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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동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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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선동조론은 일본과 한국이 같은 조상을 가지며 형제와 같은 관계라는 주장으로,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조선을 통치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에도 시대부터 제기되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유럽의 역사학을 수용하며 구체화되었다.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한국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을 강조하며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의 식민 지배, 동화 정책, 민족 말살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으며, 내선일체론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일선동조론은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 신화에 빗대어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묘사하며, 스사노오를 한국에, 아마테라스를 일본에 비유하여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 유전학 및 언어학 연구는 일선동조론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으며, 임나일본부설 역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일선동조론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일본에서는 재일 한국인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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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동조론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일선동조론
다른 명칭일한동조론
일본어: (닛센 도소론)
일본어: (닛초 도소론)
일본어: (닛칸 도소론)
로마자 표기Nissen dōsoron
Nitchō dōsoron
Nikkan dōsoron
한자 표기日鮮同祖論
日韓同祖論
개요
설명일본인과 한국인이 공통 조상을 가졌다는 유사역사학 이론.
특징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
관련 이론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역사적 맥락
배경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
만주사변 이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강화
식민지배 정책의 정당성 부여 필요
전개초기에는 한반도 내의 일본인조선인의 문화적 유사성에 집중
점차 혈통적, 인종적 공통성을 주장
신화나 전설을 이용하여 이론을 뒷받침
목적조선인의 민족의식 약화
일본에 대한 동화와 충성심 강조
일본 제국의 식민정책 강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일본 제국 패망 후 영향력 급감
역사적 오류와 식민주의적 잔재라는 비판
한일 관계의 부정적인 역사적 기억으로 남아있음.
비판
학계의 비판역사학적, 유전학적으로 근거 없음
유사역사학적 주장으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함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론
대중적 인식한국에서는 식민지배의 잔재로 부정적으로 인식
일본에서도 역사적 오류로 인식하는 경향
영향한일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역사적 인식 형성
민족주의 감정 심화
역사 왜곡 문제 야기
추가 정보
관련 개념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관련 사건만주사변
태평양 전쟁
관련 서적단일민족 신화의 기원: "일본인"의 자화상 계보 (小熊英二, 1995)
이미지
1920년대 일본 (오른쪽)과 한국 (왼쪽)의 단결을 홍보하는 일본 포스터
1920년대 일본 (오른쪽)과 한국 (왼쪽)의 단결을 홍보하는 일본 포스터

2. 역사적 배경

일본 열도 주민이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의 후예라는 주장은 에도 시대부터 있었다. 에도 시대의 유학자이자 정치인인 아라이 하쿠세키마한구마소, 고구려를 연결하는 주장을 하였고, 히라타 아쓰타네 등의 국학자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일선동조론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호시노 히사시는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기타 사다키치 등은 조선인이 일본 국민으로 동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나자와 쇼사부로는 한국어가 일본어의 한 분파라고 주장하는 등 언어학 분야에서도 일선동조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선동조론은 일본 제국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2. 1. 에도 시대

에도 시대의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우리나라(일본) 선조는 마한에서 왔다'고 하면서 구마소고구려가 동족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37] 히라타 아쓰타네 등의 국학자는 신국주의를 바탕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연구하면서, '일본과 조선은 예부터 밀접한 관계였으며 일본이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11][37] 에도 시대 말기에는 존왕양이 사상과 결합한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일선동조론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했다.

2. 2.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에는 유럽의 근대 역사학이 도입되면서 일선동조론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호시노 히사시는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연구하여 천황가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도래한 신라 왕이라고 주장했다.[38] 그는 천황가가 한반도의 지배자이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본래 한 나라이며, 조선인과 일본인은 언어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비슷하므로 한반도를 다시 천황가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기타 사다키치는 '조선인은 어서 일본 국민으로 동화하여 똑같이 천황 폐하의 충성된 신민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일선동조론을 민족 동화 정책의 근거로 삼았다.[38]

언어학 분야에서도 일선동조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가나자와 쇼사부로는 「일한양언어동계론(日韓兩言語同系論)」에서 '한국어는 우리 대일본제국의 언어와 동일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 국어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으며 류구 방언과 우리 국어(일본어)와의 관계와 흡사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학설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가나자와가 나중에 지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란 제목이 '일선동조론'이라는 말의 어원이 될 만큼 그 파급력이 컸다.[39]

일선동조론은 일본 제국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 침탈과 동화정책, 황국신민화, 민족말살정책 정당화에 이용되었으며, 일선동조론에 더해 만주·몽골을 '동족'으로 끌어들인 '대아시아주의'는 일제의 만주,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대동아공영권'의 근거로 쓰였다.

