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밀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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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오밀칙은 1858년 일본 고메이 천황이 막부에 칙명을 내리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칙허 없이 조인한 것에 대한 자책과 막부의 국정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의 밀칙이 미토 번에 하달되었고, 이후 미토 번 내부의 갈등과 막부의 탄압,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막번 체제 붕괴와 존왕양이 운동, 메이지 유신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한국 근대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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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밀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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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 종류 | 정치적 사건 |
발생 시기 | 1862년 (조선 철종 13년) |
관련 인물 |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 |
관련 장소 | 조선 전역 |
배경 | |
시대적 상황 | 세도정치의 폐단 심화, 사회 혼란 가중 |
농민들의 불만 | 탐관오리의 횡포, 가뭄과 흉년으로 인한 생활고 심화 |
종교적 요인 | 동학의 창시, 민심 수습 및 사회 개혁 요구 증가 |
전개 과정 | |
밀칙의 발송 | 최제우가 최시형에게 밀지를 내려 전국 각지에 동학의 교리를 전파하고 조직을 확대하도록 지시 |
조직 확대 | 전봉준 등 동학 지도자들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세력 확장 |
정부의 탄압 | 동학 세력 확장에 대한 정부의 경계 및 탄압 시작 |
결과 및 영향 | |
동학농민운동의 발발 | 무오밀칙을 계기로 동학 세력이 확대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 |
사회 변혁의 요구 증대 | 농민들의 불만 표출 및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 증가 |
정부의 대응 | 동학농민운동 진압 과정에서 정부의 무능함 드러남 |
2. 밀칙 강하의 배경
안세이 5년(1858년) 8월 5일 심야, 고메이 천황이 막부에 칙명을 내릴 칙사를 파견할 뜻을 밝히자 조정에서 급히 조회가 열렸다. 7월에도 막부에 칙명을 내렸지만, 한 달 동안 회신이 없는 상황에서 또 칙명을 내려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제후들에게 직접 칙명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사쓰마 번이었으나, 한 달 전 개혁파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급사하였기 때문에, 차순위로 미토 번과 조슈 번에 칙명을 내리기로 결정되었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막부의 조정에 대한 잦은 무례를 경계하고, 근신 중인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막정 개혁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고메이 천황이 밀칙을 내렸다.
막부 측 관백 구조 히사타다가 참석하지 않은 채, 무가 전주 구카 다케미치, 마도노코지 마사후사의 설명에 따른 집행 봉승(사후 승인)만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밀칙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형식은 어디까지나 통상의 칙명과 같았다.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후, 막부의 조정에 대한 잦은 무례를 경계하고, 근신 중인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막정 개혁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칙명이 내려졌다.[1]
3. 밀칙의 내용 및 전달 과정
1858년 8월 5일 심야,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막부에 칙명이 내려질 것이라는 뜻이 전달되어 조정에서 급히 회의가 열렸다. 7월에도 막부에 칙명을 내렸지만, 한 달 동안 회신이 없었기에, 칙명을 제후들에게 직접 내리기로 결정되었다. 유력한 후보는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급사한 사쓰마 번 대신 미토 번과 조슈 번이었다. 막부 측 관백 구조 히사타다가 불참한 가운데, 무가 전주 구카 다케미치, 마도노코지 마사후사의 설명에 의한 집행 봉승(사후 승인)만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밀칙이라고 불린다.
