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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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의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으로, 418년에서 430년대 초 사이에 출생했다. 그는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의 혼혈로, 서로마 제국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유리한 배경을 가졌다. 리키메르는 아비투스, 마요리아누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 올리브리우스 등 여러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시키며 17년간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으나, 잦은 황제 교체와 내분으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국 472년 대출혈로 사망했으며, 그의 조카 군도바드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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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메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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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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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리키메르 |
로마자 표기법 | Rikimeleu |
출생 | c. 418년경 |
사망 | 472년 8월 19일 (향년 c. 54세) |
소속 | 서로마 제국 |
군사 | 로마군 |
계급 | 마기스테르 밀리툼 (461년부터 서방 로마 제국의 데 팍토 군사 독재자) |
복무 기간 | ?–472 |
참전 전투 | 아그리젠툼 전투 코르시카 전투 베르가모 전투 로마 공방전 |
추가 정보 | |
주석 | 때로는 '플라비우스 리키메르'라고도 불린다.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은 4세기 후반에 존칭이 되었다. |
2. 혈통 및 초기 생애
리키메르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418년경에서 430년대 초 사이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는 수에비족이며, 어머니는 서고트 왕 발리아의 딸 또는 자매였다.[3] 이러한 혈통은 그가 서로마 제국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5세기 전반에는 아틸라의 훈족이 동유럽과 중유럽의 여러 부족을 거느리고 부상했지만, 453년에 아틸라가 급사하자 훈족 제국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게피드족, 동고트족 등이 독립했다.
리키메르는 유력한 게르만족 가문 출신이었다.
2. 1. 가계
리키메르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몇몇 학자들은 430년대 초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 권력을 잡았을 때 너무 어렸다는 문제가 있어 418년경 출생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의 부모 이름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리키메르는 유력한 수에비족과 고트족 가문 간의 결혼 동맹으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저술가들은 리키메르의 아버지를 수에비족으로 기록했지만, 리키메르를 고트족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많았다.[2] 이러한 동맹은 431년에 맺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418년 왈리아 사망 이전이 더 가능성이 높다. 왈리아의 서고트족 후계자들은 그의 친척이 아니었고, 이전 왕의 가족들에게 적대적이었을 수 있다.[4]
서로마 제국 군대에 들어가는 것은 "야만인 지도자 간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에게 흔한 선택이었기 때문에,[4] 리키메르의 가족은 로마에 봉사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4] 역사학자 피터 히더는 서고트족 내부의 불안정함 때문에 리키메르가 "서고트족 왕 왈리아의 손자"임에도 "완전히 로마적인 경력"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
다른 저명한 게르만족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리키메르는 부르군트족 등 다른 부족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예를 들어, 리키메르의 "부하이자 후계자"였던 군도바드는 그의 누이가 부르군트족 왕 군디오크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조카였다.[2]
2. 1. 1. 아버지
468년에 안테미우스에게 바친 찬사에서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리키메르가 아버지 쪽으로는 수에비족이라고 주장한다.[1] 리키메르의 아버지는 418년경 수에비족 왕 헤르메리크의 아들이거나, 429년에 사망한 수에비족 전쟁 지도자 헤르메가리우스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2. 1. 2. 어머니
리키메르의 어머니는 서고트 왕 왈리아의 딸 또는 자매였다.[3]2. 2. 로마군 입대 배경
418년 발리아 사망 이후 서고트족의 후계자들은 발리아의 친족들에게 적대적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리키메르 가문이 로마군에 투신하게 된 배경으로 추정된다.[4] 서로마 제국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야만인 지도자 간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에게 흔한 선택지였다.[4]3. 권력 장악 과정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에 따르면, 리키메르는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마요리아누스와 함께 복무하며 친분을 쌓았다.[5] 454년 아에티우스 암살과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이후, 서로마 제국은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암살 후, 로마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으나,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 직전에 암살당했다.
로마 약탈 후, 서고트족 왕 테오도릭 2세는 갈리아의 로마 군사 지휘관 아비투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테오도릭 2세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아비투스는 서고트족의 히스파니아 진입을 허용했다. 456년 새 황제 아비투스는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지만 포 계곡에서 패배했다.
