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토리 구라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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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동양사 연구의 선구자이다. 그는 지바현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학습원 교수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동양학 연구를 위해 아시아학회를 창립하고, 유럽 유학을 통해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연구했다. 그는 한국사와 만주사 연구에도 기여했으며, '야마타이국'의 위치를 북큐슈로 주장하는 등 활발한 학문 활동을 펼쳤다. 말년에는 쇼와 천황의 교육에도 관여했으며, 일본 중심주의적 역사관과 여성 지도자 평가 절하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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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토리 구라키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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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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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시라토리 구라키치 |
원어 이름 | 白鳥 庫吉 |
로마자 표기 | Shiratori Kurakichi |
출생 | |
출생일 | 1865년 3월 1일 |
출생지 | 지바현 모바라시 (구 가즈사국 나가라군 하세 마을) |
사망 | |
사망일 | 1942년 3월 30일 |
사망지 | 가나가와현 지사키시 |
묘지 | |
국적 | |
국적 | 일본 |
학력 | |
출신 학교 | 도쿄 대학 문과대학 사학과 |
학위 | 문학 박사 |
경력 | |
연구 분야 | 동양사학 |
연구 기관 | 도쿄 제국대학 |
업적 | 아시아 전토의 역사 연구 |
가족 | |
기타 정보 |
2. 생애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890년 학습원 교직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2], 이후 1891년 학습원 교수를 거쳐 1904년부터는 모교인 도쿄 제국대학 교수를 겸임했고 1911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교수를 본직으로 삼았다[1][16][18]. 대학 재학 중에는 독일 역사학자 루드비히 리스에게 배웠다[3][16].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유럽에 유학하여 독일 베를린과 헝가리 등지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16][18]. 귀국 후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여 1905년 아시아학회(亜細亜学会|아지아 각카이일본어)를 창립했고[18], 1907년에는 동양협회 학술 조사부 설립과 학술지 『동양학보』 창간에 관여했다[16]. 1923년에는 동양문고 창설에 참여하여 이사 및 연구부장을 맡았다[16].
교육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2년 당시 학습원 원장이었던 노기 마레스케가 메이지 천황을 따라 순국하자, 후임 오사코 나오토시가 부임할 때까지 원장 대행을 맡았다[16]. 또한 1914년부터 1920년까지는 동궁어학문소 어용계로서 동궁 시절의 쇼와 천황 교육에 참여하기도 했다[16][19].
그의 학문적 공로는 국내외에서 인정받아 1900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16][18], 1919년 제국 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6]. 1922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 공로 훈장을 받았다[16]. 1925년 도쿄 제국대학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명예 교수가 되었다[16].
2. 1. 출생과 교육
가즈사 국 나가레 군 나가세 촌(현: 지바현 모바라시)에서 시라토리 카이치로와 토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6]. 호적상 이름은 구라키치(久良吉)이지만, 이는 마을 서기가 잘못 기재한 것이며 본인은 본명이 구라키치(庫吉)라고 밝혔다[16].1879년, 지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사범학교 교장이자 지바 중학교 총리였던 나카 미치요와 물리학, 화학을 가르치던 미야케 요네키치를 만났다[17]. 1883년, 지바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16][18]. 1887년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16], 같은 해 제국대학(후의 도쿄 제국대학, 현재의 도쿄 대학) 문과대학(후의 도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제국대학 사학과의 첫 번째 학생이었다[18]. 대학 재학 중 레오폴트 폰 랑케의 제자였던 루드비히 리스에게 사사했다[3][16]. 1890년 제국대학을 졸업했다[16].
졸업 후 1890년 학습원 교직원에 합류했으며[2], 1891년 8월 학습원 교수로 취임하여 역사지리학과 과장이 되었다[18]. 처음에는 일본사와 서양사를 가르쳤으나, 후에 중국사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동양사 연구를 전문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츠다 소키치는 전한다[18]. 1899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 동양학회에서의 논문 발표와 해외 학회지 논문 발표 등의 공로로 1900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6][18].
