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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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선사관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동양사학 연구의 주요 흐름으로, 만주와 조선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 연구하는 역사관이다. 1908년 만철조사부의 만선지리역사조사실에서 시작되어 도쿄 제국대학으로 연구가 이관되었으나, 1945년 패전으로 쇠퇴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 쓰다 소키치 등이 주요 연구자이며, 일본의 만주 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훼손하려는 식민사관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최근에는 만선사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일국사관을 극복하고 동북아시아적 관점에서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만선사"는 전쟁 전 일본의 동양학 · 동양사학에서 주요 연구 부문이었다. 만선사관, 즉 만주사(滿洲史)와 조선사(朝鮮史)는 하나라는 역사관에 기초하였다. 만선사는 1945년 패전으로 만주국이 붕괴되고 조선이 해방되면서 쇠퇴했다[1].
만주 철도 도쿄 지사 촉탁·만선 지리 역사 조사실과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서 연구를 한 여러 연구자들이 있다.[2][3]
2. 만선사의 성립과 전개
2. 1. 만선지리역사조사실
1908년 남만주철도 도쿄 지사에 만주와 조선을 연구하는 만선지리역사조사실이 설치되었다[1]. 1915년 조사실이 폐지되자 연구는 도쿄 제국대학으로 이관되어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 16권 분량의 연구 성과를 냈다[1].
2. 2. 도쿄제국대학으로 이관
1915년에 만선지리역사조사실이 폐지되자, 그 연구는 도쿄 제국대학으로 이관되어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 16권 분량의 연구 성과를 낳았다.[1]
3. 주요 만선사 연구자
3. 1. 일본 측 연구자
1908년부터 만주 철도 도쿄 지사 촉탁·만선 지리 역사 조사실의 만주, 조선 역사 지리 조사 부문에서 연구를 한 시라토리 구라키치, 쓰다 소키치, 마쓰이 히토시, 이나바 이와키치, 이케우치 히로시, 야노우치 와타루, 와다 키요시[2],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서 연구를 한 이마니시 류, 세노 우마쿠마, 구로이타 가쓰미, 오다 쇼고, 후지타 료사쿠, 스에마쓰 야스카즈, 다보하시 기요시[3] 등이 있다.
3. 2. 조선총독부 측 연구자
시라토리 구라키치, 쓰다 소키치, 마쓰이 히토시, 이나바 이와키치, 이케우치 히로시, 야노우치 와타루, 와다 키요시[2],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소속 이마니시 류, 세노 우마쿠마, 구로이타 가쓰미, 오다 쇼고, 후지타 료사쿠, 스에마쓰 야스카즈, 다보하시 기요시[3] 등이 있다. 이들은 1908년부터 만주 철도 도쿄 지사 촉탁, 만선 지리 역사 조사실의 만주 및 조선 역사 지리 조사 부문에서 연구를 했다.
4. 만선사에 대한 비판
만선사는 조선사를 일본의 만주 진출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고, 조선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부정하는 역사관으로, 한국과 일본 양측에서 비판받고 있다.
하타 다케시는 북한의 조선 사회과학원에서 간행한 '조선 문화사'를 일국사관으로 보고, 일본의 연구자들이 북한 역사학계의 일국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선 문화를 아시아의 맥락에서 위치시켜야 한다고 경고했다.[5]
4. 1. 한국 측의 비판
현대 한국 연구자들은 만선사가 조선이 중국의 만주를 영유하는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은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하여 조선사와 묶음으로써 일본의 만주 지배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역사적으로 제시하고, 조선사의 독자성·자주성을 상실시키는 전형적인 식민사관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4] 만선사는 "일본의 동양학자들이 일본의 대륙 정책, 즉 만주·한반도 경영에 직접적이고 조직적으로 관여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엄격하게 비판받고 있다.[4]만선사 연구자들은 조선사 연구의 중점을 고대사에 두고, 조선 민족의 발전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조선사를 일본의 만주 진출이라는 시각에서만 바라본다.[4] 이들은 식민사관인 일선동조론을 비판하면서도, 타율성론이 만선사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나바 이와키치가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대사건은 모두 동아 전국의 문제의 발현임을 말해두고 싶다"고 주장한 것에서 보듯이, 만선사가 조선사의 자주적 발전을 부정함으로써 타율성론을 만들어냈다고 본다.[4]
주요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 일본의 만주와 조선 진출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11][12]
# 만주와 조선은 일체라는 결론을 먼저 내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창되었다.[13][12]
# 조선 민족은 통일신라 이후 만주인과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만주와 조선을 일체로 하는 역사관은 성립될 수 없다.[14][12]
4. 2. 일본 측의 비판
