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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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농지는 일본 미노 국에서 시작된 전통적인 종이로, 8세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헤이안 시대에 종이 규격이 정해지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널리 사용되지 않다가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을 거치며 저렴한 가격으로 유통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생산량이 증가하며 널리 알려졌고, 2014년에는 유네스코 무형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미농지는 본미농지, 미농 수제 화지, 미농 기계 제지 화지 등으로 분류되며, 기후시의 전통 공예품 제작에도 사용된다. 미농지의 크기는 미농판, 대미농판으로 나뉘며, JIS B열 종이 규격의 기원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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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미농지(美濃紙)는 8세기 일본 나라 시대 미노 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고품질 종이이다.[1] 헤이안 시대에는 종이 규격(크기, 색상 등)이 처음 제정되면서 정부 관료들이 파견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지만,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을 거치며 저렴한 미농지가 널리 사용되었다. 당시 미노 국 슈고였던 도키 씨는 지역과 권력 강화를 위해 산업과 종이 생산을 장려했다. 승려와 공경 계급 구성원들이 종이를 사용하고 고향으로 가져가면서 유통이 증가했고, 상인들도 일본 전역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에는 종이 판매 규정이 시행되었고, 특별 생산 지역으로 더욱 번성했다. 쇼지 등 일반적인 용도로 사용이 증가하면서 생산량이 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69년 4월 15일, 본미농지 기술은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6], 본미농지 보존회가 중요 무형 문화재 보존 단체로 인정받고 있다.[9] 1985년 5월 22일에는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에 의해 전통적 공예품으로 지정되었다.
2014년 11월 26일, 세키슈 한시(시마네현 하마다시), 호소가와지(사이타마현 오가와마치, 히가시치치부촌)와 함께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7]
2. 1. 기원
미농지(일본어: 美濃紙 (みのし))는 8세기 일본 나라 시대 미노 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고품질 종이이다.[1] 이 종이의 일부는 현재 나라현 나라시 쇼소인에 보존되어 있다.[1] 헤이안 시대에는 종이 규격(크기, 색상 등)이 처음으로 제정되면서 정부 관료들이 이 지역에 파견되었다.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미농지가 많이 사용되지 않았으나,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을 거치며 저렴한 미농지가 널리 사용되었다. 당시 미노 국 슈고였던 도키 씨는 지역과 권력 강화를 위해 산업과 종이 생산을 장려했다. 많은 승려와 공경 계급 구성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종이를 사용하고 고향으로 가져가면서 유통이 증가했고, 상인들도 일본 전역에 종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에는 종이 판매 규정이 시행되었고, 이 지역은 특별 생산 지역으로 더욱 번성했다. 쇼지 등 일반적인 용도로 종이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했고, 널리 알려진 종이가 되었다.
