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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제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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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면제배갑은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서양의 무력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조선에서 제작된 방탄 갑옷이다. 신미양요(1871)에서 실제 사용되었으며, 미군에 노획되어 미국으로 가져가 스미소니언 협회에 보관되었다가 2007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면제배갑은 세계 방탄복 역사에서 영국 시민 전쟁 시기 방탄 갑옷, 16세기 유럽과 중세 일본의 방탄복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서양 무기 발전과 국권 상실로 인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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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제배갑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명칭
한글면제배갑
한자면제배갑 (綿製背甲)
로마자 표기Myeonje Baegap
지정일2010년 6월 25일
소유국립중앙박물관
소재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5 (국립중앙박물관)
개요
면제배갑
면제배갑

2. 배경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치른 조선은 서양 열강의 군사적 위협을 직접 경험하며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6][7] 특히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조총에 비해 월등한 성능을 보인 서양식 소총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총기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방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섭정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서양 총탄을 막아낼 수 있는 새로운 갑옷 개발을 지시했다.[6][7] 이는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려는 자주 국방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2. 1. 개발 과정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치른 조선은 서양 세력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양 총기의 위력에 주목한 조선 조정은 총탄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방법을 모색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서양 총탄을 방어할 수 있는 새로운 갑옷 개발을 지시했다.[6][7]

당시 무기 제작자였던 김기두와 안윤(또는 강윤)은 이 명령을 받아 면갑과 철갑 등 다양한 재료로 방탄 성능 실험을 거듭했다. 실험 결과, 면을 12겹으로 겹쳤을 때 총탄을 막아낼 수 있음을 확인했고, 이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면 13겹으로 이루어진 면갑, 즉 면제배갑을 제작하게 되었다. 병인양요 직후에 개발된 이 면제배갑은 곧 조선군 병사들에게 지급되었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 실전에 투입되었다.

면제배갑은 실제로 총탄을 막아내는 데 일정한 효과를 보였으나, 몇 가지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두꺼운 면 때문에 한여름에는 착용하기 매우 더웠으며, 재질의 특성상 불에 매우 취약하여 쉽게 불이 붙는 문제가 있었다.[8] 1871년 여름, 강화도를 침공했던 미군은 기록에서 총알에도 굴하지 않고 용맹하게 달려드는 조선군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또한 미군은 대포 공격의 파편에 맞아 갑옷에 불이 붙은 조선 병사를 목격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2. 2. 실전 사용 및 노획

병인양요(1866) 이후 서양 총기의 위력을 실감한 흥선대원군은 총탄을 막을 수 있는 갑옷 개발을 지시했다.[6][7] 이에 따라 면 13겹으로 제작된 면제배갑이 개발되어 조선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다.

이 갑옷은 1871년 미국 해군미국 해병대 병력이 강화도에서 벌인 신미양요에서 처음 실전에 사용되었다. 당시 미군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총알 세례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며, 이는 미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면제배갑은 실제로 총탄을 막아내는 효과가 있었으나, 한여름 전투에서 착용하기에는 매우 덥고 무거웠으며, 천으로 만들어져 불에 쉽게 타는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8] 미군은 포격으로 인해 갑옷에 불이 붙은 조선 병사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전투 과정에서 미군은 면제배갑 한 점을 노획하여 미국으로 가져갔다. 이 면제배갑은 오랫동안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7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8][3]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되어 당시 조선군의 항전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3]

3. 한국으로의 귀환

면제배갑 뒷 모습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게 빼앗겼던 조선군의 깃발인 수자기의 존재를 한동대학교 토마스 듀베네이 교수가 확인하고 알리면서, 이를 한국으로 되돌려오려는 반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화재 반환과 관련된 법규 등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어려움을 겪다가, 2007년에 10년 임대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면제배갑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미국군이 노획하여 미국으로 가져간 여러 유물 중 하나였다. 이후 오랫동안 미국의 스미소니언 협회에 보관되어 있었다.[3] 수자기가 국내로 돌아올 때, 면제배갑을 포함한 다른 신미양요 관련 유물들도 함께 돌아온 것으로 여겨진다.

2008년 4월 1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수자기 특별전'을 통해 신미양요 관련 유물들이 일반에 공개되었고, 면제배갑 역시 이때 함께 전시되었다.[3] 이후 면제배갑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및 전시되고 있다.[3]

4. 평가

면제배갑은 세계사적으로도 방탄복 개발의 초기 시도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중요한 군사 기술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서양과는 다른 재료와 방식으로 방탄 성능을 구현하려 했던 조선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당시 급격하게 발전하던 서양의 화기 기술 수준과 조선 말기의 어려운 국내외적 상황 속에서 면제배갑 개발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국권 피탈 과정을 거치며 독자적인 기술 개발의 동력을 상실하면서 면제배갑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자주적인 기술 개발 노력이 외세의 영향과 시대적 한계에 부딪혀 좌절된 안타까운 사례로 여겨진다.

4. 1. 세계 방탄복 역사에서의 위치

세계 병기 역사에서 실제 총탄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방탄복이 전투에 사용된 사례는 영국 시민 전쟁(1642~1649)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끌던 기마대는 3겹 구조의 방탄 갑옷을 착용했다.

방탄복 제작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538년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가 필리포 네그롤리에게 방탄 성능을 가진 조끼 제작을 의뢰했다는 것이다. 또한 1561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갑옷의 방탄 성능을 시험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부드러운 소재를 이용한 초기 방탄복 형태는 중세 일본에서 실크를 사용한 사례에서 발견된다.

서양에서는 총기뿐만 아니라 대포와 같은 중화기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개인 방호 장비의 발전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점차 방탄복 개발의 동력을 잃게 되었다. 조선의 면제배갑 역시 독자적인 기술 개발의 성과였으나, 조선 말기 국권 피탈 과정을 거치며 독자적인 무기 개발의 맥이 끊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4. 2. 한계와 의의

면제배갑은 발명 이후 꾸준히 발전하거나 널리 사용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서양의 화기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총기 성능이 빠르게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포와 같은 강력한 중화기가 등장하면서, 면제배갑과 같은 개인 방호 장비의 발전 속도가 이를 따라잡기 어려워졌다.

결정적으로 조선 말기 국권을 상실하면서 독자적인 무기 개발의 동력을 잃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면제배갑 역시 더 이상 개발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조선이 처했던 어려움 속에서 자주적인 기술 개발 노력이 좌절된 안타까운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참조

[1] 웹사이트 면제갑옷 http://www.cha.go.kr[...]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2017-03-27
[2] 웹사이트 세계최초의 방탄조끼 조선군의 '면제배갑' http://www.hani.co.k[...] 2017-03-27
[3] 웹사이트 Seoul Yonhap News Agency, 1 April 2008 https://web.archive.[...] 2008-06-03
[4] 뉴스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32>면갑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10-02-01
[5] 웹인용 金箕斗 a( ? ~ ? ) http://www.encyber.c[...] 두산세계대백과사전 2010-02-01
[6] 뉴스 수자기帥字旗' 특별전시회 안내 https://web.archive.[...] 강화역사문화연구소 2010-02-01
[7] 뉴스 사진 속 조선군의 솜옷 미스터리 (하) https://web.archive.[...] The Science Times 2010-02-01
[8] 뉴스 세계최초의 방탄조끼 조선군의 ‘면제배갑’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 KISTI의 과학향기 201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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