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 니키포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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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야 니키포로바는 1885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아나키스트 공산주의 활동을 하며 무장 강도, 폭탄 테러, 재산 몰수 등에 참여했다. 체포와 투옥, 망명 생활을 거치며 프랑스 외인 부대에 입대하여 군사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귀국하여 혁명 활동을 벌였으나 볼셰비키와의 갈등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녀는 사후에도 신화적인 존재로 여겨졌으며,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에서 "마루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여성 게릴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니키포로바는 아나키스트로서 과격한 전술과 자유주의적 철학을 추구했으며, 소비에트 권력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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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야 니키포로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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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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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Maria Hryhorivna Nikiforova |
다른 이름 | (마리야 "마루샤" 흐리호리우나 니키포로바) |
별칭 | 마루샤 () |
출생 | 1885년 |
출생지 | 올렉산드리우스크, 카테리노슬라프, 러시아 제국 |
사망 | 1919년 9월 16일 |
사망지 | 세바스토폴, 타우리다, |
사망 원인 | 총살형 |
국적 | 우크라이나 |
정치 | |
배우자 | |
배우자 | 비톨트 브조스테크 |
경력 | |
군사 경력 | |
소속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 공화국 }} 마흐노우슈치나 |
복무 기간 | 1914년–1919년 |
계급 | 아타만샤 |
지휘 | 올렉산드리우스크 흑위군 (1917–1918) (1918–1919)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마케도니아 전선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 올렉산드리우스크 봉기 |
주요 직책 | |
직책 | 올렉산드리우스크 혁명 위원회 부지도자 |
임기 시작 | 1918년 1월 4일 |
임기 종료 | 1918년 4월 18일 |
이전 | 직책 신설 |
이후 | 직책 폐지 |
2. 초기 생애 및 망명 (1885년 ~ 1917년)
마리야 니키포로바는 1885년 올렉산드리우스크(현재의 자포리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장교였다. 16세에 집을 나와 베이비시터, 소매상, 보드카 증류소 공장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1905년 혁명 직전, 지역 아나키스트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 "동기 없는 테러" 캠페인에 참여하여 여러 폭탄 테러와 재산 몰수 작전을 벌였다. 체포 당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1908년 살인 및 무장 강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젊은 나이 때문에 무기징역과 중노동으로 감형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독방 감금된 후, 1910년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탈옥, 감옥 폭동을 일으킨 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 중국 아나키스트 단체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다른 추방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러시아어 신문에 기사를 썼다. 1912년, 스페인 아나키스트 운동에 가담하여 바르셀로나에서 은행 강도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파리에서 치료를 받았다. 간성 여성으로서, 의료적 개입을 받기도 했다.
파리에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세옌코 등 여러 망명 러시아 예술가 및 정치인들을 만났고, 그림과 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폴란드 아나키스트 비톨드 브로즈스테크와 편의 결혼을 했다. 1913년 말, 런던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회의에 참석하여 "마루샤"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페테르 크로포트킨의 반독일 정서에 동조, 연합국을 지지하여 프랑스 외인 부대에 입대했고, 군사 학교에서 장교로 졸업 후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복무했다. 1917년 혁명이 발발하자 전선을 떠나 귀국했다.
2. 1. 초기 생애
마리야 니키포로바는 1885년 우크라이나 올렉산드리우스크(현재의 자포리자)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877년 ~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장교였다. 그녀는 16세에 집을 나왔는데, 올렉산드리우스크의 빈민가에서 그녀를 버린 "모험가"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 처음에는 베이비시터, 다음에는 소매상으로, 결국 보드카 증류소에서 병을 씻는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2. 2. 아나키즘 입문
니키포로바는 16세에 집을 나와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베이비시터, 다음에는 소매상으로 일했고, 결국 보드카 증류소에서 병을 씻는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일을 시작한 직후, 1905년 혁명 직전에 결성된 지역 아나키스트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정치적 수습 기간을 거친 후, 니키포로바는 이 단체의 "동기 없는 테러" 캠페인에 참여하여 무장 강도, 폭탄 테러, 재산 몰수 등 여러 활동을 벌였다. 체포되었을 때, 그녀는 스스로 폭탄을 터뜨려 자살을 시도했지만, 폭탄이 터지지 않아 투옥되었다. 1908년, 살인 및 무장 강도 재판 결과, 니키포로바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젊은 나이 때문에 나중에 무기징역과 중노동으로 감형되었다.