서로마 황제가 공석이 되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리키메르에게 파트리키(귀족) 칭호를 수여하고, 457년 2월 28일에 군사령관에 임명했다. 레오 1세는 리키메르를 대신하여 마요리아누스를 이탈리아 군구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리키메르를 서방에서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으려 했다.
게르만계 출신인 리키메르는 황제가 될 수 없었지만, 군사령관으로서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게르만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동로마 제국의 대리인으로 통치하거나 꼭두각시 황제를 세워 서방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로마 귀족 계층의 반대로 후자를 선택했다.[12]
서로마 황제 자리가 비자 알레만니족이 이탈리아에 침입, 레티아에서 마조레 호까지 진출했다. 마요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알레만니족을 격퇴하고, 457년 4월 1일 아드 콜루멜라스에서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13]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가 자신의 꼭두각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레오 1세를 설득해 즉위에 동의하게 했다.
리키메르는 친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여러 개혁을 통해 유능함을 보여주었다.[14] 그는 갈리아 재정복과 히스파니아 원정에서 군사력을 과시하고,[15] 부르군트족과 서고트족을 복종시켜 아비투스 황제 이전의 동맹 부족(포에데라티) 지위로 되돌렸다.[16] 또한 반달족 왕 가이세릭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아에서 원정 함대를 건조하던 중, 발렌시아 근처에서 가이세릭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함대는 불타 없어졌다.[17] 이로 인해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반달족의 아프리카, 코르시카 섬, 발레아레스 제도 지배를 인정하고, 아프리카 서부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지배도 잃었다.[18]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군대를 해산하고 이탈리아로 귀환하려 하자, 리키메르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황제에게 반기를 들게 했다. 황제가 북이탈리아 토르토나에 있다는 것을 안 리키메르는 군대를 보내 체포하고, 461년 8월 3일 폐위시킨 뒤 8월 7일 고문 후 참수했다.[19]
반달족은 황제 자리가 빈 것을 서로마 제국에 대한 영향력 증대 기회로 여겼다. 가이세릭은 올리브리우스를 황제 후보로 추대했는데, 올리브리우스와 가이세릭의 아들 후네릭은 모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와 결혼하여 인척 관계였다. 올리브리우스가 황제가 되면 가이세릭은 리키메르를 대신하여 제국의 실권자가 될 수 있었다. 레오 1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반달족은 일리리쿰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 동로마 제국 영토를 공격했다.
반달족 공격에 직면한 레오 1세는 467년 일리리쿰 군구 사령관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지명하고, 마르켈리누스 장군을 붙여 이탈리아로 보내 황제 자리를 확보하고 북아프리카를 탈환하려 했다.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 지명이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킬 것이라 생각했으나,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위해 그를 받아들였다.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의 딸과 결혼하여 유대를 강화했고,[30]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었다.[31]
안테미우스는 즉위 후 리키메르의 권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마르켈리누스에게 파트리키(귀족) 칭호를 수여하고, 두 번째 마기스터 밀리툼에 임명했다. 468년 레오 1세는 반달족에 대한 대공세를 조직, 바실리스쿠스가 동서 합동군 최고 사령관, 마르켈리누스가 서방 공격 지휘관이 되었다. 바실리스쿠스, 마르켈리누스, 헤라클리우스의 삼방향 공격이 계획되었고, 리키메르는 마르켈리누스 휘하에서 서방군 상당수를 지휘했다. 그러나 본 곶 전투에서 연합군은 참패하고, 마르켈리누스는 시칠리아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33] 이로 인해 트리폴리타니아, 사르데냐, 시칠리아가 반달족에게 정복되었다.[34]
반달족 원정 실패는 동서 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감소시켰고, 서고트족은 갈리아·히스파니아로 영토 확장을, 반달족은 이탈리아 공격을 재개했다.[35] 마르켈리누스 사망으로 리키메르는 유일한 마기스터 밀리툼이 되었고, 황제와의 불화가 커졌다.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 황제를 "하찮은 그리스인"(''graeculus'')이라 불렀고,[36] 안테미우스 황제는 리키메르를 "배은망덕한 자"라고 욕했다.[37] 470년 리키메르 지지자였던 로마누스가 반역죄로 처형되자,[38] 리키메르는 메디오라눔(현재 밀라노)으로 들어갔고, 주교가 중재에 나섰다.[39]
472년 내전이 발발, 리키메르는 로마로 진군했다. 안테미우스 황제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피신했고, 레오 1세는 올리브리우스를 중재자로 파견했지만, 리키메르는 비밀 편지를 입수해 올리브리우스에게 황제 상징인 자주색 옷을 선물했다.[41][42] 5개월간의 포위 끝에 리키메르는 시내에 진입, 티베르 강 항구와 팔라티노를 분단하여 황제 지지자들을 굶주리게 했다.[43] 군도바드는 삼촌 리키메르를 도왔다.
