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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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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4세기 말에 태어나 5세기에 활동한 서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 훈족에게 인질로 보내져 그들의 문화를 이해했으며, 425년 갈리아 군사령관이 되어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훈족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강화했다. 아에티우스는 433년부터 450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활동하며 훈족을 비롯한 야만족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을 격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454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훌륭한 군사 지휘관이자 외교관으로 평가받지만, 권력 투쟁과 제국의 쇠퇴를 늦추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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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로마자 표기Flavius Aetius
다른 이름마지막 로마인
출생기원후 390년경
출생지두로스토룸, 로마 제국
사망기원후 454년 9월 21일 (64세)
사망지라벤나, 로마 이탈리아, 서로마 제국
사망 원인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헤라클리우스에게 암살됨
안장 장소미상, 스틸리코의 석관일 가능성 있음
남성 흉상을 묘사한 조각된 부조
아에티우스의 부조 가능성, 이 초기 기독교 석관은 스틸리코 (408년 사망)를 묘사한 것으로도 생각되며, 테오도시우스 1세 통치 기간인 387~390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음
직업
직업장군
경력
복무 기간425–454
계급갈리아 군사령관 (425-429)
군사령관 (429-454)
참전 전투아를 공성전
프랑크 전쟁
반달족의 로마 아프리카 정복 (429-432)
430년 라이티아 원정
리미니 전투
프랑크 전쟁
아를 전투
부르군트 전쟁 (435)
나르보나 공성전 (436)
몬스 콜루브라리우스 전투
고트 전쟁
반달 전쟁 (439-442)
비쿠스 헬레나 전투
오를레앙 공성전 (451)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
훈족의 이탈리아 침공
정치
직위집정관
가족
자녀2명, 가우덴티우스 포함

2. 생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391년경 모이시아 속주의 두로스토룸(현재 불가리아실리스트라)에서 태어났다.[90] 아버지는 스키타이 출신의 로마 군인 플라비우스 가우덴티우스였으며,[91]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이탈리아계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93]

아에티우스는 425년 이전 카르필리오(''Carpilio'')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카르필리오를 낳았다.[94][95] 이후 보니파키우스의 미망인 펠라기아(''Pelagia'')와 재혼하여 아들 가우덴티우스를 두었다. 아에티우스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복수한 트라우스틸라(''Thraustila'')의 아내가 그의 딸일 가능성도 있다.[96]

어린 시절 아에티우스는 궁정에 들어가 근위대에 입대했다.[61] 405년부터 408년까지 서고트 왕 알라리크 1세의 왕궁에 인질로 보내졌고, 이후 훈족 왕에게 보내져 루아와 친분을 쌓았다.[62]

423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 사후, 아에티우스는 요하네스를 섬기며 훈족 지원을 요청했으나, 425년 요하네스가 살해당하면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 측과 화해하고 갈리아 군사령관이 되었다.[12] 이후 서고트족(426년)과 프랑크족(428년)을 격파하며 군사적 역량을 과시했다.

429년 마기스테르 밀리툼(군 사령관)으로 승진, 430년 정적 펠릭스를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같은 해 유퉁족과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431년 노리족에게 승리, 432년 프랑크족과 평화를 맺었다.

432년 리미니 전투에서 보니파키우스에게 패했으나, 훈족의 도움으로 433년 권좌에 복귀했다.[70] 이후 436년 부르군트족을 격파하고, 439년 서고트족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443년 부르군트족을 사보이에 정착시켰고, 440년대에는 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의 바가우데 문제를 해결했다.

451년 아틸라갈리아 침공에 맞서,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쿠스 1세와 연합하여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승리했다.[85]

골 침공 당시 훈족의 예상 경로, 카탈라우눔 전투로 이어짐


454년 9월 21일, 아에티우스는 아들 결혼 문제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암살당했다.[98]

2. 1. 어린 시절과 가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391년경 모이시아 속주의 두로스토룸(현재 불가리아실리스트라)에서 태어났다.[90] 그의 아버지는 스키타이 출신의 로마 군인 플라비우스 가우덴티우스였으며,[91]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이탈리아계 부유한 귀족 계급의 여성이었다.[93]