2. 3. 체포와 투옥
1908년, 니키포로바는 살인 및 무장 강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젊은 나이를 고려하여 무기징역과 중노동으로 감형되었다. 그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독방 감금되었다가 1910년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2. 4. 망명 생활
1910년 니키포로바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탈옥하여 감옥 폭동을 일으킨 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 중국 아나키스트 단체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다른 추방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러시아어 신문에 기사를 기고했다. 1912년에는 스페인 아나키스트 운동에 가담, 바르셀로나에서 은행 강도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파리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간성 여성으로서, 치료를 받는 동안 의료적 개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파리에서 니키포로바는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원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세옌코 등 여러 망명 러시아 예술가 및 정치인들을 만났고, 그림과 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이 시기에 폴란드 아나키스트 비톨드 브로즈스테크와 편의 결혼을 했다. 1913년 말, 런던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회의에 참석하여 "마루샤"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페테르 크로포트킨의 반독일 정서에 동조하여 연합국을 지지했다. 그녀는 프랑스 외인 부대에 입대했고, 군사 학교에서 장교로 졸업한 후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복무했다.
3. 혁명 활동 (1917년 ~ 1919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군대가 중부 열강의 합동 공격에 저항할 수 없게 되자, 니키포로바의 드루지나는 옐리사베트라드를 떠나 베레지우카에서 그리고리 코토프스키가 이끄는 다른 아나키스트 분견대와 충돌했다. 니키포로바가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갈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후 드루지나는 기차를 버리고 기병대 분견대로 재편성되었으며, 니키포로바는 흰 말을 타고 선두에 섰다.
드루지나는 Преображенка (Пологівський район)|프레오브라젠카|프레오브라젠카, 폴로히구uk에서 다른 소비에트 군대와 합류했으나, 볼셰비키 사령관 Матвеев,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이반 마트베예프|이반 바실리에비치 마트베예프ru와 갈등을 빚었다. 니키포로바가 영지의 물품을 압수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재분배했기 때문인데, 이는 형식적으로 그녀에게 종속되어 있던 마트베예프를 자극했다. 마트베예프는 드루지나를 무장 해제하려 했으나, 니키포로바는 회의의 목적을 간파하고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했다.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지역 볼셰비키들을 꾸짖으며 "그러한 혁명적인 전투 부대를 무장 해제하는 대신, 저는 여러분에게 그것들을 창설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드루지나는 올렉산드리우스크 방어에 참여했으나, 1918년 4월 13일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과 4월 18일 독일 제국군에 의해 도시가 점령되면서 후퇴했다. 차레코스티안티니우카에서 네스토르 마흐노 군대와 합류, 훌리아이폴레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쪽으로 후퇴를 계속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아나키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니키포로바는 타간로크에서 약탈 및 탈영 혐의로 체포, 드루지나는 볼로디미르 자톤스키 감독 하에 무장 해제되었다. 지역 아나키스트와 좌파 사회혁명당,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니키포로바 체포에 항의했고, 1918년 4월 혁명 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타간로크 아나키스트 회의에서 마흐노는 남부 우크라이나 게릴라전을 결정했고, 니키포로바는 드루지나에 합류했지만, 독일 공세로 로스토프나도누로 후퇴, 지역 은행을 약탈하고 채권, 증서 등을 불태웠다. 볼셰비키 포위 사실을 안 니키포로바는 보로네시로 이동, 1918년 11월 11일 휴전 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우크라이나 총국에 전복되자 1918년 말 귀국, 백군에게서 오데사를 탈환하고 감옥을 파괴했다.