현대 한국 연구자들은 만선사관이 조선이 중국 만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만선사관이 중국사에서 만주사를 분리하여 조선사와 묶음으로써 일본의 만주 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없애는 전형적인 식민사관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4] 만선사 연구자들이 조선사 연구의 중점을 고대사에 두고, 조선 민족의 발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조선사를 일본의 만주 진출이라는 시각에서만 바라본다고 비판한다.[4]전후 일본의 조선사 연구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하타 다케시는 조선사의 자주적·주체적 발전을 부정함으로써 조선사 연구에 왜곡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5] 하타에 따르면, 만선사관이란 "조선사의 자주적 발전을 의심하는 생각"을 의미한다.[14][6]
이나바 이와키치는 만선사관의 입장에서 조선의 역사의 "자주적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 역대 왕가는 만주 또는 중국 대륙에서 패배하여 조선으로 도망쳐온 것이며, 단군 신화에 근거한 "민족적 주장"에 반대했다고 하타 다케시는 비판한다.[7][8]
하타가 만선사를 비판한 것은 조선사의 자주적 발전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며[10], 반드시 조선 한 나라만의 역사로 파악하는 일국사관을 옳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 주요 비판
5. 만선사에 대한 재평가
기타 시게루의 만선사관 비판은 조선과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적 관계를 단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비판은 전후 일본과 한국의 조선사 연구가 조선 역사를 한 나라에 국한하여 고찰하는 '일국사관'에 갇히게 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5]
하마다 코사쿠는 한국 학계에 백제가 왜국에 문화를 전래했다는 우월론이 뿌리 깊지만, 이는 백제 배후의 중국과의 상호 관계를 간과한 결과라고 지적하며, "동아시아에서의 한국 고대사의 시각이 약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한다.[15]
나카노 코타는 조선과 중국 동북 역사의 관계 단절, 그리고 조선사를 한 나라의 역사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자국 중심의 역사 인식"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5] 이러한 인식은 조선사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중국으로부터 문화와 문명을 수용했다는 사실, 조선사에서 중국인의 활동 등을 경시하게 만들었으며, 중국과 조선의 종주국-속국 관계, 지배-피지배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나카노는 전후 한국인의 한국사 연구가 한국에서만 인정되는 내셔널리스틱한 역사관을 낳았다고 비판하며, "독도 문제", "고구려 논쟁", "발해국 논쟁" 등 타국과의 갈등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전후 일본과 한국의 조선사 연구에서 일국사관을 반성하고 탈피하기 위해 만선사의 관점을 재평가해야 하지만, 조선사의 자주적 발전을 과소평가하는 부분은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16][10]
다나카 류이치는 만선사가 식민지 조선의 내셔널리즘을 억압한 것은 사실이며, 기타 시게루가 만선사를 "왜곡된 조선사상"이라고 비판하고 "조선 민족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한 것은 정당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전후 조선(근대)사 연구가 '일국사'적 색채가 강해졌고, 재만 조선인사 연구 등을 제외하면 '만주(국)'사 연구와의 상호 관계는 고려되는 경우가 적었다고 지적한다.[17]
이노우에 나오키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일국사관에 얽매이지 않는 "만선사적 시좌"와 "동북아시아적 시좌"가 유용하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의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고구려를 이해해야 하며, 만주와 조선을 일체적인 공간으로 파악하는 만선사관이 고구려를 오늘날의 국가 틀을 넘어 거시적으로 이해하고 일국사적 사관을 극복하는 데 유효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를 구분하지 않고 고구려사를 파악하려는 만선사적 관점이 고구려의 역사적 전개를 고찰하는 데 유효한 시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18][19]
야기 다케시는 만선사 연구를 높이 평가하며,[20] 전전 일본의 만선사관이 만주와 조선을 일체화하여 조선사의 독자성을 과소평가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지만, 당시 연구자들에게는 시대적 제약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만선사 연구 성과가 이후 역사 연구의 기준이 되었으며, 담기상 주편의 『중국 역사 지도집』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또한 전후 일본의 조선사 연구가 "조선사를 한반도의 틀 안에 가두어 버렸다"고 비판하며, 전후 세대 연구자들이 만선사 연구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뛰어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21]
5. 1. 일국사관 극복