425년 이전에 아에티우스는 카르필리오(''Carpilio'')의 딸과 결혼하여,[94] 아들을 낳아 장인과 같은 카르필리오라고 이름 지었다.[95] 후에 그는 보니파키우스의 미망인 펠라기아(''Pelagia'')와 결혼하여 아들 가우덴티우스를 두었다. 또한 아에티우스가 횡사한 후에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복수를 한 트라우스틸라(''Thraustila'')의 아내가 아에티우스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96]

어린 시절 아에티우스는 궁정에 들어가 근위대(tribuni praetoriani partis militaris)에 입대했다.[61] 405년부터 408년 사이에는 서고트 왕 알라리크 1세의 왕궁에 인질로 보내졌다. 408년 알라리크는 아에티우스를 다시 인질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아에티우스는 훈족 왕에게 보내지게 되어, 알라리크의 요구는 거절되었다.[62] 기번이나 다른 역사가들은 서고트족이나 훈족과 같은 호전적인 부족에게 교육받은 아에티우스는 당시 로마에 부족했던 군사적인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지적하고 있다.[63] 그는 훈족의 지도자였던 루아의 신임을 얻어 친한 관계가 되었으며, 훗날 루아는 아에티우스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주기도 한다.

2. 2. 정치적 성장과 권력 투쟁

423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죽자, 서로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카스티누스는 제1서기관[64] 요하네스를 후계 황제로 선택했다. 요하네스는 테오도시우스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어린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아스파르가 이끄는 원정군을 조직했다.

아에티우스는 요하네스 황제를 섬기며 궁정 감독(cura palatii)으로 일했고, 요하네스는 훈족의 인질로 지낸 적이 있는 그를 보내 훈족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강력한 군대가 없었던 요하네스는 수도 라벤나에서 농성했지만, 425년 6월 또는 7월에 함락되어 살해당했다. 훈족의 대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아에티우스는 서방의 권력이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와 모후 갈라 플라키디아에게 넘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아스파르와의 전투 이후 아에티우스는 갈라 플라키디아와 화해했고, 훈족을 돌려보내는 대가로 갈리아 군사령관(comes et magister militum per Gallias)의 지위를 얻었다.[12] 426년에는 아를을 포위한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아퀴타니아로 돌려보냈다.

428년에 그는 프랑크족을 격파하고 라인강 연안의 영토 일부를 회복했다.[66] 429년에는 마기스테르 밀리툼(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황태후 갈라 플라키디아의 지지자이자 가장 영향력이 컸던 파트리키 플라비우스 펠릭스가 마기스테르 밀리툼의 장관이었고, 아에티우스는 그의 두 부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훗날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보니파키우스였다. 430년 5월, 아에티우스는 자신을 모함한다며 펠릭스를 비난하여 그와 그의 아내를 살해하였다.

펠릭스가 죽자 아에티우스는 파트리키 칭호 없이 마기스테르 밀리툼의 최고 유력자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라에티아에서 유퉁족을 격파하고, 아를 근처에서 서고트족을 격파하여 지도자 아나올수스를 포획했다. 431년노리쿰에서 노리족에게 승리한 뒤 갈리아로 돌아와, 수에비족의 공격을 호소했던 아쿠아에 플라비아에[67] 주교 히다티우스를 맞이했다. 432년에 아에티우스는 다시 프랑크족을 쳐서 평화를 맺고 히다티우스를 이베리아로 돌려보냈다.[68]

로마를 지키기 위해 갈리아에서 싸우는 동안, 아에티우스는 궁정 권력자들과의 투쟁이라는 또 다른 적과 맞섰다. 보니파키우스와 아에티우스는 국가에 대한 결정에서 의견 차이를 자주 보였다. 425년 이후, 아에티우스는 플라비우스 펠릭스 휘하의 두 유력한 장군 중 한 명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보니파키우스였다. 보니파키우스는 아프리카 백작(코메스)으로서 아프리카 관구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배반의 소문이 돌면서 모후 갈라 플라키디아의 의심을 받아 소환 명령을 받았다. 이는 아에티우스의 책략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보니파키우스는 이에 응하지 않고 427년에 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보니파키우스는 이베리아 반도의 반달족에게 병력 제공을 요청했지만, 반달족은 부족 전체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왔다. 430년에 보니파키우스는 모후 플라키디아와 화해하고 아프리카를 버리고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430년 5월에 펠릭스가 사망하자 권력 투쟁은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 두 사람의 대립으로 좁혀졌다. 432년 아에티우스는 집정관이 되었고, 모후 플라키디아에 의해 이탈리아로 소환된 보니파키우스는 파트리키 지위를 받았다. 플라키디아가 자신을 배제하려 한다고 생각한 아에티우스는 보니파키우스를 공격하고자 진군하여 리미니에서 전투를 벌였다. 보니파키우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중상을 입고 몇 달 뒤에 죽고 만다. 세바스티아누스가 후계자가 되어 마기스테르 밀리툼의 칭호를 이어받았다.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사유지로 물러났으나 세바스티아누스에 의해 암살될 것을 걱정해 로마로 달아나고, 이어 달마티아와 판노니아를 지나 그의 동맹자인 훈족의 근거지로 갔다.