1901년부터 1903년 말까지 학습원의 명으로 유럽에 유학하여[16] 베를린에서 터키어를 연구하고, 이후 헝가리로 옮겨 헝가리어와 역사를 연구했다[18]. 1904년 귀국하여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를 겸임하게 되었다[16][1]. 1905년에는 아시아학회(亜細亜学会|아지아 각카이일본어)를 창립했다.
2. 2. 학문 활동
시라토리는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도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1890년에 졸업한 첫 번째 학생이었다.[18][16] 대학 재학 중에는 루트비히 리스에게 사사했으며,[16][3] 1889년에는 사학회 설립에 참여했다.[18] 졸업 후 1890년 학습원 교직원으로 합류했고,[2] 1891년 8월에는 가쿠슈인 교수로 취임하여 역사지리학과 과장을 맡았다.[18] 처음에는 일본사와 서양사를 가르쳤으나, 이후 중국사를 담당하게 되면서 동양사 연구를 전문 분야로 삼았다.[18]1899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 동양학회에서의 논문 발표와 해외 학회지에 발표한 논문들의 공로를 인정받아 1900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6][18] 1901년부터 1903년 말까지 가쿠슈인의 명령으로 유럽으로 유학하여 베를린에서 터키어를 연구하고, 이후 헝가리에서 헝가리어와 역사를 연구했다.[16][18] 1904년 귀국 후에는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를 겸임하기 시작했고,[16][1] 1911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교수를 본직으로 삼고 가쿠슈인 교수를 겸임했다.[16]
학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05년 亜細亜学会|아지아 각카이일본어(아시아학회)를 창립했으며,[18] 1907년에는 동양협회 학술 조사부를 설립하고 『동양학보』 창간에 관여했다.[16] 1934년에는 일본민족학회 이사장에 취임했다.[20]
교육자로서도 활동하여, 1912년 가쿠슈인 원장 노기 마레스케가 사망했을 때 후임 오사코 나오토시 부임 전까지 원장 대행을 맡았으며,[16] 1914년부터 1920년까지는 동궁어학문소 어용계로서 쇼와 천황의 교육에도 참여했다.[16][19]
1919년 제국 학사원 회원이 되었고,[16] 1922년 도쿄 제국대학의 명으로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 공로 훈장을 받았다.[16] 1923년 동양문고가 창설되자 이사 및 연구부장으로 취임했으며,[16] 1925년 도쿄 제국대학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명예 교수가 되었다.[16]
시라토리는 일본과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역사, 민속학, 신화, 전설, 언어, 종교, 고고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했다. 그는 동양학을 학제적인 연구 분야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관련 단체 설립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에는 「왜 여왕 히미코고」를 저술하여 야마타이국이 북규슈에 있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당시 교토 제국대학의 나이토 고난 교수가 기내설을 주장한 것과 맞물려, 이후 동대파와 경대파 간의 치열한 야마타이국 논쟁으로 이어졌다. 시라토리는 문헌학적 접근을 중시하는 학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의 스승으로는 나카 미치요가 있으며, 제자로는 츠다 소키치 등이 있다.[17][18]
2. 3. 쇼와 천황 교육
1914년부터 1920년까지 동궁어학문소 御用掛|어용계일본어로서 동궁 시절의 쇼와 천황 교육에 관여하였다[16][19].2. 4. 말년
1925년 도쿄 제국대학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16], 명예 교수[16]가 되었으며, 정삼위 훈이등[16]을 받았다.1942년 3월 30일, 폐렴으로 사망했다[16]. 묘소는 조시가야 영원에 있다.
스승으로는 나카 미치요가 있으며, 제자로는 츠다 소키치 등이 있다.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었던 시라토리 토시오는 그의 조카이다.
