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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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요리아누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457년-461년)로, 군사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는 아비투스 황제 사후 리키메로스에 의해 옹립되었으며, 세제 개혁과 행정 개혁을 추진하고 서고트족을 격퇴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반달족 토벌을 위해 히스파니아에서 군용 선박을 건조했으나 실패하고, 461년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 재건의 마지막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고 평가받으며, 에드워드 기번은 그를 "타락한 시대에 인간의 명예를 옹호하기 위해 나타난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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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리아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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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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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 |
로마자 표기 | Iulius Valerius Maiorianus |
재위 | 457년 12월 28일 ~ 461년 8월 2일 |
통치 구역 |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에서는 인정하지 않음) |
선임자 | 아비투스 |
후임자 | 리비우스 세베루스 |
섭정 | 레오 1세 |
섭정 유형 | 동로마 황제 |
출생 | 기원후 420년경 |
사망일 | 461년 8월 7일 |
사망 장소 | 데르토나, 로마 제국 |
어머니 | 마요리아누스의 딸, 마기스테르 밀리툼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통치 | |
황제 즉위 | 457년 |
폐위 | 461년 |
개인사 | |
전체 이름 |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 |
출생 연도 | 420년경 |
사망 연도 | 461년 |
사망 장소 | 데르토나 |
기타 정보 | |
참고 자료 | 카르멘 IV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 |
2. 생애
마요리아누스의 생애와 치세는 동시대 다른 서로마 황제들보다 더 잘 알려져 있다. 5세기의 후반기를 다루는 히다티우스와 마르켈리누스 코메스의 연대기, 프리스쿠스와 안티오키아의 요한의 단편들이 중요한 자료이다.
갈로-로마 귀족이자 시인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황제의 지인이었고, 459년까지의 마요리아누스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인 찬가를 지었다. 그의 정책과 관련하여, 그의 법률 12개가 ''Novellae Maiorianila''라는 이름으로 알라리크 2세를 위해 편찬된 알라리크의 요약서에 포함되어 보존되어 있다.[2]
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 밑에서 군 경력을 시작하여, 갈리아에서 리키메르[5]와 아에기디우스[6]를 만났다. 투르를 방어하고 비쿠스 헬레나 근처 전투[7]에서 프랑크족을 상대로 공을 세웠으며,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플라키디아와 결혼할 뻔했으나 아에티우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9] 454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를 살해한 후 군에 복귀했고,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가 되자 코메스 도메스티코룸에 임명되었다.[13]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살해된 후, 아비투스가 황제가 되었으나, 마요리아누스와 리키메르는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살해했다.[14] 이후 마요리아누스는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457년 4월 1일 추정),[16] 458년 12월 28일에 공식적으로 황제에 즉위했다.[20]
황제 아비투스 시대에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의 침략을 저지하여 장군으로서 주목받았다. 아비투스 사후, 457년 리키메르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처음에는 리키메로스의 꼭두각시로 여겨졌지만, 세제 개혁 및 행정 개혁을 실시하고, 서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마요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토벌을 위해 카르타헤나에서 군선을 건조했지만, 461년 7월 가이세릭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결국 마요리아누스는 가이세릭을 "마우레타니아 및 트리폴리타니아의 왕"으로 승인해야만 했다.