드루지나는 사라토프에서 다시 무장 해제, 니키포로바는 체포되어 모스크바 부티르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아폴론 카렐린, 안토노프-오브세옌코 도움으로 보석 석방, 1919년 1월 21일 재판에서 게오르기 피야타코프에게 약탈 및 탈영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불복종 유죄, 약탈 무죄 판결을 받고 6개월 공직 금지 처벌을 받았다.
재판 후 니키포로바는 훌리아이폴레로 가서 마흐노와 합의, 마흐노 운동 병원, 보육원, 학교를 맡았다. 그러나 반 볼셰비키적 태도로 마흐노와 갈등, 지역 의회에서 공개 비난 후 무대에서 쫓겨났다.
1919년 봄, 안토노프-오브세옌코, 레프 카메네프 등 고위 볼셰비키들이 훌리아이폴레를 방문, 니키포로바는 안주인 역할을 했다. 카메네프는 니키포로바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형량 감형을 지시했다.
형량 감형 후 니키포로바는 베르댠스크에서 남편과 흑위대 부대를 창설, 마흐노 운동 불법화 후, 테러 활동을 재개, 토크마크에서 마흐노에게 자금 지원을 받았다.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시베리아 알렉산드르 콜차크 암살, 하르키우 정치범 석방 및 체카 본부 폭파, 모스크바 당 지도부 암살을 지시했다. 니키포로바는 크림 반도에서 안톤 데니킨 암살을 계획했다.
3. 1. 러시아 귀환 및 초기 활동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에 귀국한 마리야 니키포로바는 페트로그라드와 크론슈타트에서 아나키스트 선동 활동을 펼쳤다. 이후 고향인 올렉산드리우스크로 돌아와 지역 아나키스트 조직을 이끌었다.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군대가 중부 열강의 공격에 밀려 후퇴하면서, 니키포로바의 드루지나는 베레지우카에서 그리고리 코토프스키의 아나키스트 분견대와 충돌하기도 했다. 이후 드루지나는 프레오브라젠카에서 다른 소비에트 군대와 합류했으나, 볼셰비키 사령관 이반 마트베예프와 갈등을 빚고 무장 해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토노프-오브세옌코의 중재로 위기를 넘겼다.
드루지나는 올렉산드리우스크 방어에 참여했으나,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과 독일 제국군에 밀려 도시를 빼앗겼다. 이후 차레코스티안티니우카에서 네스토르 마흐노 군대와 합류, 훌리아이폴레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를 계속했다.
소련의 우크라이나 패배 이후, 볼셰비키는 체카를 통해 러시아 아나키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니키포로바는 타간로크에서 체포되어 약탈 및 탈영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3. 2. 네스토르 마흐노와의 만남
1919년 봄, 훌리아이폴레는 여러 고위 볼셰비키 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니키포로바는 안주인 역할을 했다.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4월 28일 마흐노의 군대와 훌리아이폴레를 시찰하면서 "옛 지인"을 만났다고 회상했다.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훌리아이폴레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담은 글을 썼지만, 아나키스트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얻는 데는 실패했고, 결국 유쿰스 바체티스로 교체되었다.레프 카메네프는 안토노프-오브세옌코의 보고에 따라 다음 주에 훌리아이폴레를 방문했다. 니키포로바는 기차역에서 카메네프와 그의 수행원을 만나 도시로 안내했다. 카메네프는 마흐노를 만나고 도시를 둘러본 뒤 니키포로바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예카테리노슬라프로 돌아가 그녀의 형량을 원래 기간의 절반으로 줄이라는 명령을 모스크바에 전보로 보냈다.