안테미우스 황제는 지지자들이 도망칠 때까지 버티다 거지로 변장해 탈출하려 했으나,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서 붙잡혀 7월 11일 참수당했다.[44] 이후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3. 1. 아비투스 황제와의 관계
동시대의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의 기록에 따르면, 리키메르는 궁정 근위대장 (''comes domesticorum'')을 지낸 마요리아누스와 함께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아이티우스 휘하에서 일했으며, 마요리아누스와는 절친한 사이였다.[5]454년부터 455년에 걸쳐 아이티우스의 숙청과 그를 실행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암살이라는 일련의 정변으로 서로마 제국에서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황제 암살 직후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를 선포했지만, 겨우 3개월 만에 로마 시민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직후에 반달족에 의한 로마 약탈이 발생했다. 로마 약탈 후, 서고트 왕 테오도릭 2세는 갈리아 군구 사령관이었던 아비투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아비투스는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서고트족에게 스웨비족이 지배하는 히스파니아 침공을 허락했다. 아비투스의 제안에 동의한 테오도릭 2세는 그에게 서고트족의 호위병을 붙여 로마에 입성시켜 제위를 확보하게 했다. 아비투스 황제는 서고트족 출신 레미스투스를 아이티우스 사후 공석이 된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에 임명했다.

아비투스 황제가 로마에 도착하자 마요리아누스는 마지못해 신황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 후, 아비투스 황제는 리키메르를 군의 요직인 독군(comes)에 임명했다.
리키메르는 자신의 휘하 게르만 용병으로 구성된 육군과 해군을 사용하여 제국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여러 이민족과의 전투를 지휘했다. 리키메르는 456년에 반달 해군을 무찌르고 최초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 대해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아비투스 황제가 그를 반달족 토벌을 위해 시칠리아에 파병했다고 하는 반면, 갈리시아 주교 히다티쿠스의 기록에서는 코르시카 섬 근처에서 반달족을 격파했다고 한다.[6] 지중해에서의 승리로 아비투스 황제는 리키메르를 이탈리아 군구 사령관(magister militum praesentalis)에 임명했는데, 이는 서로마 제국의 군직 중 두 번째로 높은 지위였다.