8월 7일 심야, 무가 전주 마도노코지 마사후사의 저택에서 미토 번 교토 유수역 우카이 키치자에몬 도모노부에게 칙명이 전달될 예정이었으나, 키치자에몬의 지병 악화로 아들인 교토 유수역 보좌역 코우키치 도모아키가 대신 받았다.[1]
코우키치는 오사카 창고 하인으로 변장하고, 가마꾼으로 변장하여 빈 가마를 지고 도카이도를 잠행하여 16일 심야에 미토 번 도쿠가와 요시아츠에게 칙명을 전달했다. 사쓰마 번사 구사카베 이사미는 나카센도에서 하행했다. 이에 앞서, 사이고 기치노스케가 미토 번 가로 아지마 다이가에게 칙명 강하·제후 회송의 가부를 타진했지만, 아지마는 번의 혼란을 이유로 거절했다. 사이고가 교토로 돌아간 것과 엇갈려 우카이가 칙명을 가져왔기 때문에 아지마는 경악했다고 한다. 단, 사이고가 교토를 출발한 시점(8월 4일)과 밀칙 이야기가 고메이 천황 주변에서 발생한 시점(8월 5일)을 고려하면, 사이고 전설은 후일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나리아키는 칙명이 미토 번에 내려진 것을 듣고, 칙명이 히토쓰바시에 내려졌다면 제후에게 회송하고 막정 개혁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지만, 요시아츠로는 도저히 무리일 것이라고 말했다.[1]
막부에는 8월 10일에 긴리쓰케 오쿠보 이치오를 통해 칙명이 전달되었지만, 에도보다 미토에 먼저 도착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미토 번으로부터 삼가, 고산쿄에는 칙서가 회송되었지만, 그 외의 제후들에게는 막부의 명령에 의해 비밀에 부쳐졌다. 조슈 번이나 에치젠 번 등의 웅번에는 사본이 관백 이외의 섭가를 통해, 인척 관계에서 보내졌다.[1]
3. 1. 밀칙의 주요 내용
미일수호통상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 체결에 대해 칙허 없이 조인한 것을 자책하고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였다.[2] 또한, 어삼가 및 여러 번(藩)은 막부에 협력하여 공무합체를 이루고, 막부는 양이 추진을 위한 막정 개혁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 더불어, 이러한 내용을 미토번에서 다른 번에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2]
밀칙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오랑캐 가짜 조약이 아무런 여유도 없이, 순서도 없이 가나가와에서 조인되어 사절에게 건네진 일, 더욱 자세한 것은 간부인 시모후사노카미가 상경하여 보고한 내용과 같습니다만, 앞서 칙답으로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도록 하신 취지조차 없었습니다. 진실로 황국의 중대한 일임에도 조인 후에 보고하고, 쇼군(大樹公)의 혜안을 엿보려는 의도도 맞지 않아, 더욱이 칙답의 순서에도 어긋나는 경솔한 조치에, 쇼군의 현명함에, 유사의 마음가짐이 어떠한지 의심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랑캐나 오랑캐의 일은 잠시 제쳐두고, 지금 국내의 치란이 어떠한지 다시 깊이 고뇌하고 있습니다. 부디 공무(公武)의 진심을 다해, 함께 영원히 안전하도록 하려는 뜻으로 간절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가 또는 다이로(大老)가 상경하도록 하였으나, 미토(水戶)와 오와리(尾張) 두 가문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며, 또한 그 밖의 황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조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어떤 죄상에 해당되는 것인가. 헤아려보건대, 류에이(柳營)를 돕는 이들, 지금 외적이 점점 더 입항하기 어려운 시기에, 이미 인심의 귀향에도 구애받을 수밖에 없어 마음이 괴로우십니다. 겸하여 삼가 이하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도록 하신 취지, 완전히 영세 안전과 공무(公武)의 합체로, 혜안을 편안하게 하시려는 뜻, 외적의 계략에도 없는, 내우(內憂)가 있어서 더욱 마음이 깊이 괴로우십니다. 이리하여 국가의 대사(大事)이니, 다이로(大老) 각로(閣老) 그 밖에 삼가, 삼경(三卿) 가문 및 반(藩) 밖의 자손들과 대대로 섬긴 자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고, 성충(誠忠)의 마음으로, 옳게 정하고, 국내의 치평(治平)과 공무(公武)의 합체, 더욱 오래도록 번영하도록, 도쿠가와(德川) 가문을 돕고 내정을 다스려, 외적의 침입을 막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 속히 협의할 칙전의 일입니다.|ko|지난번 오랑캐 가짜 조약이 아무런 여유도 없이, 순서도 없이 가나가와에서 조인되어 사절에게 건네진 일, 더욱 자세한 것은 간부인 시모후사노카미가 상경하여 보고한 내용과 같습니다만, 앞서 칙답으로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도록 하신 취지조차 없었습니다. 진실로 황국의 중대한 일임에도 조인 후에 보고하고, 쇼군(大樹公)의 혜안을 엿보려는 의도도 맞지 않아, 더욱이 칙답의 순서에도 어긋나는 경솔한 조치에, 쇼군의 현명함에, 유사의 마음가짐이 어떠한지 의심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랑캐나 오랑캐의 일은 잠시 제쳐두고, 지금 국내의 치란이 어떠한지 다시 깊이 고뇌하고 있습니다. 