3. 3. 올렉산드리우스크 전투
마리야 니키포로바의 드루지나는 중부 열강으로부터 올렉산드리우스크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 도시의 붉은 경비대는 이미 후퇴를 조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18년 4월 13일,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이 도시를 점령했고, 그들은 니키포로바라고 잘못 믿었던 한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 4월 18일, 독일 제국군이 뒤따라와 남은 소비에트 군대를 몰아냈으며, 드루지나는 마지막 소비에트 분견대 중 하나였다.3. 4. 자유 전투 드루지나
니키포로바는 자신의 부대를 "자유 전투 드루지나"라고 불렀다. 이 부대는 옐리사베트라드를 떠난 후 베레지우카에서 그리고리 코토프스키가 이끄는 다른 아나키스트 분견대와 충돌하기도 했지만, 이후 기병대 분견대로 재편성되어 흰 말을 탄 니키포로바가 선두에 섰다.드루지나는 Преображенка (Пологівський район)|프레오브라젠카|uk에서 다른 소비에트 군대와 합류했지만, 볼셰비키 사령관 Матвеев,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이반 마트베예프|ru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후 중부 열강으로부터 올렉산드리우스크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도시가 함락되면서 후퇴해야 했다. 차레코스티안티니우카에서 네스토르 마흐노의 군대와 합류하기도 했지만, 훌리아이폴레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쪽으로 후퇴를 계속했다.
1919년, 니키포로바는 베르댠스크에서 남편 비톨트 브르조스테크와 함께 새로운 흑위대 부대를 창설했다. 이후 자신의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전선에 파견했는데, 한 그룹은 시베리아로 보내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다른 그룹은 하르키우와 모스크바에서 테러를 감행했다. 니키포로바와 브르조스테크는 직접 세 번째 그룹을 이끌고 크림 반도로 가서 안톤 데니킨을 암살하려 했지만, 세바스토폴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3. 5. 옐리자베트그라드 전투
1918년 초, 마리야 니키포로바의 부대는 옐리자베트그라드(현재의 크로피우니츠키)를 떠난 후 베레지우카에서 그리고리 코토프스키가 이끄는 다른 아나키스트 분견대와 충돌했다. 니키포로바가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갈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후 니키포로바의 부대는 기차를 버리고 기병대 분견대로 재편성되었으며, 니키포로바는 흰 말을 타고 선두에 섰다.니키포로바의 부대는 Преображенка (Пологівський район)|프레오브라젠카|프레오브라젠카, 폴로히구uk에서 다른 소비에트 군대와 합류했지만, 볼셰비키 사령관 Матвеев,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이반 마트베예프|이반 바실리에비치 마트베예프ru와 갈등을 빚었다. 니키포로바가 영지의 물품을 압수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재분배했기 때문이다. 마트베예프는 니키포로바 부대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으나, 니키포로바는 이를 눈치채고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했다.
이후 니키포로바의 부대는 중부 열강으로부터 올렉산드리우스크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했으나, 4월 13일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이 도시를 점령했다. 4월 18일, 독일 제국군이 뒤따라 도시를 점령하면서 니키포로바의 부대는 마지막 남은 소비에트 분견대 중 하나가 되었다.
3. 6. 볼셰비키와의 갈등 심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군대가 중부 열강의 공격에 밀려 후퇴하면서, 볼셰비키는 더 이상 아나키스트와의 동맹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아나키즘 운동에 대한 체카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니키포로바는 타간로크에 도착하자마자 약탈 및 탈영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녀의 부대(드루지나)는 우크라이나 볼셰비키 지도자 볼로디미르 자톤스키의 감독 하에 무장 해제되었다.지역 아나키스트와 좌파 사회혁명당은 니키포로바의 체포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아나키스트를 지지하는 전보를 보냈다.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들이 도시에 추가로 도착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18년 4월, 혁명 재판소가 열렸고, 검찰과 변호인 측 증인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니키포로바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드루지나는 사라토프로 이동했지만, 그곳에서 다시 무장 해제되었고 니키포로바 자신도 다시 체포되었다. 체카는 재판 없이 그녀를 처형하는 것을 꺼려 모스크바로 이송했고, 부티르카 감옥에 잠시 수감되었다. 그녀는 아폴론 카렐린과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세옌코의 도움으로 보석으로 풀려났다.