아비투스 황제의 후원자가 된 서고트 왕 테오도릭 2세는 서로마 황제의 명의로 스웨비족 토벌이라는 명분을 얻어 히스파니아에 침공하여 스웨비 왕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그때는 이미 아비투스 황제의 운명은 끝났다.[7]
아비투스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간청에 따라 로마에 머물렀지만, 사치와 향락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8] 그와 함께 로마에 들어온 서고트 병사들의 횡포가 시민들의 증오를 샀다.[9] 시민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리키메르가 이를 부추겼다.[10] 서고트 병사들은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 리키메르와 마요리아누스는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아비투스 황제는 로마에서 도망쳤다.[9] 아비투스 황제는 갈리아로 도망쳤고, 리키메르와 마요리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을 설득하여 라벤나의 아비투스파 토벌에 동의하게 했다. 456년 10월 16일, 두 사람이 이끄는 군대는 군사령관 레미스투스가 이끄는 황제군을 격파하고 라벤나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갈리아에서 병력을 모아 이탈리아로 귀환하려던 아비투스 황제는 북이탈리아의 플라켄티아(현재의 피아첸차)에서 리키메르와 마요리아누스에게 패하여 붙잡혔다. 폐위된 아비투스 황제는 플라켄티아 주교로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결국 나중에 살해되었다.[11]
4.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 (Magister Militum)
리키메르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가진 게르만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다.[12] 그는 여러 면에서 로마 제국에 충실하게 봉사했던 바르바리아인 장군 스틸리코의 "계승자"로 볼 수 있다.[13]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그는 여러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시키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 올리브리우스 등 여러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시켰다. 그는 마요리아누스와 협력 관계를 맺고 황제로 추대했지만, 마요리아누스가 유능한 통치자로 성장하여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자 그를 폐위시키고 살해했다. 이후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하여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군부의 반발에 직면했다.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원했던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황제로 받아들였으나, 안테미우스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자 내전 끝에 그를 살해했다. 마지막으로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대출혈로 사망했다.
4. 1. 마요리아누스 황제 (457-461)
게르만족 출신인 리키메르는 황제가 될 수 없었지만,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으로서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게르만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동로마 제국의 대리인으로 통치하거나, 꼭두각시 황제를 세워 서방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리키메르는 전자를 원했지만, 로마 귀족 계층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해야 했다.[12]서로마 황제 자리가 비어있는 틈을 타 알레만니족이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레티아에서 출발한 알레만니족은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마조레 호까지 진출했다. 마요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알레만니족을 격퇴했다. 457년 4월 1일, 병사들은 마요리아누스를 아드 콜루멜라스(''ad Columellas'')라는 곳에서 황제로 추대했다.[13]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가 자신의 꼭두각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에게 즉위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리키메르는 친구인 마요리아누스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여러 개혁에 착수하며 통치자로서 유능함을 보여주었다.[14]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갈리아 재정복과 히스파니아 원정에서 군사력을 과시했고,[15] 부르군트족과 서고트족을 복종시켜 아비투스 황제 이전의 동맹 부족(포에데라티) 지위로 되돌렸다.[16] 또한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반달족 왕 가이세릭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히스파니아에서 원정 함대를 건조하던 중, 현재 발렌시아 근처에서 (신하의 배신으로) 가이세릭에게 기습당해 대패하고 함대가 불타 없어졌다.[17] 이로 인해 마요리아누스 황제는 반달족의 아프리카, 코르시카 섬, 발레아레스 제도 지배를 인정해야 했고, 아프리카 서부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의 지배권도 상실했다.[18]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군대를 해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려 할 때, 리키메르는 그의 부재를 틈타 원로원을 설득하여 황제에게 반기를 들게 했다. 리키메르는 황제가 북이탈리아 토르토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군대를 보내 체포했다. 461년 8월 3일,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8월 7일에 고문 후 참수했다.[19]
4. 2.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 (461-465)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 황제를 암살한 후 약 3개월 동안 서로마 제국을 황제 없이 통치하다가, 461년 11월 19일에 평범한 원로원 의원 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했다.[20][21]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지만,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그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22]
리키메르의 마요리아누스 황제 암살은 군대 일부, 특히 아이기디우스와 마르켈리누스에게 불만을 샀다. 두 장군은 리키메르와 공개적으로 대립하며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인정하지 않았다.[23] 시칠리아를 지키던 마르켈리누스는 리키메르의 사주로 부하가 반란을 일으키자, 달마티아 속주로 건너가 동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점령하고, 파트리키우스(귀족)를 자칭하며 할거했다.[24][25] 갈리아 총독 겸 사령관이었던 아이기디우스는 뛰어난 인격과 능력을 갖춘 장군으로 평가되었으며, 리키메르의 계략과 서고트족 때문에 로마 진군은 좌절되었지만, 프랑크족의 지지를 받아 465년 사망할 때까지 갈리아를 계속 통치했다.[26]
순종적인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꼭두각시 황제로 삼은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가 되었다.[25]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 통치 기간 동안 리키메르가 직면한 주요 문제는 반달족과의 군사적 대립과 동로마 제국과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반달족은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이후 이탈리아 연안을 계속 습격하여 이탈리아 경제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서로마 제국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 462년 동로마 제국은 반달 왕 가이세리크와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반달족의 습격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세수가 급감하고 서방의 주요 부대가 반대파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갈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존재는 리키메르에게 장애가 되었다.[27] 465년 리비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하자(카시오도루스의 저서에 따르면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했다고 함[28]), 리키메르는 18개월 동안 서로마 황제 자리를 비워두고 동로마 황제 레오 1세가 후계자를 지명하기를 기다렸다.[29]
4. 3. 안테미우스 황제 (467-472)
반달족의 왕 가이세릭은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 후보로 추대했다. 올리브리우스는 가이세릭의 아들 후네릭과 함께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와 결혼하여 가이세릭과 인척 관계에 있었다. 가이세릭은 올리브리우스가 황제가 되면 리키메르를 대신하여 제국의 실권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이세릭은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일리리쿰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 그리스 연안의 동로마 제국 영토를 공격했다.