433년에 아이티우스는 훈족의 왕 루아와 군사적 제공의 대가로 판노니아의 지배를 인정하기로 했고,[69] 훈족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아에티우스는 권좌에 복귀하고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utriusque militiae'')의 칭호를 받아(세바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 보니파키우스의 옛 사유지까지 차지, 그의 미망인이었던 페라기아와 결혼한다.[70]

2. 3. 군사적 업적

436년, 군다하르 왕이 이끌던 부르군트족은 아에티우스와 아비투스에게 패배하여 평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이듬해 아에티우스는 훈족 ''포에데라티''를 보내 그들을 격멸했다.[20] 이 과정에서 2만 명의 부르군트족이 학살당했으며, 이 사건은 훗날 독일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토대가 되었다.[21] 같은 해, 아에티우스는 리토리우스와 함께 아르모리카에서 티바토라는 인물 아래 일어난 바가우데의 반란을 진압했다.

437년은 아에티우스가 두 번째 로마 집정관 직을 맡고 발렌티니아누스와 리키니아 에우독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결혼한 해였다. 아에티우스는 황제의 직접 통치를 복원하는 의식에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의 장군 리토리우스는 나르본 포위를 풀고 전쟁을 로마 측에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후 2년 동안 아에티우스는 수에비족 원정과 서고트족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438년에는 주요 전투(아마도 몬스 콜루브라리우스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439년 서고트족은 리토리우스와 그의 훈족 포에데라티를 격파하고 살해했다. 베테리쿠스가 상황을 안정시킨 후, 아에티우스는 갈리아로 돌아와 서고트족을 물리치고 조약을 맺었다.

443년, 아에티우스는 남은 부르군트족을 제네바 호수 남쪽 사보이에 정착시켰다. 440년대 그의 주된 관심사는 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의 바가우데 문제였다. 440년 발랑스 주변에 알라니족을 정착시켰고, 442년에는 오를레앙을 포함한 루아르 강을 따라 이들을 정착시켜 아르모리카의 불안을 억제했다.

447년 또는 448년, 아르모리카에 정착한 알란 족이 문제를 일으켰다. 클로디오가 이끄는 알란 족은 갈리아・베르기카 아라스 근교를 공격했고, 이어 투르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침략군은 비크스 헬레나 근처 도하 지점에서 저지당했다. 이 전투에서 아에티우스는 작전을 지휘했으며, 훗날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마요리아누스가 기병을 이끌고 참전했다.[26] 450년, 아에티우스는 프랑크족과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맺고 돌아왔다.

2. 4. 카탈라우눔 전투 (451년)

451년 아틸라갈리아를 침공했을 때, 로마 제국의 갈리아 군사령관은 아에티우스였다.[82] 훈족의 대군은 여러 도시를 공략하며 오를레앙으로 진군했는데, 이때 그 지역에 정착한 알란족은 아틸라 측에 붙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유력한 갈로-로마인 원로원 의원 아비투스의 도움을 받아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 1세에게 외적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참전하도록 설득했다. 또한 알란족 왕 상기반(Sangiban)의 군세가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과 합류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 성공했다. 로마-서고트 연합군은 훈족에게 포위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가서, 포위를 풀고 평야부로 퇴각시켰다.[83]

6월 20일[84], 아에티우스와 테오도리쿠스는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와 그의 동맹 부족에게 승리했다.[85] 이 전투에서 테오도리쿠스는 전사했고, 아에티우스는 테오도리쿠스의 왕자 토리슴몬드에게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즉시 툴루즈(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귀환하도록 권했다. 이 때문에 아에티우스가 전리품을 독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86]