1919년 1월 21일, 니키포로바에 대한 혁명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미 타간로크 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약탈 및 탈영 혐의로 다시 기소되었다. 1월 25일, 프라우다는 그녀가 불복종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약탈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6개월 동안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처벌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3. 7. 훌리아이폴레 활동 및 테러
1919년, 마리야 니키포로바는 훌리아이폴레에서 네스토르 마흐노의 군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훌리아이폴레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함락된 상태였다. 니키포로바는 혁명 위원회 포로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붉은 군대 사령관들이 합류를 거부하고 독일군의 진격 소식이 들려오자, 계획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후퇴했다.3. 8. 체포와 처형
제공된 소스에는 해당 섹션 제목("체포와 처형") 및 요약(1919년 체포 및 처형)과 관련된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소스만으로는 해당 섹션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4. 정치적 입장
마리야 니키포로바는 젊은 시절 아나코 공산주의 정치에 입문하여 이를 추구하기 위해 과격한 전술을 채택했다. 아나키스트로 널리 알려진 그녀는 자유주의적 철학의 상징으로 줄곧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녀는 부유한 토지 소유주가 소유한 재산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재산 재분배를 선호하며 "노동자와 농민은 수 세기에 걸쳐 그들이 창조한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빨리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아나키스트가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아나키스트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아나키스트는 단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고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경고했다.
1917년 러시아로 돌아온 니키포로바는 "소비에트 아나키즘"이라는 전술적 전략을 옹호한 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특별한 상황에서 볼셰비키와 동맹을 맺는 데 동의했고, 올렉산드리우스크 레브콤의 부대표로 잠시 임명되기도 했다.
4. 1. 아나키즘과 혁명
10월 혁명은 국가의 소멸로 향하는 단계로 여겨져 니키포로바는 이를 환영했다. 그녀는 올렉산드리우스크에서 "흑위병"이라는 무장 부대를 조직하여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으로 번져가는 갈등에 대응했다. 1917년 11월, 올렉산드리우스크 소비에트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가입에 찬성 147표, 반대 95표로 가결하여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니키포로바는 지역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 무기를 조달하며 흑해 함대의 지원을 확보했다. 12월 12일, 알렉산드로프스크 볼셰비키 봉기를 일으켜 소비에트를 전복하고 볼셰비키, 좌익 사회주의 혁명가 및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즘 대표들로 재구성했다.1917년 12월 25일, 니키포로바와 그녀의 부대는 하르키우로 가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수립에 협력하고, 지역 상점에서 물품을 몰수하여 주민들에게 재분배했다. 며칠 후, 흑위병을 이끌고 카테리노슬라프에서 가이데마크에 맞서 전투를 벌여 도시를 소비에트의 손에 넣고 48명의 병사를 직접 무장 해제했다. 전 러시아 중앙 집행 위원회가 러시아 제헌 의회를 해산한 후 내전은 불가피해졌고,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에서 니키포로바 주변의 아나키스트들을 필요한 지원 기반으로 보았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고향인 올렉산드리우스크는 3일간의 전투 끝에 다시 우크라이나 중앙 평의회의 통제 하에 들어가 지역 아나키스트 부대가 철수해야 했다. 1918년 1월 2일, 러시아에서 온 적위대 (러시아)와 훌리아이폴레에서 온 흑위병이 도착한 후 도시가 다시 점령되어 가이데마크가 우크라이나 우안으로 후퇴했다. 