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세베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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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461년 ~ 465년)였다. 그는 루카니아 출신으로, 461년 11월 리키메르의 지원을 받아 황위에 올랐으나,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의 치세 동안 서고트족, 반달족의 침략과 갈리아, 달마티아 등 속주의 반란으로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축소되었다.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로 여겨지며, 465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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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세베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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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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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플라비우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세르펜티우스 |
출생지 | 루카니아 |
사망일 | 465년 8월 15일 |
정치 | |
직위 | 서로마 황제 |
통치 기간 (서방) | 461년 11월 19일 – 465년 11월 14일 |
이전 통치자 | 마요리아누스 |
다음 통치자 | 안테미우스 |
섭정 | 레오 1세 |
섭정 유형 | 동로마 황제 |
종교 | |
종교 | 기독교 |
2. 이름
현대 학자들은 세베루스의 처음 두 이름이 '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라는 데 동의한다.[13][16][2] 하지만 후기 라틴어에서 'b'와 'v'의 상호 교환이 흔해져서, 세베루스의 코그노멘(cognomen, 로마인의 이름 중 세 번째 이름)은 때때로 '리비우스'(Livius)로 잘못 표기되기도 한다.[13][19][11]
이 두 이름 외에도 세베루스는 때때로 세 번째 이름인 '세르펜티우스'(Serpentius)로 불린다. 파스카 연대기[17]는 황제를 이 이름만으로 칭하며, 고해자 테오파네스의 연대기[3]는 '세베루스'(Severus)와 '세르펜티우스'(Serpentius)를 모두 사용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이름의 출처에 대해 의견이 다른데, 일부 학자(후기 로마 제국 인명 사전 포함)는 기록이 손상되어 그 의미가 불확실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뱀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징표(signum) 또는 수페르노멘(supernomen)이라고 주장한다.[19] 이 이름을 인정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기원이 동방인지 서방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2]
3. 배경
리비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 제국과 메디올라눔 또는 라벤나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서로마 제국은 잦은 침략과 정치적 격변, 그리고 주요 속주들의 상실을 겪었다. 460년대 초, 브리타니아는 버려졌고, 아프리카는 반달족에게 정복되었으며, 히스파니아는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에게 점령당했다.[20]
이 시기, 동서 로마 제국 모두에서 야만족 출신 장군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들의 권력은 때때로 황제와 맞먹기도 했다. 서로마 제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스틸리코(호노리우스 치하)와 아에티우스(발렌티니아누스 3세 치하)였다. 454년 아에티우스가 암살된 후, 서로마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폐위되었고, 그의 가족은 가이세릭에게 사로잡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황제 (막시무스)는 로마 약탈 중에 살해되었다.[21][22]
이러한 혼란 속에서 ''마기스테르 밀리툼'' 리키메르와 장군 마요리아누스가 권력을 잡았다. 리키메르는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로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로 추대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마요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고, 리키메르는 여전히 상당한 정치적, 군사적 권한을 유지했다.[2]
마요리아누스는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에게 인정받았으며, 정치 개혁과 갈리아, 히스파니아에 대한 로마의 통제력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461년,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했다. 고대 자료는 거의 만장일치로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머에게 암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22][14] 리키머가 이러한 행동을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한 가지 해석은 리키메르가 처음부터 절대 권력을 원했고,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머가 효과적으로 통제하기에는 너무 독립적이고 유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2][15][14]
3. 1. 지정학적 배경
4세기 말과 5세기 초,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 제국과 메디올라눔이나 라벤나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비교적 평화로웠던 반면, 서로마 제국은 여러 차례의 침략과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브리타니아, 아프리카, 히스파니아와 같은 주요 속주들을 잃었다.[20]
이 시기 동서 로마 제국 모두에서 야만족 출신 장군들의 영향력이 커졌는데, 서로마 제국에서는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 등이 대표적이었다. 454년 아에티우스가 암살된 후 서로마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폐위되고, 그의 가족들은 가이세릭에게 사로잡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황제 (막시무스)는 455년 로마 약탈 중에 살해되었다.[21][22]
이러한 혼란 속에서 ''마기스테르 밀리툼'' 리키메르와 장군 마요리아누스가 권력을 잡았다. 리키메르는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로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대신 마요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고, 리키메르는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유지했다.[2]
마요리아누스는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인정을 받으며 통치 기간 동안 정치 개혁과 갈리아, 히스파니아에 대한 로마의 통제력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461년,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했다. 고대 자료들은 리키메르가 마요리아누스를 암살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22][14]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리키메르는 절대 권력을 원했고, 마요리아누스가 그가 통제하기에는 너무 유능하고 독립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22][15][14] 마요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456년에 리키메르 장군과 마요리아누스 장군은 아비투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457년에 마요리아누스가 서로마 황제에 즉위했다.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국정 개혁에 임하여 서로마 제국의 재건을 꾀했으며, 갈리아의 부르군트족과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복속시켰다.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을 토벌하기 위해 히스파니아에서 원정 함대를 편성했지만, 반달족의 기습을 받아 함대는 불태워졌다. 반달족과 불리한 내용의 강화 조약을 맺은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이탈리아로 귀환하던 중 마기스테르 밀리툼 리키메르에게 체포되었고, 461년 8월 7일에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했다.