2. 5. 죽음

453년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아들 가우덴티우스를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플라키디아와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과거 참칭자 요한네스를 지지하여 자신과 적대했던 아에티우스가 실은 자기 아들을 제위에 올리려는 것이라 믿고 위협을 느꼈다. 이에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시종 헤라클리우스는 황제를 끌어들여 아에티우스 암살을 모의했다.[98] 454년 9월 21일, 라벤나의 궁정에서 황제를 알현하여 재무 보고를 하던 아에티우스를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직접 자신의 검으로 암살하였다.[98] 이 사건에 대해 한 원로원 의원은 "신은 폐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무슨 노여움으로 이리하셨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자신의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99]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페트로니우스는 아에티우스가 맡았던 지위를 자신이 받기를 기대했지만, 헤라클리우스가 방해했다. 복수를 위해 페트로니우스는 아에티우스의 훈족 친구였던 옵틸라와 트라우스타일라 두 사람과 함께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와 헤라클리우스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455년 3월 16일 병사들의 활쏘기 훈련을 살피기 위해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앞 광장에서 말에서 내린 발렌티니아누스를 옵틸라가 찔렀다. 헤라클리우스는 트라우스타일라에게 살해되었다. 그곳에 있던 병사들은 아에티우스의 옛 부하들이었고, 황제를 도우러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100]

3. 평가

아에티우스가 살해당한 후, 한 원로원 의원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폐하께서 자신의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88] 아에티우스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죽음으로 서로마 제국의 세력은 더욱 쇠퇴했으며, 결국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고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가 암살당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3. 1. 긍정적 평가

아에티우스는 훌륭한 군사 지휘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 "서방의 마지막 진정한 로마인"으로 불릴 정도로 존경받았다.[38]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카탈라우눔 전투를 아틸라의 무적 이미지를 깨뜨린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한다.[38] 에드워드 기번은 아틸라가 라인 강을 건너 후퇴한 것을 두고 "서로마 제국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승리"라고 평가했다.[39]

아에티우스는 433년부터 454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며, 아틸라와 훈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의 침입 속에서 유럽 국경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아틸라에 대항하는 연합을 결성한 것이다. 역사학자 아서 페릴은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족, 알란족, 부르군트족 등 전통적으로 로마와 적대적인 세력들을 연합시켜 갈리아를 방어하게 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모든 당사자가 훈족에 대한 공통적인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을 효과적인 군사 관계로 이끌어낸 아에티우스의 업적은 놀라운 것이었다"라고 말했다.[40]

J. B. 버리는 아에티우스를 훌륭한 군사 지휘관이자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지만, 카탈라우눔 전투 자체는 결정적인 전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아에티우스가 오를레앙에서 이미 후퇴하고 있던 훈족을 공격했고, 다음 날 훈족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지 않은 것은 권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버리는 네다오 전투에서 게르만족이 훈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현대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카탈라우눔 전투보다 아에티우스의 전반적인 업적에 더 주목하며,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마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이자 훌륭한 외교관이자 행정가로 평가한다. 메건 맥에보이는 카탈라우눔 전투가 군사적 기술보다는 조약을 체결하고 의무를 이행하는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41] 존 줄리어스 노리치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를 처형한 것을 "제국의 가장 위대한 지휘관"을 어리석게 죽인 자해 행위라고 비꼬았다.[42] 휴 엘튼은 아에티우스와 그의 군대가 가장 효과적인 로마 군대 중 하나였으며, 그들의 속도와 기동성은 고도로 효율적인 병참 및 인력 보급 시스템을 시사한다고 지적한다.[43] 일반적으로 그의 사후 서로마 제국이 급격히 분열되고 붕괴한 것은 제국을 통합하려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3. 2. 부정적 평가

