[132] 서적 大東亜戦史①
[133]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34]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35]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36]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37]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38]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139] 잡지 目で見る太平洋戦争史 文藝春秋 1974-12
[140] 서적
[141] 논문 (제목 없음)
[142] 논문 (제목 없음)
[143] 서적 提督スプルーアンス 学習研究社
[144]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45] 문서 奥宮、読み方
[146]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47] 문서 新装版亀井ミッドウェー
[148] 문서 新装版亀井ミッドウェー, 提督山口
[149] 서적 海軍航空隊始末記 文春文庫
[150]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51] 문서 悲劇の南雲中将
[152] 문서 奥宮、読み方
[153] 아시아역사자료센터 昭和20年8月28日(発令昭和19年12月4日付)海軍辞令公報(甲)第1898号
[154] 웹사이트 陸空の自衛隊地方組織トップが抱負 /福岡 https://mainichi.jp/[...] 2023-05-31
[155] 아시아역사자료센터 任海軍大将 海軍中将 南雲忠一
[156] 아시아역사자료센터 故海軍大将南雲忠一位階追陞の件
[157] 간행물 官報 1910-03-23
[158] 간행물 官報 1912-02-12
[159] 간행물 官報 1915-02-12
[160] 간행물 官報 1930-01-21
[161] 간행물 官報 1935-02-21
[162] 아시아역사자료센터 海軍大将南雲忠一叙位の件
[163] 간행물 官報 1941-10-23
[164] 간행물 官報 1942-09-14
[165] 서적 미드웨이 194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