3. 2. 개인적 배경
현대 학자들은 세베루스의 처음 두 이름이 '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라는 데 동의한다.[13][16][2] 하지만 후기 라틴어에서 'b'와 'v'의 상호 교환이 흔해졌고, 따라서 세베루스의 코그노멘(cognomen)은 때때로 부정확하게 '리비우스'(Livius)로 표기되기도 한다.[13][19]
이 두 이름 외에도 세베루스는 때때로 세 번째 이름인 '세르펜티우스'(Serpentius)로 불린다. 파스카 연대기[17]는 황제를 이 이름만으로 칭하며, 고해자 테오파네스의 연대기[3]는 '세베루스'(Severus)와 '세르펜티우스'(Serpentius)를 모두 사용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이름의 권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후기 로마 제국 인명 사전 포함)는 텍스트가 훼손되어 그 의미가 불확실하다고 주장하는 반면,[1][18]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뱀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징표' 또는 '수퍼노멘'이라고 주장한다.[19] 이 이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기원이 동방인지 서방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2]
세베루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이름 외에 우리에게 전해진 유일한 개인적인 정보는 511년의 갈리아 연대기에 나오는 한 줄 뿐인데, "루카니아 출신의 세베루스가 황제이자 집정관으로 추대되었다."[10] 다른 한 자료에서는 세베루스가 "독실하게 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14] 현대 학자들은 그가 사회 고위층이었고, 매우 유력한 원로원 의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11][19] 그는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라벤나보다는 로마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개인적인 선호, 정치적 편의, 발렌티니아누스가 세운 선례, 혹은 리키머의 특권 때문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11]
4. 즉위
461년 8월 7일, 마기스테르 밀리툼(군무장관)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 황제를 살해했다. 서로마 황제 자리가 비게 되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 반달왕 가이세리크, 그리고 리키메르 사이에 후계 다툼이 벌어졌다.[14][13]
로마 제국은 명목상 여전히 하나였고, 동서 로마 황제는 서로 상대방 황제를 승인할 권한이 있었다.[44] 만족 출신 리키메르는 황제가 될 수 없었기에, 자신을 대신할 허수아비 황제가 필요했다. 가이세리크는 455년 로마 약탈 당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공주들(에우도키아, 플라키디아)을 포로로 잡았다. 맏공주 에우도키아는 반달 왕자 후네리크와 결혼하여 반달 왕가는 황족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고, 가이세리크는 플라키디아와 결혼한 올리브리우스를 황제 후보로 추천했다.[52]
가이세리크는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마요리아누스와 맺은 조약이 그의 죽음으로 무효화되었다고 주장하며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공격했다.[52]
이러한 반달족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무시하고 원로원 의원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추대했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출신, 경력, 인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무명의 인물이었다.[45] 461년 11월 19일, 라벤나에서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로 선출되었다.[46]
5. 치세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치세는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시기로, 실권은 야만족 출신 장군 리키메르에게 있었다. 제국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는데, 주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내부 권력 투쟁''': 리키메르는 로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가 될 수 없었고,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메르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자 그를 살해하고 세베루스를 황제로 세웠다.[2][15][14]
- '''동로마 제국의 불인정''':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세베루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두 제국 간의 협력을 어렵게 만들었다.[25][19][14]
- '''속주들의 반란''': 갈리아의 아에기디우스와 일리리쿰의 마르켈리누스는 세베루스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15][2][27]
- '''반달족의 침입''': 반달족의 왕 가이세릭은 자신의 아들과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의 결혼을 명분으로 이탈리아 해안을 বারবার 약탈했다.[14][13][27]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베루스는 사실상 이탈리아만을 통치했으며, 그의 치세는 465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5. 1. 리키메르와의 관계
리키메르가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옹립한 실권자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베루스 황제의 이름으로 발행된 동전에는 리키메르의 것으로 추정되는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47][52] 마르켈리누스 코메스는 464년 알란족의 왕 베오르고르가 리키메르에게 패배하여 죽었을 때, "알란 왕 베르굴은 리키메르 왕에 의해 살해되었다"라고 기록하여 리키메르를 '왕'이라고 칭했다.[48]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세베루스를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로 보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 기간[마요리아누스와 안테미우스 사이의 6년] 동안 정부는 리키메르 단독으로 운영되었다"라고 썼다.[15] J. B. Bury, 토마스 호지킨 등 많은 현대 역사가들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한다.[27][14][22][30]
하지만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세베루스가 고대 자료에서 시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행위 능력을 가졌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19][2] 이들은 세베루스 재위 기간에 발행된 동전에 새겨진 모노그램이 리키메르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존 켄트는 이 비문을 'ROMAE'로 읽어 모노그램을 조폐창 표시로 보았고,[31] 일부 학자들은 'SEVERVS'라고 주장하기도 한다.[31]
5. 2. 정통성 논란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세베루스를 황제나 집정관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의 사료에서는 그를 찬탈자로 간주했다.[25] 이러한 미승인은 두 제국 간의 협력을 방해했고, 이탈리아 해안선을 구제하기 위한 서로마 제국의 선박 요청은 거부되었다.[19][14] 그러나 463년 서로마 제국에서 임명된 집정관 카이키나 데키우스 바실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인정받았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임명이 두 제국 간의 협상 결과라고 평가한다.[26]갈리아 속주의 군사령관 아에기디우스와 일리리쿰의 마르켈리누스는 세베루스의 통치를 명시적으로 거부했다.[15][2][27] 이들의 반란은 서로마 제국이 두 속주를 추가로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달족 왕 가이세릭은 세베루스를 인정하지 않고 이탈리아 해안을 습격했다.[14][13][27] 안티오키아의 요한에 따르면,[29] 가이세릭은 자신의 아들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인 에우도키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자신이 발렌티니아누스와 아에티우스의 재산에 대한 정당한 상속자라고 주장하며 습격을 정당화했다.