461년 8월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로 귀국하던 중 병사들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리키메르가 선동했다는 설이 있지만, 마요리아누스의 죽음으로 서로마 제국은 재건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마요리아누스는 420년 이후 로마 제국의 군사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마요리아누스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치하에서 마기스터 밀리툼을 역임했고, 그의 아버지는 서로마 제국의 유력 장군이었던 아에티우스의 재정을 관리했다.[2]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4] 그는 아에티우스를 따라 갈리아로 갔고, 그곳에서 아에티우스의 지휘 아래 있던 두 명의 장교, 수에비-서고트족 출신의 리키메르[5]와 갈로-로마인 아에기디우스[6]를 만났다. 이들은 훗날 마요리아누스의 생애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마요리아누스는 투르를 방어하고, 비쿠스 헬레나 근처 전투[7](447년 또는 448년)에서 프랑크족을 상대로 공을 세웠다. 비쿠스 헬레나 전투에서 마요리아누스는 다리 위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싸웠다.[8]

450년경,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의 딸 플라키디아와 마요리아누스를 결혼시켜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마요리아누스를 사위로 삼아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고, 강력한 장군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9]
그러나 이 계획은 아에티우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아들 가우덴티우스를 플라키디아와 결혼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요리아누스를 군에서 내쫓고, 시골 영지로 보냈다.[9]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에 따르면, 마요리아누스의 몰락은 아에티우스의 아내가 마요리아누스가 남편의 명성을 가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0]
454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를 살해한 후, 마요리아누스는 군에 복귀하여 혼란을 수습했다.[11] 발렌티니아누스 3세 사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가 되자 마요리아누스는 코메스 도메스티코룸에 임명되었다.[13]
2. 2. 황제 즉위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반달족의 로마 약탈 도중 살해되고, 갈리아-로마 귀족 아비투스가 서고트족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코메스 도메스티코룸(황실 경호대 사령관)이었던 마요리아누스와 이탈리아의 ''코메스 레이 밀리타리스''였던 리키메르는 처음에는 아비투스를 지지했으나, 아비투스가 민심을 잃자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살해했다.[14] 이들은 아비투스가 수도 라벤나의 방어를 맡긴 ''마기스테르 밀리툼'' 레미스투스를 살해했다. 그 후 리키머는 피아첸차 근처에서 아비투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 자신을 포로로 잡아 퇴위를 강요했으며, 마요리아누스는 457년 초에 아비투스를 굶겨 죽였다.[14]아비투스 사후 서방은 황제가 없는 상태였다.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457년 1월 27일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은 레오 1세는 단독 통치를 결정했다.[15] 457년 2월 28일, 마요리아누스는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이 되었고, 리키머는 ''귀족''(patricius)이자 ''군사령관''이 되었다.[16]
이 상황에서, 900명의 알레만니 군대가 라에티아에서 마조레 호수까지 이탈리아 영토로 침투했다. 그들은 마요리아누스가 보낸 ''백작''(comes) 부르코의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18] 이 승리는 마요리아누스 자신의 승리로 기념되었고, ''군사령관''은 군대에 의해 라벤나 외곽 6마일 지점인 ''아드 콜루멜라스''(ad Columellas, "작은 기둥들"이라는 뜻)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457년 4월 1일 추정).[16]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찬사에서 마요리아누스가 처음에는 황제 즉위를 거부했다고 전한다.[19] 마요리아누스는 458년 12월 28일에 공식적으로 황제로 선포되었다.[20] 그는 458년에 집정관을 맡았다.[2] 그러나 동방 궁정은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거의 모든 동시대 동방 자료들은 레오 1세를 유일한 집정관으로 언급하고 있다.[21]
3. 통치
마요리아누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그의 통치 기간은 여러 사료를 통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히다티우스와 마르켈리누스 코메스의 연대기, 프리스쿠스와 안티오키아의 요한의 단편들이 주요 사료로 활용된다.[2] 특히,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가 쓴 찬가는 459년까지 마요리아누스의 생애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2] 그의 법률 12개가 ''Novellae Maiorianila''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당시 제국이 직면했던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2]