3. 연구 분야 및 업적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일본의 역사학자로, 특히 일본과 동아시아 역사를 중심으로 한 '동양사'(東洋史, ''Tōyōshi'') 연구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5] 그의 연구는 일본 및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의 역사, 민속, 신화, 전설, 언어, 종교, 고고학 등 매우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했다. 그는 동양학을 학제적인 연구 분야로 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관련 학회 설립과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예를 들어 1889년 제국대학 재학 시절 사학회 설립에 참여했고,[18] 1905년 아세아학회 성립(1910년 동양협회와 합병)에도 관여했으며,[18] 1934년에는 일본민족학회 이사장을 맡았다.[20]
그의 동양사 연구는 서구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동아시아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며,[5]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일본을 동아시아의 선도 국가로 설정하려는 경향을 보였다.[6][7] 이러한 관점은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1918년에는 중국이 일본의 통치하에 놓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8] 또한 그는 국민과 국가를 동일시하며 역사가 국가 강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0]
시라토리는 한국학 분야의 선구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1905년부터 한국어의 역사 언어학을 연구하고 알타이 가설을 지지했다.[11] 또한 만주 지역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 한국과 만주가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으며,[13] 고대 발해 연구를 통해 민족적 다양성에 주목하기도 했다.[14]
1910년에는 「왜 여왕 히미코고」를 발표하여 야마타이국이 북규슈에 있었다는 설(북규슈설)을 제기했다. 이는 당시 교토 제국대학의 나이토 고난 교수가 주장한 기내설과 대립하며 이후 치열한 야마타이국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 외에도 고대 중국 기록에 나오는 류구이 땅이 사할린이며 아이누족이 거주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15]
3. 1. 동양사 연구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일본에서 동아시아와 일본의 독특한 역사에 초점을 맞춘 '동양사'(東洋史, ''Tōyōshi'')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역사가들은 이를 통해 '서구와는 구별되면서도 동등한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을 창출'하고자 했다.[5] 작가 스테판 타나카에 따르면, 이 과정에는 동아시아인들이 자신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심으로서 중국 문명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을 벗어나, 공자와 같은 중국의 상징적 인물들을 더 넓은 '동아시아' 역사의 일부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6] 이를 통해 유교 중국과 유교 일본을 공유된 동양사의 동등한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6] 또한, 이는 근대 동아시아 역사를 과거처럼 중국 중심이 아닌 일본을 선도 국가로 설정하여 구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7] 1918년에는 중국을 일본이 통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8] 이러한 틀은 일본을 문화적으로 우월한 국가로 간주하여 당시 유럽 강대국들과 동등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9] 나아가 시라토리는 당시 대부분의 일본 민족주의자들처럼 국민을 국가와 동일시했으며, 역사가 국가 강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10]시라토리의 관심은 중국을 넘어 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선구적인 한국학 연구자로 인정받으며, 일찍이 1905년부터 한국어의 역사 언어학을 연구하고 알타이 가설을 지지했다.[11] 또한 1913년부터 만주 지역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며,[12] 한국과 만주가 역사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는 견해를 피력했다.[13] 고대 발해에 관한 글에서는 발해 사절 기록에 중국식 이름과 비중국식 이름이 함께 나타나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각각 고구려 계통과 말갈 출신 인물 사이의 민족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했다.[14] 시라토리는 고대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류구이 땅이 사할린이며, 이곳에 아이누족이 거주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5]
그의 연구는 일본과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역사뿐만 아니라 민속, 신화, 전설, 언어, 종교, 고고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아울렀다. 동양학을 학제적인 연구 분야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관련 학술 단체의 설립과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89년 제국대학 재학 중 사학회 설립에 참여했고,[18] 1905년 아세아학회 성립(1910년 동양협회와 합병)에도 관여했다.[18] 1907년에는 동양협회 학술조사부를 설립하고 『동양학보』 창간에 기여했으며,[16] 1934년에는 일본민족학회 이사장에 취임했다.[20]
1910년에 「왜 여왕 히미코고」를 발표하여 야마타이국이 북규슈에 있었다는 설(야마타이국 북규슈설)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동쪽의 시라토리, 서쪽의 나이토', '실증학파의 나이토, 문헌학파의 시라토리'로 불리며 쌍벽을 이루던 교토 제국대학의 나이토 코난 교수가 기내설을 주장한 것과 맞물려, 이후 도쿄대학과 교토대학 학파 간의 치열한 야마타이국 논쟁으로 이어졌다.