이틀 후, 혁명 위원회 (소비에트) (Revkom)가 올렉산드리우스크의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지로 구성되었고, 니키포로바는 그 위원회의 부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가이데마크가 도망치자, 코사크는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에서 돌아와 알렉세이 칼레딘의 돈군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올렉산드리우스크는 그들의 고향 지역인 돈 공화국과 쿠반 인민 공화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흑위병이 방어 태세를 갖추려고 애쓰는 가운데, 코사크의 첫 번째 공격은 실패로 끝나 레브콤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다. 니키포로바가 "러시아 노동자의 학살자"들에게 차르 시대의 옛 방식을 버리라고 외치자, 많은 코사크가 겸손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공개적으로 울었고, 다른 이들은 지역 아나키스트들과 연락을 유지했다. 코사크가 떠나자 네스토르 마흐노와 니키포로바는 레브콤에서 그들의 임무로 돌아왔다. 마흐노 자신이 징역형을 선고받도록 감독한 검사의 형벌에 대한 두 사람 간의 논쟁 끝에, 마흐노는 자신의 직책을 포기하고 훌리아이폴레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니키포로바는 올렉산드리우스크 흑위병의 유일한 사령관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드루지나는 우크라이나 중부의 도시인 옐리자베트그라드로 이동하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유혈 사태 없이 도시를 점령하고 소비에트 권력으로의 전환을 감독하기 위해 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녀는 도시를 점령하는 동안 러시아 장교를 암살하고, 지역 상점을 몰수하고, 기본적인 생필품을 시민들에게 재분배했으며, 볼셰비키가 통제하는 레브콤에 대한 공개적인 반항으로 비필수적인 상품에 대한 물물교환 경제를 수립했다. 니키포로바는 레브콤이 부르주아지에 대해 너무 관대하고 새로운 지배 계급을 구성했다고 비난했으며, 모든 형태의 정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기구를 해산하고 위원장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레브콤은 그녀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했고, 그녀는 며칠 뒤 도시의 군사 대학에서 모든 무기를 약탈한 후, 새로 설립된 흑위대 지역 분대를 남겨두고 도시를 떠났다.
우크라이나 중앙 의회는 급속한 소비에트 진격에 대응하여 중앙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우크라이나 하이다마크,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및 독일 제국군의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여 소비에트 전선을 다시 밀어냈다. 독일군이 옐리자베트그라드에 도착하자 레브콤은 즉시 퇴각하여 도시에 권력 공백을 남겼다. 점령군은 심지어 현지 농민을 징집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사람들을 모집하려 했지만, 드루지나는 옐리자베트그라드로 돌아와 현지 기차역을 점령하고 도시를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부르주아지로부터 돈을 몰수했다. 도시의 공식 정부와 아나키스트 간의 긴장된 평화가 며칠 지속된 후, 아나키스트와 현지 공장 노동자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정부군에게 드루지나에 대항할 기회를 제공했다. 아나키스트는 공격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했지만 수적으로 압도당하여 카나토베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그들의 병사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혀 갔다는 것을 발견했다.
알렉산드르 벨렌케비치가 이끄는 적위대는 도시를 탈환하려 했지만,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포위되어 전멸했고, 이로 인해 도시 당국은 그들의 포로를 처형하기 시작했다. 니키포로바는 이후 드루지나를 이끌고 철도로 공격하여 교외에서 참호를 파고, 수천 명의 무장 병력과 대치했는데, 그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니키포로바를 불경한 도적 지도자로 묘사하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전투는 소모전으로 이어져 이틀 동안 참호 사이에서 끊임없이 포격과 기관총 사격이 오갔다. 2월 26일, 드루지나는 카멘스크에서 온 적위대 병력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 병력은 도시의 방어에 거의 효과적이지 못했다. 심한 폭격으로 드루지나는 즈나면카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미하일 무라비요프의 지휘하에 키예프 전투에서 승리하고 온 더 많은 적위대의 지원을 받았다. 도시 당국은 중앙국으로부터 증원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도착하지 않아 도시가 소비에트 공격에 취약해졌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북쪽에서 니키포로바의 진격을 막는 동안, 안드레이 폴루파노프는 거의 방어되지 않은 남쪽을 공격하여 도시를 항복하게 만들었다. 도시 당국은 소비에트의 요구에 따르고 니키포로바의 투옥된 병사들을 석방했으며, 이 도시는 결국 3월 19일까지 소비에트의 손에 남아 있었고, 이 날 독일 제국군의 공격으로 소비에트군은 철수해야 했다.