마요리아누스는 420년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458년에는 iuvenisla('젊은이')로 묘사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군사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할아버지 마요리아노는 테오도시우스 1세 치하에서 마기스터 밀리툼la 지위에 올랐다.[2] 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투르를 방어하고 ''비쿠스 헬레나'' 전투에서 프랑크족을 상대로 활약했다.[7]
450년경,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의 딸 플라키디아와 마요리아누스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아에티우스가 자신의 아들 가우덴티우스를 플라키디아와 결혼시키려 했기 때문에 이 계획은 실패했다.[9] 아에티우스는 마요리아누스를 군에서 물러나게 했다.[9]
454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를 살해한 후, 마요리아누스는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11]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가 되었고, 마요리아누스는 코메스 도메스티코룸la(황실 경호대 사령관)으로 승진했다.[13]
마요리아누스는 황제 아비투스 시대에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의 침략을 막아내며 장군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457년 아비투스가 살해된 후, 리키메로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13] 그는 세제 및 행정 개혁을 실시하고, 서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마요리아누스는 반달족 토벌을 위해 히스파니아에서 함대를 건조했으나, 461년 7월 가이세리크의 공격으로 함대가 파괴되었다.[40] 결국 마요리아누스는 가이세릭을 마우레타니아 및 트리폴리타니아의 왕으로 인정해야 했다. 461년 8월, 이탈리아로 귀국하던 중 병사들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40] 마요리아누스의 죽음으로 서로마 제국은 재건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3. 1. 갈리아 재정복
마요리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입지를 굳힌 후 갈리아 회복에 집중했다. 갈리아 로마 황제 아비투스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이 갈리아에 전해지자, 현지 속주는 마요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458년 리옹(현 리옹)에서 발견된 비문이 이를 뒷받침한다. 로마 관습에 따라 비문에는 그 해 재임 중이던 집정관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레오 1세와 마요리아누스였다. 하지만 이 비문에는 레오 1세의 이름만 기록되어, 당시 마요리아누스가 합법적인 서로마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보여준다.[25] 아비투스가 죽자 리옹 시민들이 세금 감면을 요청한 대상이 마요리아누스가 아닌 레오에게 였다는 사실[26], 그리고 이 시기에 갈리아에서 실패한 찬탈 기록[27]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458년 말, 마요리아누스는 야만족 부대로 강화된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에 진입했다.[28] 황제는 리키메로스를 이탈리아에 남겨두고, 아에기디우스와 "사령관 네포티아누스"를 협력자로 선택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황제 군대는 아를 전투에서 테오도리쿠스 2세 왕 치하의 서고트족을 격파하여 서고트족이 셉티마니아를 포기하고 서쪽 아키타니아로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로마의 승리는 결정적이었다. 새로운 조약에 따라 서고트족은 히스파니아에서 광대한 정복지를 포기하고 동맹국 지위로 돌아가야 했다. 마요리아누스는 신뢰하는 장군 아에기디우스를 새로운 "갈리아 사령관"으로 선택하고, 서고트족에 대한 승리와 테오도리쿠스 2세와의 새로운 조약을 보고하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사절을 보냈다.[29]
새로운 "동맹국"의 도움을 받아 마요리아누스는 론 계곡에 진입하여 "무력으로, 때로는 외교로" 그 지역 사람들을 정복했다.[30] 부르군트족을 격파하고 리옹을 포위하여 정복했다. 반란을 일으킨 도시는 막대한 벌금을 부과받았고, 바가우데는 제국에 합류하도록 강요받았다.[2] 갈리아 로마 귀족이 아비투스의 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요리아누스는 처벌이 아닌 화해를 원했다. 마요리아누스의 "서신 장관" 페트루스, 즉 아비투스의 사위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의 중재로 황제를 기리는 찬사[31](459년 1월 초)를 전달할 수 있었고, 그 보상으로 "고귀한 백작" 지위를 받았다. 그러나 리옹 시민들이 레오 1세에게 요청한 세금 감면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32]
3. 2. 히스파니아 원정과 반달족과의 전쟁
마요리아누스는 반달족의 로마 약탈 (455년) 이후, 서고트족이 형식적으로는 아비투스 황제의 이름으로, 실제로는 자신들의 통제하에 정복한 히스파니아를 재정복하고자 했다. 그는 히스파니아를 아프리카 정복의 기지로 삼을 계획이었다. 서부 제국의 풍요로운 이 속주는 로마 시로의 곡물 공급에 매우 중요했지만, 반달 왕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마요리아누스는 "모든 미덕에서 로마 황제들을 능가했다"[33]고 칭송받았으며, 반달족의 군사적 준비 상태와 현지 주민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그는 금발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사절로 위장하여 가이세리크를 찾아갔다.[34]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 민속 전설일 가능성이 있지만,[35] 원정 준비가 신중했음을 보여준다. 마요리아누스는 정보를 수집하고 300척의 함대를 모았다.[2]
