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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보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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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니 보트린은 1886년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미국 여성이다. 일리노이 주립 사범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중국으로 건너가 산칭 여자 중학교를 설립했다. 1919년 진링 여자대학 총장 대행을 역임하며 교육 행정 및 관리에 기여했다. 난징 대학살 당시 난징 안전 지대에 남아 민간인을 보호하는 데 헌신했으며, 일본군의 만행을 비판했다. 1941년 미국에서 가스 자살로 사망했으며, 난징 대학살 당시의 인도주의적 활동으로 훈장을 수여받고 기념물과 전기, 영화 등을 통해 기려지고 있다.

2. 초기 생애와 교육

빌헬미나 보트린(Wilhelmina Vautrin)은 1886년 9월 27일 미국 일리노이주 세코어에서 태어났다.[6] 아버지는 프랑스 로렌 지역 출신의 이민자 에드먼드 루이스 보트린이었고, 피오리아에서 대장장이 기술을 배운 뒤 세코어에 정착하여 어머니 폴린 로어와 결혼했다. 에드먼드는 대장장이 일과 작은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21] 미니는 세 자녀 중 둘째였으나, 오빠는 어려서 사망했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미니는 여러 위탁 가정을 거쳐야 했다. 3년 후 아버지에게 돌아와 많은 집안일을 도맡으면서도 학교 공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21] 당시 한 교사는 "미니는 타고난 학생이었고… 시도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으며, 진실로 기독교적인 소녀였다"고 회상했다.[7] 세코어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고, 지역 교회에서 자원봉사 활동도 했다.

1903년, 보트린은 노멀에 있는 일리노이 주립 사범 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여러 차례 중단해야 했지만, 1907년 93명의 졸업생 중 수석으로 졸업하며 졸업식 연설을 맡았다.[8][21] 졸업 후 잠시 르로이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일리노이 대학교에 진학하여 교육학을 공부했다.[21] 대학 시절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 운동의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 해외 선교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9][21] 1912년, 26세의 나이로 문학사 학위를 받으며 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했다.[9][21] 졸업과 동시에 연합 기독교 전도단에 가입하여 중국 선교사로 파견될 준비를 했다.[21]

3. 중국에서의 선교 활동

미니 보트린은 대학교 목사의 추천을 받아 외국 기독교 선교 협회로부터 중국의 교사직을 제안받았다.[8] 아이리스 창은 저서 ''난징의 강간''에서 보트린이 젊은 시절 활기차고 인기 있는 여성이었으나 결혼 대신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다고 언급했다.[10]

1912년 보트린이 중국행을 제안받았을 당시, 중국은 제1차 아편 전쟁제2차 아편 전쟁 이후 체결된 조약으로 항구가 개방되면서 외국 기독교 선교 협회와 같은 단체의 지원 아래 기독교 선교가 활발해지던 시기였다.[6] 보트린의 전기 작가 후아링 후는 "1914년까지 약 6천 명의 젊은 미국인들이 선교사로 외국으로 갔고, 그 중 3분의 1 이상이 중국으로 갔다"고 기록했다.[7] 보트린은 외국 기독교 선교 협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26세의 나이로 허페이로 건너가 산칭 여자 중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는 점차 성장하여 고등학교 과정까지 추가되었다.[9] 허페이에서 활동하는 동안 보트린은 미국인 동료 선교사와 약혼하기도 했다.

1918년, 중국에서 6년간 봉사한 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온 보트린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1919년).[6] 컬럼비아 대학교 재학 중, 진링 대학교(당시 금릉 여자 대학) 측으로부터 1년간 대학의 총장 대행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6] 이 대학은 미국 선교사 그룹이 중국의 주요 지역에 여자 대학을 설립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세운 세 번째 기관이었다.[11] 보트린은 1919년 진링 대학교 총장 대행직을 수락하며 결혼을 1년 연기했으나, 이후 약혼을 파기하고 독신으로 남았다.[12]