3. 주요 주장 및 비판

일선동조론의 주요 주장은 일본과 조선(북한) 양 민족이 같은 조상을 공유하며, 형제 또는 본가와 분가와 같은 관계로, 원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과 조선 통치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었다.[37]

일선동조론의 기원은 멀리 에도 시대 중기의 국학(国学)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7]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등의 국학자들은 신국주의(神国主義)를 바탕으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연구하여 "고대부터 일본이 조선보다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3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일본의 선조는 마한(馬韓)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구마소(熊襲)와 고구려(高句麗)가 동족일 수 있다고 보았다.

막말(幕末, 에도 시대 말기)에는 존황양이(尊皇攘夷) 사상과 관련하여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했고, 일선동조론도 여기에 포함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키타 사다키치(喜田貞吉),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 등의 이론은 대일본제국의 한국 병합과 동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언어학 분야에서도 한국어일본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타나 일본의 한국 통치에 영향을 주었다. 가나자와 쇼자부로는 『일한양언어동계론』(日韓両言語同系論)에서 "한국어는 일본어와 같은 계통으로, 국어의 한 갈래일 뿐이며, 류큐 방언이 일본어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이 이론의 어원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다는 견해가 우세하다.[40]

오쿠니누시가 한반도 출신의 외국 신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고사기일본서기에서 그를 스사노오의 후손으로 기록한 것 외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부족하다.[13]

3. 1. 스사노오와 단군 신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스사노오 신화를 사용하여 일본 신과 한국 신을 연결하려 했다.[6] 이들은 단군이 스사노오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연대기적 불일치로 인해 한국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6] 시라토리 구라키치 등은 한국의 신이 불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며, 단군의 역사성을 부정하려 했다.[6]

스사노오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서 신라의 "증시모리(曽尸茂梨)"라는 곳에 처음 나타났지만, 그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본 열도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4][5] 일본 역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스사노오가 한국인의 조상인 단군이라고 주장했다.[6]

그러나 단군의 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경~기원전 108년)은 스사노오가 신라(기원전 57년~서기 935년)에 나타난 시기보다 2천 년 이상 앞서기 때문에, 한국 역사가들은 이 주장을 비판했다.[6] 시라토리 구라키치와 같은 일본 역사가들은 한국의 신이 서기 372년 이후 불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며, 단군의 업적을 부정하고 일본 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 했다.[6] 초기 일본 역사가들은 단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8]

스사노오


이후 일본 관리들은 "일본인은 아마테라스에서, 한국인은 스사노오에서 유래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9]

3. 2.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의 비유

일본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스사노오 이야기를 사용하여 일본 신과 한국 신을 연결함으로써 병합을 정당화하려 했다.[6] 그중 하나는 한국 신이자 최초의 한국 왕국인 고조선의 건국자 단군이 사실은 일본 신 스사노오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성격을 비교하여, 두 민족을 공통 유산을 가졌지만 성격이 매우 다른 형제인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에 비유하면서 더욱 탄력을 받았다.[6]

아마테라스는 일본인의 집단 정체성을 상징하며 평온하고 인내심 있는 신으로 묘사되었지만, 스사노오는 자애로운 누나의 지도에 의존하는 제멋대로인 남동생으로 묘사되었다.[12] 중세 시대 초부터 스사노오는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온 "외국" 신으로 여겨졌으며,[6] 한국의 병합이 시작될 때까지 일본 역사가들에 의해 재평가되지 않았다. 스사노오의 충동적인 행동과 그의 평범함은 한국인(스사노오의 후손)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일본인(아마테라스의 후손)은 "형제"로서 한국인을 정치적 혼란과 문화적 야만성에서 구원해야 할 과제로 여겨졌다.[7]