마요리아누스는 comes이자 "서방의 patricius"인 마르켈리누스를 시칠리아로 보내 반달족으로부터 섬을 되찾게 했다. 마르켈리누스는 일리리쿰의 "comes rei militaris"(총독)였지만, 아에티우스 사후 사실상 독립적인 존재였다. 마요리아누스는 그를 설득하여 황제로 인정받고 군사적 회복에 협력하도록 만들었다.[36]
원정은 459년, 네포티아누스와 수니에리크가 이끄는 수에비에 대한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마요리아누스는 리구리아에 주력군을 집결시킨 후 아키텐과 "노벰포풀라니아"로 진입했다(460년 5월). 가이세리크는 로마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마요리아누스는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이유로 거절했다.[37] 반달 왕은 마우리타니아와 누미디아를 황폐화시키고,[38] 해군 습격을 준비했다.[30]
마요리아누스는 히스파니아를 정복했다. 네포티아누스와 수니에리크가 "루쿠스 아우구스티"(루고)에서 수에비를 격파하고 루시타니아의 "스칼라비스"(산타렝, 포르투갈)를 정복하는 동안, 황제는 "카이사라우구스타"(사라고사)에서 "아드벤투스"를 거행했다.[39] 카르타기넨시스에 도착했을 때, "포르투스 일리치타누스"(엘체 근처)에 정박해 있던 함대가 반달족에게 매수된 배신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40]
460년 가을, 마요리아누스는 함대를 잃고 공격을 취소, 가이세리크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반달족의 마우리타니아 "사실상" 점령을 인정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42] 그는 군대를 해산하고,[43] 아를라테에서 겨울을 보냈다.[44]
3. 3. 내정 개혁
마요리아누스는 제국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고 행정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세금 체납을 탕감하고, 세금 징수 과정의 부정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지방 자치 단체의 수호자(''defensor civitatis'') 직책을 강화하여 시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려 했다.[2]458년 3월 11일, 마요리아누스는 "과거 미납 계정에 대한 면제" (''Novella Maioriani'' 2)라는 법률을 발포하여 토지 소유주의 모든 세금 체납액을 면제했다. 또한, 공무원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 임무는 총독에게만 배정했다. 같은 해 9월 4일에는 "포기된 재산과 박탈된 사람들의 재산에 관하여"(''Novella Maioriani'' 5)라는 법을 발포하여 세금 시스템을 재편했다.[2]
458년 5월 8일, 마요리아누스는 "자치시의 수호자들에 관하여"(''Novella Maioriani'' 3)라는 법을 발포하여 ''수비수 키비타티스''(defensor civitatis)의 직책을 재설립했다. 이 도시 치안 판사는 재정 문제 등 공공 행정에 대한 소송에서 시민들의 이익을 대변했다.[2]
458년 11월 6일에는 ''데쿠리온, 그들의 자녀, 그들의 토지 재산 매각에 관하여'' (''Novella Maioriani'' 7)라는 법률을 통해 데쿠리온이 저지른 과거의 남용을 용서하고, 그들이 지위를 떠나거나 재산을 양도하는 것을 금지했다.[2]
마요리아누스는 로마의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 장려 정책을 펼쳤다. 그는 여성의 종교 서약 연령을 제한하고, 과부의 재혼을 장려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458년 10월 26일, ''De sanctimonialibus vel viduis et de successionibus earum''("성녀, 과부, 그리고 그들의 상속")라는 법령을 통해 종교 서약을 하는 최소 연령을 40세로 정하고, 종교 서약을 강요받은 여성에게 상속권을 부여했다.[50] 또한, 어린 과부들은 종교 서약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51]
마요리아누스는 로마의 문화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공 건물의 파괴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엄벌에 처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459년 7월 11일, ''Novella Maioriani'' 4, ''De aedificiis pubblicis'' ("공공 건물")을 공포하여 고대 공공 건물의 파괴를 허용한 판사들에게 금 5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하고, 하급자들은 채찍질과 양손 절단형에 처했다. 공공 건물에서 자재를 제거한 사람들은 이를 반환해야 했다.[55]
4. 몰락과 죽음
아비투스의 운명이 리키메르와 마요리아누스의 배신, 그리고 그의 게르만 근위대의 해산으로 결정되었듯이, 마요리아누스 자신의 운명 또한 그의 군대 해산과 리키머가 조직한 음모에 의해 결정되었다. 황제가 이탈리아를 떠나 있는 동안, 야만인 ''파트리키우스''이자 ''magister militum''였던 리키머는 자신의 옛 동료에 대한 귀족적 반대 세력을 규합했다. 마요리아누스의 입법은 제국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영향력 있는 귀족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더라도 단호하게 개입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2][56]