아에티우스의 유산은 그가 죽었을 때 제국을 상당히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스틸리코와 다소 유사한 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스틸리코 비판론자들이 브리타니아, 갈리아, 스페인에서의 찬탈에 대처하지 못했거나, 대처할 의지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406년 라인강 도하를 지적하는 것처럼, 아에티우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427-433년의 내전을 지적하는데, 이 내전으로 인해 반달족이 아프리카로 건너가 결국 멸망했으며, 아에티우스가 카르타고를 탈환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휴즈는 이에 대해 펠릭스가 반달족의 도하를 가능하게 한 전쟁의 책임자였으며, 로마인들이 보니파키우스(429-432), 아스파르(430-435), 그리고 아에티우스(441)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 이에 대처하려 했다고 지적하며 해명하려 한다.[44] 헤더는 아틸라의 부상이 결국 아프리카의 상실로 이어졌다고 말하며, 원정의 비용을 감당하고 있던 동로마 군대와 해군이 발칸반도로 소환되어야 했다고 주장한다.[44] 핼설은 아에티우스의 경력에 대한 오점은 스페인에서의 부진한 성공이었다고 주장하는데, 449년까지 대부분의 속주가 상실되었지만, 그는 나중에 이를 바로잡았다.[45] 휴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초상이 있는 1765년판 ''에치오'' 대본의 표지


>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는 확실히 서로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세대였고, 그들이 직면한 구체적이고 매우 다른 문제에 대응하고 있었다. 둘 다 모든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참조

