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상
1. 개요
윤필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와 성종 때 활약했다. 144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세조 즉위 후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승정원 도승지를 거쳐 이시애의 난 평정에 기여하여 파평군에 봉해졌다. 이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좌의정을 거쳐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를 토벌하는 등 공을 세웠다. 사림파의 공격을 받고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사림을 숙청했으며,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해 사사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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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원수 -
권율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무장인 권율은 안동 권씨 출신으로,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승리하는 등 활약하여 도원수에 올랐으며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도 기여,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인물이다. -
조선의 도원수 -
김명원
김명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이황의 문인이었으며, 정여립 모반 사건 수습 공로와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를 지낸 후 여러 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고 재상으로 평가받았다. -
갑자사화 관련자 -
방유령
방유령은 1460년에 태어나 1529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갑자사화로 파직되었으나 복귀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훈구파이면서 사림파를 두둔하는 등 복잡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갑자사화 관련자 -
연산군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은 초기 국방 강화와 빈민 구제에 힘썼으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자행하여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폭정, 한글 탄압, 사찰 훼손, 방탕한 사생활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좌리공신 -
신숙주
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언어학자, 외교관, 정치인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세조 즉위 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외교와 국방에 기여했으며, 《해동제국기》, 《동국정운》 등의 저술을 남기고 영의정을 지냈다. -
좌리공신 -
윤사흔
윤사흔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정희왕후의 동생이자 왕족 및 사대부와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음보로 관직에 입문하여 계유정난과 성종 옹립에 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되고 영돈녕부사에 이르렀으나 훈척으로서 병권 운영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우의정, 영경연사를 역임 후 사망하여 양평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2.1.1. 출생과 가계
소정공 윤곤(尹坤)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증찬성(贈贊成) 희제(希齊)이고 아버지는 참판 윤경(尹坰)이며, 어머니는 이목(李霂)의 딸이다. 세조비 정희왕후의 일족이며,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 윤호는 그의 당숙부로 성종대의 실력자였다.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부마인 윤사로는 그의 숙부 윤은(尹垠)의 아들로, 그의 사촌형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했으며 한번 본 것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다. 몸집은 작았으나 대담하고 지혜가 많았다. 세종의 서녀(庶女)인 정현옹주는 윤필상의 사촌형 윤사로와 결혼하였으므로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2.1.2. 수학과 과거
그러나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아 세종 때인 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50년(문종 1년) 추장 문과(秋場文科)에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2년) 저작이 되고 1455년 세조 찬위 직후 호조좌랑을 거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경연청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젊어서는 가난했지만, 총명 기민하여 행동이 민첩하였다.
2.2. 정치 활동
2.2.1. 세조 즉위 후
145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62년에는 서연관으로 세자에게 맹자를 강의하였으며
1463년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 이후 도승지 등을 지내면서 세조를 가까이 모셔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63년 동부승지가 된 뒤 형방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의 측근에서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형방승지로 있을 때 날씨가 매우 춥자 경향에 있는 죄수들을 낱낱이 상고하여 작은 책자에 기록하여두었다가 세조의 죄수현황을 묻는 물음에 즉시 응답함으로써 신임을 두터이 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관직은 계속 승진하게 된다. 이후 왕명 출납을 잘 처리하여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기도 했다. 1464년수궁 승지(守宮承旨)를 지냈고, 이후 다시 승정원좌승지와 좌부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2.2.2.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 토벌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승정원 도승지로서 왕명의 출납을 신속히 처리하였고, 난이 평정되자 반란의 기밀을 미리 알아낸 공과 사건을 신속히 처리한 공으로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으로 특진하고,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1등관으로 파평군(坡平君)에 봉군되었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1등(軍功一等)에 녹훈되고 2자급 특진하였다.
같은 해 파저강(婆猪江)에 사는 야인(野人)을 토벌한 개선군을 위유(慰諭)하고 이듬해 안주 선무사(安州宣撫使)로서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같은 해 세조가 죽자 3년간 광릉(光陵:세조의 능) 수묘관(守墓官)으로 있었다. 같은 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다.
2.2.3. 성종 즉위 이후
1471년 경상도에 가뭄과 한재(旱災)가 들어 기근이 심해지자 우찬성(右贊成)으로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기민을 구제하였으며, 다시 경상도 관찰사에 겸직 발령되어 이듬해까지 기민을 구제한 공으로 모피(毛衣)·녹피화(鹿皮靴)를 하사받았다. 1474년 이조판서, 의금부당상(義禁府堂上)을 겸직하다가 한명회, 노사신 등 권신들이 이조(吏曹)의 권한인 인사권(人事權)에 개입, 간섭이 심하므로 이에 반발하여 사직하고 일시 은퇴하였다.
