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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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지은 글로, 항우에게 살해된 초 회왕을 조상하는 내용이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김종직은 세조 치세에 등용되어 형조판서까지 올랐으며,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조의제문을 기록하면서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하고 문집이 소각되는 등 사림파가 큰 피해를 입었다. 허균은 김종직의 행적을 비판하며 그의 위선을 지적했으나, 이러한 평가는 당대와 후대에 논란을 일으켰다.
김종직은 조선의 성리학자로, 1459년 세조 때 과거에 합격하여 1489년 성종 때 형조판서까지 지냈다.[1] 세조는 훈구파의 권력 장악을 견제하기 위해 정몽주, 길재, 김숙자의 문인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1459년 세조 5년에 과거에 합격한 김종직은 1489년 성종 20년 형조판서에 올랐다.[1] 세조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정몽주, 길재, 김숙자의 문인들을 등용했다.
2. 생애와 사상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살해된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김종직은 1498년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의 문집은 소각되었으며, 제자들은 화를 입었다.
2. 1. 관직 생활
김종직은 조선의 성리학자로 1459년 세조 5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1489년 성종 20년에 형조판서까지 벼슬을 하였다.[1] 세조는 훈구파의 권력 장악을 두려워하여 1459년(세조 5년) 김종직의 과거 급제 이후 정몽주, 길재, 김숙자의 문인들을 서서히 등용하기 시작했다.
2. 2.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은 조선의 성리학자로 1459년 세조 5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1489년 성종 20년에는 형조판서까지 벼슬을 하였다.[1] 세조는 훈구파의 권력 장악을 두려워하여 정몽주, 길재, 김숙자의 문인들을 1459년 자신의 과거 급제 이후 서서히 등용하기 시작한다.
3. 조의제문과 무오사화
항우에게 살해되어 물에 던져진 의제를 조상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로, 세조의 자손들에게는 정통성 부정으로 받아들여졌다. 연산군은 실록에서 이 내용을 확인하고 분노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1498년 연산군 4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 사초에 조의제문을 실은 것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그의 문집은 소각되었으며, 제자들은 참화를 당했다.[1]
3. 1. 조의제문의 내용과 해석
정축년(1457년) 10월, 김종직은 밀성(밀양시)에서 경산(성주군)으로 가던 중 답계역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꿈에 칠장 의복을 입은 헌칠한 모습의 신(神)이 나타나 자신을 초나라 회왕의 손자 심(心)이라 소개하며,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고 말했다. 김종직은 꿈에서 깨어 놀라며,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고 자신은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과 시대가 다른데 꿈에 나타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했다. 또 역사서에 강에 잠겼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항우가 비밀리에 회왕을 죽이고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이라 추측하며 조의제문을 지었다.[2]
유자광은 조의제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1]
구절 | 해석 |
---|---|
정축 10월 | 단종이 사망한 1457년 (정축년) 10월 |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 | 조룡은 진시황인데, 김종직이 진시황을 세조에게 비유한 것이다. |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 |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김종직은 의제를 단종에게 비유한 것이다. |
양흔 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 | 김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계유정난 시 살해당함.)를 벤 것에 비유한 것이다. |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 도끼)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 | 김종직이 단종이 왜 세조를 진작에 제거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
반서(反噬;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을 도리어 해치는 것을 일컫는 말)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 | 단종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다. |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 | 김종직이 주희(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
3. 2. 무오사화의 발발
김종직은 조선의 성리학자로 1459년 세조 5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1489년 성종 20년에는 형조판서까지 벼슬을 하였다.[1] 세조는 훈구파의 권력 장악을 두려워하여 1459년(세조 5년) 김종직의 과거 급제 이후 정몽주와 길재, 김숙자의 문인들을 서서히 등용하기 시작한다.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의제)을 조상한다는 내용의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꼬는 내용이었다. 이는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단종에 대한 상황 묘사와 유사한 면이 있어 세조의 자손들은 정통성을 부정당하는 내용이었다. 실록을 열어보고 이 내용을 확인한 연산군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며 사관들에게 따졌고, 이는 그대로 사화로 발전하게 된다.
