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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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두산정계비는 백두산 장군봉과 대연지봉 사이 해발 2,150m 고지에 세워진 비석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1712년에 설치되었다. 비문에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기준으로 국경을 표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청나라 강희제의 요청에 의해 조선과 청나라가 합의하여 세워졌다. 설치 이후, 조선은 백두산에 대한 숭배 의식과 영토 인식을 강화했으며, 청나라는 만주 지역의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동위토문' 구절의 해석을 두고 간도 영유권 분쟁이 발생했다. 조선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청나라는 쑹화강 지류로 해석하면서 갈등을 겪었으며, 이는 간도 문제로 이어졌다.

백두산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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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계비의 위치와 현황

정계비는 백두산 장군봉(2,750m)과 대연지봉(2,360m) 사이 대략 중간 지점인 해발 2,150m 고지(高地)에 설치되었으며,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

이 비는 만주사변 발발 직전인 1931년 7월에 사라졌는데, 일본군이 철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비가 있던 자리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세운 표지석과 경계 표시를 위해 쌓았던 돌무더기 흔적만 남아 있다.

3. 정계비의 내용

비문에 대청(大淸)이라고 크게 우횡서로 쓰고, 그 밑에 그보다 작은 글씨로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고 세로로 새겼다.

이는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는 내용이다.

4. 설치 배경과 과정

청나라 강희제백두산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관심을 가졌고, 지리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며 조선에 백두산 일대 조사를 요구했다. 조선은 영고탑 회귀설 등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에 처음에는 청의 요구를 거부했으나, 1712년 강희제가 황명으로 공식 요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같은 해 청은 목극등을 사신으로 파견했고, 조선은 함경부사 이선부와 참판 박권을 접반사로 보내 혜산진에서 맞이하였다. 목극등은 이의복·조태상 등과 함께 음력 5월 15일 백두산에 올라 천지에서 수원(水源)을 찾고, 산정 남동쪽 4km 지점(해발 2,150m)의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그러나 정계비 설치 후,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쑹화강(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북평사 홍치중은 설책 공사 중지를 명하였지만, 정계에 참여한 이들은 책임 추궁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첫 번째 수원에서 안쪽으로 20리 가량 옮겨 설책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후 이 사실을 알았지만,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받고 다른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

4.1. 청나라 강희제의 관심과 초기 요구

청나라 강희제백두산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큰 관심을 가졌다. 1677년 음력 12월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봉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강희제는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면서 백두산 일대에 대한 자체 조사와 함께 조선에 비공식적으로 사계(査界)를 요구하였다.

4.2. 조선의 초기 대응과 수용

조선은 영고탑 회귀설 등 대청(對淸) 위기의식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청의 사계 요구를 거부하다가, 1712년 강희제가 황명으로 공식 요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4.3. 정계비 설치 과정

1712년(숙종 38년) 청나라는 목극등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조선에서는 함경부사 이선부와 참판 박권을 접반사로 파견하여 혜산진에서 맞이하였다. 목극등은 이의복·조태상 등과 함께 음력 5월 15일 백두산에 올라 천지(天池)에서 수원(水源)을 찾고, 산정(山頂)의 남동쪽으로 4km 지점인 해발 2,150m 지점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다.

4.4. 설책(設柵) 과정에서의 문제 발생과 조선의 대응

1712년(숙종 38년) 청나라 목극등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쑹화강(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 홍치중은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은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첫 번째 수원(水源)에서 안쪽으로 20리 가량을 옮겨 설책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받고 청의 다른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

5. 설치의 의의

백두산정계비 설치는 조선청나라 양국이 국경을 비(碑)로 명문화하고, 압록강두만강 사이 육지 지역인 백두산 천지 이남을 조선 영토로 확인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청나라는 1689년 러시아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북만주 국경을 안정시킨 데 이어, 이 비를 설치하여 조선과의 남만주 국경 및 청조의 발상지로 여겼던 백두산 등 봉금 지역의 국경을 명확히 하였다.