진링 대학교에서 보트린은 1년으로 예정되었던 계약을 연장하며 교육 행정 및 관리 과정을 만들고 혁신적인 학생-교사 프로그램을 도입했으며, 난징 서문에 새로운 캠퍼스의 계획과 자금 조달을 처리했다.[12] 1922년 가을 학기에는 진링 대학교 캠퍼스 근처에 사는 150명의 지역 주민, 대부분 문맹인 어린이를 위한 초등학교를 짓기 위해 기금 모금 행사를 개최했다.[12] 전기 작가 후아링 후는 미니가 진링 대학교에 있는 동안 "학생들이 '상아탑'에서 나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이해하도록 하고 사회 개선을 위해 헌신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진링의 좌우명인 '풍요로운 삶'의 정신을 실현하도록 이끌려고 했다"고 썼다.[12] 그러나 대학의 일부 직원과 학생들은 보트린의 방식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녀를 고압적이고 보수적이며 독선적이라고 생각했다.[11] 이는 그녀의 "주의 깊고 간섭적인 행정 스타일" 때문일 수 있다.[11]

1926년, 보트린이 미국에 있는 가족을 잠시 방문하고 돌아온 후, 중국 국민 정부의 국민혁명군장제스 장군 휘하에서 난징을 점령했다.[12] 난징에서 군대는 도시의 파괴와 약탈, 그리고 중국 시민과 외국인의 학살을 포함하는 1927년 난징 사건을 저질렀다. 진링 대학교는 약탈 중에 피해를 입지 않았고, 보트린은 장제스 군대가 진링 캠퍼스에 있는 동안 몇몇 사람들과 함께 대학의 다락방에 숨었다. 난징 사건은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봉사하는 것을 단념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를 떠났다.[12]

그러나 보트린은 진링 대학교에 남아 국민 정부가 중국의 모든 대학에 자국 출신 총장을 두도록 명령할 때까지 총장으로 봉사했다. 그녀는 1928년 9월에 진링 졸업생인 우이팡 박사로 교체되었다.[12] 1931년, 보트린은 휴가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 늙어가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돌아왔다. 그녀는 1932년에 진링으로 돌아왔다. 1937년 6월 21일, 보트린은 아버지 에드먼드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 난징 대학살과 인도주의적 활동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일본 제국 육군의 난징 점령이 임박하자, 미국 대사관의 철수 권유에도 불구하고 미니 보트린은 난징에 남기로 결정했다.[6] 그녀는 진링 여자대학(당시 금릉 여자 문리 학원)을 난징 안전 지대의 일부로 개방하여 난민 수용소로 운영하였고, 난징 대학살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중국 여성과 어린이들을 보호하는 데 헌신했다. 당시 진링 여자대학은 최대 1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6]

난징 대학살 기간 동안 보트린은 캠퍼스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일본군 병사들에 용감하게 맞서며 피난민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일본군의 만행을 상세히 일기로 기록했으며,[12] 이는 훗날 난징 대학살의 실상을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일본 대사관에 직접 찾아가 일본군의 만행 중지를 강력히 요청하고 피난민의 안전 보장을 촉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의했다.[21][12]

이러한 보트린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수많은 중국 여성과 어린이들이 학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중국 영화 난징! 난징!에도 등장한다. 종전 후 중국 정부는 그녀의 희생과 공로를 기려 'Emblem of the Blue Jade'를 수여했다.

4. 1. 난징 안전지대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보트린은 1938년으로 예정되었던 휴가를 취소하고 진링 여자대학과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즉시 난징으로 복귀했다.[6] 그녀는 다가올 일본 제국 육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기록을 상하이로 보내고, 비상 물품을 구매하며, 캠퍼스 내 참호 건설을 지시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진행했다. 1937년 8월 15일, 일본의 첫 난징 공습이 시작되자 미국 대사관은 자국민에게 대피령을 내렸으나, 보트린은 일기에 "개인적으로 떠날 수 없다고 느낀다... 위험에 처한 배에서 남자를 떠나라고 하지 않고, 아이들이 위험에 처한 여자에게 떠나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적으며 난징에 남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이 임박하자, 난징에 남기로 한 외국인들은 도시 내 민간인 보호를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1937년 11월 17일, 이들은 난징 안전 지대 국제 위원회(ICNSZ) 결성을 결정하고, 같은 달 22일 성명을 발표하여 일본과 중국 양측에 난징 시내 일정 구역을 중립적인 난민 구역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22] 양국 정부는 이에 동의하여 난징 안전지대에 중립성을 부여했으나, 일본 측은 안전지대 내에서 중국군 병사가 발견될 경우 중립 지위를 무효화한다는 조건을 달았다.[6][22] 진링 여자대학 캠퍼스 또한 이 안전지대 구역에 포함되어 난민 수용소로 지정되었다.[6][22]