1492년 김종직이 죽은 지 6년 후 1498년 연산군 4년에 제자 김일손이 이것을 성종실록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은 부관참시(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4. 후대의 평가
허균은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것에 대해 '김종직론'이라는 글을 통해 비판하였다. 허균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짓고 주시를 지은 것을 가소로운 일이라 평하며, 그의 행동이 위선적이라고 주장했다.[1] 이러한 허균의 비판은 당대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정조 때에는 허균의 저작물이 불온서적으로 간주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
4. 1. 부정적 평가
허균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이는 당대에도 큰 논란을 일으켰다. 허균의 비판은 '김종직론'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정조 때까지 허균의 저작물이 불온서적으로 간주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4. 1. 1. 허균의 비판
교산 허균은 점필재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꼰 것에 대해 '김종직론'이라는 글을 통해 조롱하였다. 허균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그 밑에서) 벼슬을 했다면 그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라고 비꼬았다.[1]金宗直論|김종직론중국어에서 허균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천하에 이록(利祿)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군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
>
> 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록과 명망이겠는가. 이미 이록을 취하였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영화와 녹봉을 누린다면, 정말로 자기의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자기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일에 맞도록 하여야 그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영화와 녹봉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그 수레를 붉게 꾸미고 그 인끈을 붉게 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의 죄악은 죽음을 당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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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유(大儒)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세조(世祖)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다그치니 부득이해서 과거에 올랐으며, 또한 시종(侍從)의 직책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는 모친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일컬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세상을 마쳤으나,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그의 문인(門人) 김굉필(金宏弼)이 더러 그가 시정책을 건의하지 않음을 간(諫)하면, 이어서,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김종직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며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인끈을 붉게 한다고 말해지는 바의 사람이었다.
>
> 계유정란(癸酉靖亂)을 당하여, 김종직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 무리들처럼 녹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金時習)처럼 평소에 은택(恩澤)을 입었던 것도 없었다. 다만 시골의 변변찮은 한 선비여서 옛 임금 단종(端宗)을 위하여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으니, 그가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본래 위선이었다. 비록 위선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기를 맹세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화(禍)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해서는 붓을 귀에 얹고 임금의 말을 기록했으며, 사책(史策)을 끼고 고운 털자리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 그의 어머니를 봉양했으니, 그가 이록을 취했던 것은 정도를 넘었었다. 또 명호(名號)를 훔치고 싶어 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버이가 있다. 그러나 끝내는 서산(西山)의 뜻을 지키리라.” 하였다.
>
>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복제(服制)를 벗고도 응교(應敎) 벼슬을 받았었고, 10년 동안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뛰어올랐다. 그만 쉴 만도 하나 오히려 더 탐내며 떠나가지 않았다. 책임을 완수치 못하면서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다가, 문인(門人)이 그 점을 지적해 주면 모면하려고 꾸며대는 말로써 대답하였다. 이게 과연 군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수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
>
>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家學)을 주워모으고 문장 공부를 해서 스스로 발신(發身)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교활하여 그의 명망을 높이려고 한 세상 사람을 용동(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미혹되게 하여 이록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자기의 재능을 헤아리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자신의 졸렬을 감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
>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때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1]
허균의 이러한 풍자는 당대의 논란거리가 되어 정조 때까지 허균의 서적이 불온서적으로 몰리는 원인이 되었다.[1]
5.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어 조선 사회에 정치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김종직은 무오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를 당했고, 그의 문집은 소각되었으며, 제자들은 참화를 당했다.
5. 1. 정치적 영향
김종직은 조선의 성리학자로 1459년 세조 5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1489년 성종 20년에는 형조판서까지 벼슬을 하였다.[1] 세조는 훈구파의 권력 장악을 두려워하여 김종직의 과거 급제 이래 정몽주, 길재, 김숙자의 문인들을 서서히 등용하기 시작한다.조의제문의 내용은 항우에게 살해되어 물에 던져진 회왕(의제)를 조상한다는 제문이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꼬는 내용으로 해석되었다. 이는 살해되어 물에 던져진 단종의 상황과 유사하여 세조의 자손들은 정통성을 부정당하는 내용이었다. 실록을 확인한 연산군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며 사관들에게 따졌고, 이는 그대로 사화로 발전하게 된다.
1492년 김종직이 죽은 지 6년 후 1498년 연산군 4년에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성종실록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5. 2. 사상적 영향
김종직은 조선의 성리학자로 1459년 세조 5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1489년 성종 20년에 형조판서까지 벼슬을 하였다.[1] 세조는 훈구파의 권력 장악을 두려워하여 정몽주, 길재, 김숙자의 문인들을 서서히 등용하기 시작했다.1498년 연산군 4년, 김종직이 죽은 지 6년 후 그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 사초에 조의제문을 적어 넣은 것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의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제자들은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참조
[1]
문서
아래 조의제문 출처와 동일
[2]
웹인용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1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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