5. 3. 속주들의 반란
달마티아의 마르켈리누스는 세베루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프리스쿠스의 비잔티움 역사 단편에 따르면, 리키메르는 마르켈리누스 휘하 병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편을 바꾸게 하고, 동로마 제국에 압력을 가하여 필라르쿠스를 마르켈리누스에게 보내 서방을 공격하지 않도록 설득했다.[28][27][2]갈리아에서는 에기디우스가 세베루스에 반기를 들었다. 세베루스는 아그리피누스를 ''갈리아 군단장''에 임명하여 서고트족의 지원을 받아 에기디우스에 대항하게 했다. 서고트족은 지원의 대가로 462년에 나르본을 얻어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었고, 에기디우스를 제국으로부터 분리시켰다.[13][2]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알란족이 베오르고르 왕의 지휘 아래 침략했으나, 464년 베르가모 전투에서 패배했다.[2][4]
5. 4. 반달족과의 갈등
세베루스 즉위 후, 가이세릭은 반달족을 이끌고 이탈리아 해안을 잇따라 습격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의 ''역사 연대기''에 따르면,[29] 가이세릭은 자신의 아들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인 에우도키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자신이 발렌티니아누스와 아에티우스의 재산에 대한 정당한 상속자라고 주장하며 습격을 정당화했다. 가이세릭은 올리브리우스를 명시적으로 옹립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14][13][27]반달족의 습격은 이탈리아 토지 소유주의 경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프리스쿠스는 세베루스 통치 기간 중 이탈리아 귀족의 대표자들이 황제에게 가서 가이세릭과의 화해를 간청했다고 보고한다. 세베루스는 귀족 타티아누스를 반달족의 왕에게 사절로 보냈지만, 가이세릭은 제안을 즉시 거부했다.[29][30][13]
6. 죽음
카시오도루스는 6세기에 세베루스가 리키메르에 의해 그의 궁전에서 독살되었다고 기록했고,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로마에서 마요리아누스에게 바치는 찬사에서 세베루스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망했다고 기록했다.[55][56] 후자의 진술은 역사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었는데, 리키메르가 세베루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졌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증거, 혹은 그러한 소문이 없었다는 증거로 해석되었다. 리키메르는 찬사의 낭독에 참석했을 수도 있으며, 이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리키메르가 세베루스를 살해했을 가능성에 대해 역사가들은 몇 가지 가능한 동기를 제시한다. 세베루스는 리키메르가 레오 1세와 화해하는 데 장애가 되었을 수 있다. 또 다른 이론은 세베루스가 리키메르가 원하는 것보다 더 활동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리키메르는 단독으로, 또는 덜 강력한 꼭두각시 황제와 함께 통치하기를 희망하며 세베루스를 살해했을 수 있다.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세베루스의 죽음의 성격에 대해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53]
사망 연도에 관해서도 이설이 있는데, 6세기의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저서 ''Getica''에서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치세는 불과 3년이었다고 했다.[54] 사망일에 대해서는 ''Fasti vindobonenses priores''가 8월 15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이름으로 발효된 9월 25일자 법령이 현존하고 있어, 그가 이 날 이후에 사망했는지, 이 법률이 사후에 그의 명의로 발포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리키메르에게는 순종적인 꼭두각시였던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존재가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와의 화해에 장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57]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 사후, 리키메르는 약 2년 동안 황제를 두지 않고 서로마 제국을 지배했고, 467년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가 지명한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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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m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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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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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Albe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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