스사노오의 자제력 부족과 아마테라스의 평온함의 대조는 두 "형제" 국가 관계에 대한 모델로 사용되었다. 식민지 담론에서 한국인과 그 국가의 미성숙함은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화와 대조되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6]

3. 3. 내선일체론과의 관계

내선일체는 일선동조론을 뒷받침하는 주요 논리로 사용되었다. '내지'(內)와 '선'(鮮)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간주하고, 한국인의 일본 동화를 정당화하려 했다.[38]

호시노 코우(星野恒)는 기기(記紀) 연구를 바탕으로 189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황실(皇室)은 한반도를 지배했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원래 한 나라였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언어와 인종이 같으므로 한반도를 다시 황실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38]

키타 사다키치(喜田貞吉)는 3·1 운동 이후 「일선 양민족 동원론(日鮮両民族同源論)」을 저술, 근대 조선과 전근대 일본을 동일시하며 조선의 낙후성을 지적했다. 그는 "조선인은 조속히 일본 국민에 동화되어 천황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스사노오 신화를 활용, 일본 신을 한국 신과 연결하여 병합을 정당화하려 했다.[6] 이들은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이 사실은 일본 신 스사노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스사노오가 삼국시대 신라의 "증시모리(曽尸茂梨)"에 처음 나타났으나, 일본서기고사기에 따르면 그곳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사실에 기반한다.[4][5] 일본 역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스사노오가 한국인의 조상인 단군이라고 주장했다.[6]

그러나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시기(기원전 2333년경~기원전 108년)가 스사노오가 신라에 나타난 시기(기원전 57년~서기 935년)보다 2천 년 이상 앞선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학계의 비판을 받았다. 도쿄 제국대학에서 동양사를 창시한 시라토리 쿠라키치 등은 한국의 신이 372년 이후 불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며 반박했다.[6] 그는 "한국이 통일 국가로서 아시아 역사에서 일본보다 늦게 발전했다"는 점을 강조하며[7] 단군의 업적을 부정했다. 초기 일본 역사가들은 단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8]

고이소 구니아키조선총독부 관리들은 단군을 한국 민족 고유의 신으로 부정하고, "일본인은 아마테라스에서, 한국인은 증시모리 산에 나타난 스사노오에서 유래했다"고 가르쳤다.[9]

4. 과학적 연구 결과

유전학적 연구 결과와 언어학적 연구 결과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공통 조상이 있고, 야요이인은 한반도에서 도래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야마토 민족한민족(조선민족)이 같은 민족이었다가 분화되었다는 일선동조론의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한국어족일본어족 사이에는 계통적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래 같은 황인종으로서 유전적으로 가까운 민족이긴 했으나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했는데, 일본어족을 사용하던 야요이인한국어족의 팽창에 의해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나머지는 한국어족에 동화되면서 현재의 언어가 된 것(반도일본어설)으로 보인다. 또한 열도를 정복한 정권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역사학적으로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

4. 1. 유전학적 근거

현대 집단 유전학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역사적,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한 유전적 친화성의 정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현대 일본인 집단은 한국인 집단과 가장 유사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플로타입 기반 연구에서 일본 집단은 한국 집단과 87~94%의 유전적 구성 요소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한족의 경우 0~8%에 불과하여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28] 한국 집단과의 유전적 친화성은 특히 시마네 현과 혼슈 지역의 집단에서 특히 강했지만, 규슈 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두드러졌지만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어떤 경우든 이 연구는 "조상 프로필 추정치는 역사적 증거와 추가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한 원래 이주에 대한 확정적인 역사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28]

동아시아 인구의 하위 구조를 보여주는 집단 유전체 PCA 그래프. 일본인 집단(정사각형)은 한국인 집단(원)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일본 유전 집단의 조상 프로필. 본토 아시아 인구 4개 집단과의 유전적 유사성을 보여준다.