467년, 레오 1세는 반달족의 공격 증가에 대응하여 일리리쿰 군구 사령관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지명했다. 레오 1세는 안테미우스에게 달마티아 군구 사령관 마르켈리누스를 붙여 이탈리아로 보내 서쪽 황제 자리를 확보하고 북아프리카를 탈환하려 했다.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의 지명이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원했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였다. 리비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안테미우스는 성공적인 군사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혈연 관계도 있었다. 리키메르는 새로운 황제와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안테미우스의 딸과 결혼했고[30], 한동안 양자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다.[31] 안테미우스는 즉위 직후 리키메르의 권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마르켈리누스에게 파트리키(귀족) 칭호를 수여하고 리키메르와 동등한 마기스터 밀리툼에 임명했다.
이후 안테미우스와 리키메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 황제를 "하찮은 그리스인"(''graeculus'')이라고 불렀고[36], 안테미우스 황제는 리키메르를 "배은망덕한 자"라고 욕했다.[37] 470년, 리키메르의 지지자였던 황제 궁정 관리 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안테미우스에 의해 처형당했다.[38] 로마누스가 처형된 후, 리키메르는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밀라노로 북상했다.[39] 파비아의 에피파니우스, 밀라노 주교가 그들 사이의 평화 협상을 요청해야 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39]
472년, 주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발발했다. 오도아케르의 병사도 포함된 이민족 용병을 이끄는 리키메르는 로마로 진군했다. 포위된 안테미우스 황제는 에 피신했다. 레오 1세는 양측의 중재를 위해 올리브리우스를 파견했지만, 동시에 안테미우스에게 그를 죽이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40] 리키메르는 이 편지를 입수하여 올리브리우스에게 보여주고 그에게 황제의 상징인 자주색 옷을 선물했다.[41][42] 5개월 동안 포위전이 계속되었다. 리키메르는 시내 진입에 성공하여 티베르 강의 항구와 팔라티노를 분단하여 황제 지지자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43] 양측 모두 갈리아 군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부르군트족의 갈리아 군구 사령관 는 삼촌인 리키메르를 도왔다.
안테미우스는 지지자들이 모두 도망칠 때까지 버텼다. 거지로 변장하여 도시에서 탈출하려던 황제는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서 붙잡혀 7월 11일에 참수당했다.[44] 이후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공식적으로 황제 자리에 앉혔다.