2014년 유네스코는 이 종이를 무형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했다.[2]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는 702년 다이호 율령 때 미노 국, 치쿠젠 국, 부젠 국에서 뜬 호적 용지로 여겨진다.[8][9] (쇼소인 문서에 미노 종이가 기록되어 있다.[10])
나라 시대 미노 국 국부 소재지(후와 군 타루이 정)에는 타루이 샘의 맑은 물을 이용한 관설 초지장(종이를 뜨는 곳)인 지야(紙屋, 종이 가게)가 있어 미농지 발상지로 불린다.[11] 미노 국 화지 생산은 국부를 중심으로 후와 군, 모토스 군, 아츠미 군 3군에서 이타도리 강 하류로 이동했다.[12]
2. 2. 중세
가마쿠라 시대 초반에는 미농지(Mino washi)가 상대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저렴한 미농지의 사용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1] 당시 미노 국의 슈고였던 도키 씨는 지역과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업과 종이 생산을 장려했다. 일본의 많은 승려와 공경 계급 구성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종이를 사용하고 고향으로 가져가면서 종이의 유통이 증가했다. 결국 상인들도 일본 전역에 종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1]무로마치 시대에는 미노에서 육세시가 열렸고, 미노지는 오미 상인에 의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1]
2. 3. 근세
나라 시대에 미노 국에서 처음으로 고품질의 종이가 만들어졌으며, 이 종이의 일부는 현재 나라현 나라시의 쇼소인에 보존되어 있다.[1] 헤이안 시대에는 종이의 규격(크기, 색상 등)이 처음으로 제정되면서 정부 관료들이 이 지역에 파견되었다.가마쿠라 시대 초반에는 미농지가 상대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저렴한 미농지의 사용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미노 국의 슈고였던 도키 씨는 지역과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업과 종이 생산을 장려했다. 일본의 많은 승려와 공경 계급 구성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종이를 사용하고 고향으로 가져가면서 종이의 유통이 증가했다. 결국 상인들도 일본 전역에 종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에는 종이 판매에 관한 규정이 시행되었고, 이 지역은 특별한 생산 지역으로 더욱 번성했다. 종이의 용도가 증가함에 따라(예: 쇼지 등 일반적인 용도) 생산량이 증가했고, 널리 알려진 종이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전매 제도로 인해 양질의 화지가 대량 생산되었고, 『화한삼재도회』에서는 "가장 좋은 것", 『신선지감』에서는 "모든 창호지의 종류에서 미농지를 최고로 친다"고 평가받아 화지의 대명사가 되었다.[12]
테라오 (현재의 기후현세키시 테라오)에서 생산되는 화지는 특히 유명하며, 『화한삼재도회』에서는 창호지용 서원지, 포장지, 등롱용으로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신선지감』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어용 제지 장인으로 이치에몬, 고에몬, 헤이하치, 주베에의 이름을 꼽고 있다.
또한 테라오 외에도 마키타니, 호라도, 이와사, 타니구치에서 생산되는 것도 양질이었다. 당연히 산지마다 제지에 사용하는 물이 다르기 때문에 생산된 화지의 풍격도 각각 달랐고, 특기로 하는 종류도 산지에 따라 달랐다.
2. 4. 근현대
나라 시대에 미노 국에서 처음으로 고품질 종이가 만들어졌으며, 이 종이의 일부는 현재 나라현 나라시의 쇼소인에 보존되어 있다.[1] 헤이안 시대에는 종이 규격이 처음 제정되면서 정부 관료들이 파견되었다.가마쿠라 시대 초반에는 미농지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지만,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을 거치며 저렴한 미농지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당시 미노 국의 슈고였던 도키 씨는 산업과 종이 생산을 장려하여 지역과 권력을 강화했다. 승려와 공경 계급이 종이를 사용하고 고향으로 가져가면서 유통이 증가했고, 상인들도 전국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에는 종이 판매 규정이 시행되면서 미농지는 특별 생산 지역으로 더욱 번성했다. 쇼지 등 일반적인 용도로 사용이 증가하면서 생산량이 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미노시를 중심으로 한 미농지 생산 가구 수는 3,700호에 달했다.[12] 도노 및 주노 지방에는 물과 펄프용 목재를 쉽게 구할 수 있어 대형 제지 공장이 들어섰다.[12] 나가라강 중하류역에서는 손으로 뜨는 화지 업체나 종이 도매상이 기계로 뜨는 화지로 전환하면서 가정용 종이, 특수 종이, 가공 종이 공장이 들어섰다.[12] 나에기 번 등에서 전통적인 손으로 뜨는 화지 생산이 이루어지던 기소강(히다강) 유역에는 기소·도노의 목재 펄프를 원료로 하는 대형 제지 공장이 들어섰다.[12]
반면, 가내 수공업적인 화지 생산은 근대화가 어려워 쇼와 시대에 기계로 뜨는 양지가 급증하면서 쇠퇴했다.[12]
2014년, 미농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2] 1985년 5월 22일,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에 의해 전통적 공예품으로 지정되었다. 2005년 8월, 미노 와시 아카리 아트관이 개관했다. 2014년 11월, 혼미농지의 손으로 뜨는 화지 기술이 유네스코 무형 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계기로, 유네스코 화지전 및 화지 서밋이 개최되고 있다.[12]
3. 종류
미농지는 크게 수제 방식과 기계 제지 방식으로 나뉜다. 수제 방식은 다시 본미농지와 미농 수제 화지로, 기계 제지 방식은 미농 기계 제지 화지로 구분된다.