만선사관에 대한 기타 시게루의 비판은 조선과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적 관계를 단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비판은 전후 일본과 한국의 조선사 연구가 조선의 역사를 한 나라에 국한하여 고찰하는 '일국사관'에 갇히게 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5]하마다 코사쿠는 한국 학계에 백제가 왜국에 문화를 전래했다는 우월론이 뿌리 깊지만, 이는 백제 배후의 중국과의 상호 관계를 간과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는 "동아시아에서의 한국 고대사의 시각이 약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한다.[15]
나카노 코타는 조선과 중국 동북 역사의 관계가 단절되고 조선사를 한 나라의 역사로만 파악하면서 "자국 중심의 역사 인식"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5] 이러한 인식은 조선사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중국으로부터 문화와 문명을 수용했다는 사실, 조선사에서 중국인의 활동 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또한 중국과 조선의 종주국-속국 관계, 지배-피지배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나카노는 전후 한국인의 한국사 연구가 한국에서만 인정되는 내셔널리스틱한 역사관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한국 역사 교과서에서는 단군은 실존 인물, 기자는 허구 인물, 위만은 조선인, 낙랑군은 베이징·요동에 위치, 신라 건국 연도는 기원전 57년, 요서에 백제령 존재, 발해는 조선의 국가였다고 기술한다. 나카노는 이러한 역사관이 "독도 문제", "고구려 논쟁", "발해국 논쟁" 등 타국과의 갈등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전후 일본과 한국의 조선사 연구에서 일국사관을 반성하고 탈피하기 위해 만선사의 관점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조선사의 자주적 발전을 과소평가하는 부분은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16][10]
다나카 류이치는 만선사가 식민지 조선의 내셔널리즘을 억압하는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며, 기타 시게루가 만선사를 "왜곡된 조선사상"이라고 비판하고 "조선 민족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한 것은 정당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그 결과로서, 전후의 조선(근대)사 연구는 '일국사'적인 색채가 강한 것이 되었고, 재만 조선인사 연구 등을 제외하면, '만주(국)'사 연구와의 상호 관계는 고려되는 경우가 적었던 유감이 있다"고 지적한다.[17]
이노우에 나오키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일국사관에 얽매이지 않는 "만선사적 시좌"와 "동북아시아적 시좌"가 유용하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의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고구려를 이해해야 하며, 만주와 조선을 일체적인 공간으로 파악하는 만선사관이 고구려를 오늘날의 국가 틀을 넘어 거시적으로 이해하고 일국사적 사관을 극복하는 데 유효하다고 평가한다.[18] 그는 만선사가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 현재의 국경이 아닌 더 넓은 관점에서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함을 보여준다고 언급하며,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를 구분하지 않고 고구려사를 파악하려는 만선사적 관점이 고구려의 역사적 전개를 고찰하는 데 유효한 시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19]
야기 다케시는 만선사 연구를 높이 평가하며,[20] 만선사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언급하면서, 전전 일본의 만선사관이 만주와 조선을 일체화하여 조선사의 독자성을 과소평가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지만, 당시 연구자들에게는 시대적 제약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만선사 연구 성과가 이후 역사 연구의 기준이 되었으며, 담기상 주편의 『중국 역사 지도집』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또한 전후 일본의 조선사 연구가 "조선사를 한반도의 틀 안에 가두어 버렸다"고 비판하며, 전후 세대 연구자들이 만선사 연구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뛰어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21]
5. 2. 동북아시아사적 관점
기타 사다오의 만선사관 비판이 조선과 중국 동북부 지역 역사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해방 이후 일본과 한국의 조선사 연구가 조선 역사를 한 국가의 역사로만 보는 '일국사관'에 갇히게 했다는 주장이 있다.[5]하마다 코사쿠는 한국 학계에 백제가 왜국에 문화를 전파했다는 우월론이 뿌리 깊지만, 이는 백제 뒤에 있는 중국과의 상호 관계를 간과한 것이며, "동아시아에서의 한국 고대사에 대한 시각이 약하다"고 지적한다.[15]