2022년 연구에 따르면 야요이 시대 인구는 약 60%의 죠몬 조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훈 시대에 중국 북부와 관련된 농업 인구의 유전적 기여로 인해 현대 일본인에서는 13~15%로 감소했다. 이 북부 인구는 황하와 서요하 유역의 농업 공동체와 관련이 있으며, 한국의 유전적 혼합에도 영향을 미쳤다.[29]

4. 2. 언어학적 근거

한국어족일본어족 사이에는 계통적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어일본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현재는 기원이 서로 다른 계통이라고 여겨지고 있다.[40] 로이 앤드류 밀러, 조셉 그린버그 등은 알타이어족에 일본어와 한국어가 모두 포함된다는 학설을 주장했으나, 현재는 기원이 서로 다른 계통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언어학에서 한국어일본어의 동일성을 근거로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는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예를 들어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는 『일한양언어동계론』(日韓両言語同系論)에서 "한국어는 대일본제국의 언어와 동일 계통에 속하며, 우리 국어의 일분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마치 류큐 방언이 우리 국어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과 같다"라고 서술했다. 가나자와가 후년에 저술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일선동조론의 어원이 되었다.

반도 일본어설에 따르면, 일본어족을 사용하던 야요이인한국어족의 팽창에 의해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나머지는 한국어족에 동화되면서 현재의 언어가 되었다고 한다.

5. 임나일본부설 비판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일선동조론의 주요 근거 중 하나였다.[37] 에도 시대 중기 국학자들은 고사기일본서기를 연구하여 "고대부터 밀접했던 일선(일조) 관계에서 일본이 지배적인 입장에 있었다"고 주장했다.[37] 평田篤胤(히라타 아쓰타네) 등은 신국주의를 배경으로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호시노 코우(星野恒)는 1890년 논문에서 "황실은 한반도의 지배자이며, 한반도와 열도는 원래 한 나라이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언어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한반도를 다시 황실의 영토에 편입시키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했다.[38] 그러나 현대 역사학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이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6. 한국의 반응 및 비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선동조론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한국인의 신앙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혈통과 문화적으로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며, 일선동조론에 반대했다.[4][5][6]

특히 단군(檀君)의 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경~기원전 108년)이 스사노오신라(기원전 57년~서기 935년)에 나타난 시기보다 2천 년 이상 앞선다는 점 때문에 한국 역사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에 맞서 도쿄 제국대학에서 동양사(東洋史)라는 학문 분야를 창시한 시라토리 쿠라키치(Shiratori Kurakichi) 등의 역사가들은 한국의 신이 서기 372년 이후 언젠가 불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6] 이를 통해 그는 "한국이 통일 국가로서 아시아 역사에서 비교적 늦게, 일본보다 늦게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7] 결국 단군의 업적을 일본 신에게 유리하게 부정했다. 통치 초기에 대부분의 일본 역사가들은 단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8]

단군을 한국 민족의 독자적이고 토착적인 신으로서 부정한 후, 조선총독인 고이소 구니아키(Koiso Kuniaki)(小磯國昭) 등 일본 관리들은 젊은이들에게 "일본인은 아마테라스(Amaterasu)에서, 한국인은 한국 증시모리 산에 나타난 스사노오에서 유래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9]

7. 현대적 의의 및 영향

일선동조론은 메이지 시대(1868~1912) 일본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오토리 케이스케의 『조선기문』(1885)과 하야시 타이스케의 『조선사』(1892) 등에서도 유사한 주장이 나타났다.[3]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스사노오 이야기를 사용하여 일본 신을 한국 신과 연결함으로써 병합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6] 그중 하나는 한국의 신이자 최초의 한국 왕국인 고조선의 건국자 단군이 사실은 일본 신 스사노오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단군고조선 건국이 스사노오신라에 나타난 시기보다 2천 년 이상 앞선다는 점 때문에 한국 역사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에 맞서 시라토리 쿠라키치 등의 역사가들은 한국의 신이 서기 372년 이후 언젠가 불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6] 이를 통해 그는 "한국이 통일 국가로서 아시아 역사에서 비교적 늦게, 일본보다 늦게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7] 결국 단군의 업적을 일본 신에게 유리하게 부정했다. 통치 초기에 대부분의 일본 역사가들은 단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8]