- 본미농지 (本美濃紙): 전통적인 제법으로 만들어진 얇고 튼튼한 종이로,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8][9][12]
- 미농 수제 화지 (美濃手すき和紙): 본미농지의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수제 일본 종이이다. 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8] 기후 현 지업 연합회에 가입된 미농지 협동조합이 있다.[12]
- 미농 기계 제지 화지 (美濃機械すき和紙): 미농지의 손 뜨기 기술을 바탕으로 기계화하여 제조된 화지이다. 절연지, 도전지(전도지), 불연지 등 특수한 용도로도 사용된다.[8]
각 종류별 상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조하면 된다.
3. 1. 본미농지 (本美濃紙)
본미농지는 전통적인 제법으로 만들어진 얇고 튼튼한 종이이다.[8]3. 1. 1. 정의
본미농지는 전통적인 제법으로 만들어진 얇고 튼튼한 종이로[8], 다음의 지정 요건을 충족하는 것만을 말한다 (중요무형문화재 「본미농지」 지정 요건).[9][12]- 1. 원료로 닥나무만을 사용할 것[12]
- 2. 전통적인 제법과 제지용구를 사용할 것
- * 2-1. 백피 작업을 실시하고, 자숙(煮熟)에 풀 또는 소다회를 사용할 것[12]
- * 2-2. 약품 표백을 하지 않고, 충전제(填料)를 첨가하지 않을 것[12]
- * 2-3. 두드려 풀기(叩解)는 손으로 두드리거나 이에 준하는 방법으로 할 것[12]
- * 2-4. 떠내기(抄造)는 "네리"에 황촉규를 사용하고, "카기츠케" 또는 "소기츠케"의 대발로 흘려 뜰 것[12]
- * 2-5. 판자 건조 방식으로 건조할 것[12]
- 3. 전통적인 본미농지의 색택, 지합 등의 특질을 유지할 것[12]
3. 1. 2. 역사
미농지의 기원은 8세기 일본의 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 미노 국에서 처음으로 고품질의 종이가 만들어졌다.[1] 이 종이의 일부는 현재 나라현 나라시의 쇼소인에 보존되어 있다.[1] 헤이안 시대에는 종이의 규격(크기, 색상 등)이 처음으로 제정되면서 정부 관료들이 이 지역에 파견되었다.가마쿠라 시대 초반에는 미농지가 상대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저렴한 미농지의 사용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미노 국의 슈고였던 도키 씨는 지역과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업과 종이 생산을 장려했다. 일본의 많은 승려와 공경 계급 구성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종이를 사용하고 고향으로 가져가면서 종이의 유통이 증가했다. 결국 상인들도 일본 전역에 종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에는 종이 판매에 관한 규정이 시행되었고, 이 지역은 특별한 생산 지역으로 더욱 번성했다. 종이의 용도가 증가함에 따라(예: 쇼지 등 일반적인 용도) 생산량이 증가했고, 널리 알려진 종이가 되었다.