1937년 12월 8일부터 진링 여자대학은 여성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피난민을 받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중국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이 피난 왔으나, 일본군의 본격적인 난징 공격이 시작되자 공습과 포격을 피해 온 피난민 수가 급증했다.[23]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완전히 점령한 후 도시 전역에서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 강간, 약탈이 자행되자, 보트린은 강간 피해를 두려워하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 대학 시설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여 피난민을 받아들였다.[23] 진링 여자대학은 본래 200~300명 수용 규모로 설계되었으나, 한때 최대 1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6][23]

안전지대 안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링 여자대학 캠퍼스에는 12월 13일 이후 매일같이 일본군 부대가 무단으로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고 중국인 직원이나 여성을 끌고 가려 했다. 보트린은 이러한 보고를 받을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 일본군 병사들과 대치하며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23] 그녀는 일본군의 만행을 저지하려다 직접 폭행을 당하기도 했으며, 총격의 위협 속에서도 피난민들을 보호하려 애썼다.[23] 보트린은 당시의 참상을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는데, 이는 난징 대학살의 실상을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1937년 12월 16일자 일기에는 일본군이 중국인 직원을 병사로 오인하여 끌고 가려는 것을 막았고, 다른 남성 4명이 끌려가 총살당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밤에는 소녀들이 트럭에 실려 "살려달라(救命|Jiuming중국어)"고 외치며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적혀 있다.[23] 12월 17일 밤에는 일본군이 대학 책임자들을 감금한 사이 여성 12명을 납치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23] 보트린은 미국 대사관을 통해 일본 대사관에 강력히 항의하여 병사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문서를 받아냈지만, 일본군은 이 문서를 찢어버리고 만행을 계속했다.[12][23] 심지어 캠퍼스 경비를 위해 파견된 일본 헌병조차 피난민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23] 12월 24일에는 일본군 고위 장교가 방문하여 피난민 중에서 위안부로 삼을 여성 100명을 선발하라고 요구했고, 21명을 강제로 데려갔다.[23] 보트린은 일기에 "분노 속에서 그들의 비열한 행위에 대해 그들을 칠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여성들이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할까"라고 적으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12]

1938년 2월 4일, 다른 모든 난민 캠프가 폐쇄되자 다시 많은 수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진링 여자대학으로 피난처를 찾아왔다. 3월 중순에는 3,310명의 난민이 대학 캠퍼스에 거주하고 있었다. 보트린은 피난민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산업 및 공예 수업을 개설하여 100명의 여성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13] 또한,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행방불명된 남편과 아들을 찾는 여성들의 요청을 받아 행방불명자 명단을 작성하여 일본 대사관에 제출하고, 수감된 민간인들의 석방을 위해 탄원서를 작성하는 등 구명 활동에도 힘썼다.[23][24] 1938년 4월, 그녀의 노력으로 모범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민간인 중 일부가 석방되기도 했다.[24]

1938년 5월 31일, 난징 안전지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보트린은 여전히 갈 곳 없는 약 800명의 여성을 진링 여자대학에서 계속 보호했다.[24] 그러나 끊임없이 목격해야 했던 일본군의 잔혹 행위와 피난민들의 비극은 보트린의 정신을 심각하게 갉아먹었다. 그녀의 일기에는 점차 피로감과 절망감이 짙게 드러나기 시작했다.[24]

4. 2. 일본군의 만행

일본 제국 육군1937년 12월 난징 전투에서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을 때, 보트린은 존 라베 등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난징 안전 지대에서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교장 대행 등으로 일했던 진링 대학교(당시 금릉 여자 문리 학원)는 최대 10,000명의 여성을 수용하는 등 난민들의 중요한 피난처 역할을 했다. 본래 200~300명 수용 규모로 설계된 건물들에 훨씬 많은 인원이 몰려들었다.[6]

보트린은 직접 캠퍼스 부지를 순찰하며 일본 군인들의 무단 침입을 막고, 난민들을 구조하고 돌보는 데 헌신했다. 그녀는 사망자 매장과 신생아 돌봄을 지원했으며, 실종된 가족을 찾는 여성들을 도왔다. 또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산업 또는 공예 수업을 열어 100명의 여성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13]