단군을 한국 민족의 독자적이고 토착적인 신으로서 부정한 후, 고이소 구니아키 등 일본 관리들은 젊은이들에게 "일본인은 아마테라스에서, 한국인은 한국 증시모리 산에 나타난 스사노오에서 유래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9]

이러한 일선동조론은 일본 우익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재일 한국인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7. 1. 재일 한국인 문제

일선동조론은 일본 제국일본 이주민 사회에 많은 한국인 유입을 가져오도록 하는 정책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고, 그 후손들은 재일 한국인(在日韓国人・在日本朝鮮人)으로서 일본에 남았다.[20] 그러나 이 민족 집단의 동화[21] 및 자신을 한국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감소[22]로 인해, 20세기 후반부터 재일 한국인의 수는 서서히 감소해 왔으며, 현재는 중국 이민자 다음으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소수 민족 집단이다.[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일본의 급속한 발전과 북한의 증가하는 위협[24]과 더불어, 민족주의[25][26] 또한 강화되었고, 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북한과 조총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서 재일 한국인들의 평판이 좋지 않게 되었다.[27] 이로 인해 재일 한국인들은 적대감과 반감의 표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일선동조론'은 일본인들에게는 이제 신성모독적인 이론이자 잊혀진 역사의 한 조각이 되었다.

일본 거주 한국인의 출생, 사망 및 귀화 수

7. 2. 일본 우익 민족주의와의 관계

일선동조론은 일본 우익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선동조론을 통해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한국에 대한 역사 왜곡을 시도한다.[6]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스사노오 이야기를 사용하여 일본 신을 한국 신과 연결함으로써 병합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6] 그중 하나는 한국의 신이자 최초의 한국 왕국인 고조선의 건국자 단군이 사실은 일본 신 스사노오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스사노오가 삼국시대의 한국 왕국 신라의 "증시모리"라는 곳에서 처음 나타났지만, 일본서기고사기에 따르면 그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반도를 떠나 일본 열도로 갔다는 사실에 근거했다.[4][5] 일본 역사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스사노오가 한국인의 조상인 원래의 단군이라고 주장했다.[6]

그러나 단군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경~기원전 108년)이 스사노오신라(기원전 57년~서기 935년)에 나타난 시기보다 2천 년 이상 앞선다는 점 때문에 한국 역사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에 맞서 도쿄 제국대학에서 동양사라는 학문 분야를 창시한 시라토리 쿠라키치 등의 역사가들은 한국의 신이 서기 372년 이후 언젠가 불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6] 이를 통해 그는 "한국이 통일 국가로서 아시아 역사에서 비교적 늦게, 일본보다 늦게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7] 결국 단군의 업적을 일본 신에게 유리하게 부정했다. 통치 초기에 대부분의 일본 역사가들은 단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8]

단군을 한국 민족의 독자적이고 토착적인 신으로서 부정한 후, 조선총독고이소 구니아키 등 일본 관리들은 젊은이들에게 "일본인은 아마테라스에서, 한국인은 한국 증시모리 산에 나타난 스사노오에서 유래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9]

일본과 조선(북한) 양 민족은 그 조상을 같이하며, 형제 또는 본가와 분가에 비유될 수 있는 관계이며, 원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 조선 통치는 역사적으로 합법적인 것이다라고 설명하기 위해 선전되었다.

메이지 이후, 호시노 코우와 키타 사다키치, 언어학자인 가나자와 쇼자부로 등의 이론은 대일본제국의 한국병합 및 그 지역에서의 동화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호시노는 기기 연구를 통해, 1890년에 "본방의 인종 언어에 관하여 미천한 생각을 말하여 세상의 진심으로 애국하는 사람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황실은 한반도의 지배자이며, 한반도와 열도는 원래 한 나라이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언어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한반도를 다시 황실의 영토에 편입시키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했다.[38]

또한, 키타 사다키치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선 양민족 동원론」을 저술하여, 근대의 조선과 전근대의 일본을 동일시하여 조선의 침체성을 논하며, "조선인은 빨리 일반 국민에게 동화되어, 마찬가지로 천황 폐하의 충량한 신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그들 자신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조의 유풍을 숭앙하는 이유이다"라고 주장했다.