1969년(쇼와 44년) 4월 15일, 본미농지의 기술은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6] 중요 무형 문화재의 보존 단체로 본미농지 보존회가 인정받고 있다.[9]
2014년(헤이세이 26년) 11월 26일, "와시 일본의 손으로 뜬 화지 기술"로서, "세키슈 한시"(시마네현 하마다시) "호소가와지"(사이타마현 오가와마치, 히가시치치부촌)와 함께, 본미농지가 유네스코(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의 무형 문화 유산 등록으로 인증되었다.[7]
미노 화지 브랜드 협의회의 미노 화지 브랜드 인정 기준에 따르면, 본미농지는 원료 규정에서 다이고 나스 닥나무(백피)만, 제법 규정에서 완전히 전통적인 제법을 따르고, 미노 시내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하고 있다.[12]
3. 2. 미농 수제 화지 (美濃手すき和紙)
미농 수제 화지(美濃手すき和紙)는 본미농지의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수제 일본 종이이다. 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수제 일본 종이가 생산되고 있다.[8] 기후 현 지업 연합회에 가입된 미농지 협동조합이 있다.[12]미농지 브랜드 협의회는 미농지 브랜드 인증 기준으로, 원료는 국내산 닥나무나 연피 등 껍질을 사용한 비목재 섬유만을 사용하고, 제조 방법은 흐름 뜨기 기법을 사용하며, 미농 시에서 생산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12]
3. 2. 1. 정의
미농지는 본미농지의 기술을 바탕으로 제조되는 손으로 뜬 일본 종이를 말하며, 용도에 따라 다종다양한 손으로 뜬 일본 종이가 생산되고 있다.[8] 손으로 뜬 일본 종이 공방으로 구성된 미농지 협동조합이 있으며 기후 현 지업 연합회에 가맹하고 있다.[12]미농지 브랜드 협의회의 미농지 브랜드 인증 기준에 따르면 미농지는 원료 규정에서 국내산 닥나무나 연피 등의 껍질을 사용한 비목재 섬유만을 사용하고, 제법 규정에서는 흐름 뜨기 기법을 사용하며, 미농 시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하고 있다.[12]
3. 2. 2. 역사
나라 시대인 8세기 일본 미노 국에서 고품질의 미농지가 처음 만들어졌다.[1] 이 종이의 일부는 현재 나라현 나라시의 쇼소인에 보존되어 있다.[1] 헤이안 시대에는 종이의 규격(크기, 색상 등)이 처음으로 제정되면서 정부 관료들이 이 지역에 파견되었다.가마쿠라 시대 초반에는 미농지가 상대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북조 시대와 오닌의 난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저렴한 미농지의 사용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미노 국의 슈고였던 도키 씨는 지역과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업과 종이 생산을 장려했다. 일본의 많은 승려와 공경 계급 구성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종이를 사용하고 고향으로 가져가면서 종이의 유통이 증가했다. 결국 상인들도 일본 전역에 종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에는 종이 판매에 관한 규정이 시행되었고, 이 지역은 특별한 생산 지역으로 더욱 번성했다. 종이의 용도가 증가함에 따라(예: 쇼지 등 일반적인 용도) 생산량이 증가했고, 널리 알려진 종이가 되었다.