나카노 코타는 조선과 중국 동북부 지역 역사의 관계가 단절되고 조선사를 조선 만의 역사로 파악하면서 "자국 중심의 역사 인식"이 형성되었고,[5] 조선사를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조선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중국으로부터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였다는 것, 조선사에서 중국인의 활동 등이 무시되고, 중국과 조선의 종주국-속국 관계, 지배-피지배 관계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나카노는 이러한 역사관이 해방 이후 한국인의 한국사 연구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낳았고(예: 한국 역사 교과서에서 단군은 실존, 기자는 실존하지 않음, 위만은 조선인, 낙랑군은 베이징·요동에 위치, 신라 건국 연도는 기원전 57년, 요서에 백제 영토 존재, 발해는 조선의 국가였다는 기술), 독도 문제, "고구려 논쟁", "발해국 논쟁" 등 타국과의 갈등을 초래했다고 본다. 따라서 해방 이후 일본과 한국의 조선사 연구에서 일국사관을 반성하고 벗어나기 위해 만선사의 관점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6] 나카노는 만선사가 조선과 만주의 국경을 상대화하므로, 현대 조선사 연구자들이 만선사 연구에서 참고해야 할 점은 일국사관에서 벗어나고, 일국사관에 얽매이지 않는 시각이지만, 조선사의 자주적 발전을 과소평가하는 부분은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언급한다.[10]
다나카 류이치는 식민지 시기 만선사가 조선의 민족주의를 억압한 것은 사실이며, 기타가 만선사를 "왜곡된 조선사"로, "조선 민족의 주체적 발전"인 조선사상을 "올바른 조선사"라고 비판한 것은 정당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결과, 해방 이후 조선(근대)사 연구는 '일국사'적인 색채가 강해졌고, 재만 조선인사 연구 등을 제외하면 '만주(국)'사 연구와의 상호 관계는 고려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17]
이노우에 나오키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일국사관에 얽매이지 않는 "만선사적 시좌", "동북아시아적 시좌"가 유용하며, 현재의 국경에 얽매이지 않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고구려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공간으로 보고 고구려를 파악하려는 만선사관은 고구려를 현대 국경을 기준으로 하는 일국사적 사관을 극복하는 데 유효하다고 평가한다.[18] 이노우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19]
> 이것은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현재의 국경이 아니라, 더 큰 관점에서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를 다수 내포하고 있지만,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를 구별하지 않고, 일체적인 역사 지리적 공간으로서 고구려사를 파악하려는 만선사적 시좌는, 고구려의 사적 전개 과정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유효한 시각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고구려의 동향을 오늘의 국가라는 틀을 넘어 거시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의 고구려사 연구가 국경을 기준으로 하는 일국사적 사관에 얽매여 논급된 결과, 처음에 나타낸 것처럼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을 상기하면, 만선사적 시좌는 일국사적 사관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다시금, 고찰될 여지가 있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야기 다케시는 만선사 연구를 높이 평가하며,[20] 만선사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언급하면서, 식민지 시기 일본의 만선사관이 만주와 조선을 하나로 묶어 조선사의 독자성을 과소평가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을 역사학적으로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지만, 당시 연구자들에게는 시대적 제약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기는 만선사를 "그 연구 성과는 이후의 역사 연구의 기준이 되었으며, 오늘 널리 사용되고 있는 담기상 주편 『중국 역사 지도집』 전 8권(1982년~1987년, 상하이, 지도출판사), 『중국 역사 지도집 석문회편·동북 권』(1988년, 베이징, 중앙민족학원출판사) 등에도 많은 면에서 그 연구 성과가 계승되고 있다"고 높이 평가한다. 또한 해방 이후 일본의 조선사 연구를 "조선사를 한반도 안에 가두어 버렸다"고 비판하며, 해방 이후 세대 조선사 연구자들이 만선사 연구자들이 남긴 방대한 학문적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21]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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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満鮮史」の虚像―日本の東洋史家の朝鮮観―
鈴木俊教授還暦記念会
1964-10
[8]
서적
[9]
서적
朝鮮史研究の課題
太平出版社
1966-11
[10]
서적
[11]
간행물
稲葉岩吉と満鮮史
[12]
서적
[13]
간행물
近代日本における高句麗史研究
[14]
간행물
日本の東洋史家の朝鮮観・「満鮮史の虚像」-朝鮮史のひろば7-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対立と統合の「鮮満」関係--「内鮮一体」・「五族協和」・「鮮満一如」の諸相
大阪歴史学会
1996-09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뉴스
한명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 (7) 일본 만선사가들이 본 병자호란,누르하치,그리고 만주 Ⅰ
http://www.kdaily.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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