부디 공무(公武)의 진심을 다해, 함께 영원히 안전하도록 하려는 뜻으로 간절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가 또는 다이로(大老)가 상경하도록 하였으나, 미토(水戶)와 오와리(尾張) 두 가문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며, 또한 그 밖의 황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조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어떤 죄상에 해당되는 것인가. 헤아려보건대, 류에이(柳營)를 돕는 이들, 지금 외적이 점점 더 입항하기 어려운 시기에, 이미 인심의 귀향에도 구애받을 수밖에 없어 마음이 괴로우십니다. 겸하여 삼가 이하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도록 하신 취지, 완전히 영세 안전과 공무(公武)의 합체로, 혜안을 편안하게 하시려는 뜻, 외적의 계략에도 없는, 내우(內憂)가 있어서 더욱 마음이 깊이 괴로우십니다. 이리하여 국가의 대사(大事)이니, 다이로(大老) 각로(閣老) 그 밖에 삼가, 삼경(三卿) 가문 및 반(藩) 밖의 자손들과 대대로 섬긴 자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고, 성충(誠忠)의 마음으로, 옳게 정하고, 국내의 치평(治平)과 공무(公武)의 합체, 더욱 오래도록 번영하도록, 도쿠가와(德川) 가문을 돕고 내정을 다스려, 외적의 침입을 막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 속히 협의할 칙전의 일입니다.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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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 번에 별지 첨부 서신】 칙전의 취지 분부하신 내용, 이것은 국가의 대사(大事)는 물론, 도쿠가와 가문을 돕고자 생각하시는 바, 회의를 열어 안전하도록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특별히 생각하시어 분부하셨으니, 유 같은 반열의 분들, 삼경 가문의 무리들 이상 은거에 이르기까지, 열번(列藩) 모두 뜻을 헤아리도록 각 방면에 전달하도록 분부하신 바입니다.|ko|【미토 번에 별지 첨부 서신】 칙전의 취지 분부하신 내용, 이것은 국가의 대사(大事)는 물론, 도쿠가와 가문을 돕고자 생각하시는 바, 회의를 열어 안전하도록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특별히 생각하시어 분부하셨으니, 같은 반열의 분들, 삼경 가문의 무리들 이상 은거에 이르기까지, 열번(列藩) 모두 뜻을 헤아리도록 각 방면에 전달하도록 분부하신 바입니다.일본어
3. 2. 밀칙의 전달 과정
안세이 5년(1858년) 8월 5일 심야,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막부에 칙명이 내려질 것이라는 뜻이 전달되어 조정에서 급히 회의가 열렸다. 7월에도 막부에 칙명을 내렸지만, 한 달 동안 회신이 없었기에, 칙명을 제후들에게 직접 내리기로 결정되었다. 유력한 후보는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급사한 사쓰마 번 대신 미토 번과 조슈 번이었다. 막부 측 관백 구조 히사타다가 불참한 가운데, 무가 전주 구카 다케미치, 마도노코지 마사후사의 설명에 의한 집행 봉승(사후 승인)만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밀칙이라고 불린다.
미토 번에 내려진 칙명은 8월 7일 심야, 무가 전주 마도노코지 마사후사의 저택에서 미토 번 교토 유수역 우카이 키치자에몬 도모노부에게 전달될 예정이었으나, 키치자에몬의 지병 악화로 아들인 교토 유수역 보좌역 코우키치 도모아키가 대신 받았다. 코우키치는 고노에 다다히로로부터 이 칙명이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후, 막부의 조정에 대한 잦은 무례를 경계하고, 근신 중인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막정 개혁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1]
코우키치는 오사카 창고 하인으로 변장하고, 가마꾼으로 변장하여 빈 가마를 지고 도카이도를 잠행하여 16일 심야에 미토 번 도쿠가와 요시아츠에게 칙명을 전달했다. 사쓰마 번사 구사카베 이사미는 나카센도에서 하행했다. 이에 앞서, 사이고 기치노스케가 미토 번 가로 아지마 다이가에게 칙명 강하·제후 회송의 가부를 타진했지만, 아지마는 번의 혼란을 이유로 거절했다. 사이고가 교토로 돌아간 것과 엇갈려 우카이가 칙명을 가져왔기 때문에 아지마는 경악했다고 한다. 단, 사이고가 교토를 출발한 시점(8월 4일)과 밀칙 이야기가 고메이 천황 주변에서 발생한 시점(8월 5일)을 고려하면, 사이고 전설은 후일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리아키는 칙명이 미토 번에 내려진 것을 듣고, 칙명이 히토쓰바시에 내려졌다면 제후에게 회송하고 막정 개혁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지만, 요시아츠로는 도저히 무리일 것이라고 말했다.[1]