[1] 서적 Early Christian and Byzantine Art Yale University Press 1993
[2] 논문 Flavius: a Nicety of Protocol https://www.jstor.or[...] 1988
[3] 문서 Gibbon ch. XXXV
[4] 서적 Cambridge Medieval History 1911
[5] 문서 Jordanes, Getica, 176; Merobaudes, Carmina, iv, 42–43, and Panegyrici, ii, 110–115, 119–120; Gregory of Tours, ii.8; Zosimus, v.36.1; Chronica gallica 452, 100. Cited in Jones, p. 21.
[6] 문서 Carpilio had been a comes domesticorum, commander of the imperial guard (Gregory of Tours, ii.8).
[7] 문서 Carpilio went to [[Attila]] for an embassy (Cassiodorus, Variae, i.4.11) and remained at their court as an hostage for some time (Priscus, fr. 8).
[8] 문서 Gregory of Tours, ii.8; Priscus, fr. 8; Cassiodorus, Variae, i.4.11; John of Antioch, fr. 201.3 and 204; Marcellinus comes, s.a. 432; Sidonius Apollinaris, Carmina, v.205; Hydatius, 167; Merobaudes, Carmina, iv (poem composed for the first birthday of Gaudentius); Additamenta ad chron. Prosperi Hauniensis, s.a. 455 (only source to cite Thraustila as son-in-law of Aetius). Cited in Jones, p. 21.
[9] 문서 Gregory of Tours, ii.8; Jones, p. 21.
[10] 문서 Gregory of Tours, ii.8; Merobaudes, Carmina, iv, 42–46, and Panegyrici, ii.1–4 and 127–143; Zosimus, v.36.1
[11]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Volume 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1952
[12] 문서 Cassiodorus, Chronica, s.a. 425; Gregory of Tours, ii.8; Philostorgius, xii.4; Prosp. s.a. 425; Chronica gallica 452, 100; Jordanes, Romana, 328; Jones, p. 22
[13] 문서 Philostorgius, xii.4; Prosp. s.a. 425 and 428; Chronica Gallia 452, 102 (s.a. 427); Cassiodorus, Chronica, s.a. 428. Cited in Jones, p. 22.
[14] 문서 Hydatius, Chron. 93, s.a. 430
[15] 문서 Merobaudes, Pan. 1.10 (Vollmer, ad loc.)
[16] 문서 Prosperus of Tirus, s.a. 429 e 430; John of Antioch, fr. 201; Hydatius, 92, 93 and 94 (s.a. 430), 95 and 96 (s.a. 431), 98 (s.a. 432); Chronica Gallia 452, 106 (s.a. 430); Jordanes, Getica, 176; Sidonius Apollinaris, Carmina, vii.233. Cited in Jones, pp.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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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Procopius of Caesarea, Bellum Vandalicum, i.3.14–22, 28–29; John of Antioch, fr. 196; Theophanes, AM 5931; Hydatius, 99; Prosperus, s.a. 427. Cited in Jones, p. 23.
[19] 문서 CIL, v, 7530; Prosperus, s.a. 432; Chronica Gallica a. 452, 109 and 111 (s.a. 432), 112 (s.a. 433), 115 (s.a. 434); Chronica Gallica a. 511, 587; Additamenta ad chron. Prosperi Hauniensis, s.a. 432; Hydatius, 99; Marcellinus comes, s.a. 432; John of Antioch, fr. 201.3. Cited in Jones, pp. 23–24.
[20] 문서 Sid. Apol. Carm. 7.234–240
[21] 문서 Hydatius, Chronicon, 110
[22] 문서 Annales Ravennates, s.a. 435; John of Antioch, fr. 201.3; Prosper of Aquitaine, s.a. 435, s.a. 438, s.a. 439; Cassiodorus, Chronica, s.a. 435; Chronica Gallica a. 452, 117 (s.a. 435), 118 (s.a. 436), 119 (s.a. 437), 123 (s.a. 439); Hydatius, 108 (s.a. 436), 110 (s.a. 437), 112 (s.a. 438), 117 (s.a. 439); Sidonius Apollinaris, vii.234–235 and 297–309; Merobaudes, Panegyrici, i fr. iib 11ff, i fr. iia 22–23, and ii.5–7; Jordanes, Getica, 176; ; [[Timothy Barnes (classicist)|Barnes, Timothy]], "Patricii under Valentinian III", Phoenix, 29, 1975, pp. 166–168; Jones, pp. 24–26.
[23] 문서 Hyd. Chronicn, 125, 128, 131, 134
[24] 문서 Chronica Gallia 452, s.a. 448
[25] 문서 Hyd. Chronicon, 141–142
[26] 문서 Chronica Gallica Anno 452, 133 (s.a. 438); Sid. Apol. carm. 5.210–218. Cited in Jones, p. 27. Jan Willem Drijvers, Helena Augusta, BRILL, {{ISBN|90-04-09435-0}}, p. 12.
[27] 문서 Priscus, fr. 16; Gregory of Tours, ii.7. It is possible that this happened after the [[Battle of the Catalaunian Plains]] in 451 (Jones, p. 27).
[28] 문서 Priscus, fr. 7 and 8; Suda, Z 29. Cited in Jones, p. 27.
[29] 문서 John of Antioch, fr. 199.2; Jordanes, Getica, 191. Cited in Jones, p. 27.
[30] 문서 Hunnish armies were never composed entirely of ethnic Huns but contained relative majorities of subject peoples.
[31] 문서 Sidonius Apollinaris, vii.328–331, 339–341; John Malalas, 358; Jordanes, Getica, 195; Gregory of Tours, ii.7. Cited in Jones, p. 27.
[32] 문서 Chronica Gallica a. 452, 139 (s.a. 451), 141 (s.a. 452); Cassiodorus, Chronica, 451; Additamenta ad chron. Prosperi Hauniensis, s.a. 451; Hydatius, 150 (a. 451); Chronicon Paschale, s.a. 450; Jordanes, Getica, 197ff; Gregory of Tours, ii.7; Procopius, i.4.24; John Malalas, 359; Theophanes, AM 5943. Cited in Jones, p. 27.
[33] 문서 Gregory of Tours, 2.7; Jordanes, Getica, 215ff. Cited in Jones, pp. 27–28.
[34] 문서 Prosper, s.a. 452; Jordanes, De Origine Actibusque Getarum 4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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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서적 アッチラ王とフン族の秘密―古代社会の終焉
[72] 서적 アッチラ王とフン族の秘密―古代社会の終焉
[73] 서적 フン族―謎の古代帝国の興亡史
[74] 간행물 Annales Ravennates
[75] 간행물 Chronica Gallica a. 452
[76] 간행물 Priscus
[77] 서적 フン族―謎の古代帝国の興亡史
[78] 문서 フラウィウス・オレステスの父
[79] 문서 オレステスの妻バルバリアの父
[80] 간행물 Priscus
[81] 서적 フン族―謎の古代帝国の興亡史
[82] 간행물 John of Anti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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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서적 アッチラとフン族
[85] 간행물 Prosperus
[86] 간행물 Additamenta ad chron. Prosperi Hauni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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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서적 Aetius: Attila's Nemesis
[91] 서적 The Prosopography of the Later Roman Empire: Volume 2, AD 395-52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92] 서적 How the Barbarian Invasions Shaped the Modern World Fair Winds 2008
[93] 간행물 Jordanes
[94] 간행물 Gregory of Tours
[95] 간행물 Cassiodorus
[96] 간행물 Gregory of Tours
[97] 문서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98] 서적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99] 서적 The Fragmentary History of Priscus
[100] 서적 The Fragmentary History of Pris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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