난징 대학살 동안 보트린이 쓴 일기는 당시의 참상과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 및 감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일기는 이후 그녀의 전기를 쓰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아이리스 창은 저서 ''난징의 강간''에서 이 시기 보트린의 활동을 언급했다. 휴아링 후이는 보트린의 일기를 바탕으로 ''난징 강간의 미국 여신: 미니 보트린의 용기''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보트린의 일기에는 일본군의 만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1937년 12월 16일: 진링 여자대학교에 대한 일본군의 공식적인 수색(중국군 패잔병 색출 명목)이 진행되었다. 보트린은 100명이 넘는 일본군을 안내하며 조사를 지켜봤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이 중국인 직원을 병사로 오인하여 연행하려는 것을 막았다. 같은 날 다른 일본군 무리가 찾아와 직원을 연행하려 했으나 저지당하자, 대신 다른 남성 4명을 묶어 캠퍼스 서쪽 언덕으로 끌고 갔고 잠시 후 총성이 들렸다. 밤에는 소녀들이 트럭에 실려 "救命!救命!|Jiuming! Jiuming!중국어"라고 외치며 끌려가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23]
  • 12월 17일: 밤에 많은 일본군이 캠퍼스에 난입했다. 이들은 보트린 등 대학 책임자들을 심문하는 척하며 붙잡아두는 동안, 다른 통로를 통해 여성 12명을 납치해갔다. 보트린은 일본군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다 폭행당하기도 했다.[23]
  • 12월 18일: 보트린은 미국 대사관을 통해 일본 대사관을 방문하여 전날 밤의 사건을 포함한 만행을 보고하고, 병사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내용의 서면 문서를 받아냈다. 이후 캠퍼스 경비를 위해 일본 헌병이 파견되었다.[12][23]
  • 12월 19일: 교직원 숙소에서 일본군 병사가 소녀를 강간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병사를 쫓아냈다. 그녀는 일기에 "분노 속에서 그들의 비열한 행위에 대해 그들을 칠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여성들이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할까."라고 적었다.[12][23]
  • 12월 20일: 일본군 고위 장교들이 시찰하는 동안에도 병사 2명이 여성을 연행하려다 제지당했지만, 장교는 병사들을 꾸짖기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같은 날 밤, 경비를 위해 파견된 헌병 25명 중 일부가 여성 2명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3]
  • 12월 21일: 전날 밤의 헌병 강간 사건을 일본 대사관에 알리고 헌병 수를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대사관을 오가는 길에 중국인 직원의 아버지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중앙에 방치된 시신을 수습했으며, 다른 지인의 집이 약탈당하고 직원이 살해된 현장을 확인했다.[23]
  • 12월 24일: 일본군 사단의 고위 군사 고문이 방문하여 피난민 1만 명 중에서 매춘부 100명을 선별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병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식 위안소를 개설하면 강간 사건이 없어질 것이라고 설명하며 21명을 선별해 데려갔다.[23]


보트린은 일기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오늘 이 도시에서 저질러지지 않은 범죄는 없을 것입니다. 어젯밤에 30명의 소녀들이 언어 학교에서 끌려갔고, 오늘 저는 어젯밤에 집에서 끌려간 소녀들에 대한 수많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녀 중 한 명은 12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음식, 침구 및 돈이 사람들로부터 빼앗겼습니다. ... 저는 도시의 모든 집이 다시 열리고 또 다시 강탈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밤 8명 또는 10명의 소녀가 탄 트럭이 지나갔고, 지나가면서 그들은 "救命!救命!|Jiuming! Jiuming!중국어"이라고 외쳤습니다. - 우리 생명을 구해주세요. 우리가 언덕이나 거리에서 듣는 간헐적인 총성은 어떤 사람, 아마도 군인이 아닌 사람의 슬픈 운명을 깨닫게 해줍니다.[12]

1938년 1월 13일까지 보트린은 일본 대사관을 반복적으로 방문하여 일본 군인들이 진링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금지하는 선언문을 받아내려 애썼지만, 군인들은 그 문서를 보는 앞에서 찢어버리고 여성을 끌고 가는 일이 빈번했다.[12]

1938년 5월 말 안전 지대와 난민 수용소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후에도, 보트린은 의지할 곳 없는 여성 난민들을 계속 보호하며 자립을 위한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일본군에게 연행되어 행방불명된 남성 주민들의 수색을 돕고, 전직 병사로 수감된 주민들의 석방 운동에도 관여했다.[21][24]

그러나 일본군의 만행은 끊이지 않았다. 1938년 5월 9일 밤, 싼파이러우에 살던 류 아주머니(50세)는 집에 침입하려는 일본군 병사 2명에게 저항하다 총검에 얼굴과 가슴을 찔려 사망했다.[24]