2014년, 미농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2] 미농지는 본미농지의 기술을 바탕으로 제조되는 손으로 뜬 일본 종이를 말하며, 용도에 따라 다종다양한 손으로 뜬 일본 종이가 생산되고 있다.[8] 손으로 뜬 일본 종이 공방으로 구성된 미농지 협동조합이 있으며 기후현 지업 연합회에 가맹하고 있다.[12]
미농지 브랜드 협의회의 미농지 브랜드 인증 기준에 따르면 미농지는 원료 규정에서 국내산 닥나무나 연피 등의 껍질을 사용한 비목재 섬유만을 사용하고, 제법 규정에서는 흐름 뜨기 기법을 사용하며, 미농시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하고 있다.[12]
3. 3. 미농 기계 제지 화지 (美濃機械すき和紙)
미농 기계 뜨기 화지는 미농지의 손 뜨기 화지 기술을 바탕으로 기계화하여 제조된 화지로, 절연지, 도전지(전도지), 불연지 등 특수한 용도의 종이도 생산되고 있다.[8]3. 3. 1. 정의
미농 기계 뜨기 화지는 미농지의 손 뜨기 화지 기술을 바탕으로 기계화하여 제조된 화지로, 절연지, 도전지(전도지), 불연지 등 특수한 용도의 종이도 생산되고 있다.[8]미농 화지 브랜드 협의회의 미농 화지 브랜드 인증 기준에 따르면, 미농 기계 뜨기 화지는 원료 규정에서 비목재 섬유를 조금이라도 포함하는 것, 제법 규정에서 손 뜨기에 가까운 품질을 낼 수 있는 기계로 제조한 것이며, 미노시, 기후시, 세키시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하고 있다.[12]
4. 미농지와 기후의 전통 공예
에도 시대부터 기후의 나가라 다리 주변 지역은 나가라강을 따라 여행하는 상인들에게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그 결과, 미노 지역에서 운송된 '''미노 화지'''와 기타 상품들이 시에 상륙하여 많은 도야에서 판매되었다. 종이의 품질이 높았기 때문에 초롱(기후 초친, 岐阜提灯), 우산(기후 와가사, 岐阜和傘) 및 부채(기후 우치와, 岐阜うちわ)를 포함한 시내의 많은 전통 공예품에 사용되었다.[3] '''미노 화지'''는 이러한 전통 공예품 제작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시의 가와라마치 지역에 있는 '''도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기후 공습에서 살아남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에도 시대 이후, 나가라 강을 이용한 운송으로 나가라 다리 부근 지역은 나가라 강의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으며, 오쿠미노에서 미노 화지 등의 양륙이 많아, 이를 취급하는 도매상가로 번성했다. 양질의 화지 "미노 화지"를 얻은 기후에서는 기후 제등, 기후 화산, 기후 부채가 탄생했다. 미노 화지는 기후의 전통 공예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5. 미농지와 판형
미농지는 27~29cm 정도, 가로 40~41cm 정도의 크기이며, 이보다 큰 것은 대미농이라고 한다.[13] 이러한 재료지를 세로로 반으로 접어 책으로 만든 것을 각각 미농판, 대미농판이라고 한다.[13]
참조
[1]
웹사이트
Mino Washi Museum
http://www.city.mino[...]
Mino City
2008-04-18
[2]
웹사이트
Washi, craftsmanship of traditional Japanese hand-made paper
http://www.unesco.or[...]
UNESCO Culture Sector
2015-05-09
[3]
간행물
Gifu City: Where History and Culture Still Thrive
Gifu City Tourism Convention Division
2007
[4]
웹사이트
Gifu Paper Lanterns
http://www.jnto.go.j[...]
Japan National Tourist Organization
2008-04-30
[5]
웹사이트
「美濃和紙」についての資料の探し方
https://www.library.[...]
岐阜県立図書館
2022-12-01
[6]
웹사이트
本美濃紙
http://www.pref.gifu[...]
岐阜県
2013-05-13
[7]
웹사이트
http://www.unesco.or[...]
[8]
웹사이트
ふるさと名物 岐阜県美濃市
https://www.chusho.m[...]
中小企業庁
2022-12-01
[9]
웹사이트
本美濃紙とは
http://www.city.mino[...]
美濃市
2022-12-01
[10]
웹사이트
美濃和紙の歴史
http://www.minokanko[...]
2011-10-06
[11]
웹사이트
紙屋塚
http://www.tarui-kan[...]
垂井町
2022-12-01
[12]
웹사이트
パルプ・紙・紙加工品
https://www.gpc-gifu[...]
公益財団法人岐阜県産業経済振興センター
2022-12-01
[13]
웹사이트
太田尚宏「日本歴史資料の形態と種類」マレガプロジェクト・ワークショップ1
https://www.nijl.ac.[...]
国文学研究資料館
20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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