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모토노리 (18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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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모토노리 (1839년)는 도쿠야마 번의 번주 모리 히로시게의 아들로, 1852년 선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아 사다히로로 불렸으며, 1864년 금문의 변에 참여했으나 패배 후 관직을 박탈당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모토노리로 개명하고, 1869년 양부 다카치카의 은거로 번주직을 계승하여 종3위 참의가 되었다. 이후 판적봉환으로 지번사가 되었으며, 폐번치현 이후에는 제15국립은행장, 공작,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1896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국장을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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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시게타카는 에도 시대 조슈 번의 13대 번주로서 재정 개혁, 군비 확충, 경제 부흥을 추진했으나, 가혹한 연공 징수로 민중들의 저항을 겪었다. - 조슈번주 - 모리 히데나리
모리 히데나리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조슈번의 초대 번주이자 모리 데루모토의 장남이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이 감봉되면서 형식적인 당주가 되었고, 오사카 전투에 참전했다. - 도쿠야마 모리가 - 도쿠야마번
도쿠야마번은 에도 시대 스오 국에 있던 모리 씨 일족의 도자마 다이묘 번으로, 구다마쓰 번에서 시작하여 도쿠야마로 거처를 옮기며 이름이 변경되었고, 석고 변동과 만야쿠산 사건 등의 분쟁을 겪은 후 폐번치현되었으나 번주 가문의 후손이 명맥을 잇고 있다. - 도쿠야마 모리가 - 아키모토 유키토모
아키모토 유키토모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로, 모리 히로시게의 아들이었으나 아키모토 히사토모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이었고, 다테바야시 번 이봉 후 번정 개혁을 추진, 조시 서원을 창설했으며, 금문의 변 이후 조슈 정벌에서 막부와 천황, 모리 가문 사이를 중재했다. - 하기 모리가 - 조슈번
조슈 번은 모리 모토나리의 후손이 다스린 번으로, 에도 시대 후기 개혁을 통해 재정을 안정시키고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도입하며 존왕양이 사상을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에 기여, 야마구치현이 되었다. - 하기 모리가 - 모리 시게타카 (에도 시대)
모리 시게타카는 에도 시대 조슈 번의 13대 번주로서 재정 개혁, 군비 확충, 경제 부흥을 추진했으나, 가혹한 연공 징수로 민중들의 저항을 겪었다.
모리 모토노리 (183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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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모리 사다히로 / 모토노리 |
개명 | 히로후사 → 사다히로 → 히로후사 → 모토노리 |
다른 이름 | 모리 모토노리 / 사다히로 |
시호 | 충애공 |
신호 | 알 수 없음 |
계명 | 알 수 없음 |
묘소 | 야마구치현야마구치시 가미우노레의 고야마 묘지 호기엔 신사 |
시대 | 에도 시대(막부) 후기 - 메이지 시대 |
출생 | 덴포 10년 9월 22일 (1839년10월 28일) |
사망 | 메이지 29년 12월 23일 (1896년12월 23일) |
관직 | |
관위 | 종4위하시종, 나가토노카미, 좌근위소장, 종3위, 참의 |
막부 | 알 수 없음 |
주군 | 알 수 없음 |
번 | 조슈번 번주 → 야마구치번 지사 |
씨족 | 모리 씨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모리 히로시게, 어머니: 다키세 양아버지: 모리 다카치카 |
형제 | 히로타다, 도시스쿠, 가타다 모토사다, 야스코, 후쿠바라 모토히로, 모토시게, 아쓰코, 아키모토 시토모, 모토노리, 교고쿠 다카토시 정실, 마쓰노 스케나가 실 |
배우자 | 정실: 모리 야스코 (모리 모토유키 딸) 측실: 야마나카 하나코 |
자녀 | 모토아키라, 고바야카와 사부로, 고바야카와 시로, 고로, 오무라 도쿠토시, 사이온지 하치로 |
2. 생애
도쿠야마번(徳山藩) 제8대 번주 모리 히로시게(毛利広鎮)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야케 사이스케(三宅才助)의 딸로 측실인 다키제(多喜勢)이다. 1852년 2월 27일 선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양자가 된다. 처음에는 '''히로아쓰'''(広封)로 불렸다. 1857년 안세이 원년 2월 18일, 양부 다카치카의 적자가 된다. 같은 해 3월 9일 종4위하 시종 나가토 모리로 임관한다. 또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로부터 편휘 ‘定’을 받아 '''사다히로'''(定広)라고 칭하게 된다. 1858년 안세이 5년, 조후번주 모리 모토유키(毛利元運)의 둘째 딸 모리 야스코(毛利安子)와 혼례를 올린다. 긴키(야스코)는 모토노리를 전후해서 다카치카의 양녀가 되었다. 1864년 겐지 원년 7월 14일 금문의 변이 일어나 산조 사네토미 등을 따라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간다. 7월 21일, 금문의 변의 패배를 알고 야마구치로 되돌아간다. 8월 22일, 막부의 관직을 박탈당했다. 또 ‘정’의 글자를 몰수당하고 다시 ‘히로앗’(広封)으로 되돌린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모토노리’(元徳)로 개명한다. 1868년 게이오 4년 2월 상경하였고, 3월 의정에 취임한다.[1] 1869년 메이지 2년 6월 4일 양부 다카치카의 은거로 뒤를 이어 종3위, 참의원이 되었다. 취임 직후 판적봉환으로 지번사가 되었다. 1871년 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면직되어, 도쿄로 옮기면서 제15대국립은행장, 공작,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1] 1896년 12월 23일 향년 57세로 사망했으며, 국장을 하사하고, 호는 忠愛公이다.[1]
2. 1. 가계와 성장 배경
모리 모토노리는 1839년 도쿠야마번(徳山藩) 제8대 번주 모리 히로시게(毛利広鎮)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야케 사이스케(三宅才助)의 딸로 측실인 다키제(多喜勢)이다. 아버지 히로시게는 1837년 은거하였고, 모토노리의 이복형인 모토미쓰(모토노리의 이복 형)가 번주를 계승했다. 모토노리의 형제 중에는 후쿠하라 모토요시와 같이 유력 가문에 양자로 간 인물들이 있었다. 아키모토 유키토모(야마가타번주, 후 다테바야시번주) 또한 모토노리의 형제이다.모리 모토노리의 가문은 조슈 번의 번조인 모리 데루모토의 남계 혈통을 잇는 분가였다. 그러나 히로시게의 증조부인 모리 모토쓰구(데루모토의 손자)가 본가의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되면서, 조슈 번 내 불화가 발생하였다. 데루모토 직계 조슈 번주는 모토노리의 4대 요시히로부터이다.