4. 3. 1. 반달족에 대한 원정 실패
468년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조직했다. 이 원정은 동서 로마 제국의 연합 작전으로, 바실리스쿠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마르켈리누스가 서방 공격을 지휘했다. 리키메르는 마르켈리누스 휘하에서 서로마 군대의 상당수를 지휘했다. 그러나 본 곶 전투에서 로마 연합군은 대패했고, 함대의 절반이 침몰했다. 바실리스쿠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고, 마르켈리누스는 시칠리아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33] 이 원정의 실패로 동서 로마 제국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35]마르켈리누스의 죽음으로 리키메르는 서로마 제국의 유일한 군사령관(마기스터 밀리툼)이 되었다. 마르켈리누스는 안테미우스 황제가 총애하는 장군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황제와 리키메르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35]
4. 4. 올리브리우스 황제 옹립과 사망
로마 공격 4개월 만에 리키메르는 반달족 왕의 압박으로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임명했다.[44] 여러 달 동안의 공성전과 기근으로 로마는 항복했고, 리키메르는 마침내 도시에 입성했다.[45] 안테미우스는 거지로 변장하여 도망치려 했지만,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교회에서 체포되어 472년 7월 11일에 참수당했다.[45]안테미우스 황제를 폐위한 지 6주 후인 472년 8월 18일, 리키메르는 갑작스러운 대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파트리키(귀족) 칭호와 마기스터 밀리툼(군사령관) 직책은 조카 궁도바트에게 계승되었다. 궁도바트는 이듬해 473년에 부르군트 왕으로 즉위했다. 리키메르가 마지막으로 옹립한 올리브리우스 황제는 겨우 4개월 만에 사망했다.
5. 죽음과 유산
리키메르는 472년 8월 18일, 안테미우스를 폐위한 지 6주 만에 대출혈로 사망했다.[45] 그의 파트리키우스(귀족) 칭호와 마기스터 밀리툼(군사령관) 직책은 조카 군도바드에게 계승되었다. 군도바드는 이듬해 473년에 부르군트 왕으로 즉위했다. 리키메르가 마지막으로 옹립한 올리브리우스 황제는 겨우 4개월 만에 사망했다.
리키메르 사후, 강력한 지도자를 잃은 서로마 제국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황제가 자주 바뀌었지만, 누구도 효과적으로 권력을 잡지 못했다. 리키메르가 죽은 지 4년 후인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했다. 오도아케르는 황제의 상징과 황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다는 서한을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보냈다. 이는 일반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간주된다.[45]
J. B. 베리 등의 역사가들은 리키메르의 지위와 제국 통치가 이전의 마기스터 밀리툼이었던 반달족 출신 스틸리코와 이후 이탈리아 왕이 된 오도아케르로 이어진다고 보았다.[46]
6. 평가
리키메르는 군사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황제를 자주 교체하고 내부 분열을 일으켜 서로마 제국의 안정을 해쳤다는 평가를 받는다.[1] 그의 권력 장악과 통치 방식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2] 특히 468년 본곶 전투의 실패는 서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재정난을 초래하여 제국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
리키메르는 황제 안테미우스와의 갈등 끝에 472년 로마 공성전을 일으켜 로마를 함락시키고 안테미우스를 처형했다.[4] 이 과정에서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는데, 이는 반달족 왕 게이세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5] 이러한 잦은 황제 교체와 내분은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고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리키메르의 사례는 내부 권력 투쟁과 외세의 침입에 대한 취약성이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7. 오페라에서의 등장
리키메르의 생애는 17세기와 18세기에 오페라 대본의 소재로 사용되었으며, 그의 전기는 낭만적이고 정치적인 음모로 장식되었다.[1]
7. 1. 대표적인 오페라 작품
리키메르의 생애는 17세기와 18세기에 오페라 대본의 소재로 사용되었으며, 그의 전기는 낭만적이고 정치적인 음모로 장식되었다. 가장 초기의 작품은 마테오 노리스의 《Ricimero re de' Vandali》(칼로 팔라비치노 작곡, 1684년)로, 로마에 안테미우스를 옹립하고 그의 딸 도미치아와의 결혼을 약속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다 잘 알려진 작품은 아포스톨로 제노와 피에트로 파리아티의 대본 《Flavio Anicio Olibrio》로,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1708년), 니콜라 포르포라(1711년), 레오나르도 빈치(1728년), 니콜로 욤멜리(1740년) 등이 작곡했다. 이 대본은 리키메르의 로마 포위 공격과 올리브리우스와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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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マ‐ていこく【ローマ帝国】 の意味とは - Yahoo!辞書
http://dic.yahoo.co.[...]
大辞泉
201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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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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