8. 결론

일제강점기 일본은 대한제국 병합과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선동조론을 내세웠다. 이는 일본조선 민족의 조상이 같으며, 형제 또는 본가와 분가와 같은 관계이므로 원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37]

일선동조론의 기원은 에도 시대 중기 국학(国学)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등의 국학자들은 신국주의(神国主義)를 바탕으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연구하여, 고대부터 일본조선이 밀접한 관계였으며 일본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3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우리나라(일본)의 선조는 마한(馬韓)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구마소(熊襲)와 고구려(高句麗)가 동족일 수 있다고 보았다.

막말(幕末) 시기에는 존황양이(尊皇攘夷) 사상과 관련하여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했고, 일선동조론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호시노 히사시(星野恒)와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언어학자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 등의 이론은 대일본제국의 한국 병합과 동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호시노 히사시는 1890년 논문에서 "황실(皇室)은 한반도의 지배자이며,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원래 한 나라이며, 일본인조선인은 언어적, 인종적으로 동일하므로 한반도를 다시 황실 영토에 편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38]

기타 사다키치는 3·1 운동 이후 "일선 양민족 동원론"을 저술하여, 근대 조선과 전근대 일본을 동일시하고 조선의 침체성을 지적하며, "조선인은 빨리 일반 국민에게 동화되어 천황 폐하의 충량한 신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조의 유풍을 숭상하는 이유이다"라고 주장했다.

언어학에서도 한국어일본어의 유사성을 근거로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는 "일한양언어동계론"에서 "한국어는 대일본제국의 언어와 동일 계통이며, 일본어의 일분파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가나자와의 저서 "일선동조론"은 이 용어의 어원이 되었다. 가나자와의 연구와 전후 기마민족설과의 관련성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39]

그러나 현대 언어학에서는 일본어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포함된다는 주장은 로이 앤드루 밀러(Roy Andrew Miller), 조셉 그린버그(Joseph Greenberg) 등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현재는 기원이 다른 별개 계통으로 여겨지고 있다.[40]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스사노오 이야기를 이용하여 일본의 신을 한국의 신들과 연결함으로써 병합을 정당화하려 했다.[6] 그중 하나는 한국의 신이자 고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이 사실은 일본스사노오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스사노오가 삼국시대 신라의 "증시모리"라는 곳에 나타났지만, 일본서기고사기에 따르면 그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본 열도로 갔다는 사실에 근거했다.[4][5] 일본 역사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스사노오한국인의 조상인 원래의 단군이라고 주장했다.[6]

그러나 단군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경~기원전 108년)이 스사노오신라(기원전 57년~서기 935년)에 나타난 시기보다 2천 년 이상 앞선다는 점 때문에 한국 역사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에 맞서 시라토리 구라키치(Shiratori Kurakichi) 등의 역사가들은 한국의 신이 서기 372년 이후 언젠가 불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6] 이를 통해 그는 "한국이 통일 국가로서 아시아 역사에서 비교적 늦게, 일본보다 늦게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7] 결국 단군의 업적을 일본 신에게 유리하게 부정했다. 통치 초기에 대부분의 일본 역사가들은 단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8]