아를라테에서 반달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겨울과 봄을 보낸 후,[44] 마요리아누스는 여름 동안 작은 호위병(아마도 ''도메스티치'')과 함께 떠났고,[43] 아마도 로마에 도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57] 그는 458년에 그랬던 것처럼 알프스를 넘으려 하지 않고, 아를라테에서 비아 아우렐리아를 따라 남부 갈리아와 리구리아로 이동했지만,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리키머가 자신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데르토나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비아 에밀리아를 따라 라벤나로 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58] 그러나 리키머는 8월 2일 데르토나(아비투스가 살해된 피아첸차 근처)에서 그를 가로막아 체포하고 폐위시켰다.[20]
황제는 옷과 왕관을 빼앗기고 구타당하고 고문당했다. 5일 후인 8월 7일, 마요리아누스는 이리아 강 근처에서 참수되었다.[59][20] 토르토나시는 현재 성 마태오 성당에 전통적으로 "마요리아누스 묘"로 여겨지는 건물을 소장하고 있다.[60] 그러나 엔노디우스는 마요리아누스가 적절한 장례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한다.[61]
리키머는 마요리아누스가 자연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후, 자신이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 전에 3개월을 기다렸다. 그는 마침내 이탈리아 원로원 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원로원 의원인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선택했다. 새 황제는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에게, 그리고 마요리아누스 휘하에서 복무했던 어떤 장군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즉, 갈리아의 아에기디우스, 시칠리아와 일리리아의 마르켈리누스, 그리고 히스파니아의 네포티아누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36][63]
461년 7월, 마요리아누스는 가이세릭의 공격으로 히스파니아에서 준비 중이던 건조 선박을 파괴당했다. 결국 마요리아누스는 가이세릭을 "마우레타니아 및 트리폴리타니아의 왕"으로 승인해야만 했다.
같은 해 8월, 이탈리아 본국으로 귀국하던 중 병사들의 반란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일설에는 리키메로스가 선동했다고 전해지지만, 결과적으로 마요리아누스의 죽음으로 서로마 제국은 재건의 마지막 기회를 잃게 되었다.
5. 평가
마요리아누스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마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그는 제국의 쇠퇴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64][65] 특히 세제 개혁과 중앙 집권에서 지방으로 일부 권한을 이양하는 행정 개혁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서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는 군사적 업적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개혁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고, 결국 461년 8월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로 귀국하던 중 병사들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64] 일설에는 리키메로스가 반란을 선동했다고 전해진다.
마요리아누스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 재건의 마지막 기회를 앗아간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를 "타락한 시대에 인간의 명예를 옹호하기 위해 때때로 나타나는 위대하고 영웅적인 인물"이라고 칭송했으며,[64]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5세기에 제국 왕좌를 차지한 인물 중 위대함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65]
참조
[1]
웹사이트
Carmen IV
https://www.thelatin[...]
[2]
문서
Mathi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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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Prosopography of the Later Roman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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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Mathisen
[14]
문서
fragment 202
[15]
문서
Libius Severus
[16]
문서
Fasti vindobonenses priores
[17]
간행물
Late Roman Prosopography: Between Theodosius and Justinian
https://www.jstor.or[...]
1983
[18]
문서
Carmina
[19]
문서
Carmina
[20]
서적
Prosopography of the Later Roman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21]
서적
Consuls of the later Roman Empire
http://archive.org/d[...]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by Scholars Press
1987
[22]
서적
Campania tardoantica (284–604 d.C.)