3. 2. 야마타이국 논쟁
1910년에 「왜 여왕 히미코고」를 저술하여 야마타이국이 규슈 북부에 있었다는 설(북규슈설)을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당시 유명한 동양학자이자 교토 제국대학 교수였던 나이토 고난은 「히미코고」를 통해 야마타이국이 기나이 지방에 있었다는 설(기내설)을 주장했다. 나이토 고난은 시라토리 구라키치와 함께 "동쪽의 시라토리 구라키치, 서쪽의 나이토 고난", "실증학파의 나이토 고난, 문헌학파의 시라토리 구라키치"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이들의 주장을 계기로 도쿄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동대파(북규슈설)와 교토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경대파(기내설) 사이에 치열한 논쟁, 이른바 야마타이국 논쟁이 벌어졌다.3. 3. 한국사 및 한국어 연구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선구적인 한국학자로 인정받으며,[11] 1905년부터 한국어의 역사 언어학을 연구했고 알타이 가설을 지지했다.[11] 그의 관심은 중국 외에도 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었는데, 특히 만주 지역 역사에 1913년부터 관심을 보였으며,[12] 한국과 만주가 역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다는 견해를 주장했다.[13] 또한 고대 발해에 관한 글을 통해, 발해 사절 기록에 중국식 이름과 비중국식 이름이 함께 나타나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각각 고구려 계통 인물과 말갈족 인물 사이의 민족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했다.[14]3. 4. 만주 지역 연구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중국 외에도 아시아 여러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13년부터 만주 지역 역사 연구에 주목했으며,[12] 한국과 만주가 역사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분리될 수 없다는 관점을 제시했다.[13] 이러한 주장은 당시 일본의 대륙 정책과 연관지어 해석될 여지가 있다.또한 시라토리는 고대 발해를 연구하며, 발해 사절 기록에 나타나는 중국식 이름과 비중국식 이름을 분석했다. 그는 이를 통해 발해가 고구려 계통 인물과 말갈 계통 인물이 공존했던 다민족 국가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4] 그의 만주 및 주변 지역 연구는 일본 중심의 동양사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3. 5. 기타 연구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일본 내 역사 연구 외에도, 동아시아와 일본의 독특한 역사에 초점을 맞춘 "동양사"(東洋史, ''Tōyōshi'') 연구의 일본 내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시라토리를 비롯한 동양사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서구와는 구별되면서도 동등한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고자 했다.[5] 작가 스테판 타나카에 따르면, 이 과정에는 동아시아인들이 자신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심으로서 중국 문명을 강조하던 전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공자와 같은 중국의 상징적 인물들을 더 넓은 "동아시아" 역사의 대표자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이는 유교 중국과 유교 일본을 공유된 동양사의 일부로 보아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있게 했다.[6] 나아가, 이는 근대 동아시아 역사를 과거처럼 중국 중심이 아닌 일본을 선도 국가로 설정하여 구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7] 1918년에는 중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8] 이러한 연구 틀은 일본을 문화적으로 우월한 국가로 간주하여 당시 유럽 강대국들과 동등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데 기여했다.[9] 또한 시라토리는 당시 대부분의 일본 민족주의자들처럼 국민을 국가와 동일시했으며, 역사가 국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10]시라토리의 연구 관심은 중국을 넘어 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선구적인 한국학자로 인정받으며, 1905년부터 한국어의 역사 언어학을 연구했고 알타이 가설을 지지했다.[11] 또한 1913년부터 만주 지역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며,[12] 한국과 만주가 역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13] 고대 발해에 관한 글에서는 발해 사절 기록에 중국식 이름과 비중국식 이름이 함께 나타나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각각 고구려 계통 인물과 말갈 인물 사이의 민족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했다.[14]
그는 고대 중국 기록에 묘사된 류구이 땅(流鬼國)이 사할린이며, 이곳에 아이누족이 거주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5]
시라토리는 일본과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역사, 민속, 신화, 전설, 언어, 종교, 고고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했다. 그는 동양학을 학제적인 연구 분야로 확립하는 데 힘썼으며, 관련 분야 발전을 위한 여러 학술 단체 설립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89년 제국대학 재학 중 사학회 설립에 참여했으며[18], 1905년 성립된 아세아학회(1910년 동양협회와 합병)와[18] 1934년 이사장에 취임한 일본민족학회[20] 등이 그 예이다.