곧 복직, 1475년에는 회간왕의 부묘를 종묘에 배향하는 문제를 논의하는데 참석하였다. 1477년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사복을 채웠다고 하여 삼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곧 풀려나와 복직하고 좌찬성이 되었다. 좌찬성으로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던 도중에 건주위(建州衛) 야인(野人)들의 정세(政世)를 자세히 탐지하여 보고하였고,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479년(성종 9년) 명나라가 건주위를 칠 때, 의정부좌의정으로 서정 도원수가 되어 김교(金嶠)·이종생(李從生) 등과 함께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도와 싸웠으며, 건주위를 크게 무찔렀다. 이 때 많은 적의 장수를 죽였고 많은 수의 포로를 사로잡아왔는데, 이 공로로 그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받기도 하였다.
2.3. 생애 후반
2.3.1. 사림파와의 갈등
사림파는 삼사를 장악한 뒤 상소 등의 방법으로 훈구파에 공격을 가했다. 이 중 윤필상을 공격한 사람은 김종직의 제자인 성균관 유생 이목이었다. 1493년 초 그는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당대의 권세가인 영의정 윤필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 일로 윤필상은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되고, 훗날 무오사화 때 그가 사림파의 제거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2.3.2. 무오사화
연산군 즉위 직후 그는 기로소에 들어갔고, 1496년(연산군 2년) 연산군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는 등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98년(연산군 4년)에는 이극돈, 유자광 등과 함께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김일손, 권오복, 정여창 등 신진사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했다. 이때 과거에 자신을 불교 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라고 탄핵했던 정적 이목도 김종직의 문인으로 엮어 제거했다. 이때 김굉필, 남곤, 정광필 등도 함께 축출해버린다.
2.3.3. 갑자사화와 죽음
1504년(연산군 10년)에 폐비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로 추죄(追罪)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윤 4월 19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했으며, 사약을 받았으나 사약을 마셔도 목숨이 끊기지 않자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한다. 향년 77세였다.
그해 5월 23일에는 그의 아들 윤숙(尹俶)·윤위(尹偉)·윤준(尹俊) 등이 모두 참형당하고, 그 뒤 그의 가까운 친척들까지도 연좌되어 파직당하거나 관직 임용에서 제한당했다.
3. 사후
윤필상은 유배지에서 죽었는데, 그의 시체는 열흘 동안 들판에 방치되었다. 시체를 수습하여 장사지내는 이가 없었으며, 까마귀와 솔개가 먹지 않았고 이웃 개도 돌아보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진도의 지식인들조차 지나가며 그의 시체를 보고 조롱했다고 한다. 한참 뒤 누군가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는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4. 가족 관계
친고조부는 윤승순(尹承順)이며, 종고조부는 윤승례(尹承禮)이다. 6촌 증조부는 윤번(尹璠)으로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친증조부는 윤곤(尹坤, ? ∼ 1422)이다. 친조부는 윤희제(尹希齊)이다. 아버지는 윤경(尹坰)이고, 어머니는 이목의 딸이다. 처부는 판관 성허(成栩)이고, 부인은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성허의 딸이다. 장남은 참의(參議)를 지낸 윤간(尹侃)이고, 차남은 승지(承旨)를 지낸 윤숙(尹俶)이다. 장녀 사위는 목사(牧使) 신조의(辛祖義)이고, 차녀 사위는 군수(郡守) 김진(金震)이며, 삼녀 사위는 현감(縣監) 지준(池浚)이다. 외손자는 지영수(池永洙)이며, 외고손자는 지여해(池汝海)와 지덕해(池德海)이다. 숙부는 윤은(尹垠)이며, 사촌은 세종대왕의 서녀 정현옹주의 부마인 윤사로(尹師路)이다. 종조부는 윤삼산(尹三山)이고, 당숙은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윤호(尹壕)이다. 6촌은 윤은로(尹殷老), 윤탕로와 정현왕후이다.
5. 평가와 비판
윤필상은 무오사화 때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는 구절을 문제삼아 김종직의 제자들을 제거하는데 일조했으며 이 때문에 갑자사화로 희생되었어도 동정받지 못했다. 사림파 외에도 그는 임금의 뜻에만 잘 영합하였다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5.1. 긍정적 평가
5.2. 부정적 평가
6. 관련 작품
* 1984년~1985년 MBC 드라마 설중매에서는 배우 박영지가 윤필상 역을 연기하였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배우 반문섭이 윤필상 역을 연기하였다.
* 1998년~2000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최병학이 윤필상 역을 연기하였다.
* 2011년~2012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배우 윤철형이 윤필상 역을 연기하였다.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배우 최용민이 윤필상 역을 연기하였다.
* 1985년 영화 어우동에서는 배우 신충식이 윤필상 역을 연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