Edipuglia
2005
[23]
문서
Gibbon
[24]
문서
Carmina
[25]
문서
CIL 13
[26]
문서
Glory of the Confessors
[27]
문서
Letters
[28]
문서
Carmina
[29]
문서
Hydatius
459
[30]
문서
fragment 27
[31]
문서
Carmen V
[32]
문서
Carmina
[33]
서적
The Wars of Justinian
[34]
문서
Procopius
[35]
문서
MacGeorge
[36]
서적
The Later Roman Empire, 284–602
JHU Press
1986
[37]
문서
Priscus, fr. 36.1; Hydatius, Chron., p. 32.
[38]
문서
Priscus, fr. 36.1.
[39]
서적
Visigothic Spain, 409–711
Blackwell Publishing
2004
[40]
간행물
Chronica gallica anno 511
[41]
논문
According to Hydatius, the peace talks took place after late November, which could indicate that Majorian had tried to recover the losses and keep pushing the attack, to desist only because of the arrival of winter of for economic reasons (Oppedisano 2009, p. 545).
[42]
논문
The treaty has not been preserved: from Priscus' fragment (fr. 36.2) it is possible to deduce it was not favourable to the Romans, even if another fragment (fr. 38) makes it clear that the Vandals did not receive recognition of their power over Sicily; it is possible that this treaty was based on the one signed in 442 (Ch. Courtois, Les Vandales et l’Afrique, Paris 1955, p. 199).
[43]
문서
Priscus, fr. 36.2.
[44]
간행물
Chronica gallica anno 511
[45]
문서
Sidonius Apollinares, Epistulae 1.11.5.
[46]
서적
The Theodosian code and novels, and the Sirmondian constitutions
The Lawbook Exchange, Ltd.
2001
[47]
문서
This Ennodius was a relative of the poet and bishop Magnus Felix Ennodius (474–521).
[48]
문서
Novella Maioriani 7.14, 6 November 458, cited in Mathisen.
[49]
서적
Coinage and history of the Roman Empire, c. 82 B.C.–A.D. 480
Taylor & Francis
[50]
문서
Novella Maioriani 6.1–3, cited in Grubbs, p. 110.
[51]
문서
Novella Maioriani 6.5–8, cited in Grubbs, pp. 232–234.
[52]
문서
Novella Maioriani 6.9–103, cited in Grubbs, p. 119.
[53]
문서
Novella Maioriani 1, De ortu imperii domini Majoriani Augusti, "The Beginning of the Reign of Our Lord Majorian Augustus".
[54]
문서
This event took place in 461, and is recorded in a letter (Letters, I.11.2–15) of Apollinaris to a friend (Mathisen).
[55]
서적
Le invasioni barbariche nel meridione dell'impero: Visigoti, Vandali, Ostrogoti
Rubettino
[56]
문서
Hydatius, 210.
[57]
문서
Hydatius, Chron., p. 32; Priscus, fr. 36.2.
[58]
논문
Epigrafia e coincidenze della storia: l’imperatore Maioriano, Dertona e una presunta nuova iscrizione cristiana
1998
[59]
문서
John of Antioch, fragment 203; Marcellinus, sa 461; Fasti vindobonenses priores, No 588. Victor of Tonnena erroneously claims that Majorian reached Rome and was killed there, and puts this event in 463 (Chronica, s.a. 463). Malalas (375 Dindorf) reports a strange version in which Ricimer was killed because of Majorian's betrayal in favour of Gaiseric.
[60]
웹사이트
Mausoleo di Maiorano (Sec. I a.C.)
http://www.comune.to[...]
2006-05-15
[61]
문서
Ennodius, Carmina, 2.135 Vogel.
[62]
서적
Emperors Do not Die in Bed
Routledge
2004
[63]
문서
O'Flynn, p. 111.
[64]
서적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65]
백과사전
Majorian
https://www.britanni[...]
2007-08-09
[66]
학위논문
CarmenIV
https://www.thelatin[...]
[67]
학위논문
The Last Romans: Emperor Majorian and the Fall of Rome
http://arno.uvt.nl/s[...]
University College Til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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