단군한국 민족의 독자적인 신으로 부정한 후,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등 일본 관리들은 젊은이들에게 "일본인은 아마테라스에서, 한국인한국 증시모리 산에 나타난 스사노오에서 유래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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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Kōhon kokushi gan Shigakkai
[3] 학술지 An Outline History of Korean Historiography http://muse.jhu.edu/[...] 1980
[4] 백과사전 Nihon Shoki http://dx.doi.org/10[...]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5] 서적 The Kojiki : an account of ancient matters https://www.worldcat[...] 2014
[6] 서적 The god Susanoo and Korea in Japan's cultural memory : ancient myths and modern empire https://www.worldcat[...] 2022
[7] 서적 Japan's Orient : rendering pasts into history https://www.worldca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8] 서적 A Historical Study on the Awareness on the Myth of Dangun KCI
[9] 서적 Die Konstruktion von Gleichheit und Differenz : der Kolonialdiskurs einer gemeinsamen Abstammung von Japanern und Koreanern, 1910–1945 https://www.worldcat[...] 2018
[10] 학술지 An Outline History of Korean Historiography https://www.jstor.or[...] 1980
[11] 웹사이트 Heibonsha World Encyclopedia, 2nd Edition, 日鮮同祖論とは https://kotobank.jp/[...] 2022-10-14
[12] 서적 Nihon tochika no kaigai jinja : Chosen jingu taiwan jinja to saijin. https://www.worldcat[...] Kobundo 2011
[13] 학술지 Ōnamochi: The Great God who Created All Under Heaven 2019
[14] 학술지 Reauthenticating Race: Na Sejin and the Recycling of Colonial Physical Anthropology in Postcolonial Korea https://www.jstor.or[...] 2016
[15] 학술지 The Politics of Nationalism in U.s.-Korean Relations https://www.jstor.or[...] 2004
[16] 학술지 The Face of the Japanese Body Politic https://www.jstor.or[...] 2005
[17] 서적 "Nihonjin" no kyōkai : Okinawa, Ainu, Taiwan, Chōsen, shokuminchi shihai kara fukki undō made https://www.worldcat[...] Shin'yōsha 1998
[18] 학술지 The Creation of National Treasures and Monuments: The 1916 Japanese Laws on the Preservation of Korean Remains and Relics and Their Colonial Legacies https://www.jstor.or[...] 2001
[19] 학술지 Reflections on the Problems of Colonial Modernity and "Collaboration" in Modern Korean History https://www.jstor.or[...] 2004
[20] 서적 Multiculturalism in the new Japan: crossing the boundaries within Berghahn Books
[21] 웹사이트 http://www.moj.go.jp[...] 2021-08-15
[22] 웹사이트 Caste, Ethnicity and Nationality: Japan Finds Plenty of Space for Discrimination http://www.hrdc.net/[...] 2016-08-17
[23] 웹사이트 国籍・地域別 在留資格(在留目的)別 在留外国人 https://www.e-stat.g[...] 2021-07
[24] 서적 The rise of Japanese nationalism http://dx.doi.org/10[...]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22-05-23
[25] 학술지 Sociological studies on nationalism in Japan http://dx.doi.org/10[...] 2021-03
[26] 서적 Japan's Postcolonial Hate Speech http://dx.doi.org/1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5-23
[27] 뉴스 CORRECTED: Pro-Pyongyang group rules out link to abduction https://web.archive.[...] Asian Political News 2002-11-18
[28] 학술지 The fine-scale genetic structure and evolution of the Japanese population
[29] 학술지 Human genetics: The dual origin of Three Kingdoms period Koreans 2022-08-08
[30] 서적 The Sea and the Sacred in Japan: Aspects of Maritime Religion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31] 웹사이트 Nihon Shoki, Volume 9 http://www.j-texts.c[...] 2019-11-05
[32] 웹사이트 The history of Shigaraki pottery http://www.the-anaga[...] www.the-anagama.com 2016-08-26
[33] 문서 The Suinin Chronicle of Nihonshoki "是以近江国鏡谷陶人。則天日槍之従人也"
[34] 서적 Immigrants or Overlords? Korean Influences on Japan in the Archaic Period: a Linguistic Perspective Institut für Kulturund Geitestesgeschichte Asiens 2012-06-14
[35] 인용 Immigrants or Overlords? Korean Influences on Japan in the Archaic Period: a Linguistic Perspective
[36] 웹사이트 Guardian.co.uk https://www.theguard[...]
[37] 웹사이트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日鮮同祖論」 https://kotobank.jp/[...]
[38] 문서 (제목 없음)
[39] 문서 騎馬民族説 2021-04-00
[40] 서적 日本語 歴史と構造 三省堂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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