막부에는 8월 10일에 긴리쓰케 오쿠보 이치오를 통해 칙명이 전달되었지만, 에도보다 미토에 먼저 도착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미토 번으로부터 삼가, 고산쿄에는 칙서가 회송되었지만, 그 외의 제후들에게는 막부의 명령에 의해 비밀에 부쳐졌다. 조슈 번이나 에치젠 번 등의 웅번에는 사본이 관백 이외의 섭가를 통해, 인척 관계에서 보내졌다.[1]
4. 밀칙 이후의 정국 변화
밀칙 강하 이후, 막부는 밀칙이 미토번의 음모라고 판단하여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도쿠가와 나리아키에게는 미토에서의 영금거, 도쿠가와 요시아츠에게는 사히카에 처분을 내렸다.[1] 막부는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미토번에 칙서를 반납하도록 명령했고, 미토번 내에서는 칙서 반납론이 우세해졌다.[1]
하지만 칙서 반납에 반대하는 세력은 미토 가이도의 나가오카 숙에 집결하여 길을 막고 칙서 반납을 저지하려 했다.[1] 칙서 반납이 결정된 후에도 반대파의 저항으로 혼란이 계속되었고, 결국 일부는 탈번하여 에도로 향하여 1860년 3월 24일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을 일으켰다.[1] 이 사건으로 인해 칙서 반납 문제는 흐지부지되었고, 칙서는 미토에 남게 되었다.[1]
4. 1. 미토번 내부의 갈등과 분열
미토번은 번 창설 이래 번주에게 충실한 개혁파(존왕양이파)와 막부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보수 문벌파(쇼세이토) 간의 대립이 격렬했다. 밀칙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개혁파 내부에서도 밀칙대로 칙서를 여러 번에 회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로 다케다 고운사이를 중심으로 한 존양이 격파(후의 텐구당)와, 칙서는 조정 또는 막부에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이자와 마사시사이를 중심으로 한 존양이 진파로 분열되어 격렬하게 대립했고, 삼파전의 혼돈스러운 번의 상태로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게 된다.[1]막부는 미토번에 대해 칙서를 여러 번에 회송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명령한 데 이어 칙서 자체를 조정에 반납할 것을 요구했다. 칙서 반납에 반대하는 격파의 번사나 영민들은 안세이 5년 9월과 안세이 6년 5월에 고가네 숙에 집결(제1차 및 제2차 고가네 둔집)하여 칙서 반납을 저지하기 위해 기세를 올렸다. 이에 대해 요시아츠는 가로 오바 야에몬, 군 봉행 카네코 손지로 등을 파견하여 진무에 힘썼지만, 억누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1]
안세이 6년 8월 27일(1859년 9월 23일), 막부는 밀칙은 천황의 뜻이 아니라 미토번의 음모라고 하여 밀칙 강하에 관여한 가로 아지마 타이다를 할복, 오쿠 유히츠 카야네 이요노스케, 교토 루스이 역 우카이 키치자에몬을 참수, 교토 루스이 역 조역 동행길을 옥문, 간조 봉행 아야자와 이타다유를 원도로 하고, 나리아키는 미토에서의 영금거, 요시아츠는 사히카에로 했다(안세이 대옥).[1]
같은 해 12월에 막부가 조정에 작용하여 미토번에 대해 칙서를 막부에 반납할 것을 명령했고, 미토번 내에서는 반납론이 주류가 되었지만, 격파는 미토 가이도의 나가오카 숙에 수백 명이 집결하여 가이도를 봉쇄(나가오카 둔집)하고, 칙서의 반납을 실력 저지하려 했다. 칙서는 역대 번주의 묘소 안에서 엄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듬해 안세이 7년 2월에 칙서 반납이 정식으로 결정되었지만, 성 아래에서 격파와 진파가 칼부림하는 소동이 일어나거나, 사이토 류지로가 반납 반대를 호소하며 미토 성 내에서 할복하는 등의 혼란이 있어 반납은 연기되었다. 나가오카 숙에 둔집하는 격파에 대해 무력 진압 움직임이 일어나자, 격파의 일부는 탈번하여 에도로 향했고, 안세이 7년 3월 3일(1860년 3월 24일)에 이이 다이로를 습격하게 된다(사쿠라다몬 밖의 변). 변 후의 혼란으로 인해 반납 문제는 흐지부지하게 되었고, 칙서는 미토에 남겨졌다.[1]
5. 밀칙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무오밀칙은 일본 근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 역사적 의의와 평가는 복합적이다. (요약 및 원본 소스 부족으로 상세 내용 작성 불가)
5. 1. 한국에 미친 영향 (별도 주제)
(요약 또는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무오밀칙'이 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참조
[1]
문서
勅諚全文でも「三卿」となっているが、御三卿の1つである清水徳川家は当時、当主不在が続き、屋敷・所領・家臣などは幕府に収公される明屋敷という休眠状態になっていた
[2]
문서
薩摩藩から兵200から300人が上京し、彦根城を落城させるというもので、伊地知正治からの伝聞として、長野主膳から井伊へ宛てた手紙に記載があるの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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