1910년에는 「왜 여왕 히미코고」(倭女王卑弥呼考)를 저술하여 야마타이국이 북규슈에 있었다는 설("야마타이국 북큐슈설")을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 "동쪽의 시라토리, 서쪽의 나이토", "실증학파의 나이토, 문헌학파의 시라토리"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던 교토 제국대학의 나이토 고난 교수는 「히미코고」(卑弥呼考)를 통해 기나이설(畿内説)을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도쿄 제국대학 중심의 학파(동대파)와 교토 제국대학 중심의 학파(경대파) 사이에 치열한 논쟁(야마타이국 논쟁)이 벌어졌다.
4. 비판 및 논란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역사 연구는 일본 중심주의적 시각에 기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그는 히미코와 같은 고대 일본의 여성 지도자들의 정치적, 군사적 역할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종교적 역할만을 강조하며 그 가치를 평가절하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1]
4. 1. 일본 중심주의 역사관
1910년 이래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일본 역사에서 여성 통치자나 군사 지도자들이 과거에 지녔던 높은 가치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여러 역사학자 중 한 명이었다.[1] 그는 히미코나 고대 일본의 여성 천황과 같은 인물들이 실제 행정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주로 종교 의례를 수행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평가절하했다.[1]4. 2. 히미코 및 여성 지도자 평가 절하
1910년 이후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일본 역사에서 여성 국가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에게 과거에 부여되었던 높은 가치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여러 역사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히미코나 고대 일본의 여제 등이 종교 의례 수행에만 집중했을 뿐 실제 행정 권력을 가진 지도자는 아니었다고 평가했다.5. 저서
- 《시라토리 구라키치 저작집》(白鳥庫吉著作集)
- * 제1・2권: 《西域史硏究》(서역사 연구) (상, 하) 서울: 삼귀문화사(三貴文化社), 1987년
- 《시라토리 구라키치 전집》(白鳥庫吉全集) 전 10권, 이와나미 쇼텐, 1969년 ~ 1971년.
- * 1, 2권: 일본 상대사 연구
- * 3권: 조선사 연구
- * 4, 5권: 만리장성 이북 민족사 연구 (새외 민족사 연구)
- * 6, 7권: 서역사 연구
- * 8, 9권: 아시아사론
- * 10권: 잡찬, 총색인 등
- * 이 중 「조선사 연구」, 「새외 민족사 연구」, 「서역사 연구」는 신판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 《일본역사 쇼와천황의 교과서》 (상・하), 벤세이 문고(勉誠文庫): 벤세이 출판(勉誠出版), 2000년.
- * 신판 단행본(전 1권)은 2015년에 간행되었으며, 토코로 이사오가 해설을 맡았다.
- 《국사 쇼와천황의 역사교과서 구어 번역》(国史 昭和天皇の歴史教科書 口語訳), 이즈모이 아키(出雲井晶) 번역 및 해설, 고단샤, 2004년.
6. 수상 경력
'''위계'''
'''훈장'''
7. 가족 관계
시라토리 카이치로(白鳥嘉一郎)와 토쿠(トク)의 차남이다.[16]
외교관이자 정치인인 시라토리 토시오(白鳥 敏夫)는 그의 조카이다.[16] 시라토리 토시오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이탈리아 주재 일본 대사를 지냈고, 1940년에는 일본 외무 대신 고문을 역임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 이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며,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Contemporary Japanese Thought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2]
서적
Contemporary Japanese Thought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Euro-Japanese Universalism, Korean Confucianism, and Aesthetic Commu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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