젊은 시절, 니키포로바는 아나코 공산주의 정치에 입문하여 이를 추구하기 위해 과격한 전술을 채택했다. 아나키스트로 널리 알려진 그녀는 자유주의적 철학의 상징으로 줄곧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니키포로바는 수년간의 활동을 통해 그녀의 아나키스트 정치적 견해를 옹호하는 수많은 연설을 했다. 그녀는 부유한 토지 소유주가 소유한 재산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재산 재분배를 선호하며 "노동자와 농민은 수 세기에 걸쳐 그들이 창조한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빨리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아나키스트가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나키스트는 단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고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경고했다.
4. 2. 소비에트 권력과의 관계
1917년 러시아로 돌아온 니키포로바는 "소비에트 아나키즘"이라는 전술적 전략을 옹호한 베테랑 아나키스트 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을 받았다. 페트로그라드에서 그를 만난 카렐린의 정치적 전술은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적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나키스트적 의제로 이끌어갈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소비에트 기구에 참여하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기구들이 급진적인 의제에서 벗어날 경우, 아나키스트들은 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야 했다. 이러한 기구 협력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널리 비난받았는데, 그들은 그러한 기구 내에서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비효율적이었다.니키포로바는 특별한 상황에서 볼셰비키와 동맹을 맺는 데 동의했고, 자신이 소비에트 기구에 임명되도록 협상하여 잠시 올렉산드리우스크 레브콤의 부대표가 되었다. 그녀는 볼셰비키 요원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요구하고, 이를 자신의 아나키스트 의제를 추구하는 데 사용하면서, 여러 우크라이나 도시에 소비에트 권력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붉은 군대와 여러 차례 동맹을 맺었지만, 혁명적인 이유로 그들의 일부 관행에 반대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지휘관들과 대립했고, 그들 중 몇몇을 개인적으로 적대했다. 그녀는 한 소비에트 지휘관이 귀족의 집에서 약탈한 사치품을 숨겨두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이기심에 대해 분노하며 그와 대면했다. 그녀는 "지주들의 재산은 어떤 특정 부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민에게 속한다. 인민이 원하는 것을 가지게 하라."라고 선언했다.
5. 유산
마리야 니키포로바의 유산은 크게 두 가지 측면, 즉 사후에도 계속된 신화적인 측면과 역사적 평가로 나눌 수 있다. 니키포로바는 생전에 불법적인 활동으로 인해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그녀의 강렬한 삶과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후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재해석되었다.
5. 1. 사후의 신화
니키포로바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녀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계속 퍼졌다. 몇 년 동안 니키포로바가 파리에서 소련 스파이가 되었고, 그곳에서 우크라이나 유대인 무정부주의자 샬롬 슈바르츠바르트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시몬 페트류라를 암살하는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그녀의 유산은 또한 모방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는데, 다수의 여성 게릴라들이 가명으로 "마루샤"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활동했다. 1919년, 25세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교사 마루샤 소콜로프스카는 그녀의 죽은 오빠의 기병대 부대를 지휘했으며, 적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20~1921년에는 마루샤 체르나야(Black Maria|블랙 마리아영어)도 우크라이나 혁명 반군의 기병대 연대장이었으며, 적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탐보프 반란 동안, 반군 지휘관 중 한 명은 마루샤 코소바라는 여성이었는데, 반란 진압 후 행방불명되었다.
5. 2. 역사적 평가
마리야 니키포로바는 불법적인 활동 때문에 생전에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으며, 군 지휘관으로서 마지막 몇 년 동안에만 공인된 인물로 부상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기존 기록들은 그녀의 군 복무 기록이나 네스토르 마흐노, 빅토르 빌라시와 같은 동시대인들의 회고록에서 비롯되었다.니키포로바의 생애는 주로 여성 볼셰비키에 초점을 맞춘 소비에트 사학에 의해 대체로 소홀히 다루어졌으며, 니키포로바를 짧게 언급하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또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역사적 서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그녀의 확고한 반민족주의적 입장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학에서도 대체로 소외되었으며, 아나키스트 사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사학은 대부분의 관심을 네스토르 마흐노에게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해체 이후 니키포로바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으며, 21세기 동안 그녀의 삶에 대한 여러 에세이와 전기가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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