계속되는 참상과 난민 구호 활동의 어려움 속에서 보트린의 정신적 고통은 깊어졌다. 1940년 4월 14일자 일기에는 "저는 에너지가 거의 바닥났습니다. 더 이상 앞을 내다보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어떤 종류의 장애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결국 그녀는 1940년 봄,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세를 보이며 미국으로 돌아갔고, 이듬해 5월 14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한 데 대한 깊은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5. 귀국과 죽음

난징 사건 이후 1938년 5월 말 안전 지구와 난민 수용소가 폐지된 뒤에도 보트린은 의지할 곳 없는 여성 난민들을 계속 보호하며 그들의 자립을 위한 교육 활동에 힘썼다. 또한 일본군에게 연행되어 행방불명된 남성 주민들의 행방을 찾거나, 전직 병사로 수감된 주민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등 구제 활동에도 관여했다.[21]

그러나 이 시기부터 보트린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며 정신적으로 크게 고통받기 시작했다. 여성 난민들을 위한 사회 교육에 필요한 학교 경비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 군정 당국으로부터 괴뢰 정부의 교육 방침과 교과서를 따르라는 압력을 받으며 고뇌했다.[27] 또한, 일본군이 중국의 여러 도시를 계속 폭격하고 파괴하며 전쟁을 확대해나간다는 소식은 난징 대학살 당시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고, 중국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교육과 구호 활동의 꿈이 좌절되는 듯한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더욱 악화시켰다.[27]

1939년 여름, 연합 기독교 전도단은 보트린에게 미국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난징에 남았다. 이로 인해 피로와 권태감은 더욱 깊어졌다.[27] 같은 해 9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이 더욱 거세지면서 전쟁의 참화가 전 세계로 확산되자 보트린의 절망감은 극에 달했다.[27]

1940년 3월, 상하이에서 열린 기독교 회의에 참석했을 때 목격한 일부 중국 여성들의 모습[27]과 같은 달 30일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었다는 소식[27]은 그녀의 우울 증상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 4월 14일, 보트린은 "나의 기력은 이제 소멸될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일의 계획을 세울 수도 없다. 모든 방법에는 반드시 어떤 장애가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일기 작성을 중단했다.[27]

결국 심각한 우울 증세로 인해 1940년 5월 14일, 동료 교사 캐서린 서더랜드와 존 매기 목사의 도움을 받아 정신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귀국했다.[27] 미국 도착 후 정신 요양 시설에서 치료를 받으며 잠시 호전되기도 했으나, 병세는 회복과 악화를 반복했고 자살 시도까지 이어졌다.[27] 결국 1941년 5월 14일,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한 아파트 부엌에서 가스 누출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55세였다.[27] 그녀의 유서에는 "나의 중국에서의 전도는 실패로 끝났다"라는 글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28] 이는 난징 대학살의 참상을 겪으며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깊은 죄책감과 함께,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자신의 이상과 노력이 좌절된 데 대한 절망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6. 유산과 평가

미니 보트린은 난징 대학살 당시 진링 여자문리학원(Ginling Girls’ College) 교장으로서 대학교를 안전지대로 만들어 약 1만 명의 중국 여성과 아동을 학살로부터 보호했다. 미국 대사관의 철수 권유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떠날 때가 아닙니다"라며 난징에 남아 헌신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1938년 7월 30일 찬위훈장을 수여했으며[15], 종전 후에는 그녀의 희생을 기리는 Emblem of the Blue Jade를 수여받았다.

난징 대학살 기간 동안 그녀가 작성한 일기는 당시의 참상과 개인적인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난징 대학살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이 일기는 역사학자 화링 후(Huá-ling Hu)가 저술한 전기 ''난징 강간의 미국 여신''[12] 등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 ''난징''에서는 배우 마리엘 헤밍웨이가 보트린 역을 맡아 일기 내용을 낭독하기도 했다. 중국 영화 난징! 난징!에도 그녀의 활동이 묘사되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는 그녀를 기리는 기념물이 있으며, 옛 진링 여자대학 교정에도 난징 시민 보호에 기여한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그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16] 미국의 하드코어 펑크 밴드 히레츠칸은 2005년 "Song For Wilhelmina Vautrin"이라는 곡을 통해 그녀를 추모했다.[17][18]

그러나 난징 대학살의 참혹한 경험, 난민 구호 활동 과정에서의 극심한 스트레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등은 그녀에게 깊은 정신적 고통을 안겼다. 1940년 5월 우울증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결국 1941년 5월 14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헌신적인 활동과 비극적인 생애는 전쟁의 참상과 인도주의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6. 1. 대한민국에서의 재조명

한국의 언론 시사인은 2009년 6월 1일자 기사를 통해 미니 보트린의 인도주의적 활동을 조명했다.[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4540 시사인 2009년 6월 1일자] 이 보도는 난징 대학살 당시 보트린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맞물려 주목받았다. 보트린의 활동은 전쟁 성범죄의 참혹함과 심각성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강조되고 있다.