2. 2. 조슈 번주 계승
도쿠야마번(徳山藩) 제8대 번주 모리 히로시게(毛利広鎮)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야케 사이스케(三宅才助)의 딸로 측실인 다키제(多喜勢)이다. 1852년 2월 27일 선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양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히로아쓰'''(広封)로 불렸다. 1857년 안세이 원년 2월 18일, 양부 다카치카의 적자가 된다. 같은 해 3월 9일 종4위하 시종 나가토 모리로 임관한다. 또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로부터 편휘 ‘定’을 받아 '''사다히로'''(定広)라고 칭하게 된다. 1869년 메이지 2년 6월 4일 양부 다카치카의 은거로 뒤를 이어 종3위, 참의원이 되었다. 취임 직후 판적봉환으로 지번사가 되었다.2. 3. 정계 진출과 존왕양이 운동
1852년 모리 다카치카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양자가 되었고, 처음에는 히로아쓰(広封)로 불렸다. 1857년 양부 다카치카의 적자가 되었으며, 종4위하 시종 나가토 모리로 임관했다. 또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로부터 편휘 ‘定’을 받아 사다히로(定広)라 칭하게 되었다.1858년 조후번주 모리 모토유키의 둘째 딸 모리 야스코와 혼인했다.
1864년 금문의 변 당시 산조 사네토미 등을 따라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향했으나, 패배 후 야마구치로 돌아갔다. 막부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름도 히로아쓰로 되돌렸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모토노리로 개명했다.
2. 4. 메이지 유신과 신정부 참여
1868년 게이오 4년 2월 상경하여, 3월 의정에 취임했다. 1869년 메이지 2년 6월 4일 양부 다카치카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아 종3위 참의가 되었다. 취임 직후 판적봉환으로 지번사가 되었다. 1871년 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면직된 후, 도쿄로 이주했다. 이후 제15국립은행장, 공작,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2. 5. 사망
1896년 12월 23일 향년 57세로 사망했으며, 국장을 하사하고, 호는 忠愛公이다. 모리 모토노리는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로 이주하여, 제15국립은행두취, 공작,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3. 영전
모리 모토노리는 1884년 7월 7일 공작[12][2], 1887년 9월 21일 정2위[13][3], 1887년 9월 29일 금황수 포장[14][4]을 받았다. 1889년 11월 25일에는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5], 12월 27일 훈1등 서보장[6]을 받았다. 1890년 10월 21일 욱일대수장[15][7], 1895년 6월 17일 종1위[8], 1896년 12월 24일 욱일동화대수장[16][9]을 수여받았다. 사망 후 1896년 12월 26일 국장[10]이 거행되었으며 (장례 집행: 12월 30일[11]), 대례복을 착용한 모리 모토노리의 사진이 남아있다.
4. 가계도
(조슈번 조상)
(초후 1)
(초후 1)
(도쿠야마 1)
(초후 2)
(기요스에 1)
(초후 2)
(도쿠야마 3)
(도쿠야마 2)
(초후 3)
(기요스에 2/초후 6)
(초후 3)
(초후 4)
(도쿠야마 4)
(도쿠야마 5)
(초후 5)
(초후 8/초후 7)
(도쿠야마 6)
(이와쿠니 7)
(도쿠야마 7)
(초후 6)
(초후 9)
(초후 8)
(초후 10)
(우베후쿠하라 21)
(도쿠야마 8)
(초후 9)
(초후 10)
(초후 11)
(초후 11)
(우베후쿠하라 24)
(도쿠야마 9)
(다테바야시 번주)
(초후 14/공작)
(나리카네 정실)
(모토반 정실)
(초후 12)
(초후 12)
(초후 13)
(당주·공작)
(남작)
(분가·남작)
(간닌 양자·자작)
(킨모치 양자·공작)
(다카치카 정실)
(모토노리 정실)
(초후 14/자작)
(모토반 양자·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