조선에서는 백두산정계비 설치 이후 백두산 숭배(崇拜) 의식과 영토 인식이 더욱 확고해졌고, 당대에는 영고탑회귀설 등에서 벗어나 청나라에 대한 불안감이 종식되었다.

5.1. 조선과 청나라 양국의 국경 명문화

조선청나라 양국은 국경을 명확히 비(碑)로 명문화하였고, 압록강두만강 사이 육지 지역인 백두산천지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청나라는 이 비의 설치로 1689년에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북만주 국경을 안정시킨 데 이어 조선과의 남만주 국경을 안정시키고, 청조의 발상지로 여겼던 백두산 등 봉금 지역의 국경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비 설치 이후 조선에서는 백두산에 대한 숭배(崇拜) 의식과 영토 인식이 더욱 확고해졌고, 당대에는 영고탑회귀설 등에서 벗어나 청나라에 대한 불안감이 종식되게 되었다.

5.2. 청나라의 입장

1689년 러시아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북만주 국경을 안정시킨 데 이어 조선과의 남만주 국경을 안정시키고, 청조의 발상지로 여겼던 백두산 등 봉금 지역의 국경을 명확히 하였다.

5.3. 조선의 입장

조선청나라 양국은 국경을 명확히 비(碑)로 새겨, 압록강두만강 사이 육지 지역인 백두산 천지 이남을 조선 영토로 확인했다는 의의가 있다.

백두산정계비 설치 이후 조선에서는 백두산 숭배(崇拜) 의식과 영토 인식이 더욱 확고해졌고, 당대에는 영고탑회귀설 등에서 벗어나 청나라에 대한 불안감이 종식되었다.

6. 정계비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19세기 후반, 조선청나라는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면서 간도 귀속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정계비 위치상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이므로 간도 일대가 조선 땅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6.1. 설치 당시 조선의 토문강 인식

숙종 시기 이조참의 이광좌는 "토문강이란 중국말로 두만강을 말한다"고 하였다. 정계비 설립 당시 청나라 사신 목극등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정한 '차관접대사의별단(差官接待事宜別單)'에도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같은 단어이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긍익연려실기술 같은 저술에서도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사계(査界) 당시 실록 내용을 보면, 조선은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천지(天池) 이남을 조선 영토로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계비 수립 당시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조선의 경계에 대해 묻자 역관 김지남이 '천지 이남은 조선의 경내'라고 답했고, 목극등은 이를 크게 다투거나 힐책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접반사 박권은 기뻐하며 조정에 보고하였다. 즉, 당시 조선은 천지(天池) 이남,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영토를 정하는 데 합의한 것을 성공적으로 평가했다.

6.2. 19세기 후반 이후의 상황 변화와 간도 문제 대두

19세기 후반, 조선청나라는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면서 간도 귀속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정계비 위치상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이므로 간도 일대가 조선 땅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정계비 해석 문제는 비가 설치된 지 약 170년 후인 고종 집권기(188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간도에는 세도정치 시기의 가혹한 수탈과 학정, 대흉년 등을 피해 19세기 초부터 이주한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간도는 1677년 이후 약 200년간 만주족 외에는 청나라 사람조차 거주가 금지된 청의 봉금 지역이었기 때문에 청나라 주민 수가 매우 적었고, 아편 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청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조선인들이 이주한 것이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외만주(연해주 등)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 '봉금령'을 폐지하고 지린의 장군 명안과 흠차대신 오대장을 보내 간도 개척에 나섰다.

이에 조선은 1883년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 김우식에게 정계비와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하고, 간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했다. 즉,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간도에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고 청나라가 쇠퇴한 1880년대 이후 조선은 '동위토문(東爲土門)'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며 간도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6.3. 토문 혹은 두만의 의미에 대한 최근 연구

최근 연구에 따르면 '토문(土門)'의 어원은 여진어구멍, 동굴, , 협곡 등을 뜻하는 보통명사라고 한다. 즉 토문강은 특정 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특징을 가진 하천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일 수 있다. 따라서 쑹화강(송화강)의 지류로서 토문강이 존재하더라도, 동위토문의 토문강이 두만강을 가리킬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