7. 미니 보트린을 소재로 한 작품


  • 난징 대학살 동안 보트린이 쓴 일기는 사건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을 자세히 담고 있으며, 이는 보트린과 난징 대학살 당시 그녀의 역할을 다룬 전기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아이리스 장은 저서 《난징의 강간》에서 보트린의 일기를 인용했다.[10]
  • 역사학자 Hua-ling Hu|후아링 후eng는 보트린의 전기인 《난징 강간의 미국 여신: 미니 보트린의 용기》(American Goddess at the Rape of Nanking: The Courage of Minnie Vautrineng)를 저술했다.[12]
  •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 《난징》에서는 배우 마리엘 헤밍웨이가 보트린을 연기하며 그녀의 일기 내용을 읽었다.
  • 루 추안 감독의 2009년 영화 《난징! 난징!》에 보트린이 묘사되었다.
  • 2009년 영화 《존 라베》에서는 미니 보트린 대신 "국제 여자 대학"의 허구적 인물인 Valérie Dupres|발레리 뒤프레eng가 등장하여 난징 안전 지대 위원회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그려졌다.
  • 중국계 미국 작가 하진은 2011년 소설 《난징 레퀴엠》에서 보트린의 가상 조수인 가오안링의 시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했다.
  • 옌거링의 소설 《난징의 13송이 꽃》은 보트린의 일기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를 원작으로 장이머우 감독이 2011년 영화 《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釵|진링스싼차이zho)를 제작했다.
  • 하드코어 펑크 밴드 히레츠칸은 2005년 음반 ''End States''에 수록된 "Song For Wilhelmina Vautrin"이라는 노래로 미니 보트린을 기렸다.[17][18]

참조

[1] 웹사이트 Minnie Vuatrin: The Woman Who Would Not Leave Nanking http://www.unmasking[...] Canadian Center for Bio-ethical Reform 2015-05-26
[2] 웹사이트 Minnie Vautrin's Letters https://mct.barnard.[...]
[3] 웹사이트 Memories of the Nanjing Massacre · Minnie Vautrin's Letters · the View from Ginling https://mct.barnard.[...]
[4] 웹사이트 Memories of the Nanjing Massacre · Minnie Vautrin's Letters · The View from Ginling https://mct.barnard.[...] 2022-12-30
[5] 웹사이트 Memories of the Nanjing Massacre · Minnie Vautrin's Letters · the View from Ginling https://mct.barnard.[...]
[6] 웹사이트 Independent Research in Nanjing, China http://depthome.broo[...] 2016-06-04
[7] 서적 American Goddess at the Rape of Nanking: The Courage of Minnie Vautrin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8] 서적 Introduc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9] 서적 Notable American Women: 1607–1950 http://search.credor[...]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10] 서적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Basic Books, A Subsidiary of Perseus Books, L.L.C.
[11] 서적 The Making of a Family Saga: Ginling College SUNY University Press
[12] 서적 American Goddess at the Rape of Nanking: The Courage of Minnie Vautrin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3] 서적 The Undaunted Women of Nanking: The Wartime Diaries of Minnie Vautrin and Tsen Shui-fang. Carbondale: Southern Illinois
[14] 서적 Terror in Minnie Vautrin's Nanjing: Diaries and Correspondence, 1937-38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5] 웹사이트 "女难民的守护神"—明妮·魏特琳 https://rabe.nju.edu[...]
[16] 웹사이트 23 Missionary Monuments http://peace.maripo.[...] Peace.maripo.com 2016-06-04
[17] 웹사이트 End States "//www.hiretsukan.co[...] 2008-04-01
[18] 웹사이트 End States ::: Lyrics "//www.hiretsukan.co[...] 2008-04-01
[19] 웹사이트 The Nanking Massacre Project http://www.library.y[...]
[20] 서적 南京事件の日々―ミニー・ヴォートリンの日記 [[大月書店]]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28] 웹사이트 シリーズ「東と西」 諸宗教の共生 https://jdzb.de/site[...] Japanisch-Deutsches Zentrum Berlin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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